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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여전히, 푸른 봄
작가 : 박양지양
작품등록일 : 2017.7.20

존경하다가,
동경하다가,
닮고 싶어 바라보다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가,
자각해버리고.
사랑해버리고
추억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런 이야기.

서툰 유지애의 서툰 이야기.
#여주성장물 #짝사랑주의



 
잔잔한 수면 위로 던져진 돌 둘 셋.
작성일 : 17-09-01 12:07     조회 : 53     추천 : 0     분량 : 8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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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

 

  짙은 고동색의 짜임새 좋게 깔린 서늘한 마룻바닥.

  전통 가옥 분위기를 보여주는 대들보와 서까래에 달린 은은한 노란색의 조명이 감싸진 한지를 지나 부실을 따뜻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제법 매서운 바람이 부는 계절임에도 이곳은 따스한 분위기만이 감돌았다.

  반듯한 자세로 앉아 책을 읽고 있는 담임의 고결한 모습은 뒤에 펼쳐진 8폭의 병풍과 어우러져 잘 그려진 수묵화처럼 보였다.

  옅은 푸른 빛이 도는 연회색의 모시 도포를 단정하게 입고 앉아 과거를 준비하는 선비처럼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모시 소재라 화려하지 않지만 역시 모든 패션의 완성은 얼굴!

  담임이 입었기에 그 옷은 소박하지만, 귀티 어린 느낌을 주었다.

  사락거리며 옷깃이 스치는 소리와 국화차의 향이 가득한 이곳은 시간이 멈춰 있는 그런 고요하고도 아늑한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고궁 내부가 재현된 듯한 이 부실에서는 부원 모두가 한복을 입고 있었다..

  학기 초부터 그냥 준비되는 대로 한 명씩 입기 시작하다 학기 말인 지금은 모두가 한복을 입게 되어 사극 촬영장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고즈넉한 분위기를 풍기는 터라 규방의 조신한 처자들이 모여 다과를 하며 소소한 이야기꽃을 피워야 할 것 같았지만, 실상은 형형색색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야한 서책, 아니 만화책을 열심히 탐독하는 부원들로 가득했다.

 

  "꽃이 되자. 이거 다음 편 누가 가지고 있어?"

 

  "지은성 대박."

 

  "꽃보다 남자 누가 보고 있어? 나 예약."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이 오히려 안정을 주었다.

  오전 시간 잠시 형식상 마셨던 찻상을 살짝 옆으로 밀어두고는 벽에 기대서는 읽던 만화책의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내려놓았다.

  옆에 앉은 나나가 내려놓은 만화책을 들며 말했다.

 

  "하늘은 붉은 강가 이거 다 본거지? 나 본다? 곰 넌 이거나 봐봐."

 

  장난기 어린 눈으로 나나가 건네준 허니 허니 드롭스를 별 생각 없이 들고서 읽기 시작했다.

  헉. 뭐야? 이건. 내가 야한 걸 보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건 좀 수위가...

  내용이 노예? 뭐야 이 남주. 에로틱한 표현력에 뭔가 야릇한 기분이 들어 자세를 바로 하고 숨죽이면서 초집중하며 페이지를 넘겼다.

  쉬는 시간 종이 울렸지만, 여전히 작은 재잘거림만 들릴 뿐 다들 만화 삼매경이었다.

  이 부의 장점은 바로 이러한 유유자적함이었다.

 

  - 드르륵.

 

  닫혀있던 동아리 부실 문이 열리고 부담임과 강민이가 들어왔다.

  부담임이야 종종 쉬는 시간마다 차 마시러 오지만 강민이는 웬일이지?

  강민이에게 손짓하자 성큼성큼 다가왔다.

 

  "김 선생님."

 

  승전고를 울리고 돌아온 장군처럼 당당하게 들어오는 부담임을 담임은 정중하게 맞아 차를 권했다.

  찻상 앞에 받은 찻잔을 한입에 털어 마시는 부담임과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며 다소곳하게 차를 음미하는 담임. 뭔가 성별이 바뀐 기분이지만 나름 잘 어울렸다.

  적극적인 부담임의 태도에 담임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고.

 

  "여긴 무슨 부였지? 코스프레?"

 

  1교시 내내 열심히 연습했는지 도복이 살짝 젖은 강민이는 앞에 쪼그려 앉으며 물었다.

  코스프레부... 같은 느낌이긴 하지.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화려한 한복차림에 장신구들을 뽐내고 있었다.

 

  "전통문화연구부."

 

  "어딜 봐서?"

