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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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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22
작성일 : 23-05-11 14:11     조회 : 215     추천 : 0     분량 : 24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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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

 

 버섯 - 유혹

 

  결국 나 혼자서 마지막 가면무도회에 참석한다. 그이는 가지 않겠다고 제대로 못을 박았다.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곳에 굳이 가고 싶지 않겠지. 그 마음이 이해가 가기에, 딱 한 번 가고 말 거면 그렇게 많은 돈 주고 비싼 옷은 왜 장만했냐는 타박만으로 마무리 하고 더 이상 그를 비난하지 않았다. 대신 나 혼자라도 가겠다고 하자 그러라고 순순히 허락한다. 이번에도 다홈이, 예슬이와 동행하긴 하는데, 그게 이전처럼 남자 복 없는 여자들만의 동행은 아니다. 마지막 행사라 그런지 다들 커플로 참석하길 원했다. 남편만 빼고. 택수가 다홈이와, 영식 씨가 예슬이와 함께였다. 어째 나만 혼자 커플 모임에 덩그러니 끼어드는 상황. 사실 완전히 혼자는 아니다. 자기 대신 동행하라며 소이를 억지로 끌어다 미는 남편. 그렇게 해서라도 미안한 마음을 덜려는 수작이겠지. 차라리 혼자가 낫겠다 싶었지만, 소이를 데려가라고 애원과 압력을 섞어 부탁하는 남편에게 그러겠다고 승낙했다. 결국 소이 옷 사는 일까지 도와주었다. 한 번도 그런 곳에 가보지 못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소이. 누군 처음 겪어보는 일 아닌가. 별 것도 아닌 걸로 왜 그렇게 난리 법석인지. 아, 이러지 말자고 다짐하는데도 소이에게 자꾸 역정을 내게 된다. 언제부터 미운 털이 박힌 건지 모르겠다. 내게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거 너무 요란스럽지 않나요?”

  “나쁘지 않은데.”

  “이건 너무 무겁다.”

  “가리긴 제대로 가려주네.”

  완전히 들떠 이 가면 저 가면 집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하며 내 의향을 묻는 소이에게 데면데면하게 대답한다. 나도 흥이 나야 같이 어울려 골라주지. 이건 뭐 하기 싫은 숙제하러 온 초등학생 꼴이다.

  “이걸로 할까요? 저 빨간 장식 달린 것도 예쁜데.”

  “둘 다 괜찮네.”

  “음, 뭘로 한다?”

  소이의 질문은 한쪽 귀로 넘겨버리고 드레스 매장을 둘러본다. 좀 더 밝은 색깔로 할 걸 그랬나? 드레스를 너무 튀지 않도록 바다색으로 골랐는데 그게 어째 밋밋하고 심심해 보인다. 이러면 이래서 문제고 저러면 저래서 마음에 안 드니 완벽하게 딱, 마음에 들 순 없지만, 정민 씨 파트너가 입었던 그 화려한 황금색 드레스에 비춰보면 이건 영락없이 어디 회사 유니폼 수준이다. 정, 민, 씨? 이제 대놓고 정민 씨라고 부르는 나. 갈수록 가관이다. 이런 행동을 내 자신이 아니라 친한 친구가 했다면 바로 등짝 위에 한 방 먹였다. 정신줄 놓지 말고 살라고, 한, 여, 은.

  “언니, 그거 언니한테 어울려 보여요.”

  “그래?”

  노란빛을 살짝 띠는 옅은 연두색 드레스.

  “한 번 입어보시지 그래요?”

  “아냐, 됐어. 난 이미 드레스 샀어.”

  대답은 했는데 어째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는다. 입어나 볼까?

  “전 이거 입어볼게요.”

  “그래. 괜찮아 보이네.”

  소이가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간 사이 그 연두색 드레스를 들었다, 놨다, 를 반복했다. 아서라, 한여은. 굳이 두 벌이나 사서 뭐하게. 아마 평생 그런 무도회 다시 참석할 일은 없을 거다. 그래도, 그냥, 입어보기만 할 건데 어때서. 손에 그 드레스를 든 채로 소이가 들어간 문을 바라본다. 소이가 저 문을 열고 나오면 더 이상 입어볼 생각은 하지 않을 터였다. 입어 봐? 도로 걸어놔? 문이 곧 열릴 듯했다. 어쩌지?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에 얼른 내달렸다. 머리로 생각하기 전에 발이 먼저 움직인다. 좁다란 공간 안에 들어서서 숨을 고르며 들고 있는 드레스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밝은 색은, 나랑 어울리지 않잖아? 괜히 손톱 끝을 곱씹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난감해진다. 덩그러니 드레스를 들고 밖으로 나서는 내 모습을 소이가 볼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참, 내 스스로 쥐구멍에 들어서버렸다. 달싹, 옭매여서, 마음대로 나가지도 못하게. 어찌나 자신이 바보 같은지. 이러고 있으면 소이가 계속 기다릴 테니 얼른 결정을 내려야 했다. 스르륵, 들이미는 생각. 입어보지 않고 나랑 어울릴지 그렇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어? 이 드레스에 독이라도 묻은 것도 아니고 그냥 입어보기만 할 거라니까. 그래, 이걸 그냥 들고 나가는 것도 우스웠다. 모르겠다, 체념하듯 입고 있는 옷에 달린 단추를 풀었다.

  “우와, 언니, 잘 어울려요.”

  발바닥을 끌며 주저하듯 나오는 날 보며 소이가 미소를 짓는다. 그러니?

  “내가 보기엔 네 드레스가 훨씬 더 예뻐 보여.”

  “그래요? 이런 건 처음 입어봐서. 가격이 꽤 세서 함부로 고르질 못하겠어요. 다른 것도 입어봐도 돼요?”

  “당연하지. 그러려고 온 건데.”

  소이가 다시 안으로 들어서고 난 후 내 모습을 거울에 비쳐봤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이리저리 몸을 돌려가며. 옷 색깔이 밝아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걸. 아무래도 내겐 어울리지 않아. 상반신 양쪽을 손으로 편평하게 쓸어내려본다. 몸에 딱, 맞춰지려나? 그럴듯하긴 한데. 이 마음은 뭘까? 어울려 보이진 않는데 벗고 싶지도 않다. 나한테 속한 게 아니지만 미련이 남는다고 할까? 가질 수 없다고 원하는 마음마저 생기지 않는 건 아니잖아?

  “이건 너무 어깨가 펑퍼짐해 보이지 않아요?”

  “좀 퍼져 보이긴 하다.”

  “옷이 가면이랑 어울려야 하는데.”

  “이전에 골랐던 공작털 달린 가면이 괜찮아 보였어.”

  소이에게 말대답을 하면서도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내게 소이가 입꼬리에 웃음을 묻히며 묻는다.

  “언니, 아무래도 그 옷 마음에 드신 듯. 언니랑 어울려요. 정말로.”

  “아니야. 너무 밝아. 그래서 내 얼굴이 거무튀튀해 보여.”

  “에이, 무슨. 옷이 밝아 입은 사람을 더 밝게 보이게 해요.”

  그런가? 대조가 아니라 보완이라고? 자꾸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바뀔 것도 없는데 거울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날 밝아 보이게 해준다고? 되레 어두워지는 게 아니라?

  “감사해요. 언니가 골라준 그 가면 마음에 들어요. 옷이랑 어울리기도 하고.”

  “본인 마음에 든다면 그게 제일이지.”

  가게 밖으로 나서며 소이가 감사의 말을 전한다. 슬쩍, 가게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그 연두색 드레스에 눈길을 줬다 거뒀다. 어차피 내 것은 아니었어. 좋은 주인 만나길 바랄게. 속으로 체념하듯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저 때문에 시간 뺏기시고. 제가 밥 살게요. 언니, 드시고 싶은 거 없으세요?”

  소이랑 둘이서 밥 먹고 싶은 생각은 그닥 들지 않았다.

