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눈이 살살 내렸다. 공기는 차가워도 바람이 불지 않고 포근해서 그랬는지, 내딛는 걸음마다 뽀드득 소리가 날 만큼 눈이 쌓였었다. 이성연은 눈을 좋아하고, 나도 좋아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기분이 퍽 좋았다.
<나 지금 출발. 30분쯤 걸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던 문자 하나인데, 어쩐지 조금 부끄러워서 목도리에 코 밑까지 얼굴을 파묻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식당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조금 어색하긴 하지만 내 눈에 보기에도 예뻐 보였다. 그래, 이성연이 반할 만하지-그렇게 생각했다.
“일찍 왔네.”
이성연은 미리 와 있었다. 그는 약속시간이 몇 시이든 늦는 법이 없었다. 나와는 달리.
“어, 왔어?”
검은 패딩에 교복 바지, 회색 운동화. 남고생의 옷차림이 뭐 그리 다를 수 있을까. 학교에 다니면서 봤던 그의 복장은 그랬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짧은 머리라도 어떻게든 스타일을 내보려고 애쓴 흔적이 여실했고, 평소엔 있는지도 몰랐던 롱코트에 구두까지 신었다. 불편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코트 입으니까 보기 좋아. 어울려.”
“고마워. 너도 오늘 유난히 예뻐. 핑크색도 잘 어울려.”
서로 마주 보며 잠깐 웃었다. 그의 얼굴이 빨개졌다. 잠시 더 서로 마주 보다 그가 이끄는 대로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영화관에는 당연히 커플로 가득했다. 우리도 그렇게 보이겠지-그렇게 생각했다.
“팝콘 먹을래? 내가 예매는 미리 해놨어.”
“그럴까? 큰 거 하나 해서 나눠 먹을까? 무슨 맛?”
“난 아무거나 상관없어.”
“그래? 그럼 카라멜 해도 돼?”
“응. 카라멜맛 좋아하는구나.”
“이런 건 단 게 최고야.”
영화 내용 같은 건 기억나지 않는다. 제대로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가 든 팝콘통 속에서 두 손이 한 번씩 스치는 것이 신경 쓰여서,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취가, 숨소리가 너무 크게 다가와서,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이제는 그럴 일이 없지만, 첫사랑은 맞이하는 소녀의 마음이란 그런 것이었다.
영화에 대해 생각나는 것은 느와르였다는 것뿐이었다. 어설픈 사랑 이야기나 가족 감동 실화보다 캄캄한 분위기 속에서 암략과 때로는 싸움이 오가는 스릴러를 더 선호한다는, 스쳐 가듯 얘기한 내 취향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어땠어?”
우리가 영화를 같이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종종 주말에, 한 2주에 한 번꼴로 같이 영화를 봤다. 작가가 되기 위해선 보다 많은 스토리를 보고 생각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둘의 생각이 일치했었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언제나 카페에 3, 4시간 박혀서 영화에 관해 토론했다. 배경 설정이 어떻고, 주연 캐릭터의 행동이 어떻고, 감독의 의도가 어떻고, 개연성이 어떻고.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고등학생의 얕은 생각일 뿐이지만, 그것이 지금의 나를 만든 자양분임은 틀림없었다.
“어, 어. 재밌었어.”
하지만 그날만큼은 영화가 어땠냐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본 게 그의 옆얼굴이랑 손밖에 없었는데 대답할 수 있을 리가.
***
“이 머리띠 어때? 이뻐?”
“음. 파란색보다는 하얀색이 얼굴에 더 어울리는 거 같아. 파란색도 너무 새파란색이라서 별로...”
“그래? 그럼 하얀색으로 살까?”
“응. 그게 더 나은 것 같아.”
“우와, 이거 너무 귀엽다!! 우리 이거 하나씩 사서 달까?”
“음...난 별로...?”
“아아 왜에~같이 달자? 응? 고양이 귀엽잖아. 응? 응?”
“여자친구가 저렇게 원하면 같이 사~둘이 같이 사면 2천원 깎아줄게.”
“할거지? 할거지?”
