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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안락한 게 아니고
작가 : 수요일
작품등록일 : 2019.11.9

"저 물어주세요."
안락사 시술소를 찾은 남자와 뱀파이어 여자의 차갑지만 뜨거운 동거.

 
19화
작성일 : 19-11-10 00:42     조회 : 224     추천 : 2     분량 : 9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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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화

 

 아무리 생각해도 몸빵밖에 없었다, 윤오가 가설을 확인할 방법은,

 윤오는 어떻게 해야 백신에 관여하는 조직에 닿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 선민이 생동성 알바 광고를 봤다던 사이트에 접속해봤다. 아르바이트 공고 페이지를 세 개쯤 넘겼을 때, 윤오의 눈에 딱 한 줄의 광고가 들어왔다.

 [이한병원] 이한병원에서 세상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생동성 아르바이트 지원자를 찾습니다.

 어쩜 딱 이 시점에. 윤오는 작성자의 아이디를 검색했다. 가장 최근 공고가 선민이 언급했던 시점에 올라온 것으로 봤을 때 한동안 중단됐던 실험이 지금 이 시점에 딱 재개된 모양새였다. 꼭 누군가를 끌어들이려는 것처럼. 윤오를 부르는 것처럼.

 윤오는 휴대폰을 꺼내 지원 연락을 위해 공개된 번호 11자리를 입력했다. 그래, 때가 되긴 했지. 들이받을 때.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윤오가 휴대폰을 집어넣고 거실로 향했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

 어느새 겨울에 접어들 때가 됐음에도 여즉 볕이 따뜻했다. 단야가 늘 누워 있는 소파 위로 정원의 나뭇잎에 걸려 부서진 햇살이 내려앉았다. 윤오는 아일랜드의 스툴에 앉아 햇살이 내려앉은 곳을 봤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노트를 꺼내 와 다시 스툴에 자리 잡았다. 노트를 펴 펜을 들고 또박또박 글자를 적어내려가기 시작했다.

 

 단야 씨, 월요일은 바나나푸딩 먹는 날이에요.

 홍대입구역 3번출구로 나가요. 거기서부터 단야 씨 생각을 하면서 5분정도를 걸으면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는 작은 골목이 나오는데요. 거기로 들어가서 다시 단야 씨 얼굴을 그리면서 3분 걷고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작은 가게가 나와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우리가 월요일마다 먹던 달디단 커스터드 크림 향이 확 풍겨올 거예요.

 바나나푸딩 주문하면 돼요. 그럼 사장님이 진열장에서 작은 유리병에 담긴 바나나푸딩을 꺼내줄 거예요. 그럼 단야 씨는 그걸 받아 들고 우리집으로 돌아와 맛있게 드시면 된답니다!

 

 화요일은 스콘 먹는 날이에요, 단야 씨.

 안국역 4번출구예요. 출구에서 나오자 마자 쭉 직진하세요. 여기는 단야 씨 생각을 좀 오래해야 해요. 한 12분 정도? 제가 해봤을 땐 단야 씨가 소 된 게으른 남자 얘기했던 걸 떠올리면 시간이 딱 맞던데, 단야 씨는 어떤 생각을 할까요. 그래도 나랑 있었던 좋은 일 하나 정도는 10분을 넘겠죠? 그렇게 직진하다 보면 오른편에 가게가 보일 거예요. 거긴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해서 단야 씨가 놓칠 리 없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온갖 맛의 스콘이 진열돼 있을 거예요.

 단야 씨는 플레인을 좋아하니까 그걸로 골라서 우리집으로 돌아와 맛있게 먹어요.

 

 제가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적은 후엔 작은 지도까지 그려 넣었다. 윤오는 바보가 아니었다. 단야 씨는 자신이 없더라도 잘 살아갈 강한 사람이란 걸 알았다. 그럼에도 그렇게까지 애써 둘의 시간을 기록한 건, 어쩌면.

 죽지 않고 돌아왔음 좋겠다.

 스스로에게 다짐하기 위한 것이었을 테였다. 윤오는 생각했다. 나는 이 집에 죽고자 들어왔는데 살기를 바라면서 나가게 됐다고. 그리고 그건 다 단 한 사람 덕분이었다고. 그러니 나는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다. 그러면서도 윤오는 자꾸 마지막을 생각하게 됐다. 그 내내 울음이 왈칵 터질 것 같아서 노트를 보던 고개를 들어올려 자꾸만 천장을 봐야했다. 그러고도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띠띠띠띠띠띠-. 띠리릭-.

