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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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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9
작성일 : 23-04-20 07:55     조회 : 75     추천 : 0     분량 : 9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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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시금치 – 활력

 

  주문이 들어온 수국을 조심스레 화분에 옮겨 심었다. 메추리알처럼 둥근 형태를 한 자주색 잎은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일부러 꾸미지 않아도 탐스러워 보이는 다발을 이룬다. 그래서 그런지 부케에 참 잘 어울리는 종이다.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누거나 감정을 공유할 수 없는 식물이라는 존재지만, 이렇게 곱게 자라서 팔려나가는 걸 볼 때면 자식 결혼시키는 부모처럼 대견한 마음이 든다. 아직 현무가 어려 그런 경험을 해보지 못했지만 꼭 그럴 거란 확신이 든다. 새 주인 손에 들어가서도 오래오래, 그 화사한 색을 잃지 않길 기원했다.

  “언니, 이 전단지 봤어요?”

  불쑥, 예슬이가 내 앞에 전단지를 꺼내 든다. 전단지를 덮은 알록달록, 화려한 색감이 눈에 그대로 들어온다. 가면무도회. 그 옆에 조금 더 작은 글씨체로 시에서 주최하는, 온가족을 위한 행사, 3번에 걸친 화려한 무대, 등이 인쇄됐다. 예슬이는 전단지 중간 아래쯤 위치한 귤색 문장에 흥분한다.

  “언니, 세상에, 3등부터 해외여행 기회를 상품으로 준대요.”

  “3등? 뭘로 3등?”

  “제일 멋지게 꾸미고 온 사람을 심사하는데 어머, 6등만 해도 무선스피커네. 나 이거 하나 사고 싶었는데 이참에 열심히 꾸미고 나가서 6등이라도 할까 봐요.”

  “아서라. 그런 데서 주는 상품이 제대로 된 거겠어? 차라리 내 돈 열심히 모아서 하나 좋은 걸로 장만하는 게 더 나을 거야.”

  “그렇지만 해외여행 상품은 탐나지 않아요? 3등부터 베트남이래요. 우와, 1, 2등은 바로 유럽 가네.”

  가면무도회라니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가면 쓰고 나가서 외국 전통춤 어색하게 흉내 내는 거나 다름없잖아. 차라리 윷놀이를 하거나 무료영화를 상영해주는 게 나을 듯하다. 예슬이만큼 시에서 주최하는 그 행사에 그리 동하진 않는다. 집에서 애 아빠랑 대화를 나눌 때까지.

  “당신 이번에 시에서 주최하는 행사 광고 봤어?”

  웬일로 남편이 먼저 그 행사에 대한 얘기를 꺼낸다. 춤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말이다.

  “가면무도회?”

  “어, 응.”

  그가 멋쩍게 대답을 한다.

  “낮에 일하는데 예슬이가 전단지 가져와서 보여주더라고. 그게 왜? 설마, 당신, 거기 가고 싶어?”

  살짝, 양볼에 붉은 기가 어린다. 머리를 긁적이는 그의 손동작이 너무 어색하다. 이런 데 관심 있을 사람이 전, 혀, 아닌데.

  “당신, 춤은 전혀 출 줄 모르잖아?”

  “아니, 왜 그렇게 단정을 하지? 한창 때 클럽 안 가본 사람은 없잖아?”

  “클럽? 당신이?

  “뭐야, 그 반응은? 나는 뭐, 즐기지도 못하고 살았을까 봐?”

  “아,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박치도 그런 박치가 없는데, 라는 말이 차마 밖으로 나오진 못하고 입 안에서 맴돈다. 어쨌든 다음 말이 궁금했다.

  “그게, 저, 여기 건물 관리인 아저씨 있잖아.”

  “어, 박씨 아저씨?”

  “아니, 경비원 아저씨 말고.”

  “그럼 누구?”

  “건물 전체 관리하는 분.”

  “아, 이선생님인가 하는?”

  “그래, 그 분이 가게로 오셨어. 이 행사가 시에서 주민들을 위해 대대로 주최하는 거라 참석해서 인사하고 다니면 가게 홍보에 많은 도움이 될 거라고 그러시는 거야.”

  그렇지. 이 사람에겐 춤이 문제가 아니라 가게 홍보가 주된 관심사겠지.

  “어, 그래?”

  “게다가 상인 조합 회장님도 오셔서 한 말씀 하시더라고.”

  “조합 회장님까지?”

