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판타지/SF
독기
작가 : Lulla
작품등록일 : 2019.11.10

신을 배척하고 인간만의 삶을 추구하는 안개와 강철의 나라 스팀 헤이즈.

눈부신 발전 뒤에 가려진 빈민굴에서 태어난 로렌스는 언제나 자신이 평균 이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그의 꿈 속에 검은 뱀이 나타났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거머쥘 기회를 주겠노라고 속삭인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로렌스는 검은 뱀의 꼬드김에 넘어가 그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3화. 회장님께서 가라사대 - 1
작성일 : 19-11-10 19:06     조회 : 203     추천 : 6     분량 : 7703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눈을 떴을 때 상쾌한 아침 햇살이 얼굴을 간질이고, 갓 구운 빵의 향긋한 냄새에 이끌려 자연스레 부엌으로 향해 이른 아침상을 받는 행복한 일상.

 

  그런 게 로렌스의 인생에 첨가되어 있을 리 없었다.

 

  로렌스는 병원 침대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열었다. 기분이 별로 좋지 못했다. 어깨가 불로 지지는 듯이 아팠고, 지칠 때까지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태반은 토악질이 나오도록 강한 약품 냄새 때문이었다. 코앞에 약품 병을 들이댄 느낌이다. 팔을 움직이기가 힘들어 오른쪽 어깨를 보니, 말아 올린 환자복 아래로 감긴 붕대가 보였다. 살짝 만져보니 적잖이 축축했다. 만진 손가락의 냄새를 맡아보니 강한 약품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각적인 요소도 기분을 악화시키는 데 한몫했는데, 바로 옆에 팔짱을 끼고 졸고 있는 덥수룩한 아저씨가 있었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에 질질 흐르는 침이 더해지니 생리적인 불쾌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배에 두꺼운 팔뚝까지 더해져 누가 보면 산적인 줄 알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선생님?”

 

  모리스가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깊이 잠이 들었는지 비몽사몽한 눈으로 로렌스를 멍하니 쳐다보다, 침을 흘렸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손으로 닦았다.

 

  “오, 오오오. 일어났냐.”

 

  마치 멀쩡히 깨어나 있었던 사람처럼 모리스가 일부러 과장되게 몸짓하며 반겼다. 하지만 풀린 눈과 덜 닦인 침 자국 때문에 전혀 설득력이 없었다.

 

  “여긴 어디에요?”

 

  "음? 병원이지 어디겠니. 특별히 개인실로 모셔 뒀단다."

 

  "아..."

 

  로렌스는 차분하게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제시카가 자신을 던졌을 때 이후의 기억이 도무지 생각이 안 났다. 거리에 떨어졌으면 즉사했을 테니 아닐 거고, 반대편 지붕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자신을 제시카가 광장의 모리스 선생님에게 옮겨준 것 같았다. 힐끗 모리스를 훔쳐보니 더할 나위 없이 따듯한 눈빛을 로렌스에게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로렌스는 완전한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실제로도 모리스는 로렌스를 어떻게 위로하면 될지 마음속으로 고심하고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의사 선생님이 흉터도 안 남을 정도로 완벽한 치료가 가능하단다.”

 

  “예. 지금 기술력이면 부러진 뼈 정도야 흔적도 없이 이어 붙이겠죠.”

 

  "음, 그래."

 

  모리스는 수긍하는 듯하다가, 갑자기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반문했다.

 

  "가끔 생각하는데, 너는 열두 살이 맞니? 우리 부담임보다 정치 이야기 잘할 것 같은데."

 

  "예?"

 

  로렌스 자신은 자랑거리로 삼지 않지만, 로렌스의 수재성은 학교에서 유명했다. 열두 살밖에 안 된 아이가 회장에게 직접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널리 퍼진 이야기였다. 성격도 어른스러워 고민거리가 있는 선생들이 오히려 로렌스에게 상담을 요청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성적도 잘 내고, 겸손한 데다 심성이 착하기도 하지. 네 인생에 제시카만 없으면 완벽할 텐데 말이다."

 

  모리스가 혀를 차며 투덜거렸다.

 

  "그런 말씀 마세요. 가끔 이래도 제시만큼 저 챙겨주는 사람 없어요."

