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은 대기실에 들어오자마자 가방을 소파에 가방을 내팽개치며 소리를 질렀다.
“진짜! 악! 짜증나!”
“유림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최실장이 놀란 듯 유림의 눈치를 살폈다.
유림은 대꾸 없이 씩씩 대며 혼자 분을 삭혔다.
“언니, 혹시 납치나 강도나 나쁜 일 해 주는 사람 알아?”
“헉! 어머어머, 무슨 그런 질문이.. 우리가 그런 사람 어떻게 아니?”
“그러게.. 막장 드라마에서는 나쁜 일 하는 심복 하나쯤 모두 가지고 있던데.. 우린 없구나. 그런 사람.”
최실장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유림의 맞은편에 앉았다.
“왜애.. 너 왜 그래..”
“있지.. 나.. 동원씨 가지고 싶었어. 솔직히 나 괜찮잖아? 성격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짜증나. 응. 다른 사람한테 거절도 당해봤어. 좀 슬퍼도 다 이겨냈어. 근데.. 동원씨한테 거절당하니까.. 막 화가 나.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그 여자만 없으면 될 것 같은데.. 그래, 파파라치 사진 찍히는 거 알았어. 그렇게라도 억지로 동원씨랑 엮이기만 하면.. 일단 시작만 하면 내가 사로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가지고 싶지? 나 왜 이러지?”
최실장이 말없이 유림의 옆으로 와 어깨를 토닥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유림은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들어오세요.”
“유림씨,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동원이었다.
최실장은 안쓰러운 얼굴로 유림을 한 번 쳐다보고 동원을 향해 말없이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리고는 조용히 밖으로 나갔다.
“유림씨, 웁니까?”
“우니까 좀 불쌍해 보이나요?”
동원은 분한 듯 입술을 깨물며 눈에 눈물이 가득 고인 유림을 바라보며 잠시 말을 멈췄다.
“유림씨는 내가 왜 좋습니까?”
“짜증나잖아요. 처음부터 거절당하니까.. 나 여배우예요. 내 자존심이 얼마나 높은지 알아요? 당신은 나한테 첫눈에 반했어야죠.”
“......”
“드라마 안 봤어요? 드라마 작가면서.. 거절하려면 좀 더 잘 해줘도 되잖아요. 희망고문이라도 좀 하면서.. 왜 드라마에서 여주들이 남자 두 명 걸치고 있는데요. 왜 한 번에 뻥 안차는데요. 그렇게 철벽 치는 거, 동원씨 좋아하는 사람한테 예의 아니에요. 한두 번쯤 가슴 설레게 해 줘도 되잖아요. 그렇게 벌레 보듯이! 나를.. 흑흑..”
“......”
“좋아해요. 좋아한다구요. 동원씨랑 이야기하고 싶고, 잘 보이고 싶고, 안기고 싶다구요. 그래서 이 드라마 더 열심히 했어요. 나 좀 봐달라구요.”
유림은 이제 눈물이 좀 그쳤는지, 아니 분이 좀 풀렸는지 동원을 마주보며 말을 멈췄다.
“유림씨, 예쁩니다. 연기도 잘 하고 멋있어요.”
“......”
“그래서 이 드라마 쓰면서 여자 주인공으로 은유림씨는 어떨까 생각하며 썼어요. 그건 진심이예요.”
“......”
“난 오랫동안 사랑할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난 연인을 아프게 잃고 내가 다시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
“거절당해서 자존심이 상한다고요? 어떻게 희망고문 한 번 하지 않냐 물었습니까?”
“......”
“당신이 보이지 않습니다.”
유림의 눈에 다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유림이 동원을 쏘아보았다.
“내 눈에 지금 사랑하는 내 사람만 보여요. 나에게 와준 게 고마워서, 행복해서 은유림씨는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은유림씨라서 거절한 게 아닙니다. 어쩌면 당신이 제대로 보였다면 나는 흔들렸을지도 모르죠. 은유림씨는 충분히 매력적이니까요.”
“...... 병 주고 약 준다더니.”
“은유림씨 자체가 아예 보이지 않으니 유림씨를 거절한 이유를 유림씨한테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자존심이 상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래서 어쩌라구요. 나는 계속 마음이 가는데 어쩌라구요.”
“유림씨 마음을 왜 제게 묻습니까? 좋아하시려면 계속 좋아하세요. 제가 그것을 상관할 자격은 없습니다."
"차라리! 그만 두라고 하지.. 왜 그렇게 독해요? 좋아하든지 말든지.. 그 말이잖아요. 하아.. 동원씨는 진짜.. 한결 같네요."
동원은 어깨를 으쓱했다.
"사람은 쉽게 안 변합니다."
유림이 고개를 돌려 땅을 보면서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만 나가요. 이제 드라마 촬영도 끝났으니 볼 일도 없어요. 그 사랑.. 얼마나 오래 가는지 지켜볼게요.”
동원은 가볍게 인사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 이야기를 진작 했어야 했을까?
이 별 것도 아닌 동영상이 터지면.. 은유림씨는 또 상처를 받지는 않을까..
한숨이 나왔다.
**
“시인아! 은유림 인터뷰 떴다. 장난 아니다!”
“또 뭐야, 진짜..”
아이들은 보내고 나니 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영현이의 전화를 끊고 시인은 인터넷을 켰다.
