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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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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30
작성일 : 23-05-29 14:19     조회 : 213     추천 : 0     분량 : 1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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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가지 - 진실

 

  화원 문단속을 하고 밖으로 나서니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다. 한여름의 가운데. 얼마 전 낮이 가장 긴 하지를 지났으니 서서히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겠지. 오늘은 늦게 출근하는 날이라 내가 마지막 문단속을 했다. 주위가 약간씩 틀어지는 듯한 하루. 나뿐만 아니라 내 주변 사람들 역시 그러한 듯. 예슬이가 남자친구에 대한 불평을 반복하고, 다홈이가 택수에 대한 불평을 반복하고, 심지어 현무 맡기러 가서 어머님이 아버님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걸 듣고 있어야 했다. 누구나 완벽할 수는 없고 어떤 관계도 흠이 없진 않을 텐데 다들 자기 파트너가 그리 성에 차지 않는 걸까. 지금 내가 입이 열 개라도 불평을 늘어놓을 처지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들의 불만이 그저 호사를 부리는 것만 같다. 남편이 근처에 있을 때마다 그의 눈치를 보고,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가시방석에 앉은 듯 몸이 불편해진다.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최대한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려 노력한다. 내가 봐도 한심하다. 역시 죄 짓곤 못 사는 법이겠지.

  “어떻게 돼가고 있어?”

  다홈이가 연락을 해서 바로 다짜고짜 묻는다.

  “아가씨와 만나서 얘기했고 소이도 가게 근처에서 봤고.”

  “그리곤?”

  “소이가 현무 아빠한테 아무런 얘기 안 했대. 자기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면서 절대 발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어.”

  “흠, 일단 그렇게 두고 봐야지. 걔가 믿음이 가는 애야?”

  “아니, 그닥 별로.”

  “그렇다면 더 가까이 주시해야겠네.”

  그러고 싶지 않다, 고 해봤자 좋은 소리 듣지 못할 걸 알기에 잠자코 있었다.

  “네 시누이는?”

  “단단히 별렀더라고.”

  “너한테 심하게 대해?”

  “대놓고 욕을 하진 않는데 눈빛이나 태도가 어찌나 살벌하던지. 자기 오빠 힘들게 하면 날 아예 능지처참할 기세였어. 더 이상 봐주는 건 없을 거라며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겠다는 다짐까지 하게 시키더라고.”

  “그럼 네 시부모는 아직 모른다는 거네.”

  “어제 현무 데리러 갔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어. 알았다면 날 제대로 잡아 족쳤겠지.”

  “됐어, 됐어. 그 정도면. 일단 급한 불은 끈 듯하군.”

  “다홈아.”

  “응?”

  “나, 누가 뭐라지도 않는데 힘드네.”

  “힘들어?”

  “현무 아빠 얼굴은 눈도 마주치기 힘들고, 주변에선 다들 알면서도 모른 체 나를 주시하는 것만 같아. 마음이 힘드니까 밥을 먹어도 이게 쌀을 씹는지 모래알을 씹는지 모르겠어.”

  한숨 쉬는 소리가 건너편에서 전해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내가 큰 실수를 했어. 이렇게 어리숙한 애한테 어쩌자고.”

  “너 자꾸 나보고 어리숙하다 그런다.”

  “어리숙하잖아. 주변에서 조용한데 왜 지레 겁을 먹어 스트레스 받냐고. 그러다 너 스스로 일 다 망친다.”

  “그럴까?”

  “거짓말도 그렇고 범죄도 그렇고 우선은 본인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자신이 통제가 안 되는데 주변이 통제가 되겠어? 내가 제일 염려하는 건 너한테서 터질까봐 그래.”

  “내가 터지게 될까? 사실, 나, 잠도 잘 못 자겠고, 사람 만나는 것도 무섭고 그래.”

  “큰 일이다. 지금은 다른 티를 내면 안 돼. 이상하게 행동하면 바로 꼬리 잡히기 쉽상이라고.”

  “그게, 나, 사람이 무서워졌어.”

