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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안락한 게 아니고
작가 : 수요일
작품등록일 : 2019.11.9

"저 물어주세요."
안락사 시술소를 찾은 남자와 뱀파이어 여자의 차갑지만 뜨거운 동거.

 
15화
작성일 : 19-11-10 00:30     조회 : 217     추천 : 2     분량 : 9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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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화

 

 여전히 너무 심하게 화려하네. 병원 치고.

  응급실을 지나 숨겨진 통로로 병원 로비를 들어선 윤오가 숨죽이던 발걸음을 멈췄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 거렸을 로비는 어둠 속에서 조용했다. 그 어둠 속에서도 화려한 내부가 선명했다. 불과 몇 개월 전 여기를 왔었다. 선민이 죽었다는 소식과 함께. 다신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할 줄 알았는데 여기 서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갈 때는 선민이 왜 죽었는지, 그 이유를 손에 쥐어야 했다. 비상 계단으로 향하는 얼굴이 비장했다.

  몰래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눈이 많았고, 기자 신분을 내세우기엔 이미 윤오는 잘렸을 게 분명했다. 선민이 죽고 회사를 나오기 전 윤오는 자신이 가진 모든 바이러스 관련 파일을 하나의 유에스비에 담았다. 이 자료들이 여기 더 있어봤자 휴지통에 버려지는 일 밖에 더 당할 게 없었다. 죽더라도 저 유에스비는 챙긴다. 윤오는 이틀 밤을 꼬박 새서 하나의 유에스비를 만들었다. 내가 발로 뛴 자료는 내 새끼다. 선민이 짐짓 꼰대인 척 하며 하던 말이었다. 유에스비에서 자료를 하나하나 정리할 때마다 선민이 생각났다. 다 선민이 열정적인 눈으로 검토하던 자료들이었다. 새끼 맞네.

  그 자료에서 의심하던 바이러스 자료실이 9층에 있었다. 간호사가 죽기 전 알려준 정보들은 자료가 의심하던 것들을 확증했다. 9층 앞에 선 윤오가 숨까지 참느라 흘린 땀을 소매로 훔쳤다. 계단에서 9층 내부로 향하는 문에는 보안 시스템이 걸려 있었다. 옆에 부착된 기계에 카드를 대야 열리는 문이었다. 윤오는 바지 주머니에서 네임택을 하나 꺼냈다. 강 규 희. 그가 혹시 이게 필요하다면 가지시라고 건넨 거였다. 윤오는 제발 병원 측에서 아직 규희의 부재를 눈치 채지 못했길 빌었다. 아직 이 기계 안에 규희의 데이터가 삭제되지 않아야 했다. 윤오가 카드를 기계에 댔다.

  삑-

  철컥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문고리를 밀고 무거운 문을 연 윤오가 살며시 발을 들였다. 약품 냄새와 섞인 알 수 없는 냄새가 훅 끼쳤다. 윤오가 확인하고 싶은 건 하나였다.

  병원이 사람을 죽이고 있다는 증거.

  분명 구체적인 서류가 있을 거였다. 병원 같이 수직체제로 일하는 곳에서는 어떤 일을 하든 서류를 남겼다. 가만히 몇백만원 짜리 의자에 앉은 윗선이 보고를 받아야 하니까. 그건 비슷한 수직 체제에 몸담고 있었던 윤오가 잘 알았다. 그렇다면 그 서류는 받은 사람보다 작성한 사람이 더 잘 보관하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하나 더. 윤오는 제 눈으로 봐야 했다. 그 실태를 직접 보고, 알고 싶었다. 펜을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부터, 윤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 나 너무 나일롱 환자 같진 않지? 들키면 안되는데.

  명패도 없이 굳게 닫힌 문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열며 윤오는 선민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이 병원 저 위층에서, 환자복을 입고 장난스레 웃던 선민을. 쉽게 열리는 문들 안에는 별 게 없었다. 자료철이 쌓여 있길래 혹시나 싶어 뒤졌던 방은 다 ㅇㅇㅇ바이러스와는 다른 연구 관련 파일들 뿐이었다. 등이 땀으로 흥건했다. 잠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어서였다. 플라스크와 비커 따위만 있는 방을 나와 옆방 문고리를 자연스럽게 돌렸다. 철컥. 수월하게 열렸던 다른 방과 달리 잠긴 방이었다. 그리고 그 방 앞에 서자, 윤오는 제가 이 층에 들어 섰을 때 맡았던 냄새가 무엇인지 조금 분명해지는 것 같았다. 옆에는 이 층에 들어올 때와 같은 카드키 인증 시스템이 옆에 붙어 있었다. 윤오가 카드를 꺼내려 손을 움직이는 순간,

  “누구시죠.”

