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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초월자들
작가 : 이루다
작품등록일 : 2020.9.24

[미스터리 역사 판타지]
1930년대 한반도. 혼란과 의심만이 가득한 조선. 경성에서 의문의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을 잃어버린 소년. 1900년 초 멕시코로 떠났다가 조국에 돌아온 이민자들. 복수의 끝에 서 있는 수상한 사내. 비밀을 감추고 있는 노신사. 그리고 미지의 물질 [The Seed]. 사건 뒤에 숨겨진 진실은 무엇인가? 역사의 도표에 기록되지 않은 자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CHAPTER 1] 조우(1)
작성일 : 20-09-24 15:19     조회 : 316     추천 : 0     분량 : 96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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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인생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살아감에 있어 우리의 의지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01

 삶은 공(空)이다. 그들의 시간은 아직 허(虛)하고, 각기 다른 계절안에서 서로가 윤회한다.

 

 아! 우리의 조국은 어디로 향하는가. 36년의 일제강점의 시작이었던 1910년 이후, 조선인들의 감정 바닥까지 시리게 만들었던 여느날은 계속되었다. 감정 상실과 허무함은 그들에게 또 다른 고향에 대한 향수와 동경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규제와 억압의 시대 1910년, 회유와 통제의 시대 1920년대를 지나 어느덧 일본의 야심이 극대화 되는 1930년대가 되었다.

 

 봄을 기다리다 지쳐 허무함에 무너져내린 사람들, 독립이라는 말을 뱉은 후에 의미를 찾는 자들, 숨을 고르고 경험을 쌓고 시대를 탓하지 않는 인물들.

 

 그렇게 조선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자신들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곳의 계절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하지만 1930년대 후반의 어느 봄, 여느 앞선 시대와 다르게, 어떤 다른 느낌의 분주함이 이곳 경성에서 느껴졌다.

 

 조선의 모던(Modern)화 바람은 처음에 느리게 행보를 이어갔다.

 

 하지만 서서히 증가되는 인구수에 맞추어 조선의 근대화는 빠르게 불이 붙었다. 도시의 발전은 인구수에 제곱 비례한다고 했던가? 어느새 건축물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식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J.O.D.K, 여기는 J.O.D.K, 경성 방송국입니다. 미각과 영양이 조화된 근대 식량! 혈액순환을 좋게 만들고 원기를 왕성히 하는 풍부한 열량의 원천! 모리나가 초콜릿에서 현재 시간 3시를 알려 드립니다. 자, 오늘 경성의 하늘은 맑고 구름 한 점 없겠는데요...”

 

 대표적인 조선인의 거리인 종로, 그 번화가 거리 근방에 위치한 카페 수만 해도 십여곳은 될 것이다. 하지만 종로 사거리의 한편에 위치한 카페 정(情)의 건물은 다른 가게들을 압도 할 만큼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리 쪽으로 향해 설치된 커다란 유리창 뒤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라디오가 눈에 띄었다. 양과자 광고와 함께 시작된 조선어 방송은 곧 일기예보가 끝나고 황성옛터라는 대중가요가 흘러나왔다.

 

 “황성 옛터에 밤이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노래는 번화가를 지나 인적이 드문 골목길로 흘러들었다. 그 소리가 희미해지는 곳에는 유곽, 선술집, 국밥집 등 유흥시설과 요릿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돈 없는 조선인들이 그나마 삶의 애환을 달래기 위해 돈 몇 푼을 들고 이곳으로 찾아 들었다.

 

 낮부터 밤 늦게까지 무 소득자 혹은 넝마주이들은 술에 취해서, 고함을 치고 푼수를 떠는 광경이 이어진다. 이는 소외받는 가난한 식민지 국가의 한을 그대로 담고 있는 풍경이라 볼 수 있다.

 

 “보자. 보자. 이번엔 공이 어디에 있을까요.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그것도 아니면 가운데?”

 

 우동 집 앞에 유독 사람들의 탄성과 감탄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성인의 허리 높이만큼 오는 접이식 간이 탁자위에 세 개의 컵이 뒤집어져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섞어서 공이 들어있는 곳을 맞추는 야바위게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오른쪽이냐 왼쪽이냐 따지지 말고, 이번에는 가운데로 갑세.”