  “여은아. 그저 네 마음이 피하고만 싶겠지만 우선 지금은 조금만 참자. 눈치를 보다 상황이 잠잠하다 싶으면 그때 수를 내서 어디 가서 쉬다 오던가. 아니, 나한테 와서 며칠 지내다 가도 되고. 최선을 다해서 견뎌. 견디고 보는 거야.”

  “그래야겠지. 다른 방법이 없는 거잖아?”

  “지금은 그래.”

  다홈이라고 달리 뾰족한 수가 없겠지. 그래, 내가 지은 죗값을 톡톡히 받는 거다. 누구 핑계를 댈 것도 없고 다 내 잘못이다. 나 같은 시민이 많으면 이 사회는 얼마나 편해질까. 스스로 이렇게 벌을 잘 주는데 따로 형 집행할 필요가 없겠지.

  마트가 정면에 보이는 자리, 그 언덕에 올랐다. 건물 안에 들어가기 겁이 난다. 가끔은 마트에 들러 남편과 함께 현무를 데리러 가곤 했었는데, 오늘은 어서 현무 데려와서 씻기고 먹이고 그저 얼른 누워버리고만 싶다. 그럼 남편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되겠지. 한 며칠 지나면 가슴이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기를. 괜히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한 자리에 머무르기 힘들어 이리저리, 서성거리지 않아도 되기를.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그렇겠지? 만약 나아지지 않는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평생 이렇게 살라고? 아, 안 돼.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이 자리였어. 그를 처음 본 게. 저기, 저 너머에서 같은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지. 바로 저기. 어? 내가 머리가 혼란스러우니까 환영을 다 보네. 알아, 안다고. 저렇게 서서 고개가 마트가 있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어. 눈을 반복해서 깜빡였다. 환영이면 어서 사라지라고. 이러다 정신이 나가버리는 게 아닌지 겁이 나서 더욱 힘을 줘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대로였다. 내가, 다홈이 말대로, 머리 어디가 터져버린 게 아닌가 두려워진다.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라고. 발이 움직인다. 가까워지면 환영이 없어질까 싶어서.

  내 인기척에 고개가 나를 향한다. 환영이 아니었다. 정신이 나간 게 아니어서 안도감이 들면서, 그가 앞에 있어 불안했다. 이제 만나면 안 되는 사이인데. 누가 보기라도 하면 정말, 큰 일 나는데.

  “전화 연락이 안 되더군요.”

  희한하게 다른 사람 시선은 다 피하게 되는데 그의 시선만은 부담스럽지 않다. 같은 편에 서 있다는 동지의식이라도 드는 걸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지낼 거란 예상을 한 건 아니겠죠?”

  “물론 아닙니다. 걱정, 했어요. 많이 힘들어 할 거라 염려했죠. 괜찮아요?”

  그를 비난할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어쩌다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됐을 뿐. 하지만, 곤란한 입장에 처한 건 나고, 그에게는 어쩌면, 그저 불편한 일이 하나 더 늘어났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지나갈 위치에 불과할 수 있다. 결혼해서 애까지 달린 나와 싱글인 채 달린 식구가 없는 그가 동일한 입장은 아닐 테니까.

  “괜찮지 않아요. 잠도 제대로 못 자겠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

  “미안해요. 입장이 난처해져서.”

  “난처해진 정도가 아니라구요. 한 가정이 파탄날지도 몰라요.”

  “제가 뭔가 도울 일이라도 있다면…….”

  “아니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도와주시는 거예요. 최대한 멀리, 멀리, 떨어져 주세요.”

  고개를 숙이는 그. 그도 힘들겠지만 그런 그의 마음을 고려할 여유가 없다. 조금도 없다. 지금 내가 숨이 넘어갈 거 같은데 옆사람 숨 쉬는 것까지 챙기라고. 그나마 그는 나보다 더 좋은 산소통을 가진 듯한 상황이잖아. 챙김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나라고. 너무 쌀쌀한 말투였을까, 하는 미안함이 들어 일부러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 자주 오세요? 첫 만남도 여기였죠.”

