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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경계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3.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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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경계선 안쪽에서 살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 밖을 넘게 될 상황에 처하면서 경계하고 그 경계하던 태도가 차차 변화하는 모습을 탐구해보려 노력했습니다. 경계선 바깥과 안을 넘나들다 결국엔 어느 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입장에 공감해보셨으면 좋겠네요. 그럼 책 재미나게 읽어주세요. 감사합니다.

 
경계 - 8
작성일 : 23-04-19 07:33     조회 : 86     추천 : 0     분량 : 8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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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투구꽃 - 밤의 열림

 

  “빨리 나와. 나 지금 너네 집 앞이야.”

  “내가 지금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뭘 불평할 게 있다고.”

  “이제 와서 얘가 왜 이래? 괜히 참기만 하다 더 큰 병 키운다. 나오라고 할 때 딴 소리 말고 얼른 나와라.”

  애를 키우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자주 있다. 그 조그만 애가 어찌나 빨리 움직이는지 잠시만 한눈 팔면 어느새 저만치 가서 일을 저지르는 중이다. 먹지 못할 물건이 입 안에 들어가 있는 건 예사고, 어딘가 부딪혀 넘어지는 게 하루에도 여러 번이다. 오늘 마감 당번이라 아침나절 여유가 있었다. 남편 아침 먹여 내보내고 천천히 애 챙겨서 시부모님 댁에 맡기려 했다. 정말 아주 찰나였다. 쿵. 왜 탁자 다리는 타고 오르려고 했는지 모르겠다. 하기야 애가 그런 철이 있으면 걱정할 필요도 없겠지. 애한테 달려갔을 땐 이미 뒤로 넘어져 귀가 아프게 울어대고 있었다. 넘어지며 이마 한쪽을 찧었던지 그 자리에서 피가 스며 나왔다. 많지 않은 양이었지만 피를 보니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다행히 살짝 생채기가 난 정도였다. 눌러주고 있으니 피도 금방 멈췄다. 피부 껍질이 약간 벗겨졌지만 며칠만 지나면 바로 아물 듯했다. 다만 이마에 난 상처라 눈에 확, 띄었다. 그냥 두기 뭣해서 일회용 밴드를 붙였는데 그게 더 도드라져 보이게 한다. 누가 봐도 바로 알아챌 수 있다. 잔소리 들을 각오는 미리 했다. 어쩌겠나. 칠칠치 못한 엄마 탓인데. 어머님은 다른 것보다 상처가 난 자리 때문에 아주 못마땅해 했다. 잘못해서 흉 지기라도 하면 잘생긴 애 얼굴 완전 망치는 거라고. 별 거 아니라고, 상처 자국 남을 만큼 다치지 않았다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내 얘긴 뒷전으로 흘리고 연신 밴드가 붙여진 자리 주위를 하릴없이 눌러봤다 떼곤 하신다. 차마 밴드를 떼고 확인하시진 않았지만 그 못마땅한 마음을 풀 길 없어 손가락을 꼼지락거리신다. 애 얼굴이 잘못될까 봐 염려되는 마음, 제가 더 하면 더하지 덜하진 않다고요. 차라리 대놓고 한 바탕 꾸짖으시면 좋겠다. 나한테 가슴에 올라온 말 다 쏟아내지 못하셨으니 분명 있다가 남편한테 분풀이를 하실 거다. 그게 상상만으로도 짜증이 난다. 애 하나도 제대로 못 보면서 밖으로 나돌아 다니려고만 한다고 해봐. 바로 되받아 줄 테니까. 아, 이러면 안 되는데. 봄을 타서 그런가? 속에 쌓이는 화를 어떻게든 잘 다스리자고 다짐하는데도 그게 참 어렵다. 어째 다스리기는커녕 점점 그 통제력을 잃어가는 것만 같아 걱정이다.

  일하러 나와서도 찝찝한 기분이 들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점심 먹으러 나와 다홈이에게 연락을 했다.

