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할리페란 꽃 1부 @@@
내 기억에 인상 깊었던 내 삶의 여정 중 첫 배경은 지금의 중동지방 어디쯤인 듯싶다.
오래돼서 연대는 기억할 수 없고, 모계 부족사회였던 거 같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내게는 함께 동거했던 남편 역할의 성인 남자들이 네 명 있었고, 아이들을 비롯해 모두 함께 한집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나의 역할은 그들이 채집하고 사냥해온 식량을 골고루 가족에게 배분하는 거였다.
그리고 아이를 낳는 것도 물론 내가 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젖을 뗀 후 그 아이들을 기르는 건 주로 남자들의 몫이었다.
우리는 평화롭게 살았다.
집안을 이끄는 내가 현명해서라기보다 당연히 가족이 서로 협동하면서 사는 게 효율적이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내 아이들에게 어머니는 단 한 사람, 즉 나였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나와 사는 그 남자들 전부였다.
그래서 내 아이들은 각기 잘하는 게 다른 그 남자들에게 이것저것 골고루 배울 수 있었다.
독점이라는 개념, 즉 나만의 자식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아서 아이들과 그 남자들 간에는 일정한 공감 의식 외 거리감도 있었고, 나를 중심으로 우리들은 위계질서를 지키며 살았다.
사실 위계질서라는 것도 누가 누구 위에 있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그저 먼저 태어난 사람은 경험이 많은 자로 대우를 받긴 했지만, 항상 옳은 건 아니었고,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면 누가 됐든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거나 자신 있는 사람이 주로 나섰다.
간혹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것에 나섰다가 실수해도 노력에 대해서만큼은 용인되는 분위기였지만, 실패에 대해선 스스로 부끄러운 일로 여겼다.
그래서 대개는 아는 것에 대해서만 나서려 했고, 일이 성공적으로 끝나면 자랑스러워했다.
지금 와 돌이켜보니 그 시절이 꽤 좋았던 것 같다.
그땐 네 것과 내 것, 그리고 위, 아래라는 개념이 없었기에 지금보다 훨씬 덜 혼란스러웠고, 모든 게 심플했으니까. 함께 이루고 함께 나누면 끝이었다.
그리고 그게 훨씬 품격있는 생활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때의 일들은 이미 너무 아득한 옛이야기니 이쯤에서 끝마치는 게 나을 듯싶다.
그렇다면 내가 기억하는 다음 생은 또 어떤 삶이었을까?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처음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하는가? 난 죽지 않는 여자라는 말?
그렇다. 난 물리적으로 죽지 않는 게 아니라,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 죽으려 해도 죽을 수가 없는 여자다.
내가 사는 세상에서 만 18세, 즉 어른이 되고 난 후 개기월식이 일어날 때 내겐 과거의 기억이 찾아온다.
전부는 아니고 부분이 떠오르는데, 퍼즐을 맞추듯 끼워 맞추다 보면 어느 정도 내 전생을 가늠할 수 있었다.
처음엔 꿈과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차차 연관성을 느끼게 되었고, 나는 그게 내 전생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오래 살다 보니 내 전생의 기억들이 혼합되기도 하고, 그중에서도 좀 더 뚜렷한 기억이 있는 게 존재하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게 있기도 했다.
그리고 전생을 잘 기억하기 위해 온 정신을 집중하는 그만큼 내게 기억이 떠오른다는 걸 점차 알게 됐다.
참, 나의 또 다른 생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지?
난 한때 번성한 왕국의 왕비를 모시던 시종이었다. 이름은 시몬느.
이제부턴 나라는 호칭 대신 그녀의 이름으로 이야길 계속해야겠다.
원래는 왕비가 자기 나라에서 데리고 온 시종이 있었지만, 도착하고 얼마 후 말라리아에 걸려 죽는 바람에 친척의 소개로 시몬느는 왕비의 새로운 시종이 됐다.
