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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더럽(The Love)
작가 : 지놓
작품등록일 : 2019.9.3


"나, 다른 사람 같이 좋아해도 돼?"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관계와 사랑
그것의 시작,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하여.

#대학생 #캠퍼스물 #악의꽃 #섹슈얼리티 #조별과제 #폴리아모리

 
6. 가을이여, 그대 열매가 봄에 피는 시시한 꽃보다 나는 좋다(12)
작성일 : 19-11-10 17:34     조회 : 261     추천 : 0     분량 : 8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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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게를 나온 우리는 근방에 있는 한 아이스크림 가게로 들어갔다. 해가 꼭 가야한다고 해서 따라오긴 했는데 비싸기만 하고 별달리 맛은 없었다.

 

  “그냥 바닐라 맛인데?”

 

  “후잉…….”

 

  “여기도 추천받은 거야?”

 

  “응…….”

 

  “그래? 같은 사람한테?”

 

  장이 안 좋은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해 역시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이스크림을 굉장히 좋아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매번 빼놓지 않고 아이스크림을 사먹곤 했지만 대개 편의점이나 동네 슈퍼마켓에 들러 막대 아이스크림을 사먹거나 어쩌다 콘을 고르는 정도였지, 따로 유명한 가게를 찾아다니거나 하진 않았었다. 그러니 이 역시도 의외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맛집코스 같은 거 추천받아 온 거야? 그리 신뢰할만한 사람이 아닌가봐?”

 

  “이상하다…… 대박이라 그랬는데.”

 

  그러곤 내게 계속해서 “별로지? 막 맛있거나 하진 않지?” 하고 묻는 것이었다. 마치 내 눈치라도 살피는 듯이.

 

  “뭐, 그래도 맛이 아주 없진 않아.”

 

  “사진에서도 완전 맛있게 보였고…….”

 

  “왜 이래 또. 맛있어, 나쁘지 않아. 괜찮다니까?”

 

  해가 갑작스레 실망감에 젖어드는 것 같아 놀라 수습해 보려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더욱 감정적인 것 같았다. 좋을 땐 더욱 환하게 웃고, 실망스러울 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찡그리는.

 

  “이상하다 너.”

 

  “뭐가.”

 

  “왜…… 뭔가 좀 불안해보이지?”

 

  “……뭐가?”

 

  “아니, 안 어울리게 내 입맛 생각해주는 것 같아서. 무슨 죄 지은 것도 아니고…….”

 

  그러고 말을 내뱉는 순간, 의도치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아, 얘가 지금 나한테 미안해하고 있구나. 말하지 못해 뜸 들이고 있는 중이었구나.

 

  “아니 그냥…… 기대했는데 맛이 없으니까…….”

 

  고개 숙인 해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착 하고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오늘 어쩌면…… 줄곧 기다려왔던 대답을 듣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아이스크림 가게를 나와선 쭉 일자로 이어진 거리를 걸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둘 다 아무런 말이 없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분위기 때문인지 손에 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열심히 핥아대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하게 몸이 제약돼버린 것 같았다.

 

  “다음은 뭐 먹어?”

 

  참다못한 나는 이 고문과도 같은 침묵을 깨야겠단 생각에 최대한 밝음을 짜내어 물었다. 그러자 해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너 더 먹을 수 있어?”

 

  “디저트 정도는? 이게 조금 아쉽긴 하니까.”

 

  그러고 손에 쥔 아이스크림을 한 차례 흔들어 보이자 해의 입가가 빙그레 곡선을 그렸다.

 

  “그럼 케이크 먹으러 갈래? 사실 아이스크림이랑 둘 중에 고민했었거든. 너 많이 안 먹을 것 같아서 아이스크림 먹으러 갔던 건데…… 요 근처긴 하거든?”

 

  “그래? 그럼 가자 거기.”

 

  솔직히 케이크란 말을 듣자마자 아차 싶긴 했지만 저 말똥말똥 빛나는 눈을 두고 어떻게 거절을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부디 그곳 화장실이 처음의 가게처럼 깨끗하길 바랐을 뿐이다.

