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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로맨스
안락한 게 아니고
작가 : 수요일
작품등록일 : 2019.11.9

"저 물어주세요."
안락사 시술소를 찾은 남자와 뱀파이어 여자의 차갑지만 뜨거운 동거.

 
3화
작성일 : 19-11-10 00:05     조회 : 228     추천 : 3     분량 : 1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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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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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화

 

  윤오도 아이스파이긴 했다. 한겨울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 아니면 초콜렛 프라푸치노, 차를 마셔도 각얼음 몇 조각 동동 띄워 시원하게 먹는 게 최고라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열치열은 냉장고 없었던 조상님들 시절 얘기고. 신문명 인류인 우리는 이렇게 냉장고도 있고, 얼음도 있는데 왜 더워 죽겠는데 땀 빼나요 하면서 회사 선배가 삼계탕 먹으러 가자 그러면 무슨 어디 끌려가는 사람 마냥 발을 질질 끌었다.

  “저기요... 저...”

  쇼파에 앉아 우아하게 논문을 넘겨 읽는 단야 옆에 덜덜 떠는 윤오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제가 가진 모든 옷을 껴입은 것도 모자라, 패딩에 분홍색 극세사 이불까지 뒤집어 쓴 상태였다. 발에는 보라색 수면양말이 신겨져 있었다. 단야는 이 동거인의 기척이 썩 마음에 들지 않은지 살짝 인상을 쓰고는 윤오를 봤다. 추워 죽겠는데 눈에서까지 한기가 나오는 것 같아 윤오는 다시 한 번 떨었다. 부들.

  “...너..너무... 너무... 추워요...”

  혹시 이렇게 피 시원하게 드시려고 저를 이렇게 얼려서.. 죽여서... 피 빨아 드시려고 그러나요... 얼마 전에는 피는 따뜻해야 맛있다 하셨으면서... 윤오는 차마 꺼내지 못한 말을 삼켰다. 처음엔 그냥 이 넓은 집에 사람 둘, 아니다. 사람 하나 뱀파이어 하나 있으니 그런 줄 알았다. 아직 시월이니 난방을 하기도 이르고, 넓은 집이니 난방비도 어마어마하게 나오겠지... 객식구가 말이 많으면 그것만큼 꼴불견도 없다 생각하며 말을 아꼈다. 그런데 딱 3일 째 생각했다.

  얼려 드시려는 걸까.

  뭘 얼려 먹냐면, 저요 저. 이러다 딱 죽겠다 싶었다. 이불을 덮고 몸을 비벼도 냉골인 방에 누운 몸을 덥히기엔 역부족이었다. 뭐랄까. 잠에 들려다가도.. 안돼. 눈 떠. 여기서 잠 들면 안돼...의 심정이 되었다. 어제는 모르는 집(그것도 뱀파이어 하우스라니) 밖에 나가기 무서워 생각도 않던 바깥에 볕이 드는 게 보이자 저도 모르게 문을 열고 나갔다. 나무들이 우거지고, 제멋대로 자란 풀과 덤불 사이로 햇빛이 드는 정원이 있었다. 밖이.. 더 따뜻해... 윤오는 차라리 방보다 정원에서 자는 게 더 낫겠다 싶었다.

  “저기 혹시 못 푼 한이 많으세요?”

  “뭐?”

  “이게 아무래도 한기가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 돼서...”

  새파래진 입술로 덜덜 떨며 아무 말이나 뱉어대는 윤오를 보는 단야의 미간이 한층더 좁혀졌다. 무슨 소리야.

  “저 이러다 정말 죽겠어요.”

  제가 죽고 싶은 건 맞는데요. 이렇게 한기 서린 고통과 추위 속에서는 아니었어요. 윤오가 이빨까지 부딪히면 떨었다.

  “아무리 여름이 끝났다고 해도 그래도 아직 가을인데, 이건 뭐 북극이라 해도 믿겠어요. 너무 추워요. 솔직히 아무 방이나 열어서 북극곰이 나와도 하나도 안 놀랄 거 같아요. 물론 조금 놀라겠지만. 아무튼 너무 추워요. 너무 춥고... 제가 전설의 고향 같은 데서 봤는데요. 못 푼 한 그런 거 들어 드리면 되더라고요. 그거 제가 해드릴게요.“

  “아...”

