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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로맨스
먼 곳의 도련님께
작가 : 재희
작품등록일 : 2017.2.17

시간여행시리즈, 첫 번째!


대감댁의 천방지축 하인 <단이>. 혼인을 앞두고 도망치지만 일이 마냥 잘 풀릴 리가 없다!

죽을 위기에서 눈 떠보니 현대.
돌아가지도 못하고 아는 사람도 없는 낯선 곳에서, 단이는 다정했던 비움골 도련님을 발견하는데...
과거와 달리 까칠한 도련님과 단이의 아웅다웅 전쟁 같은 사랑 줄다리기.

표지 감사합니다^^

***


“아니에요!”

조곤조곤 달래는 정후의 말을 막아선 단이.
레니에게 들었던 조언을 기어이 입 밖으로 내뱉는다.

“그러니까 연애를 해요!”

꿀꺽.
당황함에 말도 침도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내가요, 도련님만 보면 기분이 싱숭생숭한 것이 참말로 이상하지마는 아마도 이런 게 연모라는 것이 아닌가 해요. 그렇다고 덥석 혼인할 수는 없으니 연애를 해요. 이곳 사람들처럼 만나면서 앞으로의 일을 논의해요.”

단이에게 정후는 언제나 오락가락한 사람이었다.
행동과 말이 달라 그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으니, 종국에는 스스로의 생각으로 선택할 수밖에.

 
외전. 불꽃놀이 하던 날
작성일 : 17-08-21 16:57     조회 : 519     추천 : 1     분량 : 8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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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전. 불꽃놀이 하던 날

 

 인정은 요즘 잘 나가는 동양화 화가였다. 네 번째 전시회를 앞두고 월간지 「화랑」에서 인정의 전시장을 한참 찍고 있었다. 편집기자 한 명은 인정을 따라다니며 그림에 대해 물었다.

 흰 투피스를 입은 인정은 옅은 미소 없이 기계적으로 그림을 설명했다. 여백을 7:3 비율로 나누어 공간을 살리고, 먹의 묽기와 사용한 붓에 대해 말하면 편집기자는 학생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긴 머리카락을 종종 쓸어 올리는 인정의 목덜미를 향했다.

 전시관을 한 바퀴 돌고 돌아오니 한 남자가 벽에 기대어 기다리고 있었다. 인정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아마도 관계자인 모양이라고 기자는 생각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몇 가지만 더 여쭈어 보겠습니다.”

 

 인정이 전시장 가운데에 준비된 의자에 앉았다. 카메라가 인정을 향하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사진은 찍지 마세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음성에 사진기자는 고개를 흔들며 카메라를 내렸다. 아쉬운 건 편집기자도 마찬가지였다. 미인 동양화 화가는 얼굴만으로도 이슈가 될 수 있다. 물론 이쪽 업계에서 인정의 인물됨은 알음알음 알려져 있으나 진짜 뜨기 위해서는 작품의 ‘가격’과 화가의 ‘얼굴’이 포인트라고 기자는 생각했다. 심지어 들었던 것보다도 더 미인이라, “아쉽네요. 참 인상이 좋으신데.” 입맛을 다셨다.

 기자의 말에도 인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요.”

 

 인정이 대답하며 “실례.” 고개를 돌려 담배를 끼워 넣고 불을 붙였다. 당당하게 실내에서 흡연을 하는 젊은 아가씨의 겉과 다른 모습에 사진기자는 모른 척 하였으나 편집기자가 멋쩍게 한 마디 했다.

 

 “금연 구역 아닌가요?”

 

 “그렇긴 하지만, 오픈은 내일인걸요.”

 

 웃지도 않고 변명을 하는데 표정이 서늘했다. 아까 그림을 설명할 때보다도 전시관 전반에 냉기가 도는 듯했다. 사진 기자는 ‘이럴 거면 나는 왜 왔나.’ 하고 속으로 투덜거리며 어깨를 움츠렸다. 편집기자도 마찬가지라, 어쩐지 바짝 굳은 채로 빤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졌다.

 촬영과 인터뷰 내내 인정은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했다.