 

  "차와 한복? 그리고 전통한옥 같은 부실?"

 

  그게 뭐야,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던 강민이는 멈칫하더니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왜?

 

  "아니, 너 옷이, ...하아. 동아리에 남자가 없어서 다행이네."

 

  없어서 편하기는 하다만, 고개를 돌린 강민이는 입고 있던 체육복 상의를 벗고는 어깨에 걸쳐주었다.

 

  "이러고 있어."

 

  "여기 따뜻한데? 지금 밖에 도복만 입고 나가면 추워."

 

  옷을 돌려주려고 하자, 강민이는 내 두 손을 잡고는 그대로 내려놓으며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난 지금 열이 확 올라서 괜찮으니까 제발 이러고 있어라."

 

  뭐라는 거야?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나는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열이 확 오르셨어요? 서강민 건강하네. 크큭."

 

  "야이 씨. 은나나. 넌."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나나를 위아래로 쳐다보던 강민이는 비웃는 듯 말했다.

 

  "마녀가 컨셉이냐?"

 

  "애시끼가 블랙의 매력을 모르네."

 

  나나는 코웃음을 치며 반격했다.

  살짝 비치는 검은 저고리에 화려한 문양의 검은 치마, 강렬한 색상의 장신구로 긴 머리를 틀어 올린 나나는 쉽게 눈 돌릴 수 없는 존재감을 뽐냈다.

  블랙이 어울리는 나나와 강민이.

  어쩌면 두 사람은 취향이 같아서 사사건건 부딪치는 걸지도 모르겠다. 동족 혐오 같은 걸까?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두고 커피포트의 물을 숙우에 부었다.

  다 식어버린 찻잔과 다관의 차를 퇴수기에 버리고 숙우의 물을 국화꽃이 가득 담긴 다관에 붓고 조심히 따랐다.

  향긋한 국화 향이 퍼져나갔다.

  남은 물로 찻잔을 데우고는 차가 우러나길 기다리며 여전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우려진 차를 세 개의 잔에 나누어 따랐다.

  함께 차를 마시던 나나와 도도에게 한 잔씩 건네고 내가 마시던 찻잔을 강민이에게 건넸다.

 

  "마셔볼래?"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으로 잔을 받아든 강민이는 슬쩍 나나와 도도를 살피며 비슷한 자세로 따라 마셨다.

 

  "앗. 뜨거워."

 

  "차는 당연히 뜨겁지. 바보냐."

 

  타박하는 나나를 째려보는 강민이의 입에 타래과를 하나 집에 입에 넣어주었다.

  타래과를 먹던 강민이의 표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럴 줄 알았지.

 

  "맛있지?"

 

  "그러게."

 

  강민이는 입안의 타래과를 우물거리며 찻상 위에 놓인 타래과를 하나 더 집어 먹었다.

  다과는 담임이 늘 신경을 써서 준비하는 거라 우리가 실습하면서 만들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맛있었다.

  손가락에 묻은 조청을 입에 넣고 쪽쪽 빨았다.

  달콤한 맛과 계피의 씁쓸한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야, 유지애. 너!"

 

  왜? 라는 눈빛으로 빤히 쳐다보자 강민이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먼저 눈을 피한 건 강민이였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강민이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내가 조금 전까지 보고 있던 만화책을 향했다.

  악. 하필이면 이런 걸 볼 때!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재빨리 만화책을 집어 들어 뒤에 숨겼다.

  옆에 앉아있던 나나가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이씨.

 

  "왜? 뭐였길래 그래?"

 

  "응? 그냥 만화책."

 

  "근데 왜 숨겨?"

 

  이게 좀 표현이 좀 그래서 그렇지.

 

  "하하. 그게. 아! 여긴 웬일이야?"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아 괜히 화제를 돌렸다.

  강민이는 수상한데, 라는 눈빛으로 쏘며 말했다.

 

  "내 여자친구 유도부로 데리고 오라고."

 

  "아직도 포기 안 하셨대?"

 

  "여자부원이 극히 적으니까. 꼬시면 넘어올래?"

 

  "이미 넘어갔는데?"

 

  눈웃음을 지으며 장난치듯 이야기하자 강민이는 싱겁게 웃었다.

 

  "유도 같이할래?"

 

  "아니, 그냥 난 합기도 할래."

 

  그놈의 합기도, 라며 서운한 기색을 풍기며 다가오던 강민이의 눈이 반짝하면서 숨긴 만화책을 낚아챘다.

 

  "어어?"

