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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맹하게
작가 : 강이안
작품등록일 : 2020.11.9

'문 여는 자'의 2권입니다. 글의 흐름 안에서 조금 더 박진감 있게 그려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재미나게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행복하세요.

 
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맹하게 27
작성일 : 21-04-19 03:54     조회 : 346     추천 : 0     분량 : 9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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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7.

 

  은지는 눈을 감았다 떴다. 눈 주위에 튀었던 떡고물 때문에 눈자위가 아리다. 손을 들어 털어내 보지만 생각보다 잘 떨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방향감각이 전혀 없다. 동일한 형태가 끊임없이 이어지던 복도. 쏟아지는 떡을 피해 그대로 내달렸다. 떡을 내던지던 여자는 옆에 있던 그 기자를 따라갔는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아 뒤돌아보니 아무도 없었다.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한다. 다시 돌아가야 할까? 민호가 언제쯤 도착하려나? 병원 기도실은 1층에 있는데 어떻게 그리로 데려가지? 민호가 그 구슬을 가지고 오겠지. 그걸 이용해야 하나?

  아무래도 그 여기자가 걱정된다. 도망쳐왔던 방향으로 되돌아선다. 발걸음은 조심스럽다. 필요할 때 다윗의 멜로디가 흘러나올까? 심지어 나팔이 가르쳐줬던 멜로디들이 무엇인지 헷갈린다.

  “세 번째, 네 번째가 뭐였더라? 다섯 번째는 무서운 거였는데.”

  여러 종류의 떡들이 드문드문 바닥에 흩어졌다. 은지는 되도록 발로 밟지 않으려 피해가며 앞으로 나아간다. 그 여자도, 여기자도 보이지 않는다. 주변이 온통 떡으로 어지럽다. 따끈하게 데워진 먹기 좋아 보이는 떡은 식욕을 자극하지만 이렇게 사방으로 널브러진 모습은 되레 있는 식욕도 없앤다. 난감한 표정으로 바닥에 떨어진 떡들을 피해 움직이던 은지의 귀에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시선을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찾는다.

  “아, 저 사람.”

  무덤처럼 쌓여진 팥떡 아래서 미세한 움직임과 함께 힘들게 이어지는 숨소리가 난다. 서둘러 그 곁으로 다가간 은지는 다급히 떡을 들어낸다. 온몸에 팥물이 들었다. 거무튀튀한 짙은 보라색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덮었다. 얼굴에는 피딱지가 팥떡과 엉겨 붙어 기괴한 인상을 자아낸다. 은지는 숨을 쉬기 편하도록 최대한 입 주위에 묻은 떡을 떼어내고 몸을 옆으로 누인다.

  “이럴 때 호스피스 교육에서 배웠던 응급처치법이 도움이 되네. 어떤 상황에서도 호흡을 유지하는 게 최우선이라 했어.”

  기도가 막히지 않도록 입 안에 든 오물을 게워내고 고개를 숨 쉬기 좋게 올려준다.

  “이 다음에 뭘 하지? 그래, 서투르게 함부로 행동하지 말고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아야해.”

  일어서려던 은지는 뭔가에 놀란 듯 무릎을 굽히고 확, 주저앉는다. 두 손을 들어 팔짱을 끼듯 자신을 감싸더니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확인한다. 눈에 달리 들어오는 대상은 없다.

  “뭐, 뭐야?”

  미세한 떨림이 몸 전체로 퍼져나간다. 흡사 겁먹은 한 마리 생쥐의 모습. 고양이가 바로 근처에 있는데 찾지 못해 더욱 겁에 질린 듯. 이럴 바엔 차라리 공포의 대상과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게 낫다.

  “부, 분명, 누가 있었어. 날 보는 시선이 느껴졌는데.”

  목에 돋은 소름을 손으로 쓸어내며 고개를 좌우로 돌린다. 아무도 없다. 보이는 건 온통 떡뿐.

  “한동안 떡에는 손도 안 될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고 가슴이 계속 뛴다. 스스로를 감싸 안은 손을 풀지 않는다.

