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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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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28
작성일 : 23-05-25 14:05     조회 : 206     추천 : 0     분량 : 12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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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까치밥나무 - 숨겨진 사랑

 

  한여름 한가운데 있다. 그냥 걷기만 해도 푹푹, 쪄오르는 열기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지나치는 행인들이 가까이 곁을 스쳐가는 것만으로 짜증이 더해진다. 그들의 체온이 이글거리는 더위에 한겹 덧칠해지는 만큼 땀이 더 솟아올라 입고 있는 옷을 적신다. 이럴 땐 차라리 집에 눌러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최고지만 한 달에 한 번 있는 모임을 취소하기도 그렇다. 다홈이를 만나면 꼭 전할 말도 있고. 이번엔 마음을 단단히 고쳐먹었다. 다홈이가 아니면 이런 얘기를 꺼낼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다홈이라면 들어줄 거다. 괜찮겠지? 정말, 괜찮을까?

  다다리리라라.

  “아휴, 깜짝이야.”

  그렇게 익숙한 벨소리인데 갑작스레 울려퍼져 사람을 이렇게 놀라게도 한다. 어, 아가씨 번호잖아? 남편의 여동생인 미자 아가씨와는 그나마 시댁 가족 중 가장 편하게 대하는 사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마음을 열지는 못한다. 그녀가 듣는 말이 언제든 곧이곧대로 시부모님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기에 머리 한쪽에 붉은 경고등이 켜진 채 대화를 나누게 된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어쩐 일이에요?”

  “언니, 잘 지내시죠? 지금 통화 괜찮아요? 주변이 시끌시끌하네요. 어디 가는 길이에요?”

  “저 한 달에 한 번씩 다홈이 만나잖아요. 그게 오늘이에요.”

  “아, 다홈이 언니. 그 언니는 어떻게 지내세요? 왜, 지난 번에 이혼 절차 밟는다고 했었죠?”

  지나가듯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걸 잘도 기억하고 있다. 하기야 남 잘 되는 일보다 못 되는 일이 더 기억에 남는 법이지.

  “확정됐어요. 전남편이랑 아주 제대로 끝장을 냈죠. 확정받던 날 같이 가줬는데 난리도 아니었어요.”

  “점 하나 찍어서 님에서 남 된다고, 그렇게 좋았던 사이도 갈라서면 모르는 사이보다도 더 못해진다잖아요. 안 됐다, 다홈이 언니.”

  “아가씬 별일 없구요? 요즘 많이 더워서 고생이죠?”

  “아니 요새 왜 이렇게 더워요? 해가 바뀔 때마다 기온이 더 오르는 거 같네요.”

  “환경오염이다 지구 온난화다 말이 많잖아요. 갈수록 심해질 거라네요.”

  “안 그래도 이미 더워 못 견디겠는데 여기서 더 더워지면 어째요.”

  한동안 이런저런,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 미자 아가씨가 전화를 건 용건을 꺼낸다.

  “언니, 혹시 주위에 잘 아는 복덕방 없어요?”

  “복덕방이요? 아, 아가씨 마음 정했어요?”

  세를 얻어 학교 앞 분식집을 운영하는 아가씨가 옮기고 싶다고 언급한 기억이 난다.

  “지금 있는 곳보다 넓은 데로 옮겨야지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그게 막상 실천하기가 쉽지 않잖아요. 자꾸 미루기만 하다간 영영, 눌러앉을 거 같아 이참에 저질러볼까 하고요.”

  “어머님한테 물어보셨어요? 잘 아시는 데 있지 않을까요.”

  “에휴, 엄마한테 물어볼 거면 언니한테 말 꺼내지도 않았죠. 이래라저래라 하도 잔소리가 심하니까 일단 내 선에서 알아서 마무리 지어놓고 알리려고요.”

  “본인한테 상의 한 마디 없이 아가씨 혼자서 다 결정했다고 어머님이 서운해하실 텐데.”

  “차라리 그 서운함을 견디는 게 낫지 옮기는 일 시작하기도 전에 잔소리 듣다간 다 포기해버리고 싶어질지도 몰라서요.”

  복덕방이라.

  “아가씨, 그럼 제가 있다 집에 돌아가서 알아보고 연락드릴게요.”

  “어디 괜찮은 데 있어요? 부탁할게요. 이왕이면 아는 곳이 좋죠. 이상한 데 잘못 걸렸다가 복비만 날리고 몇 개월씩 허송세월했다는 얘기도 들어봐서요.”

