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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104화(그 후의 이야기)
작성일 : 19-11-10 18:56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10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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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후의 이야기

 

 

  “왜 이런 짓을 한 거니?”

 

  삼촌이 물었다. 그러나 두 팔을 붙들린 봄이는 고개를 푹 떨군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봄이를 내려다보고 있다가, 촉촉하게 젖은 눈을 껌벅이며 다시 물었다.

 

  “이제 이런 짓 하지 않기로 삼촌이랑 약속했잖아. 왜 그런 거야?”

 

  여전히 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할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떻게든 삼촌의 얼굴을 올려다보려고 얻어맞아 팅팅 부은 눈꺼풀을 움찔거렸지만, 봄이의 여린 몸은 휘어지고 부러진 철사처럼 자꾸만 힘없이 아래로 축 처지기만 할 뿐이었다.

 

  “다시는 혼자 멋대로 행동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도대체 왜 그런 거야, 왜!”

 

  그가 울부짖었다. 봄이는 끝내 삼촌의 얼굴을 올려다보지 못했지만, 그가 지금 눈물을 흘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그는 위엄 있는 자경단 총수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발광하며 오열하다가, 그만 절망해서 주저앉아버렸다. 봄이의 팔을 붙든 두 남자는 거의 인사불성에 빠지고 만 봄이의 너덜너덜한 몸뚱어리를 끌고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눈은 내리지 않았다. 아직도 숨을 쉴 때마다 피비린내가 풍기는 콧등에 기분 좋은 봄바람이 스쳤다. 차디찬 겨울을 온 몸으로 맞아 앙상하던 나무에서는 깨끗한 잎사귀가 자라나기 시작했고, 터진 모래자루처럼 힘없이 질질 끌려가는 봄이의 다리가 파헤친 땅바닥에는 푸른 새싹이 돋아나 있었다. 걷어차이고 부딪쳐 푸른 멍이 든 눈으로는 이 정도를 바라보는 게 고작이었다. 봄이 오는구나. 진짜로 봄이 왔어........ 그러나 이러한 광경도 점차 흐릿해졌다.

 

  잠시 후 봄이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방금 전과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 또다시 봄이는 빛 한 줄기 없는 어두컴컴한 밀실에 갇혔다.

 

  남자들은 밧줄로 꽁꽁 묶인 봄이를 지저분한 철제 의자에 떠밀어 앉혔다. 곧이어 짧은 흑갈색 머리를 뒤로 빗어넘긴, 구레나룻까지 이어지는 깔끔한 수염이 인상적인 사내가 들어와 봄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가져온 서류를 탁자 위에 올려놓더니 깍지를 낀 두 손을 괴고 봄이를 바라보았다.

 

  “꼬마 아가씨, 잠깐 몇 가지만 확인할게요.”

 

  그는 침을 묻힌 손으로 서류를 펼쳐넘기며 말했다.

 

  “이름 윤 봄. 나이는 16살........ 아니지, 이제 한 해가 지났으니 17살이겠군. 17살이면 예전 세계에서 몇 학년이었지? 고등학교 1학년이던가? 그럼 이제 막 고등학교를 입학할 나이겠네요. 그렇죠?”

 

  사내가 나긋나긋한 말투로 물었다. 봄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 그럼 어디 한 번 봅시다. 피고 윤 양은 지금 몇 가지 혐의를 가지고 있어요. 지금부터 윤 양이 받고 있는 혐의를 읽어줄 테니까 잘 들으세요.”

 

  이 곱상한 젊은 사내는 봄이를 ‘윤 양’이라고 불렀다. 지금까지 들었던 쓰레기 같은 꼬맹이, 가증스런 꼬마 년, 못된 계집애 같은 호칭보다야 몇 배는 기분 좋게 들렸다.

 

  “지정된 규정 외 통제구역 무단 출입, 비인가 살상무기 소지, 대원의 정당한 지시 불복종, 조사대원 상해 및 살인미수, 그리고....... 적대세력 결탁 의심.”

