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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판타지/SF
일곱 번째 기사
작가 : 프로즌
작품등록일 : 2016.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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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시작된 연극(6)
작성일 : 16-04-24 20:34     조회 : 732     추천 : 0     분량 : 18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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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hapter 4 - 강력한 우군

 

 

 

 “그래서 좀 더 말을 배운 후에 이야기 하는 게 좋겠다는 것이오?”

 “네. 아직 제가 말이 서투릅니다. 어쩌면 실수를 할 것 같습니다. 스웬딕 주교님이 말을 가르쳐 주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께 배우려 합니다.”

 확실히 지금도 좀 서투르다.

 프레드릭 남작은 웃으며 허락했다.

 “좋소이다. 지운 경의 요구에 응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프레드릭 남작님.”

 지운은 허리를 깊숙이 숙여 보였다.

 한없이 공손해 보이는 지운의 인사에 남작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답례했다.

 프레드릭 남작의 방에서 나온 지운은 내성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자신의 방으로 돌아왔다.

 “휴우…….”

 성안에 거주하는 병사와 그 가족들, 그리고 하인들과 마주치지 않게 해달라는 지운의 부탁에 남작이 특별히 배려를 해준 거처는 전 영주인 로만 프레드릭 남작이 말년의 대부분을 보냈던 방이었다.

 아들에게 영지를 물려 준 후 죽을 때까지 조용하고 청빈하게 살았던 노귀족의 아담한 방은 원주인의 성격이 묻어나는 듯 고즈넉하고 수수한 멋이 있었다.

 그러나 테이블이나 책장 같은 가구들은 모두 실용적이고 소박한 모습인데 반해 침대만은 왕족이나 쓸 정도로 굉장히 크고 화려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었다.

 질 좋은 단풍나무로 짠 크고 화려하기 짝이 없는 이 침대는, 프레드릭 남작가의 봉주가문(주 : 직속상위가문)이자 멘타리아 지방 전체를 다스린다는 웨이크필드 후작가문의 전 가주인 포를란 도나시엔 마시 데 웨이크필드 후작이 백합분쟁에서 자신을 보좌하여 큰 공을 세운 전대 영주 로만 프레드릭에게 직접 하사한 것이었다.

 본래 웨이크필드 후작은 로만 프레드릭을 자작으로 추천하고 작고 가난한 프레드릭 영지를 좀 더 넓혀 주려 결심했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았다.

 프레드릭 남작가의 동쪽으로는 왕국의 또 다른 대 귀족 가문인 압실리언 후작령이 바로 마주하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웨이크필드 후작의 처조카인 엥겔만 자작의 영지가 존재했던 것이다.

 또 다른 후작의 영지를 침범할 수는 없는 노릇인데다, 지독한 공처가였던 후작으로서는 아내가 끔찍이 아끼는 엥겔만 자작의 영지를 떼어 줄 정도의 담은 없었다.

 그렇다고 인간의 접근을 불허하는 크롬웰의 숲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래서 후작은 그냥 작위만 자작으로 올려주려고 결심했다.

 한데, 이미 은퇴를 결심한 로만 프레드릭은 아무 것도 한 게 없는 자식(웨인 프레드릭 현 남작)에게 자작의 위를 주는 것은, ‘싸우지 않은 자, 먹이지도 말라’라는 가훈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정중히 거절했다고 한다.

 이에 전대 웨이크필드 후작은 크게 감동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선물을 하나 줄 터이니 그것만은 절대 거절하지 말라고 했고, 더 이상의 겸양은 주인 된 후작가문에 대한 불경을 짓는 일이라 생각한 로만 프레드릭 남작은 기꺼운 마음으로 선물을 받게 되었다.

 그렇게 선물로서 제법 많은 재물과 함께 내려온 것이 바로 이 침대였다.

 주군이 신하에게 침대를 하사하는 것은 ‘경의 건강은 곧 내 건강이니 각별히 몸을 보중하시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후작가문을 백합 문장이 정교한 금세공으로 새겨져 있는데다 귀한 황옥이 곳곳에 박혀 있는 이 침대를 보자면, 로만 프레드릭 남작에 대한 웨이크필드 후작의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 침대는 엉뚱한 이가 차지하고 있으니, 로만 프레드릭 남작이나 웨이크필드 전 후작이 봤으면 저승에서 칼을 뽑아들지도 모를 일이었다.

 “허이고 편하다.”

 엉뚱한 불청객, 지운은 넓은 침대를 이리저리 구르며 헤벌쭉 웃었다.

 똑똑!

 푹신함을 마음 것 만끽하던 지운은 느닷없는 노크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지운 경, 로젤리아 프레드릭입니다. 잠깐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저 아가씨가 웬일이지?’

 지운은 의아했으나 서둘러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

 “들어오십시오. 프레드릭 아가씨.”

 “실례하겠습니다.”

 로젤리아가 방안으로 들어오자 순간 방안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지운이 남작에게 자신을 증명한 날 이후 처음 보는 로젤리아였다.