  띠링. 그렇게 전화 통화를 마쳤다. 정민 씨 회사 팸플릿을 어디 넣어뒀더라. 이거야말로 지인인 나로 인해 그가 이득을 보는 거잖아. 물론 정민 씨 본인이 아니라 그의 회사가 이득을 보게 되겠지만 자기가 다니는 회사가 잘 되면 본인한테도 좋은 거 아니겠어. 지인이라. 어째 풍기는 단어의 이미지가 낯설다. 인터넷을 통해 뜻을 찾아보니 잘 아는 사람, 이란다. 잘 아는 사람. 그가 나를 얼마나 잘 알지? 나는 또 얼마나 그를 잘 알고? 이제부터라도 그에 대해 공부해봐야겠다. 공부라. 사람에 대해 알아가는 것도 공부라고 할 수 있으려나. 뭐든지 배우는 걸 공부라고 하니까 그것도 범주에 들겠지. 정민 씨를 배워가는 거잖아.

  “야, 너 얼굴 광나가는 거 봐.”

  “보자마자 시비야?”

  “그게 어떻게 시비야. 시비가 아니라 감탄하는 거잖아.”

  사람이 연애를 하면 빛이 난다고 했다. 정말 다홈이 주위에서 행복한 분위기가 술술, 풍겨나온다. 어쩜, 우리 나이에도 저럴 수가 있는 거지. 말이즉슨 만국공통, 전연령 해당 사항이란 거네.

  “좋냐, 좋아?”

  “이거 봐. 말은 감탄사인데 말투는 시비 거는 거 맞잖아.”

  “시비 아니라니까.”

  배시시, 웃는다. 어쩜 저렇게 웃는지. 이렇게 가끔 사람 의아하게 만든다. 내가 아는 이다홈이라는 인물은 지금까지 내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던 이미지가 다가 아니었다. 이런 이다홈이라고만 믿고 있었는데 불쑥, 저런 이다홈이 처음 뵙겠습니다, 인사하듯 머리를 들이민다. 그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도 그 사람을 완전히 알지 못하는데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오죽하랴. 궁금해진다. 내가 아는 박정민은 그 박정민이 맞을까.

  “좋긴 하네. 덜 외롭고 의지가 된달까.”

  “잘해라. 택수 같은 사람 드물어.”

  “나보다 걔가 잘 해야지. 완전 횡재한 거잖아.”

  맹랑한 소리를 하길래 눈을 흘겼지만 기분 좋은 미소가 절로 흘러나온다. 다홈이가 행복해하는 모습에 내 가슴이 다 따뜻해진다.

  “어련하시겠어. 택수 안 됐다. 여왕마마 모시고 사려면 허리가 남아나질 않을 텐데.”

  “나한테 대시하기 전에 그런 각오는 충분히 했어야지.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잖아.”

  하하하.

  크크크.

  동시에 터지는 우리 둘의 웃음소리에 주위 사람들이 쳐다본다. 그 시선을 의식해 소리 줄이라고 다홈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댔다.

  “야, 사람들이 쳐다보잖아. 우릴 완전 이상한 사람 취급하겠다.”

  “뭐, 어때. 가끔 미쳐보는 것도 괜찮잖아. 항상 정상적으로만 살려고 하면 그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가 더 돌아버릴걸.”

  가슴에 담아뒀던 말을 꺼내려니 절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허리가 곧추 세워진다.

  “그으런가? 가끔씩 미쳐야 정신건강에 좋다는 말이네.”

  “왜, 미칠 일이라도 생겼어?”

  눈길이 다홈이 얼굴로 향하니 나를 빤히 쳐다본다. 그 시선에 고개가 아래로 숙여졌다.

  “어, 어, 어.”

  “응?”

  “너, 방금 그 태도 뭐야?”

  “뭐가?”

  “그거, 그 다소곳한 자세. 네가 내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건…….”

  “기집애, 눈치 백단인 건 여전하네.”

  “어머, 야아.”

  찰싹.

  “아얏!”

  내 팔뚝을 사정없이 내리친다. 매섭게 맞은 자국이 쓰라려 문질러댔다.

  “야, 아프잖아!”

  “무슨 짓 한 건데? 이것이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오른다더니 그새 사고를 치셨네. 앙큼하게 이 언니한테는 상의 한마디 없이.”