왕비는 빼어난 외모에 뼈대 있는 가문의 공주였다가 정략결혼의 희생양이 되어 왕과 결혼했다. 그래서 왕에게 진심을 주지 않았고, 왕을 같잖게 여겼다. 게다가 왕이 신임하던 경비대장과 외도까지 하고 있었다.
그녀는 왕이 처소에 들고 나면 자기 방으로 경비대장을 불러들여 은밀한 시간을 가졌다.
그 중심에 시몬느가 있었는데, 그녀가 하던 일을 생각하면 크게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긴 했다. 왕비와 관련된 일 중에서도 감춰야 할 은밀한 일은 대개 다 그녀 몫이었기에 말이다. 그녀는 왕이 처소에 든 후 왕비에게 그걸 보고하고, 왕비의 명에 따라 경비대장에게 왕비의 연서를 전하는 역할을 했다. 무려 6년이란 세월을.
그 일이 끝난 건 왕이 경비대장과 함께 전쟁에 참여해서였는데, 그 원정에서 경비대장이 죽어버렸고, 그가 죽은 후 왕비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는 듯싶더니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다음 외도상대를 물색했다.
이번엔 왕의 먼 친척뻘인 후작이었는데, 준수한 외모에 유려한 입담, 거기에 명석한 두뇌와 재치를 소유하고 있는 건 기본이었고, 여자를 후리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 인물로 소문이 자자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얼마 전부터 왕비에게 매일 싱싱한 꽃을 선물했고, 꽃과 함께 시 한 편을 매일 바치고 있었다.
얼굴은 빼어났지만, 지성은 그에 훨씬 못 미쳤던 왕비는 그런 그의 꽃과 시 공세에 마침내 정신을 잃고 그를 침대에 불러들이려고 맘먹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그날 후작에게 자신의 연서를 전하는 역할을 시몬느에게 맡겼다.
그런데 왕비가 전해준 연서를 보던 후작이 갑자기 그녀, 즉 시몬느에게 이렇게 물었다.
“네 주인께선 하루에 몇 시간이나 책을 읽으시지?”
후작의 의도를 알지 못했던 그녀는 당황하며 대답했다.
“네? 그게 무슨...”
“넌 옆에서 늘 시중을 드니까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 거 아니냐. 도대체 하루에 얼마나 책을 읽으면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건지 그게 궁금해서 말이야.”
“아... 그게...”
당황한 그녀를 보며 역시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후작이 계속했다.
“그렇지? 대답할 수가 없겠지! 하하~”
“...”
“가서 네 주인께 전해. 내일부터 꽃과 시가 배달되는 일은 없을 거라고. 그리고 내게 다신 연락하지 말라구. 만약 연락한다면 왕에게 곧바로 그 사실을 알릴 거라고.”
다급해진 시몬느는 이렇게 외쳤다.
“저, 다르망 후작님! 왕비님께 그렇게 말씀 올리면 전 죽은 목숨입니다. 제발”
“네 목숨 때문에 내가 그런 여자를 만나긴 좀 그렇구나.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가 아주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애처로운 듯 말했다.
“그래도 한 번만이라도 왕비님 처소에 들르셔서 직접 말씀을 해주심이”
“내가 보통은 여자들에게 많이 관대하단다. 하지만 내게도 꼭 지켜야 할 원칙이 몇 가지가 있는데, 무식한 여자와는 절대 말을 섞을 수 없다는 것도 그중 하나거든.
여자의 얼굴만큼, 아니 얼굴 그 이상으로 내가 여자에게 매혹되는 건 바로 품격이야.
품격을 잃은 여자는 곧 떨어진 꽃잎과 같지. 아무 가치가 없는.”
“...”
풀이 팍 죽어 고심에 찬 그녀의 모습을 가련하다는 듯 내려다보던 후작이 말을 이었다.