  “응. 그 행사에 시 관계 공무원은 말한 것도 없고 이 주변 상인 전부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다더군. 아주 크게 제대로 행사를 치르려고 하려는지 홍보를 많이 하나 봐.”

  “그러려면 한국 전통 행사로 치르던가 하지 난데없는 가면무도회가 뭐야?”

  “요즘엔 젊은 사람들 관심 끄는 게 중요하잖아. 당신이야 익숙하지 않다고 쳐도 젊은 사람들 눈엔 흥미롭겠지.”

  “어째 그 말은 나 같은 사람은 유행에 한창 뒤처졌다는 말로 들리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자기도 이번 기회에 가면 같은 거 하나 장만해서 꾸며 보면 재미나지 않겠어? 그런 핑계로 놀러 나가면 그렇게 기분전환도 될 테고.”

  남편 말을 듣고 보니 나쁘지 않을 듯도 했다. 가면이랑 옷이랑 장만하기 위해 나갈 돈이 아깝긴 했지만 그런 거 일일이 따지다 보면 쓸 돈이 없다. 가만, 가면무도회는 어떤 복장을 하고 참석해야 하지? 남편에겐 제사에 참석할 때나 입는 거무튀튀한 양복밖에 없는데. 내일 일 나가서 당장 예슬이한테 물어봐야겠다. 그게 예슬이에게서 처음 들었을 땐, 철딱서니 없는 애들 장난처럼 받아들였는데, 남편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은근히 동한다. 가면무도회라고? 그런 건 외국영화에서나 보게 되는 딴 세상 일이었는데.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런 걸 주최한다니 실감이 잘 나지 않는다.

  “재밌겠다. 나도 갈래.”

  “넌 우리 시에 사는 사람도 아니잖아?”

  “그럼 어때? 설마 일일이 신분증 검사라도 하겠어?”

  다홈이에게 별 거 아닌 듯 지나가는 말로 흘렸는데 바로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도 가겠단다. 그런가? 나 같은 사람이야 별로 흥이 안 날 뿐이지, 가면무도회라는 게 원래 사람들이 좋아하는 행사인가?

  “아니, 그렇진 않겠지. 그날 얼마나 붐빌 텐데 일일이 그걸 검사하고 그러겠어. 그렇지만 넌 여기 사는 시민이 아니라서 경품은 못 받을 걸.”

  “괜찮아. 누가 경품 바라고 가겠어. 그냥 가서 재미나게 놀다 오면 되지. 너야 네 신랑이랑 갈 거고 난 그럼 택수한테 함께 가자고 꼬셔볼까?”

  “아, 택수?”

  나도 모르게 떨떠름한 반응이 나온다. 다홈이와 택수. 둘의 조합이라.

  “경품은 뭘 주는데? 번호 뽑기 하는 거야?

  “가장 멋지게 꾸미고 나온 사람을 심사해서 뽑는다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에 걸쳐서 심사를 엄중히 할 계획이라던데.”

  “세 번? 이거 단발 행사가 아니야?”

  “아니. 시에서 아주 크게 개최하는 거라 세 번에 걸쳐서 한다네.”

  “완전 대박이다. 삼 일 제대로 놀 수 있겠는걸.”

  “너, 세 번 다 오려고?”

  “여은아. 내가 수업은 빠져도 술 마시는 자리에 안 나온 적 있니? 노는 자리는 머리 싸매고 나간다. 요즘 열심히 운동했더니 체력도 더 좋아진 거 같아. 내가 침대 옆에 같이 누울 사람도 없는 판에 이렇게라도 풀어야지 않겠어?”

  “어휴, 야. 작작, 밝혀라.”

  혼자서, 키득, 거리며 좋아라 웃는다. 말은 구박하듯이 했지만 다홈이가 온다니 내심 좋았다. 한 사람 더 익숙한 얼굴이 동행한다니 마음이 한결 놓인다. 다만 택수가 머리 한 구석에 걸리긴 한다. 다홈이와 택수 커플이라. 남편은 그들을 보고 뭐라 할까? 아직 정식으로 이혼 결정이 나지도 않았는데 함부로 다홈이가 몸을 놀린다고 싫어하려나? 워낙 체면치레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대놓고 다홈이 앞에서 뭐라 하진 않겠지만, 나에게 싫은 소리를 할지 모르겠다. 그러고 싶다면 그러라지. 다홈이만 좋다면야 그 사람 의견은 무시해도 된다. 단지, 살짝 주저되는 건, 그럼 우리 세 사람 사이는 어떻게 되는 건지 그게 은근히 걱정이다. 둘이 커플이 된다면, 셋이서 만나는 모임을 더 이상 이어나가기 어려울 수 있다. 나만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둘 사이에서 엉거주춤, 어색해질 테니. 아, 모르겠다. 그건 그때, 닥치면 생각하자. 지금은 아무리 고민해봤자 답이 나오지 않는다.