  “다음에 먹자. 오늘은 할 일이 있어. 그거 집에 가서 다시 한 번 입어봐. 달리 보일 수도 있을 거야. 비싼 돈 치르고 산 건데 마음에 안 들면 어서 바꿔야지.”

  “그럴게요. 언니, 너무 감사해요. 혼자 왔으면 계속 주저하다 고르지도 못했을 거예요. 우리 다음에 꼭, 밥 먹어요. 제가 제대로 한 턱 낼게요.”

  내가 왜. 아니다. 소이한테 이러지 말자니까. 웃어 보이는 걸로 작별인사를 대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길. 눈에 익숙한 거리. 아직 아른거리는 그 연두색 드레스. 집에 멀쩡한 드레스 놔두고 다른 걸 염두에 두다니. 집에 있는 것도 두 번밖에 입지 않았다. 갖고 놀던 장난감이 싫증나서 버리고 다른 거 사달라고 떼쓰는 아이도 아니고. 이런 형편없는 주부라니. 남편은 어떻게든 돈 모으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뼈빠지게 일하는데. 남, 편. 문득, 떠오르는 남편 얼굴이 집에 남겨둔 파란색 드레스와 겹친다. 그럼 그 연두색 드레스는, 정민 씨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댔다. 요즘 내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얼이 빠져가지곤. 일부러 눈에 들어오는 가게 간판들을 읽어댔다. 최부자 갈비집. 강원 막국수. 도시 부티크. 남원 비빔밥. CS24. 로제 화장품. 먹는 것과 입는 것과 몸에 바르는 것을 파는 가게들. 그런 물건을 파는 가게가 많다는 건 그만큼 삶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품목이라는 거겠지. 매일 먹고 입고 발라야 하니까 그걸 구매하는 사람도 많은 거고. 그런데 먹고 입고 바르기 위한 품목을 살 돈으로 장난감을 산다면 어떨까? 장난감이 생겨 행복한 기분으로 며칠 굶고 입던 옷 계속 입고 바를 거 바르지 않고 지내도 괜찮을까? 그럴지도, 아님 별로 행복하지 않을지도. 아, 머리가 지끈거린다. 한도 용량을 초과하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면 머리가 감당하질 못한다. 그래서 일부러 간판을 읽으며 걸었는데 거기서 또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렇게 집에 도착했다. 어떻게 돌아오는 길을 걸었는지도 모르게.

  머리가 지끈거려 일찍 잠들었는데, 현무 칭얼거리는 소리에 깼다. 현무 때문에 잠을 깨는 게 이제 너무 당연해졌다. 애 낳고 초창기에는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라는 한탄마저 들었는데, 그게 그런 것조차 익숙해진다. 물론 머리가 무겁고 몸이 찌뿌등한 증세가 늘 따라다니지만 그래도 살아진다. 애가 칭얼거려 깨면 머리로 무얼 해야지, 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이미 몸이 반응해서 저절로 움직인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자연스레 애를 안아 올려 토닥여주거나 먹일 이유식을 준비한다. 내 자신이 하는 행동을 제대로 인지했을 땐 이미 한참을 그러고 있던 적도 여러 번이었다. 어떻게 자신이 하는 행동을 모를 수가 있나 싶지만, 그게 살다 보면 다반사다. 남편과 장 보러 나섰다 오늘은 수산시장 가자고 정했는데도 그가 자연스레 항상 가던 마트 가는 길로 들어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머리가 항상 모든 걸 통제하는 거 같아도 몸이 스르르, 그 손아귀에서 빠져나와 제 갈 길로 가버리곤 한다. 그러고 보면 뉴스에서 저 사람이 왜 저런 행동을 했을까, 이해 못할 사건을 접할 때가 종종 있는데,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닐까. 그게 머리로 생각해서 한 게 아니라 몸이 제멋대로 나서버린 거다. 이미 깨달았을 땐 너무 늦은 거지.

  마지막 세 번째 가장무도회 날. 후련한 건지 아쉬운 건지 모를 기분이 든다. 아쉬운 거야 이제 더 이상 특별한 이벤트가 없어 그러려니 이해하겠는데, 후련한 감정은 뭐지? 거기에 참여하는데 부담을 가졌었나? 그게 사람이 그렇다. 좋은 걸 다 좋지만은 않게 받아들이고 나쁜 걸 다 나쁘지만은 않게 받아들인다. 어렵게 휴가를 받아 여행갈 날짜를 정해놓고 짐을 싸다보면, 준비한다고 스트레스 받는다. 여행하는 동안엔 동행자 때문에 스트레스 받거나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들에 스트레스를 받기도 한다. 여행가는 일정 내내 행복하고 즐겁기만 할 순 없는 거다. 반대로, 정말 가기 싫은 모임에 억지로 끌려갔다, 의외로 음식이 맛있거나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하는 예상 밖 즐거운 일이 생길 때도 있다. 이 가장무도회 때문에 준비하느라 스트레스 받고 남편 챙기느라 스트레스 받고 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았겠지. 시원섭섭하다고 해야 하나? 오늘 마지막 가장무도회가 끝나면 이젠 어떻게 되는 거지? 더 이상 그를 볼 일이 없다고 단정 지을 수가 없다. 그, 사람, 연락처도 알고 일하는 곳도 안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이 알게 됐다. 그, 사람, 은 나에 대해 뭘 알까?

  “여벌이 있다니까. 이런 때 아니면 나도 그런 옷들 손 댈 일 없어. 기회라고 생각하고 입어보라니까. 안 입으니까 먼지만 쌓여.”

  같은 드레스 입지 말고 자기가 가진 여벌 드레스 중에서 하나 골라보라고 자꾸 권하는 다홈이. 그 마음은 알겠는데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진 않았다.

  “괜찮다니까. 난 내 파란 드레스 마음에 들어. 어차피 오늘이 가장무도회 마지막 날이니까 원 없이 입고 옷장 안에 넣어두는 거지. 살면서 이런 드레스 입어볼 날이 또 올까?”

  “왜? 그거야 너 하기 나름이지. 이런 모임을 위한 동호회 같은 것도 찾아보면 꽤 있지 않을까?”

  “가장무도회 동호회? 동호회까지 가입해서 무도회 다닐 만한 열정은 없는데.”

  “있잖아아. 그런, 모임도, 있다네.”

  얘가 왜 말을 눙치고 그래?

  “부부 맞교환하는 모임.”

  “부부 맞교환?”

  “엉. 파트너 교환해서 가상부부처럼 지내본다던데.”

  풋. 다홈이 답다. 어이없어 웃음부터 터졌다.

  “참, 내, 어디서 그런 건 주워들어가지고선.”

  “뭐가? 나름 그러면서 부부관계의 새로운 활력을 찾는 커플도 많다고 해.”

  “아서라. 난 됐거든. 만약 그러고 나면 남편 얼굴 어색해서 쳐다보지도 못할 거 같아.”

  “하기야 너네 남편 성격에 그런 일 절대 동의 안 할걸.”

  “그것도 맞는 말이네. 그 사람, 백 번 죽었다 깨어나도, 그러진 못할 거야.”

  그럴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걸 정말 장담할 수 있을까? 아무리 살 비비고 사는 사이라지만, 그이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냐고 누가 물으면 자신 있게 백 프로 안다고 장담 못하겠다. 그건 피를 나눈 부모 자식이나 형제 사이라도 그렇겠지. 그 사람이 내가 아닌데 그 속을 완벽하게 알 순 없다. 어쩌면 내가 남편을 너무 고정관념만 가지고 보는 걸지도.

  “이번에도 네 남편 안 와?”

  “응.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했어. 그 소리 듣고 어찌나 속 시원한 표정을 짓는지.”

  “진짜로 가기 싫긴 싫었나 보구나.”

  “그러게 말야. 대신 마트에서 일하는 소이를 데려가라네.”

  “그으래?”