 

 게임에 참여 하고 있는 사람은 회색 체크무늬 정장을 깔끔하게 다려 입은 중년의 신사였다. 그는 돈을 많이 잃었는지, 음성에 꽤나 짜증이 섞여 있었다.

 

 “확실하시오? 우리 호구 아... 아니 손님, 제가 그래도 미안해서 그러니까 힌트 하나 드리리다.”

 

 야바위꾼은 인심깨나 쓴다는 듯, 오른쪽 컵을 들어 사내에게 공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어쩔 것이요? 이래도 계속 가운데로 갈 거요? 아니면 한 번 바꿀 기회를 드리리까?”

 

 “아, 물론 그대로 가야지. 사나이는 원래 처음 느낌대로 끝까지 가는 거야!”

 

 우리의 호구, 아니 중년의 신사는 끝까지 자신의 감을 믿기로 결정한다.

 

 "뭐 그러시던지... 에잇. 나도 모르겠소!"

 

 야바위꾼이 손님이 고른 컵을 들려는 순간이었다. 뒤에서 한 소년의 음성이 급히 중년 사내의 움직임을 멈춘다.

 

 “잠깐 아저씨! 오른쪽 말고 왼쪽으로 가세요. 확률은 그쪽이 높아 보여요.”

 

 야바위 행위를 구경하던 무리 중 한 명이었던 소년, 그는 계속해서 도박에 돈을 잃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안타까워 결국 목소리를 내고 말았다.

 

 사내는 힐끔 뒤를 돌아본다. 이마에 피도 마르지 않은 아이가 어른의 세계에 웬 말인가.

 

 "나는 말이지, 지금 하느님이 와도 내 선택은 변함없어."

 

 한 길로만 가겠다는 중년 신사의 쇠고집, 누가 말리겠느냐만은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다. 야바위꾼은 감질감나게 컵을 들어올린다.

 

 "자자자... 어이쿠 이거 죄송하게 됬습니다. 다들 그래도 박수 한 번 주시죠!"

 

 들려진 컵 밑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또 한 번 주변에서 터지는 야바위꾼에 대한 탄성소리! 양복의 사내는 입을 있는 대로 찡그리면서 그를 향해 눈을 흘기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중년의 신사가 떠난 자리에 한 소년이 등장했다.

 

 10대 중반의 나이로 추정되는 소년이다. 그는 주변에 어른들 밖에 없어서 그런지 키가 더 작아보였다. 하지만 소년의 작은 체구에서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단단함이 느껴졌다.

 

 “아저씨. 혹시 컵 몇 개까지 사용해서 공을 섞을 수 있나요?”

 

 “에끼, 이 꼬마 놈 좀 보게. 네녀석 돈이나 있느냐? 내가 양심상 코 흘리는 아이 돈은 안 건드는 것을 다행인줄 알아라.”

 

 "이거면 되나요, 사장님?"

 

 곧바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1원의 지폐를 꺼내는 소년이다. 극빈자들의 하루 생활비가 5~20전도 되지 않는다는 신문기사가 오가는 때였기에 1원이 얼마나 큰돈이었을지 짐작하게 하였다.

 

 "아니, 진작 돈부터 말씀을 하셨어야지. 잠시만, 사장님 다시 불러드릴게요. 흠흠... 여기 김사장님 손님 왔습니다."

 

 야바위꾼의 눈빛이 순간 순한 양처럼 바뀌었다. 목소리를 다듬더니 오른손을 입에다가 대고 누군가를 찾는다.

 

 “어서옵쇼, 손님! 항상 바른 생활과 올곧은 마음, 여기, 종로 무지개 다시 한 번 인사드립니다."

 

 야바위꾼 사내는 허리를 굽신거리더니 반대쪽으로 돌아 소년을 맞이한다. 마치 일인극을 보는 것 같은 그의 모습에 다시 한 번 관중석에서는 박수가 터져 나온다.

