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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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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19
작성일 : 23-05-04 13:32     조회 : 227     추천 : 0     분량 : 8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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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수선화 - 신비

 

  “언니, 뭘 그렇게 보세요?”

  “얘들 봐봐.”

  앞에 놓인 세 개의 화분.

  “똑같이 물을 주고, 똑같이 영양제 주고, 똑같이 흙을 갈아줬는데, 왜 자라는 게 다르지? 내가 은근슬쩍, 차별이라도 했다면 억울하지도 않겠어. 이건 동일하게 손이 갔는데 얘는 잎이 튼실해지고 쟤는 말라비틀어지는 이유가 뭐냐고?”

  “어쩌겠어요? 그게 다 디엔에이라잖아요. 타고난 건 바꿀 수가 없는 거죠.”

  타고난 건 바꿀 수가 없어? 아무리 그래도 노력하면 바꿀 수 있지 않나?

  “그렇게 생각하면 너무 우울하잖아. 바꿀 수 없다면 노력할 이유도 없는 거고.”

  “그렇긴 하지만 각자 받은 만큼 그걸로 최선을 다해 사는 거 아니겠어요? 운명이라는 걸 선택할 순 없으니까요.”

  선택이라. 사람들은 종종, 어쩔 수 없었다, 그래야 했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라는 말로 자신을 위로하곤 한다.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니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거다. 물론, 살면서 많은 것이 의도와 상관없이 주어진다. 나도 텔레비전에서 보게 되는 부자들의 삶을 볼 때면 난 왜 저런 집안에서 태어나지 못했나, 부럽기도 하고, 한탄을 자주 했었다. 부모, 키나 얼굴 같은 외모, 심지어 공부하는 머리도 타고난 거다. 그걸 고를 수가 있다면 누구든 부자 부모, 연예인 외모, 뛰어난 석학의 머리를 고를 테지. 그럴 수 없으니 부자가 아닌 사람, 못생겼다는 얘길 듣는 사람, 저능아라고 놀림 받는 사람이 생기는 거고. 그렇더라도, 그 주어진 상황 안에서 고를 카드는 늘 있다. 아무리 가난하고 못생기고 어눌한 사람도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 식사로 무얼 먹을지 자기 뜻대로 고를 수 있으니까. 이건 너무 극단적인 예시인가?

  “아무리 디엔에이가 나빠도 물이랑 영양제라 열심히 빨아들이면 저렇게 말라비틀어질 정도는 아닐 텐데, 어째 그런 노력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여.”

  “언니 말 대로면, 저기 말라비틀어진 애는 엄청 게으르고 삶에 의욕도 없는 거네요. 저렇게 될 만하네.”

  저렇게 될 만하네. 예슬이가 그냥 지나치듯 아무렇지 않게 꺼낸 말이란 건 나도 안다. 그렇지만 그 말이 슥, 하고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예슬이 반응에 갑자기 그 화분한테 미안해졌다. 내가 괜히 불평을 해서 나 때문에 못할 말을 듣기라도 한 듯. 방금 전까지 힐난하는 입장이었다면, 예슬이 말을 듣고 나니 변명을 해주고 싶다. 그렇게 말라비틀어지기까지 그 화분 나름대로 속사정이 있을 텐데, 그건 무시하고 그럴 만하다고 비난만 하는 건 어째 공평하지 않다. 아침 식사로 먹고 싶은 게 있어도 그걸 살 돈이 없다면 먹지 못하는 게 현실이니까. 이게 아주 웃긴다. 나 혼자서 공소하고 변론하고 다 하는 거잖아.

  “그으렇지만도 않잖아? 쟤도 사정이 있을 텐데 혹시 모르지. 빨아들이고 싶어도 빨아들여지지 않는다거나.”

  “그게 누구든 사정이 있겠죠. 사람이든 식물이든, 그런 사정없는 자가 어디 있겠어요? 각자 받은 걸로 최선을 다해 사는 게 맞긴 한데, 받은 게 적으면 욕을 먹게 될 확률이 더 높아지는 거 같아요.”

  받은 게 적으면 욕을 더 먹게 된다, 라. 내 손에 든 게 없으니 아무도 친해지려 하지 않고, 그저 떨어져서 쳐다보기만 하니 그걸 가지고 왈가왈부, 평하기가 수월해진다. 칭찬 받기 위해 더 가지라고? 그걸 부정하고 싶어도 확신이 안 선다. 별로 먹고 싶진 않은데 몸에 좋다니 별 수 없이 먹게 되는 건강보조식품처럼, 떨떠름한 기분으로 머릿속에 집어넣게 된다.