 꽁꽁 묶인 채로 잡혀와 세 기사와 남작 앞에서 엄청난 압박감에 휩싸여 있을 때도 미소녀라고 여겼던 그녀다.

 그런 그녀를 제법 심신이 편한 상태에서 다시 보자니, 지운은 그녀를 처음 봤을 때의 평가를 좀 더 상향조정 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귀여운 애네. 어딜 가도 내놔도 인기가 장난 아니겠는 걸.’

 그랬다. 로젤리아 프레드릭은 정말 귀여웠다.

 작고 아담한 체구, 오똑한 콧날 아래 도톰한 붉은 입술은 깨물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단지 눈매가 조금 서늘한 게 그녀를 약간 차갑게 보이게 했는데, 그건 또 그것대로 쿨한 느낌이 들었다.

 서늘한 진초록의 눈동자는 왠지 새침한 그녀의 매력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것 같아 아주 귀여웠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녀는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귀엽다는 말이 어울릴만한 어린 소녀. 가슴이 조금 뛰었으나 지운은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애는 이제 열여섯이야. 겨우 띠 동갑인 애란 말이다!’

 어디까지나 지운은 원조교제는 반인류적인 범죄라고 여기는 바람직한 사고방식을 가진 건실한 청년이었다.

 “제게 무슨 용무가 있습니까, 프레드릭 아가씨?”

 로젤리아는 살짝 이마를 찌푸렸다. 확실히 외국인이어서 그런지 이자의 말투는 굉장히 딱딱했다.

 하지만 아직 우리말이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니 고의는 아닐 터. 로젤리아는 불쑥 솟아오르려는 이유 모를 짜증을 가라앉혔다.

 “네, 지운 경의 물건을 돌려 드리려 왔습니다. 그리고 지운 경에게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는 지운경의 물건에 관심이 있거든요.”

 그렇게 말한 로젤리아는 지운의 가방을 내밀었다.

 한편 그녀의 말에 지운은 지운대로 조금 실망감이 들었다.

 로젤리아가 지운의 어색한 말투를 굉장히 딱딱하게 여기는 것처럼 지운 역시 로젤리아의 말투를 어색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로젤리아가 모든 타인에게 그러하듯 무덤덤한 말투로 애기한 것도 이유겠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영어권 국가에서 살아왔던 지운이 상대의 말에 담긴 ‘감정적 표현’을 느낀다는 것도 또 이상할 것이다.

 또한 지운 스스로는 부정하겠지만, 로젤리아의 질문 덕분에 그녀에 대한 묘한 기대심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도 실망의 이유 중 하나였다.

 “이것은 제 가방이군요. 고맙습니다. 프레드릭 아가씨.”

 “아닙니다. 빨리 돌려드려야 하는 건데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프레드릭 아가씨.”

 조금 답답했다. 이 어린 아가씨에게 그래도 부드럽고 멋지게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영어 실력으로는 단순한 의사소통만 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떤 물건이 궁금하십니까? 무엇이든지 물어보세요.”

 테이블 위에 가방을 쏟아내며 지운이 묻자 로젤리아는 뜻 밖에도 두 권의 책을 지목했다.

 “이 책들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언어입니다. 이 책은 어떤 책인지 저에게 말해 주세요.”

 “아, 이 책은……”

 어린 아가씨의 질문에 지운은 싱긋 웃으며 사실대로 말할 뻔했다.

 하지만 그 순간, 지운의 머릿속에 지하 감옥에서 생각했던 사기극의 성공적인 완성을 위해 반드시 행해야할 몇 가지 계획들이 떠올랐다.

 ‘크, 큰일 날 뻔 했다…….’

 “이 책들은 제가 고국에서 쓴 책입니다. 큰 것은 정치에 관련 된 책이고 작은 것은 제가 쓴 시집입니다.”

 중세 역사서의 저자, 로버트 팔만 박사와 에드가 엘런 포를 비롯한 시집에 실린 시인들이 들었다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멱살을 잡고 흔들지도 모를 거짓말을 지운은 얼굴빛 하나 바꾸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내뱉었다.

 이스라엘의 신을 가지고도 사기를 쳤는데 그깟 시인들과 역사학자가 무어 그리 대수일까?

 지운의 거짓말에 로젤리아의 얼굴이 변했다.

 “정말입니까? 이 책을 지운 경이 썼다는 말입니까? 놀랍군요. 나는 책을 쓴 사람을 처음 봤습니다. 정치와 시라……. 지운 경은 정말 많이 배운 분이시군요.”

 말투는 여전히 담담했지만 로젤리아는 정말 놀랐다.

 6년간 다녔던 왕립 아카데미의 선생들도 자신이 직접 집필한 책은 거의 없었다.

 프림왕국은 문화적으로 굉장히 낙후되었기 때문에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배우는 학문의 대부분은 강대국 퀘른 왕국연합이나 남부의 강국 베넨시아에서 건너온 것들이었다.

 게다가 시라니?