 

 “그럼 수고하셨습니다.”

 

 “작가님, 만나 봬서 정말 좋았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작품 기대할게요.”

 

 사진기자와 편집기자가 나가자마자 인정은 그 자리에서 굽 높은 신발을 벗어버렸다. 맨발로 바닥을 성큼성큼 걸어 구석진 곳, ‘손 없는 나루터’ 앞에 섰다. 발바닥에 바닥 타일의 냉기가 바로 느껴졌다.

 

 “차갑지 않아?”

 

 내내 기다리고 있던 남자가 뒤에서 다가와 인정을 끌어안는다.

 꼼작하지 않는 인정의 머리카락에 남자는 코를 박았다. 머리카락에서 습한 담배 냄새가 났다. 다른 사람의 담배 연기는 싫어도 인정의 냄새는 남자에겐 달랐다.

 

 “오늘 피곤했지, 인정아. 이제 집으로 돌아갈까?”

 

 남자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따뜻했으나 여자의 태도는 큰 변화가 없었다. 텅 빈 눈동자, 꾹 다문 입술. 그러나 이런 인정이 그림을 그릴 때만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을 남자는 알고 있었다.

 

 “우영씨.”

 

 “응?”

 

 “산에 가고 싶어.”

 

 “이번 주는 안 돼. 전시회 초반 자리는 지켜야지. 다음 주 월요일에, 전시 쉬는 날에 가자.”

 

 남자, 우영은 아이를 달래듯 어른다.

 

 “전시가 끝나면, 나중에는 아예 몇 달을 돌아다니자, 응?”

 

 “알았어.”

 

 우영의 입술이 인정의 머리카락에 목으로 내려와 희게 트인 어깨 위에 입을 맞췄다. 입맞춤이 길어진다. 끌어안은 손에 힘이 들어가자 인정이 그를 밀어냈다.

 

 “이러지 마.”

 

 우영은 잠시 물러났으나 이내 다시 한 번 입을 맞추었다. 그런 후에야 양 손을 풀었다. 인정은 그의 품에서 빠져나와 터벅터벅 벗어놓은 신발 앞으로 걸어갔다. 그보다도 빨리 우영이 달려가 무릎을 꿇고 인정의 흰 발에 구두를 신겼다.

 

 “발 아팠지?”

 

 “…….”

 

 인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둘은 함께 전시회장을 나왔다. 미리 불러놓은 콜택시가 마침 도착해 있었다.

 

 “같이 가려고 택시 불렀어.”

 

 역시 인정은 대답하지 않고 택시에 탔다.

 밤 도로가 많이 막혀 택시는 시원하게 달리지 못했다. 서울 도로 사정이야 원체 그렇다고는 해도 이 정도로 막히지는 않았다.

 

 “불꽃놀이만 하면 길이 이러네요.”

 

 택시기사가 묻지도 않은 말을 해댄다. 도로에 차가 많기는 했다.

 인정은 안개처럼 구름으로 가득한 하늘을 올려다보고 매트에 파묻히듯 등을 기댔다. 다시 시계를 내려다봤다. 8시를 막 넘어서고 있었다. 가죽끈이 손목을 조이는 듯, 그 손을 꽉 쥐었다.

 

 “인정아, 답답해?”

 

 우영이 인정의 팔목에서 시계를 끌러냈다. 끈 안쪽으로 흰 팔뚝엔 가느다란 흉터가 옅게 나있다. 이제는 아문 흉터, 그 위에 손가락이 닿을까 조심하는 손길. 그러나 그가 무엇을 해도 실 끊어진 인형처럼 인정은 등을 기댄 채 멀거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득하게 불꽃놀이가 피어올랐다. 노랗고 빨갛고 파란 빛무리가 하늘로 솟아나 흰 연기 속에서 숨 가쁘게 터져나갔다.

 

 “우리, 예전에 한강 가서 볼 때 기억나? 그땐 가을밤이라 추웠잖아.”

 

 “난…기억이 안 나.”

 

 “괜찮아. 인정아, 기억 못 해도 괜찮아.”