 천천히 눌러지는 현관 비밀번호는 이제 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았다. 그 소리에 몸을 일으킨 윤오가 그대로 빠른 걸음으로 단야에게 다가갔다. 뭐야? 단야의 물음은 윤오의 품에 묻혔다. 평소보다 더 온 힘을 다해 끌어 안은 품이었다.

  “너무 뜨겁진 않죠.”

  안아 놓고 이제야 묻는 모양에 피식 웃은 단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윤오가 그 얼굴을 잡고 입을 맞췄다. 그럼 이건요. 평소보다 적극적이다 싶어 본 얼굴이 빨갰다. 단야가 윤오의 어깨를 양손으로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윤오보다 더 깊고 오래 맞추는 입술이었다.

  “다음은 뭔데. 또 해 봐.”

  눈 앞에서 웃는 얼굴은 제가 뭘해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윤오가 단야의 허리를 감싸 안고 다시 입술을 맞댔다. 서로의 혀가 얽혀 들고 윤오는 단야의 입술을 부드럽게, 그리고 절절하게 자신의 입술로 감아 올렸다. 할 수 있다면 이 시간에 모든 걸 맡기고 싶었다.

  “단야 씨. 저 죽을 수도 있다는 말 기억해요?”

  그러나 윤오는 제가 해야할 일을 기억했다. 단야의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윤오가 단야의 손을 맞잡았다. 차가웠다. 하지만 윤오도, 단야도, 누구 하나 잡은 손을 빼지 않았다.

  “...왜?”

  “그게 생각보다 빨라졌어요.”

  아무렇지 않게 말해보려 했는데 잘 안 됐다. 서로 묻는 말에는 다 제대로 답도 못했다. 순식간에 기분이 꺼진 단야가 왜라고 묻는데도, 윤오는 그 손만 만지작 거렸다. 생각보다 빨라졌어요. 그게 뭘 뜻하는 지 단야도 알았다. 윤오가 그러쥔 단야의 손을 잡아 끌어 아일랜드 앞으로 단야를 데려갔다.

  “저는 안 죽을 거예요. 그렇게 결심했어요. 꼭 안 죽을게요. 근데, 근데요.”

  어느새 글자가 빼곡하게 쓰인 노트를 건네며 윤오가 말했다.

  “혹시, 혹시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요. 단야 씨의 시간은 흘러야 해요. 우리 둘이 월요일엔 산책을 하고 화요일엔 카페에서 책을 읽었던 것처럼. 제가 없는 시간도 ”

  윤오의 시선이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단야의 두 눈을 보던 윤오는 이제 제 발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는 잊고 잘 사세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그래야 한다는 걸 아는데요. 근데요. 저는 어른스럽지 못해서, 단야 씨가 내가 돌아오지 않더라도 저를 기억하면 좋겠어요.”

  시선을 든 윤오가 단야와 눈을 맞췄다. 처음처럼 여전히 자꾸만 보게 만드는 눈이었다. 그 눈을 피한 단야는 윤오가 준 노트를 받아들곤 적힌 내용을 눈으로 읽었다. 윤오를 닮아 반듯하면서도 각진 곳 없이 동그란 글씨체로 적힌 주소며, 메뉴 이름이며, 윤오의 애틋함이 담긴 모든 것이 단야의 마음을 간질였다. 간지럽다 못해 아렸다.

 “이렇게 써놓고, 가겠다고.”

 “제가 그 자식들 대가리는 꼭 잡을 거예요. 잡아서 미안하단 말 하게 만들 거고요. 선민이를 위해서, 규희 씨를 위해서도.”

  단야의 목소리가 가라앉을 수록 윤오는 부러 더 씩씩한 목소리를 냈다. 단야가 노트를 아일랜드에 작게 던졌다.

  “니가 나랑 있으면서 죽는 사람들을 많이 봐서, 그래서 죽는 게 사실은 얼마나 무섭고 무거운지 잊었나 본데, 죽으면...”

  화를 내고 싶은데, 이렇게 나를 두고 어디 가냐 소리를 지르며 잡고 싶은데, 자꾸만 목소리가 애절해졌다. 자꾸만 말이 멎었다. 윤오는 그런 단야를 눈치 채면서도 가지 않겠다 말하지 못했다.

  “알아요. 나 지금도 충분히 무섭고 단야 씨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요. 하지만….”

  윤오가 고개를 들었다. 단야의 눈을 바로 봤다. 그 다갈색 눈이 여느 때보다 빛나는 듯했다.

  “하지만 더는 도망칠 수가 없어요. 단야 씨.”

  단야의 검은 눈동자가 윤오의 고동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더 말하지 않아도, 그 눈만 봐도 알 수 있는 굳건한 진심이었다.