  나를 봤다 앞을 보는 그의 시선. 거기에 우리 마트가 자리한다. 이게 은근히 마음 한구석을 영, 찜찜하게 만든다. 왜 그가 보는 시선 끝에 마트가 있는 거지? 그런 모습을 본 게 처음도 아니다.

  “여은 씨, 드릴 말씀이 있어요.”

  “말씀하세요.”

  “그 전에 확실히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여은 씨랑 함께 보냈던 시간들, 제게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시작은, ……, 사정이 어떻든, 순간순간이 너무 소중했습니다. 예상치 못했었죠. 제게 이런 인연이 생길 거라고. 누군가를 만난 것이 여은 씨가 처음은 아닌데,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습니다. 진심이었어요.”

  본론에 들어가기 전 앞말이 너무 길어지는 듯하지만 듣기 싫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가 하는 말이 달콤하게 들리니 나도 단단히 미치긴 미쳤다.

  “여은 씨. 그 시작이 말이죠.”

  “잠깐만요.”

  현무 아빠가 마트로 들어가는 모습을 봤다. 아무래도 소이는 믿음이 가지 않는다. 그이 귀에 소이의 말이 들어가는 순간, 이제껏 해왔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다. 마트를 향해 다가가는 내 뒤에서 정민 씨가 어떻게든 말을 이으려 한다.

  “그게 그러니까요.”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어요. 그만 가볼게요.”

  정민 씨가 뒤에서 계속 대화를 이어가려 하지만 그 말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요즘엔 내 주변에서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그 모든 걸 한꺼번에 감당하기 벅차다. 그러다 보니 우선순위를 정하게 된다. 일단 가장 급한 문제부터 먼저 처리하고 그 다음 순서, 그 다음, 그렇게 일처리를 하게 된다. 현재 최우선 순위는 소이와 시누이의 입막음을 하는 일이다. 그러면 다른 일들은 어떻게든 해결이 되겠지. 만에 하나 남편과 시댁에서 알게 된다면, 그럼 그 다음은 나도 모르겠다. 그건 정말 상상하기도 싫다.

  “이제 들어와요?”

  현무 아빠가 소이와 마주치기 전 어서 나섰다.

  “음, 왔어? 현무 데리러 갈 거지? 나랑 함께 가고 싶으면 잠깐만 기다리던가.”

  “응, 괜찮아. 나 신경 쓰지 말고 일해. 일이 중요하지 기다리는 거야 대수라고.”

  분주한 그 사람 곁에서 맴돌았다. 실없이 진열대에 놓인 물건을 들었다 놓기도 하고 있지도 않는 먼지를 털어댔다. 소이가 지나치며 인사를 건네기에 간단히 답하고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시퍼렇게 눈을 치켜뜨고 지켜보고 있으니 감히 그이 곁에 접근하진 못하겠지. 할 일 없이 진열대를 둘러보고 있자니 평소엔 이런 걸 팔았는지 생각지도 못했던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와사비맛 아몬드라고? 그걸 누가 먹어?

  “이제 갈까?”

  “그래, 가요.”

  웃고 싶은 마음이 추호도 없는데 웃으려니 그것도 쉽지 않다. 평소처럼 인사를 건네는 시부모님 앞에서 억지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고, 현무 아빠가 툭, 던지는 재미없는 농담에 재미있다고 반응하려니 힘이 든다. 집에 도착하자 아직 저녁 지을 준비를 시작도 안했는데 그저 자리에 누워버리고만 싶다. 나, 금방 화장실 좀, 그러곤 화장실로 들어와 변기 위에 쭈그리고 앉았다.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수 있을까? 내 너덜거리는 마음이 견디긴 할까? 힘들어도 지금은 다홈이 말처럼 버텨내는 거다. 어쩔 도리가 없다. 다 놓아버리면 끝이니까. 우리 현무는 어쩌라고.

