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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연재 > 로맨스판타지
푸른 잎에 능금
작가 : 목탄
작품등록일 : 2020.8.5

용의 여인이 될 운명을 타고난 능금,
행궁 청소를 하다말고
실수로 세자의 손을 베어버리는 데
지고지순, 능금만 바라보는 홍옥을 남겨둔 채
결국 궁궐로 납치되고 만다.
조선시대 온천과 궁궐 서가를 오가며 벌어지는 용팔이 로맨스,
흑룡과 청룡이 하늘을 화려하게 수놓을 지어다.

 
11. 어여쁘다, 고치
작성일 : 20-09-01 11:01     조회 : 304     추천 : 1     분량 : 8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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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5 17 19 21

 

 화홍이 챙겨준 약을 들고는 능금이 살금살금 행랑을 향한다.

 “능금입니다. 문을 열어주십시오.”

 고통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모순이 끙끙대며 문을 연다. 온통 땀범벅인 게 참기 힘든 게로구나.

 “약을 가져왔습니다.”

 “제게 어찌 다정하십니까.”

 “고작 한 대를 맞은 저도 이리 아픈데, 궁녀님은 오죽 하시겠습니까.”

 돌아서려는 능금의 팔을 모순이 잡는다.

 “약을, 발라주시겠습니까?”

 능금이 어찌할 새도 없이 모순이 저고리를 벗는다. 진물이 흐르는 등을 외면할 수도 없는 일이라, 능금이 떨리는 손으로 약을 바른다.

 약을 채 바르기도 전에, 군사가 몰려오고, 행랑 주변이 불빛에 둘러싸인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어찌 제게 호의를 베푸셨습니까.”

 문이 발칵 열리고, 군사들이 능금과 모순을 끌어낸다. 오라에 묶인 능금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다.

 

 분노한 화홍이 궁녀가 고하기도 전에 교태전에 들어선다. 인사도 하지 아니하고, 매서운 눈으로 어미를 쏘아본다.

 “어찌 능금을 하옥하셨습니까!”

 “네가 사내에 빠져 예까지 잊었구나.”

 “글도 모르는 궁녀를 비현각에 보내신 이유가 이것입니까!”

 “그 아이는 궁녀를 건드렸어. 감히 전하의 여인을 건드린 죄를 너도 알겠지?”

 “풀어주십시오. 그 애는 죄가 없습니다.”

 “한밤에 궁녀의 처소에 든 것이 어찌 죄가 아니더냐.”

 “약을 주러 간 것뿐입니다.”

 “남녀가 등을 벗은 채 한 방에 있었다. 어찌 약을 핑계 삼을까.”

 “능금은,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그건 동궁의 생각이다.”

 “제게서 그 애를 뺏어 무엇을 얻고자 하십니까!”

 “그건 네가 더 잘 알게 아니냐.”

 중전의 말에 화홍의 표정이 차갑게 식는다.

 “좌의정과 손을 잡으셨으니, 곧 나라를 훔치시겠습니다.”

 “다 동궁 위한 일이다.”

 “아니오, 그건 어머니의 욕심입니다.”

 “동궁!”

 화홍이 교태전을 박차고 나간다. 그 애가 네 역린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네가 그 애를 끼고 도는 한 세자빈에게는 후사가 없을 터. 그러니 어쩌겠느냐. 빛을 막는 가지는 쳐낼 밖에.

 

 화홍이 초조하게 정자를 오간다. 이를 어쩐단 말이냐. 그 애의 무고를 어찌 밝혀낸단 말이냐. 사내로 지내는 것이 안전하여 그리 두었거늘, 그 조차 용납지 않는 것이냐. 여인인 걸 밝히면, 후궁이 되고 말 것인데, 세자빈과 중전의 등쌀에 목숨이나 보존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애를 곁에 두고자 했던 내 욕심이 죄였던가. 새벽 별이 돋는 데도, 화홍의 시름은 깊어져만 간다.

 “좌의정 대감이 궁에 자주 든다 하였더니, 일이 벌어졌군.”