 

  “……근데 우리 저녁도 먹을 거 아니야?”

 

  해가 주문해온 케이크를 보고 있자니 숨이 턱 막혀왔다. 유명한 것들 맛만 보자더니 두 개의 접시에다 종류별로 가득 채워온 것이었다. 칼로리로만 따져도 좀 전 식사만큼은 될 것 같았다.

 

  “다 맛있대. 자주 올 것 같지도 않고 온 김에 먹어야 될 것 같아서. 먹어봐 얼른.”

 

  해는 녹차 맛이 날 것으로 짐작되는 초록, 노랑, 하양 삼색의 케이크와 까만 쿠키가 잔뜩 올라가 있는 연분홍빛 케이크, 그리고 맛을 전혀 짐작키 어려운 무지개 색의 케이크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

 

  나는 비교적 덜 부담스러워 보이는 녹차 베이스의 삼색 케이크로 포크를 뻗었다. 배도 부른데다 평소에도 케이크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어서 아주 조금만 맛을 볼 생각이었다.

 

  “어?”

 

  놀랍게도 케이크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산뜻하고 달콤했다. 또한 부드럽고 촉촉했다. 설탕 범벅의 역하고 질리는 단맛이 아니라(물론 설탕이 듬뿍 담겨있을 순 있겠지만) 순한데도 은은한 중독성이 있었다.

 

  “왜? 왜? 맛있어?”

 

  “괜찮은데? 많이 안 달아서. 아니 달긴 한데 순한 느낌이야.”

 

  배가 찼다고 생각했었는데 신기하게도 쑥쑥 잘 들어갔다. 내친김에 옆에 있던 연분홍빛 케이크에도 손을 대봤다.

 

  “얘는 좀 많이 달다.”

 

  해도 나를 따라 한입 가득 먹어보더니,

 

  “난 다 좋은데?”

 

  배시시 웃고는 언제 밥을 먹었냐는 듯 거침없이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너 그러다 또 배 아파.”

 

  “괜찮아, 또 빼면 되지.”

 

  “……빼긴 뭘 빼…… 너 말을 진짜 쫌…….”

 

  내가 타박하자 갑작스레 입을 부르르 떨며 ‘붑붑’ 하고 방귀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황당해 말을 잊지 못하다가도, 보다보니 픽 웃음이 났다. 솔직히 좀 귀여웠다.

 

  케이크가 들어갈수록, 또 시간이 지날수록 해는 그 달달함에 물들어 가는 듯 보였다. 두 눈망울엔 행복감이 그득해졌고, 입 주위에선 달콤함이 새나오는 듯했다. 말투는 한없이 부드러워졌으며,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반달모양의 눈웃음이 생겨났다. 그런 해를 보고 있자니 뭐랄까…… 기분이 묘했다. 대화를 하는 게 즐겁고, 같이 있어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지독할 정도의 무료함을 느꼈다.

 

  ‘내가 여기서 뭐하는 거지?’

 

  해가 하는 말에 답을 하고, 맞장구를 치고, 함께 웃고 하는 일들이 내가 아닌 겉으로 꾸며낸 가면이 대신 하는 것만 같았다. 진실한 의식은 내 안 깊숙한 곳으로 점점 침잠해 들어가선, 어느 한 구석진 곳에 콱 틀어박혀 가면이 벌이는 일들을 가만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럴 줄 알았어. 너 왜 이렇게 안 먹어. 빨리 좀 먹어.”

 

  해가 가면에게 연분홍 빛깔의 케이크를 권했다.

 

  ‘안 먹는다고 해. 저리 치워버려.’

 

  나는 가면에게 소리쳤지만 가면은 듣질 않았다. 오히려 해를 향해 한 차례 웃어주곤 묵묵히 케이크를 집어 먹는 것이었다. 가면이 멋대로 한 행동이었음에도 속의 갑갑함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이것도 먹어봐, 이것도.”