“덧붙여 시종들에게 최대한 관대한 나지만 이번 일만큼은 절대 양보할 수가 없구나.”
그의 말에 기죽지 않고 그녀가 갑자기 대들 듯 말했다.
“이 경운 제 목숨이 달린 문젠데요? 관대함의 정도로 어찌 제 목숨의 당락을 논하시는 건지, 원칙이 목숨에 앞선다는 건 또 무슨 논리이신지 전 당최 이해가”
그때 그녈 뚫어질 듯 바라보던 후작이 생각에 빠지더니 잠시 후 말했다.
“알았다. 내 생각이 바뀌었다! 네 왕비 처소로 가자. 내가 직접 그녀를 설득하고 나온 후 너와 함께 이 밤을 보내고 싶구나.”
그녀는 놀라자빠질 뻔했다. 하지만 자빠지는 거 대신 그의 눈을 피하곤 그를 따라 함께 왕비 처소로 갔다.
왕비 처소에 도착해 안으로 들어갔던 다르망후작이 잠시 후 나오더니 그녀에게 말했다.
“왕비는 이제 잠을 청하겠다고 하더구나. 모든 게 해결됐으니 너는 네 처소로 돌아가도 된다. 그러니 나와 오늘 밤을 함께 보내도록 하자.”
시몬느는 당황스러웠지만 결심한 듯 자신의 생각을 내뱉었다.
“다르망 후작님! 후작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꽃에 주인이 존재하는 건 아니듯 주인의 보호를 벗어나 그저 들꽃으로 남길 소망하는 꽃도 있답니다.”
그는 한동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렇게 말했다.
“네가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긴 하다만... 왕비가 너고, 네가 왕비였다면 내 선택이 쉬웠을까?”
“...”
그는 그녀를 다시 지그시 내려다보더니 그녀에게 심쿵한 윙크를 한 번 날려준 다음 밖으로 나갔다.
그게 시몬느와 그와의 마지막 만남이었다면 애당초 이 이야기는 시작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당시 그녀가 그렇게 당돌하고 똑부러지게 후작에게 항변할 수 있었던 건 알게 모르게 어느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전생의 모습이 떠올라서였을 수도 있으리라. 네 명의 남자를 거느리고 여러 아일 낳고 기르며 수많은 가족을 돌봐야 했던 여장부와도 같았던 그녀의 전생이 그날 그 사건에 영향을 미치지 말라는 법도 없을 터.
어쨌든 며칠이 지난 후, 시몬느는 다르망 후작을 다시 만나게 됐다.
그건 다름 아닌 친히 왕이 그녀를 불러 왕의 부름에 응하기 위해 왕의 처소를 찾았을 때, 후작이 왕 바로 옆에 서 있는 걸 그녀가 보게 된 거다.
왕은 시몬느에게 말했다.
여기 있는 다르망 후작이 널 어여삐 봐 너를 그의 성으로 데려가고 싶어한다고. 그리고 이미 왕비에겐 양해를 구했다고 덧붙였다.
그제야 후작이 시몬느에게 부드러운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굳이 싫다면 강요하고 싶진 않다만, 되도록 내 청에 응했으면 싶구나.”
당시엔 그의 제안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지만, 어쨌든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던 시몬느는 왕의 명에 따라 그가 지정한 마차에 올라 그의 성으로 가게 됐다.
왕비에게 인사를 하러 갔었는지, 아니면 인사도 못 하고 바로 그를 따라나서게 됐는지 그건 중요하지도 않지만, 어쨌든 그녀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다르망후작이 지정한 마차 안에는 좋은 향이 풍기는 캐시미어 덮개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걸 덮고 갈 수 있었다는 사실, 그것만이 또렷하게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
그렇게 해서 시몬느는 꽃마차를 타고 후작의 여인, 아니다! 이건 조금 더 두고 봐야 할 일이 되겠고, 아무튼 후작이 지정한 마차에 올라 그의 성으로 입성하게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