  “이상해. 분명 시선을 느꼈는데.”

  커어억. 누워있는 남자가 거친 숨소리를 낸다. 기도가 막히기라도 한 걸까? 은지는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고 자신을 타이른다.

  “괜찮아. 내가 착각한 거야. 아무 일 없어. 아무렇지 않다고. 정말 으스스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은지는 조심스레 무릎을 세우려고 노력한다. 한 번 빠진 힘을 다시 채우기가 녹록찮다. 양팔을 내려 바닥을 짚어가며 엉거주춤 일어선다. 끙. 양 다리에 힘을 주는 동시에 허리를 세우려고 하는 찰나였다. 귀밑 머리카락이 삐죽이 일어선다. 금세 목 위로 소름이 덮인다. 그 기분 나쁜 느낌이 전신을 덮친다. 누군가가 쳐다보고 있다는 감각. 멀리서도 알 수 있는 자각. 고개를 돌리면 금방 눈이 마주칠 것 같은데. 주체하지 못하고 온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먼저 왼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없다. 다음은 오른쪽. 눈에 들어오는 건 없다.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내쉰다. 몸을 틀어 뒤를 향한다. 어렵게 눈꺼풀을 들지만 텅 빈 공간만 앞에 있다.

  “아니야. 이게 착각일 리가 없어. 이렇게 소름이 돋는데.”

  아주, 미세한 기척을 느꼈다.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부터.

  “설마.”

  고개를 들어 위를 보기 위해 목이 넘어간다. 검은 눈동자가 정확히 은지의 눈과 마주한다.

  “아아아아악!”

  은지의 비명이 복도를 타고 넘어올 때 민호는 자신이 있는 자리를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여차하면 뒤로 물러나서 반대 방향으로 뛸 생각이었다. 갑작스레 울리는 여자의 비명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가 움직일 생각을 못하고 굳어버린다. 박간호사를 돌보던 고참 간호사는 겁에 질린 눈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을 주시한다. 박간호사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오늘 이게 무슨 일이라니. 병원에 마가 꼈나?”

  상철도 다른 사람들처럼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본다.

  “은숙 씨.”

  경비직원들은 복도를 울리는 비명소리에도 상철의 눈치를 살피며 섣불리 움직이지 못한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가려면 상철을 지나야 한다. 이제 마음이 급해진 건 민호다. 비명소리의 주인공이 누군지 금세 알 수 있었다. 이 일을 맡게 된 후로 놀랄 일이 생길 때마다 자주 들었던 고음.

  “은지야. 무슨 일이 생긴 거야?”

  주변을 보지만 섣불리 움직이는 사람이 없다. 보는 사람의 눈을 홀릴 만큼 번쩍이는 골프채를 서슬이 퍼렇게 움켜쥐고 언제든 골프공을 쳐낼 자세를 잡은 그가 전혀 만만하게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민호도 다급해졌다. 이대로 있을 수만은 없다. 경비직원들이 만류할 새도 없이 혼자서 앞으로 나아가더니 상철과 마주한다.

  “상철이 아저씨. 저는 아저씨한테 어떤 나쁜 감정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도우려는 그 마음 이해해요. 그런데 아저씨. 저쪽에서 제가, ……, 제가, 아끼는 사람이 무슨 사고를 당했는지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저도 그 사람을 지켜줘야 해요. 그저 지나가기만 할게요. 가게 해주세요.”

  진지한 입매와 깊어진 눈으로 자신의 말을 전하는 민호를 보며 상철은 주저한다. 잠깐, 자신의 행동에 대한 확신이 엷어진다. 이게 잘하는 짓인가?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면서까지? 두 손으로 쥐고 있던 골프채를 내려 한 손으로만 잡는다. 발 근처에 놓인 골프공을 본다. 갑자기 격렬하게 피로감이 몰려온다. 자칫 삐끗, 하면 넘어갈 듯 아득해진다. 이제 나한테 뭐가 남았지? 아내는 나를 보고 도망쳤어. 무슨 괴물을 보듯 하며. 은숙 씨는 끝까지 옆에 있어줬지. 나를 걱정해주면서. 상철이 다시 두 손으로 골프채를 고쳐 잡는다. 얼굴에 드러나던 주저하는 빛이 사라진다.

