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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판타지
Off Side
작가 : 지현시
작품등록일 : 2019.9.26

세계적인 축구 스타와의 로맨스,
실종된 아빠를 둘러싼 미스터리,
시간을 매개로 한 반전의 판타지!
페어 플레이 룰을 비웃듯 반칙이 난무하는 그라운드 위에서
오늘도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두 자기만의 경기를 뛰고 있는 중이다.
그 앞에 공을 차 주며,
나도 함께 뛰고 있다고 조금만 더 힘을 내라고,
이 어려운 경기를 멋지게 이겨 보자고, 응원하는 목소리를 글에 담았다.

운명의 파트너, 시온과 정원이 펼치는 인생 최고의 경기!
휘슬은 불렸다. 원더골(Wondergoal)을 향해 함께 달려 보자, 내일이 없는 것처럼!

 
첫 데이트 (1)
작성일 : 19-11-10 19:34     조회 : 191     추천 : 0     분량 : 5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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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5월 17일┃

 

 전신 거울 앞에 선 정원은 짧은 머리카락을 검은 모자 안에 쑤셔 넣으며 외출 채비를 했다. 승리의 여신, 니케의 날개가 그려진 트레이닝복으로 상하의를 갖춰 입었다. 이 또한 검은색이었다. 얼굴과 팔의 살색을 제외한다면, 지금 정원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색이라곤 이채가 도는 황갈색 눈동자가 유일했다.

 정원은 립스틱을 향해 뻗은 손을 고민 끝에 거두어 들였다. 허여멀건 입술에 붉은 기가 더해진다면 훨씬 생기 있어 보일 테지만, 이는 일부러 남장까지 하고 나서는 오늘 야행과 어울리지 않았다. 정원은 대신 무색무취의 립밤으로 엷게 윤을 내며 단장을 마쳤다.

 거실로 나오자 부엌 아일랜드에서 남생이 바나나를 까먹고 있었다. 의자 다리 부러진다고 몇 번을 일렀건만, 몸을 뒤로 젖혀 흔들거리는 버릇은 좀처럼 고쳐질 기미가 안 보였다.

 정원 남매가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는 2년 전에 청준의 집에서 독립해 나오면서 얻은 보금자리였다. 화장실 두 개와 방 세 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남향, 로얄 층에 속한다는 14층 중간 라인. 좋은 매물이 나오면 연락 달라고 부탁했던 부동산 중개업자가 가히 환상적이라며 소개한 조건들이었다.

 정원은 지체 않고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현관에 탁 들어가 받은 첫인상이 좋았던 까닭이다. 군데군데 흠집은 좀 났지만 거실에서 부엌까지 넓게 깔린 마루 장판, 나뭇결이 살아 있는 오크(oak)색 창틀과 문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는 14년 동안 외삼촌 댁에서 더부살이를 한 남매가 바랐던 집의 이상적 모습과 거의 일치했다.

 이사 오면서 인테리어에 크게 손을 대지 않아, 전과 달라진 풍경이라면 싱싱한 꽃과 푸르른 나무가 도열하고 있는 초록의 베란다 정도였다. 정원은 엄마를 닮아 식물 기르기를 좋아했다. 아니, 닮은 건 꽃을 잘 키우는 능력뿐이었다. 좋아하는 건 다른 이유에서였다. 특정 냄새가 과거의 기억을 재생하는 데 관여한다는 프루스트(Proust) 효과 덕에 정원에게 있어 꽃향기는 곧 엄마였다. 엄마가 그리울 때마다, 그녀는 꽃에 얼굴을 파묻고 그 향기를 폐부 가득 들이마셨다. 제일 효과가 좋은 꽃은 백합이었다. 생전에 서연이 가장 좋아했던 꽃이었으니까.

 정원이 하나둘 사들인 화분은 그녀의 세심한 관리 덕에 중간 이탈자 하나 없이 베란다에서 점점 그 세를 키워갔다. 어느덧 베란다를 다 덮은 푸른 물결에 남생은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르다가도, 빨래 널기가 불편하다고 토를 달았다.

 “어느 은행이야, 필요한 장비는 다 챙겼겠지? 금괴를 가져오려면 내가 동행해야 하지 않아? 누이의 그 가녀린 팔목으론 100만원어치도 힘들어 보이는데.”

 남생은 시커먼 도둑 분장을 한 정원을 작정하고 놀려댔다. 정원이 함께 가지 못하게 해 심술이 잔뜩 난 상태였다.

 “신뢰하지 못하는 파트너는 데려가지 않는 게 백 번 나아. 돌발적인 행동에 발등 찍히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거든.”

 “너무해, 시온이 형과의 시간을 독차지하다니…… 당신이 그러고도 내 누나야?”

 “스토커를 달고 나갔다 정시온한테 무슨 욕을 들어먹으라고? 극성 맞은 네 애정 표현에 치를 떨던 그 표정을 잊을 수가 없어. 대체 그때 무슨 생각이었던 거야?”