 

  "하긴 돈을 가진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손님이제. 안 그렇소. 여기 계신 양반들!!”

 

 선창을 받은 군중들은 합의라도 된 듯, 다들 후창식으로 긍정적 신호를 보냈다.

 

 “좋소이다. 내가 경성 뒷골목에서 이 야바위 짓으로 지금까지 먹고 살았거늘. 꼬마 손님, 친구들이 왜 나를 종로 무지개라고 부르는지 알겠소? 바로 컵을 일곱 개나 사용해서 공을 돌릴 수 있거든. 어때? 꼬.마.손님 어디 해 볼 테요?”

 

 “아까부터 꼬마, 꼬마. 아 힘이 난다. 무조건 이길 테다. 우리 사장님 말이 참 기시네요. 어디 손기술 좀 봅시다.”

 

 사내의 진중함이 여느 전문가 못지않다. 어느 무협지에서나 볼 수 있는 손놀림이 이곳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소년은 별로 관심 없다는 듯 그의 기술이 끝날 때까지 하품을 하며 딴청을 피웠다.

 

 컵의 배열은 소년이 보는 방향으로 앞 열에 3개, 뒷 열에 4개로 배치되었다. 조금의 오차도 용납 못한다는 듯, 오와 열이 각을 제대로 잡았다.

 

 테이블 끝에 남은 하얀 연기는 야바위꾼의 각오를 확인시켜 주었다. 토끼든 여우든 사냥감으로 걸려든 것을 진심으로 대하겠다는 호랑이의 기운이 그의 뒤로 나타나는 듯 했다.

 

 “어린애 돈을 어떻게든 따먹겠다는 진심이 여기까지 느껴지네요. 좋아요. 저도 진심으로 대하죠. 뒤쪽 4개 컵 중에 왼쪽에서 2번째 녀석에게 제 전 재산을 다 걸죠.”

 

 소년은 콕 집어서 나중에 위치상으로 딴소리 나오지 못하게 못을 박는다.

 

 “육감만 믿고 전 재산을 태워? 혼을 다한 장인의 손길에 나조차도 지금 공의 위치가 어딘지 모르는 것을... 좋아 그 의지에 보답을 해주지 그럼. 네가 맞힌다면 건 돈의 7배를 주겠어. 대신 틀리면 그땐 나도 깡패가 되는 거야. 그 장인을 대하는 태도를 다시 배우게 될 거다. 건방진... 어디서 전문가의 연출 앞에서 하품을 하다니.”

 

 “컵을 들어보시기나 하시죠.”

 

 순간 모든 사람은 숨을 죽였다. 야바위꾼은 소년이 지목한 컵을 서서히 들어올리기 시작한다. 그의 이마에서 땀이 떨어진다. 공기가 싸늘하다. 그 광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의 눈이 날카롭게 날아와 컵에 꽂혔다.

 

 이제 컵 밑에 드러나는 바닥의 모습,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야바위꾼의 입꼬리에 얕은 미소가 맺혔다.

 

 그때였다. 소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관중들을 집중하게 했다.

 

 “잠깐...이 아저씨, 손기술을 너무 부리시네. 여기 아무나 한분만 나와서 도와주세요. 제가 받을 돈에 절반을 드릴게요.”

 

 소년은 야바위꾼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여기서 겁먹으면 안된다. 그대로 자신의 의견을 밀어 부치기로 한다.

 

 “저, 무지 '개' 아저씨 컵 그대로 가지고 계세요. 저 사람 지금 컵을 들면서 공이랑 같이 들었어요!”

 

 웅성되는 좌중들, 그중 한 덩치 큰 사내가 뛰어나와서 야바위꾼이 든 컵을 재빨리 가로챘다. 그러자 컵안에 들어 있던 공이 땅으로 떨어져 나왔다.

 

 덩치 큰 사내는 아예 소년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양, 야바위꾼의 목 주변을 움켜지고 사기꾼을 대하듯 땅에 집어 던진다.

 

 “아저씨, 제발 같은 조선인들 피는 그만 빨아 드세요. 이렇게 돈 버시면 같은 동포들끼리 어떻게 서로 믿고 살겠어요?”