  “미안해, 젊은이. 나는 내가 한 약속을 지켜야겠어. 지금 내 마음에 남은 건 그것뿐이네. 그 약속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두 발로 서서 삶을 지탱할 의미가 나에겐 더 이상 없어. 내 정말 미안하지만, 자네를 가게 할 수는 없네.”

  민호는 일이 쉽게 풀릴 거라 예상하지 않았다. 상철에게 말을 걸면서 이미 웃옷 호주머니 안쪽에 있던 구슬을 하나 집었다. 그걸 꺼내서 손 안에 쥔다. 상철은 민호의 동작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에 제대로 대비하진 못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골프공을 쳐낼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상대방이 뭔가를 던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의중을 찔려 불시에 날아든 검은색의 둥근 물체를 몸에 맞았다. 그뿐이었다. 사람들은 그걸 던졌던 민호를 쳐다본다. 민호는 바닥에 떨어진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다. 상철은 그런 민호를 이해할 수 없어 황망히 주시한다. 민호의 머리에 퍼뜩, 생각이 떠오른다. ‘아차. 고리를 풀고 던지랬지.’ 바닥에 떨어진 구슬 위 단단히 걸린 고리가 보인다. 민호가 다시 주머니에 손을 넣는 것을 상철은 놓치지 않았다. 팔과 다리가 정확한 자세를 잡았다. 고리가 풀린 구슬이 공간을 타고 날아왔지만 상철에게 가닿기 전에 상철이 쳐낸 골프공과 부딪혀 날아왔던 방향 저 멀리로 날아간다. 민호의 얼굴에 낭패한 기색이 번진다. ‘이, 이게 아닌데.’ 상철이 두 번째, 세 번째 스윙을 연달아 이어간다.

  “으아악!”

  “엎드려!”

  얼굴 위 핏자국이 선명한 채로 앞줄에서 지휘하던 경비직원이 고함을 내지른다. 날아오는 골프공의 속도가 무척 빠르다. 기겁을 하고 털썩, 주저앉고,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가린다. 순간적인 반사동작으로 아래를 향해 다이빙하는 자도 있다. 공에 맞은 사람은 없었지만 날아온 골프공 때문에 퍼져가는 공포의 파급효과는 상당히 빠르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밀치고 당기기를 서슴지 않는다. 질서를 지키자는 공중도덕의식은 내 한 몸 살고 나서야 지킬 수 있는 사치품이다. 그 다음 공이 날아오자 이제 그 자리는 폭탄 맞은 시장바닥 같다. 서 있는 사람은 없고 모두 바닥에 엎드려 엉금엉금 기는 동작을 한다. 상철의 소매 안쪽에서 골프공들이 떨어진다. 바닥을 향해 하나씩, 턱, 턱,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래로 내려간다. 팔을 휘두르며 다리를 돌리는 동작으로 하나를 치고 난 후 다시 자세를 잡아 그 다음 공을 쳐낸다.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다. 마치 공치는 기계 같다.

  “올 테면 얼마든지 와라. 이것만큼은, 이 동작만큼은 내가 꿈에서도 잊지 않는다. 피가 끓는구나, 끓어올라.”

  한쪽 벽 끝으로 향하는 민호의 움직임이 굼뜨다. 다급하게 서두르는 옆 사람과 그만 발이 엉켰다. 다리를 빼내서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 애쓴다. ‘김사부님이 위기상황에서 어떻게 하라고 했더라? 이럴 때 도움이 될 만한 말을 하지 않으셨던가?’ 김사부와 처음 대면한 날,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이 그 날의 마무리 주제였다.