 

 차로 꽉 찬 택시는 멈추었고 둘은 서로에게 기댄다. 괜찮다는 말을 주문처럼 읊조리며.

 

 

 

 

 

 같은 때, 그러나 다른 시간. 이곳 또한 달 밝은 밤이다. 폭죽 소리는커녕 밤새 우는 소리 하나 없음에도 지섭은 통 잠들지 못하고 담 안쪽을 서성였다. 그 뒤를 어린 하인 하나가 졸졸 따라왔다.

 

 “작은 도련님, 주무시지 않으시고요.”

 

 근래 작은 도련님이 또 며칠을 앓아누운 것을 집안의 모르는 이가 없다. 때마침 혼사가 오가는 때여서 어르신들은 더욱 전전긍긍, 바깥으로 말이 나가지 않게 하였으나 의원이 오가니 어디 마음대로 될까.

 다행히 자리에서 일어난 후로는 한층 얼굴이 맑아져 모두가 반겨했음에도 본인만은 내내 우중충하였는데.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그리 보이냐.”

 

 “예. 오늘 밤에는 낯빛도 좋으시고.”

 

 “밤인데 어찌 낯빛을 읽느냐?”

 

 “저리 달이 밝지 않습니까. 헤헤, 곧 장가가셔서 그런가요?”

 

 어린 하인의 놀림 투에도 지섭은 화내지 않았다. 본디 그런 사람이라 가만히 담벼락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삼남아, 옛적에 여기서 보았던 계집아이 하나 기억하느냐?”

 

 “예? 누구 말씀입죠?”

 

 하인은 곰곰이 생각했다. 뭔가 제 주인의 속에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그것을 알 수가 없어 답답했다. 괜스레 잘못 이야기했단 초를 칠 터인데 제가 양반가 도련님 속을 어찌 알까. 아무리 편하게 해준대도 상대는 한참 위에 있는 이이다. 하인은 머리를 조아리고 잘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렇구나. 나만 기억하는구나.”

 

 “죄, 죄송합니다. 소인이 기억을 못 해서.”

 

 “네 탓을 하는 건 아니다.”

 

 지섭이 쓰게 웃는다.

 

 “중요한 사람입니까?”

 

 “글쎄다.”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평소에도 이 둘째 도련님은 세월아 네월아 태평하였으나, 평소와는 또 미묘하게 분위기가 달랐다. 무엇이라 정확히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눈칫밥만 십 년 넘게 먹었는데 모를 리가.

 하인은 속이 우그러드는 것만 같았다. 장가를 앞두고 따로 마음을 둔 여인이라도 있는 것인지. 하지만 제 도련님이 어디 여자 있다는 소리는 생판 듣지 못한 터라 하인은 기우로 치부했다. 그저 장가를 앞두고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인지도 모른다. 계집애들이나 그러는 줄 알았는데 사내들도 그러는 줄이야 어찌 알았을까. 정작 자신도 장가를 가지 않았으니 예비 신랑 속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밤에는 새가 보이지 않는구나.”

 

 “새도 밤에는 자야지요. 수리부엉이는 종종 다닐 겁니다.”

 

 “내가 찾는 새는 참새인데.”

 

 “안 그래도 요번에 소작 들어온 마식이네가 곧 참새몰이 한답니다. 이맘때면 시끄럽게 몰려오니 원 남아나는 게 있어야지요. 소인이 껴서 몇 마리 잡아 올까요? 메추리만은 못해도 먹을 만은 합디다.”

 

 지섭의 너털웃음에 하인은 멋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산 것을 찾는단다.”

 

 “그럼 산채로 잡으면 되지요. 소싯적에 덫 좀 놓았습죠.”

 

 “되었다. 새의 본적은 하늘에 있는데 어찌 잡겠느냐. 참새는 당연히 날아야하거늘.”

 

 하인은 제 주인이 뜬구름 잡듯이 문자를 쓰는 것에 익숙했다. 그저 고개를 조아리고 “예, 예.” 하고 동조했다.