 

 야바위꾼은 손을 떨면서 7원을 내밀었다. 그리고 소년은 약속한 대로 4원을 그 덩치 큰 사내에게 내밀었다.

 

 “여기 돈 받으세요.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어차피 돈 벌려고 한 게 아니라서.”

 

 소년에게 돈을 받은 사내는 구경꾼들에게 소리친다.

 

 "저 야바위꾼 녀석 다시는 경성 바닥에서 장사 할 수 없게 소문 내 버립시다!"

 

 그 후, 사내는 자리를 떠나려는 소년에게 고맙다며 재차 이름을 물었다.

 

 “저는 연이. 이연이라고 해요.”

 

 [이연(李緣) 등장. 15세. 꼬마라는 말을 싫어함.]

 

 #02

 경성의 근대화 물결은 청계천 이남의 남촌으로부터 시작 하였다. 그곳은 일본인이 거주하는 본정(本町: 충무로), 황금정(黃金町: 을지로) 그리고 명치정(明治町: 명동)등을 일컬었다. 그 결과,1900년 초기에는 조선인들의 북촌과 일본인의 남촌 사이에 심각한 발전의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가로등 하나 없던 종로는 1920년대를 기점으로 해서야 그 발전을 시작하였다. 곧 발전의 속도는 가파르게 상승곡선을 그린다.

 

 1930년 중반을 넘어서면 북촌도 어느 덧 젊은이들이 알아주는 번화가 거리가 되었다. 메이지야 신발점, 스즈키 양품점, 모리나가 캔디 스토어등의 큰 상점들 뿐만 아니라, 카페거리에 문인, 음악가등이 자주 찾는다는 소문도 거리의 분위기에 한몫했다.

 

 북촌의 대표적인 곳이 지금 이곳 화신(和信) 백화점이다.

 

 본정의 미츠코시(三越), 명치정의 조지야(丁子屋), 그리고 종로의 화신(和信). 앞선 두 백화점이 일본인 거리에 위치했다면, 종로의 화신은 조선인의 거리가 시작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오늘 백화점에서 행사가 있는 모양이었다. 안에 잠깐 보이는 직원들만 100여명이 넘었다. 무궁화 꽃을 수놓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여점원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백화점 정문에 서서 계속해서 문을 열어주고 닫아주고의 일만 반복했다.

 

 손님들을 응대하느라 분주한 점원들 사이로 할머니 한분이 손녀의 손을 잡고 백화점을 나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한 번 더 탔다가는 이 할미가 서 있지를 못하겠구나. 아고, 어지러운 것.”

 

 화신백화점에 설치된 최신식 엘리베이터의 위엄은 지방 멀리까지 퍼졌다고 한다. 저 멀리서 한 무리의 아주머니들이 마치 버팔로떼처럼 우루루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 요물을 타보기 위해서 시골에서도 올라온다는 소문은 과장이 아닌 듯 하다.

 

 버팔로들은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할머니와 손녀, 톰슨가젤 두 마리를 빠르게 지나쳤다. 두 마리의 연약한 짐승은 그들의 거침없음에 위압감을 느꼈다.

 

 더 이상 이곳은 자신들이 있을 곳이 아니다. 그들은 빠르게 문으로 나섰다.

 

 "아니, 긍께 차말로 얼마나 기다리란 말이여어?"

 

 뒤에서는 엘리베이터 쇠창살 쪽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우두머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할머니와 손녀는 백화점 밖으로 나온다. 갑작스럽게 현기증을 느낀 할머니는 이내 중심을 잃고 앞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괜찮으세요?”

 

 다행히 한 소년의 팔이 할머니의 어깨를 거들어 중심을 바로 세웠다. 손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해맑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마침 경품의 1등 번호가 호명되었다. 곧 정문 쪽도 복잡해질 것이다. 이를 염려한 할머니는 소년에게 간단하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자신의 손녀와 가던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 소년은 이연(李緣)이었다. 그는 종로 야시장 터를 떠나 어느새 화신백화점이 있는 종로 사거리에 도착했다.