  “언니, 퇴근하기 전에 잊지 말고 무거운 분재들 함께 옮겨놔야겠어요.”

  오늘 아침 개장을 내가 했다. 덕분에 일찍 퇴근할 건데, 퇴근하고 할 일을 예슬이에게 말해주진 않을 거다. 사실 아직 확실하지 않다. 정말 내가 그리 할 건지. 자꾸 마음이 왔다 갔다 한다. 인생에서 주어진 것만큼이나 선택할 것도 있는데, 선택이 쉽지 않을 때가 자주 있다. 그게 결과가 염려될수록 더욱 그렇다. 선택을 했으니 책임도 지라는 이치니까.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 책임이 무거워 보일수록 선택 버튼을 누르기가 주저된다. 당연한 거 아닐까? 세상 누가 비난받을 일을 하고 싶을까? 항상 칭찬과 격려를 받길 원한다. 그게 당연한 사람 마음이다. 그런데 그런 당연한 이치를 거스르고 비난받을 일을 하는 이유는 뭐지?

  “어, 그래. 점심 먹고 바로 옮겨놓자. 그거 혼자 하다 허리 나간다. 혹시라도 잊으면 상기시켜 줘. 내가 요즘 자주 깜빡깜빡, 해. 애 낳고 아줌마 다 되서 그런가, 몸이 마음 같지 않다니까.”

  “에이, 언니가 뭘요. 아직 한창 나이인데.”

  분재 얘기만 하고 슬쩍, 돌아선다. 오후에 일 끝나고 뭘 할지 묻는 말에 듣지 못한 척하고. 휴대폰으로 인터넷을 검색해서 그 사람 사무실 주소를 알아냈다. 쥬얼 랜드 앤 빌딩 컨설팅. 웹사이트에 상당히 공을 들였다. 첫 화면이 떠오르자마자 화려하고 세련된 인상이 그대로 전해진다. 실속이 어떻든 이미지 관리는 잘하는 회사다. 이리저리 배너를 클릭하며 둘러봤는데, 그저 웹사이트를 둘러보는 것만으로 묘하게 회사에 대한 신뢰가 든다. 전문적인 프로의 인상을 가졌다고 할까. 이 회사에 맡기면 꼭, 집을 팔아줄 거라는 믿음이 생기도록.

  회사 소개 난에 올린 여남은 장의 사진. 전 직원이 함께 찍은 듯한 사진 안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맨 뒷줄, 가장 오른쪽에서 세 번째 사람. 사진으로 보니 또 달라 보인다. 옆에 함께 선 사람들보다 키가 큰 편이다. 혼자만 봤을 땐 그리 크다는 인상은 아니었는데. 옅게 미소를 짓고 있다. 아무래도 회사 공적인 사진이라 사무적인 느낌이 진하게 배었다. 이 사람이 캐주얼한 복장으로 아저씨 춤이라도 추는 모습을 상상하려 해도 그게 잘 되지 않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장 입고 나왔을 법한 사람. 그는, 살면서 얼마나 많은 혜택을 받았을까? 그다지 욕을 먹고 살진 않았을 정도로 받긴 했을 성싶다.

  퇴근하고 나와서, 점심 때 갈 곳이 없으면 김밥 한 줄 사서 앉아 있곤 하던 벤치에 가서 한참을 앉아 있었다. 이미 속으로 작별인사까지 건넸던 그인데,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아직도 미련이 남은 건가? 얼마나 진척됐다고? 탁, 일어섰다, 털썩, 주저앉았다. 어떻게 한다? 괜히 공연한 일을 벌이는 건 아닌지 두렵다. 그냥 눈 딱, 감고 덮어버리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지나갈 터였다. 그게, 그런데, 그게 말이다. 가보지 않은 길엔 항상 미련이 남는다. 그 길을 갔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그게 긍정적 결과든 부정적 결과든 가보았다면 머리 한구석에 후회를 질질, 남겨놓진 않겠지. 그래, 그럴 바엔 지금 결판을 내버리자. 내가 어떤 커다란 계획을 실행하겠다는 것도 아니잖아. 슬쩍, 둘러보고, ······, 그러고, 그러면? 아니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벗어나면 되잖아. 만약 맞다, 라면? 아, 머리가 아파온다. 더 이상 고민하지 말자. 단순하게 생각하자고. 그래, 그저 둘러보는 거야. 쇼핑도 아이쇼핑은 돈 안 받는다고.