 

  "이런 꼴을 당해놓고 그런 말이 나오니, 참나..."

 

  모리스가 기가 막힌 듯 코웃음 쳤다. 아무리 그래도 로렌스는 제시카를 끝까지 감쌀 생각이었다. 하루종일 우울하게 축 처진 어깨를 보면 있던 악감정도 싹 사라진다. 외곽 구역에서부터 피 한 방울 이어지지 않은 자신을 먹여 살리던 그녀를 쉽게 매도할 생각은 없었다.

 

  "됐다. 괜찮아지면 밖으로 나오렴. 오늘 종합검진 날이니까 곧 네 차례가 올 거란다."

 

  묵직한 몸을 일으켜 세우자 앉아있던 의자가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모리스가 나간 뒤, 할 일이 없어진 로렌스는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병실에는 재미없어 보이는 책 몇 권과 꽃병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이번에는 몸을 움직였다. 제자리에서 몇 번 뛰고 왼팔을 붕붕 돌렸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 치곤 몸이 가벼웠다.

 

  "진보를 몸으로 직접 체험할 줄은 몰랐는데."

 

  로렌스가 중얼거리며 병실 문을 열었을 때, 갑자기 네댓 명의 사람들이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으헛!”

 

  로렌스는 기겁을 하며 몸을 뒤로 젖혔다. 정장에 가운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들이었다. 로렌스를 눈치채지 못한 듯 그들은 저들끼리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빠르게 복도를 지나가 반대편 병실로 들어갔다.

 

  "무슨 일이 있나..."

 

  로렌스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들어간 병실 쪽으로 다가가 창을 통해 안쪽을 살폈다. 그들은 침대를 둘러싸고 병실에 있던 환자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침대 위의 환자는 로렌스와 또래인 듯 어려 보였다.

 

  "누구지...?"

 

  각도 상 간호사 한 명이 완벽하게 가리고 있어 환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코를 박을 기세로 창에 바싹 기댔는데, 갑자기 간호사의 옆구리로 얼굴이 불쑥 튀어나오더니 로렌스에게 손을 흔들었다.

 

  "왁!"

 

  깜짝 놀란 로렌스는 튕기듯 문에서 멀어졌다. 안쪽에서 누군가 걸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십니까?"

 

  안경을 쓴 의사가 문을 열며 말했다. 의사의 눈매가 날카로워 로렌스는 괜히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아, 저 검사 받으러 왔는데요..."

 

  당황해서 생각나는 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창을 들여다 본 이유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은 아니었다. 의사는 무뚝뚝하게 로렌스를 바라보다 오른쪽 복도 끝에 커다란 문을 가리켰다.

 

  "종합검진은 저쪽으로 가라."

 

  "아 네..."

 

  로렌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의사가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창에 신문을 덮어 가려버렸다. 신문 헤드라인에 붙은 팔을 크게 벌린 남자 사진이 '절대 보지 마'라고 말하는 듯했다.

 

  로렌스는 딱히 크게 흥미가 있던 것도 아니라 별생각 없이 돌아섰다. 문득 손을 흔들었던 환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개인실에 있는 환자치고는 피부에 윤기가 돌고 상당히 건강한 여자아이였다.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로렌스가 혼자 중얼거리며 모퉁이를 돌자 로비가 나왔다. 계단 바로 옆에 접수대가 있고, 그 앞에 가지런하게 놓인 수십 개의 의자를 선생님과 아이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유일하게 서 있는 사람은 모리스였는데, 도톰한 손을 마구 휘저으며 열정적으로 연설을 하는 중이었다. 모리스가 나온 지 채 일 분이 안 지났는데 아이들은 벌써 지루해 죽겠다는 얼굴로 축 늘어져 있었다.

 

  “야! 저기 로렌스다!”

 

  로렌스가 잠시 어느 타이밍에 나가야 할까 고민하는데, 턱을 괴고 있던 카일이 로렌스를 발견하고 크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이어진 실을 한 번에 잡아당긴 것처럼, 아이들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곧 로비에 폭탄이라도 터진 듯 시끄러운 목소리들이 로비를 가득 메웠다. 부담임인 아로네프마저 모리스를 제치고 로렌스에게 달려왔다. 그는 로렌스의 얼굴과 머리를 만지며 걱정하는 말을 쏟아냈다.