 

 퇴근길을 서두르는 사내들의 모습과 주변의 카페 등이 켜지는 모습들, 시간은 어느덧 늦은 오후로 향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연이는 손을 꼭 붙잡고 걸어가는 할머니와 손녀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본다. 자신도 모르게 입가가 흐뭇해진다. 저런 정을 줄 수 있는 가족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잠시나마 생각을 하는 소년이다.

 

 연이에게는 다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소년의 기억은 자신을 거두어준 이 마태오 신부와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소년은 이 마태오 신부의 성을 따라서 이연(李緣)이 되었다. 가족관계나 자신의 이름조차 기억 못하는 그에게 마태오 신부는 가족이 되어주었고 이름도 주었다.

 

 마태오 신부는 이연을 처음 본 순간을 잊지 못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연이의 눈]

 

 이 불안한 땅에서 확신을 갖고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눈을 그때 자신에게서 보았다고 말했다.

 

 소년은 이제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연이는 감성을 자극하는 옛 추억은 그만 떠올리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마태오 신부의 배려 덕분에 공립 보통학교까지 졸업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배움에 필요한 문제들보다 먹고 사는 문제가 더 급하다는 것을 어린 나이에 깨달았다.

 

 서둘러 사거리 보신각을 지나 청계천에 위치한 장산 만물상으로 향했다. 청계천이 저 멀리 보이자 연이는 오전에 만물상 돌패 삼촌이 한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돌패는 종로에서 만물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연이와의 인연은 어느덧 5년이 넘었다. 이 마태오 신부와 돌패의 친우(親友) 관계가 이연에게로 이어진 까닭이다. 소년은 돌패가 주는 일을 통해 조금이나마 성당의 살림에 보태곤 했다.

 

 자신이 오전에 만물상에 도착한 후, 돌패 삼촌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 한 뼘은 되어 보이는 목각 인형을 가지고 나왔다. 중간에 태엽장치를 하고 있는 사슴인형이었는데 뒤에는 작은 수통이 달려 있었다. 그가 태엽을 돌리자, 사슴의 입에서 수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봐라, 신기 안허냐? 이것이 말이여, 이번에 덕국(德國: 독일)에서 들어온 것인디, 방안에 두면 연기에서 공기를 맑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안혀. 그래서 좀 들여왔다. 돈 많은 양반들은 외국에서 온 것이라고 하면 엥간히 환장을 혀야지.”

 

 사내의 목소리에 충청도 사투리가 섞여 있었다.

 

 만물상 안에는 박스가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거기서 하나 꺼낸 모양이다. 미리견(美利堅: 미국), 서반아(西班牙: 스페인), 불란서(佛蘭西: 프랑스)등 온 세상이 여기 만물상에 있는 듯했다.

 

 “이것은 동보 구리무(cream의 일본식 표현)라고 해서 이번에 들어온 것이여. 사슴 목각 인형이랑 같이 인사동 김 양반네 가져다주고, 오는 길에 동아양조(東亞釀造)에 들렀다 와야. 거기 이 서류 갖다 주면서 말이여,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봉투하나 줄거시여, 그거 받아 오면 되어야.”

 

 그리고 그는 곧 심각한 표정으로 연이에게 말했다.

 

 “요새, 본정, 명치정 등 신시가지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은 들어본겨?”

 

 “예, 돌패 삼촌. 우리 이 영감님한테 얼핏 들어보긴 했어요. 살인사건 관련된 이야기 말씀 하시는거죠?”

 

 “우미관 매점아이가 그러더라고. 조지야 백화점 알어야? 거기 뒷거리에서 한 중년 남성이 살해 당했는거여.”

 

 “그래요?”

 

 “그런디... 이것이 말이 안 되는 거 같으면서도... 그러니께, 살해 범인이 짐승이랴.”

 

 “말도 안 돼. 그럴리가요...?”

 

 연이는 뭔가 짐작되는 데가 있는 듯 말끝을 흐렸다.