 

 지섭은 제 역할을 잘 알고 있었다. 가문의 둘째로서 형의 뒷받침을 해야 하고 좋은 아내를 맞아 자손을 길러내야 했다. 그것은 몸이 약한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이었다.

 아버지의 바람대로 경기 집안과 연이 닿았으니 별 일이 없는 한 그의 역할은 충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건강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제 마음이야 다른 이가 지고 떠났으니 그 또한 이루어진 셈이다.

 

 “부자(父子)의 바람이 모두 이루어지니 이 얼마나 평온한 세상인가.”

 

 지섭의 시구를 하인은 알아듣지 못하고 조용히 따라 뇌었다.

 

 

 

 

 

 ***

 

 이단이가 사라진 지 1년하고도 4개월이 지났다.

 

 작년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을 때였다. 학원에는 대입에 성공하거나 졸업한 학생들이 떠나고 또 새로운 학생들이 몰려들었다. 교복을 입고, 제 나이에 걸맞게 웃고 떠드는 학생들. 그 속에서 정후는 미친 듯 사방을 뛰어다녔다.

 함께 갔던 바닷가, 미술관, 궁을 돌아다녔고 커플들 사이에서 아무것도 얻은 것 없이 허탈하게 돌아왔다. 정협은 단이가 한동안 못 올 거라고 말했다. 더 묻고 싶어도 정협은 아예 도망이라도 간 듯이 사라졌으며, 정은은 결혼준비에 바빠 아예 단이에 대한 건 물어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사람 한 명이 사라졌는데 어디에서도 찾을 길이 없었다. 아니, 사라진 건 맞을까. 컬러 전단지라도 만들어서 뿌려야하는 건 아닐까 하고 홧김에 팸플릿 샘플까지 만들었지만 거기까지였다. 사라진 단이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뭔가를 알고 있을 정협을 기다리는 수밖에.

 

 단이의 뒤를 따르듯이 사라졌던 정협은 봄기운이 느껴질 무렵에야 나타났다. 또 여행이라도 갔던 거겠지만 마음 한 구석이 불안한 것은 여전했다. 여행을 떠났던 언제나처럼.

 정협이 훌쩍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정후는 어디 가는지 신경 쓰지 않으려 했었다. 시간이 지나면 으레 돌아오겠거니. 그만은 아버지처럼 저를 떠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동안 정후는 제 오피스텔이 아닌, 정협의 집으로 출퇴근했다. 단이가 돌아오든, 정협이 돌아오든 누군가는 돌아오겠지 하고. 조용하기 짝이 없는 그 집으로 돌아갔다.

 

 봄비가 마구 쏟아지던 날, 정협은 돌아왔다. 여느 때처럼 땀내 가득한 후줄근한 모양새는 아니었으나 표정은 더욱 우그러져 현관문을 열었다. 소파에서 새우잠을 자던 정후가 문 여는 소리에 눈을 깜빡였다. 정협도 놀란 듯 현관에 멈추어 섰다.

 

 “형…….”

 

 “어, 그래. 미안. 깨웠구나. 조용히 들어올걸.”

 

 말하며, 정협은 신발을 벗었다. 여행을 갔던 때와 달리 짐도 없이 단출한 차림이었다.

 

 “여행간 거 아니야?”

 

 “어, 음…. 가기도 갔고.”

 

 “그래.”

 

 형제 사이에 인사치레는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단이는 어디 있어?”

 

 다짜고짜 묻는 말에 정협의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아는 거지, 형은?”

 

 “…….”

 

 “…왜 어디 갔는지 말을 안 해줘? 난 못 갈 데라도 돼? 아니, 혹시 집에라도 간 거야?”

 

 “그건 아니고.”

 

 정협은 성큼성큼 다가오는 정후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단이가 얘기하지 말래?”

 

 “아니…….”

 

 “그러면?”

 

 “…미안하다.”

 

 “뭐가 미안한데?”

 

 “말해 줄 수 없어.”

 

 “왜?”

 

 “나중에, 돌아오면. 그때, 그때 꼭.”