  새벽녘까지 뒤척였다. 현무 아빠에게 잠들지 못하는 걸 들키지 않으려니 그것마저 힘들다. 그가 깨지 않게 조심스레 왼쪽으로 누웠다 오른쪽으로 돌아눕기를 반복한다. 살면서 잠들지 못해 힘들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잠을 못 자는 것이 이렇게 괴로울 줄이야. 하릴없이 눈감고 뒤척이길 반복하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주변이 밝아와 눈이 떠졌다. 깜빡, 잠들었구나. 얼마나 잤을까? 어? 현무 아빠가 왜 아직까지 자고 있지? 분명 남편이 옆에 있었다. 보통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새벽이 다 지나기 전 집을 나서는 사람인데 곁에 누워있다. 괜히 불안해진다. 내 마음이 편치 않으니 일상생활에서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른 면이 보이면 다들 내 잘못을 알고 있어 다르게 행동하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든다.

  “현무 아빠. 지금 몇 신줄 알아? ”

  조심스레 그를 깨우니 으음, 신음소리를 낸다. 어째 평소와 다른 모습이다. 얼굴이 살짝, 상기된 듯도 하다. 이마에 손바닥을 대본다.

  “어머, 당신 열나네.”

  “어, 그래? 어째 어제부터 으슬으슬, 하더라니. 감기 오려나 보다.”

  힘겹게 상체를 세우는 그를 말렸다.

  “그 모양으로 나가려고? 누워있어. 당신 하루 안 나간다고 가게가 안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나가야지. 죽을 병 걸린 것도 아니고.”

  “아휴, 이 사람. 마누라 말 정말 안 들어요. 차라리 하루 쉬고 나아져서 복귀하는 게 낫지 괜히 병 키우다 며칠 쉬면 더 손해라고. 누워있으라니까. 뜨끈하게 생강차랑 닭국물 준비해줄 테니까 그거 마시고 땀 푹 내면서 쉬라고.”

  오늘도 늦게 출근하는 날이라 아침에 여유가 있었다. 남편을 위한 음식을 준비하고 칭얼거리는 현무를 달래서 씻기고 옷을 갈아입힌다. 입술이 바싹 마른 채로 입맛이 없다고 투덜거리는 그를 재촉해 억지로 차와 국물을 마시게 했다.

  “당신 지금도 마트 생각하고 있지?”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있으니 더 생각나는데.”

  “그것도 병이다, 병. 내가 오늘 늦게 출근하는 날이거든. 그렇게 염려가 되면 나라도 나가보고 문제 있으면 당신한테 연락해줄 테니까 염려 그만하고 푹 쉬어. 이럴 땐 내 말 좀 들어, 들으라구.”

  영, 내켜하지 않는 그를 자리에 누이고 현무를 데리고 나왔다. 아이를 맡기고 마트로 들어서니 일한 지 꽤 된 양군이 이미 마트 문을 열어놓았다. 양동혁, 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남편과 나는 그를 양군이라 부른다.

  “사모님, 나오셨어요. 어째 사장님이 아직 출근 안 하셨네요.”

  “오늘 그이가 몸이 좋지 않네. 별일 없죠?”

  “네, 평소 같아요. 사장님 몸이 안 좋으세요? 많이 편찮으세요?”

  “아니, 심한 건 아니고. 감기 같아요. 하루 쉬면 괜찮을 거예요. 내가 뭐 도울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요. 특별히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장님 어서 쾌차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마트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아니고 내가 있다고 해서 별로 도움이 될 건 없었다. 그저 명목상 윗사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정도랄까. 대충 자리를 지키다 화원에 출근할 시간에 맞춰 나갈 계획이었다. 그녀가 안으로 들어서기 전까진. 정민 씨 회사 동료. 그 황금빛을 내뿜던 마녀. 저 도도함은 그 걷는 걸음새만으로 풀풀, 흘러넘친다. 어떻게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도도해 보이지? 타고난 게 분명하다. 나는 그녀를 아는데 그녀는 나를 알아볼까? 그녀와 마주할 땐 주로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때 모델하우스에서 잠시 얘기를 나눴을 때만 빼고. 항상 그녀를 주시했던 게 나였지 그녀 눈에는 난 들어오지도 않겠지. 양군이 그녀를 맞이한다. 둘이서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그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다가온다.

  “사모님. 마트와 관련해서 사장님을 뵙기로 약속을 했다는데 어쩌죠?”