  요즘엔 휴대폰에 담을 수 있는 지도 앱 덕분에 길 찾기가 엄청 수월해졌다. 그 앱만 누르면 지도가 펼쳐지고 주소를 입력하면 바로 그 주소지가 어디인지 알려준다. 거기가 바로 가야 할 목적지다. 그런 방법이 생겨나기 전 길 찾기는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묻고 또 물어가며 헤매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상상하기 힘들다. 언제 그랬었나 싶게. 우습지. 삶에서 어느 선을 넘어버리면 그 이전은 금세 잊히고 그 이후만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 는 말은 세상 공통 진리다. 어찌나 건방진 인간의 마음인지.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서 건물 앞을 바라봤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티를 팍팍, 낸다. 살짝만 건드려도 똑, 부러질 듯 각이 진 모서리가 서늘한 느낌을 준다. 파란색 파스텔 톤으로 칠해진 외벽. 어릴 적엔 노란색이 그렇게 좋았는데, 나이 들수록 파란색이 좋아진다. 노란색 좋아하면 겁이 많다고 하던데, 어릴 때 겁이 많았었던 것 같진 않다. 남들처럼 겁낼 땐 겁을 내고 용기를 낼 땐 용기를 냈었는데. 언젠가 가장 좋아하는 색이 뭐냐는 질문을 받고 파란색이 점점, 좋아진다고 했더니, 파란색은 남자가 많이 고르는 색이란다. 여자는 주로 분홍이나 빨강을 좋아한다고. 그게 타고난 걸까, 아님 그런 식으로 머릿속에 주입받아 온 걸까? 예슬이 말처럼 그게 다 디엔에이 덕분인가? 좋아하는 색마저 미리 주어진다고 하면 어쩐지 억울한데 말이다.

  한참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으니 목이 슬슬, 말라온다. 어디서 커피라도 살 수 있을까 둘러보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노천카페가 보인다. 앉을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있지만 굳이 거기서 마시다 괜히 그 사람 눈에 들길 원하진 않았다. 포장으로 아이스커피를 주문하려고 줄에 들어섰다. 점심시간은 한참 지났는데 커피를 주문하려는 줄이 상당히 길었다. 이맘때가 은근히 졸음이 밀려오는 시간이긴 하다. 다들 오후 식곤증을 이겨내려 커피를 마시는 걸까? 평소엔 웬만해서 찬 커피를 마시지 않는데 오늘은 다소 기온이 올라가서 시원한 게 당긴다. 목이 마른데 더운 걸 마시고 싶지도 않고. 내 차례가 와서 주문을 하고 돈을 지불하려는데 뒤에서 양해를 구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죄송한데 동행이 있어서요. 괜찮으시면 제가 앞으로 나서도 될까요?”

  설, 마, ······. 나를 지나쳐 카운터 위로 내미는 손 안에 카드가 쥐어진 게 보인다.

  “플랫화이트 하나랑 같이 해서 계산해주세요.”

  “포장해드릴까요?”

  “아이스커피 포장이었나요?”

  내게 묻는다.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네.”

  “그럼 제 것도 포장해주세요.”

  그럴 필요 없다, 고 하는 게 가장 적당한 반응이었겠지만 뜻대로 되질 않는다. 말문이 막힌다, 는 게 가장 적절한 상황 묘사였다. 말이 나오질 않아 그저 손만 흔들어댔다. 저, 저, 저것, 봐봐. 그의 입 꼬리 끝에 매달린 짓궂은 미소. 그걸 보며 그저 속으로 그를 비난한다. 그 비난이 그에게 가 닿지 않겠지만. 흔들리는 내 손을 가리키며 그가 입을 뗀다.

  “지금 반갑다고 손으로 인사하는 건가요?”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행동은 뭘까? 아예, 대놓고 무시하고 뒤로 돌아설까? 말실수를 하지 않도록 속으로 되새기고 또 되새겼다.

  “어머어, 여기 근처에 사세요?”

  맙소사, 어머어, 라니.

  “지금이 집에 있을 시간은 아니죠.”

  “아, 어, 그럼, 직장이 이 주변에?”

  “어떻게 이렇게 만나네요.”

  사람이 질문을 하면 제대로 답변을 해야지, 꼭 자기 할 말만 한다니까.

  “그렇네요. 신기해라.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요?”

  “정말, 신박한 우연, 이네요. 그 하고많은 장소와 시간 중 여기서 서로 마주치다니요.”

  그 말투에서 풍기는 냉소는 지레짐작하는 나만의 착각일까?

  “이곳 커피를 좋아하세요?”

  이번에도 내 질문엔 대답 없이 커피를 받아들더니 돌아선다. 나를 보지도 않고 뒤로 말만 흘린다.

