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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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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20
작성일 : 23-05-09 14:36     조회 : 234     추천 : 0     분량 : 146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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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들쭉나무 - 반항심

 

  운수 좋은 날. 내 선택으로 읽은 책은 아니다. 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작품 소개를 들은 후 그 작품을 읽어오도록 일주일 기한이 주어졌다. 제목과 내용이 직설적으로 상반된 소설. 그 주인공처럼 나도 오늘 하루 운이 좋을 거라 생각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지난 밤, 칭얼거리지 않고 잘 자준 현무 덕분에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고, 그 덕분에 눈을 떴을 때 몸이 가뿐했다. 가끔씩 느끼는 그 가뿐함이 어찌나 소중한지. 애 때문에 야기되는 수면박탈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정말 그 소중함을 모를 거다. 잠 잘 자는 것도 복이다, 복. 오후 출근이라 느긋하게 아침을 시작했다. 얼핏, 서성거리던 남편 기척을 감지했던 듯도 한데 어느새 나갔는지 보이질 않는다. 장사라는 게 참, 그렇다. 아침 일찍 문 열어서 밤늦도록 닫질 못한다. 자기 돈 벌기가 절대로 쉽지 않다. 직장생활하는 사람들이 열 받는 일이 생기면 종종, 창업한다 그러면서 불평을 토로하지만 창업이 말처럼 쉽다면 누구나 다 할 거다. 미생이란 드라마에 나온 배우가 그랬지. 안이 전쟁터면 밖은 지옥이라고. 지옥에서 살아보라지.

  자는 애를 깨웠더니 칭얼거린다. 그래도 내 컨디션이 나쁘지 않아 그 칭얼거림이 그다지 싫지 않다. 어쩔 땐 그게 신경에 거슬려 욱, 하고 소리를 질러버리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을 듯. 애 먹이고 씻기고 그러면서 나도 덩달아 이것저것 입에 집어넣고. 애를 먹이다 보면 나를 위해 온전히 요리하고 음미하기가 힘들다. 일단은 애가 우선이고 먹이고 나서 남은 게 내 차지가 될 때가 다반사다. 내 엄마도 그랬겠지? 괜히 미안하다. 그 빚을 조금이나마 더 갚을 기회를 주지 않고 하늘나라로 일찍 떠나버렸으니까.

  얼추 여유가 있어 애 데리고 바람이라도 쐬고 오려고 마음을 정했다. 점심시간 맞춰 시부모님댁에 들러 애 맡기고 출근하면 딱, 되겠다. 햇살이 좋은 날이다. 그 빛을 조금이라도 더 쐬겠다고 서둘렀다. 보행기에 애를 앉히고 문단속을 하려 집 구석구석을 둘러봤다. 은근히 정신이 산만해졌는지 요즘 들어 자주 뭘 까먹고 안 잠그고 잊어버린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더 확인하는 버릇을 들이려 노력 중이다. 이 정도로 확인했으니 됐겠지. 가장 우선은 현무를 잃어버리지 않고 무사히 데리고 돌아오는 것. 설마 애를 잃어버리겠냐고 묻는다면 그 많은 미아들은 왜 생겨나는지 반문하고 싶다. 부모들이 방심하는 틈 사이로 애는 빠져나가버린다. 현무 이마에 난 조그만 상처에도 그 난리를 떠시던 어머님에게 현무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하기조차 싫다. 최소 뒤로 넘어가는 수준? 딸그락. 현관문을 마지막으로 잠그고 보행기를 밀어 골목으로 나선다. 아아, 좋다. 바깥 공기가 이리 좋을 수 있다니. 엄마 기분이 좋은 걸 아는지 현무도 방긋, 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주위를 끊임없이 둘러본다. 얼마나 세상이 신기하겠어? 눈에 들어오는 하나하나가 새롭고 인상적이겠지.

  우리 계약을 맺어볼까요? 계약이라니. 무슨 뜬금없는 소린지. 그 사람. 박, 정, 민. 내가 이미 마음속으로 그에게 작별을 고했다는 걸 알기나 할까? 당연히 모르겠지. 말해주지 않는다면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희한하게도, 그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누면 대화가 술술, 풀려나간다.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말이 알아서 나아간다. 왜 누군가와는 그렇고, 다른 누군가와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지 참 모를 일이다. 대화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과는 정신을 집중해서 상대방이 흥미를 잃지 않도록 노력해도 이건 그냥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다. 어느 순간 내가 탈진해서 그 노력을 그만두게 된다.