  “상의하고 벌일 일이면 그게 어디 사고니? 예기치 못하게 그렇게, ……, 된 거지.”

  “거두절미하고, 그 복덕방 직원이야?”

  “복덕방 직원이라니 어째 듣기 그렇다. 부동산 중개 전문가라고 하는 게 듣기에도 좋잖아.”

  “어쩜, 어쩜. 역시 그랬군.”

  “역시라니?”

  “너, 그 사람 볼 때마다 눈이 하트 모양으로 변하더라고.”

  “내가 언제!”

  다행이다. 걱정했었는데 대화가 편하게 흘러간다. 다홈이는 들어줄 거라 믿었고 그러길 바랐다. 내겐 마지막 보루 같은 존재니까.

  “자 이왕 말 나왔으니 언니한테 다 털어놔 봐.”

  “아아, 그러니까 말이지.”

  “이제 와서 주저하는 건 아니지? 새삼 부끄러워졌어?”

  “아니, 그게 아니라,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네.”

  “아예, 처음부터 자세하게 나열하시지.”

  물론 모든 걸 시시콜콜하게 다 펼쳐보이긴 그랬다. 나도 염치가 있지. 뺄건 빼고 넣을 건 넣어서 대략 서사를 뭉뚱그렸다.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내려놓고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짓는 다홈이.

  “그래서였던가?”

  “그래서, 라니?”

  “요즘에 네가 어딘가 달라보였어.”

  “어떻게?”

  “그게 설명하기 쉽진 않은데. 왜 꽃이 제대로 물이 올랐다고 할까. 피긴 피었는데 만개하진 않았던 봉우리가 활짝 열렸다, 라고 하면 말이 되려나.”

  예슬이도 비슷한 얘길 했었는데. 내가 달라보이긴 하나.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다고 구체적으로 말을 해주면 좋으련만.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은 눈곱만치도 변한 게 없는데. 아님 풍기는 분위기가 달라졌나? 그런 변화를 스스로 알아채긴 어렵겠지. 슬쩍, 대화 주제를 다홈이를 향해 돌렸다.

  “넌 어때?”

  “어떻다니?”

  “택수랑 어디까지 갔어?”

  “어휴, 애 그렇게 안 봤더니 완전 속이 시커멓게 변했네. 애 키우는 아줌마라서 그렇게 된 거야?”

  “어쭈, 대한민국 아줌마를 너무 편견을 갖고 보는데. 그걸 아줌마라서 궁금해하는 게 아니잖아. 누구라도 그렇게 묻는 게 당연할걸. 속이 시커멓긴. 알건 다 아는 우리 사이에.”

  “으흐흐흐.”

  그제야 의뭉스럽게 웃어댄다.

  “내 그럴 줄 알았지. 아주 깨소금이 쏟아지는구나.”

  “우리가 세상 물정 모르는 갓 결혼한 신혼부부도 아닌데. 네 말처럼 알건 다 아는 사이고 새로울 게 없지.”

  “그래도 좋지?”

  또 웃는다. 아주 좋아 죽는구나.

  “새로운 건 없는 대신 서로 너무 잘 알아서 완전 편해. 어디를 어떻게 맞춰줘야 하는지 고민할 필요도 없고.”

  “네 나이도 있고 돌아온 싱글인 걸 감안하면 그저 감지덕지, 감사하면서 택수 모시고 살아야 돼. 분수를 알아야지.”

  “택수가 날 받들어야 한다니까. 너는 친구가 돼서 어째 내 편을 들 생각은 안 하냐.”

  “이것이 끝까지 우기네. 현실을 직시하라고.”

  “아니라니까.”

  다홈이가 많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한 번 실패해봤으니까. 이번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너어, 얼마나 진심인 거야?”

  다홈이가 앞에 놓인 음료를 한 모금 머금고 그렇게 물으며 내 안색을 살핀다. 저거 완전 엄마 표정인데. 이제 와서 나한테 엄마 노릇 하려고?

  “진심이라니?”

  “그 복덕방, 아니 부동산 중개 전문가한테 어느 정도 마음을 준 건가 궁금해서.”

  “날 마구 몰아대던 사람이 너였잖아. 불 질러 놓고 그 기세가 너무 세질까봐 지금에야 걱정하는 거야?”