  떨떠름한 다홈이 반응. 내가 소이를 마땅찮아 하는 걸 이미 눈치 챘으려나.

  “어.”

  “괜찮겠어?”

  “괜찮지 않을 게 없지. 어차피 가장무도회 도착해서 따로 놀 건데. 내가 걔랑 춤이라도 출 일은 없으니까.”

  “맞아. 좋은 일 한다고 생각해. 사원 만족 이벤트 초청. 원래 사원이 행복해야 기업이 잘 되는 거래.”

  좋은 일이라. 소이한테 선심 쓰는 거라고? 소이가 무슨 소녀 가장은 아니잖아? 내가 챙겨주지 않는다고 걔가 제대로 된 삶을 살지 못한다는 법도 없고. 오늘은 함께 가니까 챙겨줘야 하겠지만. 아, 그 생각을 떠올리니 벌써부터 싫은 감정이 치고 올라온다. 챙겨줘야 해? 얼마나? 그냥 무도회장 도착해서 너는 네 길로, 나는 내 길로, 그렇게 헤어지면 안 되려나? 이러지 말자고 해도 그 싫은 감정이 생기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휴우. 심호흡을 했다. 내보내자. 내보내자. 이 싫은 감정을 내 안에서 내보내자.

  “왜 한숨은 쉬고 그래? 마지막이라 아쉬워서?”

  “아쉬울 것도 많다. 여러 가지 챙겨야 하고 성가시기도 했어. 마냥 재미나지만은 않았다고. 끝난다니 후련하기도 해.”

  “얘가 숙제하러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럴 바엔 왜 가는데?”

  그러게 말야. 그럴 바엔 왜 갈까? 처음엔 그저 생경한 행사가 신기하고 궁금해서 흥분된 채로 참석했다.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니 피로감이 쌓인다. 역시 사람은 놀던 물에서 놀아야 해.

  “택수랑 동행하는 거지?”

  “으응.”

  또다시 떨떠름한 반응. 어라?

  “그 으응, 은 뭔데? 둘이 뭔 일 있었어?”

  “일은. 그냥, 그게······.”

  있긴 있다.

  “둘이 싸운 건 아니지?”

  “애들도 아니고 싸우긴.”

  “그럼?”

  “택수한테 지나가는 말로 이혼 확정됐다고 알렸거든. 그게 뭐, 어디 대놓고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딱히 숨길 일도 아니고.”

  “그렇지.”

  “그 후로 애가 태도가 좀 이상해.”

  “그래?”

  “택수도 전형적인 보수 성향의 남자인 걸까? 그렇게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이혼녀라는 낙인에 꺼림칙해하는.”

  “나도 택수가 그런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해본 적 없는데.”

  다홈이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가장무도회로 향하는 발걸음. 새삼 마지막이라는 기분이 훌쩍, 몸 전체에 전해진다. 지금으로선 후련함보다 아쉬움이 더 크게 다가온다. 아무래도 마지막, 이라는 단어 자체가 아쉬움을 주렁주렁, 매달게 되니까.

  “언니, 언니.”

  “안녕하세요.”

  예슬이와 영식 씨 커플. 이 커플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천생연분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들. 계속 쭉, 잘 지내길 기원하게 된다.

  “왔어.”

  “어머, 신혼커플 오셨네.”

  “얘는, 식도 안 올렸는데 신혼이라니.”

  “그렇긴 한데 여기는 볼 때마다 신혼부부라는 인상이 든다니까.”

  다홈이가 장난스레 건네는 말에 예슬이가 깔깔, 거리며 웃고는 이어서 묻는다.

  “택수 오빠는요?”

  “어, 일 때문에 늦을 거 같아서 무도회장으로 바로 온대.”

  택수는 일 때문에 미리 만나서 함께 가지 못하고 무도회장으로 바로 온다고 했다. 다홈이는 아쉽다기보단 잘 됐다고 안도한다. 뭔가 불편하긴 한가 보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 후, 잠시 그 자리에서 소이를 기다리느라 머물렀다.

  “죄송해요, 언니. 저 때문에 기다리셨죠?”

  헐레벌떡, 뛰어오는 소이. 급하게 서둘러 오느라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어찌나 예쁜 짓만 골라 하는지. 다들 저 한 사람 때문에 기다리도록 이렇게 늦어주신다. 휴우, 하아, 날카로운 톤이 나오지 않게 말을 꺼내기 전 심호흡을 했다.

  “아니야. 얼마 안 기다렸어. 인사해. 다홈이는 알지? 여긴 나랑 함께 일하는 예슬이고, 그 옆엔 예슬이 남자친구 영식 씨.”

  “안녕하세요.”

  꾸벅, 90도 각도로 절하는 소이. 촌스럽게 요즘 누가 저런 식으로 인사를 하는지. 아, 아니야. 소이한테 그런 감정 갖지 말라니까. 이게 그애 앞에서 자꾸 감정 조절이 안 되니 얼른 헤어져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무도회장에 도착하면 대충 설명해주고 바로 안녕이다.

  “드레스 예쁘다.”

  다홈이가 인사치레로 건네는 말이겠지. 예쁘긴 예슬이 드레스가 훨씬 예쁘다. 아악, 그만해. 마지막 날이라 그런지 어째 사람이 더 붐빈다. 오늘은 드레스 시상이랑 경품추첨 등 이런저런 추가행사가 더해져 관심이 증폭됐겠지.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은근히 그, 사람, 을 찾아보지만 이게 각종 드레스와 가면으로 꾸민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 찾기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다. 자꾸 그를 그, 사람, 이라고 칭한다. 부르지 못할 이름이라도 되듯이. 생각해보니 그렇네. 정민 씨, 라고 하면 되지 그 사람이야 뭐야. 그 사람 이름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뭔가 바뀔 리가 없잖아?

  “우와, 오늘 사람 되게 많네요.”

  “다들 경품 받을 수 있나 혹시나, 해서 온 거 아닐까? 1등이 유럽여행이랬지?”

  “어머, 유럽여행을 보내줘요?”

  그거 전단지에 다 적혀있었거든. 넌 읽어보지도 않고 뭐했니? 더 이상 안 되겠다. 소이랑 떨어져야겠단 심산으로 대충 무대 위치가 어디고 일정이 어떻게 진행된다는 걸 알려주고 나서 다홈이와 눈을 마주쳤다. 다홈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예슬이와 영식 씨 커플을 향해 손짓을 한다.

  “그럼 커플은 둘이서 신나게 즐기시고, 싱글들은 알아서 짝을 찾아볼게요.”

  “저, 저희끼리만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소이의 질문에 다홈이가 답한다.

  “아니, 여기까지 와서 같이 움직일 생각하면 안 되지. 그래서 어떻게 짝을 찾겠어? 이제부터 각자 가는 거야. 나도 여은이랑 작별할 거고.”

  당황하는 소이의 얼굴.

  “그, 그래요?”

  “행운을 빌어요. 좋은 짝 찾도록 해요.”

  주저하는 몸짓이 역력한 소이를 뒤로 하고 다홈이가 이끄는 대로 나아갔다. 멀찍이 떨어졌을 때쯤 다홈이가 묻는다.

  “혹시 네 신랑이랑 쟤랑 뭔 일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아차. 이미 말을 꺼내놓고 나서 목소리가 날카롭다는 걸 깨달았다. 머쓱, 해진 다홈이 반응.

  “아니, 딱히 어떤 뜻으로 물은 건 아니고. 너 하는 행동이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꼭, 쟤가, 변방의 오랑캐라도 되듯이 살기를 띠고 보는 네 눈빛은 뭐니?”

  “내 눈빛?”

  “난 쟤, 고분고분하고 예의바르게 봤거든. 신랑이랑 엮인 일 아니면 네가 그런 살기를 띨 이유가 없잖아?”

  입 안이 말라온다. 목이 마른데 딱히 물을 구할 만한 곳도 보이지 않는다.