 

 정후는 정협의 이 표정을 알고 있다. 여행 간답시고 며칠씩 사라져 버릴 때, 처음 행선지를 물어봤을 때도 꼭 이런 얼굴을 했었다. 말해주지 않을망정 정협은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그 사실만으로도 정후는 안심했다. 거짓말하느니 말하지 않는 게 나았다. 그래서 정후는 정협이 이번에도 절대 말해주지 않을 것을 알았다. 그 동안 제게 말하지 않은 모든 사실을 다 포함하고서라도.

 

 

 

 

 

 정협이 입을 다물고 몇 달이 지났다. 여전히 단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해 여름은 또 유난히 더웠다. 몇 십 년 만에 최고 기온이 되었다고 뉴스에서 연방 난리였다. 가뭄은 덤이었고 해마다 오던 태풍도 옆나라로 모두 비껴갔다. 덕분에 에어컨 판매량은 최고, 전기 사용량도 최고를 찍었다.

 아마 단이가 있었다면 에어컨을 보며 좋아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런 건 처음 보았을 테니까.

 

 갑자기 떠오른 이름에, 정후는 생각 없이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태양이 뜨겁게 내리쬐는 길가의 주민센터 입구에서 서늘한 바람이 새어나왔다. 잠시 망설이던 정후는 주먹을 꽉 쥐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점심시간이 지나서 안은 한산했다. 입구에 서 있던 정후가 카운터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사람 좀 찾으려는데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직원이 그제야 고개를 번쩍 든다.

 

 “이단이라고…….”

 

 “번호표 먼저 뽑으세요.”

 

 하고 습관적으로 얘기했다가, 이내.

 

 “사람을 찾아요? 무슨 관계이신데요?”

 

 직원이 물었다.

 

 “음, 그게…. 제 학생인데…….”

 

 이 변명도 마땅찮다. 그러나 다른 말을 하는 것이 정후에게는 더 어려웠다.

 

 “가출했어요? 그럼 여기가 아니라 경찰서에 가셔야 하는데.”

 

 “가출…은 아닌 것 같아서.”

 

 이미 수십 번은 경찰서 앞을 들락날락했다. 신고할까했으나 역시 그런 소란은 일으킬 수 없었다. 애초에 가출한 단이를 보호하고 있던 게 정협이었지 않나. 정후는 계속해서 단이의 고향 생각이 났다.

 

 ‘고향으로 돌아간 걸까.’

 

 그렇다면 오히려 이쪽에서 실종 신고하는 게 우습기까지 하다. 정협은 그것만은 아니라고 잡아뗐지만 정후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남산에서 보았던, 향수에 젖은 옆모습 때문에 그럴 것이다.

 사실은 정협도 소재를 모르는 게 아닐까. 만약 고향에 돌아갔다면 왜 간 걸까. 고작 마음을 거절했다는 것 때문에? 거절한 것도 아니고 보류인데도 그럼 끔찍한 고향땅이 낫다는 것일까. 정후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고작이라니.’

 

 그건 아니다. 마음을 거절당한 걸 ‘고작’이라는 말로 폄하할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쥐어짰다. 올 봄 초에 잠깐 생겼던 옆머리의 원형탈모는 나았지만 마음 속 답답함은 여전했다.

 

 “손님?”

 

 주민센터 직원이 다시 불렀다. 꿈에서 깨어난 듯 정후는 뒤로 물러났다.

 

 “아. 아닙니다.”

 

 역시 경찰서를 가봐야 하나, 그러나 결국에는 그곳에도 가지 않은 채 정후는 뙤약볕 아래를 걸었다.

 

 

 

 

 

 시간은 빠르게만 지나갔다. 하루하루는 느리게만 흘러갔는데 또 다시 겨울 특강이 시작하고 나서야 정후는 시간이 아주 빠르게 지나갔음을 깨달았다. 단이를 만나고 헤어진 후 1년이 지난 것이다.

 여전히 단이에 대해서는 소식 하나 없던 중, 제 특강반에서 단이의 친구였던 여학생을 발견했다. 단이와 매양 붙어 다니던 두 명 중에 한 명인지라 얼굴을 기억했다. 예비고등학생이었던 녀석이 이제는 고등반에 들어왔는데, 머리를 펌하고 매니큐어도 한껏 칠해 여전히 눈에 띄었다.