 말을 달려왔는가, 별감의 호흡이 가쁘다.

 “어찌하면 좋겠느냐?”

 “세자빈과 합방을 하거라.”

 “느닷없이 무슨 말이냐.”

 “이제 다, 네가 합방을 거부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냐. 무슨 수를 써서라도 후사를 봐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들이다. 근데, 후사는커녕 남색에 빠져있으니, 꾀를 낸 게 아니냐.”

 “그놈의 합방타령! 내가 무슨 씨돼지냐.”

 “하루정도 씨돼지가 되면 어때. 좋아하는 사람을 지키려면, 그쯤은 해야 하는 것 아니냐.”

 “부사, 너마저 이럴 거냐!”

 아끼려 숨겼던 것이 되려 위험하게 되었으니 그 속이 오죽할까. 이제 그만 몰아세워야겠구나.

 “이렇게 된 거, 능금을 구할 궁리나 찾자. 합방은 후에 해도 늦지 않으니.”

 합방 소리에 넌덜머리나는 표정을 짓는 화홍, 대장부는 열 계집 마다 하지 않는다지만, 이리 작정하고 덤벼들면 싫은 법이다. 그 고집이 능금을 위험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그럼, 왜 이러고 서있어.”

 “그 방법은 쓰면 능금이 더 위험해지니까.”

 “뭐야, 그게.”

 혼자 배회하던 정자를 이제는 둘이 걷는다. 이러다 정자 바닥이 닳아 없어지겠다.

 “능금에게 가봐야겠다.”

 “너 따위 별감에게 옥문을 열어줄까?”

 “세자저하에게는 열어주지 않을지 모르지만, 이 별감은 다르지요. 천하의 미색을 만날 절호의 기회를 어느 사내가 놓치겠습니까.”

 “쓸데없는 능력이라 하찮게 봤더니 오늘 빛을 보는 군. 잘 살펴주고 오거라.”

 화홍이 쓴 웃음을 짓는다. 이럴 때는 정말로 네가 부럽구나. 아무 곳이나 자유롭게 오가는 네가 부럽다.

 명월관 최고 기녀를 소개시켜줌세. 허풍 섞인 약조를 하고 은자도 넉넉히 챙겨주고 나서야, 옥문이 열렸다. 이놈들 비위는 어째 나라님보다도 맞추기가 힘드네. 툴툴대던 부사가 옥을 살핀다. 대체 어디 있는 것이냐. 그 어린 것을 이리 흉흉한데 박아놓다니. 외진 곳에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능금을 발견하고는 부사가 울컥한다.

 “네 등이라 챙길 것이지. 어찌 궁녀의 등까지 오지랖 넓게 챙겼냐?”

 능금이 부스스 일어나 부사를 올려다본다. 눈 밑에 피멍이 든 것이 많이도 맞았구나.

 “아픈 것을 뻔히 아는데, 어찌 모른 척을 합니까.”

 “미련한 것. 그 선함을 이용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몰라?”

 “무슨 사정이 있을 겁니다.”

 “사정은 무슨 사정.”

 부사가 뒤춤에 숨겼던 부채를 능금을 향해 던진다.

 “벌레나 쫓던가.”

 줄 거라곤 그것뿐이다. 낮에는 더울 것이니 땀이라도 식히거라. 벌레가 있으면 쫓고, 이 미련한 것아.

 능금이 부채를 받아들고는 품에 고이 안는다.

 부사가 한숨짓는다. 궁에 살기엔 너무 선하구나. 화홍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너를 궁에 두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다. 혹여 살거든 궁 밖을 떠나거라.

 “잘 견디거라. 그래야 궁을 나가든, 장가를 가든 할 게 아니냐. 여기서 죽으면 총각귀신 돼서 구천을 떠돈다.”

 “예.”

 궁 밖이란 얘기에 왈칵 눈물이 쏟아진다. 정말 나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비현각 시동 노릇도, 이제는 지겹구나. 능금이 훌쩍이는 모습을 지켜보던 부사가 말없이 돌아선다. 저 어린 것을 저리 만든 그 계집을 찾아야겠다.