  “아, 아니야. 네가 너무 앞서 나갔어. 신랑이랑 엮인 일도 없고, 내가 쟤한테 살기 띨 일도 없어. 사람이 너무 붐비고 정신없어서 그런가봐.”

  내 답이 내키지 않겠지. 일부러 다홈이 시선을 피하며 나아갔다. 마지못해 더 이상 묻진 않고 내 뒤를 따른다. 마지막 날이라 더 붐비는 오늘. 북적거리는 인파를 지나쳐 나아가려니 자꾸 부딪히게 된다. 한 사람 치고 지나가면 다음 사람 어깨와 또 부딪치고. 그게 반복될수록 짜증이 쌓여간다.

  “정말 사람 많네. 경품에 현혹되어 아주 파리떼처럼 몰려드는구나.”

  다홈이가 하는 말에 답없이 앞만 보고 걷자 그런 내 모습을 힐끔, 쳐다본 다홈이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고 묵묵히, 뒤따르기만 한다. 촘촘히 공간을 메운 인파가 앞에 자리해 이제 더는 나아갈 수 없어 멈추니 화려한 무대가 가까이 보인다. 저 위에서 춤을 췄다는 게 아직도 제대로 실감이 나질 않는다. 그것도 정민 씨랑. 슬쩍, 다홈이를 찾으니 두어 발걸음 떨어져 무대를 둘러보고 있다. 열이 올랐던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제 슬슬, 다홈이에게 미안해진다. 괜히 애꿎은 다홈이에게 역정을 낸 듯하다. 하필 그 타이밍에 내 옆에 있어가지고. 역시나 인생은 타이밍이다. 조심스레 다홈이 눈치를 살피며 은근슬쩍 말을 건넨다.

  “너 갑자기 되게 조용하다.”

  킁, 코웃음을 치는 다홈이.

  “왜? 이제 말할 기분이 드셨어?”

  “언제는 내가 말 안 했어?”

  “잠시 어디 다른 데 갔다 오신 듯하긴 했지.”

  무안해진 기분으로 어떻게든 화제를 바꿔보려는데 다홈이가 황급히 말을 꺼낸다.

  “야, 야. 저기 봐봐. 저 가면. 그 커플 맞지? 네 꿈 속 왕자님.”

  “얘는. 왕자님은 무슨. 아주 잘도 지어낸다”

  다홈이가 손짓하는 방향에 그가 보였다. 눈에 익숙한 사자 갈기 가면. 옆에는 화려한 파트너를 대동하고. 이건 뭐 화려하다로 부족해서 황홀하다고 해야 할 정도다. 자주색과 붉은색이 저렇게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건 처음 깨달았다. 전체적인 바탕은 자주색으로 덮고 그 위로 은은하게 붉은색이 군데군데 자리한다. 게다가 마무리는 번쩍거리는 장식으로 처리했다. 난 저 반짝이는 도저히 감당 못하겠다. 그것도 할 만한 사람만 하는 거지.

  어, 어? 내 눈을 의심하게 만든 건 그의 정장 색상 선택이었다. 항상 어두운 계열의 색만 입는다고 생각했는데 마지막 날이라 그런 건지 하얀색으로 골랐다. 위아래 하얗게 뒤덮었고 그에 맞춰 구두마저 흰색으로 신었다. 이전과 동일하게 사자 갈기처럼 털이 삐죽 솟은 가면을 썼는데 그것마저 은색으로 바뀌어 흰색과 어울렸다.

  “어머, 이번엔 천사 컨셉인가? 아주 흰색으로 도배를 했네.”

  “그, 그러게.”

  다홈이가 날 쳐다보는 게 느껴진다. 그 가면 아래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확인할 순 없지만 안 봐도 뻔하다. 대놓고 드러나지 않도록 태도 관리해야 하는데.

  “가까이 가서 볼까?”

  “동물원 호랑이도 아니고 뭘 가까이 가서 봐.”

  내 말이 먹힐 리가 없다. 날 끌고 나아가는 다홈이. 이게 진짜로 희한하다. 난 저 복잡한 인파 사이를 도저히 끼어들지 못하겠는데, 다홈이는 용하게 이리저리, 그 사이를 비집고 나아간다. 그것도 타고난 거라면 타고난 거다. 그와 사람 오십 명 정도 들어설 공간을 사이에 뒀었는데 이제는 그 간격이 스무 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하얀색도 나름대로 어울린다. 어두운 계열이 차갑고 날렵한 인상을 줬다면, 하얀색은 좀 더 부드럽고 온화한 기운을 풍긴다.

  “흰색도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는데.”

  내 말이.

  “나쁘진 않네.”

  최대한 시큰둥하게 반응하려 했다.

  “나쁘지 않다고? 눈을 떼지 못하는데.”

  “내가 언제?”

  “옆 동반자가 색을 맞췄으면 더 좋았겠다. 저 흰색 옆에 엉뚱한 자주와 빨강이라니. 이건 뭐 완전 천사와 악마네. 그래, 맞아. 악마다, 악마.”

  마음에 안 든다고 굳이 악마라고 할 것까진 없잖아. 참 언제 봐도 당당해 보이긴 하다. 악마의 자신감을 갖춰다고 할까?

  “마녀가 더 어울리지 않나?”

  “마녀? 하하하. 그래, 마녀 어울린다. 자주색 마녀. 아주 제대로네. 왜 괜찮은 남자들은 저런 마녀를 꼭 옆에 끼고 있나 몰라.”

  괜찮으니까 마녀가 몰리지. 다홈이 말이 맞긴 맞다. 어째 두 사람 복장이 따로 논다. 차라리 내 파란색이 저 하얀색과 더 어울리겠는데.

  “네 드레스가 더 어울리겠다.”

  뭐야?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거야?

  “그, 그래? 흰색과 파란색 조합이라.”

  “그래 보여. 흰색과 자주색보단 흰색과 파란색이 낫지.”

  역시 친구가 좋네. 그렇게 말만이라도 해주니 좋다. 아니, 그게, 그와 어울리길 원한다는 건 아닌데.

  빵, 빠바방. 울려퍼지는 악기 연주 소리. 뒤이어 사회자의 안내 멘트가 따른다. 환영 인사와 함께 오늘 일정, 협찬 기업에 대한 감사 인사가 이어진다. 중간중간, 요령 있게 사람들의 함성을 유도하면서 행사 마지막 날이라는 아쉬움을 전하더니, 오늘의 주제는 클래식과 뮤지컬 넘버라며 마무리하자 바로 연주가 시작된다. 귀에 익숙한 클래식 선율이 들리고 관객이 한꺼번에 무대 위로 올라서기 시작한다. 주저하는 날 잡아끄는 다홈이.

  “뭐해? 얼른 올라가서 좋은 자리 잡아야지.”

  “우리 둘이서 춤추자고?”

  “어때? 파트너 생길 때까지 그러지 뭐.”

  “어째 여자 둘이서 좀 그렇지 않나?”

  “그렇긴 뭘 그래. 까짓 거 춤이야 추면 그걸로 되는 거지.”

  드레스 차려 입은 여자 둘이 마주보고 서서 스텝 밟기가 어색했지만 다홈이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클래식 선율에 어울리지 않게 다홈이가 빠른 몸동작으로 흔들어대자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 터져나오는 내 웃음소리에 다홈이가 같이 웃어대자 흥이 오른다. 에라 모르겠다, 란 심정으로 함께 몸을 흔들어댔다. 그게 추다 보니 남의 시선 같은 건 의식하지 않게 된다. 신이 나서 서로 장난치듯 부딪히며 왔다갔다 정신없이 스텝을 밟아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연주곡이 서너 곡 바뀐 후 잠시 휴식기를 가진다. 무대 아래로 내려가려는데 다홈이가 그대로 멈춰 있다.

  “안 내려가?”

  “택수 왔네.”