 

  “아니에요.”

 

  처음으로 봄이가 입을 열었다. 너무 오랜만에 입을 열어서인지 입천장에 쩍쩍 달라붙는 마른 침에서 피 맛이 났다.

  “부인한다는 거군요.”

 

  곱상한 사내가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다가와 봄이의 뺨을 때렸다. 봄이가 휘청거리자 곱상한 사내가 팔을 들어 가로막았다.

 

  사내는 봄이를 안쓰럽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최대한 좋게 해결하려는 거예요. 우리도 엄연한 법치주의자이기 때문에 미란다 원칙은 작용하겠지만, 아무리 부인해도 윤 양이 가진 혐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 말은 지금 윤 양이 여기서 말하는 내용이 재판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는 의미죠. 그래도 부인하는 건가요?”

 

  “아니에요. 난........ 아니에요.”

 

  봄이가 중얼거리듯 내뱉었다. 곱상한 사내는 그런 봄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펜을 휘갈겨 서류에 뭐라고 적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윤 양도 한 번 생각해 봐요. 이제 고작 16살, 아니 17살밖에 안 된 외팔이 소녀가 통제구역의 삼엄한 경계를 뚫고 무단 침입해서 조사대원 한 명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이대고는 불도저를 몰라고 협박을 한 거죠. 그러다 결국 대원에게 중상을 입히고,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는 대원들의 지시도 듣지 않다가 마침내는 포위당해서 붙잡히게 되었는데, 윤 양의 진술에 따르면 은색 펜던트 한 개를 찾기 위해서 벌인 짓이었다고 했어요. 맞나요?”

 

  봄이는 상처투성이 얼굴을 푹 떨어뜨렸다.

 

  “내가 비록 법무장교를 맡게 된 지 얼마 안 됐다고는 해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을 할 수가 없는 진술 내용이에요. 고작 펜던트 하나를 찾으려고 위험한 식인종 저택 잔해로 들어갔다니. 더구나 허가되지 않은 인원은 곧바로 즉결처분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을 정도로 A급 경계태세 상황이었는데도 말이지요. 도대체 그 펜던트에........ 가만있자.”

 

  사내는 코트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무언가 꺼냈다.

 

  “도대체 이 펜던트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죠?”

 

  “이리 내놔요! 당신이........”

 

  봄이가 난데없이 벌떡 일어나 사내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뒤에 서 있던 남자 둘이 곧바로 개입해 봄이의 얼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그리고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리는 봄이를 다시 강제로 꽉 눌러앉혔다.

 

  “크흑, 읏........”

 

  사내는 짓눌린 채로 자신을 노려보는 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는 깨진 펜던트를 열고는 할머니처럼 얼굴을 찡그리고 펜던트를 살폈다.

 

  “음, 사진이네요. 가족 사진.”

 

  그는 여전히 찡그린 얼굴로 봄이와 펜던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윤 양은 지금 이 펜던트....... 아니지, 정확하게는 이 사진 하나 때문에 이런 짓을 벌였다는 건데, 윤 양이 섣불리 저지른 그 행동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날 뻔했는지 알고 있나요? 조사대원 한 명이 지금 의식이 없어요. 여기서 자칫해서 그 대원이 죽기라도 하면 지금 윤 양의 혐의에 살인 혐의가 추가되는 거라고요.”

 

  “당신들이 죽였어. 당신들이 죽이려고 했던 거잖아!”

 

  봄이가 악을 토했다. 사내는 등받이 의자에 드러눕듯이 기대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뇨, 그렇지 않죠. 즉결처분 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 허가되지 않은 인원을 사살하기 위해 사격을 가하는 것은 규정상 정당하고, 그로 인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된 희생자는....... 규정대로라면 순직이 되죠. 지금 이 자리에서는 그곳에 있었던 허가되지 않은 인원, 바로 윤 양에 대해서 책임을 묻고 있는 거고요.”