  굵고 낮은 남자의 목소리가 대답을 들으려는 게 분명 아닌 질문을 했다. 윤오는 그 상태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빳빳하게 굳었다. 단순히 신분을 묻는 질문 때문만은 아니었다. 등 뒤로 자신을 겨눈 무언가 느껴졌다.

  “지나가다... 들렀는데요....”

  어색하고 티 나는데 가오까지 없는 변명에 등 뒤로 느껴지는 총구에 힘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지나가다?”

  “예.... 지나가다....”

  방금까지 비장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어리숙한 얼굴로 바뀌었다. 고개를 슬쩍 돌리려던 윤오가 푹 찌르는 총에 다시 얼굴을 앞으로 돌렸다. 얘 뭐하는 새끼지. 이 새끼들 뭐가 있긴 있네. 윤오는 생각했다. 내가 여기서 이 총 든 남자를 치고, 여기 문을 뚫고 들어가서 증거 찾아서 무사히 병원을 빠져 나가서 택시를 타고 집에 갈 수 있을까. 얼핏 느껴지는 남자의 체구는 윤오보다 컸다. 윤오가 친다고? 총이 아니더라도 윤오가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신문사에서도 어쩌다 한 번씩 족구라도 하는 날이면 윤오는 기사 써야한다면서 토꼈다. 30분이면 나오는 스트레이트 쓰면서 왜 빼냐는 선배의 말에 울면서 들어간 족구장에서 윤오는 진짜 울었었다. 이거 살인족구잖아요.... 아무튼 윤오는 그만큼 몸 쓰는 일에는 젬병이었다. 그러니 남자를 제압? 차라리 단야에게 배운 대로(가르친 적 없음.) 목을 물어뜯는 게 더 현실적일 것 같았다.

  “저는 그럼 다시... 나가서... 가던 길을 가보겠습니다....”

  하하 웃으며 다시 출입문으로 나가려던 윤오 뒤로 총이 장전됐다.

  “거기로 들어오셨어요? 여기 아무나 못 들어오는 덴데.”

  네? 뒤를 돌려는 윤오에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아니. 돌아보진 마시고.”

  “네... 그럼 전 안 돌아보고 나가겠...”

  “아무나 못 나가는 데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되지.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총이 나오는 상황을 별로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사실 아예 없었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할지 도무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띵-

  엘리베이터 소리였다. 그리고,

  “무슨 일이세요?”

  윤오의 시선이 자연스레 소리 나는 쪽을 향했다. 익숙한 목소리. 단야였다. 단야가 제 네임택을 들어 보이며 남자에게 말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아닙니다. 외부인이 들어와서...”

  슬쩍 돌아본 시선에 남자는 어느새 총을 집어 넣은 상태였다. 윤오는 단야에게 달려가서 다 이르고 싶은 참았다. 저기... 제가 지금 괜히 쫄아 있는 게 아니라 저 남자가... 방금까지 총을 들고 있었거든요....

  “제 손님이에요. 뭐 좀 갖다 달라 하면서 키를 줬는데, 잘못 왔나봐요. 실례했어요.”

  단야가 윤오의 손목을 잡고 다시 엘리베이터를 탔다. 닫힘 버튼을 누르고 남자에게 목례하는 단야를 보면서도 윤오는 내내 굳어 있었다. 하나는 내가... 총을... 맞을 뻔 했어... 총이.. 내 허리랑.. 머리랑... 아무튼 나 죽을 뻔 했어...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풀리지 않는 의문과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는 것들 때문이었다. 냄새와 남자, 총. 그런데 단야는 제가 여기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윤오가 팔짱을 끼고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층수를 응시하는 무표정한 단야의 옆모습을 봤다. 어떻게 알았지?

 

  *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지 못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통이라는 말이 평안으로 느껴질만큼.

 

  윤오를 제 연구실...?(머라고 하지) 쇼파에 앉힌 단야는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윤오에게는 티도 못 내고 있었지만, 윤오만큼이나 단야도 놀란 가슴을 달래고 있었다. 당직으로 병원에 있는 단야에게 대모가 연락이 왔었다.

  9층에 좀 가보렴.

