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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오리진
작가 : 시리홍
작품등록일 : 2019.9.23

세상의 상냥함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 안에 숨어있던 세상의 진실을 어떠한 사건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깨달아버린 주인공은,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에게 갑작스럽게 기회가 찾아오게 된다.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128화 천 년의 대회 (10)
작성일 : 20-09-25 10:59     조회 : 320     추천 : 0     분량 : 4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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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은이는 눈앞에 보이는 상황에 쉽사리 적응할 수 없었다.

  사고회로는 지금도 불타오를듯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시은이는 사고회로가 도출해낸 결과를 애써 부정하고 있었다.

 "크크크..카르탄. 네가 나타날 때부터 예상했던 결과다. 정말 넌 예나 지금이나 너무나도 뻔하단 말이야. 어떻게 그 뒤로 배우는 것이 없는 거지?"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시은이의 너머에 있는 실운은 미친듯이 웃고 있었다.

  몇 번의 틀어짐과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 또한 커다랗게 세워낸 계획 속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실운은 이 모든 상황들을, 몇 번이고 시뮬레이션을 하며 실패를 줄여냈고.

  결국 자신의 원하는 결과로 하나하나 이끌어내고 있었다.

 "사백년이다. 더 세세하게 세면 더 오랜 시간이 흘러갔겠지. 난 그 동안,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았어. 난 계속해서 꿈꿔왔다. 오늘 같은 날에 이르기를! 대체 몇 번이나 계획을 짜냈는지 아느냐! 대체 몇 번이나! 계획을 철회시켰는지! 네가 아느냔 말이다! 넌 그대로였지만, 난 아니라고! 그게 지금 네 페인이다. 결국 넌 그래서 죽는 거야!"

  실컷 뭐라뭐라 떠들어대는 실운.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미치도록 기뻤다.

  그 누가, 복수를 이룬뒤에 허무하다 그랬는가.

  이렇게도 짜릿한 것을.

  실운은 자신의 온몸에 퍼져나가는 복수의 쾌감에 어쩔줄을 모르며, 몸까지 부르르 떨어대고 있었다.

  투웅.

  꿋꿋하게 서있던 카르탄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시은이는 여전히 맹렬하게 회전하는 사고회로의 결과를 부정하며, 카르탄을 받아냈다.

  그의 귀엔 실운의 떠드는 소리가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뚜렷해진 감각속에서, 시즌 또한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바로 자신의 몸에 닿아 약해진 숨을 겨우겨우 몰아쉬는 카르탄 뿐이었다.

 "카르.."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카르탄과 관련된 옛 여주인의 모든 기억이 들어왔기에, 그가 자신에게 어떠한 존재인지 알 수는 있었지만.

  그것이 여주인과 감정과 자신의 감정과 맞물리며,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여주인이 품었던 감정과, 자신이 품고 있는 감정.

  이리저리 뒤섞이며, 여러 곳에서 부딪쳤지만, 딱 한 가지는 아무런 부딪침없이 합일을 이룰 수 있었다.

  절대 갚을 수 없는 막대한 고마움.

  여주인이 입었던 은혜와, 지금 시은이가 입게된 은혜.

  그 모두 여주인과 시은이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었다.

  시은이의 가녀린 품에 몸을 맡긴 거구의 카르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이번에야말로.. 시은..당신께 도움이 되어서 다행이오.."

  카르탄의 입가로 붉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카르..! 더 말하지마요...내가..내가 어떻게든.."

  이미 시은이는 알고 있었다.

  한층 더 예민해진 감각은 이미 카르탄의 몸 전체의 세포 활동 하나하나를 예지할 수 있었으니까.

  그는, 이미 가망이 없었다.

  그도 그것을 아는 걸까.

  힘겹게 벗겨낸 은색의 건틀렛 속의 거친 손을 시은이에게 뻗었다.

  시은이는 곧바로 곱디고운 손으로 그 손을 맞잡아 주었다.

 "..이미..알고 있소..명이 다해간다는 것을..하지만..전혀 후회되지 않소. 마지막이라도 당신의 도움이 되었으니.."

  쿨럭. 쿠헉!

  카르탄의 입속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쏟아졌다.

  지금이라면 실운이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카르탄과 시은이를 동시에 베어낼 수 있었지만.

  실운은 자신의 계획속의 커다란 목표 중 하나를 이뤄, 그 기분을 만끽하느라 딱히 이쪽에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계획은 틀어질 수 없다고 확신하며.

  지금 순간이 아니더라도, 언제든 목숨을 거둬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카르..나 다 기억났어요..당신이 내게..아니..저보다 앞선 시은씨에게 어떠한 존재였는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엄청난 고백을 해버리는 시은.

  지금의 시은이가, 예전의 김시은이 아님을 밝히는 선언.

  실운이 들었다면, 눈이 휘둥그레질만한 정보였으나, 앞에 있는 카르탄은 그저 덤덤할 뿐이었다.

 "..역시, 그랬소..? 하하..처음에 말한 것이 틀린 것이 없구려.."

  카르탄과 처음만났을 때도 그랬다.

  기억상실증이라 하기 전,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던 시은.

  카르탄은 그러냐고하며 넘기긴 했지만, 무슨 모종의 이유로 맨 처음 만났을 때처럼 기억을 잃은 것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모습이 조금 달라져 보이는 것 또한, 그 여파이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지금 카르탄이 덤덤하게 넘어갈 수 있던 것.