 프림왕국에는 많은 음유시인이 존재했지만 글을 배운 시인은 아주 드물었다. 게다가 음유시인은 각 지방의 정보나 영웅이야기를 노래로 전해주는 이야기꾼의 성격이 강했다.

 물론 글을 알고 많이 배운 귀족이 시를 읊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모하는 레이디를 향한 유치찬란한 사랑타령이었다. 게다가 그런 사랑타령도 이렇게 책으로 만들 정도로 다작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로젤리아는 감탄을 하면서도 혹시나 그런 유치한 사랑타령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그녀는 지운이 귀족이라는 사실을 아직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정말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면?

 로젤리아는 시험을 해보기로 했다.

 “저에게 지운 경이 쓴 시집을 읽어 주시겠습니까? 저는 이 언어를 읽을 수 없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이것으로 그가 진짜 귀족이며 글을 읽고 쓸 줄 아는지 판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물론입니다 프레드릭 아가씨.”

 지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지운이 굉장히 놀랐으면서도 한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들이 말하는 언어는 분명히 영어였지만 문자는 알파벳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지구에서 쓰는 알파벳과는 조금 다른 문자를 쓰고 있었다. 그렇기에 영문과 한글이 뒤섞인 시집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고.

 ‘이게 좋겠군.’

 “크흠!”

 지운은 헛기침을 한 번 한 다음 낭랑한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It was many and many a year ago,

 in a kingdom by the sea,

 that a maiden there lived whom you many know

 by the name of Annabel Lee

 and this maiden she lived with no other thought

 than to love and be loved by me

 …….

 …….

 …….

 For the moon never beams without bringing me dream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the stars never rise but I feel the bright eyes

 Of the beautiful Annabel lee

 And so all the night-tide, I lie down by the side

 Of my darling, my darling, my life and my bride,

 In the sepulchre there by the sea,

 In her tomb by the sounding sea…….”

 ‘머, 먹히려나……?’

 나직한 목소리로 낭송을 끝낸 지운은 긴장을 억지로 숨기며 곁눈질로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

 처음과 같은, 차가워 보이는 표정으로 로젤리아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지운은 내심 실망했다.

 ‘조금 유치했나? 그래도 포우의 시 중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건데…….’

 지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에너벨 리’는 포우가 죽은 아내 버지니아를 그리며 쓴 것으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그의 애정과 비통함이 절절히 묻어 나오는 영시에 있어서는 명작에 반열에 올라와 있는 시였다.

 게다가 한국어로 해석해서는 그 음악성을 느끼기가 힘들지만, 발음이 좋은 사람이 운율을 살려 읊으면 영어에 무지한 사람들도 이 시가 굉장히 아름다운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느낄 정도로 굉장한 음악성을 자랑하기도 했다.

 지운이 에너벨 리의 아름다움을 처음 느낀 것은 우연히 알게 된 영문학을 전공한 캐나다친구가 홍대 앞 술집에서 이 시를 읊었을 때다.

 특히 첫 부분의 맑고 영롱한 느낌이 계속 이어지다 마지막 부분의 Tomb라는 단어에서 울리는, 마치 피아노의 가장 낮음 음과 같은 그 어두운 음감.

 그것은 그야말로 아내의 무덤에서 하염없이 슬퍼하는 한 남자의 심정을 단 하나의 음으로 표현했다고 해도 좋을 만큼 무겁고 장중한 느낌을 담고 있었다.

 그때 받은 느낌은 굉장히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걸 살리고 싶어서 애써 그때의 기억을 되짚은 지운이 최대한 노력해서 시를 읊었건만, 로젤리아의 반응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

 “죄송합니다. 시가 형편없습니다.”

 계속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작전이 실패로 돌아간 것 같았기에 지운은 저도 모르게 쓴웃음을 지었다.

 에드가 엘런 포우가 들으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이 빌어먹을 도둑놈아! 훔쳐간 것도 모자라서 이제 욕까지 하냐!’라고 멱살을 잡고 업어치기를 할 말이었지만 청취자의 반응이 이러니 어쩌겠는가?

 “이 시…….”

 지운이 실망하고 있을 그때, 로젤리아의 도톰하고 바알간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네?”

 “이 시, 정말 지운 경이 쓴 것입니까?”

 “네. 제가 쓴 것입니다.”

 로젤리아의 서늘한 눈동자가 지운에게 고정됐다.

 그 눈빛에 지운은 내심 혹평이 나올 듯해서 다시 쓰게 웃었다.

 “대단해요…….”

 “아, 죄송합……. 네?”

 시선을 돌리며 다시 한 번 사과하려던 지운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로젤리아를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합니다. 제가 이제까지 들어 본 시 중에서 가장 완벽합니다. 정말이지, 너무나 슬프고 아름다운 시입니다. 지운 경은 천재입니다. 이렇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운율을 가진 시가 존재한다니. 정말 놀랍습니다.”

 “아, 하하…….”