  단야가 주머니에서 에어컨 리모콘을 꺼냈다. 그리고는 공중을 향해 눌렀다. 띡띡. 굉장한 선심이라도 쓰는 듯한 손짓이었다. 윤오는 그 시혜적인 집주인의 태도에 감동할 틈도 없었다. 아니 지금 저게 뭐야....?

  “...지금 에어컨 켜놓으신 거였어요...?”

  “어.”

  “한기가 아니라요...?”

  “어.”

  “몇 도였는데요...?”

  “18도. 더 안 내려가던데.”

  “18도요? 18...? 18..... (뭐? 18?) 아니 욕한 거 아니라요. 진짜 아니라. 그러니까 원래 18도였는데, 지금 20도로 올리신 거고. 그러니까 이 집이 20도... 아니지 원래 18도... 난방비가 없어서 집이 추운 게 아니라... 한기도 아니고.... 아니 여름도 다 지났는데 18도.... 여름에도 회사에서는 25도 이하로도 못 내리게 하는데... 18도...”

  얼빠진 윤오가 몸 떠는 것도 잊고 중얼거렸다.

  “추웠어?”

  “추웠냐구요? 죽는 줄 알았어요. 비유적 표현이면 좋겠는데, 진짜,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나는 온도가 올라가면 죽을 수도 있어서. 미안.”

  전혀 미안하지 않는 말투로 단야가 사과했다. 그러면서 건네는 손에는 카드가 있었다. 이제 사과에 오히려 입장이 바뀐 건 윤오였다.

 음... 쓰레기 된 기분….

 

  둘의 동거는 전적으로 단야의 손해라는거, 윤오가 모를 리 없었다. 집도 없고, 돈도 없는 윤오를 받아준 것도 모자라 방까지 하나 떡 내줬으니까.

  - 전 그냥 현관에서 자도 돼요....

  - 거긴 내가 신발을 신어야 해서 안돼. 쓸데 없는 소리 말고 올라가서 자.

  - 네.

  제 염치 없음에 송구스러워하며 간 방에서 윤오는 다시 생각했다. 약간 이거 죄송해서 죽게 만드려는 작전일까. 잘 안 쓰는 방이라더니, 매일 쓸고 닦는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한쪽에는 달빛을 가득 받는 큰 창이 있었고, 그 아래로는 벨벳 카펫이 깔려 있었다. 침대의 하얀 이불은 주름 하나 없었다. 단야는 윤오가 그 침대에 곧장 누워 좀 저를 내버려 두길 바랐겠지만, 윤오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제 방이라고 주신 궁전 스캔을 끝낸 윤오는 그대로 다시 방을 나갔다.

  “단야 씨!!!”

  우당탕탕 2층 복도를 뛰는 소리에 제 방에 들어 있던 단야가 미간을 구기며 나왔다. 왜. 말에 날이 잔뜩 섰다. 쓸데없는 걸로 부른 거면 진짜 이대로 너 작업실 간다는 뜻이었다.

  “제가 생각해봤는데요.”

  “뭘.”

  “제가 뭘 할 줄 아느냐....”

  “그걸 내가 같이 생각해줘야해?”

  아니요... 그건 아니죠... 그 뜻이 아니라....

  “빨래나 설거지 같은 거...”

  “우리 집은 그거 다 기계가 해.”

  “그래도 손맛이라는 게...”

  “그거 하나당 500만원이 넘어. 돈값은 당연히 하겠지?”

  “그 청소도 나쁘지 않은데...”

  “그것도 기계가 더 잘해. 안 봐도.”

  “그럼 사람이 더 잘하는 건 없을까요 이 집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이 집의 그 비싼 기계들보다 잘하는 게 없어서요.... 제 피라도 빠실래요... 근데 제가 아픈 걸 진짜 싫어하긴 하거든요.... 시무룩해진 윤오는 뻔했다. 인간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은 받고만은 못 살았다. 제가 준 것을 어떻게서든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머릿속이 훤했다. 사실 윤오가 제 집에서 그냥 (살아있지만) 죽은 듯이 사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렇지만 윤오가 하는 걸 봤을 때 분명 그렇게는 못할 인간이었다. 사람이 더 잘하는 일이라.... 이 집에서 기계가 돕지 않는 일은 하나 밖에 없었다.

  “시술소 일 도울래?”

  “네? 그... 사람들 피.. 드시는 거요...”

  “싫어?”

  “아니요! 아니요!!! 좋아요!!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될까요?”