  멀리서 보이는 눈에 익숙한 가면. 그 아래 갖춰 입은 정장은 지난 번과 다르다. 어째 나만 동일한 드레스를 입었군. 다들 값비싼 옷을 어찌 감당하는지 궁금하다. 내가 유독 가난한 거야, 아님 다들 그런 데는 투자할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뭐,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 옆에 선 다홈이가 움직임이 없다. 이런, 모두 가면을 쓰고 있으니 그 아래 표정을 알아채기 힘들다. 택수는 아직 우리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훑는 중이다. 다홈아, 어쩔 생각이야?

  “우릴 찾고 있나 봐.”

  내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하려는데 다홈이가 그 손을 잡는다.

  “여은아. 부탁 하나 해도 돼?”

  “부탁? 그래. 뭔데?”

  “나 잠시만 택수랑 시간 보낼게. 그래도 괜찮을까?”

  부탁이라기보다 거의 통보 수준이다. 내가 반대할 이유는 물론 없다.

  “그럼, 얼마든지.”

  천천히 택수를 향해 걸어가는 다홈이. 사는 게 우리가 원하는 대로 딱, 딱, 맞춰 진행된다면 세상 근심할 일이 없겠지만 그게 그렇게 되질 않는다. 심지어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 헷갈릴 때도 종종, 있다. 그렇게 계획하고 뜻한 대로 되지 않아 실망하고 넘어지며 사는 수밖에 달리 방도가 없다. 다홈이는 다홈이 나름의 계획을 세웠을 거고, 택수는 택수 나름의 뜻한 바가 있겠지만 결국은 그대로 다 이루어지진 않는다. 그 벌어진 틈을 감내하며 사는 걸 배워야 진정 어른이 되는 거겠지. 나이만 먹었다고 다 어른이 되는 건 아니니까.

  다홈이가 가버리자 덩그러니, 혼자 남았다. 사실, 조금 전 소이 혼자 떨궈내고 고소하다고 여겼는데 나도 남 얘기 할 처지가 아니다. 아님, 그런 나쁜 생각하다 벌 받는 건지도. 이제 이런 내가 무서워진다. 소이를 보기만 해도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어째야 하나 고민이다. 그 애를 보지 않는 게 최선일 텐데, 그런 이유로 남편에게 소이를 내보내라고 한다면 그건 공정하지 못한 처사다. 텔레비전 뉴스 같은 데서 갑질의 횡포라며 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당하는 처사를 보여주면 그걸 보고 분개하곤 했는데, 내가 그런 갑이 된다니 상상하기도 싫다. 그럼 최선의 방법은 뭘까? 무작정 참는 것도 최선은 아닐 텐데.

  톡. 왼쪽 어깨 위 건네지는 감촉. 거칠게 치고 지나가는 진동이 아니라 나 여기 있다고 봐달라는 신호로 전해진다. 고개를 돌리니 그가 앞에 있다. 하얀 천사. 아니, 그게, 진짜 천사라는 게 아니라.

  “여기 있었군요. 찾았어요.”

  “······.”

  갑자기 이 이벤트가 가면무도회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가면 아래 감춰진 표정을 확인하고 싶어도 그 가면을 벗기지 않는 한 확인할 도리가 없다. 구멍 아래 자리한 눈빛도 제대로 감지되질 않는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말만으론 대화에 한계가 있다. 말과 함께 보이는 얼굴, 자세, 몸짓이 합쳐져야 완전한 의미를 품는다. 당신 머릿속에는 지금 무엇이 자리하는 거죠?

  “다음 곡 괜찮을까요?”

  그가 내미는 손을 선뜻 잡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파트너는 어디 갔어요?”

  “파트너요?”

  “자주색이랑 빨간색 섞인 드레스 입었었죠? 지난 번엔 화려한 황금색 드레스였는데.”

  그가 전하는 목소리에 옅은 웃음이 묻었다.

  “아, 날 이미 봤군요. 게다가 아주 자세한 사항도 알고 계시고.”

  미워.

  “함께 온 파트너랑은 충분히 시간을 보낸 듯해서요. 여기서 만난 새로운 얼굴과 함께하면 그것도 좋겠죠.”

  분명 눈이 웃고 있어. 가면 아래 숨어 제대로 보이진 않지만 안 봐도 뻔하다.

  “원래 그리 쉽게 파트너를 교체하나요? 전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르는 사람이 좋더군요.”

  “한 곳에 진득하게 머무르기 전에 일단 여기저기 다녀봐야지 않겠어요? 다녀보지 않으면 어디가 내게 맞는 곳인지 알지 못하겠죠. 한 곳에 오래 머무를 건데 이왕이면 제대로 된 곳을 고르기 싶군요, 저는.”

  얄미울 정도로 말싸움에선 절대 밀리지 않는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제대로 되받아줄까 머릿속으로 궁리하던 중 사회자의 목소리가 주위에 울린다.

  “자, 이번엔 유명한 뮤지컬 음악이 이어집니다. 아마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곡들일 겁니다. 귀에 익숙하다면 그에 맞춰 춤추기도 더욱 좋겠죠. 마음껏 즐겨주세요!”

  사회자 말대로 귀에 익숙한 선율이 장내에 펼쳐진다. 내가 맞잡지도 않았는데 그가 낚아채듯 손을 잡아 이끈다. 아주 제멋대로다. 음악이 들리자마자 바로 나아갔더니 주위 사람들에 치이지 않고 수월하게 무대 정중앙에 이른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무대 한가운데는 부담스럽다.

  “너무 한가운데지 않아요?”

  “가면까지 썼는데 누가 알아보기나 하겠어요. 신경 쓰지 말고 즐기죠.”

  난 댁처럼 안하무인에 철면피 아니라구요. 가끔은 이런 무신경한 사람이 부러울 때도 있다. 주변 신경 쓰지 않고 스트레스 받지 않고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며 편하게 살겠지. 어릴 때부터 주변에 폐 끼칠 바엔 차라리 굶어죽어라, 라는 말 듣고 자란 나 같은 사람에겐 그저 편한 대로 하며 사는 게 불가능한 법이다. 그나마 그의 말처럼 가면이라도 쓰니 그게 조금 상쇄되긴 한다.

  “춤이 늘었어요.”

  그런가? 스텝을 밟아나갈수록 자연스러워지는 기분이 들긴 했다. 현무 재우려 안아주다, 설거지하다 그릇을 옮기면서, 일터에서 화분 옮기는 가운데 나도 모르게 스텝을 밟고 있어 깜짝 놀란 적이 종종, 있었다. 춤 실력을 늘리기 위해 노력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냥 스텝을 밟는 게 즐거웠다. 그게 이렇게 하면 좋겠다고 무의식적으로 움직이다보니 갈수록 발이 능숙해진다. 그 다음 곡은 무척 귀에 익다. 익숙한 곡이라 그런지 발놀림이 한층 더 가벼워진다.

  “이 뮤지컬 봤어요?”

  “······.”

  내 발걸음 변화를 알아차린 그가 묻지만 대답할 수가 없다. 무슨 뮤지컬인지 알아야지 대답을 하지. 그가 잠시 기다렸다 자신의 물음에 스스로 답한다.

  “오페라의 유령이죠.”

  아, 그거. 그 제목은 엄청 많이 들어보긴 했다. 이게 그 뮤지컬에 나오는 음악이구나. 많이 들어봐서 귀에 익숙하지만 제목은커녕 어디에 나오는 곡인지도 몰랐다. 뮤지컬 보러 다닐 여유가 있어야지.

  “그 이름 많이 들어보긴 했어요.”

  “세계 4대 뮤지컬 중 하나죠. 그 뮤지컬에 나오는 곡들이 워낙 유명해서 사람들이 그 뮤지컬을 보지 않았어도 삽입된 곡들은 자주 들어봤을 겁니다.”

  “유령이 오페라를 불러요?”