  “너 가면 나 그냥 다 잊어버릴 거야.”

  그 진심을 알면서도 붙잡고 싶었다. 가지 말라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붙잡고 싶은 이유를, 사랑한다 말하고 싶은 마음을 뱉으면 윤오를 붙잡고 울어버릴까봐. 단야는 유치한 거짓말을 했다.

  “정말?”

  농담 같은 진심이었다. 윤오의 마음을 단야가 모를 리 없었다. 단야가 윤오의 팔을 잡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더이상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랑했던 인간이 있었어. 그런데 죽어버렸고. 나는 그를 살리지 못했어. 세상에서 가장 살리고 싶은 사람이었는데 말이야. 그 후로 아주 깊은 늪에 잠긴 것 같은 삶을 살았지. 그 곁을 지켜온 게 선이랑 이사장이야.”

  단야가 처음으로 먼저 꺼내는 과거 이야기였다. 이사장. 그 이야기에서 나오는 이름에 윤오의 눈이 날카로워졌다.

  “단야 씨에게 이사장은 어떤 존재예요?”

  일전에도 비슷한 질문을 했었다. 그 때 단야는 그랬다. 싫어해. 증오해. 세상 복잡한 목소리는 그 이면의 것을 말하고 있었다. 단야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사장은, 내 부모가 낳은 나를 다시 한 번 더 태어나게 한 존재야.”

  무언가를 잔뜩 머금은 말이었다. 그 오랜 세월 쌓아온 분노, 미움. 그리고 애증.

  “나는 그가 싫어. 그렇지만,”

  그 삶을 알기에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는 마음.

  “그가 죽진 않았으면 좋겠어.”

  “단야 씨.”

  윤오가 단야를 안았다. 제가 가진 감정을 마주한다는 게, 피하고 싶었던 마음을 똑바로 응시한다는 게 힘든 일이라는 거 알아서.

  “저는 이 일이 이사장이랑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요. 이한 병원 아주 깊은 곳이랑도요.”

  안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떨리는 걸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저는 이제 작업을 시작할 거예요. 그래서, 그래서... 살아 돌아올 거란 장담은 못해요.”

  “...너무한다 너.”

  “미안해요. 단야 씨가 소중히 여기는 둘을 놓고 고민하게 해서.”

  단야가 시선을 내려 애꿎은 발끝만을 봤다. 소중한 존재. 윤오는 어쩜 이렇게, 제가 다 말하지 않은 것까지 알고 있을까. 단야는 이제 더이상 무슨 말을 해야할 지 찾지 못했다. 그저 죽지말라고. 가지 말라고 잡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윤오가 손을 들어올려 그런 단야의 고개를 부드럽게 감싸 제 시선과 맞닿게 만들었다.

  “단야 씨. 저랑 같이 잘래요?”

  윤오가 단야를 꽉 안았다.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처음 단야가 윤오를 만났을 때는 상상도 못했던 따뜻함이었다.

  “내가 어둠을 걷는 동안 단야 씨가 지켜봐 준다면 하나도 겁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마지막 말에 울음이 섞인 것 같기도 했다. 단야는 자신의 놓치지 않겠다는 듯 허리에 두른 손에 더욱 힘을 줘 안겨오는 윤오의 머리를 살살 쓸어줬다. 윤오의 손을 풀어내고 맞잡은 뒤 2층 방으로 윤오를 이끌었다. 머릿속 생각은 오직 하나로 통했다.

  잡은 손이 이 밤과 함께 영원하다면.

 

 *

 

  그 사이에 창문을 열어놨던 기억이 어렴풋이 있는 것도 같다. 그런 작은 기억은 다 날릴 만큼다른 것들로 가득 찼던 밤이었다. 새벽 바람에 잠을 깬 단야가 천천히 창문을 닫았다. 차가운 바람에도 여전히 열이 식지 않았지만, 윤오가 추울까 걱정돼서였다. 단야는 다시 침대에 누워 잠든 윤오를 바라봤다. 바람을 타고 들어온 달빛이 윤오의 얼굴에 가 닿았다. 단야가 본 잠든 윤오의 얼굴 중 가장 곤히 잠든 얼굴이었다.

 오늘은 안 울어 다행이다.

  윤오의 잠든 얼굴을 단야가 좋아한다는 걸, 몰래 자주 훔쳐봤다는 걸 윤오가 알까. 말간 얼굴이이상하게 낯설었다. 저 얼굴을 또 볼 수 있을까. 평안히 잠들어 숨 쉬는 얼굴을. 지난 밤 단야는 저와 살을 맞댄 윤오를 붙잡고 몇 번이고 물었다. 꼭 가야 해? 가지 않겠다 약속해. 응? 그 긴밤 내내 윤오는 그 물음들에 단 한 번도 답하지 않았다. 맹하고 순한 줄만 알았는데, 단호한 구석이 있었다.

