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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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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18
작성일 : 23-05-03 11:22     조회 : 227     추천 : 0     분량 : 10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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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무궁화 – 은근

 

  삶이 무료하거나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는 기분이 들 때, 그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변화 하나가 그렇게 감사할 수 없다. 다홈이와 정기적으로 만나는 모임도 어떻게 보면 반복되는 일상이라 하겠지만, 그래도 그건 매일 살던 곳을 벗어나 산에 오르거나 바닷가에 닿아 맡게 되는 특별한 공기와 같다. 한 달에 한 번, 점심으로 시작해서 저녁까지 마치고 귀가하는 걸로 남편과 합의를 보았다. 그다지 탐탁지 않아 하는 그의 심기를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에게 이 모임까지 양보할 여지는 주지 않았다. 딱, 한 달에 한 번이다. 그런 여유마저 가지지 못한다면 삶이 정말 삭막할 거다.

  얼마 전부터 모임에 합류한 택수는 이번엔 나오지 못한다. 하필 중요한 거래 모임과 날짜가 겹쳤다. 그런 상황에 처하면 일이 우선이다. 먹고 사는 게 가장 시급한 문제니까. 대신, 다홈이가 짓궂은 제안을 한다.

  “택수가 있을 때 할 게 있고 택수가 없을 때 할 일이 있지.”

  “뭔 소리야? 그거 꼭 우리가 택수 몰래 나쁜 짓 하는 거 같잖아.”

  “남자들은 이해 못하는 여자들만의 세계라고 해두자.”

  “술은 택수와 함께 마실 수 있으니까 술 마시자는 건 아니고 어디 남자 호스트바라도 가게?”

  “어머, 이제 보니 아줌마 은근 밝히신다.”

  “네가 생각하는 수준을 내가 아니까 그렇게 말해본 거야.”

  “아줌마, 얼굴 빨개졌어.

  “네가 놀리니까 그렇잖아.”

  “좀 더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을 생각해봤지.”

  어째 좀 불안하다. 다홈이가 생각해내는 일이란 보통 상식 밖을 벗어나서 나를 곤란하게 만든다. 사람 자체는 참 좋은데 생각의 범위가 사차원으로 넘어가버릴 때가 종종, 있어 감당하는 게 고역이다.

  “네가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라고 하는 게 현실적이지 않을 때가 많잖아.”

  “네가 자꾸 네가, 네가, 네가, 그러니까 꼭 힐난하는 듯 들리잖아. 너 언제부터 나한테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달고 살았냐?”

  “그런 게 아니라 불안해서 그런다. 괜히 사고 칠까 마음을 놓을 수가 없네.”

  “어머어. 나한테도 엄마 마음인 거야? 그렇게 철없는 수준은 아니잖아, 내가?”

  철이 없는 정도가 아니지, 라고 하려다 말았다. 이렇게 말싸움 해봤자 끝이 없을 거고. 하아, 벌써부터 한숨이 나온다. 엉뚱한 이 생각을 어떻게 막아야 한다?

  “잘 들어보라고. 별로 힘든 일도 아니야. 네가 눈을 떼지 못했던 그 사람 있잖아.”

  “그 얘기는 또 왜?”

  이미 다 끝났어, 마음 완전히 접었다고, 속으로 안녕, 이라고 작별인사까지 했어,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건 확률게임인 거 같아.”

  확률? 수학책은 건드리기만 해도 두드러기가 돋으면서 확률은 무슨?

  “우리가 고층 식당에서 밥 먹다가 그 사람이 지나가는 걸 발견했잖아. 한 번 지나간 자리는 다시 지나갈 확률이 높지 않겠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 분명 그를 만나게 될 거란 말이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야?”

  “오늘의 미션은 거길 지키고 있는 거야. 그와 대면하게 될 때를 기다리며.”

  “그 식당에 또 가자고?”