  “여긴 좀 번잡해서요. 앉을 만한 곳이 있어요.”

  뭐야, 그건 의사를 물어보는 게 아니라 숫제 따라오라고 지시하는 행동인데. 확, 싫다고 해버릴까? 아무래도 그건 예의가 아닌 듯해 그가 향하는 대로 따랐다. 난 예의범절 제대로 배우며 자랐다고.

  “저기 앉지요.”

  그가 가리키는 곳에 높이 솟은 빌딩 근처 자리한 벤치가 있다. 잠시 기다려주는 그를 내 딴에는 꼿꼿한 걸음걸이로 지나쳐 벤치 한쪽에 앉았다. 이건 댁이 하라고 해서 하는 게 아니라 내 의지에 따라 하는 것뿐이라고. 이래봬도 당당하고 주체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라 자각하며 살아왔으니까. 내가 벤치가 앉았는데도 그가 함께 앉지 않고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한다. 왜 그러지?

  “왜요? 안 앉아요?”

  그가 벤치 반대쪽 끄트머리를 가리킨다.

  “저쪽에 앉지요.”

  뭐, 뭐라고?

  “네?”

  “거기 제가 앉을 테니까 저쪽으로 옮기세요.”

  뭐야, 이 남자. 원래 이렇게 강박적인 사람이었어? 앉는 자리도 골라 앉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별 차이 없어 보이는데요.”

  일부러 들으라고 샐쭉한 톤으로 내뱉곤 자리를 옮기는데, 그걸 알아듣기나 한 건지 무심한 표정으로 내가 앉았던 위치에 걸터앉는다.

  “여자분들은 햇빛 피하려고 엄청 노력하더군요. 선크림은 기본에, 모자와 선글라스, 마스크에 장갑까지 끼시는 분도 있고. 이 자리가 햇빛이 그대로 들어와요. 그나마 그쪽은 빌딩에 가려 그림자가 드리울 겁니다.”

  아, 그런 의도였나? 말해주지 않으면 그 속내를 어떻게 알겠어. 그래도 그 설명을 들으니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흠, 사람 배려는 할 줄 아는군. 플러스 1점. 아니, 내가 이제 와서 평가를 하겠다는 건 아니고. 이미 작별인사까지 했다니까.

  “그럼 어쩌다 이곳에 이르렀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그 물음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대답을 해야 하니 준비한 답이 적절한지 의구심이 든다. 아님 그냥 지나다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고 해버릴까?

  “이 근처에 직장이 있으세요?”

  “제 질문엔 아직 답을 하지 않으셨는데요.”

  “제가 했던 질문에도 답 없이 자기 할 말만 하셨잖아요? 저만 답하면 억울하죠.”

  “질문이 뭐였죠?”

  “직장이 이 주변이냐고 물었고, 저 카페 커피를 좋아하냐고 물었어요.”

  “제가 일하는 곳은 저기 길 건너 바로고, 저 카페 커피를 굳이 좋아한다기보다 가장 가까워서 편한 김에 자주 이용하지요. 이제 됐나요?”

  “네, 됐어요.”

  그러곤 그의 질문은 못 들은 척 손에 든 커피를 들이켰다. 오오, 이 집 커피 괜찮은데? 그도 한 모금 마시곤 몸을 움직여 조금 더 편한 자세를 취한다.

  “은근히 졸렸거든요. 커피 생각이 간절했답니다.”

  “어젯밤 신나게 보내셨나 봐요. 피곤이 남아있다니.”

  그가 옅은 미소를 짓는다. 내 말이 재밌긴 한가?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다보면 내 얘기가 재미없어 지루하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걱정이 든다. 대화에 대한 자신감은 타고나지 못한 나였다. 그가 보이는 밋밋한 웃는 표정 하나가 별 거 아닌 거 같아도 나를 이완시키는 데 꽤 큰 작용을 한다.

  “사람이 졸린 게 꼭 전날 신나게 보내서 그렇지만은 않죠. 그게 일 때문일 수도 있고 복잡한 가정사로 인해서일 수도 있죠.”

  “요즘 일이 많으세요?”

  “아뇨, 딱히 그렇진 않네요.”

  “근래 집에 무슨 문제 있으세요?”

  “그다지요.”

  “그럼 답이 나오잖아요. 신나게 논 후유증이네요.”

  다시 미소를 짓는 그. 여기서부터 주의해야 한다. 생각이란 게 미련해서 조금만 결과가 좋으면 계속 그쪽으로 몰아가려는 경향이 생긴다. 그에게 너무 오버한다는 인상을 주고 싶진 않다.