  그가 술집에서 있었던 일을 꺼내자 괜히 얼굴이 화끈, 거렸다. 그 밤 뒷부분은 제대로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취해서 머리에 남는 게 없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니 그게 공연히 불안하고 창피하기만 하다. 험악한 실수라도 하지 않았을까 자꾸 상상을 하게 된다.

  “전화번호 드렸는데 연락이 없더군요.”

  “제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굳이 연락드릴 필요를 못 느꼈어요.”

  “그랬는데도 가면무도회에서 다시 만났으니 이것도 인연이네요.”

  “그 가면무도회, 지역 주민 모두를 초대한 거잖아요. 그런 자리에서 만났다고 인연이면 내 주변에 사는 사람 모두가 인연인 거네요.”

  “그럴지도 모르죠. 이 넓고 넓은 세상에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 그 위치에서 함께 살게 됐다면 그것에도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죠.”

  뭔가 톡, 쏘는 대답을 해주고 싶은데 말이 궁해졌다.

  “제 말에 공감이 가면 맞다고 해줘도 될 텐데요.”

  “본인이 좀 밉상인 거 알아요?”

  “밉상이요?”

  “은근히 주는 거 없이 미운 인상.”

  “제가 미워요?”

  “얄밉다고 해두죠.”

  “얄밉다와 밉다는 살짝, 다르죠?”

  “어떻게요?”

  “밉다, 는 마음에 들지 않거나 눈에 거슬리는 건데, 거기에 얄이라는 글자가 붙으면 그 행동이 약삭빨라서 밉다, 라는 뜻이 되죠. 제 행동이 문제인가요, 아님 제 자신이 문제인가요?”

  “그걸 묻는 의도가 뭐죠?” “행동이 문제면 고치면 될 텐데, 존재 자체가 문제면 없어지는 수밖에요.”

  존재 자체가 문제냐고 묻는 그. 손에 든 컵에서 풍겨오는 쌉쌀한 커피 향기. 나, 솔직히 이 커피와 그와 나누는 대화를 즐기고 있다. 그걸 말해줘야 할까? 그럴 자신이 없다. 그럼, 안 되는, 거잖아?

  “같은 동네에 사는데 저한테 미움받는다고 사라져버릴 수는 없잖아요?”

  “멀리서 발견한다면 도망가는 노력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 웃네요.”

  그래요. 나오는 웃음을 막을 길은 없네요.

  “어이가 없어서요.”

  “어이가 어디로 갔지?”

  “아, 진짜.”

  “죄송요. 아재라 불릴 만큼 나이는 먹었죠. 그러니 아재개그 하는 걸 피할 길이 없네요.”

  “그래도 노력하세요.”

  “그러죠.”

  픽, 피어나오는 웃음. 자꾸 웃으면 헤퍼 보일까 자제하고 싶은데 그것도 쉽지 않다. 그렇다. 그와 만나면서 새로 배우게 된 것. 웃음을 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좀 마음껏 웃어요. 괜히 억누르려 하지 말고. 누구한테 죄 지었어요?”

  그를 빤히 쳐다봤더니 그도 빤히 쳐다본다. 내 표정이 굳은 걸 보지 않고도 알겠다. 커피 한 모금. 그러곤 바닥을 내려다본다. 대화를 나누다 갑자기 침묵이 흐를 때, 그 침묵을 어떻게든 깨보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이 사람과는 그럴 필요가 없다. 침묵은 침묵 자체로 의미를 지니고 그걸 일부러 밀어내려 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얼마간 그도 말이 없다. 얼굴 위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어?

  그의 새끼손가락이 내 새끼손가락을 건드린다. 톡, 톡. 이럴 땐 말 대신 행동인가? 내 눈이 그의 얼굴로 향하자 그가 입을 뗀다.

  “우리 계약을 맺어볼까요?”

  “계약이요?”

  “사람 사이에 맺는 약속 같은 거. 주로 목적 달성을 위해 조건을 걸지요.”

  “사전용어를 묻는 게 아니구요.”

  “목적은 서로 행복해지는 것. 조건은 서로의 과거, 배경, 가정사 같은 건 아무것도 개의치 않고······.”

  말을 마저 끝내지 않는 그.

  “개의치 않고요?”

  내가 묻자 이젠 그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여은 씨는 행복해지고 싶지 않아요?”

  갑자기 그렇게 묻는 의도는 뭐지?

  “사람은 누구나 행복해지길 원하잖아요?”

  “행복해지기 위해, 누구나, 감수해야 할 게 있지 않겠어요?”

  “행복해지는 게 쉽다면 사람들이 그렇게 행복을 찾아 헤매고 다니진 않겠죠?”

  “여은 씨는, 그럼, 행복을 위해 얼마나 희생할 수 있어요?”

  이건 어떻게 대답해야 한다?