  묻고 나서 내 자신이 너무 바보스러웠다. 안 봐도 뻔하다. 그의 눈과 입이 웃고 있어.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 톤이 귀에 울린다.

  “거기 유령으로 나오는 역이 오페라를 작곡하죠.”

  귀에 익숙한 곡이 끝나고 잘 모르는 선율이 이어진다. 좀 더 어둡고 느린 곡이다. 어딘가 장송곡 같기도 한. 그의 한쪽 팔이 내 허리를 감더니 그 손에 힘이 들어간다. 나를 향해 더 가까이 다가서는 그의 상체.

  “그럼 이 곡은 당연히 모르겠군요?”

  “이, 이 곡이요? 뭐, 뭔데요? 어떤 뮤지컬에서 나오는데요?”

  “동일한 뮤지컬에서 나오는 곡인데 이전 곡처럼 유명하진 않아요. 내용상 거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데, 제목이······.”

  “제목이요?”

  “한국말로 직역하면, 되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다, 정도가 되겠네요.”

  되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다? 그런 곡이 있어?

  “장송곡처럼 들려요.”

  “장송곡이라. 그렇네요. 사람이 죽으면 되돌아갈 수 없으니까 장송곡이라 해도 맥락이 맞네요.”

  “너무 심각한 건 싫은데.”

  “살면서 좋은 일만 맞이할 순 없죠. 싫은 것도 감당해야 이어서 좋은 것도 찾아오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이 곡은 너무 우울하네요.”

  “그래도 멜로디는 잘 만들었어요. 꽤 웅장하게 울린답니다.”

  그의 말처럼 귀에 잘 들어오는 멜로디였지만, 듣고 있자니 내겐 섬찟, 한 느낌이 들도록 어둡게 다가온다. 게다가 제목이 되돌아갈 수 없는 선을 넘는다, 라니 제대로 된 장송곡이다. 잠시, 아무런 말이 오가지 않는 채로, 춤이 이어졌다. 그 장송곡이 끝나고 한층 밝은 곡이 이어진다. 이 곡 또한 많이 익숙한데 도무지 제목은 모르겠다. 그가 말을 꺼내기 전 목을 가다듬는 동작이 진동으로 전해진다.

  “살면서, ······,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 순 없죠.”

  “맞는 말이에요. 그 말에 동의해요. 인생사가 자기 뜻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스트레스 받고 살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게 뜻대로 안 되니 다들 힘들어하는 거죠.”

  “좋은 걸 얻기 위해 싫은 일을 할 때도 있겠죠.”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요. 그건 확실해요.”

  “원하는 걸 손에 넣으려, ······, 희생, 할 필요도 있는, 거구요.”

  “자꾸 희생, 희생, 그러는데 희생이라는 말도 있는 사람한테나 어울리는 사치지, 없는 사람은 희생할 건더기도 없지 않겠어요?”

  “그렇지만, 여은 씨는 많은 걸 가졌죠.”

  “내가요?”

  “그렇지 않은가요?”

  내가 가진 거? 그다지 많지 않은데. 그에게 이런저런 내 사정을 하소연하듯 풀어내고 싶진 않았지만 그에게 순순히 동의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더 컸다.

  “그리 많지 않아요. 일단 부모님이 안 계세요. 두 분 다 성인이 되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거, ······, 그 말을 듣게 되어 유감이네요. 부모님이 살아계시고 안 계시고는 큰 차이죠.”

  “아무렴요. 많은 사람이 부모님 계신 걸 당연시 여기지만, 없어져보면 그 소중함이 뼈저리게 다가오죠.”

  “성인이 되기 전이라 더 힘들었겠어요?”

  “청소년기를 유복하게 보내진 못했죠. 넉넉하다, 는 기분을 느껴본 적이 없어요.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 일을 시작했지만,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해야 하니까 돈이 모이질 않더군요. 풍족하게 쓴다는 건 나한테 해당되지 않는 남들 얘기였죠.”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내 말이 이어질 때까지 기다려준다. 너무 내 얘기를 많이 하지 않나 주저하다, 그를 더 이상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아 안에 쌓인 것들을 꺼내보였다.

  “오늘도, 내 주변 사람들, 다들,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오던데 나만 같은 옷이에요. 이마저도 감사해야 한다는 거, 그런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 많다는 거 잘 알지만, 비교하게 되는 건 피할 수 없더군요. 친구가 자기 여벌옷을 빌려주겠다고 하던데, 오죽 내가 불쌍해 보여 그런 제안을 할까, 하는 자격지심이 들더군요. 그러니까 내 말은, 난 자존감이 낮아요. 험한 세상에 맞설 자신감도 부족하고 별다른 이유 없이 미안한 감정만 앞서요. 이렇게 부족한 날 선택해준 남편에게 너무 감사할 따름이죠.”

  남편, 이란 단어를 꺼내놓고 아차, 하는 낭패감이 뒤따른다. 그 앞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걸 스스로 발설하다니. 정말 어리석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스텝을 이끌어간다.

  “봐요. 이렇게 펼쳐놓고 보니까 별로 가진 게 없죠?”

  “너무 감사할 따름인 소중한 남편과 아이가 있죠. 챙겨주는 친구가 있구요. 옷을 빌려주겠다는 제안이 싫어도 어쨌든 빌려주겠다는 친구가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죠.”

  “그렇죠. 사람이 감사한 걸 모르고 살면 안 되죠. 전혀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은 아니에요. 그치만, 풍족하게 가진 쪽은 아니라는 거죠.”

  “그래도 소중한 남편과 아이와 친구가 있죠. 조금만, ······, 더 행복해지기 위해, 남편과 아이와 친구를 희생할 수 있겠어요?”

  그가 어떤 방향으로 대화를 이끌어가려는지 그 의도를 모르겠다.

  “무슨, 뜻이죠?”

  “어쩌면, 말이죠. 항상 내 편일 거 같은 친구마저 등을 돌릴 만한 상황이 생길 수 있더라도, 그걸 감내할 수 있겠어요?”

  “그게 어떤 상황인데요? 그리고 굳이 그런 희생까지 해가면서 내가 왜 그렇게 할 거라는 거죠?”

  “지금보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그가 내 손목을 더욱 단단히 붙잡는다. 그게 불쾌할 수도 있는데 행동인데 그가 하니 불쾌하지 않다. 오히려 더 친밀해지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 이것도 병이다, 병. 그가 하면 모든 게 용서가 된다는 건가?

  “자, 여기서 잠시 쉬어가겠습니다.”

  흐르던 음악이 멈추고 사회자가 휴식을 알린다. 그가 손을 놓길 기다린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한참 재미나게 놀다 손에 든 장난감을 놓아야 하는 아이처럼. 그렇잖아. 그는 내게 장난감이야. 그 이상은 아니다. 가면 너머로 날 보는 그의 눈. 주위를 가득 메웠던 인파가 흩어지면서 주변에 틈이 생긴다. 이대로 있다간 달랑 우리 둘만 남을 거 같아 문득, 불안해진다. 무대 한가운데 대놓고 구경하라고 서 있을 순 없다. 역시 나는 주인공 체질은 아니다. 손을 놓으려 하자 반대로 끌어당기는 힘이 느껴진다. 그를 응시했다. 무슨 의미죠?

  “잠시만 함께 있죠.”

  “여기서요? 이렇게?”

  눈가 근육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안 봐도 뻔하다. 짓궂은 그의 미소.

  “난 별로 개의치 않는데요. 여은 씨가 싫으면 아래로 내려가도 돼요.”

  그가 걸음을 내딛는다. 그의 손에 잡힌 채로 따른다. 이거 어디서 본 듯한 장면인데. 백설공주? 신데렐라? 라푼젤인가? 겨울왕국엔 제대로 된 왕자가 안 나왔어. 현무 보여준다는 핑계로 내가 더 열심히 봤던 디즈니 만화들. 이게 나이 먹을 대로 먹어서 봐도 재밌다. 요즘엔 만화도 참 잘 만든다. 아님 내 정신연령이 낮은 건지도. 왕자가 공주를 구하는 장면이라고 하기엔 공주가 뒤에 남겨둔 게 너무 많다. 팔다리가 묶인 게 아니라 마음이 묶여서 그걸 풀어내기가 더욱 힘들다.

