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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독기
작가 : Lulla
작품등록일 : 2019.11.10

신을 배척하고 인간만의 삶을 추구하는 안개와 강철의 나라 스팀 헤이즈.

눈부신 발전 뒤에 가려진 빈민굴에서 태어난 로렌스는 언제나 자신이 평균 이하의 인간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던 그의 꿈 속에 검은 뱀이 나타났고, 그에게 새로운 삶을 거머쥘 기회를 주겠노라고 속삭인다.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싶었던 로렌스는 검은 뱀의 꼬드김에 넘어가 그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한다.

 
2화. 말괄량이의 약점 - 2
작성일 : 19-11-10 19:04     조회 : 190     추천 : 9     분량 : 7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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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뭐?”

 

  다이빙? 다이빙이라고 했나? 다이빙의 뜻이 뭐였지?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머리부터 급강하하는 그런 스포츠를 말하지 않나? 여기는 안전 장비도 뭣도 없는데? 뛰어내리면 죽는데? 그냥 죽는데?

 

  하다못해 그럴듯한 다이빙대가 있어야 하지 않나? 여긴 건물 옥상인데? 뛰어내리는 사람은 세상에 미련이 없는 그런 사람이어야 했다. 물론 그런 사람이 뛰어내려도 좋다고 인정하는 꼴은 아니지만, 적어도 로렌스 본인은 이 세상에 아직 미련이 많았다.

 

  “저기, 제시? 우리 의견을 다시 조율해 볼...”

 

  “사랑한다, 동생아!”

 

  로렌스는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그는 고층 건물 옥상에서 떨어지며 대화가 가능한 초인이 아니었다. 게다가 굉장히 단단해 보이는 파이프에 충돌하기 직전이라면 기절해도 할 말이 없다.

 

  투웅-! 끼기긱!

 

  거친 낙하 소리와 함께 제시와 로렌스의 온몸에 깊은 전류가 퍼져나갔다. 뼈가 울리는 충격에 로렌스는 저도 모르게 “억!” 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시는 다음 디딤대를 찾아 빠르게 눈동자를 굴렸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목표가 보였고, 즉시 제시는 앞쪽으로 크게 도약했다. 그리고 그대로 양쪽 다리를 굽혀 외벽을 밀어 찼다.

 

  그 반동으로 높게 떠오른 몸을 비틀어 아래쪽 또 다른 파이프에 발을 디딘 후, 지체없이 길을 따라 달려 다시 한번 도약했다.

 

  낮은 건물들 탓에 의외로 발 디딜 곳이 많았다. 물론 로렌스는 전혀 안전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제시가 너무 막무가내로 달려갔기 때문이다. 지붕 타일을 밟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자기 심장도 같이 두들겨 맞는 느낌이었다.

 

  제시는 마치 멀리뛰기 선수 같았다. 족히 십 미터는 넘게 떨어진 건물 사이를 땅 위를 걷듯 자연스럽게 건너뛰었다.

 

  “동생아, 여기가 어디더라? 어느 쪽으로 가야 길이니?”

 

  “윽! 억! 케엑!”

 

  “미안, 이따 물어볼게!”

 

  시원한 바람을 즐기는 역할은 제시가, 처량한 곡소리는 로렌스의 몫이다. 아마 이 장면을 모리스가 봤다면 당장에 제시를 때려죽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선생님은 로렌스의 목소리가 닿기엔 너무 먼 거리에 있었다. 사실 그게 선생님이었다고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애초에 제시의 시력이 아무리 괴물같이 좋다고 해도 인간의 범주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제시는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에게 달려가고 있다는 말이 된다. 그것도 로렌스를 업은 채 벽을 타고, 이십 미터 정도 높이에서 강철 파이프에 떨어져 놓고 멀쩡하게 달리고, 그러면서 신나게 웃기나 하고…….

 

  ‘어라? 믿을 만하지 않아?’