  “왜요?”

  “뭐가요?”

  “말을 하려다 만 얼굴이라서요.”

  “으음. 아니에요. 그냥요.”

  “어째 마음껏 놀려다 깜빡한 숙제가 떠오른 아이처럼 보이네요.”

  “아이요? 어리게 봐주셔서 감사하긴 한데 그리 어린 나이는 아니라서요. 깜빡한 숙제가 떠올랐으면 하기 싫어도 해야지 않겠어요?”

  “여은 씨는 숙제부터 하고 노세요, 아님 놀고 나서 숙제를 하세요?” 그의 입에서 새어나오는 내 이름이 얼핏 울리듯 들려온다.

  “숙제를 먼저 해야 아무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겠어요?”

  “숙제부터 먼저 하시는군요.”

  뭔가 생각하듯 고개를 까닥인다.

  “근데 그거 알아요? 할 숙제가 있는데 미뤄놓고 놀면 두 배로 더 재밌다는 거?”

  “모범생은 아니셨네요.”

  “제가 그렇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인 원리를 말해본 것뿐입니다.”

  “할 숙제가 남아있으니 찜찜해서 제대로 놀기 힘들지 않을까요?”

  “실컷 제대로 놀았다면 숙제를 못했어도 그만큼 가치가 있겠죠?”

  “숙제를 하지 않고 살 수는 없잖아요. 아니, 숙제를 안 할수록 삶의 질이 떨어지겠죠.”

  “평생 숙제하지 않고 살 수는 없어도 한두 번 빼먹는 건 나름 신날 겁니다.”

  한, 두, 번. 말이 쉽지. 그런 여유조차 없는 사람도 얼마나 많은데. 딱히 그리 대꾸하진 않았다. 그의 말을 부정하고 싶은데 그게 또 완벽하게 부정이 되진 않는다.

  “그래도 조심해야지 않겠어요?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세 번 되기 쉬우니까요.”

  “그렇긴 하죠. 그게 바로 중독으로 가는 길이니까. 중독되기 전에 자신을 조절해야 하겠죠. 그 말이 사실 한끗 차이에요. 바라는 일에 열정을 갖고 살라고 하는데 그럼 열정과 중독은 어찌 구별하는 거죠? 마음이 저 깊은 곳에서 원하는 걸 따라가는 게 열정 아닌가요?”

  음, 이건 대화가 은근히 철학적으로 흘러가는 듯한데. 숙제하기 싫은 열정은 열정이 아닌 건가? 내 표정이 어째 너무 진지해졌는지 그가 내 얼굴을 보며 싱긋, 입술 근처 미소를 올린다.

  “머리 아픈 얘기 그만 할까요?”

  “왜요? 제가 수준 높은 얘기를 소화하긴 벅차 보이나요?”

  “여은 씨랑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긴 한데 손도 잡아보고 싶어서요.”

  입 안에 있던 타액이 목을 타고 넘어간다.

  “남자들은 다 똑같은 거 같아요.”

  “어떻게 똑같은데요?”

  “결론은, 육체적인 접촉으로 끝이 나길 바라죠.”

  “그게 나쁜가요?”

  “너무 밝히면요.”

  “결국 그것도 중독인 거네요.”

  “그렇죠. 중독이죠.”

  “열정이 아니라?”

  “?”

  이번엔 내가 그를 빤히 바라본다. 눈을 피하지 않는 그. 지금 그와의 대화가 어떻게 끝이 날지 상상이 안 된다. 어쩌면 질문을 해야 할 대상은 그가 아니라 나 자신이다. 왜 여길 왔고 이 벤치에 그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하는 저의가 뭐냐고? 사실 나 자신도 내가 진정 무얼 원하는지 혼란스럽다. 단순 욕망? 치기어린 일탈 욕구? 그가 말한 대로 숙제가 하기 싫어 몰래 도망나온 아이? 내 속은 숙제를 하지 않고 놀러나온 게 걱정이 돼서 불안, 불안한데, 평생 숙제만 하곤 못살겠다 데모하는 소리에 그 불안이 묻히고 있다. 저 눈빛. 저리 달콤하잖아. 숙제를 미뤄놔서 두 배로 달게 느껴지니까. 숙제 한 번만 미룰까? 딱 한 번만. 두 번은 안 된다. 중독될까 무섭다. 질문 하나가 머릿속 저 아래에서 자꾸 떠오르려 해 꾹, 꾹, 눌러대는데, 그게 밀고 올라오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그의 얼굴을 건드려보고 싶은 마음은, 열정일까 아님, 중독일까?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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