  예슬이에게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기로 했다고 하니 많이 반가워한다.

  “언니, 그럼 가면이랑 옷 준비해야죠?”

  “내가 그런 걸 준비해본 적이 있어야지. 요즘엔 다들 온라인으로 주문하지?”

  “그럼 제가 아는 곳이 있는데 같이 갈래요?”

  “그래? 오늘 내가 마감이잖아.”

  “괜찮아요. 퇴근하고 집에 갔다 언니 마감 시각 맞춰서 올게요.”

  “나야 그럼 고맙지만 너무 번거롭지 않겠어?”

  “신경 쓰지 마세요. 쇼핑은 언제나 즐겁죠. 저도 겸사겸사, 둘러보고요.”

  “대신 언니가 저녁 살게. 하나보다 둘이 가면 심심하지 않고 더 좋지.”

  “그럼 있다가 앞에서 만나는 걸로 할게요.”

  “응. 고마워.”

  남편한테 전화를 걸어 저녁 먹고 들어간다니 뚱, 한 반응이다. 물론 반가워하지 않을 줄 예상했다. 당신이 가자고 한 가면무도회 때문이잖아. 가면이랑 옷 필요하다고. 그렇게 말하니 달리 토를 달진 않는다.

  “나도 가면이랑 옷이 있어야 하잖아? 난 어쩌고?”

  그렇지. 남편도 하나 장면해야 한다. 그이 양복을 떠올리니 한숨부터 나온다. 화려한 가면무도회를 그려보며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가슴이 들떴다가도, 거기 참석하기 위해 챙겨야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라 어질하니 머리가 아프다. 왜 세상엔 쉬운 일이 하나도 없는 걸까? 겉으로 보이는 1이나 2를 이루기 위해 그 보이지 않는 아래에선 10만큼의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게 세상 진리다. 그래서 모든 걸 겉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단순히 판단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는 거겠지. 외부에서 보기엔 그저 번쩍번쩍, 부럽게만 보이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 같은 직업도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지난하게 준비하는 과정을 거친다는 걸 너무 하찮게 간과한다. 내가 직접 그 자리에 있어보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건, 사람이든 일이든, 아무것도 없다. 이차 경험은 이차일 뿐이다. 일차가 될 수는 없다.

  “일단 한 번에 하나씩만 하자고. 오늘 일부러 다홈이가 시간 내서 함께 가준다고 했으니까 내 꺼 먼저 장만하고 나서 당신 것 챙기자고. 행사 날까진 전부 준비할 수 있겠지.”

  남편을 달래놓고 전화 통화를 마쳤다. 쇼핑할 때는 달랑 배추 한 다발을 사더라도 기분이 좋아진다. 다홈이랑 동반해서 쇼핑하러 갈 생각에 벌써 기분이 들뜬다. 아직 일 끝마치려면 반나절이 남았는데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옷은 어떤 걸로 하지? 영화에서 보듯 하늘하늘, 휘날리는 드레스를 입긴 그렇겠지. 그건 낯 뜨거워 절대 못 입을 거다. 색은 뭘로 하지? 너무 눈에 띄진 않게, 그렇지만 무도회 가는데 칙칙한 무채색은 싫다. 음, 쇼핑은 좋은데 고르는 건 또 그대로 힘들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니까.

  “언니, 저 왔어요.”

  오후에 손님이 뜸했다. 바쁘면 시간이 빨리 흐르지만 한가하니 그 흐름이 더디다. 괜히 잘 있는 분재 잎을 닦아대며 돌아다녔다. 일렬로 늘어선 꽃들에 물을 주다 너무 넘쳐서 황급히 바닥으로 흘러넘치는 물을 훔쳐내기도 했다. 필요없는 것들을 일부러 챙기려다 자꾸 일을 만든다. 참, 나도 나이 먹을대로 먹어서 이런 작은 일로 흥분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오히려 애가 된다는데 내가 벌써 그런 단계에 들어선 건지 걱정이다. 빨리 흐르든 천천히 흐르든 어쨌든 시간은 흐르게 돼 있어 마감할 시각이 다가온다. 거의 끝마칠 때쯤 예슬이가 들어선다.