  “현무 괜찮아?”

  “정말 별 거 아니라니까. 넘어지며 이마를 부딪쳤는데 살짝 까지기만 한 거야. 그 자리가 하필 이마라서 우리 시어머니가 난리가 나신 거지.”

  “애 키우다 보면 그런 일 한두 번이겠어.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너네 시어머니가 별나긴 하시지.”

  “시어머니만이 아니야. 남편이 시어머니한테 한 소리 듣고 나서 나한테 구시렁거릴 상상을 하니까 그거에 짜증이 더 치민다. 요즘 갈수록 화가 통제가 안 돼. 다홈아, 나 어쩌면 좋니?”

  “야, 너 울화병 생긴 거 아니야?”

  “그런가?”

  “그게 분노를 억누르기만 해서 신체에 증상으로 나타나는 병이라잖아. 너, 너무 참기만 하다 병으로 도졌나 봐.”

  “설마, 병이라고 할 것까지야······. 그런가? 맙소사, 다홈아. 나 화병 생긴 거야?”

  “안 되겠다. 이 언니가 도와줘야지. 그대로 있다간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 거야.”

  “어떻게 도와주려고?”

  “가슴에 화가 쌓여서 생긴 병이잖아. 풀어줘야지!”

  그러곤 일 끝나고 만나자고 한다. 일방적으로 대략 몇 시쯤 집 앞으로 올 테니 준비하고 기다리라고 하더니 제대로 대답할 겨를 없이 통화를 끝낸다. 지난 번 술 취해서 들어왔던 일 때문에 아직 남편 눈치를 보는 편이라 쉽사리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게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오늘 또 술 마시고 들어오긴 그랬다. 아니, 다홈이 만나면 꼭 술을 마시다는 건 아니잖아. 그저 친구 얼굴 보고 맛있는 음식 먹고 들어오면 괜찮을 듯도 했다. 풀어줘야 한다잖아. 더 쌓였다간 어디로 어떻게 그 화가 튀어나갈지 걱정도 된다. 남편도 내가 그런 식으로 풀어서 자기한테 불똥이 튀지 않으면 더 좋으리라. 자기를 위한 길이기도 하니까 이해하라고. 남편에게 전화를 거니 바로 받지 않는다. 바쁜가? 조금 기다리니 바로 전화가 온다.

  “어, 미안. 전화 받으려고 하니까 끊기더라고. 왜?”

  “아, 별 건 아니고. 오늘 어머님 댁에 현무 데리러 가줄 수 있어?”

  “어디 나가? 애 얼굴에 흉 졌다며?”

  참, 어찌나 빠르신지.

  “흉은 무슨 흉! 애가 넘어져서 살짝 까졌어. 금방 괜찮아질 거야. 흉질 거리 아니니까 걱정 마.”

  “저녁에 어디 가는데? 많이 늦을 거야? 당신 늦게 되면 난 거기서 밥 먹고 들어가던가.”

  “그거 괜찮네. 안 그래도 아들 얼굴이 반쪽 됐다고 걱정하시던데 제대로 몸보신 하고 와.”

  “어째 말이 고깝게 들린다. 어머니가 나 걱정해서 한 말 아직 마음에 두고 있는 거야?”

  휴. 그래, 오늘 풀러 가기로 했으니까 지금은 참자.

  “아니, 가서 잘 얻어먹고 오라고 하는 말이야. 딴 뜻은 없어.”

  “당신, ······, 오늘도 술 마셔?”

  이 사람이 내가 허구한 날 술만 마시는 줄 아나. 그래도 지난 번 일은 내가 잘못한 거니까 그렇게 묻는 걸 탓하진 못하겠다.

  “아니, 잠깐 다홈이 만나고 들어올게.”

  “다홈 씨 잘 지내시지?”

  “걔야 잘 지내지? 못 지낼 일 있겠어?”

  “어, 그래, ······, 정리는 다 됐나?”