 그녀의 극찬에 지운은 쑥스러운 웃음으로 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 했지만 입으로는 끊임없이 찬사를 내뱉고 있었다.

 그러나 지운은 그녀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었기에 의무적으로 네, 네라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대부분이 시문학에 관련된 전문적인 용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전문어를 듣는 와중에도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먹혔구나!’

 그랬다. 완벽하게 먹힌 것이다.

 사실 현대의 영시가 중세의 아가씨에게 먹힐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진실한 사랑이야기는 시문학의 공통주제였다.

 게다가 에드가 엘런 포우는 천재 중의 천재다.

 그런 천재가 아내를 잃은 슬픔을 혼신을 다해 표현한 명시가 중세라고는 하지만 한창 감수성이 풍부할 나이의 아가씨, 그것도 많이 배운 귀족가의 아가씨에게 먹히지 않으면 이상할 것이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고마워요, 포우 선생님. 당신은 정말 천재입니다!’

 

 ******

 

 로젤리아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에너벨 리’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여자이름인 것을 보니 또 사랑타령이군. 이 사람도 똑같아. 뭐 글을 아는 것을 보니 귀족은 맞는 거 같네.’라고 생각했었다.

 귀족가의 시인들이 자신의 시의 제목을 붙일 때 흔히 써 먹는 것이 바로 시를 바치는 대상인 레이디의 이름이었으니까.

 그래서 이 외국인의 시도 그와 다를 바가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생각은 지운이 침중한 목소리로 조용히 시를 읊으며 조금씩 바뀌어져 갔고, 마침내 끝날 때는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시의 아름다움에 취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완벽한 운율과 신비하기 짝이 없는 현묘한 느낌을 주는 어휘라니!

 사실 기존의 시와는 형식이 달랐기에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레이디에 대한 끝없는 아부와 말도 되지 않는 은유와 비유가 뒤섞인 역겨운 사랑타령과는 차원이 완전히 다른 시였다.

 가슴이 떨렸다.

 대체 눈앞의 이 남자는 그 ‘에너벨 리’는 레이디를 얼마나 사랑했기에 이런 시를 만들어 낸단 말인가?

 너무나 안타까웠다. 그 죽어버린 레이디가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

 놀라움과 동시에 질투심이 생겼다.

 자신의 연인을 위해, 이제는 이 세상에서 흔적이 완전히 끊어진 연인을 위해 새로운 흔적을…… 그것도 아름답기 짝이 없는 그런 흔적을 창조해 주는 사람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그런 이의 사랑을 죽어서도 소유하고 있는 에너벨이라는 레이디에게 질투가 생겼다.

 게다가 이런 대단한 시를 썼음에도 겸손하게도 자기 작품의 미숙함을 탓하는 외국인이 쓴웃음을 짓는 순간, 로젤리아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서 울고 싶은 기분을 꾹 참기 위해 쉴 새 없이 시의 위대함에 대해서 떠들었다.

 그러나 정작 시의 작자인 눈앞의 검은 눈동자의 외국인은 무심한 어조로 ‘네’라는 짧은 대답만을 했다.

 그것은 자신이 쓴 시를 읊는 동안 그토록 잊으려 노력했을 슬픔과 죽어버린 연인에 대한 번민이 다시 찾아온 탓이 분명했다.

 그것이 더욱 더 이 외국인 귀족을 진실한 사람으로 보이게 했다.

 그렇게 시와 언어야말로 그 사람의 인성과 품격을 나타내주는 가장 정확한 지표라고 굳게 믿고 있던 로젤리아에게, 지운은 참된 인생과 진실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현자라고도 불릴만한 사람으로 각인된 것이다.

 이것은 지운의 의도한 거짓말과 결코 의도하지 않은 몇 가지 행동들이 우연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일련의 화학작용을 일으켜 완성된 성과물이었다.

 “지운 경.”

 “네, 프레드릭 아가씨.”

 “제 이름은 로젤리아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운 경 보다 어립니다. 앞으로 이름을 불러주시겠습니까?”

 “네?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로젤리아 아가씨.”

 

 ******

 

 여전히 무표정해 보였지만 두 눈 가득 열기를 담은 얼굴로 로젤리아가 방에서 나간 후 지운은 고소를 지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됐다는 지적 포만감이 한가득 담겨있었다.

 어린 아가씨를 속였다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쨌거나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는 대는 성공했다.

 지금 지운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아무런 연고도 없이 막막한 상태로 살아가야할 세상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조력자지, 작은 거짓말을 하는데서 오는 양심의 울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거짓말은 타인에게 전혀 피해를 끼치지 않은 거짓말이다.

 끽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현 상황에서 그런 거짓말 조금 했다고 해서 자신이 때려죽일 악당이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별 문제는 없잖아? 누가 피해 보는 것도 아니고.’

 지운은 부인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피해자는 있었다.

 에드가 엘런 포우, 그의 창작물이 한순간에 21세기의 판타지 소설가의 작품으로 명의이전이 되어 버렸다. 지적재산권침해를 넘어선 ‘도둑질’이라는 명백한 범죄행위다.