  “어디로 가요?”

  날 돌아봤다 대답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그. 항상 제멋대로라니까. 문득, 그와 단둘이 무대 뒤로 숨어들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저절로 뜨거워지는 얼굴. 다행이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벌게진 얼굴을 그에게 들킬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가 돌아서 나를 본다. 가면 아래 보이는 그의 눈. 내가 묻고 싶은 말을 그가 먼저 묻는다.

  “무슨 생각해요?”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네요. 지금 앞서 가는 사람은 정민 씨잖아요.”

  “아래로 내려가자고 한 사람은 여은 씨였죠.”

  “그렇게 말하진 않았어요. 지레 짐작하고 정민 씨가 움직였죠.”

  “그럼 다시 올라갈까요?”

  “아이, 정말······.”

  그의 눈이 웃는다. 짓궂어.

  “사람 붐비지 않는 곳에서 여은 씨한테 제대로 물어보고 싶었어요.”

  “뭘요?”

  “······.”

  어쩐 일인지 말문이 막힌 그. 그게 더 꺼림칙하다. 왜 그래요, 당신답지 않게?

  “갑자기 진지하게 나오니까 겁나는데요.”

  그가 팔을 내밀어 조심스레 내 손목을 감싼다. 부드럽지만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여은 씨에겐······.”

  말을 꺼내며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본다.

  “소중한 가족과 친구가 있죠. 세상에 그보다 중요한 건 없을 겁니다. 맞아요. 그건 어떤 것과도 바꾸기 힘들 정도로 소중하죠. 그렇지만, 살다보면, 그것 말고도 다른 가치 있는 것과도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요? 단지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뿐이죠. 삶에서 가보지 않으면 모를 길은 많이 뻗어있어요. 그 길을 가보기 위해 한걸음 내딛기가 가장 힘들죠. 딛고 나면 오히려 그 다음은 수월해져요.”

  “인생에서 이런저런 도전을 해보는 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나도 동의해요. 하지만 왜 자꾸 가족과 친구를 들먹여요?”

  “어쩌면, 내가 제안할 내용이 가족과 친구가 용인하지 못할 수도 있어서요.”

  “가족과 친구가, 용인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럼 나보고 그 반대를 무릅쓰고라도 정민 씨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설득하려는 거군요?”

  “반드시 그렇다는 건 아니에요. 내가 틀렸을 수도 있어요. 가족과 친구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다면 더욱 좋겠죠.”

  “그 제안이 뭔데요?”

  이번엔 내가 그의 눈을 또렷이 응시한다. 이제야 알아차렸는데, 그의 눈동자는 옅은 갈색이다. 눈빛이 강렬해서 그런지 눈동자 색이 짙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저한테 기회를 주세요.”

  “기회?”

  “여은 씨와 함께 시간을 보낼 기회. 여은 씨가 싫다고 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겁니다. 나라는 사람이 있다는 걸 여은 씨에게 알려주려고 해요. 여은 씨 인생에서 이런 기회도 찾아왔다고, 그걸 겪어보라고 말이죠. 저라는 길을 한 번 걸어가보지 않겠어요?”

  그런 질문에 어떻게 단번에 대답할 수 있을까? 반대편 손이 이번엔 내 팔목 근처를 은근히 만지작거린다.

  “쉽지 않은 제안이라는 거 알아요. 가족과 친구가 반대할 수 있어요. 아니, 반대할 게 당연하겠죠. 만약, 여은 씨가 가족, 친구와 나 사이에서 선택해야 할 입장에 처하고 나한테 물러나달라고 한다면 군말 없이 물러나겠습니다. 그저, 시도는 해보라는 겁니다. 겪어보고 아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내려놓는 거죠.”

  “그럼 정민 씨는요? 정민 씨가 바라는 바는 뭔데요?”

  “······.”

  답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적당한 말을 고르는 거겠지. 그렇게까지 내게 매달려서 당신이 얻을 건 무엇이죠? 내가 정민 씨에게 그렇게 가치가 있어요?

  “여은 씨는, ······.”

  흠칫, 그가 날 붙들고 있던 손을 떼더니 황급히 뒤로 물러난다. 왜지? 뒤를 보니, 이런 상황에서 마주하기 가장 달갑지 않은 사람이 뒤에 있었다.

  “어, 언니.”

  내가 함께 골라줬던 드레스를 입고서.

  “저, 혼자서 뭘 어째야 할지 몰라서 한참을 헤맸어요. 언니가 보여서 너무 반가운 마음에 달려왔는데······.”

  얼마나 듣고 있었던 거야? 분명, 정민 씨가 내 몸에 손을 올려놓고 있던 모습은 봤을 거다. 이럴수록 차분하게 반응해야 한다.

  “어, 그, 그래. 무대엔 올라가봤어?”

  “아니요. 다들 짝을 맞춰서 올라가던데 혼자 올라가기 뭣하기도 하고.”

  “얘는, 즐기러 온 건데 혼자면 어때? 그리고 일부러 모르는 사람과 짝을 지어서 춤을 추기도 해.”

  쩌렁, 하게 마이크를 타고 사회자의 목소리가 주변에 울린다.

  “그럼, 지금부터 시상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소이가 나를 향해 묻는다.

  “시상식이요?”

  “오늘이 가면무도회 마지막 날이잖아. 세 번에 걸쳐 진행하면서 가장 잘 꾸미고 나온 사람들에게 상을 준다고 했었어.”

  소이 앞에서 그를 향해 눈길을 줄 엄두가 나지 않는다. 어서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터였다.

  “우리도 시상식 보러 가자. 혹시 모르지. 다홈이가 매번 엄청 잘 꾸미고 왔었거든. 상 하나 받을지도 몰라.”

  “어머, 다홈이 언니요? 그럼 좋겠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일부러 소이 팔짱을 끼고 나섰다. 그가 바라보는 시선이 뒷머리 위로 느껴졌지만 차마 돌아볼 수 없었다. 나 대신 소이가 뒤를 흘낏, 돌아본다. 그 시선을 분산시키려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뱉었다.

  “여기 와서 춤은 춰보지도 않은 거야? 무도회잖아. 춤은 꼭 춰보고 가야지.”

  “그, 그게요, 스텝 밟는 법도 모르겠고 누구 아는 사람도 없고 그래서요.”

  “어휴, 얘는. 누군 제대로 배우고 와서 추는 거겠니? 그냥 즐기러 오는 거지. 다음 춤곡 나오면 언니랑 올라가자.”

  “그래도 돼요? 우와, 언니, 너무 감사해요.”

  “별 것도 아닌데 뭘.”

  그가 아직 날 바라보고 있을까? 내가 묻는 말에 그가 아직 대답을 하지 않았는데. 그가 묻는 말에 나도 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할 말을 다 뱉어버렸다. 이제 결정은 나의 몫. 그건 어쩌면, 가장 힘든 짐을 내가 짊어졌다는 거다. 자긴 할 만큼 했으니 그 후는 나보고 마무리하라고? 이건 너무 불공평하지 않나?