  왜냐고 묻기도 전에 전화가 끊어졌다. 인상을 쓴 단야는 잠시 망설이다 일어났다. 이상하게 대모의 말은 쉬이 넘길 수가 없었다. 저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라 그런가. 아니면 옛 버릇이 남아 있어 그런가. 아무튼 단야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9층을 눌렀다. 보안카드를 대야만 갈 수 있는 층이라 단야도 한 번도 안 가본 층이었다. 마주한 건 땀으로 흠뻑 젖은 윤오와 그 등 뒤로 겨눠진 총이었다. 흐려져 가던 기억이 다시 선명해지고 있었다.

 

  “요괴랑 살더니 괴물 다 됐구만!”

  정신을 차렸을 때 민호 등은 이미 피로 범벅이었고, 총을 쏜 사람도, 그 옆에서 동조하던 사람도, 그리고 원래 그 총을 맞았어야 할 단야도 모두 멈춰 있었다. 숨도, 말도, 웅성거림도. 그 웅성거림을 뚫고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단야를 대신해 총알 앞으로 뛰어든 민호를 비난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아무 말도 못하던 사람들이 하나씩 동조하기 시작했다. 그래. 다 저 년 때문이야. 다 저 사람 잡아 먹는 괴물년 때문이야.

  민호야.

  단야에게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제 손을 적신 피가 빨갰다. 저를 보는 민호의 눈처럼.

  군대에서 사람을 보내 민호를 찾아 왔다. 산골 깊숙한 곳까지 어떻게 왔냐 했더니 그 곁에는 마을 사람들 한 무리가 있었다. 최민호? 그 저 산속에 그 괴물 여자랑 같이 사는 총각 아녀? 마을 사람들은 단야를 괴물이라 불렀다. 앞에서는 아이고 신령님 선생님 하다가도 돌아서면 괴물년이라 했다. 늙지도, 무언가 먹지도 않고, 손만 대면 병을 고치는 게 희한하다는 이유였다. 선한테는 안 그러면서, 단야에게만 그랬다.

  - 탈영한 것도 아닌데 왜 가야합니까?

  5분을 줄 테니 대충 짐 챙겨서 따라 나오라는 말에 민호가 되물었다. 저는 전쟁 중에 다쳤고, 부대는 저를 버렸으니 갈 이유 하등 없다는 거였다. 그러나 완장을 찬 남자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 전쟁 중에 군인은 나라의 개 같은 거야. 다치면 버려지고, 잘 따라오면 재산 같은 거지.

  - 싫습니다. 안 갑니다.

  단야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민호의 굳은 목소리였다. 제게 사랑한다 말할 때뿐 아니라, 투닥거릴 때도 한 번도 낸 적 없는 목소리였다.

  - 저 계집이 꼬신 거야. 저 괴물년이 홀린 거라니까?

  마을 사람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민호가 그들을 쏘아봤다. 거기에는 언젠가 단야가 병증을 고쳐 주었던 이들도 있었다.

  - 단야가 괴물이었으면, 여기 이 무례하고 염치없는 이들부터 다 죽여 버렸을 겁니다.

  단야가 민호의 어깨를 잡았다. 괜찮으니 하지 말란 뜻이었다.

  - 홀린 게 아니면 뭐야! 저 늙지도 않고 허옇기만 한 계집이 자네를 홀린 게 아니면 뭐란 말이야!!

  - 저 여자를 죽여야 해요!

  민호의 말에 사람들의 언성이 높아졌다. 사람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흥분한 목소리를 냈다. 사람들의 말에 군인들이 동조하는 게 느껴졌다. 그들은 단야를 노려보고 있었다. 군인 하나가 총을 장전했다.

  - 최민호. 지금 챙겨서 나오지 않으면 여자를 쏘겠다.

  단야 앞으로 총이 겨눠졌다. 단야는 그런 건 하나도 안 무서웠다. 다만 민호가 저 때문에 다치거나 화가 나거나, 사람들과 척 지는 건 싫었다.

  - 민호야. 가서 짐 싸.

  - 싫어.

  - 빨리.

  - 나 안 가. 단야야. 나 안 갈 거야. 나 지금 가면 언제 올지 몰라. 아예 못 올지도 몰라. 그래도 괜찮아? 너 나 안 보고 살 수 있어? 응?

  아무 답도 못했다. 민호가 돌아오기만 한다면, 단야는 기다릴 수 있었다. 민호의 부재가 단야에게 아주 지겹고 길겠지만, 단야의 평생보다는 아니었다. 민호가 돌아온다는 약속만 한다면, 단야는 그 약속 하나 붙잡고 평생을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전쟁 중이었다. 민호가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보장, 여기 있는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단야는 아무 말도 못했다. 아니. 가지마.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아. 민호야 가지마. 그런 말도, 가라는 말도. 그 무엇도 못했다. 그러던 차에 방아쇠가 당겨졌다. 그 당기는 손가락을 먼저 본 건 민호였다.