 

  가면의 반응에 기분이 좋아진 듯 해는 케이크 접시를 통째로 내 쪽에다 밀었다.

 

  ‘배부르다고 하라고. 더는 먹고 싶지 않다고, 너나 먹으라고 말하란 말이야!’

 

  그러나 가면은 내가 성내는 것 따윌 신경 쓰기보다는 해의 웃음이 끊이지 않길 더 바라는 것 같았다. 접시 위에 있는 것들을 꾸역꾸역 입으로 옮겨 나르는데, 달짝지근한 딸기시럽 향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평소엔 잘 먹지도 않더니 오늘따라 완전 잘 먹네? 더 주문해올까?”

 

  해는 포크마저 내려놓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흐뭇하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였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나 달달한 것이었기에, 나는 가면의 다음 행동도 쉬이 예측해 볼 수 있었다. 저 미소를 계속 유지시키기 위해서라도 배 터져라 먹어대겠지. 그런데,

 

  “너 먹어. 난 이제 됐으니까.”

 

  갑작스레 가면답지 않은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심지어 냉랭하다고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미소를 띠며 바라보던 해도 조금 놀란 듯했다. 이제야 내 말을 듣는 걸까? 나는 숨죽인 채 가면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배불러? 하긴 많이 먹긴 했다 그치? 그럼 조금 쉬었다 먹을까? 그게 낫겠지?”

 

  해가 조금 무안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을 하자,

 

  “됐어. 이제 많이 먹었는데 뭘. 너 먹을 거면 먹고 아니면 포장해서 나가든지 하자.”

 

  그러곤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는 것이었다. 해도 놀랐고 나도 놀랐다.

 

  ‘아니, 그렇게까지 하라곤 안했다고.’

 

  해는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었다.

 

  “미안, 너 이런 거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너무 많이 시켰지. 너 배 아픈 거 아니야? 그럼 그냥 더 안 먹더라도 조금만 더 앉아있다…….”

 

  “너 오늘 이상하다. 왜 이렇게 나 챙겨주려는 거야? 진짜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나는 당황하고야 말았다. 가면이 제멋대로 폭주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해를 보며 쏘아붙이듯 말하는데 전혀 통제가 되질 않았다.

 

  “아니…… 난 그냥…….”

 

  “일단 일어나자. 나 더부룩해서 이제 케이크는 쳐다보지도 못 하겠어.”

 

  “…….”

 

  해의 표정이 점점 굳어져 가는 걸 의식했음에도 가면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안 나갈 거야?”

 

  “……왜 갑자기 화를 내는 거야…….”

 

  해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전에 없이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이에 나는 점점 더 걱정이 되기 시작했는데, 이 상황의 끝이 전혀 짐작되질 않았기 때문이다. 해와는 장난 식으로 투닥거린 적은 있었어도 진심으로 얼굴을 붉히며 다퉜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처음으로 그 선을 넘어버린 것이었다. 가면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했는지 뻣뻣하던 자세는 어디가고 어느새 떨리는 눈으로 해를 응시하고 있었다. 해는 시나브로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흑.”

 

  해는 말없이 손등으로 두 눈가를 훔쳤다. 좀 전까지 그곳에 서려있던 달콤함이 눈물에 녹아 스르르 사라져 내렸다.

 

  나는 어떻게든 해보라고 가면을 재촉했으나 이상하게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뭐야, 설마 도망친 거야?’

 

  이제껏 내 행세를 하던 가면이 갑작스레 사라져버렸던 까닭에 나라도 급히 수습에 나서야했다. 억울한 심정이었지만 일단은 해를 달래는 게 급선무였다.

 

  “왜 울어…… 또.”

 

  해는 말없이 킁킁대며 울음을 참는가 싶더니,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서러움이 복받친 듯 목 놓아 통곡하기 시작했다.

 

  “어흑…… 어헝엉…….”

 

  “울지마…… 미안, 미안. 내가 갑자기 정신이 나갔었나봐. 미안, 울지마.”

 

  달랠수록 우는 소리가 더욱 커져갔다. 주위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들렸다.