  저 여자가 현무 아빠랑? 무슨 일로? 궁금한 마음을 감추며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요? 달리 들은 얘기가 없어서. 아무튼 내가 얘기해 볼게요.”

  그녀 앞에 서려니 은근히 주눅이 든다. 그와 동시에 지지 않겠다는 반발심도 올라와서 그 반발심을 더욱 부추기려 노력하며 일부러 다리에 힘을 주어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저희 남편이랑 만나기로 하셨어요?”

  “아, 사모님이시군요. 네, 사장님이랑 오전에 뵙기로 약속을 정했는데.”

  역시 날 알아보지 못한다.

  “죄송해서 어쩌죠? 그 사람 오늘 몸이 좋지 않아 못 나왔어요. 급한 일이세요? 저와 상의해도 될 일라면 제가 얘기 듣고 전하도록 할게요.”

  슬쩍, 망설이는 마음이 얼굴 위로 올라왔다 흩어진다. 내게 말을 꺼내도 될지 확신하지 못하는 듯하다. 그래도 내가 안주인인데 마트에 관해 몰라야 할 일이라도 있다는 건가. 궁금함이 더해지니 반발심이 주눅든 마음을 덮어버린다.

  “그이랑 저랑 모든 일을 함께 결정해요. 그 사람 단독으로 일을 벌인 적은 없거든요. 제가 모른 채로 진행될 일은 없을 거예요.”

  일부러 그녀의 시선을 맞받았다. 그녀 입술 주위로 올라오는 미소.

  “그러시겠죠. 다름 아니고 가게 이전에 관해서요.”

  가게 이전?

  “이건 정말 좋은 기회거든요. 사장님에게 예전에도 말씀드렸는데, 이 가게 때문에 전체 건물 재개발이 미뤄지다 보니 시가보다 훨씬 좋은 조건이 제시됐어요.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그런 제안을 받기 힘드실 거예요. 구입을 의뢰한 쪽에서 자꾸 재촉을 해서 이렇게 다시 찾아뵙게 되었는데, 그렇게 재촉을 한다는 건 진짜 좋은 신호에요. 절대 손해 보실 일 없으세요.”

  예전에도? 그 뒷말엔 별로 관심이 가지 않는다. 이미 현무 아빠가 알고 있었다고? 왜 나한텐 아무 상의를 하지 않았지? 가게를 옮길 가능성을 열어놓긴 해서 정민 씨 통해 다른 자리를 알아보기도 했었지만 이렇게 좋은 제안을 받은 사실은 몰랐다.

  “실은 여기 마트 말고도 이 건물 안 여러 상가 이전을 저희 회사가 도맡아서 처리해왔거든요. 회사 전 직원이 나서서 성심껏 도와드리려고 노력 중입니다. 어떻게든 신속하고 편리하게 이전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꼭 부탁드립니다.”

  미사여구를 더해 자기 회사를 선전하고 있지만 이 회사 아주 안달이 났구나, 하는 냉소가 가슴에 더해질 뿐이다. 물건을 팔려는 장사꾼에 쉽게 넘어가지 말라는 건 세상 만고의 이치다. 회사 전 직원이라고? 참, 나. 어디 우리 마트만 당신들 고객이겠어. 은근히 머리 한구석이 켕긴다. 이 기분 나쁜 찜찜함은 뭐지? 잠시만. 전 직원? 정민 씨도 거기 직원이잖아. 그럼 정민 씨도 알아? 머리부터 싸한, 기운이 풍겨오더니 가슴 전체로 퍼져나간다. 이어서 그를 처음 봤던 밤, 부터 시작해서 반복해서 그 자리에 서 있던 그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간다. 그랬었어? 결국 그거였어? 내게 접근했던 게 그 이유 때문이야? 이런 머저리!

  “사모님, 아주 괜찮은 부지가 있어요. 여기 보시면…….”

  그녀가 손가방에서 몇 가지 팸플릿을 꺼내려 하는 걸 무시했다.

  “제가, 약속이 있는 걸 깜빡했네요. 오셨다고 남편한테 전할게요. 꼭 연락드리라고 할게요.”

  “아니, 저기…….”