 

  머릿속에 모순이라는 단어가 가득 찼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소녀를 다시 한번 정의했다.

 

  ‘괴물 맞잖아, 이 자식?’

 

  “재밌는 거 하자!”

 

  “어... 으에?”

 

  “날아올라라!”

 

  비극적이게도, 로렌스의 시련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느긋하게 망상에 젖어 있을 새가 없다는 뜻이다.

 

  포탄을 던지는 듯한 동작으로, 정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제시는 너무 좋아하는 동생을 허공에 힘껏 집어 던졌다.

 

  원래부터 그랬지만, 로렌스의 머릿속에 정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뒷덜미를 잡혀 던져지는 순간 느껴지던 바람이라던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태양 빛이 따스하다던가, 저번 주에 먹었던 부식 머핀의 달콤함이라던가.

 

  로렌스는 한 마리의 비둘기가 된 느낌이었다. 본디 날개가 있지만, 육지에서의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나는 법을 잊어버린 비둘기.

 

  아름다운 포물선 궤적에 남았던 섬광은 환상인가, 아니면 로렌스의 눈물인가.

 

  인생무상, 세상사 공수래공수거라고 했던가. 마지막 유언을 들어줄 사람은 어디 없을까. 진짜 꼭 하고 싶은 말이 남았는데. 여러분, 잠깐 멈춰서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제가 하늘을 날고 있답니다. 행복의 집에 사는 제시카 위즐에게 제 말 한 마디만 전해주세요.

 

  “개새끼야...”

 

  쿵- 파박!

 

  로렌스를 저 멀리 반대쪽 지붕으로 던져버린 제시카는 우뚝 튀어나온 종탑을 발로 걷어차고 한 바퀴 돌아 닌자처럼 멋있게 착지했다.

 

  "큰일났다!"

 

  타일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제시카가 번개 같은 속도로 지붕 위를 내달렸다.

 

  "으아아! 이러니까 나는 안 돼!"

 

  제시카는 처음부터 로렌스의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했다. 달리면 기분이 풀린다는 생각에 적당히 속도감만 줄 생각이었는데, 무심코 흥분해버렸다. 따지고 보면 대포에 로렌스를 밀어 넣고 심지를 당긴 것과 같았다.

 

  제시카와 반대로 로렌스는 평범한 열두 살 아이일 뿐이다. 힘의 차이를 생각도 안 하고 그냥 저지르고 보는 것이 제시카의 나쁜 습관이었다.

 

  마치 벽에 붙은 벌레를 잡으려다 그대로 발라버린 느낌이다. 몸이 다 터져 죽은 벌레를 보고 ‘아, 기절만 시킬걸’하고 후회하는 것과 비슷한 부류이다. 이번에는 벌레가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에게 적용했다는 게 문제긴 하지만.

 

  "동생아! 괜찮... 으엑?!"

 

  제시의 반응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만 같았다. 사실, 귀신보다 지금 로렌스의 몰골이 더했다. 떨어질 때 어깨부터 떨어졌는지 오른팔이 힘없이 축 늘어져 있었고, 헤 벌어진 입술에서 침이 흘러내렸다. 외관만 봤을 때 다행히 높이를 생각하면 덜 다친 편이긴 했다. 제시카는 혹시나 그랬을지도 모를 최악의 상상을 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개새끼야..."

 

  “그래, 나 개새끼야! 진짜 미안!”

 

  무슨 말을 해도 로렌스는 들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제시카는 그걸 알면서도 머리를 감싸 쥐고 사과만 반복했다.

 

  “모... 목뼈가 부러진 건 아니겠지?”

 

  제시카가 로렌스를 업자, 어깨에 따듯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제시카는 로렌스가 코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까무러칠 듯 기겁했다. 정신없이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 진짜 타조와 같았다.

 

  "미안, 좀 내려갈게?"

 

  로렌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는 외투를 벗어 로렌스를 등에 단단하게 고정했다. 그리고 파이프를 붙잡고 조심스럽게 광장으로 내려왔다.