 

  “케이크…… 줘도 뭐라 하고…… 배부르면…… 흑…… 안 먹으면 되지…… 흑…….”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미안. 다 먹을게, 먹을 수 있어.”

 

  포크로 케이크를 집어 올리려는 순간,

 

  “먹지마!”

 

  떽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닌가. 어찌나 놀랐던지 하마터면 포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너 하나도 안 줄 거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노려보는 모습이 퍽 살벌했다. 나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눈을 내리깔 수밖에 없었다.

 

  얼마쯤 지났을까, 한동안 말없이 훌쩍거리던 해가 다시금 케이크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내가 슬쩍 고갤 들어 올리자 눈을 부라리면서,

 

  “안 줄 거야!”

 

  “안 먹어, 안 먹을게…….”

 

  “맛있기만 한데…… 짜증나…….”

 

  혼잣말로 계속 뭐라 뭐라 웅얼대는 것이었다. 재수가 없다느니, 진짜 싫다느니…….

 

  그러는 와중에도 해의 케이크를 향한 포크 놀림은 계속해서 빨라져갔다.

 

  “……화 많이 났어?”

 

  해 역시 스트레스를 받거나 화가 났을 때 습관적으로 폭식을 하곤 했다. 얼마 들어가지 않게 생겨가지고선 무지하게 먹어대는데, 한 번 시작했다 하면 아무리 말려도 소용이 없었다. 이번이 딱 그 꼴이었다.

 

  “……그러다 배탈 나겠다.”

 

  “뭔 상관이래.”

 

  그나마 얼굴이라도 봐주고 대꾸라도 해주니 다행이다 싶었다. 조금 안심이 되자 그제야 해의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그렁그렁한 눈물에, 툭 튀어나온 입은 연신 위아래로 오물오물 움직이고 있고…… 몸집만 큰 애기 같았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야 이런 애한테…….’

 

  문득 자괴감이 거세게 일었다.

 

  그즈음 케이크에만 집중하고 있던 해가 별안간 벌떡 고개를 쳐올렸다. 계속 염탐하듯 몰래몰래 힐끔거리던 중이었는지라, 그러고 딱 눈이 마주치자마자 나는 그만 놀라 얼어버리고 말았다.

 

  “이거 너 먹어.”

 

  “……어?”

 

  해가 가리킨 것은 그제까지 온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던 마지막 남은 조각 케이크였다. 무지개색의 그것이었다.

 

  “너 먹으라고.”

 

  “……안 준다면서?”

 

  “……흥.”

 

  고개를 홱 돌리는가 싶더니 눈길은 여전히 내게 머물러있었다. 저 고집 센 해가 말을 바꾸는 건 또 처음 있는 일이어서,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해를 보았다.

 

  “진짜 나 먹어? 이건 맛없는 거래? 추천한 사람이?”

 

  아니면 배가 부른데 남기긴 아깝고 해서 제일 별로인 것을 내민 걸지도 모른다.

 

  내 말에 해는 씩씩대며 “아니거든! 그게 여기서 제일 유명한 거야!” 하고 소리쳤다.

 

  “근데 왜 나를 줘? 너 안 먹고.”

 

  “……어쨌든 너랑 같이 와 먹으려고 한 건데…… 너는 거의 먹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거라도 먹어야지…….”

 

  그러곤 뭔가 부끄러운 듯 몸을 배배꼬는 것이었다. 그 순간 요상한 기운이 나를 휘감아 오는 게 느껴졌다. 어, 이거 뭐지?

 

  케이크는 분명 맛있긴 했다. 빛깔처럼 온통 뒤죽박죽의 이도저도 아닌 맛이 날 줄 알았더니 빵들 사이에 촘촘히 발라져있던 생크림이 제법 부드럽고 달콤한 맛을 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게 중요한 것은 케이크의 화려한 색도, 부드러운 맛도 아니었다.

 

  “……맛있어?”

 

  “괜찮네. 너도 먹어봐.”

 

  “조금 배부르긴 한데…….”