  양군에게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나섰다. 박정민, 너 겨우 그런 인간이었어? 뭐 어째? 순간순간이 소중했다고?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고? 너무 억울해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물건 팔려는 장사치가 못할 말은 없다. 다홈이 말이 모두 맞다. 이런 어리숙한 애한테 불을 쥐어주니 아주 제대로 화상을 입어버린 거다.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 그가 일하는 곳이 이렇게 멀지 않았는데. 내 마음이 급해서 그렇다. 한시라도 빨리 그와 대면해서 물어보고 싶었다. 아니, 제대로 된 대답을 듣지 못한다면 물어뜯기라도 할 거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배신감에 치가 떨린다. 그에 뒤따르는 분노가 감당이 되지 않는다. 이러다 머리가 터져버릴지도.

  “어서 오세요. 쥬얼 랜드 앤드 빌딩 컨설팅,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건네는 인사는 받을 생각도 없이 바로 정민 씨를 찾았다.

  “박정민 씨 계세요?”

  “아, 약속 잡고 오셨어요?”

  “아니요. 약속을 잡진 않았는데 급한 일이라 그래요. 빨리 뵈었으면 하는데요.”

  “그러세요? 어떤 일로 만나시려는지?”

  안달이 나고 가슴이 타는 내게 계속 질문을 던진다. 아무래도 사업 때문이라고 하는 게 나을 듯해 마트 가계약 건이라고 넌지시 알리니 신속히 전화기를 든다.

  “여, 은, 씨?”

  이렇게 회사 안까지 들어와 자신을 찾는 내가 새삼스러울 거다.

  “급히 나눌 얘기가 있어서요.”

  “마트 계약과 관련된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좀 그렇네요.”

  “지금 방문하신 손님이 꽤 많아서요. 어디 빈 사무실이 있을지 확인해야겠네요.”

  “그럼 잠깐 밖으로 나가죠.”

  냉랭하게 흘러나오는 내 말투에 그가 적잖이 당황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얼굴, 더 붉어지게 만들어 주겠어.

  “상황이 더 안 좋아졌어요?”

  뒤따라 나오며 조심스레 묻는 그를 향해 홱, 고개를 돌렸다.

  “당신, 뭐야? 그저 그런 장사치였어?”

  그의 눈은 휘둥그레지고, 입은 반쯤 벌어진다.

  “여은 씨, 갑자기 왜 그런?”

  “우리 마트 어떻게든 접게 하려고 나한테 접근했냐고?!”

  그렇겠지. 가슴에 찔리니 그리 얼굴이 붉어지고 당황해서 말이 나오질 않겠지. 버러지 같아, 당신.

  “그게 말이죠, 사실 어제 제대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나한테 그랬잖아!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큰 의미를 지녔다고. 순간이 너무 소중했다고. 그거 다 지어낸 거였어? 지어낸 거였냐고?!”

  저절로 커지는 목소리. 지나가는 행인들이 힐끔, 거리며 쳐다본다. 위에서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다 상관없다. 지금은 속에서 치미는 걸 쏟아내어 어떻게든 끓어오르는 머리를 식힐 수만 있으면 좋겠다. 그렇지 못하면 바로 넘어가버릴 정도다.

  “여은 씨, 잠시만요. 잠시만 진정하고 내 말 들어봐요.”

  일찌감치 진정할 수위는 넘어섰다. 손이 뻗어나가 그의 가슴팍을 밀어낸다.

  “나한테 그랬잖아. 진심이었다고. 진심, 이라며.”

  눈가가 축축하다. 또륵,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진심은, 저 가슴 안쪽에서 흘러나와서 다시 집어넣으려 노력해도 집어넣지 못하는 거잖아. 억지로 뽑아내는 게 아니잖아. 정민 씨 마음이 진심이었다고? 그거 다 거짓말이잖아. 마트 때문에 나한테 접근했잖아. 그래놓고, 소중했다고? 큰 의미라고? 의미는 무슨 개뿔!”