 

  “괜찮냐? 다친 데는 어떻고. 너 임마 이렇게 빨리 일어나도 되는 거야?”

 

  “로스... 로렌스? 로렌스 괜찮...”

 

  인파에 휩쓸려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라일라는 잔뜩 웅크리고 로렌스의 바로 옆에서 속삭였다. 로렌스는 라일라의 말에 반응해주려다 불쑥 머리를 들이민 카일 때문에 깜짝 놀라 숨을 들이켰다.

 

  “형, 하늘 위를 날았다면서? 제시카 누나는 중요한 관찰 대상이니까 말이지. 던져질 때 어느 정도의 힘으로 날아갔어? 상층부의 안개는 어떻고? 숨쉬기 어려울 정도로 안개가 껴 있었어?”

 

  "이 상황에도 그런 말이 나오냐 너는!"

 

  수첩과 펜을 꺼내든 카일은 걱정하기는커녕 질문을 쏟아냈다. 옆에서 아로네프가 타박을 주건 말건 카일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코를 골며 자는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학생이 로렌스를 둘러싸며 참새처럼 짹짹거렸다. 유일하게 이 상황을 즐기지 못하는 이가 있다면 바로 로렌스 본인이었다.

 

  좁은 복도에 징글징글하게 모인 들쥐 떼 같은 꼴이라니. 아이들의 체온과 뜨거운 입김이 피부에 닿아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밀쳐낼 강단도 없어 결국 로렌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벽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이 녀석들아! 길을 막으면 안 되지. 당장 돌아오지 못해!"

 

  모리스의 목소리는 아이들에게 전혀 닿지 않았다. 접수대의 간호사들이 보기에는 성질 더러운 깡패지만, 모리스를 길게 봐온 아이들 눈에는 그냥 동네 아저씨일 뿐이다. 게다가 자기만 아는 이야기를 하는 모리스보다 로렌스 쪽이 백배 천배 더 재밌었다.

 

  "아론! 너도 거기서 그러면 안 돼. 사람들에게 민폐잖아."

 

  "걱정되니까 그러지. 선생님이 다친 애 데리고 전력 질주할 때 얼마나 쫄렸는지 아세요?"

 

  "나도 걱정되니까 그런 거야. 잔말 말고 빨리 이리로 오라니까!"

 

  "아! 더럽게 말 많네. 얘들아, 저쪽으로 가서 마저 하자!"

 

  아로네프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뿌리박혀 서 있던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그 틈바구니에 있던 로렌스는 기가 막힌 듯 뜨악하게 입을 벌린 모리스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야, 너네는 왜 내 말을 안 듣냐? 이 선생님 조금 섭섭하다?"

 

  아이들은 모리스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모리스는 가슴이 답답해져 손바닥으로 마구 내리쳤다. 아로네프가 옆에서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면 입을 한 십 분만 닫아보쇼. 선생님의 그 재미없는 경험담 아무도 안 궁금해요. 매번 같은 레파토리에 같은 소재를 단어만 바꿔 말하는데 무슨 재미가 있어요.”

 

  "너 이 자식아. 그래도 내가 네 삼촌인데 말을 그따위로 하냐. 어른에 대한 공경이 없어요."

 

  "교육자끼리 삼촌 조카 사이가 어디 있소. 별 해괴한 소리 집어치우고 오후 수업 어떡할 거냐고요."

 

  말이 몽둥이라면 모리스는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피떡이 되어 바닥에 뒹굴었을 것이다. 아로네프는 혀를 차며 모리스를 마치 벌레를 보듯 노려봤다.

 

  이쯤 되니까 모리스도 슬슬 열이 올라왔다. 단지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도움을 주려 했을 뿐인데 이런 말까지 들어야 하나 싶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본인이 잘못한 게 없었다. 다만 저 버릇 없는 어린놈의 궤변에 휘둘린 게 너무나도 분했다.