  “아니지. 식당은 위층에 있잖아. 그 사람을 발견하더라도 내려오는 사이 놓치면 어쩌게? 말짱 도루묵이야. 이번엔 아예 그 골목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해.”

  그 제안에 어안이 벙벙해져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걸 어떻게 막는다? 대답 없이 숨소리만 내는 날 붙잡고 다홈이가 앞장을 선다. 설마, 그런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실행에 옮길 거라 믿기지 않고, 다홈이 말대로 한다고 거길 지나가는 그를 다시 마주칠 거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게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야, 라는 한탄만 머릿속을 맴돈다. 반대할 여지가 있는 논쟁거리라도 돼야 논리적으로 반박을 할 텐데, 이건 그냥 애들에게 들려주는 꿈 같은 우화라서 고개만 그저 흔들었다. 다홈인 내가 반박을 못하니 더욱 확신이 서는 발걸음으로 성큼성큼, 걸어간다. 왜 반박을 못하는지 이유를 알려고 하지는 않고.

  붙잡혀서 따라가는 길이 싫지만은 않다. 이렇게 햇살 좋은 날, 그저 길을 걷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이제 슬슬, 봄이 오나 기대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봄이 아니라 여름 냄새를 풀풀, 풍긴다. 봄, 가을은 짧아지고 여름, 겨울은 길어진다더니 그 말이 맞다. 분명 봄이 온다고 맞을 준비를 했는데 내가 맞이하고 있는 건 거진 여름이다. 봄아, 너는 그새 어디 갔니?

  “저거, 내가 제 가격으로 산 건데 이제 반값 세일하네.”

  날 잡았던 손에서 힘이 빠져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쳐다보니 커다란 투명유리를 통해 자신이 샀던 가방을 주시하고 있다. 어련하겠어, 이다홈 씨. 쇼핑이 없다면 삶에 큰 구멍이 뚫릴 분인데. 잘하면 주의를 돌릴 수 있을까 싶어 조심스레 찔러봤다.

  “들어가서 둘러볼까? 저기 저거 새로 나온 신상품 아닌가?”

  “나중에. 지금은 할 일이 있잖아. 그게 우선이야.”

  어쭈, 세게 나오시네. 마음 단단히 굳혔구나.

  “우선까지야. 그렇게 서두를 일은 아니잖아. 인생은 길다고.”

  쑤욱, 내 앞으로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을 들이민다.

  “딴 생각 하지 마라. 오늘은 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거야. 택수 나오면 이렇게 하고 싶어도 못해.”

  주의를 돌리려 시도했지만 실패. 앞장 서서 걸어가는 다홈이를 부지런한 걸음으로 뒤따른다. 애가 다른 건 몰라도 추진력 하나는 최고다. 한 번 마음먹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성격. 그게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는데, 내겐 좋지 않을 때가 더 많아 보이지만, 그것도 내가 아끼는 다홈이의 일면이라 받아들여야 한다. 나한테 맞는 면만 원한다면 그건 우정이 아니라 흥정이 되겠지. 그게 가족이나 친구나 비슷하다. 가족이니까 친구니까, 좋은 부분만 빨아먹고 뱉어낼 수가 없는 거다. 내 입맛에 맞지 않고 뒷맛이 씁쓸한 부분도 그 요리 전체를 맛보길 원한다면 참고 삼킬 필요가 있다. 그래서 어른이겠지. 싫은 것도 참고 삼킬 줄 알게 성장한 단계.