 

 “갸가 종로 경찰서까지 가서 진술했다니께 확실할 것이여. 이번에 수사를 크게 하고 있다니까 뭔 말이 나오지 안것냐.”

 

 그때, 돌패 삼촌의 걱정스러운 말에 절대적으로 조심하겠노라고 다짐했던 이연이었다.

 

 저 멀리 청계천의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비릿함과 동물 특유의 털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이제 돌패 삼촌이 말했던 그 '짐승'이라는 단어가 더욱 진하게 머릿속에 새겨지기 시작했다.

 

 소년은 잠시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그에게 또한 조선의 근대화 과정에서 나오는 매캐한 연기와 남촌에 사는 일본인들의 살 냄새가 느껴졌다. 그것들은 평상시와는 다르게 소년에게 역한 울렁임을 일으켰다.

 

 연이는 이제 느낄 수 있었다. 아아, 또 그 짐승임이 틀림없다. 그는 사실 '짐승'이라는 존재에 대해서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감각의 섬세함' 덕분이었다.

 

 그렇다. 순수하게 자신의 확신에서 오는 '완벽하게 상황을 가려낼 의지와 능력', 소년은 이것을 '감(感)'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운동신경의 발달에서 오는 신체적인 뛰어남은 아니었다. 물론 본인 또래의 누구보다 지치지 않고 잘 달렸다. 하지만 소년 자신도 그런 신체적 능력이 어른들과의 경쟁을 넘어서는 정도는 아니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것에 대해 끓어오르는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하게 밝혀지기 전까지, 시대의 모든 울렁임 앞에서 본인의 능력을 감추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어리지만 알 수 있었다. 지금 조선 땅에서 모든 모난 돌들은 정(釘)을 두드려 맞을 것이 당연한 일이다.

 

 이연은 다시 한 번 청계천 구석을 유심히 바라 보았다. 그의 시선은 날카롭게 공간을 흝었다. 그러다 무질서하게 달려오던 어느 인력거와 부딪힐 뻔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그의 모든 감각이 말하고 있다.

 

 지금 이 조선 땅에.. 이름 모를 [괴물]이 산다. 그리고.. 그것은 살아있는 어떠한 것 보다 위험하다.

 

 #00

 달빛은 길게 카페 정(情)의 정문 쪽으로 난 유리창을 넘어갔다. 전시된 라디오는 그 빛을 품고 더욱 고풍스러움이 느껴졌다. 그리고 라디오의 금속에 반사된 빛은 이내 종로의 거리로 향했다.

 

 종로의 거리에 부서진 달빛 조각에 수상한 그림자가 닿는다. 갑자기 들리는 ‘지직’ 거리는 소리, 누가 만지기라도 한 듯 라디오에 불이 들어왔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 가엾다...”

 

 낮에 이곳에서 흘러 나오던 황성옛터의 노래가 다시 시작되었다. 라디오 주파수의 수신율이 떨어지는지, 힘들게 나오는 음이 더 노래를 구슬프게 만들었다.

 

 달빛 조각에 걸린 그림자가 사라지자 다시 라디오는 꺼졌다. 하지만 달과 함께한 소리는 황량한 종로의 밤공기를 타고 어느덧 수표교까지 흘러 들어왔다.

 

 노래가사는 곧 길게 뻗은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청계천의 하천이 흐르는 소리에 묻혀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곳에 한 짐승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짐승은 자신의 몸을 숙이고 사냥감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었다.

 

 낡은 수표교 밑은 달빛도 잘 스며들지 않는 곳이다. 몸을 숙인 짐승의 모습은 집중하지 않으면 찾기 힘들어 보였다.

 

 청계천이 흐르는 소리와 가끔 들리는 곤충 소리만이 밤 늦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고단한 삶들이 모여 형성한 수표교의 움막촌은 어느새 현실에 적응하였는지 그들 스스로 고요한 밤을 맞고 있었다.

 

 짐승은 어느 덧 그 풍경과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사냥감은 그의 사정거리 안으로 다가왔다.

 

 짐승은 서두르지 않았다. 그의 발톱은 침착했다.