  “왔어? 얼른 마무리할게.”

  “뭐 도와드려요?”

  “아니, 도와줄 거 없어. 전부 안으로 들여놨고 오늘 입금한 거 정리해서 금고에 넣기만 하면 돼.”

  사장님이 현금 관리를 위해 장만한 금고는 무척 튼실해 보인다. 저걸 뚫으려면 웬만한 망치와 드릴로는 어림없지 싶다. 그걸 열려면 미사일을 쏴야 할 거라는 예슬이 말에 웃음이 났다. 어디서 이걸 구하셨는지 궁금하다. 우리 마트에도 하나 장만하면 든든할 텐데.

  예슬이도 흥분했는지 가는 길 내내 말을 멈추지 않는다. 가면은 하나 구입해야 하고, 무도회 입고 갈 옷은 있지만 구입한 지 오래 돼서 아마 새로 장만해야 할 거란다. 평소 무도회 갈 기회가 흔하진 않을 텐데. 그런 건 하나 장만하면 평생 입는 거 아닌가? 웨딩드레스처럼. 내 생각이 너무 구식인가? 내 생각이 너무 구식인가, 라는 물음은, 예슬이가 데려간 가게 안으로 들어서, 옷을 둘러보며 가격 확인을 하다, 머리 한쪽으로 쑥, 들어가 버렸다. 무슨 옷이 이렇게 비싸! 특별할 때만 입는 특별한 옷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생각보다 엄청 비싸다. 이 돈이면 애 기저귀 몇 개를 사고, 남편 바지가 몇 별이고, 그걸 셈하다 멈췄다. 방금 전 스스로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이런 건 하나 장만하면 평생 입는 거니까, 그러니까, 한 번 살 때 제대로 장만해서 두고두고 입을 테니 그렇게, 따지면, 돈 값을 하는 거, 겠지. 속으로 그리 일렀지만 어째 자신을 타이르는 투가 된다. 영화 실미도에서 설경구가 했던 말처럼, 비겁한 변명입니다!, 라고 내 양심이 찔러 댄다. 하, 어쩐다. 이번엔 가면을 둘러봤다. 말도 안 돼! 이 애들 장난감처럼, 허접해 보이는 게 이 가격이라니! 그나마 튼튼하게 잘 만들었다 싶은 건 더 가격이 뛴다. 그렇구나. 가면무도회 같은 것도 돈 있고 여유 있는 사람이 즐기는 거다. 살림에 쪼들리는 나 같은 사람이 즐기기엔 동그라미 하나 추가, 숫자 하나 증가에 심장이 벌렁, 거린다.

  “언니, 이거 어때요?”

  예슬이가 쑥스럽게 묻는다. 예쁘다. 옷자락에 하늘거리는 술이 달린 형광 오렌지색 드레스다. 네 나이 때는 뭘 입어도 예쁠 거야. 불쑥, 떠오르는 말에 내심 혀를 찼다. 예슬이와 내가 얼마나 나이 차가 난다고. 괜히 나이 많은 먹은 티 내지 마라, 속으로 일렀다. 그래, 이런 기회가 자주 오는 것도 아닌데. 내가 살면서 언제 또 이런 데 와서 옷이랑 가면을 구입하겠어. 어쩌면 일생에 오직 한 번일지 모른다. 그래, 눈 딱 감고, 오늘 한 번만 지르는 거야. 그렇게 다짐을 하고 반복해서 이르지만 계산을 하기 위해 카드를 건네는 손이 조금씩 떨린다. 이 돈이면, ······, 아, 머릿속으로 셈하는 거 그만하라고.

  예슬이는 결국 가면과 옷 모두 새로 구입했다. 굳이 나를 향해 다짐한다. 이제 두 번 다시 드레스 사는 일 없을 거라고. 예전에 샀던 옷이 너무 낡아서 새로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고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을 해댄다. 우리 너무 스스로에게 미안해하는 듯하다. 자주 이러는 거 아니잖아. 눈 딱, 감고 지나가자. 이번만. 집에 들어서니 남편이 현무랑 놀아주는 중이다.

  “어머님 댁에서 식사하고 왔어?”

  “아니, 집에 와서 챙겨먹었어. 현무도 아버지가 보시더라고.”