  이렇게 마주하는 골목이 참 다르다. 낮 시간 보행자가 드문 시간은 북적거리는 저녁보다 그 삶의 단면을 더욱 여실히 보여준다. 곳곳에 보이는 쓰레기 더미. 저건 누가 치우지?, 라는 생각이 불쑥, 들이민다. 누군가는 치우겠지. 그래야 또 장사를 할 테니까. 더러운 곳에 사람이 모이진 않는다. 그런가? 그 치우는 비용마저도 우리가 지불하는 음식값이나 옷값에 포함되나 보다. 그러니 단순히 원가만 고려해서 비싸다거나 싸다고 판단해서는 안 되는 거다. 경제라는 게 얼마나 오묘하고 복잡한지. 벽을 뚫고 튀어나온 배관에서 허옇게 김이 올라온다. 저 안에서 누군가는 저녁에 판매할 음식을 열심히 요리 중이다. 골목에 주차한 트럭에서 열심히 음료수와 식재료를 나르는 사람도 보인다. 참 다들 열심히 산다. 화원에서 땀 흘리며 열심히 물 주고 가지를 쳐낼 땐 세상에서 가장 바쁘게 사는 사람이 나인 듯해도, 내가 몰랐던 곳에선 나만큼 바쁘게, 아니 나보다 더 바쁘게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쉬는 날 마음 편히 보내려 나온 길인데 이게 괜히 사람 숙연해지게 만든다. 아, 좀 억울하다. 이러면 일하다가 힘들어도 대놓고 불평을 못하게 되잖아. 그게 참, 너무 많이 알아도 안 좋다. 누구 말처럼, 가끔은 한쪽 눈 감고 세상을 살 필요가 있다. 삶의 진리를 전부 알았다간 지독한 두통을 평생 지니고 살아야 할지 모르니까.

  “이쯤이지 않나?”

  “그런가? 낮에 와보니까 또 다르게 보이네. 여기가 이랬었나 의아해지게 생경해.”

  “그게 다 사는 이치지. 우리도 그렇잖아? 화장했을 때랑 지웠을 때랑 변신이잖아, 변신. 사람이든 장소든 꾸미는 대로 확, 확, 바뀐다고.”

  “그래도 변신은 너무 했다. 화장 안 했다고 내 얼굴이 그렇게 달라 보이냐?”

  뭐지 이 침묵은?

  “야!”

  “왜?”

  “사람이 질문을 했는데 왜 대답을 못해? 왜 말을 못하냐고?”

  “친구로서, 듣기 좋은 대답을 해주길 원하는 거야, 아님 진실한 대답을 해주길 원하는 거야?”

  “이게 죽을라고!”

  “대신 나는 그런 곤란한 질문은 안 하잖아. 아는 대답을 왜 묻는 건데?”

  “야!”

  다홈이가 커피를 포장 주문하자고 제안한다.

  “어디 들어가서 안 마시고?”

  “그러다 그 사람 놓치면 안 되지.”

  “너 어째 너무 심각하다. 대강 해. 사실 그게 헛짓거리지, 우리가 하루 죽치고 앉아있다고 그 사람이랑 마주치게 되겠어? 그건 너무 드라마 같잖아.”

  “우리라고 살면서 한 번쯤은 드라마 주인공 돼보지 말란 법 없잖아? 오늘 날 잡았으니 이참에 주인공 돼보는 거지.”

  드라마 주인공? 조연이나 엑스트라는 아니고? 살면서 주연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단역이라도 겨우 맡았으니 그거에 충실하자 다짐하며 살아왔을 뿐. 주연이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하긴 했다. 으리으리한 백 평대 집에서 고용인을 두고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화려하게 사는 삶 같은 거? 연예인? 기업인? 정치인? 나한테는 꿈만 같은 그런 위치? 나보고 그런 역할을 해보라니 그건 어째 아닌 듯한데. 하기야 가면무도회도 같은 맥락이잖아? 평소 상상만 하던 무도회에 자신이 아닌 다른 모습으로 꾸미고 가서 하루 실컷 취하도록 즐기고 오는 행사. 하루쯤이라면. 딱, 하루라면 말이지.

  “시원한 거 마실까?”

  “으응. 날도 좋고 뜨듯한 거 보다 그게 낫지 않나?”