 

  사내가 뒤로 팔을 젖히자, 뒤에 있던 남자가 담배를 건네주었다. 사내가 담배를 입에 물자 다른 남자가 다가와 불을 붙여주었다.

 

  사내가 착잡하다는 듯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아무튼, 윤 양이 계속해서 모든 혐의를 부인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받아낸 진술들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도출해 낸 결과들을 그대로 재판부에 보고할 수밖에 없어요. 그렇게 된다면 내일 있을 재판에서 불리해지는 건........ 윤 양이겠죠.”

 

  사내가 담배를 끼운 손으로 봄이를 가리켰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는 게 좋아요. 자경단 일원이 아닌데도 어떻게 자경단 캠프에서 머물 수 있었는지, 왜 굳이 그 늦은 시간에 엄격하게 통제된 위험지역에까지 들어가려고 한 건지, 그리고 어떻게 그 악랄한 식인종들에게 잡혔다가 살아나올 수 있었던 건지. 사실 윤 양이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우린 윤 양이 이중첩자라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요.”

 

  “몇 번이고 말했어요........ 난 첩자도 아니고, 그저 펜던트를 찾기 위해서였다고.”

 

  참다 못한 사내가 탁자를 쾅 내리치며 소리쳤다.

 

  “펜던트 얘긴 이제 집어치워! 고작 이 사진 쪼가리 하나 때문에 식인종 저택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만약 네가 그곳에서 살아나왔다는 게 정말이라면, 녀석들이 얼마나 지독하고 잔혹한 놈들인지 알겠지! 기본적으로 녀석들은 포로를 잡지 않지만, 해병대 출신의 건장한 조사대원들조차도 녀석들에게 붙잡혔다가 가까스로 살아나오고 나면 그야말로 반병신이 돼. 아직까지 정신병이나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대원들도 많다고. 그런데 너 같은 꼬맹이가, 너 같은 젖비린내 나는 계집애가........ 식인종 첩자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그곳에서 제 정신으로 멀쩡하게 걸어나올 수 있었던 거야?”

 

  봄이는 미친 사람처럼 깔깔 웃었다. 제 정신으로? 멀쩡하게 걸어나와?

 

  “지랄을 하세요, 장교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빡 하는 소리와 함께 또다시 봄이의 얼굴이 거세게 젖혀졌다. 이제 정신이 혼미해지려고 했다. 힘없이 고개를 축 늘어뜨린 봄이에게 사내가 말을 이었다.

 

  “게다가 죽을 뻔한 고비를 가까스로 넘기고 구출되었는데, 또 다시 그곳으로 돌아갔다고? 이건 네가 정말로 첩자이거나 놈들 중 하나라고밖에는 추측이 안 돼. 저택 잔해를 조사해본 결과 우리 대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여성의 시신들뿐이었어. 그리고 녀석들이 자신들과 같은 여자나 아이들을 데려가 일원으로 삼는다는 건 이미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지. 너 역시도 처음에는 놈들과 한패가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놈들과 함께 있으면서 세뇌당했거나, 살기 위해 식인종 규율을 따르다 보니 너도 모르는 사이에 놈들과 동화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그렇지 않나?”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유하고 나긋나긋하게 봄이를 대했던 사내는 이제 마치 흉악범을 취조하는 형사처럼 날카로워진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원래부터 이럴 목적이었겠지만.

 

  봄이는 더 이상 고개를 들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봄이는 뭐라고 말이라도 내뱉기 위해 볼을 부풀리고 침을 삼켰지만, 부르트고 찢어진 입술이 말을 듣지 않았다. 봄이는 다시 한 번 피를 삼킨 뒤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내 잘못이 아니에요.”

 

  사내는 조용히 봄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는 마치 기력이 다해 길바닥에 뒤집어져 천천히 햇빛에 말라 죽어가는 바퀴벌레를 바라보듯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끽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할 이야기는 없겠군. 계집애를 끌고 가서 가둬.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마음껏 가지고 놀아도 좋다. 다만 내일 재판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뜨리지는 말고.”