 수업 내내 맨 뒷자리 구석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끝나자마자 쌩 나가버린다. 얼른 정후가 따라갔으나 이미 엘레베이터는 내려가고 있었다. 급히 계단으로 일 층까지 내려갔다.

 

 여학생은 건물 입구에서 높은 힐로 갈아신고 있었다. 정후가 옆으로 다가갔다.

 

 “어?”

 

 어깨 위로 진 그림자에 학생이 먼저 돌아보았다.

 

 “쌤?”

 

 “어, 음….”

 

 아이들은 얼마 안 되는 선생들을 기억하지만 선생들은 수많은 아이들을 다 기억하지는 못한다. 이름을 어물거리는데 학생이 물었다.

 

 “왜요?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아니, 음.”

 

 한참을 망설이다가,

 

 “너… 그때 그, 단이 친구 맞지?”

 

 “그런데요….”

 

 “혹시 지금은 단이랑 연락 되나 해서…….”

 

 “몰라요! 전에 제가 쌤한테 물어봤었잖아요!”

 

 사실 그 학생은 단이가 사라진 이후, 제일 먼저 교무실로 쫓아와서 어디 갔냐고 물어보았었다. 며칠을 쫓아다니며 신상을 캐고 다니더니, 종국에 아무런 소용이 없자 “다 선생님 때문이에요!” 하고 소리 지르기까지 했다. 그 후로 한동안 안보이다가 이번에 다시 학원에 온 것이다.

 

 “모르니까 물어보지.”

 

 “아씨, 겨울 특강엔 올 줄 알았는데. 근데 진짜 쌤도 몰라요? 걔네 부모님도 연락 안 돼요?”

 

 “음…….”

 

 “다니 이 기지배! 연락되기만 해봐! 연락돼도, 쌤한테는 안 알려줄 거예요!”

 

 “…왜?”

 

 멍청한 질문일까. 그러나 자동적으로 나온다.

 

 “다니가 왜 그렇게 갑자기 그만뒀겠어요! 상민이도 그렇고…….”

 

 “…….”

 

 “…아, 마침 상민이도 왔네. 저 갈게요.”

 

 건물 밖에서 막 달려온 남학생이 헐레벌떡 숨을 고른다. 여학생을 보며 손을 흔들다가 정후를 발견하자 한참을 노려본다.

 

 “…….”

 

 여학생은 유리문을 나갔고, 둘은 서로 쳐다보면서 뭐라 떠들어댄다.

 일 년 즈음 전에는 저 사이에 또 한 명이 있었다. 해맑은 얼굴로 요목조목 입 다물지 못했던 옆모습. 그래서인지 학생들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시선을 의식했는지 남학생이 고개를 돌린다. 눈이 마주쳤다. 얼굴을 씰룩거리며 대놓고 불쾌감을 표시하는데, 그제야 정후는 단이에게 고백했다던 남학생을 떠올렸다.

 

 마음이 쓰다. 별 소득도 없이 정후는 돌아섰다.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르는 불안감과 후회가 물밀듯 밀려왔으나 도리가 없다. 기다리는 수밖에.

 

 

 

 

 

 정신없이 바쁜 특강은 작년과 비슷한 날짜에 끝났고, 정후에게는 또 짧은 여유가 생겼다. 그러나 바쁘게 정신없이 단이를 찾느라 돌아다녔던 작년과는 달리, 올해는 아무것도 하는 것 없이 그저 잠만 잤다. 겨울잠을 자는 동물처럼 오피스텔에 처박힌 채.

 겨울이 지나 봄이 밀려드는지도 모르고 정후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래서 4월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정후는 꽃이 핀 것을 알았다. 도로가에 멍하니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퇴근길 덕분이었다. 한가득, 꽃잎으로 가린 하늘을 보며, ‘꽃이 이렇게 많았나.’, ‘언제부터 꽃이 폈나.’ 생각하고 마는 것이었다.