  이혼하라고 부채질 하는 거야, 뭐야? 아니다, 이렇게 예민하지 말자고 하는데도 또 이런다. 그런 뜻으로 물은 게 아니잖아.

  “사람 사이 관계 정리가 어디 쉽겠어? 별거는 벌써부터 했는데 아직 소송 중인가 보더라고.”

  “다시, 합칠 가능성은 없는 거고?”

  “나 광휘 씨랑 사이 좋았던 거 당신도 알지? 두 사람이 다시 합칠 수만 있다면 내가 팔 걷어붙이고 돕고 싶은데 그러긴 너무 멀리 갔어. 서로 정신병자라고 밀어붙이며 법원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싸웠대. 어쩌겠어?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겠지.”

  “그려. 다홈 씨한테 내가 안부 묻더라고 전해줘.”

  “그럴게.”

  통화를 그렇게 마무리하는데 다홈이 말대로 풀긴 풀어야겠다는 확신이 더욱 굳어졌다. 남편이 별 생각 없이 건네는 말에도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볼 때 분명 내 속에 문제가 있긴 하다. 그랬는데, 막상 다홈이가 집 앞에서 나오라고 하니 이걸 어떻게 풀 건지 염려가 된다. 분명 코 비뚤어지게 마시자고 할 게 뻔한데, 그건 안 되고 어디 노래방에라도 가자고 하려나. 술기운 없이 노래 부르기도 어색한데. 밖으로 나오니 오늘 밤은 날씨가 풀렸다. 후끈, 하니 어디 들어가지도 않았는데 위에 걸친 겉옷을 벗고 싶었다.

  “나 오늘 술은 안 돼. 지난 번 사고 친 일도 있고 해서.”

  “네가 술 안 마시면 심심할 텐데. 취하지 않을 정도만 마시면 되잖아.”

  “한 잔, 두 잔, 그러다 계속 들어가는 거, 내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안 마셔.”

  “그래라. 싫다는 사람 계속 안 권한다.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네가 살 거야? 그럼 먹고 싶은 거 많지.”

  “이것이 일부러 집 앞까지 모시러 왔는데 고마운 줄은 모르고. 그래, 내가 풀어준다고 했으니 내가 쏜다. 먹고 싶은 걸로 아무거나 고르세요.”

  “그냥 해본 소리야. 일부러 이렇게 와줬는데 네가 왜 사냐? 사도 내가 사야지.”

  “아이고, 우리 여은 씨. 이제 철 들었네. 감사한 것도 알고.”

  그렇게 말하며 내 엉덩이를 툭, 툭, 쳐댄다. 오늘 다홈이 보기로 한 건 잘한 결정 같다. 이미 조금씩 기분이 나아진다. 그렇게 둘이서 저녁 메뉴 고르려 돌아다녔는데 이른 저녁부터 식당마다 사람이 붐빈다. 주말도 아닌데 이렇게 이른 시각에 손님이 넘치다니. 다들 일은 안 하고 먹으러만 다니나. 우리도 거기에 속하지만 우린 예외다. 오랜만에 만나서 나와 본 거라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반문하려나. 암튼 내 입장과 남 입장은 다른 거니까.

  “오늘 우리 맛보다 분위기를 선택할까?”

  다홈이가 그런 제안을 한다.

  “맛보다 분위기?”

  “맛집으로 소문난 곳은 아닌데 삼층에 있어서 경치 보기 좋아. 그리로 갈까?”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가끔은 분위기 좋은 곳에서 시간 보내는 것도 운치가 있겠지. 다홈이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들어선 곳은 옅은 노란색으로 벽을 칠한 경양식집이었다. 따로 특별히 내세우는 메뉴는 없는지 평이하게 고를 수 있는 흔한 음식들로 메뉴판을 채웠다. 주인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광고하듯 오래된 영화 포스터들로 곳곳에 장식을 했다. 연신 다홈이와 ‘어, 저 배우 아는데’라는 말과 함께 기억 한 구석에서 이름을 꺼낸다. 경치 보기 좋은 곳인 만큼 일부러 밖이 잘 내려다보이는 창 옆 자리로 골라 앉았다.