 

  시계탑 광장에는 육 구역에서 가장 큰 상가가 있다. 위치는 고아원과 학교의 중간 지점쯤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세 곳에 크고 작은 상점들이 들어서 있는데, 도구점이나 의류점, 철물점까지 여러 가게가 오밀조밀하게 들어서 있다.

 

  따라서 광장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시계탑 상가를 이용하기에, 사람이 굉장히 많이 돌아다닌다. 그러나, 그 사이를 제시카가 지나가도 누구 한 명 눈길을 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은 피투성이 아이를 업은 여자보다 당장 팔 물건을 손질하는 게 더 중요해 보였다.

 

  "그래, 많이 팔아라."

 

  제시카가 입술을 내밀며 이죽거렸다. 먼저 도움을 구할 생각도 없었다. 분수대에 앉아있는 선생님과 아이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무엇보다 도움을 구한다고 선뜻 나서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제시카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

 

  ‘선생님’ 모리스는 귓전을 때리는 얄궂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들었을 때 하루에 재액이 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침 인생에 있어 조심해야 할 점을 경험담으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한껏 곤란하면서 숨길 수 없는 잔망스러움을 드러내는 얼굴, 힘없이 축 늘어져 업혀 있는 남자아이. 모리스는 그 아이가 누구인지 대번에 알아차렸다. 제시카와 같이 다니는 남자아이라면 카일과 로렌스 말고 없었다.

 

  “허억!”

 

  꽃무늬 원피스의 라일라가 놀라 뒤로 자빠졌다. 뒤를 이어 가지런히 벤치에 앉아있던 아이들이 요란법석을 떨며 제시카에게 달려왔다.

 

  “야 임마!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제시!”

 

  모리스와 부담임인 아로네프도 부리나케 뛰어오며 마구 소리를 질렀다. 모리스는 특히나 경기를 일으키며 제시카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조미료만 좀 치면 멋진 기삿거리가 되겠는걸. 누나, 조금만 더 숙여볼래?”

 

  “어쩌지……병원, 병원에 가야 해. 어, 어느 쪽이었지? 이쪽은 우리 집이고, 이쪽은 선생님 집이고, 저쪽은…….”

 

  몇몇 아이들은 제시의 등에 업힌 로렌스를 콕콕 찔러보기도 하고,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다. 그들은 마치 진귀한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호기심 어린 눈동자로 제시의 주변을 에워쌌다. 카메라를 든 카일은 벤치 위에 올라서서 로렌스의 얼굴을 찍기도 했다.

 

  그 물결에 휩쓸리지 않고 라일라는 이성적으로 행동하려고 애를 썼으나, 자꾸만 다리가 먼저 움직여서 실에 매달린 인형처럼 춤을 추는 모양새가 되어버렸다. 난장판 그 자체였다. 조금 전까지 관심도 없던 행인들도 제자리에 멈춰 그들의 행태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공연인가 뭔가로 착각한 모양새였다.

 

  “나중에 각오해라.”

 

  모리스는 로렌스를 옮겨 받으며 제시카를 매섭게 노려봤다. 완전히 제시카를 범인으로 낙인찍어버린 눈빛이었다.

 

  “예에...”

 

  제시카가 힘없이 대꾸했다. 억울해도 다치게 한 건 본인이 맞았다. 모리스는 한숨을 푹 내쉰 뒤에 빠르게 달려갔다.

 

  “병원으로 가자! 아론, 애들 좀 챙겨라.”

 

  "알고 있어요. 빨리 가기나 하세요!"

 

  공사판의 인부 같은 말투로 아로네프가 소리쳤다.

 

  "어... 저기..."

 

  제시카가 소심하게 아로네프를 불렀다. 고개를 돌린 아로네프는 기분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사나운 인상에 째진 눈이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야외 수업 네가 주관했다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선생과 학생 사이임에도 제시카는 아로네프에게 거침없이 반말을 사용했다. 아로네프는 그 부분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뭐? 지금 그게 중요하냐?”