 

 밤에 가로등 아래 꽃잎이 떨어지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 뚝 멈추어 섰다. 검은 머리, 출렁이는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서 혼자서 버럭 소리 지르던 누군가가 생각이 났다. 운 것도 같고 울지 않은 것도 같은 눈으로 말똥말똥 저를 쳐다보며 또 웃는 얼굴 또한.

 화해하라 종용하였지만 결국 정후는 형과 따로 화해하지 않았다. 형제 사이란 그런 법인데다가…….

 

 ‘너 때문이야.’

 

 말도 없이 떠났으면서 정협에게만 알려주고 사라져버렸으니까.

 

 ‘형은 약속을 잘 지킨단 말이야.’

 

 절대로 먼저 알려줄 일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가 와 줘.’

 

 속으로 외치는 그 목소리,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하늘 멀리에서는 펑 펑 하고 폭죽 터지는 소리와 또 구름처럼 피어나는 폭죽 연기가 아득하니 몰려왔다.

 

 

 

 *****

 

 원래 2화로 나눠 올리려다가, 한 번에 올립니다.^^

 댓글, 감상평, 추천은 물론 정주행도 환영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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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8. 엄청난 고백 3 (1) 2017 / 8 / 10 547 1 6989   
33 8. 엄청난 고백 2 (1) 2017 / 8 / 5 506 1 5499   
32 8. 엄청난 고백 1 (1) 2017 / 8 / 4 506 1 5018   
31 7. 손 없는 나루 5 (2) 2017 / 8 / 3 537 1 4971   
30 7. 손 없는 나루 4 (1) 2017 / 8 / 2 547 1 5344   
29 7. 손 없는 나루 3 (1) 2017 / 8 / 1 494 1 5248   
28 7. 손 없는 나루 2 (2) 2017 / 7 / 31 497 1 5295   
27 7. 손 없는 나루 1 2017 / 7 / 31 478 1 5263   
26 6. 달고나처럼 달콤하기 짝이 없는 4 2017 / 7 / 31 489 1 5270   
25 6. 달고나처럼 달콤하기 짝이 없는 3 2017 / 7 / 31 459 1 5001   
24 6. 달고나처럼 달콤하기 짝이 없는 2 2017 / 7 / 30 475 1 5603   
23 6. 달고나처럼 달콤하기 짝이 없는 1 (1) 2017 / 7 / 30 539 1 5315   
22 5. 교정에 내려앉은 까치처럼 4 (1) 2017 / 7 / 29 525 1 4926   
21 5. 교정에 내려앉은 까치처럼 3 (2) 2017 / 7 / 29 536 1 5236   
20 5. 교정에 내려앉은 까치처럼 2 (1) 2017 / 7 / 27 525 1 4740   
19 5. 교정에 내려앉은 까치처럼 1 2017 / 7 / 26 463 1 4748   
18 4. 홍색 댕기에 쓴 편지 4 (1) 2017 / 7 / 25 524 1 5421   
17 4. 홍색 댕기에 쓴 편지 3 (1) 2017 / 7 / 24 528 1 5025   
16 4. 홍색 댕기에 쓴 편지 2 (1) 2017 / 7 / 23 536 1 5221   
15 4. 홍색 댕기에 쓴 편지 1 (1) 2017 / 7 / 23 512 1 4995   
14 3. 곡주가 그리웠어라 4 (1) 2017 / 7 / 22 544 1 5338   
13 3. 곡주가 그리웠어라 3 2017 / 7 / 22 446 1 5959   
12 3. 곡주가 그리웠어라 2 2017 / 7 / 20 450 1 5452   
11 3. 곡주가 그리웠어라 1 (1) 2017 / 7 / 19 521 1 5468   
10 2. 견원지간(犬猿之間) 5 2017 / 7 / 18 447 1 5732   
9 2. 견원지간(犬猿之間) 4 (1) 2017 / 7 / 15 482 1 4769   
8 2. 견원지간(犬猿之間) 3 2017 / 7 / 14 442 1 5006   
7 2. 견원지간(犬猿之間) 2 2017 / 7 / 13 430 1 4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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