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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버들밭아이들(작가 개인사정으로 잠시 연재 쉽니다)
작가 : 코리아구삼공일
작품등록일 : 2020.9.10
버들밭아이들(작가 개인사정으로 잠시 연재 쉽니다)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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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배경을 제외하고, 모두 허구이며 인물들은 가공의 인물들입니다.>
이젠 사라져가는 대가족세대와 시골의 마을공동체생활을 겪은 70,80세대의 이야기입니다. 이 글은 그저 평범한 아이의 눈으로 부모님세대를 바라본 옛 이야기입니다.

 
외할머니
작성일 : 20-09-13 09:25     조회 : 42     추천 : 2     분량 : 3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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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할머니>

 

  난 외갓집에서 자주 겨울을 났다. 엄마가 동생을 줄줄이 낳아서 힘들었기 때문이다.

 외갓집 동네는 모두 기와집이거나 초가집이었다. 완전 시골마을이었다.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에 돌담이 높았다. 조선시대 마을이 이렇게 생겼으리라.

 모든 마을사람들이 대부분 친척이었다. 옛날에 양반마을이었다고 하는데 그 말이 맞는 것이 오래된 기와집들이 많았고, 제실도 여러 개였다. 그리고 겨울에 가보면 집집마다 전통음식을 그렇게 많이 장만할 수가 없었다. 그때에만 해도 읍내에 공장에서 만든 엿, 강정, 유과, 약과가 넘쳐나는데, 외갓집 동네에서는 철저하게 집에서 가마솥에 엿을 고고, 찹쌀반죽을 말렸다가 기름에 튀겨서 엿을 묻히고 뻥쌀을 묻혀서 유과를 만들었다.

 직접 만든 유과에서 생강냄새가 향긋하게 났었다. 모양도 크기도 집집마다 제각각 달랐다.

 곶감도 직접 감을 깎아서 말렸다. 그래서 잘 말린 곶감은 단지에 넣어두면 하얀 분이 생긴다.

 이 모든 준비들은 제사, 혹은 차례를 지내기 위한 것이었다. 산 자들이 오로지 죽은 자를 위해서 몇 날 며칠, 혹은 일 년 내내 제사나 모사를 제대로 지내기 위해서 목숨을 거는 마을이다.

 외할머니는 저녁마다 나를 데리고 남의 집에 마실을 갔었는데, 처녀들은 모두 집에서 무슨 실틀같은 걸 걸어놓고 뭔가를 짜고 있었다. 할머니들은 대부분 한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있었고, 쪽을 쪄서 비녀를 꽂고 있었다.

 내가 사는 동네와도 완전 다른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갔다고 해도 될 것이다.

  아주 어릴 적에 외할머니나 이모를 따라서 오빠와 함께 외갓집에 가는 길이 지금도 눈에 보일 듯하다. 동네 앞에서 버스에서 내려서 긴 냇가 위 다리를 건너고 넓은 들판을 지나서 마을 앞 큰 느티나무 앞의 마을 회관을 지난다. 그 전에 가겟집도 있었다. 그러면 거기서 언덕 위의 굽은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 우물이 있고 그 위 언덕에 조그만 초가집 석필이아재집이 나온다.

 엄마의 사촌이지만 나이는 우리와 비슷하다. 우리가 가면 석필이아재는 방이 쩔쩔 끓도록 군불을 땐 방에 우리를 모셔놓고 본인의 어머니께서 제사를 위해 힘들게 준비해놓으셨을 엿,

 유과, 강정, 약과, 곶감을 한아름 내어놓고 먹으라고 주었다.

 석필이아재와 우리는 얼어붙은 논에서 썰매타기도 하고 연날리기를 하기도 하면서 놀았다.

  밤에 외할머니를 따라서 이웃집에 마실을 가면 온 동네처녀들이 한 방에 모여앉아서 나무틀에 실 한끝을 걸어놓고 홀치기를 하고 있었다. 홀치기란 실꼬기인데 이 꼬인 실을 가지고 염색을 해서 다시 풀어서 고급 옷감을 짰다고 한다. 그 옷감으로 옷을 만들면 그 옷이 볼륨감이 있어서 비싼 드레스를 만들 때 썼다고 한다. 우리나라보다는 일본으로 수출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홀치기한 실을 24자 정도 꼬으면 한 뭉태기에 4~5만원을 줬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뽀빠이 한 봉지에 20원 정도했으니까 시골에서는 상당한 수입이었다.

  처녀들이 보름동안 꼼짝앉고 꼬으면 24자 정도 꼬았다고 한다. 예전에는 방직공장은 많아도 섬유가공산업을 발달하지 못해서 그렇다고 한다. 혼자서는 심심하니까 겨울에 모두들 모여앉아 실을 꼬면서 어느 집 딸이 시집을 잘 갔다는 둥, 어느 집에 논을 샀다는 둥 온갖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었다.