  이게 생각했던 것만큼 화려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나이 먹을 대로 먹은 성인 여자 둘이서 손에 아이스커피를 하나씩 들고 골목 어귀에 섰다. 어디 앉을 자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다 주변에 놓인 빈 상자를 슬쩍, 집어서 반으로 나눠 둘이서 깔고 앉았다. 그러곤 하염없이 지나가는 사람을 쳐다보고 있는 거다. 지나가던 행인이 동전을 던져주지 않아 다행이다. 그럼 제대로 비참해지겠지.

  “얼마나 이러고 있을 예정인데?”

  “하루 종일. 그게 우리 계획이잖아?”

  “우리 계획? 네 계획이겠지.”

  “좋다고 참여할 땐 언제고?”

  “좋다고 참여하긴. 네가 날 질질, 끌고 왔잖아.”

  “또 이러신다. 속으론 은근 기대하면서 앙큼 떨기는.”

  커피를 확, 부어버리는 시늉을 하니 애교 떠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지만 이참에 뱉어봐?

  “밥은 어쩔 건데?”

  “한 사람씩 교대로 다녀올까? 아님 배달 주문을 해?”

  “작작 좀 해! 그건 진짜 아니다. 여기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 먹으려고?”

  실랑이를 벌이다 결국 내 성화에 못 이겨 점심은 지난 번 갔었던 그 고층 레스토랑에서 먹기로 했다. 창가에 앉아 먹으며 계속 주시한다는 조건을 달고.

  “옮긴 곳은 이제 정리가 다 돼가?”

  “이게 집 규모를 줄이니까 청소거리가 반으로 줄어든다. 삶의 질이 높아져.”

  “나도 밥짓기나 빨래는 그래도 하겠는데 청소하기가 어쩜 그리 싫니? 그렇다고 청소 로봇은 믿음이 안 가서 사기 싫고.”

  “말도 마라. 내가 그거 청소 로봇인가 뭔가 사서 돌렸다가 바닥 카펫 다 파먹어버렸다.”

  “어머, 그래?”

  이혼을 확정 짓고 다홈이는 방 두 개짜리 작은 아파트로 거처를 옮겼다. 아무래도 큰 집에 살다 작은 곳으로 이사하면 기분이 좋지만은 않을 텐데 그 티를 내진 않는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는 거겠지. 그렇게 앉아서 커피를 홀짝이며 지나가는 사람을 끊임없이 바라본다. 처음엔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한심하다는 생각만 들다가, 그게 은근히 관찰하는 재미가 생긴다. 둘이서 지나는 사람 옷, 신발, 머리 모양새까지 하나하나 지적하며 평을 내리고 나라면 어떻게 고를지 제안까지 한다. 가끔 우리가 나누는 대화 소리가 너무 커져 그 관찰 당하는 사람이 돌아보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연기까지 해댄다. 이러다 정말 드라마 찍는 건 아닌지.

  “여은아, 여은아. 저기, 저기.”

  이제 슬슬, 관찰하는 게 지겨워지고 대화가 뜸해질 때쯤, 다홈이가 내 어깨를 흔들어댄다.

  “뭔데?”

  설마, 정말 그가 나타나기라도 한 걸까? 그게 기대가 되면서 염려가 되기도 한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어떻게 행동한다? 그는 아니었다. 대신 그 옆에 있던 그녀다.

  “아, 저 여자.”

  “그래, 맞아. 그 일행 중 한 명이지?”

  참, 그녀는 멀리서 봐도 바로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높은 굽이 달린 구두, 볼륨 제대로 들어간 머리하며, 짙은 눈 화장까지.

  “그럼 그 사람도 곧 나타나는 거 아냐? 야, 야. 준비해, 준비.”

  “준비는 무슨. 준비로 뭘 할 건데? 미행이라도 하려고?”

  “그럴까?”

  “그러자는 게 아니잖아!”

  점점,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그녀. 그렇게 그 여자는 우리 앞을 지나쳐 가는데 그는 보이질 않는다.

  “일어나자.”

  “일어나서 어쩌려고?”

  “미행하자며?”