  “행복을 위해 희생한다는 말, 어째 모순되게 들리네요.”

  “모순이라?”

  “그렇잖아요. 희생한다는 건 자기가 잃고 싶지 않은 걸 잃는 건데 그러면서 어떻게 행복해질 수 있죠?”

  “사람이 다 가질 순 없잖아요? 우선순위를 매겨 더 원하는 걸 갖는 거죠.”

  “우선순위를 정하기 힘들면요?”

  “그건 마치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어떻게든 다 가져야겠다고 떼쓰는 애가 하는 질문처럼 들리는데요.”

  “정민 씨 말의 요지가 뭔가요?”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 수도 있겠죠. 그렇지만, 생활에 변화를 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요?”

  “기회라는 게 자주 찾아오지 않잖아요? 여은 씨와 제가 이렇게 서로를 알게 된 것도 어찌 보면 천만 분의 일에 해당하는 특별한 인연일 수 있는 거고 그걸 놓치지 않았으면 합니다.”

  문득, 현무가 웅, 웅, 거리는 소리를 내서 그와의 기억에서 벗어나 보행기 안을 들여다봤다. 입을 오물거리며 양손을 맞부딪힌다. 미리 준비해뒀던 간식거리를 입 안으로 밀어 넣어준다. 기분 좋아 짓는 눈짓. 양팔을 들어 공중에서 마구 휘젓는다. 현무야, 엄마도 너처럼 단순하게 살 수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뭔가를 좋아서 하고, 그걸 해서 행복하고, 행복하니까 사는 게 즐겁고. 아니다, 그건 너무 생각 없는 논리다. 단순하게 살기만 해서 행복하다면 현무는 항상 행복해야겠지만 현무라고 항상 행복하지만은 않다. 배고파서 울고, 귀저기 갈아달라고 울고, 졸리다고 울고, 어떤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운다. 그렇게 자주 울 만큼 사는 게 마음에 들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현무야, 너는 행복해지기 위해 뭘 희생할 거니? 아니, 아직 어린 현무에겐 그런 선택지조차 없는 거겠지. 그나마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거에 감사해야 하는 걸까?

  “정민 씨와 제가 서로 알게 된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자는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렇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죠.”

  “너무 비즈니스 제안처럼 들려요.”

  “그래서 싫다는 건가요?”

  “저는 비즈니스적인 것보단 로맨틱한 게 좋거든요.”

  “여자분들은 종종, 그런 선택을 하더군요.”

  “그건 너무 편견이지 않나요? 여자라도 비즈니스적인 걸 더 좋아할 수 있어요.”

  “통계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더 그런 성향을 보인다는 겁니다.”

  “그럼 그 통계를 뒷받침할 증거는 가지고 계신가요?”

  이번엔 그가 미소 짓는다. 나도 그를 웃긴 거네.

  “제가 졌네요. 제 논리를 증명할 증거는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다시 묻죠. 조금 더 로맨틱하게요. 수천 광년을 지나 우리가 이렇게 힘들게 만났습니다. 이런 인연이 또 있을까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도 여은 씨 같은 분을 찾긴 힘들겠죠. 그런 소중한 존재인 그대를······.”

  “잠깐만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들다.

  “이번엔 또 왜 그러죠? 로맨틱한 게 좋대서 로맨틱하게 해봤는데.”

  “그건 로맨틱한 게 아니라 유치해요.”

  “비즈니스적인 건 비즈니스적이라 싫고, 로맨틱한 건 유치하다고 그러고. 그럼 좀 가르쳐줘봐요. 어떻게 해야 제대로죠?”

  “대강 이 정도면요. 정민 씨와 나는 어쩌면 오랜 시간을 헤매다 이제 겨우 서로를 발견하게 된 건지 몰라요. 길을 잃어버리고 헤매기도 했지만 결국 만날 인연은 만나게 된 거죠. 그런 소중한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네요. 진정한 행복을 찾기 위해 삶 속에서 많은 걸 희생해야 한대도 그 행복을 위해 감수하겠어요.”

  그가 나를 똑바로 쳐다본다.

  “그 제안 받아들이겠습니다.”

  “?”

  덜커덩. 뭐지 이 소리는? 현무는 신이 나서 상체를 마구 흔들어댄다. 보행기가 흔들리자 그걸 오히려 즐기고 있다.

  “어머, 이게 왜 이래?”