  소이를 데리고 무대 근처에 도착하니 이미 시상식이 꽤 진행된 뒤였다. 모든 관중이 동시에 볼 수 있도록 커다란 스크린이 무대를 한가운데 두고 좌, 우, 가운데, 세 곳에 위치하도록 놓였고, 차례대로 상이 호명되고 이어서 상을 받을 사람의 모습이 그 스크린들 위에 나타난다. 상을 받을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무대 위로 오르면 사회자가 시상자를 호명해서 상을 주도록 이끌었다. 1등상이 예고된다. 가장 큰 상이라 그런지 사회자가 꽤, 뜸을 들인다. 살짝, 길게 끄는 드럼 소리에 이어 사회자가 오늘의 1등상입니다, 라고 외친다. 스크린 세 곳 동시에 보여주는 1등 주인공. 눈에 익숙한 드레스다. 그 마녀. 분명 마술을 부린 거다. 화려하긴 해도 그저 번쩍거리기만 했지 세련된 느낌은 없었는데. 다홈이가 더 세련되면 됐지 마녀보다 못하지 않았다. 주위를 가득 채우는 함성과 박수소리가 이어진다. 가면 아래 보이는 새빨갛게 칠한 입술이 잇몸이 보일 만큼 환하게 웃는다. 좋아서 어쩌지 못하나 보다. 조잡해 보이는 1등 트로피를 연신, 들었다 놨다를 반복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올림픽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줄 알겠다. 1등상을 마지막으로 시상식이 마무리되고 사회자가 1등 수상자를 위한 단독 무대를 마련한다. 그런 건 왜 하는데! 나도 모르게 욱, 하고 올라온다. 그 파트너로 누가 올라올지 안 봐도 뻔하다. 사회지가 그 마녀에게 파트너가 있냐고 묻고, 없으면 구해주겠다고 하니, 마녀가 있다고 하며 주위를 둘러보며 파트너를 찾는 시늉을 한다. 천천히 올라오는 그의 모습.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볼 땐 아무렇지 않았는데, 단둘이서 무대 한가운데 자리한 채로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이게 감정 조절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저기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이 주체 못할 뜨거움은 뭐지? 질투? 배신감? 그것도 아니면 초라한 내 자신에 대한 분노? 내게 기회를 달라고 하던 그가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춤을 추는 장면에 입 안이 씁쓸해질 만큼 화가 치밀어 오른다.

  “자, 어서들 올라오세요. 이제 3일간의 가장무도회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춤곡이 이어집니다. 내일이 오지 않을 듯이 남은 힘을 모두 모아 신나게 즐겨주세요!”

  1등 당첨자를 위한 무대가 끝나고 사회자가 멘트를 잇는다. 그걸 신호로 우르르, 관중이 한꺼번에 무대로 모여든다. 옆에 있던 소이를 잡아당겼다.

  “우리도 얼른 올라가자. 언니가 같이 춤추자고 한 약속 지켜줄게.”

  “네, 네, 그래요, 언니. 너무 흥분돼요.”

  이리저리, 치이며 무대 한쪽 귀퉁이에 이른다. 역시나 소이에게 기대할 건 없었다. 이건 뭐, 스텝의 기본도 모르는 애다. 어차피 와보는 게 좋아서 왔으니까. 소이의 몸짓에 대충 맞춰가며 시선은 계속 그를 찾았다. 더 이상 무대 한가운데 있진 않았다. 몰려든 인파에 뒤쪽으로 밀려났다. 그리 멀리 않은 위치다. 마녀는 1등상을 받고 신이 났는지 덩실, 거리며 어깨를 흔들어댄다. 어휴, 어디 환갑잔치라도 오셨어요?

  “언니, 제가 너무 못 추죠? 죄송해요.”

  “아니, 이런 데 와서 잘 추고 못 추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그저 즐기면 돼.”

  소이가 어떻게 춤을 추든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그가 어디 있는지만 놓치지 않으려 했다. 연주가 멈춘다. 다음 곡을 준비하는 찰나의 휴지기.

  “소이야. 여기까지 왔는데 언니랑만 춤추고 가면 얼마나 아쉽겠니. 이제 곡 바뀌니까 파트너 바꿔보자.”

  “어머, 언니. 저기, 모르는 사람 아무나한테 춤추자고 하는 건가요? 그냥, 우리······.”

  소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주위 인파를 밀치고 나아갔다. 다홈이 뒤를 따를 땐 어떻게 그렇게 사람 밀치고 나아가는지 감탄했었는데, 나도 마음 단단히 먹으니 그게 가능하다. 누가 불평하던 말던 앞만 보고 밀어댔다. 이어지는 건 다소 느린 춤곡. 다음 춤을 준비하던 두 사람이 내가 바로 옆에 다가오자 당황스레 동작을 멈춘다.

  “이번 곡은 저랑 추실래요?”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는 마녀의 눈길이 느껴졌지만 그게 아무렇지 않았다. 그의 시선만이 내 안중에 자리했다. 이제 어쩔 거죠? 그가 잡았던 손을 놓고 마녀를 본다.

  “이전 곡 같이 췄으니까 이번엔 양보해도 되지 않겠어요?”

  서로 반말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는 아니네. 가면 아래 감춰져 보이진 않지만 찌푸러진 얼굴 주름이 그대로 상상이 된다.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 올렸다 내리더니 마녀가 물러난다. 그래, 결국 마녀를 물리치고 왕자를 차지하는 건 공주라고.

  “그럼.”

  그가 손을 내민다. 손을 맞잡고 스텝을 맞춘다. 느린 곡이라 곡이 흐르는 가운데 맞춰나가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그와 시선이 얽힌다. 그가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간다.

  “여은 씨가 먼저 춤추자고 하다니 의왼데요.”

  “놀랐어요?”

  “솔직히, 그랬어요.”

  “내가 물었던 질문 아직 답하지 않았어요.”

  “그 대답이 듣고 싶었던 건가요?”

  그 말에 대답은 않고 스텝에 집중하는 척 고개를 내렸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 몸에 전해지는 그의 움직임이 가볍다.

  “질문은 내가 먼저 했죠. 그 답은요?”

  “애들도 아니고 누가 먼저 했다 따지는 건가요?”

  “아무래도 여은 씨 답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질 거라서요. 가장 중요한 답부터 듣고 싶군요.”

  그렇다. 예 또는 아니오, 내가 건네는 답에 따라, 모든 게 이전과 같지 않게 된다. 되돌아가지 못할 선이 앞에 자리한다. 건너야 할까, 돌아서야 할까?

  “내, 선택인가요?”

  “오롯이 여은 씨 손에 달렸어요.”

  살아오면서 그런 사치를 누린 적 별로 없었는데. 내 선택으로 일이 결정된다니. 곡이 끝을 향해 치닫는다. 마음이 점점, 급해진다. 그 마녀가 정민 씨와 춤춰야겠다고 다시 돌아올지 모르는데. 예 아님 아니오. 느리지만 아주 단단한 곡조로 마무리를 향해가는 연주.

  “나, 아니다 싶으면 바로 발을 뺄 거예요.”

  “물론이요.”

  “가족과 친구 포기할 생각 전혀 없어요.”

  “그 마음 십분 이해합니다.”

  “날, 조금이라도 강요할 생각은 하지도 말아요. 전적으로 내가 원하는 바를 존중해줘요.”

  “약속할게요.”

  춤곡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는다. 별로 빠르지도 않은 스텝이지만 내 숨이 자꾸 가빠진다. 내 손은 단단히 그의 손을 부여잡고 있고, 내 발은 혹시나 그의 발을 밟지 않을까 무척 예민해져 있다. 이건 도무지 믿을 수가 없다. 이런 일이 내 인생 안에서 벌어지다니. 그와 맞춰 이렇게 춤을 추는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긴 하다. 그런가? 지금 꿈꾸고 있나? 그래, 꿈이라면 최대한 오래 꾸면 좋겠다. 즐길 수 있을 만큼 가능한 길게. 꿈이 아니라면? 그럼 내일부터 현실적으로 마주해야겠지. 오늘은 꿈처럼 즐기는 거다. 꾸고 싶어도 꾸지 못하는 아주 귀하고 달콤한 꿈처럼. 나도 이 정도는 즐길 자격은 되지 않을까? 그래, 이 정도는 괜찮겠지. 향긋하고 알싸한. 그 달콤함에 이성을 놓고 취해버릴 정도로 매우 달달한 꿈.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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