  “아무리 대단한 최고의 무술가라도 항상 헛점은 있지. 세상에 완벽할 수 있는 자가 누가 있겠어? 상대방의 움직임과 특징을 잘 살펴 봐. 쉽게 얘기해서, 축구선수가 내 적이라면 어디가 약점이겠나? 아무래도 팔이겠지. 반대로 야구선수라면 다리겠지. 누구든 뛰어난 부분이 있으면 그와 반비례해서 안 쓰거나 발달하지 않은 데가 꼭 있다고. 그걸 노리면 확률은 아주 높아지지 않겠어?”

  ‘골프선수가 적이라면?’ 자로 잰 듯 정확한 자세로 공을 쳐내는 상철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일부러 맞추지 않는 건지 공이 사람들 머리 위를 지나쳐 날아간다. 연달아 날아드는 공 때문에 누구도 바닥에서 일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 와중에 두려움 때문인지 울음을 터뜨리고 입에서 침이 흘리는 사람도 있다.

  ‘생각을 해보자. 골프는 손으로 치니까 일단 하체가 약점이겠지. 크게 휘두르니까 동작과 동작 사이 틈을 타서 접근하면 유리할까? 저 무시무시하게 생긴 골프채에만 안 맞는다면 가능할 법한데. 상철이 아저씨 장점은 뭐지? 그래, 눈 감고도 맞출 것 같은 타고난 자세. 그럼 자세가 흐트러진다면?’

  민호는 벽에 바짝 붙어 주변을 훑는다. 사람들이 겁을 먹고 맨땅에 자맥질하느라 바쁘다. 그 혼란함 속에서 경비직원들은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사방으로 돌아가던 눈이 한 곳에 멈춘다. 상철이 대걸레를 집었던 곳. 아무런 장식 없는 하얀 벽 앞 덩그마니 자판기가 놓여있다. 각종 음료수 캔과 소형 플라스틱 병이 그 안에 자리한다. 민호의 머릿속에 프로골프선수가 악천후 속에서 힘들게 경기를 이어가는 장면이 스쳐간다. ‘바닥이 미끄러워도 저렇게 완벽한 자세를 잡을 수 있을까?’ 주머니 안에서 천 원짜리 지폐가 잡힌다. ‘그래, 까짓 거 한 번 해보자.’

  자신을 지키기 위한 보호본능이 발동한 사람들 틈을 뚫고 나가기가 쉽지 않다. 민호는 몸과 얼굴에 와 닿는 팔과 다리를 밀쳐내며 어렵사리 앞 공간으로 나아간다. 상철의 눈을 피하기 위해 허리는 세우지 않았다. 골프공은 크기가 작아서 제대로 치려면 집중해야 한다. 거기다 혼비백산 흩어지는 사람들만으로도 상철의 주의를 끌기 충분했다. 잘만 하면 들키지 않고 자판기에 도달할 수 있을 듯했다. 벽으로 바짝 붙어 조심히 움직인다. 상철이 다음 공을 치기 위해 양팔을 아래로 내린다. 그의 양 눈이 정확히 공을 조준하기 위해 가운데로 모인다. 민호는 팔을 딱, 벽에 붙이고 다리를 번갈아 가며 미끄러뜨린다. 바로 앞에 낭떠러지가 있기라도 한 듯이 벽에 완전히 밀착해서 나아간다. 목덜미 위로 땀이 흘러내린다. 추운 날씨에도 긴장한 몸으로 힘을 주니 땀이 솟는다. 조심해서 움직이려니 전진속도가 상당히 느리다. 이제 상철이 있는 곳을 지나치려 한다. 고개만 돌리면 바로 민호를 볼 수 있는 위치다. 공이 날아간다.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방향이 아니라도 공이 날아오는 것 같으면 그대로 고함을 질러댄다. 공포의 물결에 파도타기를 하면서 한쪽에서 비명이 울리면 옆쪽이 되받고 또 그대로 다시 전달된다. 목을 타고 침이 넘어간다. 느리지만 발을 멈추지는 않는다. 후다닥, 내달리면 자판기 앞까지 금방 도달할 거리지만 눈에 띄면 안 된다. 앞에서 지휘하던 경비직원이 그때 민호를 발견한다. 궁금한 표정이지만 상철이 보고 있어 함부로 행동하지 않는다. 상철이 다음 공을 소매에서 떨어뜨리고 그 뒤로 걸음을 옮긴다. 공이 사선으로 굴러가서 자세를 잡고 고개가 돌아가면 자칫, 민호를 발견할 수 있다. 경비직원이 다급히 나선다.