 하지만 뭐 어떤가? 죽은 자는 말이 없는데.

 지운은 죽은 포우가 산 자신 보다 낫다는 데는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에드가 엘런 포우, 그 인간적인 천재라면 분명히 이해해 줄 것이다.

 그렇게 지운은 스스로에게 변명하며 테이블 위에 쏟아둔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똑똑!

 대충 정리가 끝날 무렵, 지운의 방에 다시 노크 소리가 울렸다.

 ‘어린 아가씨가 다시 찾아온 것일까?’

 지운은 내심 즐거운 상상을 하며 일부로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누구십니까?”

 하지만 바깥에서는 지운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운 경, 저는 프레드릭 영주님의 기사, 크리스티안 로렌스입니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만.”

 ‘로렌스? 그 냉정해 보이는 기사?’

 그가 왜 자신을 찾아 왔는지 짐작이 가긴 했다.

 하지만 원래라면 내일 쯤 로젤리아에게서 이야기를 전해들을 프레드릭 남작이 직접 찾아 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의외긴 해도 일단 이 영지에서 제법 큰 영향력이 있을 것 같은 기사가 온 것이다.

 다소 예상과 멀어지긴 했지만 이렇게 된 바에야 자신이 먼저 선수를 쳐야한다.

 지운은 심호흡을 한번 한 후 문 쪽을 향해 말했다.

 “들어오십시오, 로렌스 경.”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로렌스의 모습이 보였다.

 날카로운 로렌스의 눈빛을 대하자 지운은 긴장이 됐다.

 지운은 눈앞의 이 기사가 아주 깐깐하고 쉽게 볼 수 없는 인물임을 직감적으로 눈치 챌 수 있었다.

 “앉아도 되겠습니까?”

 “그러십시오, 로렌스 경.”

 로렌스에게 의자를 권한 뒤 지운은 천천히 맞은 편 의자에 앉았다.

 지운은 조심스럽게 로렌스의 표정을 살폈다.

 다행히 로렌스는 지운을 보지 않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은 지운의 읽으려고 남겨둔 책과 정리가 안 된 몇 개의 물건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이었다.

 유심히 그것들을 바라보는 로렌스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듯이 지운이 웃으며 말했다.

 “하하, 어지럽군요. 좀 치우겠습니다.”

 지운은 서둘러 물건들을 가방에 쓸어 담았다.

 툭.

 약간 긴장한 듯 물건을 치우던 지운의 팔꿈치가 책을 치자 책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책이 떨어진 곳은 공교롭게도 로렌스의 발 근처였다.

 로렌스는 앉은 자세 그대로 허리를 굽혀 책을 주워들더니 책의 표지를 살폈다.

 “지운 경, 이건 뭐라고 쓴 겁니까?”

 로렌스의 질문에 지운이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정치의 기술과 전쟁의 정의’이라는 제목입니다.”

 거짓말이다. 사실은 ‘중세유럽의 정치전쟁사’라는 제목을 가진 책이다.

 순간, 기사 로렌스의 눈매가 날카롭게 변했다.

 그는 새삼스럽다는 얼굴로 지운과 책을 한 번씩 번갈아 보며 말했다.

 “멋진 제목이군요. 정치의 기술과 전쟁의 정의. 훌륭한 제목입니다. 흐음. 책의 재질도 놀랍군요. 지운 경의 나라에서 이런 책은 흔합니까?”

 뭔가를 알고 싶어 하는 눈치.

 지운은 조용히 대답했다.

 “많이 볼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이 책을 쓴 사람이 바로 저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몇 권 나오지 않았습니다.”

 순간, 기사 로렌스의 눈가가 한번 실룩였다.

 “그렇습니까? 제본 기술이 대단히 뛰어나다했더니 그래서 그런 것이군요. 대단합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이 조금 궁금합니다만, 알려 주실 수 있겠습니까?”

 “저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의 말은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제대로 설명을 하지 못할 것 입니다. 그래서 설명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죄송합니다, 로렌스 경.”

 로렌스는 지운의 어색한 어투에 살짝 웃었다.

 난처한 듯한 지운의 표정을 곰곰이 살피던 로렌스는 무엇인가를 결심한 듯 미간을 살짝 모으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한 질문 몇 가지는 받아 주시겠습니까?”

 ‘이것 봐라?’

 가라앉았던 긴장이 다시금 일어서며 지운은 저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했다.

 “그렇게 하지요. 그 질문이 무엇입니까?”

 지운의 말에 로렌스는 바로 질문을 하지 않고 한동안 지운을 바라보았다.

 지긋이 지운을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는 사냥감을 노리는 사냥꾼의 눈 같기도 했고, 새로운 서적의 목차를 훑어보는 학자의 그것 같기도 했다.

 그 눈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살피는 자’의 시선임을 지운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지운을 바라보던 로렌스 말문이 드디어 열렸다.

 “정치는 무엇이고 전쟁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신권은 무엇입니까?”