  “간만에 풀코스로 먹어볼까? 스프부터 시작해서 디저트까지 아주 제대로.”

  “너는 와인도 한 잔 해. 일부러 나 때문에 너까지 술 안 마실 필요는 없잖아?”

  “생각해줘서 고마워요, 여은 씨. 속으로 그럴까 했음. 네가 그렇게 안 말해줬으면 서운할 뻔 했다.”

  “술쟁이.”

  “그런 말 들을 만큼 누구처럼 취해서 인사불성 되진 않거든요.”

  “어쩌다 그런 거야. 몇 백 년 만에 한 번 그랬는데 사람들이 그걸로 주구장창, 뭐라 그러길 멈추지 않네.”

  “그냥 해본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하는군. 그것도 가슴에 맺힌 것 중에 하나구나. 오늘 그것도 함께 풀라고, 풀어. 내가 다 받아준다.”

  “어휴, 내가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난다. 고맙다고, 고마워, 친구.”

  그저 별 생각 없이 단호박 스프를 시켰는데 예상보다 맛이 괜찮았다. 홀짝, 홀짝,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자 다홈이가 맛 좀 보자며 자기 숟가락을 들이밀더니, 아예 자기가 시킨 크림 스프 접시를 내 접시와 바꿔치기 한다.

  “야, 너, 이런 게 어딨어? 네 꺼나 먹으라고.”

  “이거 은근히 맛있네. 진작 알았으면 나도 단호박 스프 시키는 건데.”

  결국 크림 스프는 한쪽으로 밀리고 둘이서 단호박 스프를 나눠 먹었다. 메인 메뉴까지 마치고 나서 배가 불러오자 슬슬,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높은 곳에 올라오니 밖이 잘 보이긴 한다.”

  “그렇지? 특히 밤에 내려다보는 풍경이 보기 괜찮아. 꽤 멀리까지 보여.”

  저 아래 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

  “뭘 그렇게 보니? 괜찮게 생긴 남자라도 있어?”

  “얘는. 내가 그렇게 밝히는 여자는 아니잖아.”

  “참, 내.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타고난 하늘의 이치거늘, 눈에 괜찮은 남자가 들어와서 쳐다보는 걸 갖고 밝힌다고 하는 건 그렇지.”

  “네 눈에는 어떤 타입의 남자가 들어오는데? 골라 봐.”

  “큭, 이거 괜찮네. 아무리 그림의 떡이긴 하지만 내 구미에 맞는 남자를 고른다니. 저 사람 어때?”

  “다리가 좀 짧지 않나?”

  “아니 저 정도면 괜찮은데. 네가 언제부터 키 큰 남자 좋아했냐?”

  “키 큰 걸 좋아하는 게 아니라 다리 길이가 적당하긴 해야지.”

  “저기는?”

  “머리 스타일이 마음에 안 들어.”

  “저긴 근육이 좀 있네.”

  “완전 머슴 타입인데.”

  “야, 이것이 눈만 높아져 가지고. 결혼한 애 엄마가 자꾸 그렇게 따질래?”

  “어차피 가지지도 못하고 구경만 하는 건데 따지면 어때? 이렇게라도 내 입맛에 맞게 골라보는 거지.”

  “오호, 저 정도면 킹카다. 너 설마 저 사람도 별로라고 할 거야?”

  “······.”