  멀쩡했던 보행기 한쪽 바퀴가 반쯤 빠져있다. 집에서 나올 때만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보행기가 자동차도 아니고 정기적으로 점검을 받진 않는다. 그렇더라도 멀쩡했던 게 아무런 낌새도 없이 탈이 나면 안 되는 거잖아.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이리저리 바퀴를 맞춰보려 노력했지만 고정하고 있던 이음새에 문제가 생긴 건지 제대로 고정이 되질 않는다. 이렇게 길 한가운데서 문제가 생기니 참 난감하다. 자동차처럼 견인차량이 와서 끌고 가줄 것도 아니고. 바퀴가 제 멋대로 도는 채로 보행기를 밀고 가려니 힘이 두 배로 든다. 이거 슬슬, 기분을 잡치려 한다. 아니야. 살면서 이런 예상치 못한 문제를 겪을 때가 한두 번도 아닌데 그럴 때마다 기분이 상하면 정상적인 정신상태를 유지하긴 힘들어진다.

  “아니, 이게 왜 이러누? 바퀴 구멍이라도 났나?”

  처음엔 누군가 도움을 줄 거라 예상하고 그 목소리가 반가웠다. 시선이 옮겨갔는데 반가움이 경계로 변한다. 상대방을 외모로 보고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누누이 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가슴께에 닿을 만큼 길게 수염을 기른 나이 많은 어르신이 땟물이 얼룩진 꾀죄죄한 복장을 한 채로 현무를 넘겨보고 있다.

  “아이구, 이뻐라. 무언가 탈이 난지도 모르고 저리 좋다고 웃고 있네.”

  그 어르신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자꾸 경계심이 커져간다. 아무래도 제대로 된 도움을 받긴 어렵겠고 어서 자리를 벗어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여기 바퀴가 빠졌네.”

  “아, 네.”

  “그렇게 끌고 가려면 힘들지. 잠깐 있어봐.”

  도움을 주겠다고 하시면 사양하고 얼른 지나치려 했는데 마다하기도 전에 바퀴를 손에 잡고 이리저리 흔들어대신다. 끼기긱. 반쯤 이어져있던 바퀴가 통째로 빠져버린다. 당황한 표정이 짙어지는 어르신.

  “아니, 이게 왜 이러나?”

  “아, 저, 괜찮아요. 일단 집에 돌아갔다 수리 받으러 가야겠어요.”

  “이런 상태로 어떻게 집까지 가려고.”

  내가 아무리 마다해도 어르신이 그만두지 않고 계속 바퀴를 다시 집어넣으려 애를 쓰신다. 휘청. 바퀴가 지탱하던 자리가 비어 한쪽으로 넘어지려 한다. 황급히 반응해서 겨우 보행기 균형을 잡을 수 있었다. 불그스름하게 변해버린 어르신 얼굴 위로 땀이 흘러내린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서 더 강하게 거부하며 보행기를 밀고 나섰다.

  “괜찮아요, 어르신. 집이 바로 이 근처에요. 아무튼 감사합니다.”

  “아니, 이봐요. 애기 엄마. 그렇게 해서 어떻게 가려고.”

  이제 흡사 도움을 주는 게 아니라 가는 길을 막아서는 상황이 돼버린다. 순간 훅, 차고 오르는 짜증을 참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후회가 됐지만 그 당시엔 참기 힘들었다.

  “왜 이러세요, 정말!”

  내 반응에 어르신이 움찔, 동작을 멈춘다. 그 새를 놓치지 않으려 속력을 냈다. 황망히 내 뒷모습을 바라보는 어르신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모르는 척 최대한 발걸음을 빨리해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어르신이 보이지 않을 지점에 이르러서야 겨우 숨을 돌렸다. 아예 제대로 빠져버린 바퀴를 손에 들고 어렵게 균형을 잡아가며 보행기를 밀고 가려니 이게 힘이 세 배, 네 배가 든다. 땀으로 등이 흥건히 젖었다는 걸 그때서야 깨닫는다. 시부모님 댁까지 가는 거리가 상당히 멀게 느껴져 막막하기만 하다. 그래도 가야했다. 더 머뭇거리다간 출근시간에 늦을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일로 하루를 망치지 말자고 다독이며 발걸음을 지속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방긋, 거리며 웃어주는 현무가 너무 고마웠다. 그래, 현무야. 우리 오늘 하루 망치지 말자. 시부모님 댁 현관문이 이렇게 반가워 보인 적이 없었다. 됐어. 현무 맡기고 출근하면 되는 거야. 운수 좋은 날이 되도록 하자고.

  “어머님, 저 왔어요.”

  평소대로라면 왔냐고, 맞이하며 문을 열어주시는 어머님이 나오시질 않는다. 초인종 소릴 못 들으셨나? 다시 초인종을 눌러대며 어머님을 불렀다. 힘이 빠져서 그런지 목에서 새된 소리가 나온다. 역시 반응이 없다. 어, 이상하다. 덜컹.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어머님이 아니라 아버님이다.