  “불장난이, ……, 재밌으니까 하는 건 맞는데, ……, 화재가 돼버리면 더 이상 재밌을 수가 없지.”

  옳고 그름이, 맞고 틀리고가, 여기인지 저기인지를 대번에 알 수 있다면 사는 게 얼마나 편할까.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흔하고, 이런 모습의 내가 존재했었나, 종종, 놀라기도 한다.

  “사실 좀 무서운 게 있어.”

  “어떤 게?”

  “화재를 진압하고 나서 불에 그을린 자리에 되돌아왔을 때, 화재가 나기 전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토독. 건너편에 마주앉은 친구가 검지와 중지로 탁자 위를 가볍게 두드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온다. 한쪽 방향으로 약간 고개를 숙인 듯도 하고.

  “너, 그거 알아?”

  “어떤 거?”

  “은근히 날 생각하게 만들어. 이것저것.”

  “그래서 억울해?”

  “세상 단순하게 살고 싶은 사람 자꾸 머리 쓰게 만드니 덕분에 에너지 소모가 많아지긴 해.”

  “머리를 자주 써야 치매 예방된대.”

  “말이나 못하면…….”

  “틀린 말 아니잖아. 말은 마음의 양식이야.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니까.”

  같이 웃는 타이밍. 내가 속으로 얼마나 안도하고 있는지 다홈이가 알기는 할까. 다홈이가 아니면 이 이야기를 꺼낼 사람이 없다. 가슴에 담고 있는 걸 꺼내놓기만 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설령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하더라도 그저 내 말을 뱉어낼 수 있다는 그 자체로.

  딩딩디디디디딩딩.

  다홈이 성격만큼이나 화끈하게 울리는 벨소리. 다홈이가 응답하기 위해 화면을 누르기 전 내 눈치를 살핀다.

  “안 받아? 누구 전환데?”

  “택수.”

  대놓고 얘기해서 다홈이가 택수와 사귀는 걸 마음에 걸려 할 이유가 없다. 싱글인 선남선녀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한다는데 흠이 될 게 없지.

  “괜찮아. 받아. 나는 왜 신경 쓰고 그래?”

  “차라리 네가 택수를 아예 모른다면 내 마음이 편할 거야. 괜히 택수 때문에 네가 불편해할까 그렇지.”

  “불편하긴 우리 사이에. 끊기겠다. 얼른 받아.”

  통화하는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아무래도 내가 앞에 있어 불편한 듯. 그럴 필요 없다 해도 그 마음을 어쩌지 못하나 보다. 사람 마음이 그렇지. 머리로는 아니라고 해도 따라주질 않으면 소용이 없다. 그나마 통화하는 사이 간간이 미소를 짓는다. 좋겠지. 아무렴. 어? 슬금슬금, 올라오는 이 감정은 뭐지? 가장 친한 친구가 좋아하는 모습에도 부러워하게 되나? 아니야. 이건 질투심이 아니다. 다홈이가 행복해하는 게 보기 좋다고. 그걸 질투할 생각은 전혀 없는데. 다홈이가 행복하지 않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나도 그렇게 미소를 짓고 싶은 거다. 우리 함께 행복하면 더 좋은 거잖아. 택수와 다홈이처럼, 나와, ……,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다홈이에게 몸짓으로 신호를 주고 화장실로 향했다. 변기 위에 주저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한동안 그렇게 그의 전화번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그 번호를 누르지는 못했다. 우린 택수와 다홈이가 아니니까. 싱글인 선남선녀 두 사람이 좋아하는 게 아니니까. 아, 맞다. 아가씨. 그래, 내가 그 사람 회사에 새 고객을 소개시켜줬다고 하면 그도 좋아하겠지. 그렇게 그의 회사 연락처와 함께 아가씨에게 문자를 보내고 나오니 다홈이가 이미 통화를 마치고 혼자 생각에 빠져있다. 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드는 얼굴이 어째 통화 전보다 더 불편해 보인다. 왜지?

  “택수랑 잘 통화했어?”

  “어어.”

  “너 대답하는 모양새가 어쩐지 탐탁지 않다.”

  입술이 한쪽으로 돌아간다. 잘근, 거리며 아랫입술을 씹더니 어렵게 말을 뱉어낸다.

  “택수가 보자는데.”

  “그래? 나 택수 본 지도 한참 됐잖아. 같이 만날까?”

  “나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준비라니?”