 

  당황하며 되찾으려 했지만 늦었다.

 

  "뭐야 그냥 만화책...어...음."

 

  실망하면서 좌르륵 페이지를 넘기던 강민이가 돌연 입을 다물었다.

  어느 장면에서 페이지가 멈추었는지 알 거 같았다.

  한참을 뚫어져라 보던 강민이는 피식 웃으며 웃었으며 책을 덮었다.

  강민이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응, 그래. 나도 이런 거 봐. 좋아해. 아니 그건 너무 노골적이고 내 취향은 좀 더 순수한 고로... 마음속에서 열심히 내가 할 말을 생각해보았지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재미있었어?"

 

  짓궂은 표정으로 묻는 강민이의 말에 그래도 그게 그 남주의 사랑법이야, 소유욕에 꽉 찬 남주가 섹시했어, 라고 말하려다 관두었다. 내가 생각해도 좀 이상한 발언 같았다.

  입을 다문 나에게 만화책을 돌려주는 강민이는 이런 거 보지마, 라고 놀리듯 귓가에 속삭였다.

  아, 제길.

 

  *

 

  방학을 일주일 앞둔 마지막 CA 활동 날.

  비공식적인 담임과 부담임의 데이트, 아니 썸인가? 하여튼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유도부와 전통문화연구부의 함께 영화관에 오게 되었다. 담임이 상영시간을 착각하는 바람에 영화 보기 전까지 꽤 시간이 남아, 강민이, 나나, 해미, 도도, 나 이렇게 5명은 함께 오락실에서 시간을 때우게 되었다.

 

  "악! 곰! 뒤! 뒤에 뱀 오잖아."

 

  나나의 외침을 들으며 미친 듯이 총을 쏘아댔지만 결국 DEAD가 떠버렸다.

 

  "곰. 너 너무 못해."

 

  나나는 투덜대며 총에서 손을 놓았다.

 

  "거봐, 유지애 게임 못한다니까."

 

  구경하고 있던 강민이가 웃으며 말했다.

 

  "나도 잘하는 거 있어!"

 

  "뭐? 뺘샤뺘샤? 다른 그림 찾기?"

 

  "그래 그거."

 

  강민이는 그래, 그래. 라며 어린아이를 어르고 달래듯이 살살 토닥였다. 애 취급인가.

  토요일 오전, 사람이 많지 않은 오락실에 퍼지는 펌프 노래에 나나와 강민이가 서로를 째려보며 올라섰다.

 

  "그렇게 짧은 다리로 할 수는 있겠냐?"

 

  "지고서 울지나 마라."

 

  시작 전부터 팽팽하게 기 싸움을 하던 두 사람은 음악이 시작되자 화려한 스텝을 선보였다.

  강민이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나도 만만치 않았다.

  대체 저 정도로 할 수 있으려면 오락실 지분에 얼마를 투자해야 할까, 라고 생각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열중하고 또 잘하는 모습이 부러웠다.

  운동 말고 내세울 특기가 없다는 것에 생각이 들어 회의감이 느껴졌다.

 

  "강민이 잘하네."

 

  옆에 서 있던 해미가 두 사람에게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응, 저번에 같이 왔었을 때도 구경하던 여자들이 다 꺅꺅댔다니까. 가끔 궁금하다. 강민인 나한테 왜 고백을 했을까 하고."

 

  "좋아할 만하니까 좋아했겠지."

 

  도도의 격려에 그런가, 라고 말하며 미소를 지었다.

  둘의 대결에서 나나가 승리를 하고 의기양양하게 비웃자 강민이는 나라를 잃은 표정을 하고선 말도 안 돼, 라며 좌절했다.

  나도 나나가 이길 줄은 몰랐지만. 나나야 오락실에 지분이 꽤 되겠구나.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며 철권으로 향하는 두 사람을 붙들고 상영관으로 향했다.

  강민이는 승부에 집착하며 영화는 못 봐도 나나를 이겨야겠다며 툴툴거리는 강민이의 모습은 귀여워서 꼭 안아주고 싶었다.

  아니, 안아버렸구나. 머리보다 몸이 더 빠르다니.

  내가 먼저 안는 경우가 드물어서인지 강민이는 싱긋 웃어주며 어깨에 손을 둘렀다.

  뒤에서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

 

  "야, 너희 이 자리 배치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짜증을 내는 강민이의 말에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도도, 나나, 나, 해미, 강민이 이런 자리 배치고 영화관 가운데에 주르륵 모여 앉았다.

