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도의 마케팅에 관한 전체적인 계획은 이런 컨셉으로 진행됐어요. 저희 플랫폼에서도 소규모 판매자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점진적으로 실시하는 중에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회의를 요청드린 것은 내년에 달라지는 몇 가지 시스템 때문이에요. 제가 간단히 표를 준비해 봤습니다’
어두운 회의실에서 자신이 제작한 ppt를 발표 중이었던 플랫폼 ‘나우’의 정미소 과장은 능숙하게 프레젠테이션 리모컨을 찾아 들었다. 정리하기에 쉽진 않았지만 공을 들인 만큼 자신이 있었다. 표에 대한 설명을 위해 숨을 고르는 순간 어디선가 코를 고는 소리에 당황하여 뒤를 돌아봤다. 시선이 멈춘 곳에는 서란이 고개를 떨군 채 졸고 있었다.
‘요즘에 잘나가더니 또 시작이네..’
인기 판매자들만 초청해서 내년에 마케팅 전략 및 사업 계획을 간단히 소개하는 자리에 웬일로 참석한다 했더니 결국 이런 식이었다. 협조를 구하는 자리이기 때문에 사실 참석하지 않아도 될 법한데 굳이 참석해서 저렇게 눈에 띄게 졸고 있는 서란이 괘씸했다.
‘그동안은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는데’
서란은 쇼핑몰의 실적만으로는 항상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회의에 언제나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고 서란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개성 강한 개인 판매자들은 각자 자신만의 약점이 있었다.
요 근래 몇 개월간 서란은 딴사람이 된 것 마냥 회의 참여에 적극적이었다. 처음에는 적응 안 되던 미소도 이제서야 서란과 계획 다운 계획을 공유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갑자기 오늘 제자리였다.
‘휴우..’
생각을 마친 미소는 곧 아무렇지 않은 척 발표를 이어갔다. 과연 서란이 졸면서도 이 발표를 듣고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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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란 님. 잠시 저 좀 보고 가요”
미소는 다른 판매자들과 함께 나가려는 서란의 팔을 붙잡았다. 서란은 이런 행동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흠칫 놀랐다.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너무 갑작스럽게 잡았나’
평소와 다른 서란의 반응에 미소는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았다.
“앗, 네 무슨 일이세요?”
“아. 사실 저번에 말씀하셨던 시스템 제안에 대해서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요. 중간 절차를 간략히 하는 방향이 여러모로 저희 회사의 방향성과 일치하는 듯해서요.. 그래서”
“자.. 잠시!!”
말을 마친 서란이 갑자기 회의 테이블에 엎드렸다. 미소는 서란의 돌발행동(?)에 당황했다.
“….?!?”
“아 제가 어려운 얘기를 들으면 머리가 아파가지고.. 지금 두 시간 내내 들었더니 안 그래도 머리가 아픈데… 잠시 시간 좀 주세요”
“…. 음 근데 이거 서란 님이 제안해주신 거잖아요. 대체 왜 지금 머리가…”
“제가요?!?!”
깜짝 놀라 고개를 들며 되물어보는 서란의 모습에 미소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혹시 기억 상실증이란 게 주기적으로 오는 건가? 왜 이렇게 생소한 모습이지’
문제는 서란이 지금 미소보다도 훨씬 당황해하고 있단 점이었다. 서란은 정말 기억이 안 나는 듯했다.
‘분명 오래 생각하고 꺼낸 말 같았는데…’
동공 지진을 보여주는 서란의 모습에 미소도 말문이 막혀 버렸다. 둘은 그렇게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똑똑”
어디선가 입으로 낸 노크 소리가 들렸다. 열린 유리 문에는 미애가 한심하단 표정으로 회의실 유리벽에 기대어 서란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서란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미애 쪽으로 다가갔다. 미소는 둘의 갑자기 가까워진 모습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다. 둘은 속삭이며 무언가를 얘기하는 듯하더니 곧 미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정미소 과장님.”
“네 안녕하세요. 조미애 비서님.”
“죄송하지만 지금 서란 님을 대표님께서 찾으셔서요. 바로 데려가야 될 것 같은데 괜찮으실까요?”