  탕!

  단야가 사랑하는 몸이 아래로 순식간에 꺼졌다.

 

  이 바보가. 왜 뛰어 들어. 총알이 날라드는데 왜 뛰어 들어. 나 괴물 맞잖아. 네가 사랑하는 사람. 괴물 맞아서. 나는 저깟 총알 한 탄 맞아도 죽지도 않는데, 저 작은 총알 하나에 이렇게 죽을 네가. 왜 뛰어 들어. 민호가 손을 들어 단야의 얼굴을 닦았다. 자기는 피가 철철 흐르는 주제에, 이깟 눈물 몇 방울이 뭐라고. 사랑하는 연인은 제가 사랑하는 연인이 우는 건 또 못 봐서. 그 와중에 손을 들어 단야의 눈물을 닦고 있었다. 죽어가는 와중에.

  “민호야. 기다려.. 기다, 기다려.... 내가 살려줄게...”

  할 수 있다. 이걸로 마을 사람도 여럿 살렸다. 의원에서도 못 고친다 했던 것들 다 단야가 고쳤다. 단야가 민호가 다친 부위에 손을 얹었다. 고통에 민호의 잘생긴 눈썹이 찌푸려졌다. 단야가 제 치유 능력을 쏟았다. 몸 안에 모든 기를 민호의 상처로 넣으려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상, 이상하다... 왜...”

  전혀 능력이 통하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도 고치고, 제 다친 상처도 고치는 그 능력이 민호에게 듣질 않았다. 눈물이 앞을 가려 자꾸만 흐려졌다. 민호의 얼굴이 흐려졌다. 단야는 그게 가장 싫어서, 눈을 꾹 감아 눈물을 떨구고, 또 떨궈도 자꾸만 흐려졌다. 힘을 쓰는 게 보이는 단야의 손을 민호가 잡았다. 여전히 따뜻한 손이었다.

  “단야야.”

  “기다려. 조금만 참아. 민호야. 내가. 내가 너... 내가...”

  엉엉 울고 싶었다. 그러지 못하는 건 민호를 살려야 해서, 내가 여기서 다 놓고 울어버리면 진짜 민호가 죽는 걸까봐. 그런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능력이 안 흘렀다. 아무리 흘려보내도, 자꾸 옆으로 샜다.

  “...단야야.”

  민호가 단야의 손을 조금 강하게 잡았다.

  “나 봐봐.”

  민호의 상처 부위만 보던 단야가 고개를 들어 민호를 봤다. 애써 웃으려는 입꼬리가 떨리고 있었다. 어제도 오늘도 사랑한다 말하며 입 맞추던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좋아해서...”

  말하지 마. 바보야. 말할 때마다 상처가 흔들리는 게 다 느껴지는데, 그러니까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끝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데. 단야는 그러지 못했다. 민호가 하는 모든 말에 귀 기울이고 싶어서.

  “너무 좋아해서...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민호의 눈도 단야처럼 흐려지고 있었다. 민호가 울고 있었다. 단야가 손을 들어 그 얼굴을 만졌다. 민호야. 민호야. 죽지마. 그러지마. 죽지마. 민호야. 나 두고 혼자 죽지마.

  “그러면 안 되나?”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은 언젠가 저를 보내지 말라고, 떠나고 싶지 않다 했던 얼굴과 꼭 같았다. 왜 안 돼. 되지. 평생, 평생 우리 같이 있자. 여기서 평생 과꽃도 키우고, 나무도 제 자라나고 싶은 대로 멋대로 자라나게 두고, 고구마도 까고, 같이 등 하나 켜 놓고 웃으면서 이야기하자. 단야가 말도 못하고 그 얼굴만 쓸었다. 제가 사랑하는 얼굴만.

  “...단야야. 나 이름 한 번만 불러 봐.”

  “민호야. 말하지 마. 이제 말하지 마. 평생 같이 있을 거니까. 그래도 되니까. 이제 말하지 마. 알겠지.”

  이름만 불러 달랬더니, 이렇게 다 답해주네. 민호가 웃었다. 그리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민호야....”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멈출 거면 차라리 우리가 사랑하던 어느 그 행복했던 햇살 속에서나 멈추지. 단야는 더 이상 제 이름을 부르지 않는 민호의 입술을 매만졌다.

  나는 죽지도 않는데, 그래서 이렇게 네가 죽어도 따라 죽지도 못하는데.