 

  뒤에 있던 남자 둘이 봄이의 양 어깨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봄이는 피가 흘러내리는 이를 악물고 끌려가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지칠 대로 지친 외팔이 소녀의 힘으로는 터무니없이 역부족이었다. 사내가 돌아서서 담배연기를 뿜으며 덧붙였다.

 

  “명심해. 우리는 엄연히 법치주의자이고 인간이야. 최대한 인간답게 포로를 대해야만 해. 알아들었지? 인간답게 말이야.”

 

  끌려가던 봄이는 사내의 그 한 마디에 혹시나 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봄이의 그 희망이 뇌리에 녹아들기도 전에, 무언가 차갑고 딱딱한 것이 봄이의 관자놀이를 강타했다. 봄이는 그만 정신을 잃었다.

 

  그들은 그 때만큼은 더할 나위 없이 인간다웠다.

 

 * * *

 

  그 후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실신했다가 깨어나는 것을 반복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제 눈을 뜨던지간에 보이는 것은 똑같았다. 좁은 밀실 정중앙에서 유일하게 빛을 내뿜는 낡은 전구 하나, 바로 코앞에서 봄이의 턱을 붙잡고 상태를 살피는, 미간에 날카로운 주름을 세우고 화가 난 듯한 얼굴을 한 남자.

 

  봄이가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저 사내들이 던지는 질문에 맹목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면, 봄이는 곧바로 이 밀실에서 나갈 수 있었다. 자경단을 배신하고 적대세력과 결탁하여 그들과 완전히 동화되었으며, 식인종들과 함께 지내면서 식인 풍습을 배웠고 그 결과로 실종된 조사대원들을 산 채로 혹은 몽둥이로 때려죽인 다음 귀중한 동물성 단백질원으로 섭취한 적이 있다고 인정하기만 하면 되었다. 간단한 일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봄이는 끝까지 그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만족스러운 대답이 나오지 않을 때마다 봄이의 얼굴을 때리고 배를 걷어찼다. 그 때문에 봄이는 이빨이 부러지고 수도 없이 토했다. 피를 얼마나 흘렸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고, 계속되는 고통 속에서 흐르는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상처와 눈물로 범벅이 된 봄이의 머리채를 움켜잡고 욕설을 퍼붓다가 땅바닥이나 벽에 처박고는 했다.

 

  차마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울부짖다가 탈진해서 실신하고 깨어나고를 셀 수도 없이 반복한 탓에 봄이는 자신이 당한 일들을 모두 기억하지도 못했다. 더 다양하고 많은 고통스러운 일들을 당했을지도 몰랐지만, 봄이는 굳이 기억해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들이 봄이의 온 몸 구석구석을 부수고 망가뜨렸지만, 깁스를 한 오른팔만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저 다리가 부러진 가엾은 비둘기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남은 일말의 동정 같은 것일까?

 

  봄이는 초라하게 쓰러진 뒤에도 자비 없이 날아오는 발길질에 걷어차이면서도, 그저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눈을 뽑아가든, 불에 달군 칼로 찌르든, 남은 한 쪽 팔마저 부러뜨리든 상관없으니까 그저 빨리 끝나기만 했으면. 이 고통 속에서 조금이라도 빨리 벗어날 수만 있다면 그 끝이 빛이든, 어둠이든 상관없으니까 제발.........

 

  결국 봄이는 또다시 실신해버렸다.

 

  그 이후로는 오랫동안 깨어나지 못했다.