  어? 그였다. 이제 얼굴이 익숙해져버린 그 사람. 또박또박한 글씨체로 자기 이름을 박, 정, 민, 이라고 적어서 건네준 그 냅킨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그걸 버리지 않은 건지 나도 모르겠다. 혹시나 싶어서? 직장에서 회식 모임이라도 나온 건지 정장을 차려 입은 한 무리에 섞여 지나가고 있다. 그 바로 옆에 있던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엄청 우스운 얘기를 들었는지 크게 웃더니 그의 어깨를 두드린다. 같이 웃는 그의 얼굴. 그러고 보니 그가 그리 환하게 웃는 모습을 처음 본다. 내 앞에선 잠깐씩 미소를 띠우긴 했었는데 저렇게 밝게 웃진 않았었다. 하기야 처음 만나는 사람 앞에서 저리 웃으면 이상한 취급을 당할 거다. 역시 똑같은 브랜드의 정장. 이번엔 살짝 옅은 감색이다. 귀밑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이발할 때가 됐지 않나?

  “오호. 저 정도면 마음에 드는구나?”

  대답 없이 그를 보고 있자니 다홈이가 게슴츠레 눈을 치켜뜨고 묻는다.

  “응? 아니, 뭐, 그다지 나쁘진 않네.”

  “이것이, 지금 아무리 장난으로 재보고 있다지만 너무 하네. 저 남자 정도면 그저 감사하다고 넙죽 절이라도 하고 받아들일 만한데 나쁘지 않다고?”

  “그, 그런가?”

  보라색 원피스가 뭐라고 귀에 대고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준다. 그냥 직장 동료? 아님 연인? 요즘엔 사내 연애도 많이 하니까. 주변 일행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자 그에 맞춰 움직인다. 이번엔 반대쪽에 있던 남자가 말을 꺼내자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간다. 그 남자는 조금 연장자로 보인다. 회사 윗사람이라서 비위를 맞춰주는 걸까?

  “그다지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닌데. 네가 아예 눈을 떼지 못하는구나. 우리 여은이 저런 취향인지 몰랐네.”

  “어휴, 아니야. 눈을 못 떼긴.”

  앞에 든 음료를 들어 마시다 그만 사례가 걸렸다. 으푸, 컥, 커컥. 다홈이가 놀란 눈으로 등을 두드린다.

  “어머, 얘, 괜찮아?”

  “음, 으음. 컥, 컥, 엣취!”

  정말 가지가지 한다. 내가 겨우 진정되자 나를 보는 다홈이 눈빛이 짙어진다. 입가에 장난스럽게 걸친 옅은 미소. 아, 이런, 이건 뭐, 흡사 다 들여다보인 꼴이다. 다홈이가 나를 갖고 놀릴 텐데 이 짓궂은 행태를 어떻게 견디나?

  “어머머, 얘가 완전히 빠졌네, 빠졌어. 그렇게 숨이 멎을 정도였어? 아니 이 좋은 기회를 놓치면 안 되지. 언제 우리가 이렇게 다시 나와 보겠냐? 내가 엮어줘?”

  “기집애. 엮긴 뭘 엮어? 우리 그냥 구경만 하는 거였잖아.”

  “그러다 좋은 일 일어날 수도 있는 거고. 잠, 시, 만.”

  “에에? 야!”

  설마 다홈이가 일어나서 나갈 줄은 몰랐다. 그래놓고 화장실이라도 가겠지 싶었다. 어쨌든 이미 그는 저만치 지나갔을 테니.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가 아직 거기 있었다.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지만 붐비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속도가 많이 느렸다. 그의 일행은 다들 흥겨운 기분에 취했는지 서두르는 기색도 아니다. 불쑥, 머릿속에 끼어드는 문장. 옆얼굴 각도가 예술이다. 옆얼굴 각도가 예술이라고? 별 말을 다 한다. 이럴 땐 내가 내 자신이 아니고 누군가 머릿속에 들어와 대신 말을 해주는 듯하다. 귀 모양이 귀엽다. 맙, 소, 사! 한여은, 진정하라고.

  “설, 마!”