  단야는 어떤 말을 기억했다. 대모가 제게 했던 말이었다. 업. 네가 앞으로 평생 짊어지고 가야할 업. 그제서야 그 업의 무게를 실감했다. 단야는 천천히 제 무릎에 누운 민호의 머리를 아래로 내려놓았다. 그리고 일어나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하얗다고만 생각했던 단야의 얼굴에 색이 돌았다. 분노의 빛이었다. 단야는 결심했다. 다 죽이겠다고. 사람들 말처럼 저는 괴물이 맞았다. 민호가 그랬다. 괴물이라면 다 죽여 버렸을 거라고. 맞았다. 그건 제게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 결심은 그 자리에서 이뤄졌다.

  그리고 단야는 그날로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대모도, 선도. 그렇게 또 몇 십 년을 박혀 있었다. 민호를 만나기 전처럼. 두 번 다시.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

 

  그랬는데, 다짐이라는 게 이렇게 또 무너지네.

  윤오를 집까지 끌고 왔다. 차 옆 자리에 앉아 얼빠진 얼굴로 창 밖만 보는 윤오를 보며 단야는 생각했다. 정말 그럴 줄 알았는데. 민호 때문에 의사가 되겠다 생각하면서. 이제 정말 사람 때문에 무언가를 결심하는 일은 이게 끝일 거라고. 더 이상 사람들에게 퍼줄 마음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너는 죽을 거지.”

  윤오는 힘없이 쇼파에 앉아 있었다. 여전히 정처 없는 얼굴이었다. 단야가 그 옆에 앉았다. 건조한 목소리가 이상하게 축축했다. 윤오는 단야의 말에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이렇게 쉽게. 그 총 하나가 니 가슴 하나만 노려도, 죽어 버릴 거지.”

  질문이 아니라 확신이었다. 알 수 없는 말들 같은데, 윤오는 그걸 다 이해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래서 안 하겠다는 거야. 이렇게 쉽게 죽으면, 또 나만 남겨지고.”

  “안 죽을게요.”

  그렇다면 답하고 싶었다. 그 확신에 살포시 마음을 올리고 싶었다. 안 죽을게요. 윤오가 확실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안 죽어. 인간은 다 죽지.”

  “계속 옆에 있을게요.”

  말도 안 되는 말인 거 아는데, 희한하게 믿고 싶었다.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저 약속을 어기고 제 곁을 떠날 거라는 걸 알면서 그랬다.

  “좋아하니까요. 옆에 계속 있고 싶으니까요.”

  틈만 나면 이렇게 제 마음을 고백하는데, 그게 제 틈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데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단야는 떨리는 마음이 낯설었다.

  “나도 그래. 윤오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다.

 

 *

 

  “어디 가?”

  방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단야에 윤오가 애써 웃어보였다. 제가 앤가요. 2층으로 올라가는 윤오를 끝까지 지켜 보던 단야가 몸을 돌리자 선이 서 있었다. 이 밤중에, 어딘가 나가는 차림이었다.

  “대모한테.”

  “윤오한테 잠깐 가줄래.”

  “왜?”

  “나 다시 병원을 가봐야 해서.”

  선이 웃었다. 단야야.

  “날 믿어?”

  웃는 얼굴과 다르게 처진 목소리였다. 어딘가 날서 있는 듯한 말투였다.

  “당연하지.”

  단야 앞에서는 내보인 적 없는 목소리였다. 홀로 방에 앉아 있을 때도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날 믿는다는 말이 이렇게 싫을 줄 몰랐다. 단야가 저를 믿는다면, 선은 언제나 그 앞에서 믿음직스러운 사람이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은 좀 어려웠다. 얼마 전 나는 네 품에 안겨서 왜 날 사랑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너를 사랑하는 사람 손에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맡겨?”

  언제나 그 옆에 있으면 그걸로 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단야가 제게 상처를 상처를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선은 이제야 인정했다. 그 상처를 마주하는 것은 괴로웠다. 네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안도감과 언젠가는, 이라는 기약 없는 믿음에 지쳐서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그걸 마주한 이상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순 없었다. 선이 그 웃는 얼굴을 버리고 제 마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괴로워. 너 때문에.”

  “...그렇구나.”

  허망한 표정이 선의 얼굴을 채웠다. 그래. 선이 현관으로 갔다. 선이 단야에게서 먼저 등을 돌린 건 처음이었다. 단야는 그 뒷모습을 보지 않았다. 발걸음을 돌려 계단을 향했다.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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