  “저, 선생님.”

  상철이 흠칫, 멈추고 그를 본다. 경비직원이 그 시선을 피하듯 하며 민호를 흘겨본다. 민호가 그 시선을 받더니 움직이기 좋게 벽에서 조금 더 떨어진다. 걸음 속도가 빨라진다.

  “제발 부탁입니다. 잠시 멈추시고 제 말을 들어보세요.”

  상철은 그 경비직원의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본다. 더 이상 해를 끼치고 싶은 의도는 없다. 손에 골프채를 들고 있지만 다리가 제대로 된 자세를 잡진 않는다.

  “저희 모두 뒤로 물러나면 되겠습니까? 아무도 선생님 계신 곳 지나치지 않으면 되지요? 그게 원하는 바 아닌가요?”

  상철이 대답이 없다. 앞을 노려보기만 한다. 민호가 보폭을 짧게 해서 발을 빨리 놀린다. 다음 말이 나오기 전에 자판기에 닿을 수 있었다. 지폐를 집어넣고 되는 대로 아무 버튼을 누른다. 무설탕 코카콜라 캔이 아래로 떨어진다. 쿵. 꽤 큰 소리가 복도를 울린다. ‘이게 이제 보니 보통 큰 소리가 나는 게 아니구나.’ 민호는 캔을 집어 들기 위해 허리를 숙이려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 목덜미에 땀이 맺힌다. 한참 소란스러웠던 저쪽에서 더 이상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다들 뭐하고 있는 거야?’ 민호는 천천히, 아주 조심스레, 몸을 돌렸다. 상철이 반쯤 허리를 비틀어 이쪽을 보고 있다. 그 뒤에서 경비직원도 민호를 본다. 더 뒤에 있던 사람들도 움직임을 멈추고 민호를 향해 눈길을 준다. ‘그, 그렇게 쳐다볼 구경거리는 아닌데. 아, 뭐라고 말을 해야 할 텐데.’ 민호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그 흰 종이 위로 대충 글씨가 쓰인다. 그걸 읽듯 하며 억지로 입을 뗀다.

  “목, 목이 너무 말라서…….”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이 없다. 경비직원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생각했다. 겨우 목마른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썼던 건가. 상철의 눈이 민호의 얼굴 위로 그대로 가서 꽂힌다. 그 시선에 민호가 침을 삼킨다. 상철이 살짝 미소를 짓는 것도 같았다. 등을 보인 상철을 향해 경비직원이 달려든다. 얼굴 위로 흘러내린 핏물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상철은 방어 자세를 취하며 골프채를 휘두른다. 채가 경비직원을 정통으로 맞추진 않았지만 왼쪽 귀 끝을 스친다. 제대로 맞지 않았어도 워낙 휘두르는 힘이 컸던지 살갗이 찢어져 피가 공중으로 흩뿌려진다. 통증으로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이를 악물고 몸을 그대로 던진다. 민호는 자판기에서 캔을 집어내더니 상철에게 다가선다. 경비직원과 같이 넘어지면서도 채를 손에서 놓진 않았다. 캔이 따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주변으로 콜라가 뿌려진다. 상철의 주위로 검은 기포가 흘러넘친다. 경비직원은 민호의 행동에 의아해서 다음 동작을 멈추고 주시한다. 일어서려던 상철은 바닥에 뿌려진 물기 때문에 중심을 잃는다. 공을 치기 위한 자세를 잡을 생각은 하지도 못한다.민호가 그 뒤로 빠져나간다. 뒤를 돌아볼 생각은 없다. 이제 남은 자들이 마저 알아서 하시라며.