  “정말? 어머님은 어디 가시고?”

  “요즘 집에 잘 안 계시나 봐. 두 분이서 서로 얼굴 보기도 힘들다더군.”

  “좋은 거잖아. 나이 드실수록 활발하게 활동하시면.”

  “그런가? 어떤 걸로 골랐어?”

  남편이 묻는데 괜히 수줍어진다. 미인대회 심사받는 것도 아닌데 남편이 별로라고 한마디 하면 상처를 많이 받을 듯하다. 이걸 보여 줘, 말어? 그가 고개를 내밀어 손에 든 쇼핑백 안을 보려고 하는데 그걸 마다하기도 그랬다. 가격표는 진즉에 떼버렸다.

  “그냥, 적당한 걸로.”

  가면이 먼저 백에서 나온다. 눈가와 코 주위를 덮을 수 있게 검은 셀로판지 같은 걸로 편평한 바탕을 이루었고, 그 주변에 다채로운 색상을 가진 털이 촘촘히 자리했다. 그 사이사이, 들러붙은 번쩍거리는 장식이 살짝, 지나치지 않나 신경 쓰였지만, 그 정도는 무도회라는 자리에서 그리 도드라지진 않겠지 싶었다.

  “예쁘네.”

  어찌나 감탄사가 훌륭하신지. 천천히, 드레스가 담긴 종이상자를 열었다. 예슬이처럼 오렌지색이나 아님 자주색처럼 붉은 기가 도는 색으로 할까 하다, 그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빨강 계통은 어쨌든 눈에 도드라진다. 굳이 숨고 싶다는 건 아니지만 시뻘건 아낙네가 되긴 싫었다. 조금 진한 파랑이 물들어진 바다색 드레스로 했다. 파란색은, 일단 눈에 편안하게 다가와 부담이 덜하니까. 내 어릴 적, 가장 좋아했던 공주는 백설공주도 신데렐라도 아닌 인어공주였다. 파란 바다에 사는 공주. 그 당시 함께 앉던 짝꿍이 이야기 끝이 해피엔딩이 아니라고 인어공주 이야기는 싫다고 했지만, 난 그래도 인어공주가 좋았다. 바다에 빠진 왕자를 구하고, 자기 머리를 잘라 다리를 얻는 그녀의 당찬 모습이 어딘가, 왕자님에 많이 의존하는 다른 공주들에 비해 독립적이고 진취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거품으로 변해 왕자 품이 아닌 바다 품에 안겼지만.

  “어때? 괜찮아?” 남편이 말없이 드레스 위아래를 훑는다. 그게 뭐라고, 남편이 심사하는 것도 아닌데, 살짝 긴장된다.

  “입어봐야 제대로 알 수 있지 않겠어?”

  “그냥 보기엔 어때?”

  입어보라는 그의 말이 성가셨다. 이걸 지금 입고 벗고 하라고? 그냥, 보기 좋다, 라는 그의 말이 듣고 싶을 뿐이다.

  “색깔 괜찮네. 너무 알록달록하면 애들 까까옷처럼 보일 거니까.”

  애들 까까옷? 에휴. 결국 잘 어울리겠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남편이 세심하게 챙겨주는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끔은, 자주는 아니라도 어쩌다, 건네는 다정한 말이 듣고 싶을 때가 있다. 이야, 공주님 같네, 그 말을 건네기 그리 어려울까? 그래, 저 사람 두뇌로는 그게 불가능한 건지도.

  “나는 온라인으로 주문했어.”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는데 그가 불쑥, 말을 꺼낸다. 이 사람 앞에서 드레스 입어볼까 망설이다,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온라인?”

  “어, 굳이 바쁜데 가게까지 찾아가서 고르고 그럴 여유가 없을 듯해서.”

  “가면이랑 옷, 전부?”

  “어. 요즘엔 온라인 쇼핑이 대세잖아. 종류가 어찌 그리 많은지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봐야 할지 처음엔 엄두가 제대로 안 나더라고.”

  “자기 혼자 골랐어?”

  그가 대답하기까지 살짝, 뜸을 들인다. 현무를 들어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하더니 앞에 내려놓는다.

  “내가 그런 거 보는 눈이 있어야지. 소이한테 봐달라고 했어. 요즘 젊은 애들 보는 시선이 그런 거 고르기에 더 적당하겠더라고.”

  소이?