 쏟아지는 졸음을 어쩌지 못하고 잠들어있던 모순이 발소리를 듣고는 눈을 뜬다. 부사가 서슬 퍼런 눈으로 모순을 쏘아본다.

 “감히 저하의 사내를 탐했건 게냐?”

 “그러합니다.”

 “그랬다면 네가 우리를 우습게 본 게 분명하구나.”

 “좋아하는 사내에게 안긴 것이 그리 죄가 됩니까?”

 “그게 무에 죄겠느냐. 네 사내가 받을 죄를 능금에게 덮어씌운 게 죄지.”

 모순이 본능적으로 배를 끌어안는다.

 “제가 사모한 건, 능금님입니다.”

 “끝까지 나를 능멸하는구나.”

 부사가 소매부리에서 뭔가를 꺼내 던진다. 나비문양으로 수놓인 노리개다.

 “모, 모르는 물건입니다.”

 “네 사내도 그리 말할지 궁금하구나.”

 모순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마마가 널 비현각에 보낸 게 고작 능금이 때문이라고 생각하느냐?”

 “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오직 능금님을 사모했을 뿐.”

 “닥치거라. 네 어리석음이 네 사내를 죽이고, 너마저 죽일 것이니.”

 부사가 차갑게 돌아선다. 감히 역린을 건들인 죄, 갚을 수조차 없으리라.

 꽃이 피고 지는 계절이라 해도, 새벽 냉기는 어쩔 수 없는지, 능금이 움츠러든다. 홑겹 옷도 춥고, 마음도 춥구나.

 “바보 같다.”

 어느새 나타난 홍옥이 능금의 시린 어깨를 감싸 안는다.

 “맘껏 비웃어라.”

 “천성이 바보 같은 걸, 비웃어서 뭐 하리.”

 “그게 비웃는 거거든.”

 맞은 곳이 아픈지 끙끙대면서도 할 말은 다 한다.

 “많이 아프냐?”

 “응.”

 피멍이 든 얼굴을 보니 가여워 미치겠구나. 홍옥이 멍든 부위를 조심조심 어루만진다. 네가 이리 되도록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미안하다. 널 지키지 못해서.”

 “그게 왜 네 탓이야? 아무나 덜컥 믿는 내 탓이지.”

 능금이 홍옥의 품에서 바들바들 떤다. 홍옥이 도포를 벗어 능금의 어깨에 둘러준다.

 “너는,”

 “이렇게 안으면 되지.”

 도포자락에 꽁꽁 싸맨 능금을 홍옥이 끌어안는다.

 “누에 같네.”

 “누에? 이렇게 귀여운 누에 봤어!”

 “봤지. 요렇게 귀여운 누에.”

 홍옥이 능금의 이마에 입을 맞춘다.

 “곧 비단실을 자아 낼 테냐? 귀염둥아.”

 아픈 것도 잊고 능금이 피식 웃는다.

 “이리 좋으면 어쩌냐. 아픈 것도, 추운 것도, 억울한 것도 잊고, 이리 좋으면 어쩔 테냐.”

 “어딘들, 좋지 않으랴. 너와 나 둘뿐인데.”

 홍옥이 능금의 입술에 대고 속삭인다.

 “이런 고치 속이라면, 평생을 갇혀도 좋으리.”

 

 동이 트기도 전에 능금이 돌바닥에 던져진다. 간밤에 매를 맞은 것 치고는 참으로 차분한 얼굴이구나. 등채를 든 의금부 도사가 능금을 추궁한다.

 “넌 어찌하여 궁녀와 통간을 한 것이냐.”

 “하지 않았습니다.”

 “네가 저 계집의 옷을 벗기고도 아니라 하느냐!”

 “제가 벗긴 게 아닙니다.”

 “허허, 사내가 되어서 비겁하게 계집에게 죄를 돌리느냐! 네가 아무리 저하의 총애를 받은들, 궁녀를 범한 죄는 중죄 중에 중죄다.”

 “저는 그저 약을 발라주었을 뿐입니다.”