  “너랑 택수랑 한 자리에서 만나는 거.”

  “이야. 너 정말로 내가 마음에 걸리는구나.”

  “차라리 네가 택수랑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면 좋겠다. 그럼 허심탄회하게 너네 둘 소개시켜줬을 거야. 남녀 사이라는 게 한치 앞도 모르잖아. 이러다 내가 택수와 깨지면 어쩌나 자꾸 걱정이 들어.”

  “벌써부터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사람 일이라는 게 그러니까. 내가 겪은 경험도 있고 해서.”

  다홈이가 이렇다. 일처리가 시원시원하고 털털한 성격이면서도 주변 사람 챙길 때는 한없이 자상해져서 자잘한 거 하나까지 챙기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내가 그만큼 다홈이를 좋아하는 거고. 찜찜해하는 다홈이를 더 이상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 나는 괜찮다며 얼른 가서 택수를 만나라며 재촉했다. 본인이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해서 내가 가지 않기로 했는데 또 그걸 미안해 한다. 다홈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됐지? 이렇게 해도 미안해하고 저렇게 해도 미안해한다. 결국 어떻게 해도 미안해 한다는 거잖아. 사람이 사람을 좋아해서 만나는 게 미안해할 일이 아닐 텐데.

  친구를 보내놓고 되돌아오는 길이 약간, 허전하다. 아무래도 자주 있는 만남이 아니니까 마무리 할 때면 항상 아쉽다. 그럼, 다음 달에 봐, 라고 인사를 전하면, 한 달이라는 기간이 무척 멀리 있듯 전해진다. 그게 자주 못 봐서 더 아쉬운 거라는 걸 알지만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게다가 다홈이가 택수를 만나러 가는 모습이 자꾸 겹쳐지며 더욱 감정이 짙어진다. 혼자 있기 싫다. 오늘 밤은 더욱 그런 기분이 든다. 달이 밝아서 그런가? 거의 보름달이 다 된 둥그스런 모양새. 퍼뜩, 여기가 어디지?, 생각을 추스리니 그의 회사 근처다. 이것도 병이다. 무의식적으로 발이 움직여 여기까지 오다니. 아, 이럴 마음은 아니었는데. 예상보다 다홈이와 일찍 헤어졌고 시간이 좀 남았다. 이 소중한 하루를 한 순간도 낭비하고 싶지 않다, 고 하면 핑계일까?

  휴대폰을 꺼내 손에 쥐었다. 다시 한참을 번호만 바라본다. 다홈이는 나 같진 않겠지. 전화를 걸고 싶을 때 걸고 만나고 싶을 때 만나겠지. 그게 얼마나 좋을까? 나이를 먹어갈수록 눈치를 보지 않고 살고 싶었다. 부모 없는 아이라고 눈치를 보는 게 싫었고, 가난하다고 눈치를 보는 게 싫었고, 살 집을 잃게 될까봐, 먹을 음식을 살 돈이 없어 굶게 될까 눈치를 봐야 하는 게 싫었다. 언제, 어떤 자리에서도 항상 마음 한 켠에서 주변을 살피기 위해 열심히 껌벅거리고 있는 눈동자를 감기게 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나 같은 사람에겐 그게 숙명이라는 거겠지. 타고 나서 바꿀 수가 없는 것. 동양인으로 태어나서 서양인이 되기 위해 피부를 깎아내도 서양인이 될 수는 없는 거잖아. 난 마이클 잭슨의 변해버린 얼굴이 보기 싫었다. 그렇지만, 그가 어떤 마음으로 그 피부를 벗겨내는 시술을 받았을지는 조금은, 이해가 됐다. 이렇게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감정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번호를 누르고 다섯 번쯤 울리자 그가 응답한다.

  “여은 씨? 늦은 시간에 어쩐 일이에요?”

  “혹시 제가 방해된 건 아니에요? 통화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마침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서 아직 회사에요.”

  아, 그러고 보니 그가 퇴근했을 수도 있을 시각이었다. 이렇게 생각이 없다니. 아무 생각없이 회사 앞까지 와버렸다. 그가 없을 수도 있었는데. 아님 그가 아직 회사에 남아있었다는 걸 운명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고작 그걸로 운명이라니.

  “바쁘시면 굳이 방해하고 싶진 않아요.”

  “급한 일은 아니구요. 지금 어디신데요?”