  “그, 그래? 소이면 유행에 민감한 젊은 눈으로 봐줬겠지?”

  잠깐만. 소이가 젊은 눈이면 내 눈은 유행에 도태된 늙은 눈이야? 아니, 남편이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라는 걸 안다. 그건 그렇긴 한데, 그다지 좋은 기분이 들진 않는다. 왜 하필 소이지?

  “응. 가면무도회, 나는 가본 적도 없는데 소이는 잘 알더라고. 이게 좋겠다, 저게 맞을 거다, 아주 전문가처럼 찾아봐주던데.”

  방금 미소 지었어? 소이 얘기하면서 기분 좋아진 거야?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거 완전 밴댕이 소갈딱지 정도밖에 되지 않는 이해심을 가진 아내가 질투하는 풍경이다.

  “소이가 내 휴대폰에 가면이랑 옷이랑 사진 넣어줬거든. 가만 있어봐라. 어디 들어가 있더라?”

  머릿속으로 박정민이라는 이름이 쓰인 냅킨이 지나친다. 저이가 그걸 보기라도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지금 나는 남편에게 화를 낼 자격조차 없다. 당연, 그가 잘못한 것도 없고. 그저 하루의 대부분을 마트에서 함께 보내는 직원 중 한 명이 가면무도회에 입고 갈 가면과 옷을 골라준 것뿐이다. 하루의 대부분이라. 그렇다. 소이는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그이와 함께 할애한다. 그것도 남편 잘못이 아니다. 일을 하고 돈을 벌어야 하니까. 그렇지만, 그게 말이다. 이론적으로 설명할 길도 없고, 사리분별에 맞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루 중 나보다 더 오랜 시간을 그와 함께 보내는 직원 아이가, 나보다 어리고 청초하게 생긴 그 아이가, 내가 아니라 그 애가 남편을 위해 가면과 옷을 골라주었다. 누군가는 그게 뭐 대단한 거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싫었다. 아이 아빠가 입는 옷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골라준다는 게 날 불편하게 한다. 그는 그걸 입고 나와 동반해서 가면무도회에 가겠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그는 애를 앞에 두고 열심히 휴대폰을 눌러대고 있다. 나에게 보여줄 사진을 찾으려고. 당신은 소이를 어떻게 생각해? 여태 그런 질문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는데 불쑥, 떠오르니 그걸 떨쳐버리기 힘들다. 오늘 하루 쇼핑 할 생각에 들떠서 흥분했던 기분이 저 아래로 가라앉는다. 왕자를 볼 기대에, 걸을 때마다 찔러오듯 전해지는 고통을 참아가며, 왕궁으로 향했다, 결국 거품이 되어 바다 아래로 가라앉은 그녀처럼 내 마음이 가라앉는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그 아래를 헤엄쳐서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그게 마음처럼 잘 안 된다. 이 바다가 무척 넓고 깊다. 너무 쉽게 빠지고 거기서 헤어 나오기가 그리 힘이 든다. 난 인어공주만큼 수영 실력이 좋은 것도 아니니 그게 더 힘들겠지. 고민이다.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할까 봐. 무섭다. 이러다 진짜로 거품이 되어버릴까 봐.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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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경계 - 31 2023 / 5 / 30 204 0 12659   
30 경계 - 30 2023 / 5 / 29 215 0 11634   
29 경계 - 29 2023 / 5 / 26 203 0 12867   
28 경계 - 28 2023 / 5 / 25 195 0 12047   
27 경계 - 27 2023 / 5 / 24 199 0 13068   
26 경계 - 26 2023 / 5 / 23 205 0 8947   
25 경계 - 25 2023 / 5 / 18 204 0 13933   
24 경계 - 24 2023 / 5 / 16 208 0 7552   
23 경계 - 23 2023 / 5 / 15 212 0 17591   
22 경계 - 22 2023 / 5 / 11 217 0 24941   
21 경계 - 21 2023 / 5 / 10 208 0 6708   
20 경계 - 20 2023 / 5 / 9 220 0 14673   
19 경계 - 19 2023 / 5 / 4 212 0 8725   
18 경계 - 18 2023 / 5 / 3 212 0 10760   
17 경계 - 17 2023 / 5 / 1 211 0 6719   
16 경계 - 16 2023 / 4 / 28 212 0 5667   
15 경계 - 15 2023 / 4 / 27 215 0 6666   
14 경계 - 14 2023 / 4 / 26 225 0 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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