  죽음이 다가오기 때문에 초연해진 덕분일까?

 "..시은..이제야 모든 것이 떠올랐소. 당신이.. 이곳에 오리란 것 또한 난 이미 알고 있던 거요."

  카르탄은 실운에게 죽음에 가까운 공격을 당한 순간, 무엇인가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공격으로 인한 고통이 아닌, 정신적인 고통이 카르탄을 한순간 덮쳐왔다.

  그렇게 떠오른, 사백년 전의 봉인되었던 기억들.

  옛 김시은과 만나고, 여행을 떠나고, 천 년의 대회를 참여하고 마무리지은 뒤, 자신이 천계에 몸을 담게 된 것까지.

  그 모든 것이 일순 떠올랐던 것이었다.

  왜 이제서야 불완전했던 트리거가 발동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카르탄은 마지막에라도 이유를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카르탄,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기다란 은발이 불안하게 휘날리는 가운데의 카르탄의 표정은 굳건했다.

 "시은, 어서 시작해주오.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소."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카르탄.

  시은이는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너무나 고마웠다. 이 모든 것을 자신이 갚을 수 없다는 것이 너무나도 미안했다.

 "걱정마시오. 절대 실패하지 않을 테니."

  든든한 미소를 지으며 시은이를 안심시키는 카르탄.

  시은이의 손에서 새하얀 기력이 피어올랐다.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새하얀 기력.

  그 기력은 한 줄기 선이 되어 카르탄에게로 흘러들어갔고.

  그 순간, 카르탄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당신을 기다렸소. 김시은."

  다죽어가는 카르탄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 것인지, 심지 굳은 목소리로 또렷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백년간, 난 죽지 않기 위해 시찰단에 들어갔소. 시찰단은 세상의 의지가 섞여있는 왕과 연관되어있는 단체. 그들은 절대 왕의 허락없이는 죽을 수 없소.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다치거나, 명령을 불복종할시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시찰단에 들어가면 모든 기억을 잃게 되오. 그래서 사실 전투 중에 죽는 것을 제외하곤 죽을 수 없소."

  왕조차 밝히지 않은 시찰단의 비밀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카르탄.

 "..이런 거 얘기하면, 명령불복종이잖아요.."

  이와중에도 사고회로는 끊임없이 돌아가며 시은이의 입에서 자연스런 대답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 수 있었는지에 대한 비밀을 이야기했음에도, 시은이는 전혀 신경쓰고 있지 않았다.

  카르탄은 입가를 붉게 물들이며 여전히 핏물을 흘리고 있었어도,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성격또한 많이 닮았구려.."

  카르탄은 자신의 손을 붙잡아준 시은이의 고운 손을 반대손으로 다시 부드럽게 감싸쥐었다.

  거칠어진 손이기에 실질적으로 부드러울 수는 없었으나, 시은이는 그 따스함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목숨을 보전할 수 있어도, 기억을 잃어버리게 되니, 당신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게되오. 그래서 난 시은에게 부탁했소. 내 기억을 묶어달라고."

  카르탄의 기억속의 마지막 장면.

  그것이 김시은이 카르탄의 기억을 묶었던 장면이었던 것이다.

  김시은이는 이미 자신이 이곳에서 고리온 드에 의해 밀려날 것을 알고 있었다.

  미리 알고 있었기에, 다음에 올 시은이를 위해 베타에서 준비를 마칠 수 있던 것이었다.

  그러한 사실을 카르탄에게 알렸다.

  물론, 오리진과 베타에 대한 이야기는 빼놓았다. 그가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음으로.

  카르탄은 그 말을 듣자마자 시찰단이 떠올랐고, 시은이의 재능을 이용해 자신의 기억을 묶어낼 방도를 떠올렸다.

  시은이는 처음에 반대했지만, 굳건한 카르탄의 의지에, 결국 그가 바라는대로 재능을 통해 기억을 묶어냈다.

 "당신이, 이곳에 반드시 올것이라 했소. 그래서 내 기억또한 그 때 바로 풀려날 수 있게 조정을 해두었는데..아무래도 그 당시 시은이, 약해진 상태라 불안정했던 모양이오. 이제야 모든 것이 떠오른 걸 보니."

  시은이의 손을 붙잡은 카르탄의 손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은이는 아무말 없이, 힘을 주어 그 손을 더욱 세게 붙들었다.

 "..시은의 재능을 알고 있소?"

  카르탄도 시은이가 힘으로 자신의 손을 붙들고 있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었으나, 굳이 모른척하며 자신의 머리맡의 시은이를 온힘을 다해 올려다보았다.

  시은이의 눈동자는 어느새 촉촉해져, 굵은 물방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물방울이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자연스레 카르탄의 손에 힘이 더 세게 쥐어지고 있었다.

 "선의 재능.."

  카르탄의 입에서 더 이상 붉은 피가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급속도로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져가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어떻게 보면 무엇이든 이뤄낼 수 있는..그러한 재능.."

  토옥. 토옥.

  굵은 물방울이 카르탄의 거친 피부에 떨어져내렸다.

 "..울지마오..난 충분히 행복했으니까.."

  투욱. 투우욱. 투욱. 투두두두둑.

  편안하게 눈을 감은 카르탄의 얼굴에 끊임없이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들.

 "흐윽...흑..."

  헤아릴 수 없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슬픔과 후회의 눈물.

  눈앞의 적이 번듯하게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은이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카르탄의 몸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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