 잠깐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그 정적은 그다지 길게 가지 않았다.

 “정치는 왕과 인간을 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전쟁은 정치를 유지하는 필수요소입니다.”

 “……!”

 로렌스의 눈매에 잔 경련이 일었다.

 지운은 한결 단호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신권은…… 모든 명분을 만들어주는 가장 중요한 열쇠 중 하나입니다.”

 로렌스의 눈 부위가 몇 번 더 실룩거렸다. 꼭 화가 난 사람 같이 보였다.

 지운이 지금 자신이 한 대답이 잘 된 것인지 잘 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대답은 중세왕권과 신권정치에 있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사실이었다.

 물론 마키아벨리즘이 태동하기 전까지의 중세에는 그런 사실을 학문적으로 정의 내린 사람이 없었다.

 단지 지배자 중 똑똑한 몇몇이 본능과 경험으로 그런 사실을 파악하고 정권유지를 위해 신권과 전쟁을 적절히 써먹었을 뿐이었다.

 21세기 지구에서도 종교의 힘은 대단하다. 몇몇 특정 거대종교가 아닌 단순한 사이비 종교만 봐도 인간이 얼마나 종교에 약한 존재인지 쉽게 알 수 있다.

 중세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은 21세기의 인간이 그럴진대, 신과 종교의 권위가 왕권보다 막강한데다 배우지 못한 문맹들이 우글거리는 중세의 인간들은 과연 어떠했겠는가?

 중세에서 신의 권위를 대리하는 사제들, 특히 교황의 힘은 현대인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했다.

 물론 시대에 따라 교황의 힘이 축소되거나 개개인에 따라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하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교황(The pope)’이라는 호칭 자체는 부정하지 못했다. 왕이라 할지라도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맞춤을 해야 했다.

 신권이란,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지운 경.”

 “아닙니다. 저는 현명하지 못합니다. 방금 말은 싸구려(Cheap thing)입니다.”

 여전히 세련되지 못한 어색한 표현이다.

 하지만 로렌스는 더 이상 웃지 않았다.

 “그럼 늦은 시간에 실레가 많았습니다.”

 지운에게 작별을 고하고 나가는 로렌스의 눈가는 여전히 실룩이고 있었다.

 ‘큰일 났다! 설마 여기는 왕권이 신권보다 훨씬 더 우위에 있는 걸까? 며칠 전의 일로 봐서는 아닌 것 같았는데……. 젠장!’

 로렌스가 떠난 후 지운은 손톱을 깨물며 쉴 새 없이 방안을 오갔다.

 속이 바싹 타들어 갔다.

 책을 일부러 떨어트려 로렌스의 시선을 책으로 가게하고 로렌스가 용건을 꺼내기 전에 자연스럽게 책에 대한 이야기로 주제가 옮겨 가게끔 유도한 것 까지는 좋았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 나올까 싶어서 아직 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것을 핑계로 질문이 자신이 의도한 포인트로만 향해 가도록 못을 박은 것도 썩 훌륭했다.

 그렇게 자신이 유도한대로 로렌스가 질문을 간단하게 하도록 이끌어냈다. 물론 그가 한 질문이 쉽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세의 정치적 특성을 단 몇 마디로 줄여서 쉽게 대답한 것도 썩 괜찮았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틀어진 것 같아 지운은 고민이 되었다.

 자신의 판단이 틀렸다면 말짱 다 도루묵인 것이다.

 방금 찾아온 로렌스라는 기사는, 냉철해 뵈는 표정부터가 그랬지만 프레드릭 영지의 기사 중에서 가장 많이 배웠고 유식하다고 들었다.

 그런 로렌스가 화가 난 것처럼 눈매만 실룩이면서 돌아갔으니, 지운으로서는 자신의 계획이 말짱 도루묵이 된 것 같아 불안하기 그지없었다.

 ‘제기랄! 좀 더 확실히 알아보고 작업을 걸걸 그랬나? 눈초리가 장난 아니게 무섭던데…….’

 지운의 고민은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후에 알았지만, 로렌스가 눈가를 실룩일 때는 굉장히 놀라거나 흥분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지운은 그가 아주 화가 났거나 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것이라 여기고 전전긍긍할 뿐이었다.

 

 ******

 

 ‘놀랍다……. 정말 놀라운 식견을 가진 자다.’

 기사 크리스티안 로렌스는 쉴 세 없이 실룩이는 한쪽 눈꼬리를 문질렀다.

 그러나 경련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애초에 그가 지운을 찾은 이유는 무슨 수를 써서든지 엥겔만 자작가로 보내버리기 위한 꼬투리를 잡기 위해서였다.

 외국 백작가의 장자라는 작자라면 온당 가지고 있을 허영심을 은근슬쩍 부추기기만하면 원하는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애초부터 그가 정치가라는 것은 아예 믿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건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상황이었다.