 

  “어?”

 

  말을 해놓고 찔렸는지 제시카가 어깨를 움츠렸다. 확실히 이런 이야기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대체 무슨 짓거리야? 평소 성질머리를 보면 답이 나오지만, 그렇다고 동생을 저렇게 패도 되는 거야? 이러니까 누가 너랑 친해지고 싶겠냐고.”

 

  “뭐? 아니 잠깐만. 내가 로렌스를 때렸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는 자기가 반 죽인 사람을 업고 병원 찾아다닐 미친놈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냐?”

 

  “아니면 뭔데. 왜 로렌스가 저렇게 다쳤는데?”

 

  “그건...”

 

  제시카는 할 말이 궁해져 입을 다물었다. 주먹으로 패진 않았어도 어쨌든 제시카가 낸 상처기 때문이다. “싫다는 애를 옥상에서 반대편 옥상까지 던져 오른팔을 부러뜨리고 기절시킨 미친 녀석이 바로 접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었다.

 

  “내가 물어봤잖아. 왜 저렇게 다쳤냐고?”

 

  “그것보다 우리 병원으로 갈까? 가서 다 이야기해 줄게.”

 

  제시카가 억지로 화제를 돌렸다. 결국은 모리스에게 한 번 더 이야기해야 할 내용이었다. 구태여 두 명에게 따로따로 설명할 이유는 없었다. 미안함의 대상은 로렌스지 선생들이나 아이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아...”

 

  아로네프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짜증이 배로 솟아 정수리에 웃도는 느낌이었다.

 

  “너는 어떻게든 내가 징계 때릴 거야. 그렇게 알아.”

 

  아로네프가 차갑게 말하고 휙 돌아섰다. 제시카는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아로네프를 따라갔다. 뒤를 이어 아이들이 따라왔는데, 성질을 주체 못 하는 아로네프 때문에 걸음이 느린 아이들은 거의 달리다시피 해야 했다.

 

  “근데, 병원은 왜 다 같이 가는 거야? 모리스 선생님이 갔으니까 네가 수업 진행하면 되잖아.”

 

  “무슨 말은 하는 거야. 난 야외 수업이라고 한마디도 안 했어.”

 

  “무슨 수업인데 그러면.”

 

  “혼자 생각해보세요, 멍청아.”

 

  짜증스러운 말투로 대답하며 아로네프가 제시카와 거리를 벌렸다. 제시카는 금세 따라붙어 재차 질문했다.

 

  “왜~ 이 정도는 알려 줘도 괜찮은 거 아니야? 그래도 수업받는 학생인데, 오늘 뭐 하는지 알아야 준비를 하지.”

 

  “네가 언제 준비를 해 왔다고...”

 

  화를 내려다 말고 아로네프가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마구 뛰던 심장 박동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아로네프는 화병으로 죽는다는 어르신들의 말씀을 이제 조금 이해한 기분이었다. 이 정도로 뻔뻔한 인간 앞에서 단명하지 않기가 더 힘들 것 같았다.

 

  “종합검진, 종합검진! CMK라고! 너는 삼 년 동안 받았으면서 매번 까먹냐?”

 

  순간 제시카의 움직임이 멈췄다. 살갑게 웃던 얼굴이 경련하며 무표정하게 바뀌었다가,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던 얼굴을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아~ 종합검진. CMK 알지. 그래, 매년 있는 행사인데 그걸 생각 못 했네, 음.”

 

  잔뜩 긴장한 얼굴인 주제에 여유 있는 척을 하는 제시카를 보자 아로네프는 조금 전까지의 감정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대신 그 감정이 있던 곳에 가학적인 즐거움이 자리 잡았다.