  “그냥 옆에서 돕기...?”

  별 필요하지도 않은 일이었으니 막상 뭘 도우라할 지도 어려웠다.

  “피 빠실 때 잘 물고 빠실 수 있도록 사람을 좀 잡고 있거나 그런 거요?”

  “아니. 나 목에 호스 꽂아서 빨아.”

  “네? 그럼 그때 저한테는 왜 그러셨어요.”

  아. 그거. 그건 단야도 해줄 말이 없었다. 저도 모르게 오바했다는 말 밖엔. 한 번 이렇게 시술소에서 피를 빨 때마다 양껏 빨기 때문에 보통 피를 보고도 식욕을 느끼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날 저를 보는 윤오의 눈에 혹했었다. 별로 인정하거나 파보고 싶진 않은 사실이었다.

  “예약 손님 정리하기. 손님 오시면 나가서 문 열어 드리고 자리 안내하기. 뭐 필요하면 차나 커피 타오기.... 이 정도?”

  “시급은 최저 맞춰 주시나요?”

  “장난해?”

  “...농담이에요. 재미 없었죠.”

  띵동-

  “일 시작. 나가봐.”

  “넵.”

  그러니까 결국 윤오는 까라면 까야하는 사람인 거였다. 윤오는 뒤집어 쓴 이불을 대충 접어 쇼파에 올려 놓고는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넹. 나가요.

  “안녕하세요.”

  단발머리의 작은 여자가 서 있었다. 갈색 가디건에 계절감이 느껴졌다. 이것 보세요. 단야씨. 밖에 사람들은 다 이렇게 입고 다닌다구요. 윤오가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죽으러 오셨... 아니다. 그.. 예약 하고 오셨죠?

  “네.”

  밝은 윤오의 목소리와 달리 여자는 낮고 차분했다. 윤오의 안내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오는 걸음도 작고 가벼웠다. 그사이 단야는 방에 들어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차 드릴까요?”

  “네. 감사합니다.”

  윤오가 아일랜드에 가 전기 포트에 물을 올렸다. 따뜻해... 이따 주신 카드로 옷 사고 목욕탕 가야지... 가서 온탕에 몸 지져야지...

  “나도 한 잔만.”

  방에서 나온 단야는 윤오를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느낌의 옷을 입고 있었다. 베이지색 정장이었다. 셔츠 사이로 작은 목걸이가 빛났다.

  “송진희 씨?”

  “네.”

  “안녕하세요. 몇 가지 질문을 해야 하는데요.”

  쇼파에 앉은 단야가 다리를 꼬았다.

  “네.”

  차를 가져온 윤오가 제 자리를 찾지 못하자, 단야가 제 옆 쇼파를 손끝으로 툭툭 쳤다. 앗. 넵.

  “왜 죽고 싶으세요.”

  윤오도 아는 질문이었다. 저도 받았던 질문이었으니까. 죽으려고 들어온 집에서 일이라니. 죽으러 들어온 곳에서 살아도 되냐는 질문부터가 이상했다. 괜히 드는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 애들이 저를 너무 괴롭혀요.”

  이 여자는 얼마나 죽고 싶은 걸까. 진희라는 손님은 단야의 질문에 막힘없이 답했다. 마치 몇 번이고 제가 왜 죽고 싶은지 이유를 말해본 듯한, 누군가 이유를 물으면 툭 꺼내려 연습한 듯 자연스럽고 거침 없었다.

 

 *

  “야. 봤냐? 쟤 진짜 표정 너무 멍청해.”

  처음에는 낯설어 그렇다 생각했다. 새로온 사람에 대한 낯섦이라고. 내일은 조금 더 나아지겠지. 내일은 조금 더 풀리겠지, 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학교를 나갔다. 그러나 나아지는 건 없었다. 여전히 학생들은 진희가 말하는 걸 무시했다. 진희가 학교 벤치 같은 데서 혼자 앉아 있으면 어디선가 찰칵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킥킥 거리는 소리까지. 심한 학생들은 계단을 걷는데 치마 속을 슬그머니 들추기도 했다. 그제야 진희는 인정했다. 명백한 공격이었다.

  “선생님. 애들이 자꾸 괴롭혀요.”

  “그거 다 새로운 얼굴이라 그런 거야. 좀 참아 봐.”