 

 로렌스는 지운의 거처로 가던 도중, 주군인 프레드릭 남작과 함께 영지에서 자신과 말이 잘 통하는 로젤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잔뜩 상기된 얼굴의 로젤리아가 자신에게 하는 말은 놀랍기 짝이 없었다.

 그 외국인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것도 두 권이나. 그가 가지고 있던 책이 바로 스스로 쓴 책이라 했다.

 게다가 한 가지는 분명히 ‘정치’에 관련된 책이라고 로젤리아가 말했다.

 백작가문의 장자로 태어나 떠받들어지며 흥청망청 살았을 게 뻔한 작자가 정치에 관련된 책을 써?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하지만 로젤리아의 붉게 상기된 얼굴은 그로서도 자주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자신이 직접 확인해 보자고.

 외국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눈치가 제법 빨라 보이는 외국인이 의심하지 않게 가장 핵심이 되는 세 가지 사항만 물어 보았다.

 그것은 눈치만 있다고 대답할 수 있는 종류의 질문이 아니었다. 배우지 못해 무식하고 배웠다고 하더라도 깊은 통찰력과 현실적인 안목이 없는 자라면 문장의 진의조차 이해 못할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 외국인 귀족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놀라웠다.

 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 아니 귀족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로렌스에게 있어서는 큰 충격이었다.

 신권이 모든 명분을 쥐고 있다니? 게다가 그 신권을 이용해야 한다니?

 분명히 독실한 종교인인 그가?

 신은 신이고 민은 민이라는 것인가? 아니면 민이 없으면 왕도 신도 없다는 것인가?

 어찌됐건 상관없다.

 저런 식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두 번 다시 찾기 힘들 것이다. 장담하건데, 이 나라에서 저런 귀족은 절대 찾을 수 없을 터다.

 적어도 자신의 경험에 따르자면 그랬다.

 주군을 모시지 않고 유랑하던 방랑기사 시절, 로렌스는 많은 기사와 귀족들을 만났었다.

 대부분이 현실에 만족하는 뼛골까지 썩어버린 세습 귀족이었고 개중에는 매관 귀족인 주제에 요망한 감언으로 일신의 영달만을 꾀하는 자들도 있었다. 심지어 귀족을 사칭하는 외모만 그럴싸한 야바위꾼도 보았다.

 간혹 그런 자들과는 완전히 다른 귀족도 있긴 했다.

 로렌스는 롯시를 다스리는, 모든 이들이 영명하신 대공전하라 칭송해 마지않는 ‘공작(Duke)’ 프란체스카 알렉산드레 말레반 롯산드리아의 휘하에서 잠시 몸을 담은 적도 있었고, 퀘른 왕국연합의 왕 슈바인스라이거와 함께 전투에 참가한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위대한 핏줄과 그에 걸 맞는 능력과 무력을 잘 이용해 일국의 패자의 자리에 오른 인물들로 로렌스가 생각하기에도 대단한 군주들이었다. 한때는 자신의 몸을 의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핏줄(Lineage)로 이루어진 강력한 혈맹을 이미 형성하고 있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시골 기사의 시종으로 시작해 갓 향사(주 : Esquire, 정식기사의 전 단계)가 된 당시의 로렌스가 그 견고한 혈맹을 뚫고 성공하기란 드래곤의 비늘 떼어오기보다 어려웠다.

 또한 그들은 ‘고귀한 귀족’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정치와 이상향은 그들의 고귀한 핏줄이 인도하는 길로만 국한되어 있었다.

 고귀한 핏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의와 명분, 그리고 명예였다.

 그 위대하고 오롯한 군주들 휘하에서 로렌스는 스스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빠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다시금 자유기사(주 : 영주를 모시지 않고 떠돌아다니는 기사)가 되었다.

 때로는 지방영주의 분쟁에 참가하기도 했고, 용병단에 들어가 자신의 검에 피를 묻혀보기도 했다.

 그러나 로렌스는 자신의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정체 모를 열기를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흘러가듯 살던 로렌스는 3년 전 웨이크필드 후작의 영지의 객원기사(주 : 정식 영지기사가 아닌 손님으로 머무는 기사)로 잠시 몸을 의탁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 그곳에서 그는 작위를 잇기 위해 후작가를 방문한 웨인 프레드릭 남작을 만났다.

 작고 가난한 영지의 영주.

 하지만 웨인 프레드릭 남작은 그가 만나왔던 여타 귀족과는 달랐다.

 빈곤한 영지 덕분에 주변 귀족들에게 알게 모르게 무시 받고 경원 당하는 신세였지만 웨인 프레드릭 남작은 그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프레드릭 남작이 부끄러워했던 것은 자신의 척박하고 가난한 ‘영지’가 아니라, 그런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는 웨인 프레드릭, 그 자신의 무력함이었다.

 로렌스는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귀족을 처음 만났다.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반성을 한다는 것이고 반성은 곧 발전으로 이어진다.

 부끄러움과 자기반성이 없는 무능력한 귀족들이 어떻게 몰락하는지 로렌스는 잘 알고 있었다.