 

  조심스레 포크를 드는 해에게 나는 눈을 맞추었다.

 

  “친구가 케이크 추천해준 거야? 친구들?”

 

  “응? ……응.”

 

  “이렇게나 많이?”

 

  “그냥…… 유명한 것들 몇 개랑 맛있어 보이는 것들…….”

 

  “네가 추천해 달라고 했어?”

 

  “응? 아니 뭐…… 그냥.”

 

  “그냥?”

 

  나는 기묘한 설렘이 내 어깻죽지에서 아른거리는 걸 느꼈다. 그것이 계속해서 나를 떠밀었다.

 

  “나랑 같이 오려고?”

 

  “…….”

 

  어라, 이제는 시선을 회피하기까지?

 

  “친구들이 나 알아?”

 

  “알긴 알지…….”

 

  “네가 네 친구들한테 나랑 같이 와서 먹을 거라고 추천해 달라고 한 거야?”

 

  이건 너무 직접적이었나? 살짝 후회가 되긴 했지만 내친김이었다. 해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왜?”

 

  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물었다.

 

  “왜?”

 

  “음…… 우리 이제 나가서 딴 거 먹으러 갈까?”

 

  “갑자기 말을 돌려.”

 

  “남은 건 싸달라고 한다?”

 

  “뭐래 남은 것도 없구먼. 너 자꾸 딴 말 할 거야?”

 

  나의 거듭된 재촉에도 해는 아무 말 없이 잠자코 있을 뿐이었다. 나는 조금 답답해졌다.

 

  “아니, 아예 작정하고 동문서답 하는 건 또 뭐야. 새로 나온 대화법이야?”

 

  “……뭐가.”

 

  “나랑 이 동네 온 이유가 뭐야.”

 

  “그냥 온 거라니까?”

 

  “추천받아 온 거라며.”

 

  “……먹고 싶은 거 생겨서 온 거야.”

 

  “나랑 같이 먹고 싶은 거?”

 

  “…….”

 

  다 왔어, 다 왔다고! 내 주위를 떠돌던 설렘이 그렇게 외치는 것만 같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너 친구들한테 뭐라고 하고 추천받은 거야? 그것만 말해 줘. 뭐라고 하고 나왔어?”

 

  “……얘기 안 할래.”

 

  “오늘도? 오늘은 얘기 한다면서. 네가 저번에 그랬잖아. 오늘이라고.”

 

  “…….”

 

  내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깨달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주위의 시선 따위 살펴서 무엇 하랴. 중요한 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너 나한테 할 말 있지.”

 

  “……뭐.”

 

  “없어?”

 

  “…….”

 

  해의 입술이 옴짝달싹 하고 있었다. 긴장된 마음으로 지켜보았으나 끝끝내 말은 나오질 않았다. 목구멍 언저리에서 막힌 듯싶었다. 어쩌면 너무 성급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의 서두름이 해를 물러나게 만들었을지도. 어깻죽지를 부유하던 설렘의 압력이 너무나도 강했던 탓일까, 오히려 어깨가 축 처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침묵이 장내를 휩쓸었다. 그때였다.

 

  “……들한테…….”

 

  “응?”

 

  “……친구들한테…….”

 

  “…….”

 

  “……나 오늘…… 남자…… 친구 생길지도 모른다고 했어…….”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오른 해가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여기저기서 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다. 달아오른 몸을, 그리고 기분을 선선히 달래주는 가을바람이었다.

 

  우리는 이번에도 말없이 걸었지만 아까와는 조금 달랐다. 서먹한 침묵 대신 향긋한 풋풋함이 뒤따르는 느낌이었다. 그냥 걷는데도 발맞추어 걷는 것 같았다. 문득문득 스치는 팔등의 촉감이 좋았다. 화창한 늦은 오후의 거리가, 불어오는 가을바람이, 피부로 스며드는 산뜻함이 좋았다.

 

  “가을에 시작하는 연인들은 봄의 기운을 받지 못해서 그만큼 설렘이 적대.”

 

  “……그래?”