  막상 그의 회사 앞이라고 하려니 주저된다. 꼭 내가 스토커라도 된 거 같잖아. 일부러 건물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근처를 지나다 정민 씨 회사 간판이 보이길래 그냥 생각이 나서 전화해봤어요. 아직까지 회사에 계실 줄 몰랐네요.”

  “그러게요. 저도 시간이 이렇게나 흘렀는지 모르고 있었어요. 금방 나갈게요.”

  걸어가다 멈췄다. 그저 멀찍이 물러나 있을 심산으로 나아가다 보니 걸음이 어색했다. 이 정도면 적당할까?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게 보이는 그의 회사 간판. 사무실은 일층, 새로운 건물을 의뢰받을 때마다 전시가 바뀌는 모델하우스는 이층. 이번엔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여은 씨.”

  그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되돌아가는 걸음, 한 발짝마다 힘이 들어간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그게 제일 어렵다. 너무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적당한, 속도를 유지하는 것.

  “죄송해요. 이렇게 미리 약속도 없이 불쑥 나타나서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거 갑작스러운 방문이 기대치 않은 선물 같은데요.”

  처음엔 짓궂게만 보이던 미소에 조금씩 적응이 된다. 그가 짓는 모양새에 익숙해지고 있다.

  “선물이라니 부담이 되네요.”

  “부담까지야.”

  “선물받을 때처럼 즐겁게 해드릴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의 눈 안에서 주변 불빛이 반사되어 빛난다.

  “노력하면 못할 일이 없다죠.”

  그가 예상보다 가깝게 다가선다.

  “흠, 흐음.”

  괜스레 나오는 헛기침.

  “어디 불편하세요?”

  “그래도 탁 트인 장소인데 마음이 편치는 않네요.”

  그가 팔을 들어 손을 내민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몰라 멀뚱히 바라보았다.

  “선물 주실래요?”

  잡으라는 듯이 손바닥을 보인다. 자연스레 주위를 둘러보게 된다. 누군가 익숙한 얼굴이라도 보게 될까 조심스러운 마음을 감추긴 힘들다. 손에 닿는 감촉 다음에 당겨지는 압력이 느껴진다. 건물 옆 좁게 패인 골목.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기분으로 그를 따랐다.

  “어떻게 이 시각에 여기 근처를 지나게 되셨어요?”

  “한 달에 한 번씩 만나는 친한 친구가 있어요. 그 친구가 사정이 생겨서 예정보다 일찍 헤어지게 됐거든요.”

  조금 비틀어지는 그의 입술. 묘하게 심술궂게도 귀엽게도 보인다.

  “그럼 저는 대타로군요.”

  괜히 죄책감이 들게 하려는 시도인가?

  “그 친구가, 근래 애인이 생겼는데,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요.”

  “친구보다 애인을 만나러 가겠다고 해서 우울해지셨나 보군요.”

  “그것보단, 나도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었어요.”

  몸이 거의 부딪힐듯 가깝게 다가선다.

  “질투인가요?”

  “질투라고 하긴 그렇네요. 그 친구가 즐거워 보여 좋았어요. 그저 나도 친구처럼 즐겁고 싶다는 마음이랄까요.”

  “그 친구가 애인을 만날 때처럼? 제가 여은 씨한테 그럼?”

  그럼, 결론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그가 내 이마 위로 입술을 눌러 온다. 따끈한 체온이 전해진다. 촉촉한 느낌도 함께. 양손으로 목 주변을 지긋이 눌러 당긴다. 그의 목에 내 코와 입이 닿는다. 알싸한 향이 전달된다. 이건 어떤 향수일까? 아니면 면도 후 바르는 로션인가? 그의 단단한 가슴께를 끌어당겼다. 누군가에게 안겨있다는 사실만으로 위로가 된다는 건 최근에 알게 되었다. 그 이유가 사랑이든, 욕망이든, 아니면 추위든 상관없었다. 그렇게 안아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그저 좋았다. 다리와 다리가 닿는다. 팔과 팔이 스친다. 그의 가슴팍이 내 상체를 지그시 눌러온다. 손을 바삐 움직여 그 몸을 훑는다. 아무리 만지고 또 만져도 만족할 수 없다는 듯 건드리고 눌러댄다. 그가 힘을 주어 나를 힘껏, 끌어당긴다. 몸과 몸이 흡사 밀착, 된 것처럼. 빨려들어가고 싶다. 한시라도 떨어지기 싫다.