 

 * * *

 

  다시 봄이는 눈을 떴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늘 처음으로 보이던 빛과 남자의 화난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코뼈가 부러졌는지 감각이 없었지만 냄새는 맡을 수 있었다. 하수도에 있었을 때 풍겼던 시궁쥐의 비릿한 냄새, 녹슨 쇠 냄새(아니, 아마도 이것은 피 냄새일 것이다-), 그리고 손가락이나 다리에 어렴풋하게 전해지는, 무언가 간질이는 감각. 봄이는 엎어진 채 가까스로 한쪽 눈을 뜨고 올려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 하나조차 움직이지 않았고, 목덜미에는 벽돌 같은 추를 올려놓은 것만 같았다. 봄이는 자신의 정신과 육체가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착각했다. 일어서야 한다는 결심과는 달리 무거운 몸뚱어리는 말을 듣지 않았고, 그로 인한 피로는 봄이의 의지와 정신,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희망조차도 서서히 좀먹어갔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놈들의 취조 결과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모르는데 잠들 수는 없었다. 교수형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몇 시간? 몇 분? 아니면 몇 초?

 

  그러나 이미 몸이 한계였던 봄이는 곧 엎어진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 몇 시간 동안만큼은 봄이가 지금껏 살아오며 보냈던 그 어떤 시간보다도 달콤했다. 꿈에서 먹었던 솜사탕보다도, 엄마의 손을 잡았던 기억이 떠올랐을 때의 그 순간보다도.

 

  잠시나마 꿀맛 같은 잠에 빠져들었던 봄이는 주변에서 나는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누군가가 봄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봄이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려고 했지만 콘크리트 철근 같은 몸은 요지부동이었다. 당황한 봄이가 외쳤다.

 

  “거, 거기 누구예요?”

 

  그마저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비명을 지르다가 목이 쉰 모양이었다. 봄이는 꼼짝도 하지 않는 몸을 포기하고 눈알이 뒤집힐 정도로 눈동자만 휘저었다.

 

  막연한 공포에 질린 봄이의 눈망울에서 또다시 눈물이 흘러내렸다.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몸서리쳐야 할 고통이 남아있었던 건가.

 

  “잠깐, 멈춰요. 더 이상은.......... 이제 그만해줘요. 이만큼 했으면 됐잖아요........ 네? 제발 부탁이니까, 때리지만 않는다면 날 어떻게 해도 좋으니까......... 이제, 이제 제발 그만해요. 몸이 움직이지 않아요. 다리도 부러진 것 같아. 아저씨, 아저씨........ 도와줘요. 어디 있어요........ 날 혼자 두지 말아요.”

 

  이윽고 어둠이 손을 뻗어 봄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싫어, 싫어! 차라리 죽여! 더 이상 날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빨리 죽이란 말이야! 어째서 날 죽이지 않는 거야? 그래, 나는 식인종이고 첩자야! 날 살려두면 너희들을 전부 다 죽여버리겠어! 죽여버릴 거라고! 그러니까 제발........ 날 죽여줘. 죽여달란 말이야.”

 

  봄이는 차디찬 땅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꼈다. 어둠은 흠칫하니 봄이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가, 곧 다시 봄이의 몸을 더듬었다. 어둠이 말했다.

 

  “이봐요, 진정해요. 난 아가씨를 해칠 생각이 없소.”

 

  봄이는 울음을 멈췄다. 이제야 목이 움직였다. 봄이는 엎어진 채로 힘겹게 목만 들어 눈앞의 어둠을 올려다보았다.

  “저런, 꽤 호되게 당한 모양이군. 일어설 수 있겠소? 목소리를 들으니 어린 아가씨 같은데........ 못 일어서겠다고? 그럼 조금만 가만히 계시오. 도와줄 테니까.”

 

  어둠 속에서 털북숭이 팔뚝이 봄이를 부축해 일으켰다. 봄이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온통 후끈거리는 몸을 어떻게든 움직여보려고 끙끙댔다. 봄이는 일어서려다가 철창에 어깨를 부딪치기도 하고 다리에 힘이 빠져 엉덩방아를 찧기도 했지만, 어둠의 도움으로 봄이는 가까스로 힘겹게 철창에 기대어 앉을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죠? 누군데 날........”

 

  “그런 건 피차 알 것 없소. 나도 죄수니까. 당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오.”