  팔에 턱을 묻고 엎드린 단야가 윤오의 얼굴을 지그시 봤다. 저대로 내 곁을 떠나 자신의 맡은 바를 다하러 가겠지. 나는 정말로 가만히 그가 살아 돌아오길 기다려야 할까. 그렇게 그저 가만히 앉아 시간이 지나길 바라고 바라면 될까. 이대로 윤오를 영영 잃게 된다면 앞으로의 영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그럼 나는 어떡해야 하지.

  답은 하나였다. 윤오를 살리는 것. 윤오가 죽게 내버려두지 않는 것. 단야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윤오가 깨지 않을 작은 소리로 문을 닫고는 방을 나섰다. 복도는 단야가 나온 방과 달리 싸한 공기로 가득차 있었다.

 

 

  “들어 와.”

  단야가 두드린 노크 소리에 선이 누군지 묻지도 않고 답했다. 단야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들어가지 않고 문 앞에만 서있을 뿐이었다. 언젠가 선이 했던 모습이었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책을 들고 있던 선은 고개를 들어 단야를 보았다.

  “문은 두드렸는데 들어오진 않겠다?”

  단야는 그 장난같이 웃는 얼굴에 그늘이 졌다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선의 얼굴은 저렇게 웃고 있었는데, 그 안에 그늘이 있었을까. 단야는 이제야 그게 궁금해졌다.

  “부탁할게 있어.”

  “일단 들어와. 앉아서 얘기해.”

  얼굴에서 웃음기를 뺀 선이 들어오라며 고갯짓을 했다. 단야가 선 앞에 놓은 의자에 앉았다.

  “윤오가...”

  “단야야.”

  이 새벽에 문까지 두드려 가며 하는 부탁이 뭔지, 짐작은 갔다. 그렇지만 확신하고 싶진 않았는데, 단야는 그 바람까지 무참하게 했다.

  “나 친구는 안 한다고 했어.”

  선이 단야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거기엔 네 사랑을 도와주지 않을 거란 뜻도 있었어.”

  나 그거 안해. 나 그런 거 바라고 네 옆에 있었던 거 아니야. 이렇게 비참해지려고 네 옆에 이렇게 계속 있는 거 아니라고. 단야는 아무 말도 않았다. 도돌이표였다. 한 사람의 터져 나온 마음이 둘의 관계를 어그러트리고 어그러트리는. 선에게 돌려줄 마음이 없는 단야는 그저 그 마음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네가 날 쳐다 보기만 해도 떨려.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어떻게 아직까지, 여전히 떨려.”

  한 번 터져 나온 마음은 멈출 줄을 몰랐다. 이백년을 건너 온 고백이었다. 그러나 단야는 여전히 아무 말도 없었다.

  “윤오가 죽을 수도 있대. 죽으러 가겠대.”

  그래. 너는 그렇게 애절한 눈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지.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었던 눈이 곧 익숙해졌다. 단야의 그 눈 앞에서는 모든 전의를 상실하는 기분이었다.

  “대모가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건지, 남윤오한테 무슨 일이 닥칠 건이 알아야겠어.”

  그러니까, 그래서 아무 것도 못했다. 이백 년을 뚫고 나온 고백도, 아직 채 못한 사랑한다는 말도. 선은 제 입술만 물었다.

  “진짜 나를 믿나 보네. 지금 나보고 남윤오를 살리는 걸 도와 달라고.”

  “도와줘. 혼자서 뭘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어.”

  “걔가 없어지면 나한테도 기회가 생기겠지?”

  너는 진짜 나쁘다. 선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단야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묻는 말에도 단야는 좀처럼 답이 없었다. 그저 내려까는 선의 시선만 따라갈 뿐이었다.

  “너는 참. 참 나쁘다.”

  나가 줘. 선이 일어나 제 방 문을 열었다. 답하지 않아도, 답은 이미 충분했다. 단야의 입으로 듣는 순간 또 한 번 더 상처 받을 게 두려웠다. 단야가 의자를 끌어왔던 곳으로 돌려놓고 방을 나서려 뒤를 돌았다. 아래로 내려 하나로 묶은 머리에 한 가닥 은빛으로 색이 바랜 머리카락이 보였다.

  선은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았다. 뜨거운 것과 오래 닿았을 흔적이었다. 휘몰아치는 질투는 없었다. 다만, 숨을 쉬기가 어려웠다. 누군가 심장을 한 손으로 꽉 죄는 기분이었다.