  “그렇지만 제가…”

  “그렇게 나쁜 애들은 아니야. 다 좋으면서 괜히 그러는 거라니까.”

  교무실에 찾아가 담임 선생님에게도 말했다. 참으라는 말만 돌아왔다. 학생들을 불러 부탁도 했다. 하지 말라고.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고. 화도 내봤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절망감만 더 쌓일 뿐이었다.

  찰칵-

  수군수군.

  쟤 좀 봐. 쟤는 옷을 왜 저렇게 입어? 쟤는 아는 게 있긴 해?

  학교를 걸을 때마다 말들이 뒤에서, 앞에서, 옆에서 날아와 진희에게 꽂혔다. 그래서 학교를 안 가야겠다 생각했다. 이대로는 못 살겠다고. 너무 괴롭다고.

  “힘 내. 괜찮아 질거야.”

  다들 힘내라는 말을 했다. 선생님도, 고민을 털어 놓은 친구도, 뭘 힘내야겠는지 모르겠는데 그랬다. 나쁜 애들은 아니라니. 지금 진희한테 나쁜 애들인데. 나쁜 짓을 하는데. 왜 나쁜 아이가 아니라고 하는 건지 궁금했다. 어느날 깨달았다. 이대로는 더이상 살 수 없다고.

  그래서 죽으려고 했다. 한동안 매일 점심시간마다 사람들 눈을 피해서 옥상에 올랐다. 보여주고 싶었다. 진희는 옥상 난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두려움보다 분노였다.

  나 너네 때문에 죽은 거야. 너네가 나 이렇게 만든거야. 내가 떨어지는 걸 보고, 내 모습을 보고 꼭 반성해.

  그러다 결국 아래로 떨어지지 못하고 난간에서 내려왔다. 너무 무서웠다. 아플까봐. 그 와중에 아픈 걸 걱정하고 있었다. 그게 웃겨서, 진희는 또 울었다. 결국 그렇게 단 한 번도 발을 떼지 못했다. 진희가 그러는 것도 모르고 애들은 여전히 매일 진희를 괴롭혔다. 하루는 그러다 집 가는 길에 생각했다. 아. 어쩌면 나 때문일 수 있겠다. 이렇게 소심하고 겁 많은 성격이니 애들이 괴롭히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네 때문에 죽은 거야. 이런 거 말고. 그냥, 그냥 죽고 싶다고. 이제는 그냥 죽고 싶다고.

 

 *

 

  마지막쯤에 진희는 조금 말을 빠르게 하는 듯 했다. 말을 끝낸 후 한 번에 숨을 다시 몰아 쉬었다. 세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침묵을 깬 건 많은 말을 하지 않고 듣던 단야였다.

  “제가 작업할 지 말 지 결정하는 방식은 하나입니다. 신문 기사를 찾았을 때 의뢰인과 똑같은 사연으로 죽은 사람이 있는지. 있다면 당신은 죽을 수 있고, 없다면 돌아가셔야 합니다.”

  “어디로 돌아가죠.”

  “어디로든요. 오셨던 데로든. 가고 싶으신 데로든.”

  “무조건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진희 씨의 경우는 찾을 수 있을 지 모르겠네요. 조금 특수한 경우 같아서요.”

  단야의 말에 진희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군요. 여기 오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다고 해서…”

  “있을 거예요.”

  단야의 고개가 돌아갔고 진희는 얼굴을 들었다. 윤오를 향해.

  “아니에요. 있어요. 왜 없겠어요. 학생이 학생만 괴롭히는 줄 아세요? 분명히…”

  “이렇게 끼어드는 건 일에 포함 안 되는데.”

  “...있을 거라구요… 데스크에 얼마나 많이 올라 오는데...”

  단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찾고 작업 결정 후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네...”

  분명히 있을걸. 윤오는 단야가 작업을 할 거라 확신했다. 그럼 진희는 죽겠지. 그것을 확신하는 제가 좀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진희와 같은 이유로 죽은 사람이 없을리 없었다.

  “차가 맛있네요.”

  진희가 어색하게 잔을 들었다. 단야 하나 빠졌을 뿐인데, 그렇게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빠진 것도 아닌데 어색함에 자리가 더욱 어려워졌다.

  “무슨 과목이세요.”

  “영어요.”

  “제 친구도 임용 준비하는데. 걔도 영언데 사람 안 뽑는다고 되게 그러더라구요. 진희 씨 되게 멋있으세요.”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어색함에 아무 말이나 던지던 윤오는 차라리 아까 그 에어컨 바람에 얼어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기간제예요.”