실시간 검색어에 1위에 ‘은유림 고백’이 떠 있었다.
「이동원작가를 좋아했어요. 그래서 대본 핑계로 해랑도까지 찾아갔어요. 근데 철벽방어..ㅡㅡ
그래서 회식 때 술 먹고 쓰러지기 필살기를 썼는데.. (저 완전 술 세요. ㅋㅋㅋㅋ) 자동차 뒷 자리에서 오지도 않는 잠 억지로 자는 척 하며 업히기 까지 했답니다. 근데 무겁다며 잠든 척 한 저를 침대에 내동댕이치며 짜증을 얼마나 내던지.. 유혹 대실패로.. 대실연 당했습니다. 여러분, 저 위로해 주실 거죠? 역시 전 여러분 밖에 없어요.ㅋㅋㅋ 사랑합니다.♡」
헉.. 이 여자 뭐가 이렇게 솔직해..
시인은 기사를 읽기 전 떨리던 마음이 서서히 안정되는 것을 느꼈다.
하아.. 내가 넘 멋진 남친을 사귀나보다..
앞으로 이런 여자들 어떻게 정리시키면서 살지?
뭐야? 같이 살 거야?
어머어머, 얘 왜 이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또 한 번 폰이 울렸다.
또 영현이였다.
“시인아! 실시간검색어 보고 있어?”
“뭘? 방금 기사 봤어. 이제 스캔들 완전 정리되겠네.”
“아니아니.. 크크크크.. 너 이제 어쩌냐.. 크크크크크.”
“왜? 뭔데?”
은유림 고백이라는 검색에 밑에 살포시 있던 이동원 고자.. 고..자? 고자라니!!
“이.. 이게 뭐야?”
“잠든 은유림 그냥 두고 가는 거 보면 고자가 분명하다며.. 풉.. 큭큭.. 지금 도배중이다. 팬들이. 크크크크.”
멘붕이었다.
**
“어머, 어머. 작가님. 작가님 이름 검색하면 옆에 고자도 같이 떠요. 어떡해. 크크크.”
드라마 최종회가 끝나고 동원은 오랜만에 한가로운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동원의 별장 앞 작은 해변에 누워 책 읽고 있는 동원에게 옆에 누운 시인이 폰을 보다가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얼마나 웃긴지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책을 덮고 동원이 옆으로 누워 웃고 있는 시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웃는 게 좀 사라지자 동원이 시인을 가까이 잡아 당겼다.
시인이 계속 웃음 띤 얼굴로 동원을 놀렸다.
“작가님, 어떡해요? 이제 장가는 다 갔네.”
동원은 시인의 턱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왜..왜 그래요?”
“내 성기능에 이상이 없음을 가르쳐 주고 싶어서.”
“어머어머! 뭐래! 이 변태!”
그대로 내달린 시인이 오솔길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나 먼저 가요. 나 다음 주 추석이라서 이번 주 주말에 부산 가는데 작가님은 언제 서울 가요?”
“빨리 이리로 뛰어 와요! 안 그러면 잡아서 오늘 안 놔줄 겁니다!”
“베~”
시인은 혀를 쏙 내밀고 도망가기 시작했다.
동원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소리쳤다.
“정시인! 뽀뽀는 해 주고 갑니다! 안 그럼 계속 쫒아가서 마을 사람들 다 보는 데서 키스할 거예요!”
나무 사이로 잠시 숨어 있던 시인이 다시 달려와서 동원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는 동원의 입술에 뽀뽀를 쪽 했다.
동원은 가지고 있던 책을 떨어뜨리고 시인의 허리를 꽉 안더니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잠시 입술을 뗀 동원은 시인의 뺨을 어루만지다가 꼭 안았다.
“휴.. 하루라도 안 보면 나 병 걸리는 거 아니예요? 새 아이템 생각났어요. 자기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상사병 걸려서 죽는 남자 어때요?”
“피이~ 다음에 만날 때 병 안 걸려 있기만 해요!”
“나도 내일 서울 가서 미리 추석하고, 2주 정도 미국 가요. 다음 이야기는 미국 입양기관 이야기를 한 번 담아 볼까하고요. 인터뷰가 있거든요. 같이 갑시다. 학교 때려치우고.”
“크크크. 학교도 하나 사 줄 거예요? 잘 다녀와요. 몸조심하고! 알았죠?”
“학교 하나 사 줄게요. 같이 갈래요?”
동원은 웃으면서 자신의 셔츠 자락을 매 만지고 있는 시인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선생님 때려치우고 내 밑에서 글 쓰는 거 배우는 건 어때요?”
“오~ 그건 좀 땡기네요. 그면 내가 현주씨 대신에 막내 작가 되는 거네요?
“완전 낙하산이죠. 어때요?”
“생각해볼게요. 작가님처럼 히트 쳐서 유명 남배우랑 스캔들도 나야지!”
“아~ 진짜 디스픽쳐 이 자식들!”
시인은 동원의 가슴에 얼굴을 기댔다.
동원이 시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잘 다녀와요. 작가님.”
“빨리 갔다 와서 바로 올게요.”
시인과 동원은 떨어질 수가 없어서 그 자리에서 계속 헤어짐을 미뤘다.
몇 번의 키스가 더 오가고 동원의 몸이 점점 더 뜨거워지자 시인이 도망치고 말았다.
그 날, 동원은 또 밤새 운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