없는 애교를 쥐어짜서 겨우 같이 산 고양이 얼굴이 달린 핸드폰 고리. 노점상 아주머니가 한, ‘여자친구’란 말에 황급히 손사래를 치다 보니 어느새 그는 지갑을 열고 있었다. 그게 우리의 첫 커플템이었다.
요즘이야 다 스마트폰을 쓰니 그런 걸 쓸 일도 살 일도 없지만, 그때까지는 다들 많이 쓰는 아이템이었다. 나중에 우리가 대학을 가고, 아무도 폴더폰을 쓰지 않을 때도 그는 그 고양이 핸드폰 고리를 들고 다녔다. 나는 어느샌가 잃어버려 어딨는지 모른다.
“어때? 맛이...괜찮아?”
그는 보통 또래 남자애들과는 달랐다. 여러 면에서. 식성도 그중 하나였는데, 물론 아무거나 다 잘 먹고 좋아하긴 하지만, 보통 남자애들은 양이 적다거나, 느끼하다거나 그런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 파스타를 좋아했다. 거의 사랑한다고 표현해도 좋을 정도로.
남자애들은 잘 가지 않는 카페를 좋아했고, 디저트도 웬만한 여자애들보다 많은 걸 알았고 좋아했다. 우리의 무수히 많은 데이트 동안 먹는 거로 싸워본 적이 없었던 건 그의 덕이 컸다.
“응. 맛있어, 좋아. 어떻게 알았어?”
“아, 그냥 예전부터 친구들이랑 종종 오던 곳이야. 너랑 한 번은 꼭 와보고 싶었어.”
영화를 보고, 길거리 상점 구경을 하고, 파스타를 먹고. 정말이지 전형적인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였다. 겨울이라 해가 짧아서 7시가 갓 넘었는데도 벌써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가게 창문에는 온갖 색의 전구 불빛이 반짝반짝거리며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었고, 어디서 트는지도 헷갈리는 캐롤은 거리를 음표로 덮었다. 좋아하는 캐롤과 좋아하지 않는 캐롤이 한 데 섞여서 무슨 노래가 들리는지 몰라도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예쁘다.”
우리는 그곳을 중앙무대라고 불렀다. 백화점 뒷문 바로 앞의 크고 넓은 공간, 한 번씩 작은 대회도 열리고 야외 공연도 열리고 행사도 여는 큰 광장 같은 곳이었는데, 이제는 사라지고 없어져 버린 추억의 장소이다.
“응.”
언젠가부터, 매 연말 때면 그 중앙무대에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웠었다. 우리 키를 훌쩍 넘은 큰 트리였는데, 전체를 색전구로 감싸고 리본도 걸고 볼 장식과 꼭대기의 별도 달아서 아주 예뻤다. 그리고 눈이 내렸다.
“와, 눈 내린다.”
“...첫눈인가?”
“우리 같이 첫눈 맞는 거야.”
눈은 내리고, 캐롤은 들리고, 전구는 우릴 밝히고. 더없이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몇십초의 정적 후, 그가 입을 열었다.
“수아야.”
그의 목소리로 이름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우린 그동안 왜인지 서로의 이름을 부르기를 피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이성의 이름을 막 부른다는 건 어렵고도 간질거리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그렇게 내 이름이 부드럽고 달콤하고 황홀하게 들리는 일은 앞으로 없었다.
“응, 성연아.”
“우리 사귈까...?”
“너무 멋이 없는 거 아니야?”
“아...더 좋은 말이 생각이 안 나서...”
너를 좋아한다는 말, 나도 그렇다는 말로 밟는 확인 절차는 우리에게 무의했다. 길고 구구절절한 고백 멘트는 서로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나 주고받는 것이었다.
“그래. 우리 사귀자.”
우리는 그렇게 짧은 말로 연인이 되었다.
***
고3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 친구에서 연인이 되었음에도 2학년 때보다 더 적게 만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야자나 토요자습 같은 걸 안 했지만, 그는 둘 다 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정말 그렇게 할 거야?”