  “저 왔어요, 아버님.”

  “그래, 왔냐.”

  시선을 제대로 맞추지 않으시는 아버님의 얼굴이 어둡다. 뭐지? 허리를 숙여 보행기 안 현무 얼굴을 살짝, 어루만지시더니 그대로 옆을 스쳐 밖으로 나가신다. 얼른 아버님 앞길을 트기 위해 옆으로 황급히 붙어 섰다. 갑자기 들리는 어머님의 새된 목소리.

  “그러고 가버리면 다냐고?!”

  아버님은 못 들으신 듯 그대로 나가버리신다. 이거 조짐이 좋지 않은데?

  “나만 현무 할머니야! 당신은 현무 할아버지 아니냐고!”

  상황 판단이 서질 않아 거실로 들어서지도 못하고 그대로 보행기를 잡은 채 서 있었다. 균형이 잡히지 않는 보행기를 잡고 있는 게 점점, 더 힘들어져 결국 어머님과 인사를 나누지도 않고 현무를 안아 올려 안으로 들어섰다. 쾅. 방문이 열리고 나오시는 어머님 얼굴에 이미 울긋불긋, 제대로 색이 올랐다.

  “그 인간 결국 나갔냐?”

  아버님을 내 앞에서 그 인간이라고 부르다니 어머님이 화가 나긴 제대로 나셨다.

  “네. 방금 나가셨어요.”

  “망할 인간. 지 생각밖에 못하지.”

  “무슨, 일, 있으셨어요?”

  “너 오는 거 아는데, 내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버렸거든. 하루만 현무 봐달라고 했는데도 이미 약속된 일이라 한사코 안 된다고 저리 가버린다. 한 번 정한 약속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야 하는 네 시아버지 성격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내가 오죽하면 그랬겠니. 아무래도 곗돈 문제가 생긴 거 같다.”

  어머님 일상 중 중요한 몫을 차지하는 계모임. 현재 참여하시는 계모임이 한두 건이 아닌 건 알고 있다. 정확히 몇 건인지 모르겠지만 아마 대여섯 개는 넘을 거다. 난감한 표정을 짓는 어머님.

  “이럼 네가 곤란해질 걸 알지만 곗돈이 걸린 문제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네.”

  그럼 저는 어쩌라구요?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저기, 오늘, 하루만 일 쉬면 안 되냐?”

  “그게, 하루 쉬는 건 문제가 아니지만, 갑자기 알려 주시면······, 저 대신할 사람 구하기도 힘들고······.”

  “내가 안다. 미안하다. 그런데 나도 발등에 불이 떨어진 문제라서 말이다.”

  신발을 신고 나서시는 어머님 기세에 밀려 그만 뒷걸음질 쳤다. 보행기 바퀴가 빠진 일은 꺼내지도 못했다. 출근시간이 바로 코앞인데 이제 와서 오늘 일 못 나간다고 알리는 건 용납될 리가 없다. 총총, 걸음으로 멀어져가는 어머님 뒷모습을 황망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직 출근시간까진 여유가 있지만 현무를 어찌해야 할지 대책이 서질 않는다. 일단 예슬이가 정시에 퇴근할 수 있도록 시간 맞춰 도착해야 했다. 여태 한 번도 현무를 일터에 데려간 적은 없었다. 예슬이라도 함께 있으면 그나마 어떻게 해보겠지만 예슬이마저 퇴근하면 나 혼자서 가게와 현무를 전부 돌봐야 한다. 그러다 문득, 한쪽 바퀴가 빠진 보행기를 끌고 일터까지 가야 한다는 데 생각이 미치지 이건 뭐, 폭발하려는 감정이 거의 한계에 다다르는 걸 감지했다. 아니야, 한여은. 참아, 참으라고. 화내봤자 바뀔 건 없다고.

  보행기가 한쪽으로 기울어 힘줘서 균형을 바로 잡을 때마다 울화 게이지가 한 뼘씩 차오른다. 화원 간판이 보일 즈음엔 양팔 근육이 쑤셔와 눈물이 핑, 돌 정도였다. 그래도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그나마 쌓인 화를 가라앉히고 호흡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집에 갈 땐 남편에게 부탁해 차로 데리러 오라고 해야지 싶다. 그것도 안 되면 택시라도 타고 가야지 더 이상은 이렇게 걷지 못할 상태였다.

  “언니 왔어요? 퇴근 시간 가까워져 언니를 보게 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니까. 어머, 현무 아니야? 웬일이래요? 현무가 여길 다 오고?”