 내가 더 어렸을 적에는 나 혼자서 외갓집에 외할머니와 살았던 때가 있었다.

 이모들과 외삼촌은 대도시에 나가서 공장을 다니고 있었다.

 할머니가 이웃집 농사일을 도와주러가면 엄마의 사촌 남동생인 석필이아재도 학교에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외갓집의 좁은 마당에는 대추나무가 있었는데 늘 그 나무 위로 올라가서 외할머니를 기다렸다. 사과나무 위를 밤낮 오르락내리락하는 나에게 대추나무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과부였던 외할머니는 종종 일을 하고 주는 막걸리를 마시고 들어와서 신세 한탄을 하기도 했다.

 “내가 젊어서 과부가 돼서 평생을 혼자 사는고나. 더러운 내 팔자야.”

 할머니세대는 6.25를 겪었고 전쟁통에 과부가 된 여자가 많았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난 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5남매나 낳은 뒤에 돌아가셔서 외할머니가 그렇게 젊어서 과부가 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외할아버지는 엄마가 대략 아홉 살쯤 돌아가셨다. 친척 초상집에 갔다가 거기서 음식을 잘못먹고 사흘 정도 아프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그 일을 주당이 걸려서 돌아가셨다고 했다. 즉 초상집에서 음식에 귀신이 붙어서 음식을 잘못먹은 사람이 죽는 것을 말한다.

 지금과 달리 의학이 발전하지 못해서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요즘 말하자면 전염병 같은 것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너거들 때문에 재가 안하고 혼자 안살았나?”

  외할머니는 엄마를 비롯한 외삼촌, 이모들에게까지도 늘 청상과부로 살았다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 말을 자주 들었던 외삼촌은 화를 벌컥 내기도 했다.

 “지금이라도 어데 좋은 데 있으믄 가소! 안 잡을테니.”

 그러면 외할머니는 또 아무말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불행히도 외할머니는 내가 보아도 젊었을 적을 상상해봐도 미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외할머니는 우리집일이 바쁠 때 일년에 몇 달씩은 우리집에 와서 살았다.

 아침부터 땅콩밭에 나가서 호미로 김을 매거나 점심을 먹은 후에도 마루라도 닦았다.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엄마가 가마솥에 여름 보양식으로 사골국을 끓이거나 닭이라도 잡으면 외할머니는 삼시세끼 고깃국에 밥을 먹었다. 그리고 사골국이 무슨 음료수나 되는 것처럼 목만 마르면 한 그릇씩 퍼서 들이켰다. 그러고 나서 하는 말씀이 더 기가 찼다.

 “나 살 빠졌다.”

 본인의 팔뚝이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엄마아부지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아마 딸이 용돈을 좀 더 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에서 그러시는 것 같았다.

 과수원에서 일을 도와줄 때도 일을 하러 오시는 아주머니들보다 곱절은 더 잡수셨다.

 세참으로 막걸리를 사다놓으면 막걸리를 마시고 취해서 노래를 부르다가 가끔 주사를 부리기도 했다.

 “젊어서 혼자되셔서 고생을 많이 해서 마음이 허해서 안그러나?”

 같이 일을 하던 아주머님들이 안됐다는 듯이 말한다.

 그러면 몇 날 며칠 고된 농사일을 거들어주었다고 엄마아부지가 품삯을 쳐서 봉투에 돈을 챙겨드린다. 아부지 몰래 엄마가 가외로 돈을 더 얹어드리는 것은 당연하다.

 외할머니가 외갓집으로 떠날 때는 사과, 쌀, 고춧가루, 참기름, 마늘, 심지어 사골국까지 퍼간다. 이것들을 아부지가 경운기에 실어서 그다지 멀지 않은 외갓집까지 실어드린다.

 외할머니는 심지어 엄마가 목욕할 때 쓰려고 사놓은 이태리타올도 챙겨가신다.

 아마도 외할머니는 과부로 정신적으로 의지가지없이 사시다가 일이 많아서 고생은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는 딸네집을 자신의 친정집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여간 허전한 과부마음을 달래려고 늘 딸네집에서 살다시피하거나 본인집에 갈때면 나, 아니면 오빠를 데리고 가서 살았던 것 같다.

 우리집에 있을때는 오빠, 동생들과 복닥복닥거리느라 혼자 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형제들과 먹는 것부터 입을 옷, 잠자리까지 모든 것을 경쟁해야했다.

 외갓집은 일단 단촐해서 좋았다. 마을 사람들도 다들 순하고 다른 집을 방문하면 대부분 친척이라서 그런지 맛있는 간식도 많이 먹었다.

 하지만 과부할머니의 허전한 마음이 전염이 되었는지 나도 덩달아 외로워졌고 집에서 구박을 받더라도 다시 집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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