 두 달 전, 폴란드와의 평가전을 마치고 나온 시온을 그대로 덮쳐버린 남생은 극성팬의 모습 그 자체였다. 눈물까지 흘려가며 시온과 격한 포옹을 하더니, 핸드폰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고 입고 있던 옷에 사인도 받았다. 곁에 선 정원은 그런 동생이 낯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우리 남자들 세계에서 시온이 형은 영웅이나 다름없다고! 난 그런 천재일우의 기회를 놓치는 머저리가 아니야.”

 “글쎄, 충분히 머저리 같아 보인던데.”

 “친구들이 날 얼마나 부러워한 줄 알아? 정시온 사인이라니까, 축구 잘 모르는 여자애들도 관심을 보이더라. 오늘 만나면 사진이나 사인보다 더 근사한 걸 건질 수도 있을 텐데, 저 이기적인 도둑 때문에 다 망쳤어! 누나가 오늘 훔친 건 하나뿐인 동생의 행복이라는 걸 명심해 둬.”

 “불쌍한 내 동생. 남의 인기에 영합하지 않고선 친구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단 소리잖아. 너와 정시온의 재회를 막은 건 매우 잘한 일인 듯싶다. 앞으로는 네 안의 가치에 대해 탐구하고 이를 개발하는 데 더 매진하도록 해. 넌 정시온의 후광 없이도 멋지게 빛날 수 있으니까!”

 남생은 정원의 진심 어린 충고를 치, 하며 가볍게 튕겨 냈다. 상심이 너무 커, 지금은 어떤 말을 들어도 기운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원은 그런 남생을 뒤로 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삐친 동생을 달래는 사이, 핸드폰이 여러 번 진동했다. 아무래도 시온이 도착을 한 모양이다.

 

 “뭐 하잔 거야, 지금?”

 지하 주차장에 확연한 이질감을 드러내고 있는 시온의 노란 슈퍼카를 발견한 정원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차창을 똑똑 두드리자, 운전석에 앉은 시온이 차에서 내려 정원 쪽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난 그에게 정원은 다정한 인사말도 생략하고 앙칼진 목소리를 뽐냈다. 안 그래도 시온과의 외출이 부담스러워 죽을 지경인데, 이렇게 존재감이 훌륭한 차를 몰고 오다니!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정말.

 “남장이 취미야? 왜 그렇게 입고 나와, 명색이 첫 데이튼데.”

 시온 역시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온통 시커멓기만 한 정원의 복장이 무성의하게 느껴졌다. 제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가, 하고 불안해지기까지 했다. 머리 만지고, 옷 고르면서 어떻게 해야 정원의 눈에 멋져 보일까 고민했던 그의 시간이 한순간에 초라해졌다.

 “일단 타.” 시온이 보조석 차 문을 열어주며 말했다. “나랑 있는 거 사람들이 볼까 무서운 거잖아, 지금.”

 정원은 깊은 한숨과 함께 화려한 슈퍼카에 올라탔다. 시온의 말대로, 주차장에서 그와 실랑이를 오래 하고 있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정원이 고분고분 차에 오르자, 시온은 잡고 있던 문을 닫은 뒤 다시 운전석으로 돌아갔다.

 “눈에 좀 덜 띄는 차는 없었던 거야? 졸부처럼 비싼 차 사 모으는 게 취미잖아. 주차장에 자랑스럽게 줄 세워 놓은 차 중에 이거보다 얌전한 아이가 분명 있었을 것 같은데.”

 “졸부라 돈 많은 티를 내고 싶었나 보지.” 능숙한 핸들링을 보여주며 지상으로 올라가는 시온의 목소리에 언짢은 기색이 묻어났다. “국정원 정예 요원처럼 하고 나올 거였음 미리 언질을 좀 주지 그랬어. 드레스 코드라도 맞추게.”

 “남생인 나더러 도둑 같다고 하던데. 넌 역시 정의의 편에 서는 게 자연스러운 모양이구나?”

 정원의 농담에도 일단 상한 기분은 쉽게 회복되지 못했다. 시온은 전방을 주시하며 보조석 쪽으론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의 왼쪽 창문 너머로 서울의 야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잠들지 않는 도시’란 수식어에 걸맞게 밤을 밝히는 불빛들의 향연이 낭만적인 감성을 불러 일으켰다.

 “이미성 만나러 갈 땐 예쁘게만 하고 나오더니…….”

 혼잣말처럼 내뱉은 시온의 귀여운 투정에 정원은 미안함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질투는 사랑의 또 다른 이름. 그가 미성을 연적으로 삼은 게 다소 어이없었지만, 시기심이 생길 만큼 자신을 좋아하고 있단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정원은 찬찬히 시온의 옷차림을 살폈다. 베이지색 면 티셔츠에 짙은 카키색 팬츠를 입었다. 왼쪽 손목에 찬 제법 무거워 보이는 시계를 빼고는 별다른 장신구는 하지 않았다. 헌데 자세히 보니, 동그란 펜던트의 실루엣이 티셔츠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정원이 준 반지를 줄에 꿰어 목걸이로 하고 온 것이었다! 정원은 허전한 제 왼손 약지를 오른손으로 가렸다. 둘 사이를 누구에게도 들켜선 안 된단 강박이 시온에 대한 무심함으로 이어졌다. 미안했다.