  시부모님한테 벌어진 일을 설명하는 사이 입 안이 까슬해졌다. 그게 힘들게 여기까지 보행기 끌고 오느라 피곤해서 그런지, 아님 남부끄러운 집안 사정을 타인에게 설명해야 하는 게 창피해서 그런지 아무튼 편치가 않다. 현무를 봐서 반가우면서도 걱정이 앞서는 표정으로 예슬이가 묻는다.

  “언니, 정말 괜찮겠어요? 현무 데리고 가게까지 보려면?”

  “오늘 딱 하루만. 절대 이런 상황 또 안 벌어지도록 할게. 미안.”

  “특별한 일 없으면 평일엔 사장님 잘 안 들르시니까 그건 문제가 아닐 거예요. 아휴, 내가 현무 봐주고 싶긴 한데 하필 오늘은 저도 일이 있어서 늦게까지 못 남아있어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네가 왜 죄송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오히려 현무 여기 데려온 거 눈 감아주니 내가 더 감사하지. 빨리 하던 일 마무리하고 퇴근할 준비해.”

  오늘 하루만 어떻게 버티는 거다. 어떻게든.

  “언니, 그럼 오전 정산한 거 보여드릴게요.”

  인수인계를 하고 두 사람이 필요한 일을 마무리 지었다. 예슬이는 문을 나서면서도 걱정스런 눈길을 보낸다. 나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안쓰러워 해줘 그게 참 고마웠다. 다행히 오후가 바쁘진 않다. 손님이 북적이는데 현무까지 울어대면 정말 난감해질 텐데 아직 그런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다. 시간아 빨리 흘러라. 미리 현무 아빠한테 얘기를 해두는 게 낫겠지?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전화를 걸었다.

  “어, 무슨 일 있어?”

  하여튼 무드 없긴. 다짜고짜 용건부터 묻는 건 그 사람의 전형적인 방식이다. 보고 싶었어, 사랑해, 이런 건 바라지도 않지만 오늘 하루 어땠냐, 정도는 물어봐주면 좋을 텐데. 뭔가 묻는다면 점심은 뭐야, 저녁은 뭘 먹어, 같은 먹는 이야기뿐.

  “당신 있다가 현무랑 나랑 데리러 와야겠어.”

  “현무?”

  보행기 바퀴 빠진 일을 설명하며 이상한 할아버지 만난 얘길 덧붙이니 쯧쯧, 혀를 찬다. 어떻게 처신해서 그런 사람이 함부로 접근하게 만드냐는 말에 울화 게이지가 요만큼 더 올라간다. 그치만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라 말대꾸하기도 귀찮았다. 숨을 깊게 한 번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그리곤 말을 딱, 딱, 한 음절씩 끊어가며 덧붙였다.

  “나, 퇴근 시간, 맞춰, 와줘. 지금도, 팔이, 욱신거려, 힘들어.”

  “그게······.”

  “그럼 있다 봐. 수고.”

  더 듣고 있기 싫어 못 들은 척 통화를 마무리했다. 지금은 날 좀 봐줬으면 좋겠다. 이미 몸은 지쳤고 신경은 날카롭게 곤두섰다. 그럼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이렇게 심신이 힘들 때 가장 만만한 대상은 가깝게 지내는 가족이다. 그래서 그렇게 얘기하겠지. 거리가 가까운 가족이 주로 깊숙이 상처를 준다고. 그게 미안하지만 나도 여유가 너무 없다.

  “잠시만요. 제가 확인해드릴게요.”

  어? 사장님 목소리?

  “여은 씨. 별 일 없고? 마침 다른 손님이 없네. 내가 잘 아는 부부신데 매화 분재를 찾는다고 하셔서.”

  놀란 속을 감추려 애써 노력하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른 현무가 있는 쪽을 살폈다. 여기선 현무가 보이지 않는다. 사장님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인다.

  “분재가 단가가 세잖아. 얼른 괜찮은 걸로 하나 찾아봐. 이럴 때 실적 올리는 거지.”

  사장님을 따라 들어서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부부에게 목례를 건네고 안으로 들어섰다. 현무야, 엄마 한 번만 봐줘. 사장님 가실 때까지만 조용히 있는 거야, 제발. 이게 정신이 다른 데 팔리니 일이 제대로 손에 잡히질 않는다. 평소 같으면 바로 찾아낼 매화분재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뒀더라? 허둥거리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대화를 나누는 사장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한테 하는 얘기가 아닌데도 그 소리가 빨리 찾아내라고 다그치는 듯 울린다. 분재는 따로 한쪽에 몰아두는데 어째 소나무 분재만 보이고 매화가 눈에 들어오질 않는다. 아, 그렇지. 매화 피는 시기가 다가와서 그걸 최대한 늦추기 위해 차가운 곳에 두려 바깥에 빼놨었다. 얼른 밖으로 나가 가장 예쁘게 물이 오른 걸로 골라 싸놓은 포장을 풀었다. 분재를 가지고 들어서자 사장님이 살짝, 과장된 태도로 감탄사를 뱉는다.