“아…네네. 괜찮습니다.”
말을 마친 미애와 서란은 빠른 속도로 회의실에서 사라졌다. 어느새 조용해진 회의실에는 미소의 의문만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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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재능에는 연기가 없다고 했어 안 했어. 오늘은 왜 또 여기 와서 xx이야?”
미애의 거친 호통이 달가웠다. 서란은 지금 돌이킬 수 없는 연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지나가다 발견했으니 망정이지. 도대체 회의에는 왜 기어들어간 거야. 원래 그런 거 들으면 5분도 안 돼서 졸잖아”
“…이때까지 서우가 참여했던 거 나도 연습해보려 한 거지. 갑자기 바뀌면 이상하잖아”
“지금까지 서우 언니가 올려놓은 네 이미지 괜히 망치지 말고 그냥 가만히 나 있어 쫌”
서란과 함께 복도를 빠르게 걸으며 미애는 잔소리를 쏟아 냈다. 엄마 같은 미애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이제서야 익숙한 공간으로 들어온 느낌에 서란은 안도했다. 걷는 중간중간 미애는 미소 띤 인사도 놓치지 않으며 서란을 빠르게 엘리베이터 앞으로 끌고 갔다.
“대표님은 안 봐?!?”
“…회의 실에서도 그따위로 연기해놓고 대표님을 지금 만나겠다고? 100퍼센트 들킬 테니까 그냥 좀 가..”
“아니 그래도 시도는…”
“시도 같은 소리 한다. 어서 가!”
미애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점점 더해져 갔다. 서란은 자신을 구해준 미애의 말에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딩동”
어느새 도착한 엘리베이터에서 도착은 이 들렸다. 그런데 열린 문 사이로 민우의 얼굴이 빼꼼 비쳤다. 깜짝 놀란 미애가 허둥지둥 서란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피하려 했으나 이미 늦어버렸다.
“서란?”
뒤에서 서란을 부르는 소리에 둘은 어색한 몸짓으로 뒤를 돌아 볼 수밖에 없었다.
“아하하하.. 대표님. 이제 출근하시나요. 오늘은 왠지 늦으셨네요. 하필 이 시간에..”
본능적으로 서란을 몸으로 가린 미애의 인사말이 어색했다. 민우는 미애를 향해 한번 싱긋 웃어 보이곤 곧 서란에게 곧바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어쩌다 온 거야?”
“아…”
각오했던 일이었으나 이렇게 갑자기 민우를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던 서란은 가만히 민우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 모습에 민우는 조용히 서란의 손을 잡았다.
“!?!?!??!”
깜짝 놀란 미애를 뒤로 한채 민우는 그렇게 서란의 손을 잡고 회사의 안쪽으로 향했다. 마주 잡은 손을 넋 놓고 쳐다보는 미애의 시선을 뒤로 한채 민우는 빠르게 대표실로 들어갔다.
‘탕’
문이 닫히는 소리에 서란은 정신을 차렸다. 둘밖에 없는 이 공간엔 부드러운 민우의 시선이 가득했다. 서란은 지금 처음으로 민우를 아주 가까이서 볼 수 있었다. 사실 서란은 민우가 이렇게까지 잘생겼는지는 알지 못했다. 몇 번 마주친 곳도 어둡거나 스쳐 지나갔던 게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떠오르는 스타트 업계의 아이돌이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민우는 캐주얼 정창 차림으로 책상에 기대서 서란을 천천히 쳐다보고 있었다. 심플하게 입고 있어도 이목구비의 화려함 때문에 어딜 가든 눈에 띄는 타입이었다. 단정하게 이마를 드러낸 까만 머리가 피부색과 대조를 이루어 이 상황을 더욱 비현실적으로 보이게 했다. 몸에 살짝 붙는 옷으로 인해 드러난 긴 팔다리도 민우를 더욱더 비현실적이게 보이게 만들어주었다.
