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모습을 정후가 방 밖에서 지켜보며 한탄했다.
“누나까지…….”
“정후아! 보고만 있지 말고 오빠 좀 도와줘.”
“누나까지 왜 그래? 미쳤어? 쟤를 왜 형네 집에 두는데.”
“갈 곳이 없어서 그래.”
“그럼 차라리 본가에 데려가! 형 혼자 사는데 여자애를 데려다 놔?”
“그럴 사정이 있어. 일단 좀 도와줘봐.”
“그 사정이란 게 뭔데?”
정후 때문에 분위기가 차게 식었다. 단이만 이유를 모르고서 고개를 갸우뚱 거렸고 정협과 정은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였다.
정은과 정협이 단이의 방을 꾸미는 동안, 정후만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도대체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혼자 고민하고 있으려니 신나 있던 단이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열심히 일하는 두 사람을 두고 단이 혼자 앞에서 얼씬거리더니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새까만 눈동자가 뚱한 표정의 정후를 찬찬히 훑는데 둘 중 아무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참말로 똑같은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속내를 모르는 정후가 다짜고짜 물었다.
“너……이름이 단이라고?”
“네! 도련님.”
정후가 고까운 얼굴로 팔짱을 낀다. 삐딱하게, 재차 물었다.
“도련님이라고 부르지 말고. 우리 형이랑 어떻게 알게 된 거야?”
도련님과 꼭 같은 얼굴로 시비 거는 말투가 단이로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이는 입을 쭉 내밀고 중얼중얼 혼잣말만 늘어놓았다.
“성질이 괴팍한 게, 그 도련님이 아니긴 아닌가본데. 참말 이상하네.”
“우리 형이 답답할 정도로 착해서 여기 저기 당하며 살긴 하지만 말이지 나는 아니거든. 왜 호구 짓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겠는데. 말 좀 해보시지? 병원에서부터 네 뒤치다꺼리 하는 거 봤거든? 아니, 수납도 형이 했더라?”
“가만가만 듣고 있자니 속 베려서 못 쓰겠네요. 생긴 건 도련님 닮아 실팍하게 생겨서는 말하는 모양이 왜 그 모양입디까?”
“뭐어?”
단이가 퉁명스럽게 나오자 상대, 정후는 발끈하여 제가 처음 시비건 것도 잊고 열이 오르는 제 뒤통수를 붙잡는다. 단이는 가만 듣고만 있지 않았다. 아무 말도 안 하려고 했지만 기어이 한 소리 하고 만다.
“게다가 이리 예의 없는 놈이 나리의 아우라니.”
“노옴?”
대놓고 들으라며 하는 혼잣말을 정후가 못 들을 리가 없다. 둘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래요, 놈! 정협 나리 반이나 닮아 봐요!”
“너야말로! 도대체 형이랑 무슨 사인데 집에까지 들어와?”
“무슨 사이긴! 은혜과 책임이 오가는 사이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 그렇게 받은 목숨을 책임질 각오. 단이가 당당하게 되받아 소리쳤다. 정후는 주춤 한 걸음 물러났다. 기합이 터져 나오는 거실, 정후는 비틀거리다가 소파 끄트머리를 잡고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은혜? 책임? 맙소사. 너……몇 살이야?”
“열여덟 살인데요.”
“미성년자……. 너, 너 부모님 번호 불러!”
“부모님 안 계시는데.”
대답하는 단이의 표정이 아무렇지도 않아 외려 정후가 당황했다. 사과도 못 꺼내고 뻘쭘하게 재차 질문했다.
“그, 그럼 집은 어딘데!”
“더부살이하던 곳에서 나왔어요. 쫓겨난 건 아니고!”
“가출? 하, 이 형이 미쳤네. 가출 청소년한테 책임질 짓을 해? 차라리 호구가 났지.”
단이 방을 꾸미고 있는 정협을 향해 당장이라도 소리치고 싶은 것을 정후는 간신히 참았다. 말들은 차마 밖으로까지 못 나오고 입에 혼잣말로 중얼중얼 맴돌았다. 정후가 고개를 흔들다 단이를 향해 물었다.
“너 이름이 뭐라고?”
“단이.”
어째 처음에 비해선 누그러진 목소리였지만 단이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럼에도 꼬박꼬박 대답을 해주는 것은 그가 도련님과 생김새가 같기 때문이고 또 정협의 동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래, 너. 학교는 어딘데. 설마 학교도 안 가는 건 아니지?”
“학교? ……그런 거 모르는데요.”
“와. 미친……. 그래서 우리 집으로 데리고 오려는 거구만. 한정협, 뭐냐. 착한 호군 줄만 알았지 이런 범죄를……..”
“이봐요!”
그러나 단이는 정후의 위협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눈에 힘을 주고 정후를 노려봤다.
“정협 나리를 함부로 말하지 마시죠.”
정후는 제 눈앞의 여자애를 보며 말할 수 없는 혼란에 빠졌다.
이름은 단이. 가출 청소년에 학교도 안 다니고. 정협과 희생과 책임이 있는 관계이면서도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특별한 사이. 집으로 데리고 온다는 건 관계가 제법 진지하다는 말이 아닌가.
믿었던 형에 대한 실망을 어쩌지 못하고 정후는 소파에 푹 눌러앉아 제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버지보다도 믿고 따르던 든든한 형. 무슨 일이 있어도, 설사 범죄를 저지른다 해도 저만은 결코 저버리지 않을 거라 다짐했는데. 거기에 미성년자와의 불순한 관계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발랑 까진…….
‘아아아아하.’