 

  그래도 모리스도 어른이었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법으로 아로네프를 찍소리도 못하게 누를 수단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오늘 오후 수업에는 스팀 헤이즈 전 구역의 수장이자 상권을 한 손에 틀어쥔 2H사의 회장님이 방문하기 때문이다. 저번 방문 때 언제든지 연락해도 좋다는 회장님의 약속대로 편지를 썼더니 바로 오겠다는 답장이 왔다. 이 정도라면 본인의 업무 능력에 아로네프가 감탄해서 자연스럽게 주눅이 들 게 뻔했다.

 

  "휠러 회장님과의 면담이다. 무려 학생들과 일 대 일 상담이지!"

 

  모리스는 화들짝 놀라 그를 바라보는 아로네프를 보았다. 그래, 저 표정이지. 모리스는 내심 뿌듯하게 미소지었다.

 

  “회장님이 오신다고요?”

 

  “놀랍겠지만 사실이다. 그것도 이 삼촌이 회장님과 직접 연락해서 따낸 결과물이다, 이거야. 회장님이 인재를 찾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그래서 학교랑 상가부터 공사판까지 닥치는 대로 뒤져서 직원을 뽑는 중에 내 연락을 받으신 거지. 내가 어떤 사람이냐? 도시 전역을 따져도 비빌 사람이 없다는 최고의 수재의 스승 아니냐? 당연히 회장님도 그에 맞는 대우를 할 수밖에 없지.”

 

  “거들먹거리며 말한 것 치고는 본인이 한 게 없는데요.”

 

  “시끄러워! 네가 회장님의 편지를 봤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버릇없는 말투가 모기 눈물만큼이라도 고쳐졌을 텐데.”

 

  이미 모리스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치는 아로네프의 머릿속에 모리스의 행동 경위가 뻔하게 보였다. 아마 답장을 보내는 데만 반나절 정도를 지새웠을 것이다. 본사 관계자 앞에서 허리가 곧게 펴지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회장의 친필 편지 앞에다가 큰절을 올려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다.

 

  “우리 워커 군 덕분에 내 인생이 얼마나 편해졌는지 몰라요. 내가 너 무한으로 사랑하는 거 알지 로렌스?”

 

  “시끄럽고. 그럼 빨리 검사하고 학교로 돌아가야죠.”

 

  “우리만 검사받는 줄 알아? 한 층에 검사실이 하나인데 그럼 어쩌냐.”

 

  “아, 미리 연락해서 예약하던가 했어야죠!”

 

  “이놈이 소리를 질러? 야! 부모님이 그렇게 가르치든?”

 

  대화가 진행될수록 둘의 말투가 점점 거칠어지다가 결국 로비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꼴이 되어버렸다. 나름대로 상식이 좀 박힌 라일라와 로렌스를 제외하면 나머지 아이들은 연극을 보는 듯 흥미롭게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생님들 여기 병원이에요! 조금만 진정을 하고...”

 

  “너 임마 내가 우스워 보이냐? 내가 그래도 교사 짬밥이 삼십 년이야 삼십 년. 어디 코흘리개가 어른이랑 말장난을 치려고 들어?”

 

  “말장난 안 했고요. 누가 선생님 교사 짬밥을 무시했대요? 아무 관계도 없는 우리 부모님 들먹거린 게 누군데?”

 

  “야 너 툭 까놓고 말해 보자. 너 나 무시하잖아. 학생들이 나보다 너를 좋아하니까 그거 믿고 까부는 거 맞지? 배은망덕한 녀석. 형님이 너 학교 보낼 때 내가 돈 들이지 말라고 필요한 거 다 챙겨줬어. 네 집 살림에 어디서 그런 돈이 나오나 궁금했지? 다 내가 해준 거야 임마.”

 

  “저도 툭 까놓고 말할게요. 그거 어디 하수구에서 건져 왔어요? 한 이십 년 퇴보한 디자인에 곰팡이 찌든 냄새 때문에 한동안 친구들한테 말도 못 붙였어요. 그냥 집에 쓰레기 처리할 데 없어서 우리 집에 던져넣은 거잖아요. 내 말 틀려요?”

 

  “이놈이 그래도? 평생 존경해도 모자랄 사람에게 뭐? 하수구에서 건져 왔냐고? 지금 잘 돼서 교사 생활하는 거지 나 없었으면 넌 평생 거지꼴 못 벗어났어.”