 “이놈이 그래도! 저놈이 바른 말을 할 때까지 주리를 틀어라.”

 이 사이로 신음이 새나온다. 능금이 피땀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걸 모순이 애써 외면한다. 이러다 정강이뼈가 부러지겠다. 보다 못한 홍옥이 부채에서 튀어나오려는 순간, 별감이 나타난다.

 “멈추시오!”

 “예가 어딘 줄 알고 훼방이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도사의 불호령에도 부사가 꼼짝 않는다.

 “저하의 명을 받아, 사건의 진범을 찾아온 것뿐이오.”

 부사의 말이 떨어지자, 군사들이 오라에 묶인 도령을 끌고나온다. 사내를 알아본 모순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이 자는 누구냐?”

 “저 궁녀와 통간을 한 사내요.”

 “증거가 있느냐?”

 별감이 사내의 도포자락에서 나비 노리개를 빼어 던진다.

 “저 궁녀의 몸에도 같은 것이 있을 것이오.”

 포졸들이 모순의 저고리에서 같은 걸 찾아 도사에게 내놓는다.

 “네 이년, 대체 몇 명과 놀아난 것이냐!”

 죄를 추국하기도 전에, 어린 사내가 벌벌 떨며 도사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다.

 “나는 죄가 없소. 나는 저 궁녀를 모르오. 나는 아무런 죄가 없소!”

 한때는 심장이라도 빼줄 것처럼 굴던 사내가 나를 모른 척 하는 구나. 모순이 슬프게 흐느낀다. 나 혼자 지키려 했던가. 나 혼자 이 아이를 지키려, 엄한 사람을 형장으로 몰았던가.

 “감히 궁녀를 임신시키고도 몰랐다고 발을 빼는 것이냐.”

 부사가 불호령을 놓는다.

 “임신이라니요. 제가 그런 게 아닙니다.”

 “아비가 되어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사내의 비겁함에 혀를 내두르며 부사가 나무란다.

 “고작 노리개 하나로 아비라는 증거가 됩니까! 저건 그냥 저자에서 산 물건입니다!”

 도령이 끝내 마음을 준 여인을 부정한다.

 “고작 노리개라, 그리하면 저 궁녀에게 물어보시지요.”

 도사가 말없이 울고 있는 모순을 돌아본다.

 “아이의 아비는 오직 하나다. 그걸 모르지는 않겠지.”

 “죽여주십시오.”

 “네가 말하지 않으면, 너도, 이 둘도 죽는다.”

 모순이 머뭇댄다. 어찌 중전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나를 구하신다고 한 마마님은 어찌 오시지를 않으시는 것인가. 나를 구하고자 하신 게 아니라, 나와 그를 죽이고자 부러 그러셨다는 말인가. 능금이 목적이 아니라, 아이의 아비가 목적이었다는 말인가.

 “저는, 저는 아닙니다!”

 혹여 자신의 이름이 나올까 도령이 끼어든다.

 “닥치거라! 누가 너더러 말하라 하였느냐!”

 어찌 몰랐을까. 아직은 어린 소년이라는 것을, 누구를 지킬 힘도, 누구를 사랑하기에도 아직은 어리기만 한 응석받이였다는 것을, 그 풋풋함에 끌려 그만 마음을 주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후회도 없으리.

 “이 아이의 아비는,”

 모순이 입을 여는 순간, 세자빈이 나타나 말을 막는다.

 “어찌 내 아우가 이리 묶여있는 것이오!”

 “의금부까지 직접 나오시다니, 대관절 누가 고한 것입니까?”

 “대체 왜 내 아우가 묶여있냔 말이오!”

 비겁하게 빌던 사내가 세자빈의 등 뒤로 숨어든다.

 “아우라, 마마의 아우님이 전하의 여인을 탐낼 줄을 몰랐습니다.”

 “전하의 연인이라니요. 감히 내 아우에게 죄를 씌우는 것이오! 전하의 여인을 탐낸 것은 저 능금이란 아이가 아니오!”