  너는 평생 아닐 거야. 평생 이렇게 네 것이 아닌 흔적들만 쫓게 될 거야.

  심장이 이렇게까지 죌 거면, 그냥 터트려 버리지. 꽉 쥐어 없애 버리지. 벌을 받는가 보다. 이기적인 결정을 내린 200년 전의 죗값을 이렇게 치르나.

 

 *

 

  윤오는 눈을 떴다.

  자신을 바라보던 단야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마자 몸을 일으켰다. 옷을 챙겨 입은 윤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둘러 집을 나섰다. 단야의 얼굴을 보면 더이상 발걸음을 뗄 수 없을 것 같았다. 괜한 미련이 또다시 윤오를 도망치게 할 거였다. 윤오는 몇 번이고 단야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저 가요. 그러나 윤오는 입을 굳게 다물고 미리 준비한 USB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동이 채 뜨지 않은 아침 바람이 차가웠다.

  그간 조사한 자료들이 모두 담긴 USB였다. 선민 사건의 개요와 진실부터 규희 씨의 증언, 이한병원과 백신 개발 TF팀의 관계 그리고 백신의 부작용 등이 자세하게 정리된 파일 여러 개가 들어 있었다.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자신이 직접 백신 실험에 참가할 계획이며 연락이 닿지 않고 행방이 묘연할 시 이한병원 9층 자료실을 수색해 못다한 취재를 이어가 달라는 부탁의 글이 적혀 있었다. 윤오는 편지 봉투에 USB를 하나씩 나눠 담았다. 자신이 일했던 신문사의 여러 기자들에게 우편으로 USB를 전달했다. 개중 하나쯤은 윤오로부터 도착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편 배송 작업을 끝내고 윤오는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전에 생동성 아르바이트 공고를 보며 저장한 11자리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았을 때, 한 남자가 전화를 받았다.

 “예, 한성근 과장입니다.”

 “생동성 알바 공고 보고 지원하려고요.”

 “아, 그러시군요. 오늘내로 준비되시는 대로 이한병원 백신 개발 센터로 오시면 됩니다. 따로 준비해 오실 건 없고 식사만 하지 않으시고 오시면 될 듯합니다. 그리고….”

 “남윤오. 27세. 머리칼은 갈색이고요. 아, 백신 개발 TF팀은 백신 개발 센터가 아니라 이한병원 9층에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요?”

 윤오는 참지 않고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어찌됐든 상대에게 자신이 찾아간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그래야 놈들도 정체를 숨기지 않고 가장 악질적인 모습을 드러낼 테였다.

 “이미 다 아시네요? 맞습니다. 이한병원 9층 자료실에서 재회하는 걸로 하죠. 아, 오늘도 정단야 선생이 구하러 옵니까?”

 “그쪽이 들먹일 이름은 아닌데요.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윤오가 거칠게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단야까지 알고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 윤오는 제가 두려움에 지지 않고 단야를 이 일에 끌어들이지 않은 게 천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결판을 지을 일만 남았다. 윤오는 일이 빠르게 끝나길 바랐다. 얼른 일을 마치고 우리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꼭.

 

 *

 

  인사도 없이 갔네.

  빈 침대를 보며 그 답지 않은 무정함에 뭐라할 시간은 없었다. 단야는 윤오가 잡고 있던 자료들을 찾았다. 여기서 윤오가 어디로 갔는지 힌트를 알아낼 수 있다면.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이란 파일은 모조리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대모님을 찾아 가. 가서 직접 물어.”

  어느새 뒤에 온 선이 자료를 펼쳐 놓고 뒤적이는 단야에게 말했다.

  “퍽이나 알려주겠다.”

  “그럼 나는?”

  단야는 대답 않고 계속 필요한 자료들을 정리했다. 선과 말싸움할 시간이 없었다. 자료는 이렇게 많은데 윤오가 무얼 할 지 알려주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중요하다 생각되는 자료 몇 개를 챙긴 단야가 겉옷을 챙겨 입었다. 윤오는 이한병원을, 그리고 이사장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갈 곳은 분명했다. 병원. 단야가 현관을 나섰다. 윤오가 나섰던 꼭 그 모양처럼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윤오와 다른 건, 그 모습을 보는 이가 하나 있다는 거였다. 선은 한참 그 나간 자리를 보다 폰을 켰다. 이 이른 시간에 깨어 있을 사람은 선과 단야 말고 하나 더 있었다. 우리와 비슷하고도 다른 사람. 짧은 신호음 끝에 대모가 전화를 받았다.

  “어디세요? 제가요. 사랑을 이길 수가 없어서요.”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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