  “거기 서!”

  상철은 저만치 앞서가는 민호를 향해 일갈한다. 옆에 있던 경비직원이 붙잡으려 했지만 그만 젖어버린 바닥 위로 미끄러진다. 어렵사리 골프채를 집고 균형을 잡은 상철이 비틀거리며 일어서서 뒤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어 번 미끄러졌지만 넘어지진 않았다. 복도를 돌아 나아가던 민호는 무심코 뒤를 보다 기겁을 한다.

  “어, 어, 아저씨.”

  상철이 골프채를 바닥에 끌며 따라오고 있었다. 콜라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엉겨 붙어 무서운 인상을 풍긴다. 그 뒤엔 아무도 따라오지 않고 그 혼자다. ‘그래. 지금이 적절한 순간이겠어.’ 주머니에서 구슬을 집어 꺼냈다. 고리를 푸는 것도 잊지 않았다. 상철이 골프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단번에 내리칠 모양새로 다가온다. 얼굴 위로 붙어버린 젖은 머리카락, 앞에 있는 민호만 노리고 달려드는 기괴한 표정, 젖은 발 때문에 제대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걸음새까지 더해 흡사 절에서 보는 무시무시한 천왕상을 연상시켰다. 휘두르면 이제 머리를 맞을 수도 있겠다 싶은 거리에서 민호가 구슬을 던졌다. 구슬이 날아가 몸에 탁,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골프채가 허공을 가르며 민호를 조준해 날아온다. 민호의 눈 바로 앞까지 닿을 찰나였다. 상철에게 가서 닿았던 구슬이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공중에서 멈췄다. 그의 몸 전체가 흐릿해지고 색이 바래는 듯하다 알갱이 하나하나로 이루어진 입자로 변한다. 그리고 청소기에 먼지가 빨리듯 단번에 훅, 하니 구슬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단지 한 순간이었다. 상철이 있었던 자리는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텅, 비었다. 민호에게 방금 일어난 일이 그저 꿈만 같다. 몸이 반응하질 않는다. 연신 눈만 끔뻑인다. 가팔랐던 숨이 조금씩 가라앉는다. 다급한 발소리들. 경비직원들이 저만치서 모습을 드러낸다. 상철을 찾으려 했지만 민호밖에 보이질 않는다. 직원들이 멍하니 정신 나간 채 서 있는 민호 곁으로 와서 괜찮은지 살핀다.

  “이봐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그 환자는?”

  민호는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 위해 애를 먹는다.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다.

  “어, 음, 그러니까, …….”

  바로 앞 두 갈래로 나눠진 곳이 보인다. 직진하면 은지의 비명이 들렸던 방향,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곳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방향. ‘이 사람들을 함께 데려가면 안 되겠지.’ 오른손을 들어 왼편을 가리킨다.

 “저기, 저쪽으로 갔어요.”

  주변에 있던 도착한 사람들이 민호가 가리키는 곳으로 서둘러 향한다. 왼쪽으로 돌아나가면 앞으로 복도가 길게 뻗었다. 점점 빨라지는 발소리들이 멀어져간다. 민호도 발을 옮긴다. 조금씩 움직임이 편해진다. 이제 정신이 제대로 돌아온 모양이다. 눈에 초점이 맞춰지고 배에 힘을 줬다가 뺀다. 숨도 깊게 들이켰다 내뱉는다. 은지가 저 너머에 있다는 생각에 각오를 단단히 다진다.

  “은지야, 조금만 더 견뎌줘. 내가 간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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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 2021 / 4 / 12 345 0 3722   
25 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 2021 / 4 / 5 371 0 7879   
24 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 2021 / 3 / 29 382 0 8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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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 2021 / 2 / 21 402 0 4769   
19 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 2021 / 2 / 21 377 0 5361   
18 문 여는 자 2 - 사슴처럼 빠르게 사자처럼 용… 2021 / 2 / 21 386 0 43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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