깊고 깊은 한숨이 길고 느리게 흘러나왔다. 반면 단이는 어쩐지 힘들어하는 정후를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혼자 화냈다 혼자 저러니 이상도 하지.”
제게 더 따지지도 않고 혼자 저러니 조금 안쓰럽기도 한지라 단이가 옆에 매고 있던 가방에서 생수통을 꺼내 불쑥 내밀었다.
“뭣 땜시 그리 열이 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땐 냉수 한 사발이면 나아요.”
“뭐어?”
“나리께서 사준거니 감사한 마음으로 한 잔 자시고 열 좀 식혀요. 헌데 물을 사먹다니 참 이상도 하죠.”
“하아아아…….”
정후의 한숨은 그치지를 않았다.
‘누나는 아는 걸까.’
정은은 정협 못지않게 정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정도로 딱 부러지는 데가 있다. 아마 정협이 정말로 미성년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라면 가만 안 있을 게 뻔했다. 만약 정협이 사실을 다 말하고 책임지기로 했다면 아예 새언니 대접이라도 해주려는 건 아닌가하는 기함할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정협에게 대놓고 따지려고 했다. 그러나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며칠 만에 정협이 자신이 아예 모르는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아서 정후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몇날 며칠 병실 그 애 옆을 지키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처음에는 호기심과 질투였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진 않아도 형과 누나는 정후에게는 정신적인 부모나 마찬가지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은 아버지. 그럼에도 부모의 부재를 크게 느끼지 못한 건 두 사람 덕분이었다.
그런 정협이 여자애를 사근사근 챙겨주니, 처음에는 교통사고 관련자라도 되나 했다. 병실에서도 내내 옆에서 다정하게 말하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오지 못하도록 지키는데다가 교통사고도 아닌 것 같았다. 나중에는 사람들에게 동생이라며 하지도 않았던 거짓말을 했고 집까지 데려온 것이다.
정후는 이미 서운함과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거기에 청천벽력 같은 단이의 말. 정후는 앞이 깜깜하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가가 찌릿찌릿하고 배가 꾸르륵거리고 속이 꽉 막히고 더불어 제 형의 앞날까지도 꽉 막힌 것처럼 생각되었다.
“안 돼!”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이건 안 될 말이다. 정후는 결심했다. 결코 그 여자애를 형수라고 부르는 일만큼은 없어야 한다고! 사실은 그것이 정협이 경찰서에 가는 일보다도 더욱 큰 문제였다.
정후의 상태가 그런가하면, 단이는 설렘과 우울 사이에 있었다. 생전 처음으로 제 방이 생겼고 제 물건들이 생겼으며 다정한 나리와 언니가 챙겨주고 있으니 마음이 이토록 호화로운 적이 없었다. 정은에게는 아가씨라고 부르려했으나 정은이 극구 말려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 마음이 더욱 기뻐 가슴 안의 부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분명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된 것은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만큼 기쁜 일도 생겼으니 괜찮지 않나, 하고 단이는 꽤나 긍정적으로 생각했었다.
단이가 우울해진 이유는 순전히 정후 때문이었다. 저를 보고 눈에 핏발이 서서 따지고 드는데 그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아예 모르는 사람이 그러면 싱겁게 넘기면 되는 일이지만 정후는 정협의 친동생이었다. 심지어 도련님과 같은 얼굴로, 상냥하게 웃던 그 도련님의 얼굴로 무섭게 화를 내니 정후만 떠올리면 어깨가 축 늘어졌다.
“까짓 거, 흥. 정협 나리 가족이 아니었으면 아니, 도련님만 안 닮았어도 내가 대우 해줬을까봐.”
그 첫만남으로 단이는 이미 기대하는 게 없었다. 불편한 표정, 따지는 말투, 정협 나리의 험담까지 도무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물론 조선에서 제 왈패 같던 모습이야 잊은 지 오래였다.
“나 왔다!”
그래서 갑자기 정후가 나타났을 때에도 단이는 당황하지 않았다. 오히려 제 집인 양 바닥에 앉아서 정협이 준 그림책을 뒤적거리고 있었다. 지레 당황한 쪽은 정후였다.
‘어라.’
일부러 정협이 없는 때에 따지러 온 거였긴 하지만 어쩜 저렇게 뻔뻔하게 있나. 단이가 아는 척 하지도 않고 고개부터 돌리니 괜스레 속도 꼬였다. 나이 먹고 어린애랑 눈치 싸움을 벌이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 일인데 지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후는 바닥에 앉은 단이를 가만히 노려보다가, 화장실 다녀와서 쳐다보다가, 물 한 잔 마시고 바라보다가, 기어이 먼저 말을 걸었다.
“너 진짜 여기서 살 거야?”
“나리께서 여기서 살랬어요.”
“그래도 너네 집에 가야지. 키워주신 분 있다며?”
“……거긴 못 가요. 이제.”
“왜? 사고 쳐서? 차라리 그분들한테 허락받는 게 낫지 않나?”
“못 간다니까요!”
참다못한 단이가 빽 소리 질렀다.
“못 간다고요!”
정후를 노려보며 다시 한 번 외치는데 험상궂은 목소리와 달리 눈은 또 그렁그렁하다. 정후는 아차 속으로 진땀을 뺐다.
“아, 알았어. 말하기가 어려워서 그래? 형한테 같이 가달라고 해. 어쨌든 그분들한테 평생 말 안 할 수는 없을 거 아냐. 찾고 있을지도 모르고.”
정후는 금세 수법을 바꿨다. 강경하게 나가지 않고 부드럽게 살살 구슬리자 단이도 금세 표정이 누그러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