  신성한 CA 시간에 커플 꽁냥거림은 못 보겠다는 나나와 해미가 의기투합한 결과였다.

 

  "애시끼는 그냥 거기 떨어져 앉아. 어두운데 우리 곰 옆에는 얼씬도 하지 마라."

 

  "아오, 은나나 저 짤뚱맞은게."

 

  "그래서 졌냐? 졌어?"

 

  팩트로 공격하는 나나에게 자존심 상한 강민이는 입을 꼭 다물었다.

  이긍. 속이 부글부글 끓고 있을 강민이에게 나나가 들고 있는 팝콘을 하나 집어 건넸다.

  텁.

  중간에 앉은 해미가 내 손의 팝콘을 홀랑 먹었다.

 

  "야 이해미 너까지 왜 그러냐?"

 

  "아니 그냥 네 반응이 웃기잖아."

 

  "아오, 진짜 사방이 방해꾼이네."

 

  포기했는지 팔짱까지 끼며 깊숙이 의자에 기댄 강민이는 스크린에 집중했다.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상영되었다.

  영화는 가볍게 볼 수 있는 코미디물이었다.

  적당히 친구들과 웃으며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나고 두 담임은 교복 입고 있으니 너무 돌아다니지 말라는 당부를 남기고 사라지셨다.

  아무래도 두 분 데이트삘인데... 이런 공적인 일로 사적인 욕심을 채우시다니!

  멀어지는 선생님을 보며 강민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어? 스티커 사진기다."

 

  오락실 바깥쪽 일본여고생의 사진으로 도배된 스티커사진기를 발견한 도도가 말했다.

  이런 날은 한 방 찍어 남겨야 한다는 친구들에게 이끌려 알록달록한 가림막을 안으로 들어갔다.

  6명이 들어가 있긴 다소 비좁은 공간이었지만 그래도 아예 못 찍을 정도는 아니었다.

  소름 돋게 깜찍한 기계의 음성지시에 따라 포즈를 취했다.

  카운트가 시작된 시간에 쫓기며 예쁘게 꾸민 사진을 작게 잘라 나누어 가졌다.

  처음 찍어본 스티커사진이라 신기해하며 지갑에 넣었다.

  친구들과 함께 찍은 첫 스티커사진이라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졌다.

 

  "가끔 곰 널 보면 세상과 단절된 곳에 갇혀있다 나온 애 같아."

 

  "그러게. 지애 넌 대체 평소에 뭐하니?"

 

  나나와 도도의 말에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운동? 노래방?"

 

  진짜 운동, 노래방. 체육관 애들과 함께 하는 거 말고는 따로 시간을 내서 하는 것이 없었다.

  이러니 강민이와 데이트할 때마다 모든 게 다 처음이지.

 

  "곰 얜 가만 보면 완전 소나무야. 하나 빠지면 아예 다른 걸 안 본다니까."

 

  나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신기했다.

  내가 생각할 때 나는 뭐든지 싫증을 잘 낸다고 생각을 했는데 주위에서 보는 나는 소나무라니.

  내가 생각하는 내가 맞는지, 주위에서 보는 내 모습이 정말 나인지 그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강민이는 합숙훈련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유도부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라며 툴툴대는 강민이에게 시간 되면 보자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오후에나 연습이 끝나는 강민이와 오후부터 운동을 시작하는 내 시간의 타이밍은 잘 맞지 않았다.

  게다가 크리스마스이브 날은 강민이네 부모님 생신이었고, 크리스마스 당일은 내가 가족들과 있어야 해서 만나지 못했다.

  결국, 새해가 되기 전까지는 보기 힘들어 보였다.

  아침저녁으로 틈나는 대로 문자와 전화를 하며 만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체육관도 한 해를 마무리하며 송년회 자리를 만들었다.

  초, 중등부 관원들은 1차에서 모두 해산하고 고등부 이상과 교범인 한성이만 남아 2차 식사자리를 가졌다.

  오랜만에 맡는 갈비의 향은 식욕을 미친 듯이 자극을 했고 철도 씹어먹을 고등학생인 우리는 구워지는 고기를 순식간에 먹어치우며 음료수를 마셨다.

 

  "너희들이 군대를 가버리면 꽤 공백이 생기겠구나."

 

  "저희 다 가는 건 아니고 호열이 얜 공익이라, 당분간은 호열이가 주축이 돼서 출전해야 할 거 같습니다."

 

  바로 옆 테이블에서 조금은 진지한 이야기들이 들려왔다.

  관장님과 사범님들은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면서 내년 일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시고 계셨다.