 “나 예뻐서 좋아하는 거야? 내 차림새가 어떻든 사랑해줄 의향은 없어? 이렇게 입고서라도 널 만나고 싶어서 나온 거잖아, 이 바보야.”

 그제야 비로소 시온의 고개가 오른쪽으로 돌려졌다. 정원의 솔직한 해명에 감동한 눈치였다. 그녀의 애정을 멋대로 과소평가해 괜한 시간 낭비를 했다. 오늘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그 힘든 일정도 꿋꿋이 버텼는데!

 지난 13일에 EPL 마지막 경기를 뛰고, 열두 시간의 비행을 거쳐 한국 땅으로 넘어온 그는 예정되어 있던 후원 기업 행사에 성실히 참여했다. 귀국의 목적이 국내에서 열리는 두 번의 평가전을 치르는 것이니만큼, 21일 대표팀 소집 전에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선에서 정원을 만나려면 오늘밖에 시간이 없었다.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으로 시온은 정원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시선을 마주치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달콤한 순간은 정원이 시온의 손을 도로 제자리로 갖다 놓는 통에 더는 지속되지 못했다.

 “위험해, 핸들 두 손으로 잡아. 사고 나서 다치기라도 하면 진짜 가만 안 둬, 응급실로 쫓아가서 죽여버릴 거야.”

 “다친 것도 서러운데 네 손에 죽기까지 해야 해? 그건 좀 너무하다. 네가 어떤 모습이든 변함없이 널 사랑해 줄 남잔 흔치 않아. 그토록 가혹한 처분은 재고하는 게 좋을걸?”

 시온은 정원의 으름장을 농담으로 받아쳤다. 그러나 정원은 진지했다. 시온이 은퇴 전까지 부디 무사 안전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운전할 땐 항상 조심해야 해, 사고가 언제 어디서 날지 모르니까. 운전 경력이나 실력 따위로 자만해져선 절대 안 돼. 불의의 사고는 너 하나만 잘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부상 당해서 축구 못 하게 되면 얼마나 속상할지 누구보다 네가 제일……!”

 정원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형인 재신을 언급한 거나 다름 없는 발언이었다. 시온은 정원의 움찔거림을 알아차렸다. 그는 지금까지 정원이 핏대를 세우고 한 잔소리를 무시한 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았다.

 “뭐 먹을까? 뭐 좋아해? 같이 밥 먹는 건 처음이다, 그렇지?” 시온은 못 들은 척, 못 본 척, 의도적으로 화제를 바꿨다. “양식은 분위기 내긴 좋지만, 느끼해서 몇 입 못 먹는단 단점이 있어. 나 완전 토종 입맛이거든. 덕분에 외국 생활이 잘 맞아, 체중 관리가 절로 되니까. 너는 어때?”

 재신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시온의 노력이 가상해, 정원은 장단을 맞춰 주었다. “나도 그래, 고추장 들어간 건 뭐든 잘 먹어. 칼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거, 그런 거 좋아해.”

 “오케이! 그럼 메뉴는 정해졌다.”

 시온은 방긋 웃으며 엑셀을 지그시 밟아 주행 속도를 높였다. 그러면서 핸들을 두 손으로 단단히 움켜잡았다. 정원이 불안해하는 게 싫어서였다. 그 모습이 만족스러운 듯, 정원은 차 시트에 몸을 편안히 기댔다. “운전할 때랑 축구할 때, 골라 봐, 어느 모습이 더 멋있는지.”

 정원의 애틋한 시선을 느낀 시온이 특유의 허세를 부렸다. 길게 생각할 가치가 없는 질문인 듯, 정원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축구할 때.”

 “나 한 손으로 주차하는 묘기도 부릴 줄 아는데. 연습했거든, 여자친구 생기면 보여주려고.”

 “소용없어. 네가 뭘 하든, 공에 매료되어 그라운드를 달리는 정시온을 이길 순 없어.”

 단호한 여자. 시온은 기분 좋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일에 열중했을 뿐인데, 그 모습이 제일 멋지다고 말해주니 뿌듯했다. 신기하다. 정원의 말은 하는 족족 가슴에 와 박히니. 이러니 안 사랑하고 배겨?

 시온은 자꾸만 보조석 쪽으로 내려가려는 오른손을 간신히 붙든 채 생각해 둔 식당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동안 저도 모르게 흥얼거린 콧노래에 정원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진 굳이 보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데이트는 이제부터가 시작인데, 나중에 그녀를 집으로 돌려보내야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아, 이 밤의 끝을 잡고 놓지 않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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