  “아휴, 이거 제대로 꽃이 폈네. 요맘때 매화는 정말 예쁘다니까요. 제가 소나무 분재도 좋아하지만 그게 사시사철 한결같다면, 매화는 한창 피었다 졌다가 다시 피기를 반복하는 변화가 무쌍해서 좋아요. 여기 구경해보세요.”

  부부 손님을 구슬리는 사장님 뒤에 서서 가장 환한 미소를 지으려 애썼다. 그러면서도, 구석에 있는 현무가 신경 쓰여 도대체 집중이 되질 않았다.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이 스트레스 지수가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다. 까륵. 흡, 내 숨이 멈춘다. 사장님이 한창 말을 이어가다 나를 돌아본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네? 아, 아뇨. 저는 들은 게 없는데요.”

  “아유, 예뻐라. 소나무 말고 매화로 하자니까.”

  “자고로 소나무가 은근한 맛은 있는데 말이지.”

  남편은 소나무를 원하는 듯하지만 매화에 매료된 부인의 성화에 져준다. 매화 분재로 결정이 나고 떨리는 손으로 분재 포장을 한다. 자꾸 포장지가 미끄러져 손 안에서 놓치는 걸 사장님이 눈치 채지 않을까 조바심 내며 마무리를 하는데 어떻게 끝마쳤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럼, 여은 씨. 오늘 하루 수고하고.”

  부부 손님을 뒤따라 나서는 사장님 뒤로 문이 닫히고 그들 부부와 대화를 나누는 사장님 목소리가 들리지 않자 나도 모르게 다리에서 힘이 턱, 빠진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지탱하기 어려워 얼른 곁에 있던 의자 위로 주저앉았다. 이게 사람이 긴장을 하니 무지막지하게 힘이 든다. 그리곤 하루 종일 먹은 게 없다는 걸 깨달았다. 현무도 제대로 먹은 게 없어 배가 고플 텐데 칭얼거리지 않은 게 정말 신기하고 감사했다. 서둘러 먹을 거리를 찾아 현무 입에 물렸다. 기분 좋아 웃는 저 얼굴. 그래, 엄마가 그걸로 위로 받으며 산다. 현무야, 엄마가 고마워.

  녹초가 된 상태로 버티듯이 오후를 보냈다. 힘이 드니 어째 시간의 흐름이 더욱 더디다. 십 분이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일찌감치 폐장할 준비를 마치고 남편의 차가 도착하길 기다리는데 도대체 나타날 기미가 없다. 오긴 오는 거야? 그게 시간이 되지 않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건데도 마치 오지 않을 거라는 기분이 자꾸 들었다. 결국 남편은 퇴근 시간에 맞춰 도착했다. 남편과 인사도 제대로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서둘러 화원 문단속을 하고 바퀴 빠진 보행기를 차 트렁크에 실었다. 남편이 뒷좌석에 현무를 앉히고 운전석에 올라선다. 내가 안전벨트를 매는 걸 확인하고 시동을 건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에어컨 바람에 저절로 눈이 감긴다.

  “많이 피곤해 보이네.”

  “말도 마.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겠어.”

  “어머니랑 통화했어.”

  “뭐라고 하셔?”

  “지금 아버지한테 완전히 삐치셔서 다신 상종도 안 하겠다는 식으로 말하시던데.”

  “아버님이 그럴 땐 한 발 양보해주셔도 좋을 텐데.”

  “아버지 성격 잘 알잖아.”

  “사람이 어떻게 자기 원하는 대로만 하고 살아. 그만큼 나이도 드셨고 이제 유해지실 때도 됐잖아?”

  남편은 내 말에 동조하지도 반대하지도 않는다. 그래도 같은 남자인 아버지 편을 들고 싶은 걸까?

  “어머님 곗돈 문제는?”

  “총무가 곗돈을 개인 사정을 위해 유용했나 봐. 계모임 회원들이 한꺼번에 몰려가 닦달을 해서 차로 보증을 서게 했나 보더군. 암튼 잘못되면 차를 팔아서라도 갚도록 하게 했다네. 대단들 하시지.”

  “힘들게 모아온 곗돈을 날려버릴 상황인데 그렇게라도 해야지 않겠어?”