 “비현각에 가기 전부터 저 궁녀는 회임 중이었습니다. 마마님의 아우님과 저 궁녀와 자주 만나는 것을 본 이도 있구요.”

 “그게 누구요! 누가 감히 내 아우를 모함하는 것이오!”

 별감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별감이 눈치를 주자, 머뭇대던 증인들이 우루루 몰려온다.

 “김 상궁, 박 상궁이 알려줄 것이오.”

 아무리 세자빈의 동생이라지만, 증인이 나타난 이상 모른 척 할 수가 없다. 도사가 증인에게 묻는다.

 “둘은 어디서 일하고 있소.”

 “교태전입니다.”

 “저 궁녀와는 아는 사이요?”

 “생각시 때부터 같이 지낸 사이입니다. 교태전에서 마마님을 같이 모시고 있구요.”

 “좋소. 그럼, 둘 중 누가 저 궁녀와 통간을 하였소!”

 “그건 알지 못하오나, 간혹 사가에 나가 마마님의 아우님을 만나는 것은 보았습니다.”

 “네 년이 내 아우를 모함하는 구나!”

 세자빈의 호통에도 기가 죽지 않는 것이 뒷배가 있음이 분명하다. 두 상궁의 표정이 당당하다.

 “어찌 소인이 아우님을 모함하겠습니까. 오직 사실만을 고할 뿐입니다.”

 “네 년이 그래도!”

 “마마님은 잠자코 계시지요. 그리 막으시면 그저 아우를 싸고도는 누이 밖에 더 되시겠습니까.”

 별감의 말에 세자빈이 입을 다문다.

 “무슨 일로 만난다 하였소?”

 “바늘과 먹으로 글을 배운다 하더이다.”

 “바늘과 먹이라,”

 도사가 느닷없이 모순의 옷고름을 풀어헤친다. 옷고름이 풀어지자 왼쪽 가슴께에 희미하게 글자가 새겨져 있다. 모순이 서둘러 옷고름을 고쳐보지만, 만천하에 그 글씨가 공개되었다.

 “몸에 이름을 새길 만큼 연모하였거늘.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이냐!”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네 이름 글자가 너무 선명하구나.”

 세자빈의 눈동자가 서릿발처럼 매섭다. 아비가 중전과 교류한다하여 내심 불안해하였는데, 결국 일이 이렇게 되었구나. 중전의 궁녀가 아비의 집을 오간 것부터가 잘못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리 계획을 한 것인가. 무섭구나. 처음으로 시어미가 무섭구나.

 “국법으로 엄히 다스리시오.”

 “누이!”

 “너는 지금부터 내 아우가 아니다.”

 어리석고, 비겁한 아우가 그제야 무릎을 꿇는다. 손이 발이 되도록 빈들, 감히 궁녀를 건들렸으니 살아남을 수는 없다. 형틀에 묶여있는 능금이 한탄한다. 우리는 짚으로 만든 인형에 불가하구나. 사랑을 하여 노리개를 나누고 가슴팍에 문신을 새겼을 것인데 이리 부정할 수 있다는 말인가. 도대체 누구를 지키려 이런 거짓을 고한단 말인가. 내가 죄를 덮어쓴들 저 여인은 죽을 것이오, 복중 태아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 애비 또한 목을 베어 천변에 매달아둘 것인데, 이 불행으로 득을 얻는 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감히 천하를 훔치려 욕심을 내었던 좌의정 대감이 중전의 발치에 엎드려 통곡한다.

 “제 아들을 살려주십시오!”

 “내가 뭘 어찌하겠소?”

 궁녀가 집에 든다는 걸을 알았으나. 제 누이가 보낸 줄만 알았다. 그게 중전의 미끼인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나는 어쩌자고 빌미를 준 것인가. 이리 간악한 줄은 몰랐던가. 아비의 욕심이 결국 자식을 사지로 몰았다.

 “마마, 미련하고, 미혹한 제 자식을 부디 살려주십시오.”

 “그건 이 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뭐든,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고작 못난 아들 땜에 벼슬이라도 내놓겠다는 것이오?”