  얼마간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갑작스레 저 너머 큰 길가에서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움찔, 반사적으로 몸이 그에게서 떨어지려 하지만 그가 놓아주질 않는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시선을 주니 부모와 여자 아이 하나, 남자 아이 하나가 보인다. 도란도란, 이어지는 대화. 그가 목과 어깨 사이 옴폭, 들어간 곳에 입술을 대고 부드럽게 깨물었다 놓아주기를 반복한다. 그 리듬이 일정하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이미 반으로 나눠져, 한쪽은 그 움직임이 영원히 멈추지 않기를 바라고, 반대쪽에선 어떻게든 멈춰야 한다고 다그치고 있다. 바깥을 살폈다 그를 향했다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이번엔 여자 두 명이 재잘거리며 지나친다. 그 소리가 아침 나절에 들리는 참새들 지저귐 같다. 둘 중 하나가 문득,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마주치는 시선. 그리곤 건너편으로 사라진다. 분명 아무 의미없는 동작이었지만 그 시선이 눈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저 멀리 딴 세상으로 흘러버렸던 내 의식은 점점, 제자리로 돌아오려 한다. 한층 소란스러운 무리가 가까워진다. 마치 고함치듯 고성에 가까운 대화가 이어진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 세 명이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까지 해가며 말을 뱉어내고 있다. 얼핏, 보면 싸움을 하는 것처럼 보여도 얼굴에 웃음기가 가득하다. 그런 식으로 서로 어울리는 사이도 있는 법이겠지. 그리곤 눈에 들어온 익숙한 얼굴. 시선에 들어왔지만 어째 현실감은 들지 않았다. 그저 쭉, 이어지는 영화의 다음 장면이라고 인식될 정도. 그 옆 사람 얼굴도 눈에 익숙하다. 왜 소이가 아가씨와 함께? 얼른 어디론가 숨어야 한다는 상식이 갑작스런 습격에 멍하니 의식을 놓고 그저 바라보기만 하게 되는 먹잇감에겐 통용되지 않는다. 그렇게 지나쳐버렸으면 좋았으련만, 소이도 이전에 지나쳤던 여자처럼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똑같이 아무 의미없는 동작이었지만 그애에겐 내 얼굴이 익숙하니까. 둥그렇게 커지는 눈동자와 단단히 고정된 고개 방향. 그 순간이 얼마나 길었을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는다. 억겁이 한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찰나가 평생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니까. 그랬다. 몹시 길었던 순간이었다. 눈을 감은 채로 내 몸을 탐닉하길 멈추지 않는 그를 벗어나기에는 힘에 벅찼다. 그렇다고 그의 품에 숨기는 이미 늦었다. 어떻게든 소이의 시선을 피하려는 와중에 가만히 나를 향해 고개를 고정하고 있는 소이가 궁금해 같은 방향으로 쳐다보는 아가씨의 눈길이 잡힌다. 아니야, 이건, 안 된다고! 그제야 급격히 머리를 뚫고 나오는 조급함. 그를 있는 힘껏 밀쳐내는 내 힘에 그가 멈칫, 거리며 눈을 열고 내 안색을 살핀다. 황급히 그 뒤로 숨으며 큰 길가를 살폈다. 텅 빈 공간. 지나쳐갔다. 날 봤을까? 봤겠지? 눈이 마주친 사실이 분명했지만 어떻게든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내 착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마음 저 깊은 곳에 자리한 죄책감이 불러낸 환영. 그만 멈추라고, 그런 경고를 보낸 건지도. 그래, 그럴게. 방금 일어난 현실이 내가 바라는 대로 착각이라면 뭐든 하겠다는 간절함이 가슴을 가득 채운다. 누구 앞에서라도 싹싹, 빌고 싶었다. 무릎을 꿇고 두 손이 닳도록. 백팔배라도 하라면 할 의향이 있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가팔라진 숨을 고르며 내 안색을 살피는 그를 배려할 여유는 조금도 남아있지 않다. 그저 너무 간절해서 가슴 가운데 오롯이 손을 모으고 단단히 굳은 채로 움직이질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 눈에 들어왔다. 골목 안쪽으로, 제대로 확인을 해야겠다는 심정이 가득 들어찬 채로, 상체를 내미는 아가씨의 얼굴이.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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