 

  문득, 아로네프는 작년 종합검진 때를 떠올렸다. 죽기보다 주삿바늘을 싫어하는 제시카가 채혈 차례가 다가오자, 접수원을 붙들고 울며불며 난리를 쳤었다. 날이 선 들짐승처럼 으르렁거리지 않나, “살려줘, 살려줘! 나 진짜 죽을지도 몰라!”라던가 하고 소리를 쳐대는 통에 결국 수면실에서 재우고 피를 뽑아야 했다. 잠을 자기 직전에 “부탁이니까 십 년 치 한꺼번에 뽑아주시면 안 돼요?”라는 제시카의 말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오늘은 어떨까. 아로네프는 기대감에 부풀어 반짝이는 눈동자를 제시카와 마주쳤다. 매년 카일이 찍은 제시카 컬렉션을 보는 게 인생의 낙일 정도다. 제시카 역시 아로네프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걸음을 돌려 상가 쪽으로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야, 제시!”

 

  아로네프가 소리를 칠 것도 없었다. 뒤따라오던 아이들이 이미 장벽 같은 대열로 제시카를 막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둘러싸인 제시카는 얼굴빛이 창백해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그리고 지붕 위를 뛰어올랐던 그 자세로 아이들을 뛰어넘으려고 했다.

 

  “누나, 그냥 가자. 괜한 짓인 거 알면서.”

 

  “맞아. 저번에 그러다가 우리 점심 못 먹었단 말이야.”

 

  “미뤄지면 로렌스 오빠 내가 잡아둘 거야. 절대 같이 못 가게.”

 

  “자고 일어나면 다 끝날 거야 누나.”

 

  “...너희, 임마...”

 

  한마디씩 하는 아이들의 말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도망쳐 봤자 검사 날짜가 조금 밀리는 것뿐이다. 최초 검사일로부터 삼 일이 지나면 구금당한다는 소문도 있었다. 게다가 미뤄서 가게 되면 딱히 제시카를 챙겨줄 사람도 없다. 부담임이라면 같이 가주겠지만, 아로네프의 비웃음을 견디면서까지 날짜를 미루고 싶진 않았다.

 

  “나한테 그래서 어쩔 건데.”

 

  제시카가 뒤를 돌아보자,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오해했는지 아로네프가 투덜거렸다. 그러면서 지금 제시의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기억했다.

 

  당장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눈망울, 어딘가 푸석해 보이는 머릿결, 꽉 다문 입술에 말아쥔 주먹. 아로네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CMK는 쉽게 말해 채혈하고, 분석하여 우편으로 결과를 보내주는 건강 검진이다. '정신 오염도 검사'라는 중요한 검사가 있긴 하지만, 사람들은 피를 마구 뽑히고 각종 약물을 투입받는 통에 그냥 주사 맞는 날이라고 표현한다.

 

  왜 제시카가 주사를 싫어하는지는 모른다. 그냥 평소 행실을 매년 이날에 속죄한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선생이 되기 전부터 알았던 사이였는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이미 둘은 친해졌고, 서로를 마구 까대고 있었다.

 

  ‘찍어서 또 게시판에 붙여야지.’

 

  벌써 제시카를 놀릴 생각에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아로네프는 제시카가 보지 못하게끔 돌아서 천천히 걸었다. 선생이 되고도 자길 대하는 태도가 변하지 않으니 이런 식으로라도 스트레스를 풀어야 했다. 받은 만큼 돌려주자는 게 아로네프의 신조였다. 제시카가 열 받게 하는 만큼 본인도 열 받게 하고 싶었다.

 

  ‘또 찍으면 진짜 죽여야지.’

 

  물론 제시카도 바보는 아니라, 아로네프가 무슨 생각인지 정도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누가 먼저냐고 따질 것 없이 무조건 재가 먼저다. 오빠라고 대접을 받고 싶으면 먼저 자기가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지. 놀릴 거 다 놀려 놓고 대접받고 싶어 하는 게 이기적인 거지 내가 잘못한 건가?

 

  이거 누구한테 들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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