  “미행하자고 한 적 없거든.”

  다홈이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다.

  “기회는 올 때 잡으라고 했어. 이번을 놓치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라. 지금까지 기다린 거 그냥 허비할 거야?”

  얘가 왜 이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데?

  “그러지 말고 오늘 점심 내가 쏠게. 이만큼 했으니 됐잖아. 밥이나 먹으러 가자.”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가는 다홈이.

  “그렇게 순순히 포기하면 내 이름이 다홈이가 아니지. 얼른 안 일어나고 뭐해?”

  어느새 우리는 그녀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살다 보니 내가 누군가 미행까지 하고 있다. 도대체 이게 뭐하는 짓이람. 다홈이가 나보다 더 흥분했다는 건 역력했다. 양볼이 발갛게 상기된 채로 발을 빠르게 놀린다.

  “어, 어, 저리로 들어가는데. 여기 새로 지은 건물인데?”

  “모델하우스 아니야?”

  아무리 봐도 모델하우스였다.

  “오우, 집장사하는 복부인이신가? 돈 굴리시려고 보러 오셨나?”

  “너는 왜?”

  다홈이가 그 뒤를 따라 들어서려 하자 얼른 팔을 잡아챘다.

  “한여은 씨. 오늘 드라마 주인공 해보자. 여차하면 너한테 주연 주고 나는 비중 높은 여조 할 테니까 나만 믿고 따라와.”

  “얘가 점점.”

  오히려 내 팔을 끌고 건물 안으로 들어선다. 모델하우스는 새 건물 냄새를 제대로 풍겼다. 티끌 하나 보이지 않게 깔끔히 정돈된 모습에 청소하기 싫다고 불평하던 내 모습이 무안해질 정도였다. 각이 지게 접어놓은 팸플릿 하나도 예사로워 보이지 않았다. 저렇게 접으려면 어떻게 손을 놀려야 하나 궁금한 찰나, 화사하게 유니폼을 차려 입은 여직원이 앞에 다가온다.

  “어서 오세요. 하우스 보러 오셨죠? 안내해 드릴까요?”

  말문이 막힌 채 입술만 달싹, 거리는 내 뒤에서 다홈이가 그 질문에 답하며 앞으로 나선다.

  “네에. 아휴, 요즘 제대로 된 집 찾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요? 새로 지었다는 곳도 막상 살아보면 부실시공 때문에 입주자들 불평이 넘쳐나고. 그나마······.”

  다홈이가 재빠르게 팸플릿 하나를 집어 맨 뒷장을 쓰윽, 훑는다.

  “마제스틱 건설은 신용이 가지요.”

  그런 이름을 가진 건설사도 있었어? 마제스틱?

  “그럼요. 요즘엔 모든 게 브랜드 가치랍니다. 고객님, 그 브랜드가 왜 가치 있는지 그걸 보셔야죠. 사람들이 믿고 찾는 건 다 이유가 있답니다.”

  아무래도 올해 연말 연기대상은 다홈이가 타겠다. 이건 뭐 수십 년 경력의 연기자 저리 가라네.

  “정말 그래요. 요즘엔 다 신용으로 장사한다니까요. 그러니까 다들 큰 회사만 찾잖아요. 그 신용을 어디 하루이틀 만에 쌓을 수 있나요?”

  “옳으신 말씀이세요. 믿음을 준다는 게 단기간 이루어질 일이 아니죠.”

  다홈이가 일절 막히지도 않고 청산유수처럼 그 직원과 말을 나누는 사이, 슬쩍, 옆으로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내 눈엔 모델하우스는 들어오지 않고 방금 전 여기 들어왔던 그녀만 찾게 된다. 어디로 간 거지? 거실과 주방을 지나니 베란다가 나온다. 주위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베란다로 향하는 문을 열고 나섰다. 이층 건물이라 밖에 보이는 경치는 단순하다. 나오자마자 훅, 전해지는 담배 냄새. 베란다 구석 보이지 않는 곳에 그녀가 밖을 보는 자세로 서 있다. 두 손가락 사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담배 한 개비를 집은 채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한다. 몰래 나쁜 짓하다 들킨 학생처럼 죄의식이 들 법도 한데, 그런 낌새 하나 없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다. 내가 먼저 인사를 건네듯 고개를 살짝 숙이자 그녀가 인사를 받는 동작과 동시에 엷게 입술 위로 미소를 올린다.