  밀어냈다가 때렸다가 잡고 흔들기를 반복했다. 이제 멈춰 서서 쳐다보는 행인도 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겠지. 아님 좋은 구경거리 생겼다고 즐기는 걸지도. 그가 자신을 때리는 나를 말리지 못하고 맞고만 있다. 입이 있으면 변명을 해보라고. 어디 그 잘난 변명거리 들어보자고. 예상치 못하게, 귀를 울리는 고함소리는 앞에서가 아니라 뒤에서 튀어나왔다.

  “야아아!”

  가슴이 서늘해지게 만드는 외침. 분명 나를 향한 거란 걸 알 수 있었다. 놀라서 소리가 나는 쪽을 보니 눈이 마주친다. 그 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빠르게 다가오는 아가씨. 그 시선에서 불꽃이 튄다. 분명 눈에서 일렁였다. 그렇게 선명하게 번쩍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꼭대기에서부터 가슴께까지 온통 젖어있었다. 흥분해서 떨리는 손에 쥐어진 물병. 본인이 마시려고 들고 있었던 것일까. 눈 안에 비집고 들어오는 물기에 쓰라려 눈꺼풀을 깜빡이며 손등으로 훔친다. 생각이고 뭐고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아가씨 손에서 물병이 떨어진다. 바로 전해지는 머리카락의 움직임. 아가씨 양손에 단단히 쥐어진 채 당겨지는 힘에 앞으로 맥없이 거꾸러졌다.

  “내가 그랬지! 가만히 보고 있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잖아! 해놓고 또 이래. 이 염병할 년아!”

  이건 설명이고 변명이고 전혀 일말의 겨를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끌리는 대로 끌려다녔다. 마음이 채비를 갖출 짬이 없으니 몸은 그저 잡아당겨지는 방향으로 반항 한 번 못해보고 내동댕이쳐진다. 보다 못한 정민 씨가 말리려 끼어들자 더욱 새된 소리가 새어나온다.

  “어, 너 잘 만났다. 네놈이지! 네가 멀쩡한 남편에 애까지 있는 여자 꼬여낸 그놈이지!”

  빙글빙글, 돌아가는 머리가 겨우 진정되고 주변 풍경이 또렷해지면서 정민 씨에게 살벌하게 달려드는 아가씨가 눈에 들어온다. 일방적인 몸싸움이었다. 말리려는 사람과 죽일 듯한 기세로 덤벼드는 사람이 붙으니 상대가 될 리 없었다. 할퀸 자국이 정민 씨 목덜미 위로 보이고 팔꿈치 한쪽이 뜯겨져 나간다. 저거 비싼 건데 어떡해.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염려가 든다.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는지 정민 씨가 주먹을 움켜쥔 팔을 든다. 설마, 아가씨를 한 대 치려는 건가? 그걸 상상하니 머리가 아찔, 했다. 그 이후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쏜살같이 펼쳐진다. 다쳐서 피를 흘리는 아가씨와 상해사건에 휘말리는 정민 씨. 그건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정말이지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거다. 어떻게 그리 빨리 다가갔는지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빠르게 움직였다. 정민 씨가 들어올린 팔에 매달린 내가 숫제 울부짖는다.

  “안 돼요, 정민 씨. 안 돼에에!”

  내 속에서 터져나오는 울음이 아가씨를 향해 주먹을 든 정민 씨를 말리기 위한 건지, 내게 일어나는 상황에 속이 상해 터져나오는 건지, 아님 그저 다 포기해버리고 싶다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에 북받친 건지, 확실치 않다. 모두 다 해당되는 건지도. 눈이 눈물에 젖으니 아예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랬다. 이 순간만큼은 그게 너무 좋았다.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이리 좋을 줄이야. 그렇겠지. 사람이 정신줄 놓는다는 게 이런 게 아닐까. 놓아버리면, 그렇게 되면, 머리가 정지해버리니까. 더 이상 혼란스럽지도, 걱정에 휩싸이지도, 힘겹게 마음을 추스릴 필요도 없으니까. 그래, 계속 흘러내려라. 눈을 제대로 뜰 수 없게. 앞이 보이지 않게. 이 추한 내 모습을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아도 되도록. 흘러버려라. 끊임없이.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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