‘캐주얼 슈트를 입어도 이렇게 빛나는데 제대로 된 슈트를 입으면 얼마나 멋있을까’
쇼핑몰 ceo인 서란의 눈이 빛났다. 지금 눈앞의 대표로는 모델도 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우월한 길이와 특유의 분위기가 주위의 시선을 충분히 끌어들이고도 남았다. 서란은 지금 자신의 상황은 파악하지 못한 채 자신의 사업각을 재고 있었다.
“평소에는 쳐다보면 시선을 피하더니 오늘은 다르네”
민우의 말에 서란의 의식이 현실로 돌아왔다.
“아. 아니 그게 오늘은 너무 멋있으셔서”
넋 놓고 있다 서란의 본심이 나왔다. 서란은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 고마워. 그런데 왜 이렇게 뭔가 다른 느낌이 들지…”
“.. 제가요?”
“ 응. 나를 보는 시선이 매우 달라진 것 같기도 하고.. “
서란을 쳐다보는 민우의 눈빛이 날카로웠다. 잘생긴 대표의 저돌적인 행동에 서란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서우와 민우의 관계가 어느 정도 유지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솔직히 이 정도까지 일 줄을 상상도 못했던 서란이었다. 서란은 호들갑을 떨고 싶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심쿵 하는 이 분위기에 말없이 민우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어쨌거나 마지막 만남 후 그날은 내가 좀 예민하게 굴었던 거 인정할게.”
“…”
“그냥 둘이 있을 때는 나만 봤으면 좋겠어”
“!!!!!!!!.”
‘ 이런 말을 들을 사이라는 건 얼마나 그새 진전이 됐다는 얘기지?!?’
생각보다 짙어지는 민우의 분위기에 서란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은 서란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음. 이런 얘기는 혹시 다음번에..”
서란은 어색하게 웃으며 살살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민우는 그런 서란의 말을 못 들은 것 마냥 서란에 게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민우가 서란의 볼을 쓰다듬었다.
“?!?!?!?”
서란은 갑작스러운 민우의 행동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서우와 이렇게까지 가까웠었다니. 말해주지 않은 서우가 원망스러웠다. 너무 뒤늦게 알아차려 점점 상황이 대처할 수 없게 변해가고 있었다.
“다음번에 또 언제 볼 수 있을까… 매번 요리조리 숨어버려서”
민우는 환한 미소와 함께 서란을 내려다보았다. 볼에 닿은 손가락이 뜨겁게 느껴졌다. 순수해 보이는 민우의 표정에 서란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단 말이야"
말을 마친 민우가 서란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더니 곧 서란에게서 떨어졌다. 서란은 순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민우에게 시선을 돌렸다.
“향기도 그렇고.. 시선도 그렇고.. 뭔가 묘하게 다른데? .. 무슨 일이 있었어?”
민우의 예리한 직감에 서란은 소름이 돋는 느낌이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어갔다.
“요새 연말이라 밀린 업무가 많아서 .. 집에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일 거예요"
“여러 사람이라.. 혹시 저번에 그 사람도 집에 왔었나?”
“누구..?”
“동혁이라고 했나. 그 사람”
“아 그분이야 우리 집 아래층에 사는데요.”
말을 마친 서란은 깜짝 놀라 다시금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서란이 지금 사는 집은 원래 오피스텔이 아니었다. 서란의 말실수에 민우의 표정이 살벌해졌다.
“…. 아래.. 산다는 그런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 저 그게..”
궁지에 몰린 서란의 표정이 다급해졌다. 입만 열면 틀어지는 분위기에 서란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대표님. 이제 곧 급한 미팅이 시작됩니다. 여기서 지금 이러실 시간 없어요”
또 한 번 시급한 상황을 해결해 준 것은 미애였다. 미애는 빠르게 문을 열고 들어와 어어.. 하는 민우의 등을 밀면서 함께 사라져 버렸다. 서란은 잠시 이 상황에 당황했지만 곧 정신을 차리고 빠른 속도로 회사에서 도망쳤다.
‘아.. 서우!!! 왜 이런 상황을 나한테 아무것도 얘기해주지 않은 거야!!!’
도망치는 서란은 애꿎은 서우를 원망하며 황급히 회사 건물에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