  아, 사범님들 군대 가는구나.

  내년이면 22살인가? 머리로 사범님들의 나이를 계산하며 고기를 입에 넣었다.

 

  "뭐 내년에는 조교 인원을 대폭 증원할 생각이고, 인한이 너도 나이가 있으니 호열이와 함께 이끌어 나가면 되겠구나. 내년은 추가 훈련을 좀 늘려서 내실을 다져야겠어."

 

  호탕하게 웃으시며 잔을 비우시는 관장님과는 대조되게 박 사범님과 호열이 오빠, 그리고 인한이 오빠 표정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관장님의 앞자리에 앉아있던 인한이 오빠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저, 관장님."

 

  "어? 그래 우리 강 사범."

 

  술이 좀 들어가시면서 기분이 좋아지신 관장님은 자랑스러운 내 아들이라는 눈빛을 인한이 오빠에게 보냈다.

  보통 아빠란 저런 존재일까 싶었다.

  내 아들, 내 자식이 이쁘고 자랑스러운, 부러움 마음을 가지며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관장님의 반응에 멈칫하던 인한이 오빠는 다시 한번 마음을 가다듬는 것 같더니 말을 이었다.

 

  "저, 내년부터 운동할 생각 없습니다. 신학대를 가기 위해 준비하고 싶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뭐? 어디? 신학대?

  경수와 여진이도 황당하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모님도 전혀 알지 못하셨는지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인한이 오빠를 바라보셨다.

 

  "강인한. 지금 뭐라고."

 

  갑자기 냉랭해진 분위기가 생성되며 관장님은 술기운이 쫘악 빠진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내년부터 신학대를 가기 위해 준비하고 싶습니다. 더는 운동 하는 건 힘들 거 같습니다."

 

  -쾅.

 

  술잔이 거칠게 탁자를 내려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화기애애하던 분위기는 냉랭함을 넘어서 살벌해지고 있었다.

  호열이오빠와 박 사범님은 대강 알고는 있었는지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게 무슨."

 

  "관장님께서 늘 제게 이 체육관을 물려받으라고 하셨지만 전 사실 신부님이 되고 싶습니다."

 

  "강인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신부라니?"

 

  "사실 관장님의 뜻을 최대한 따르고 싶었지만, 솔직히 제 인생 제가 선택하고 싶습니다. 올해를 마지막으로 전 운동을 관두고

 내년부터는 신학대의 예신 모임에 참여하면서 차근차근 준비해보고 싶습니다."

 

  술잔을 잡은 관장님이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박 사범님과 한 사범님, 그리고 호열이 오빠와 흰둥이 오빠가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나섰다.

  일단 그런 이야기는 집에서 허심탄회하게 나누는 게 좋겠다며 사모님을 부축해 차량으로 모셔다드렸다.

  말없이 노려보기만 하는 관장님과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한이 오빠를 둔 채, 우리는 사범님의 지시에 따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인사할 분위기도 관장님이 인사를 받아 줄 분위기가 아닌지라 조용히 묵례만 하고선 최대한 조용히 음식점을 빠져나왔다.

  식당 유리 벽 너머에서는 여전히 두 사람은 서로 쳐다만 보고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자자, 오늘은 일단 집으로 해산하고 지금 일에 대해서 그냥 모르는 척하고."

 

  박 사범님의 말에 모두 충격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채 헤어졌다.

  2002년 12월 마지막 주.

  상당히 추웠던 그 날, 송년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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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변하지 않는 것 2018 / 7 / 9 303 0 5583   
94 ...그러니까 다행인 거야. 2018 / 7 / 5 296 0 5984   
93 내가 있어야 할 곳에 나는 없었다. 2018 / 5 / 14 302 0 5781   
92 그러니까, 그걸 바랐거든, 난. 2018 / 5 / 3 281 0 5866   
91 평화는 개뿔. 2018 / 4 / 23 277 0 5949   
90 권태로움 2018 / 4 / 17 286 0 5773   
89 바쁜 일상, 그리고 작은 변화(2) 2018 / 4 / 8 266 0 5736   
88 바쁜 일상, 그리고 작은 변화 (1) 2018 / 4 / 5 302 0 5796   
87 동상이몽 2018 / 4 / 1 278 0 5684   
86 싸이는 댓글이 문제. 2018 / 3 / 31 264 0 5776   
85 우리가 함께했던 마지막 그 여름. 2018 / 3 / 24 259 0 5581   
84 영원이란 없을 걸 알지만 2018 / 3 / 20 276 0 5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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