  진희가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더 그렇게 괴롭혔나. 제가 뭐 대학 원서를 써줄 것도 아니고. 뭐 대단한 시험 붙은 것도 아니라서?”

  “진희 씨. 죄송해요. 제가 말을...”

  “아니에요. 괜찮아요. 어려운 시험인 거 맞으니까. 저도 되게 오래 준비했었어요. 노량진에 박혀서도 해봤고, 동네 도서관 문 열 때 가서 닫을 때 엉덩이 떼기도 했고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도시락을 쌌거든요. 점심용 하나. 저녁용 하나. 근데 집에 쌀이 떨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찾았던 학교였어요. 운이 좋았죠. 영어처럼 인기 많은 과목은 기간제 하나 되는 게 어디냐 싶으니까요. 여기서 경험도 쌓고, 돈도 벌고, 하고 싶은 거 하면 즐거울 줄 알았어요. 걔네들을 만나기 전까진요. 그만 두고 싶었어요. 하루는 걔네가 정말 심각한 장난, 그래요. 걔네한테는 장난일 테니까. 그걸 쳤는데 그게... 그게...”

  “말씀하기 어려우시면 안 말씀하셔도 돼요.”

  “감사해요. 그날은 정말 집 가는 길 내내 울었어요. 집 가서 엄마한테 그랬죠. 나 학교 가기 싫다고. 지금 생각하면 웃긴 대사예요. 어린애도 아니고. 학교 가기 싫다고 마구마구 울다니. 엄마가 토닥여주면서 돈 버는 게 힘들지. 누구 가르친다는 게 그게 참 그렇게 어려운 거야 한마디 해주면 괜찮을 것 같았는데, 엄마가 그러는 거예요. 그럼 우리 집 생활비는 어쩌니...”

  윤오가 진희의 얼굴을 확인했다. 혹시 그가 울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돼서였다. 그러나 진희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은 듯 차분한 얼굴이었다. 윤오는 그제서야 그 얼굴이 더 괴로워보인다는 걸 알았다.

  “그날 방에 들어가서 여기 예약 잡았어요. 그 전부터 알고는 있었거든요.”

  “진희 씨.”

  굳은 분위기를 깬 건 단야였다. 단야는 들어가기 전과 다름 없는 얼굴로 걸어 나와 다시 제 자리에 앉았다.

  “작업하겠습니다.”

  순간 진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기사가 있었나요?”

  “네. 기사가...”

  단야가 한쪽에서 손을 모으고 둘을 지켜보던 윤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많더군요.”

  아무렇지 않게 다시 진희에게 고개를 돌린 단야가 익숙하다는 듯 준비한 말들을 읊었다.

  “안락사 작업 방은 따로 있습니다. 지금 저랑 같이 그 방으로 가시면 됩니다. 죽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5초. 처음에는 좀 아프실 텐데 아픈 건 곧 끝나실 거예요. 안락사 후 준비된 장소에 장사합니다. 혹시 이 작업을 하러 간다고 따로 알리신 분이 계신가요.”

  “아니요.”

  단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요. 이제 따라오세요.”

  앞서는 발걸음을 따라 진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진희의 팔을 윤오가 황급히 붙잡았다.

  “저, 저기요!”

  진희와 단야가 돌아봤다. 이 일도 아마 제가 하는 일에 포함된 건 아닐테지만, 윤오는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누구에게든 남기고 싶은 말씀이나 전하고 싶은 편지나 있으세요?”

  나 너네 때문에 죽은 거야. 너네가 나 이렇게 만든 거야.

  그런 끔찍한 말이어도. 윤오는 전하고 싶었다. 진희가 원한다면. 진희를 죽게 만든 이들에게 알리겠다고 생각했다. 그들도 알아야 한다고.

  “아니요. 없어요.”

  그 말투는 마치 처음 진희가 한 말처럼 담담하고, 일상적이었다.

  “이제 그냥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어요. 그뿐이에요.”

