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진들이 벌였던 만행으로 병원은 어수선하고 불안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중요한 일을 맡아야 하는 자리에 관련 업무에 숙달된 직원들이 아닌 신입 직원들이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고, 벌써 일주일동안 내가 방송으로 접한 코드블루만 하더라도 열 세 번이나 되었다.
이전이었더라면 비교적 힘들이지 않고 케어 할 수 있는 부분에 자잘한 구멍이 빈번해지자
남아 있던 환자들의 불만과 이탈도 가속화 되었다.
병원 내부의 파벌 싸움과 정리해고가 일어날 때는 잠잠하던 언론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내었고, 그동안 병원에 협조 해 왔던 다른 병원과 대학교들에서도 더 이상의 협조는 하지 않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아무리 개판으로 난리를 부리던 임원들이었어도 나름대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 그들이 사라진 자리의 공백을 메우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병원의 잡다한 업무들이야 신입 직원들과 남아 있는 기존의 직원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정상화 시킬 수 있다지만 병원의 운영진들의 결재가 필요한 사안들이 결재를 받지 못하고 쌓여감으로 인해 병원엔 여러 가지 문제점이 발발했다.
나는 잠시 사회복지 업무를 놓아두고 쌓여 있던 대부분의 결재 서류를 살펴 나갔지만 내가 섣불리 결재 서류에 사인 할 수 있는 것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여전히 차곡차곡 쌓여가는 서류더미.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음에도 기업에서는 새로운 운영진을 보내 주지 않는다.
이쯤 되니 이제는 의심이 확신으로까지 굳어지고 있었다.
병원의 누군가가 아직까지 파워게임을 벌이는 중이다.
파워게임의 당사자는 병원에 남아 있는 중진들 중 누군가이고 그(혹은 그녀)와 싸우고 있는 이들은 모 기업의 간부들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병원의 운영진들은 대부분 소리 소문 없이 증발해 버려서 모 기업 간부와 파워게임을 벌일만한 인사는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내가 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에 휘말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루에 몇 번은 물만 먹고도 체해버려서 나중엔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부족한 일손을 돕기 시작했다.
2주도 안 되어서 살이 6kg이나 빠져 버렸다.
165cm에 55kg이던 몸무게가 49kg으로 빠져버리니 병색이 완연한 환자들과도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밤낮 없이 일 한 덕분에 얼굴엔 자잘한 기미와 다크서클이 내려앉았다.
“환자복만 입으면 딱이겠어.”
데이트조차 꿈꿀 수 없었고 일이 얼마나 바쁜 것인지 그와는 이전처럼 병원 내에서 잠시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다.
그가 돌아오면 병원의 모든 문제들이 하나씩 해결 될 것이라는 믿음도 서서히 사라져갔다.
‘임원들이랑 동등한 입장인 나조차도 해결 못하는 일인데, 기껏 해야 이 병원의 한방 과장인 그가 어떻게 해결 하겠어? 병원장 아들이면 모를까.’
나는 적잖은 회의감에 휩싸였다.
그가 이 일을 해결할 힘이 없다면 조만간 외부에서 새로운 병원 운영진을 끌어 오고 병원 정상화를 위해 힘쓸 수 있는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에 깊이 절망했다.
“결국, 이놈의 주식이 문제네. 정말 팔아버릴까? 그 얄미운 회사 간부들 말고 아예 회장 손자라는 인간한테 높은 값으로 팔아버리는 거야.”
여태껏 일하지 않아도 배당금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가능케 하였던 주식이 이제는 성가시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그렇게 갖고 싶어 하던 것이지만 내게는 성가시기 짝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고 말았다.
이제 더 이상 모기업의 주주라는 것을 숨긴 채 병원에서 편하게 일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그동안 내게 사소한 흉금까지 털어놓던 병원 직원들은 여태껏 병원 운영진들을 대해 왔던 그대로 어렵고 껄끄럽게 날 대할 것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고 원치 않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내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누가 온다고?”
“새로운 운영진이 벌써 파견 됐대요.”
“회사에서 운영진을 보내왔단 말이야?”
병원 신입 간호사에게 전해들은 소식에 긴장으로 딱딱해졌던 어깨가 단숨에 풀어졌다.
“정말로 그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병원에 운영진을 보내왔다고?”
병원과 회사에서 각각 한 번씩 보았던 회장은 고집 세고 남의 말을 안 듣기로 유명했으며,
쉽게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회장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병원 문을 닫고 다른 곳에 매각 해 버리는 것 말고 병원 정상화에 힘을 쏟을 거라고 믿을 순 없었다.
“확실한 사실이야?”
“속고만 사셨나. 그렇다니까요. 벌써 지하 회의실에 과장님들도 대부분 호출 되셨는걸요?”
“환자는 안 보고?”
“환자들도 급한 환자들은 벌써 다른 병원에 보냈다고 하더라고요.”
‘다들 앞으로는 이 병원에 협조 하지 않겠다는 공문을 보내 온지 오랜데, 갑자기 왜 이렇게 상황이 급변한 거지? 가만! 이거…….며칠 전이랑 상황이 묘하게 비슷한데?”
그가 출장을 떠나고 알 수 없는 일에 휘말린 후에 병원 운영진이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이번엔 병원과 대학교에서 결연을 끊으며 도움을 거부하게 된 일련의 사태가 소리 소문 없이 해결 됐다?
“그럼……그가……? 에이, 설마.”
회의실.
쾅!
“누가 이렇게 몰상식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황휘?”
회의실 앞에서 거만하게 앉아 있는 남자의 얼굴이 몹시 낯익었다. 아니, 낯익다는 정도로 무마하기엔 너무나 익숙한 얼굴이었다.
“남구덕 과장님이 왜…….”
“아아~ 이번에 남과장님이 병원 이사장님이 되셔서 말이죠.”
대답은 병원에 남아 있던 원무과 직원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사장님이요?”
“어머! 선생님. 모르셨어요?”
내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에 우월감이라도 느낀 듯 원무과 직원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비틀린다.
‘계속 바빠서 직원들이랑 수다 떨 겨를도 없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안 알려 주는데~에~!’
억울했다. 다들 아는 사실을 나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다들 안 알려주면 당신이라도 알려 줬어야지.’
그리고 가장 억울한 것은 그를 통해 이 사실을 듣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