  정말로 다홈이가 그리로 내려갈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가게가 자리한 건물 밖으로 나서는 게 보인다. 후다닥. 이것저것 생각 없이 그대로 내달렸다. 안 돼, 안 된다고. 다홈이가 그에게 말을 걸고 그가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다면 난 정말 이 세상 하직이다. 그러고 나면 그의 얼굴을 어떻게 다시 본단 말인가. 근처 사는 이웃사촌인데 볼 때마다 피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삼층에서부터 어떻게 계단을 내려왔는지 모르게 달려 내려와서 밖으로 나섰다. 시간이 지날수록 거리로 모여드는 인파가 더욱 붐빈다. 도대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 있다 이렇게 한꺼번에 모여드는 건지. 다홈이 뒷모습이 저만치 보인다. 점점,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사람이 워낙 붐비니까 다홈이도 진행이 더디다. 내 안 어디에 그런 힘이 숨겨져 있었나 궁금하게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내게 부딪힌 사람들이 이상한 여자라고 쳐다보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그대로 밀어붙였다. 미친 여자라고 욕하라지. 지금 그 사람들이 미친 여자라고 할 건 아무렇지 않았다. 그가 미친 여자라고 할까 그게 가장 걱정이 될 뿐이다. 다홈이가 그의 일행 근처까지 당도했다. 바로 앞에 그가 있었다. 다홈이가 그를 향해 뭐라고 말을 건네는 게 들리는데 워낙 주위가 인파로 술렁이고 있어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도 다홈이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는지 다홈이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다홈이가 다시 말을 꺼내려는 찰나였다.

  “야!”

  오른쪽 어깨를 잡았다. 거기까지였다. 그 다음 말을 숨이 가빠서 잇지를 못했다. 그저 단단히 다홈이 어깨를 잡은 채로 상체를 숙이고 숨을 쉬었다 들이쉬기만을 반복했다. 다홈이가 뒤를 돌아보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어, 왜?”

  “자, 자, 잠깐만.”

  다홈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시간을 보냈다. 저 순진무구한 척 동그랗게 치켜뜬 눈. 얄밉다. 내가 저 때문에 이리 숨 막히게 뛰어야 하겠냐고. 겨우 말을 꺼낼 수 있을 만해지자 바로 소리를 질렀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뭐하다니. 부킹해주려고 그랬지. 이런 기회가 자주 오겠어?”

  “부킹은 뭔 부킹? 누가 해달래? 애가 어째 나이 들수록 너무 뻔뻔해진다. 사람이 체면과 예의는 지키며 살아야지.”

  “체면과 예의? 나는 쾌락과 즐거움을 체면과 예의보다 더 앞세우며 살련다.”

  “내가 너 때문에 창피해서 못 산다. 못 살아.”

  “그 사람 너무 괜찮았잖아? 네가 아주 푹, 빠져서 보더구만. 이런 기회 놓치면 너무 아깝다고.”

  “그만해. 됐어. 빠지긴 내가 뭘 빠졌다고. 네가 혼자서 상상해놓고선.”

  혹시나, 싶어 그를 찾는데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제 일행과 함께 저만치 가버렸나 보다. 가슴 한편에서 안도감이 든다. 그런데 그 옆에 떠오르는 아쉬움은 뭐지?

  “아, 어떡해. 너 때문에 그만 놓쳐버렸잖아.”

  “놓치긴 뭘 놓쳐? 그 사람이 사냥감이라도 돼?”

  다홈이가 또, 그 게슴츠레한 눈을 한다.

  “어흐, 그 말 좋은데. 사냥감? 너도 속으론 근사한 사냥감이라도 된다고 생각한 거지?”

  “네가 술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 취했구나. 그만 주접 떨어라. 자꾸 그러면 확, 버리고 가버린다.”

  억지로 다홈이 팔을 끌고 돌아섰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회식을 한다면 고깃집으로 갔겠지? 별 게 다 궁금하다. 건물 입구에 다다르자 경양식 집 알바 학생이 거기까지 나와서 우리를 찾으려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손님! 계산하고 가셔야죠!”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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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경계 - 17 2023 / 5 / 1 225 0 6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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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경계 - 15 2023 / 4 / 27 226 0 6666   
14 경계 - 14 2023 / 4 / 26 238 0 5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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