  안녕하세요, 인사했던 그 작은 단발머리가 윤오가 올랐던 계단을 올랐다. 정말로요? 정말 그뿐이에요? 윤오는 다시 물을 수 없었다. 가볍게 계단을 걷는 진희의 발걸음이 정말이라고 그뿐이라고 이미 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

 

  작업은 조용했다. 아마도 진희 씨는 저처럼 단야의 이를 보고 놀라거나 무서워하지 않았나보다고 윤오는 생각했다. 그랬을 것 같았다.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고도 뱀파이어군요, 할 것 같은 사람이었다. 15초면 끝난다더니 단야는 한참이 지나서야 거실로 내려왔다. 윤오는 찻잔을 치우지도 않고 진희와 헤어졌던 자리 그대로 쇼파에 앉아 있었다.

  “손님한테 함부로 말 걸지마.”

  단야가 찻잔을 모아 주방에 갖다 놓았다. 내가 하겠다고 해야 하는데... 윤오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 모든 상황이 낯설고, 이질적이며, 허무했다. 방금까지 진희가 마셨던 차가 채 식기도 전에 진희는 죽었다. 단야는 아무렇지 않게 그 잔을 치우고 있었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얼굴로. 저도 죽으러 온 입장이면서도, 윤오는 그게 너무, 뭐랄까. 기계적. 그래. 모든 일이 너무 기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래도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인데. 그 사람의 인생 비디오를 돌려보고, 삶이 어땠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할 건 아니지만 단야는 놀라우리만치 이성적이었고, 그저 절차에 따라 움직였다.

  “진희 씨는요?”

  “뭐가.”

  “진희 씨는 이제 어떻게 돼요?”

  띵동-

  “왔네. 진희 씨 어떻게 할 사람.”

  오늘만 두번째 초인종이었다. 가뿐한 마음으로 나가던 아까와 달리 윤오의 발걸음이 느렸다.

  “어라? 누구...?”

  웬 남자였다. 대박 잘생겼어. 큰 키에 검은 슬랙스, 흰 셔츠를 입은 남자는 슈트 자켓을 걸친 손으로 윤오를 가리켰다.

  “손님...?”

  손님이라뇨. 그쪽이야말로 예약하셨어요? 물으려는 윤오를 지나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간 남자가 이내 단야를 발견하곤 단숨에 그를 끌어 안았다. 금방 밀어낼 줄 알았던 단야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안겨 있었다. 남자는 한참을 끌어 안고 나서야 단야를 놔줬다.

  “웬 초인종이야. 현관 비번 알면서.”

  풀려난 단야가 금세 팔짱을 삐딱하게 끼고는 못마땅하다는 듯 말했다.

  “나 왔다고 알리려고 했지. 뭐 너가 직접 나와서 열어주면 더 좋았겠지만... 아까 어떤 애기가 열어주던데... 그 애기가... 어디...”

  여깄다. 그 애기.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둘을 지켜보던 윤오가 뒤에서 가만히 남자를 째려보는 중이었다. 뭔가 굉장히 무시 당한 기분인데...?

  “12시면 끝날 거라고 해서 맞춰 왔는데 아직 안 끝났네. 쇼파에서 잘생기고 얌전하게 기다리고 있을게.”

  “아냐. 그 손님은 위에 있고, 쟨 손님 아니야.”

  윤오가 저를 째려보든 말든 단야하고만 얘기하던 남자가 그제야 놀란 눈으로 윤오를 다시 돌아봤다.

  “근데 왜 여기 있어?”

  묘하게 날이 선 말투라고 생각했다. 분명 얼굴은 웃는 것 같은데, 말투가 단야에게 하던 것과 조금 달랐다. 근데... 중요한 게 그게 아니라... 저기.. 저게…

  “임보.”

  “임보?”

  “올라 가서 데리고 와.”

  단야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장난스러운 말투로 변했다. 알지 알지. 씨익 웃는데, 확실했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계단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저기요. 단야 씨. 진희 씨 어떻게 할 사람이라면서요. 아니잖아. 사람.

  웃는 입술 사이로 단야와 비슷하게 날카로운 송곳니가 보였다.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다는 마음과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겹쳤다. 선택은 제 몫이 아니었다. 두 계단 정도 오른 남자가 뒤를 돌았다.

  “오늘 안 잊었지?”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은 여전히 잘생겼고, 하는 말은 윤오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알아. 거기 가는 날.”

  단야는 익숙하다는 듯 답했다

 
작가의 말
 

 수요일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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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4화 2019 / 11 / 10 240 2 7060   
3 3화 2019 / 11 / 10 229 3 10231   
2 2화 2019 / 11 / 9 260 3 6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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