 “그게 소신의 아들을 살리는 길이라면 그리하겠나이다.”

 중전이 묘하게 웃는다. 적이 될 자는 미리 내치는 것이 좋지. 후사 따위 세자빈에게 볼 필요도 없고, 후궁이라도 상관없다. 내게 권력을 실어줄 수만 있다면.

 “좋소. 좌의정의 뜻을 전하께 전하겠소.”

 

 고초를 당한 능금이 쓰러져있다. 창살 너머로 능금을 바라보던 화홍이 붉어진 눈으로 일어선다.

 “너를 이리 만든 사람을 용서치 않으리.”

 화홍이 바람을 가르고 걷는다. 아무 욕심이 없었지만, 이제는 욕심을 내야겠다. 그 욕심이 너를 지킬 수 있다면 내야겠다.

 강녕전에 든 세자가 임금을 향해 절한다.

 “비현각 시동 때문에 든 것이냐?”

 “소자보다 앞서 어마마마가 드셨나 봅니다.”

 “좌의정의 벼슬을 폐하고, 아들을 유배 보내라 하더구나.”

 “그 궁인은 죽는 것입니까.”

 “그래.”

 “능금은요?”

 “복중 아이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궁녀와 통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통한 게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같은 방에 든 것은 용서 받을 수 없다.”

 저리 선하고 선한 눈으로 능금을 죽이라 한다. 마치 책을 찢듯, 나무를 베듯 아무 감정 없이 능금을 죽이라 한다.

 “지키고 싶은 것을 어찌 지키셨습니까?”

 “숱한 것을 포기하여 지켰다.”

 “그렇다면, 저도 포기하겠습니다.”

 “무엇을 포기할 테냐.”

 “헤아릴 수 없이 숱한 것입니다.”

 “말해 보거라.”

 “능금은 결코 그 궁녀를 범할 수 없습니다. 능금은, 여인이기 때문입니다.”

 화홍의 말을 듣던 임금이 느닷없이 웃는다. 그 웃음이 맑고 깊어 감히 물을 수조차 없다.

 “궁궐 암투극이 싫어 비현각에 숨겼더냐.”

 “아바마마,”

 “그 마음을 안다. 나도 한 때 그런 정인이 있었으니.”

 “어디에 숨기셨습니까?”

 “너도 잘 아는 곳에 숨겼지. 등잔 밑이 어둡지 않느냐.”

 “소자보다 현명하시군요.”

 아비에게도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어미를 여인 대하듯이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은애하는 여인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알지는 못하였다. 그 여인을 지키셨구나. 쥐도 새도 모르게 지켜내셨구나.

 “동궁, 후사를 보아라. 그리하면 어미의 관심도 그 아이에게서 떠날 게다.”

 “소자를 보시고, 은애하는 여인을 지키셨습니까.”

 임금이 말없이 허공에 눈을 둔다. 과연 지킨 것이 맞는가. 잃은 것이 맞는가. 악착 같이 궁에서 살아남길 원하였던가. 언제 올지 모르는 지아비를 영영 기다리는 것을 원하였던가.

 “후궁으로 들이거라.”

 “아바마마.”

 “그 아이가 여인네인 것이 드러나면, 응당 그리 될 것이다. 승은을 받을 아이를 가만 둘 중전이 아니지.”

 “아직, 그런 게 아닙니다.”

 “상관있느냐. 동궁전에 있던 여인이라면 동궁의 여인이다. 퇴궐을 한들 혼인조차 할 수 없으니 차라리 첩으로 들이는 게 낫지 않느냐.”

 과부처럼 혼자 살아갈 능금을 원한 게 아니었다. 그렇다고 궁에 남아 중전과 세자빈의 손아귀에 드는 걸 원한 것도 아니다.

 “그리하여 남장을 시킨 것이냐.”

 “예.”

 그리 지키려 사내로 만들었건만 이제는 다 소용이 없게 되었구나. 이제는 후사를 보는 방법 밖에는 없다는 것이냐. 너를 이렇게 품을 수밖에는 없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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