“응. 아무래도 둘 중 하나만 하기에는 좀...공부랑 병행하는 게 맞는 거 같아. 그렇다고 내가 너처럼 막 엄청 공부를 안 해도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오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이제 마치는 시간이 다르네. 넌 토요일에도 학교 오고.”
“응. 미안해.”
“미안할 건 아니야. 그냥 아쉬운 거지. 괜찮아. 대신에! 문자 자주 하고! 전화도 자주 하고!”
“어? 어어.”
“문자는 그냥 야자 시작할 때 한 번, 도중에 한 번, 끝날 때 한 번, 심화 야자 시작할 때 한 번, 도중에 한 번, 마치고 한 번. 집에 가면서는 전화. 알았지?”
사귀면서 알게 된 건데, 이성연은 은근히 연락이 좀 짰다. 답장도 곧잘 하고, 전화도 2시간은 기본일 정도로 길게 했지만, 정작 본인이 먼저 문자를 하는 경우는 그다지 많지 않았었다.
“...너 글 쓰는데 방해되지 않을까..?”
“아니 전혀. 그러니까 알았지? 한 번이라도 빼먹으면,”
“빼먹으면?”
“내가 전화할 거야. 아자 못하도록, 계속.”
난 이때부터 귀엽게 협박할 줄도 알았다.
“꼭 할게.”
학생 때의 이른 연애를 시작하는 커플이 있다는 조언해주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전화를 꺼놓는다던가 그러면 알아서 해.”
연애의 주도권은 본인이 가져야 한다는 것.
“...거, 걱정하지 마.”
실제로 그는 단 하나도 빠트리는 법이 없이 문자를 했다. 너무 정적이고 딱딱한 어투가 다소 거슬릴 때도 있었지만, 그것 역시 그의 성격이었고 매력이었다. 적응하면 또 나름 텍스트만으로도 그의 목소리가 자동재생 되기도 했으니 그럭저럭 괜찮았다.
“마쳤어?”
“응, 이제 나왔어.”
“공부하는 것도 힘들지?”
“그럭저럭 할 만해. 어떤 점에서는 글 쓰는 것보다 나은 점도 있고...”
“아~나도 오늘은 글이 안 써져~! 지금 썼다 지웠다만 몇 번 반복하는지도 모르겠어. 공모전이 많이 남지도 않았는데.”
“음...글은 도통 보여주지 않으니 도와줄 수가 없잖아.”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그와 글을 나누지 않았었다. 굳이 이유를 대자면 약간의 창피함과 또 약간의 라이벌 의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그도 글을 쓰는 사람이었으니까.
특히나, 애인이 되어버린 그에게 내가 쓴 글을 보여주고, 평가받는다는 것은 고등학교 3학년짜리 여자아이에겐 좀 벅찬 일이었다. 내가 이성연에게 내 글을 당당히 보여줄 수 있게 된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괜찮아, 내 일인데 뭘.”
“음...그럼 주말에 어디 놀러 갈까?. 놀이공원 어때? 수아 너 놀이공원 좋아하잖아.”
“어? 성연이 너는 싫어하잖아? 가도 돼?”
“당연하지. 수아 네가 좋으면 난 괜찮..을걸?”
“진짜지? 진짜 가는 거지? 자유이용권 끊을 건데?”
“...자, 자유 이용권? BIG 5면 안 될까...?”
그는 놀이공원을 무서워했다. 아마 나이를 꽤 먹은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런 건 변하지 않는 종류의 것이니까. 이성연이 탈 수 있는 놀이기구는 바이킹 정도가 한계였고, 그 이상은 제정신으로 타지 못했다. 오죽하면 그나마 제일 나은 놀이기구라고 고르는 것이 ‘관람차’였을까.
강해 보이는 겉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고 놀리는 재미가 쏠쏠했던 덕분일까, 사실 놀이공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음에도 그와 함께 가는 놀이공원은 언제나 재미있었다.
“무슨 소리야! 얼마 만에 가는 건데 당연히 자유이용권이지! 11시 오픈이니까 10시 반에 정문 앞에서 보는 거다? 기대하고 있을게!”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이러면 약속을 깰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