 

  “전혀, 하나도, 쥐똥만큼도 안 고맙네요. 돈 가지고 유세 떨 줄 알았으면 술 사줄 돈으로 어머니 코트나 한 벌 더 사다 줄 걸 그랬습니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자식이? 너 오늘 내 손에 죽었다. 어디 주둥이만큼 주먹도 자신 있는지 보자고!”

 

  “존경합니다, 선생님. 부디 아이들을 앉힌 뒤에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길 바랍니다.”

 

  “으악! 누가 귀에다 바람을 불어넣어. 이런 미친...”

 

  모리스의 오른팔이 옆으로 쭉 뻗어졌다. 그리고 바로 옆에 서 있는 사람의 멱살을 단단히 움켜쥐었다.

 

  하지만 손에 잡힌 옷은 학생들이 입는 셔츠보다 얇고 부드러웠으며 넥타이같이 길쭉한 천 쪼가리도 만져졌다.

 

  문득 모리스는 생각했다. 학생 중에 아로네프보다 키 큰 사람이 있던가? 아니 있다고 해도 우리 반에서 이런 목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나마 나이가 찬 제시카는 애초에 검사실에서 나오자마자 로렌스 쪽으로 달려간 뒤였다. 그러니까 지금 멱살을 잡힌 사람은 모리스와 전혀 안면이 없거나 학교와 관계가 없는 별개의 인물이라는 뜻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모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의 하반신 쪽을 쳐다봤다.

 

  먼저 광이 번쩍번쩍 나는 검은색 가죽 구두와 새하얀 양말이 눈에 들어왔다. 검은색 줄무늬 양복바지도 보였다.

 

  “허어... 패션 철학 독특하시네.”

 

  패션은 쥐뿔도 모르는 모리스가 중얼거렸다. 조금씩 시선을 올려보았다. 금색 테가 들어간 가죽 벨트와 체크무늬 조끼, 하늘색 실크 셔츠, 그 가슴팍을 단단하게 움켜쥐고 있는 모리스의 손.

 

  슬슬 모리스는 이 멋들어진 신사가 누구인지 똑똑히 알 것만 같았다. 그래서인지 멱살을 잡은 손에서 도무지 시선이 올라가지 않았다. 시야에 틈틈이 보이는 흰색 수염만 봐도 정신이 아득해졌다.

 

  “제가 옷을 좀 특이하게 입긴 합니다.”

 

  어디선가 반지를 낀 손이 불쑥 튀어나와 모리스의 손을 잡는 바람에, 그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그 때문에 약간 시야가 올라갔는데, 덕분에 모리스는 멱살을 잡힌 신사가 아까부터 자기를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흰색 수염과 군데군데 검은 머리가 자란 가르마를 탄 머리, 날카롭고 높은 콧대와 약간의 주름살이 진 얼굴, 그리고 깊으면서도 장난기 어린 잿빛 눈동자까지.

 

  “저번에 한번 봤죠? 노바 시리우스 휠러라고 합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모리스의 귓전을 울렸다. 붉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한순간에 병원의 색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회... 회장님?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1 10화. 거미와 수정구슬 - 1 2019 / 11 / 10 210 8 6900   
10 9화. 펜타프리즘 2019 / 11 / 10 196 8 7209   
9 8화. 신님의 논리 2019 / 11 / 10 199 8 8375   
8 7화. 연어는 급류를 거슬러 2019 / 11 / 10 200 7 7765   
7 6화. 네가 두려우면 나를 의지하라 2019 / 11 / 10 218 6 7721   
6 5화. 맹수 2019 / 11 / 10 193 6 7643   
5 4화. 회장님께서 가라사대 - 2 2019 / 11 / 10 173 6 8171   
4 3화. 회장님께서 가라사대 - 1 2019 / 11 / 10 204 6 7703   
3 2화. 말괄량이의 약점 - 2 2019 / 11 / 10 190 9 7620   
2 1화. 말괄량이의 약점 - 1 2019 / 11 / 10 220 8 7572   
1 프롤로그 (2) 2019 / 11 / 10 353 13 1771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