 

  “대신 그만큼의 편안함과 안정감이 자리 잡을 수 있다나?”

 

  신빙성이 그리 높은 것 같지는 않았다. 안 그래도 표정 조절 때문에 힘겨웠던 것이다. 설렘이 적다고? 자꾸만 새나가는 웃음을 참으려다보니 볼 근육이 파르르 떨릴 지경이었다.

 

  “넌 아쉽지 않아?” “뭐가? 설렘이 적을 수 있다는 거?”

 

  해가 가만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피식 웃어주었다.

 

  “그건 그냥 계절에 빗대어 한 번 해보는 말일 뿐인데 뭐. 아무 의미도 없는 걸. 그리고 사실 난…… 편안함도 그리 싫다고는 생각 안 해. 설렘도 언젠가는 수그러들게 마련이고 편안함이 그 자릴 대신하게 될 거잖아. 금방 사라지는 것보다야 오래 가는 게 더 좋으니까.”

 

  내 말에 해가 빙그레 웃었다.

 

  “나도 그래!”

 

  “어쨌거나 편안함이란 게 무료하다거나 지루하지만 않으면 되는 거잖아?

 

  누구 말마따나 지루하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한 법이지. 그 순간 시시한 봄꽃보다는 농익은 가을의 열매를 사랑한다는 한 시의 구절이 떠올랐다. 자신을 가을이라 표현한 여인이 들려준 시였다.

 

  가을이여, 그대 열매가

  봄에 피는 시시한 꽃보다 나는 좋다.

  분명히 말하건대, 절대로 지루하지 않다!”

 

  옆에서 해가 빨갛게 익은 사과 같은 얼굴로 멀뚱멀뚱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시한 봄꽃이 아닌, 달콤한 즙이 듬뿍 배여 여문 싱그러운 가을의 열매. 해는 내게 그러한 존재였다.

 

  “아! 날씨 좋다! 가을 좋다!”

 

  “뭐래…… 또.”

 

  부끄러워 얼굴이 빨개지는 와중에도 해는 오른쪽 셔츠 소맷자락을 꼭 붙든 채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소맷자락을 타고 전해지는 해의 떨림이 그렇게도 좋았던 까닭에, 나는 날아갈 듯한 기분에도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발 한 발을 내딛었다. 언제까지나 이 떨림이 끊이지 않고 내게 전달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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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5. 그리고 해가 대답했다(8) 2019 / 10 / 25 260 0 5389   
27 5. 그리고 해가 대답했다(7) 2019 / 10 / 22 245 0 6577   
26 5. 그리고 해가 대답했다(6) 2019 / 10 / 18 239 0 6998   
25 5. 그리고 해가 대답했다(5) 2019 / 10 / 16 246 0 6729   
24 5. 그리고 해가 대답했다(4) 2019 / 10 / 14 239 0 5475   
23 5. 그리고 해가 대답했다(3) 2019 / 10 / 10 227 0 5692   
22 5. 그리고 해가 대답했다(2) 2019 / 10 / 7 235 0 4448   
21 5. 그리고 해가 대답했다(1) 2019 / 10 / 4 250 0 5937   
20 4. 가을 하늘이 맑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맘때… 2019 / 10 / 3 230 0 3888   
19 4. 가을 하늘이 맑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맘때… 2019 / 10 / 1 244 0 5003   
18 4. 가을 하늘이 맑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맘때… 2019 / 9 / 26 236 0 4897   
17 4. 가을 하늘이 맑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맘때… 2019 / 9 / 25 226 0 6668   
16 4. 가을 하늘이 맑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맘때… 2019 / 9 / 24 212 0 4546   
15 4. 가을 하늘이 맑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맘때… 2019 / 9 / 20 249 0 7204   
14 4. 가을 하늘이 맑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맘때… 2019 / 9 / 19 252 0 6106   
13 4. 가을 하늘이 맑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맘때… 2019 / 9 / 18 229 0 7412   
12 3. 시간을 돌리는 마법의 주문, 워프(4) 2019 / 9 / 17 249 0 7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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