 웨인 프레드릭과 함께 한통의 와인을 비우며 밤 세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 날 아침, 로렌스는 결심했다.

 이 귀족을 따라가자고.

 지금 당장 가진 힘은 없지만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줄 아는 이 젊은 영주에게 자신의 충성을 맡겨 보자고.

 웨인 프레드릭 남작의 아버지, 로만 프레드릭 전 영주의 충성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던 웨이크필드 후작은 로렌스의 요청을 두 말 없이 받아 들였다. 좋은 주군을 모시게 되었다고, 얼마간의 재물과 시종까지 딸려서 그를 웨인 프레드릭 남작에게 보내주었다.

 그렇게 크리스티안 로렌스는 프레드릭 남작을 따라가 정식으로 기사의 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오늘, 자신의 꿈을 함께 이룰 수 있는 또 다른 인물을 만난 것이다.

 ‘꼭 잡아야 한다. 우리 영지와 프레드릭 남작가문의 발전을 위해…….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정치가 무엇인지 썩어빠진 중앙귀족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저 외국인을 꼭 잡아야 한다.’

 충심어린 기사, 로렌스는 그렇게 결심했다.

 

 ******

 

 “지운 경이 말과 글을 완벽하게 배우게 되더라도 반드시 우리 영지에 남게 해야 해요. 그는 뛰어난 시인이자 현자입니다. 왕립아카데미의 잘난 척만 하는 교수들과는 수준이 다른 진정한 학자입니다.”

 “그는 뛰어난 정치가이자 현실적인 안목이 남다른 훌륭한 사상가입니다. 아직 좀 더 검증을 거쳐야겠지만 지금 지닌 지식과 안목만으로도 인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사람입니다. 고국으로 돌아갈 상황이 아니니 잘 설득해서 아니, 협박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 영지에 남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허허…….”

 연회밖에 모르는 여느 귀족가의 레이디와는 생각 자체가 다른 무남독녀 로젤리아와 영지에서 가장 유식한데다 냉철한 판단력까지 겸비한 기사 로렌스의 강력한 요청에 프레드릭 남작은 어이가 없었다.

 어제 두 사람이 보인 태도들과 완전히 달랐다.

 “대충 말을 제대로 할 정도가 되면 떠나보내는 것이 좋겠어요. 스웬딕 주교께서 신경을 써주시는 것 같으니 중앙교구로 보내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외국에서 온 독실한 신자라면 추기경도 충분히 관심을 기울일만하고, 주님의 은총이 바다 건너 멀고 먼 이국까지 닿아 있다는 사실은 중앙교구 입장에서는 선전용으로 그만이니까요. 게다가 흔치 않은 성구까지 있으니 금상첨화일거예요. 다음 주일이라도 당장 주교님께 의사를 타진하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아버지께서 허락하시면 제가 직접 주교님께 말씀드릴게요.”

 이것은 왕립 아카데미에서 6년 간 수학하며 종교와 역사, 문학에 대해서 공부한 딸 로젤리아가 어젯밤 잠자리에 들기 전 자신에게 한 말이다.

 “우리 영지에 남아 있어 봤자 별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일단 귀족이라니 이곳에 적응하게 되면 자신의 나라에서 받았던 대접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백작가문의 장자니까 남작이지요. 보나마나 오만하고 사치스러운 인물일 겁니다. 기우일지는 모르지만 스웬딕 주교님의 총애를 믿고 돈이나 재물, 어쩌면 로젤리아 아가씨를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적당히 외국에서 온 고위 귀족으로 포장한 다음 주변의 돈 많은 귀족가로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음유시인과 신기한 외국문물을 좋아하는 엥겔만 자작가가 좋겠군요. 생색내기엔 그만일 거 같습니다. 말씀만 내리시면 제가 알아서 준비해 두겠습니다.”

 이것은 영지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참고할 경제적 상황과 주변 영주들과의 관계 개선에 대해 이야기 하던 도중 로렌스가 남작에게 건 낸 조언이다.

 그랬던 두 사람이 하루 만에 자신을 찾아와 성에서 묶고 있는 외국인 귀족을 잡아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자신에게 요구하고 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은 갔다.

 그리고 그의 딸과 충성스러운 기사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필히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생각을 굳힌 프레드릭 남작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그들의 요구를 승낙했다.

 “로지와 로렌스 경의 말이 그렇다면 내 생각해보도록 하지. 하지만 그가 말을 완벽하게 배울 때 까지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으니 그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시오. 그 이후에 내가 친히 그에게 의사를 물어 보도록 할 테니.”

 “영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기사와 소녀는 동시에 대답하고 물러갔다.

 로젤리아와 로렌스, 두 사람은 지운이 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만든 강력한 우군이 되었다.

 하지만 그 시각…….

 지운은 그들이 이런 식으로까지 자신을 높게 평가하리라고는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로젤리아에게 땄을 점수에 희희낙락하면서도 로렌스의 찡그린 인상을 떠올리며 전전긍긍하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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