  “그래도 계모임하며 친분을 쌓아온 사이잖아. 너무 심하지 않나?”

  “돈 앞에서는 가족도 사정 안 봐주는데 친구 사이는 대단치도 않지.”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는 남편. 이 사람은 자기 생각이랑 맞지 않는 상황에선 자기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기 보단 그 상황을 피해버린다. 굳이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피해하기만 해선 살아갈 수 없는데 말이다.

  “아얏.”

  “팔 많이 아파?”

  “온종일 내내 이렇게 저렇게 비틀거리는 보행기 균형 잡느라 진을 다 뺐어.”

  “둔하게 그걸 그리 끌고 다녔어? 택시라도 잡아타고 집에 돌아와서 보행기 두고 오던가 하지.”

  “둔하게? 길 가다 갑자기 바퀴가 빠졌는데 길 한복판에서 택시 잡긴 쉬운 줄 알아? 그리고 누군 택시 타고 싶지 않아서 안 타? 택시비 아까운 건 어쩌고?”

  “그 택시비 아끼려다 약값 더 나가게 생겼으니 그러지. 사람이 하나만 보고 둘은 못 보잖아.”

  “지금 나랑 한 바탕 하겠다고 덤비는 거야?”

  울화 게이지 완충. 솔직히 내가 말을 내뱉으면서도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마구 쏘아댔다. 역시나 이번에도 남편은 대꾸를 하지 않는다. 이번만큼은 확실히 전달된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거지. 속을 박박, 긁어내듯 퍼붓고 나니 그래도 후련하긴 했다. 그러면서 남은 마지막 체력도 방전됐다. 중력이 찍어 누르는 기분이 들 만큼 몸이 무거웠다. 눈을 감고 창쪽으로 기댔다. 이젠 누가 뭐라도 해도, 심지어 나를 들쳐 업고 간다고 해도 조금의 반항도 할 수 없을 만큼 피로감이 극도로 몰려온다. 손끝 하나 까닥하기 싫었다. 세상만사가 다 귀찮았다. 그저 머릿속에 명징하게 떠오르는 한 가지. 그와 나눴던 대화 마지막 부분.

  “저, 저기요. 그, 그게, ······, 그건 내가 먼저 꺼낸 말이 아니잖아요.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죠.”

  “그럼 제대로 묻죠. 제가 제안하고 싶은 건, 이런 소중한 인연을 놓치지 말고 서로 행복해지도록 이용하자는 겁니다. 별로 로맨틱하게 들리진 않지만 제가 그렇게 꾸미는 재주가 부족하네요.”

  “서로 행복해지도록?”

  “서로가 행복해지는 게 가장 우선순위가 되는 거죠.”

  운수 좋은 날인 줄 알았는데 운수 사나운 날이었다. 정말 더럽게 운 나쁜 날이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게 좋다고 하지만 그럼 오늘 끝을 어떻게 좋게 만들어야 하지? 그가 하자는 대로 하면 좋아지는 거야? 아니야, 성급하게 굴지 말자고. 현재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아야 하는데. 하지만, 그런데, 그렇지만 말이야. 생활에 잠시 변화를 주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 않을까? 영구적이 아니라 잠시만 말이지. 살짝, 양념 뿌리듯이 잠시만. 기분전환 하듯이 그렇게. 그럼 삶이 더 맛나지 않을까? 조미료도 많이 뿌리면 느끼해진다고. 아주 살짝만. 이렇게 찌질하고 처참하고 바닥까지 닿은 듯한 기분이 들 때, 그 기분을 낫게 해줄 그런 조미료가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으, 러엏, 지이, 않으려나? 아마 제대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생각해보면 그걸 얼토당토않은 생각으로 받아들일지 모르겠는데, 지금처럼 몸과 마음이 한없이 무거워 가라앉는 순간엔, 그저, 그렇다, 라고 답하고 싶다. 그래, 그렇게 답하니 한결 좋네. 그래, 맞아, 맞다고. 그 양념 찬스를 쓰겠다고. 눈앞 탁자에 올라온 음식에 뿌리겠다고. 그게 없으면 써서 못 삼키겠으니 그래야겠다고. 그래, 라고 무심코 입에서 튀어 나온다. 운전하던 남편이 묻는다.

  “어?”

  “아니, 아니야. 운전에 집중해.”

  말해버렸다. 입으로 뱉어버렸다. 그랬더니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 든다. 그 단어가 그렇게 무거운 거였나? 아아, 숨쉬기가 편해진다. 아마도, 끝이 좋으면 나름대로 나쁜 하루는 아니였다고 변명의 여지를 가져보는 건지도. 다시 한 번 속으로 뱉어본다. 그, 래.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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