 

 날카로운 발톱의 끝이 사냥감을 향하는 순간, 사냥감의 가슴에서는 뜨거운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작가의 말
 

 1.J.O.D.K: 1927년 2월 경성방송국에 의하여 개시된 한국 최초의 라디오 방송

 2.모리나가 초콜릿: 1899년 모리가나 설립. 일본에서 최초로 밀크 초콜릿을 만들었다.

 3.화신백화점: 종로에 1931년에 설립되었던 화신백화점은 신태화(申泰和)가 민족자본으로 설립한 화신상회에 연원을 두고있다.

 4. 본정: 충무로, 명치정: 명동 (중요 지명은 계속해서 작가의 말에 남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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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다 20-09-24 15:25
 
[미스터리 역사 판타지] 초월자들 잘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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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작품소개 (03: 43, 2020, 09, 24) 2020 / 9 / 24 517 0 -
30 [CHAPTER 2] 그림자 섬 Finale (1) (1) 2020 / 9 / 29 376 0 8733   
29 [CHAPTER 2] 그림자 섬 (13: 마리의 과거편) (1) 2020 / 9 / 29 316 0 8338   
28 [CHAPTER 2] 그림자 섬 (12: 마리의 과거편) 2020 / 9 / 29 291 0 7939   
27 [CHAPTER 2] 그림자 섬 (11: 마리의 과거편) 2020 / 9 / 29 283 0 7104   
26 [CHAPTER 2] 그림자 섬 (10) 2020 / 9 / 29 290 0 8943   
25 [CHAPTER 2] 그림자 섬 (9) (1) 2020 / 9 / 28 310 0 7805   
24 [CHAPTER 2] 그림자 섬 (우리들 등장) 2020 / 9 / 28 293 0 8275   
23 [CHAPTER 2] 그림자 섬 (8) (1) 2020 / 9 / 28 310 0 7303   
22 [CHAPTER 2] 그림자 섬 (7) 2020 / 9 / 28 277 0 6869   
21 [CHAPTER 2] 그림자 섬 (6) 2020 / 9 / 28 281 0 6714   
20 [CHAPTER 2] 그림자 섬 (5) 2020 / 9 / 27 297 0 6849   
19 [CHAPTER 2] 그림자 섬 (4) 2020 / 9 / 27 285 0 7408   
18 [CHAPTER 2] 그림자 섬 (3) 2020 / 9 / 27 278 0 6817   
17 [CHAPTER 2] 그림자 섬 (2) 2020 / 9 / 27 294 0 7092   
16 [CHAPTER 2] 그림자 섬 (1) 2020 / 9 / 27 284 0 6903   
15 [CHAPTER 1] 조우 Epilogue 2020 / 9 / 26 277 0 5643   
14 [CHAPTER 1] 조우 Finale (4) 2020 / 9 / 26 295 0 5688   
13 [CHAPTER 1] 조우 Finale (3) 2020 / 9 / 26 289 0 5804   
12 [CHAPTER 1] 조우 Finale (2) 2020 / 9 / 26 281 0 7291   
11 [CHAPTER 1] 조우 Finale (1) 2020 / 9 / 26 298 0 9697   
10 [CHAPTER 1] 조우(9) (1) 2020 / 9 / 25 324 0 9263   
9 [CHAPTER 1] 조우(8) 2020 / 9 / 25 287 0 6631   
8 [CHAPTER 1] 조우(7) 2020 / 9 / 25 274 0 9948   
7 [CHAPTER 1] 조우(6) 2020 / 9 / 25 285 0 8690   
6 [CHAPTER 1] 조우(5) 2020 / 9 / 25 289 0 7971   
5 [CHAPTER 1] 조우(4) (1) 2020 / 9 / 24 327 0 9845   
4 [CHAPTER 1] 조우(3) (1) 2020 / 9 / 24 313 0 8428   
3 [CHAPTER 1] 조우(2) 2020 / 9 / 24 287 0 9647   
2 [CHAPTER 1] 조우(1) (1) 2020 / 9 / 24 317 0 9682   
1 [CHAPTER 0] 영의 기록 2020 / 9 / 24 461 0 7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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