  “모델하우스가 참 깨끗하고 반듯하네요.”

  “새로 지은 건물이라 그렇겠죠. 생물이든 물건이든 새로 난 건 그 자체로 깨끗하고 반듯하잖아요.”

  그 말을 들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왠지 어색해져 눈을 내렸더니 그녀 손에 든 담배 개비가 시야에 들어온다. 얇은 막대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그만 홀렸던지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니, 그녀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담배에 관한 얘기를 꺼낸다.

  “요즘에 흡연자들은 참 힘들어요. 사방이 다 금연이라 어디 편하게 흡연할 장소를 찾을 수 있어야죠. 혹시 피세요? 하나 드릴까요?”

  “아니요. 살면서 담배를 배울 기회가 없었네요.”

  “운이 좋으셨네요. 담배 이게 요즘엔 워낙 구박을 받는 데다, 돈은 돈대로 들고 건강엔 좋지 않고 여러 모로 나쁜 점만 많죠. 저도 끊을 수만 있다면 일찌감치 끊었을 텐데 그게 생각만큼 쉽지 않네요.”

  “금연한 사람과는 상종도 말라잖아요. 그만큼 담배 끊으려면 독해야 한다는 건데,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면 그런 말이 나오겠어요.”

  그녀가 천천히 몸을 튼다. 어쩜 그 동작조차 우아해 보이는지. 별 게 다 우아하다 해도 내겐 그녀 움직임 하나하나가 특별해 보인다.

  “집 보러 오셨어요?”

  아니, 라고 하려다 그럼 집 보러 오지 않으면 여기 왜 왔냐고 물을 게 뻔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거짓말을 하려니 최대한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담배를 들지 않은 손으로 근처에 둔 핸드백을 뒤지더니 명함을 꺼내서 건네는 동작을 취한다. 그 손에서 명함을 받아들고 거기에 인쇄된 글자를 하나씩 읽어나갔다.

  심진옥. 이름에 옥이 들어가네. 그래서 우아한가? 속으로 그런 말도 안 되는 추론을 하는 내가 한심했다.

  쥬얼 랜드 앤드 빌딩 컨설팅. 랜드 앤드 빌딩 컨설팅? 대충 우리말로 하면 부동산 사무소 아닌가? 영어로 하면 더 있어 보인다고 영어 이름을 쓰나? 아, 옥이라서 쥬얼인가?

  연락할 방법이 다양하게 나열되었다. 사무실 전화, 휴대폰, 팩스 번호, 이메일, 마지막으로 웹사이트 주소.

  “저어, 여기 관리하는 일을 하시나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젓는다.

  “아니요. 건설사에 속해서 일을 하는 건 아니구요, 건설사와 밀접한 일을 하긴 하죠. 건설사가 지어놓은 집과 건물을 광고하고 구매자를 찾아 연결하는 일을 해요.”

  내가 맞네. 쉽게 말해 부동산 중개사잖아?

  “이 모델하우스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마제스틱이 요즘 잘 나가는 건설사기도 하구요. 저희 회사 입장에선 주요 고객이죠. 그래서 당분간은 자주 들르고 있답니다.”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비즈니스 우먼. 하찮게 얘기하면 복부인 정도? 아무리 내가 깎아내리려 해도 그녀는 복부인보단 비즈니스 우먼이라는 명칭이 더 어울리는 분위기를 풍긴다. 똑같은 직책이라도 사람에 따라 이렇게 이미지가 달라진다.