 

  어둠의 목소리는 부드러웠고, 봄이를 데려온 자경단 장교가 처음 봄이를 대할 때처럼 나긋나긋했다. 다만 그와는 달리 어둠의 목소리에서는 가식이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도와줄 수 없다고요........”

 

  “그렇소.”

 

  봄이는 그가 구해주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자 숨이 턱하고 막혔다.

 

  “그러면, 저기, 부탁 하나만 들어줄 수 있을까요?”

 

  “내가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라면 들어주겠소.”

 

  “날 죽여주세요. 내 목을 조르든, 녹슨 못을 내 목에 꽂아넣든 상관없으니까, 최대한 고통스럽지 않게 단번에 말이에요.”

 

  어둠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안됐지만 그럴 수는 없소.”

 

  “어째서죠? 왜 날 죽일 수 없다는 거죠?”

 

  어둠이 헛기침을 하고는 봄이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다른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복잡한 결정과 대가가 필요하니까.”

 

  봄이는 마른 숨을 들이마셨다. 이빨 몇 개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고, 가까스로 들이마신 호흡에는 달콤한 공기보다 쇠맛이 나는 피가 더 많이 섞여있었다. 그 때문인지 기침이 나왔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은 왜 여기 갇혀있는 거죠? 당신도 뭔가 일을 저질렀으니까 여기에 갇힌 게 아닌가요?”

 

  어둠은 고민이라도 하듯 잠깐 동안 목소리를 늘어뜨리다 대답했다.

 

  “.........놈들을 쏴 죽였지. 아주 많이.”

 

  “그랬겠죠. 역시 당신도 사람을 죽여봤군요. 그렇다면 분명히 당신과는 상관없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살인을 해야만 했을 순간도 있었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다른 방법이 없었소.”

 

  “지금 나라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처럼 보여요? 그렇게 아무 의미없는 살인을 하고 났을 때. 그 순간의 감정을 기억하나요? 만약 기억한다면 어땠죠? 난 말이죠, 처음으로 다른 사람을 죽였던 그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해요. 처음엔 자기혐오에 시달렸어요. 미쳐버릴 정도로 머릿속을 파고드는 죄책감과 자괴감 때문에 며칠 동안이나 잠을 설치고, 분명히 아무도 없는데도 누군가가 자꾸만 귀에다 대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듣기도 했죠. 그런데 재미있는 게 뭔지 알아요? 처음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솟구쳤던 이런 감정들이, 살인을 거듭하면 거듭할수록 점점 무감각해지기 시작하더군요. 아직까지는 그런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이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 두려워요. 이런 내가, 머지않아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해버린 또 다른 나와 마주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도..........”

 

  어둠은 대답하지 않았다. 봄이는 힘겹게 어둠을 더듬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지금이라면 아직 늦지 않았어요. 당신이라면 이미 살인에 무감각할 테고, 어떻게 하면 고통스럽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죠. 내가 인간이 아닌 무언가로 변하기 전에 당신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부탁이에요. 여기서 당신이 날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난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될 테고 결국엔 죽은 목숨이에요. 그런 치졸하고 굴욕적인 죽음을 맞을 바에는, 차라리 지금 여기서 당신의 손에 죽고 싶어요. 그래도, 적어도 당신의 손은.......... 따뜻하니까.”

 

  봄이는 어둠의 손을 마치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감쌌다. 어둠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방금 그 말, 정말로 감당할 수 있겠소?”

 

  “물론이죠. 내가 스스로 내린 결정인걸요. 내가 택한 운명에 후회는 없어요. 결국 난 하나밖에 없는 소망조차 끝내 이루지 못한 패배자일 뿐이고, 그런 녀석에게 어울리는 건 이런 비참한 말로밖엔 없겠죠.”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어둠이 봄이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봄이가 나지막이 말했다.

 

  “난 할 수 있는 모든 걸 했어요. 이제.......... 조금만 쉬게 해주세요.”

 

  봄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 속에서 억센 두 손이 튀어나와 봄이의 목을 움켜잡았다.

 

 

 
작가의 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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