  “집에 관심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괜찮은 매물 여럿 보유하고 있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다홈이 목소리. 여직원과 대화를 나누며 이 근처로 다가오는 중인가 보다. 다홈이를 그녀와 마주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어떤 식으로 또 엮으려 할지 몰랐다. 어떻게든 그 사람과 날 맺어주겠다는 집요한 목표로.

  서둘러 그녀를 향해 짧은 목례를 건네고 베란다를 벗어났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하니 다홈이 정면이 보인다. 다홈이가 날 보고 입을 벌리는데, 말을 꺼내기 전 내가 선수를 쳤다.

  “얘, 어떡하니? 집에서 급한 전화가 왔어. 애가 상태가 안 좋은가 봐. 가봐야 할 거 같아. 미안해. 모처럼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왔는데.”

  다홈이가 의뭉스런 눈초리로 나를 보다 여직원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와 발을 맞춰 입구로 향한다.

  “여기서 나가자는 거야? 아님 오늘 하루 끝내겠다는 거야?”

  답하기까지 잠시 주저했다.

  “그게, 미안한데, 애가 그래서 말야.”

  “너 대답하는 데 잠시 틈이 있었다. 진짠 거야?”

  기집애, 눈치 빠른 거 하곤. 이대로 추궁 당하면 내 입장이 더 곤란해질 터였다. 한 번 말을 꺼냈으면 그대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다른 일이면 내가 안 이래. 애가 걸려서.”

  미안해, 현무야.

  “애가 아프다는데 어쩌겠어. 대신 다음에 밥 사. 기껏 시간 내서 나왔는데 아쉽네.”

  “넌 지금 들어갈 필요 없잖아. 이전에 지나치며 봤던 신상품. 그거 둘러보고 가. 일부러 나왔는데 괜히 너마저 하루 공치지 말고.”

  내가 생색을 내듯 꺼낸 말에 다홈이 인상이 복잡해진다. 아무리 그래도 거기까지다. 본성을 숨기긴 힘들지. 눈에 빛이 도는 걸 감지했다.

  “아니, 내가 굳이, 뭐, 그 신상품을 꼭 봐야겠다거나, 쇼핑을 꼭 해야겠다거나 그런 건 아닌데······.”

  “알어. 내가 알지. 미안해. 다음에 내가 맛난 거 꼭 살게. 이것도 다 너 오늘 쇼핑하라는 하늘의 계신가 보다. 너는 나한테 선심 써서 좋고, 쇼핑해서 좋고, 일석이조네.”

  웃음기를 머금은 다홈이 얼굴을 확인하고 돌아서 걸음을 서둘렀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 사람과 어떻게든 맺어주겠다는 다홈이 계획을 돌릴 방법이 없었다. 오늘 하루 아쉽게 공치더라도 그 편이 나았다. 다음 모임 때 더 재미나게 놀지, 뭐. 손에 든 명함의 빳빳함이 전해진다. 종이 재질도 고급스러운 걸 사용했나? 아, 그만해, 그만하라고, 한여은. 그녀가 하는 건 뭐든지 우아하다는 거야, 너? 다홈이에겐 미안하지만 얼른 집에 돌아가서 명함에 적힌 웹사이트 주소를 검색해볼 생각만 머리를 가득 채운다. 그 웹사이트를 검색해보면 뭔가 알 수 있을까? 아무래도, 직장 동료니까 그에 대한 정보도 있지 않겠어? 혹시, 직장 동료가 아닐지도. 아, 모르겠다. 어쨌든 검색해보면 알게 되겠지. 그에 대한 단서가 있든지 없든지. 비밀 상자가 열리려 한다. 그래서 은근히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까? 상자를 열려는 판도라처럼. 판도라가 상자를 열었을 때 마냥 나쁜 것들이 무수히 튀어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에 나온 희망 같은 좋은 것만 나오기를 바란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판도라 이야기 결말이 어떻게 되었더라?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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