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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더럽(The Love)
작가 : 지놓
작품등록일 : 2019.9.3


"나, 다른 사람 같이 좋아해도 돼?"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관계와 사랑
그것의 시작,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하여.

#대학생 #캠퍼스물 #악의꽃 #섹슈얼리티 #조별과제 #폴리아모리

 
6. 가을이여, 그대 열매가 봄에 피는 시시한 꽃보다 나는 좋다(10)
작성일 : 19-11-09 19:32     조회 : 251     추천 : 0     분량 : 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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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황한 내가 잠시 주춤거린 사이, 설이누나가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너희 아직 덜 친해졌어. 좀만 더 있다가 가. 그리고 어…… 지금 분위기 좀 가라앉았지 우리? 그럼 일단 예능이라도 틀어놓고 있을까? 굳이 영화가 아니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잖아. 보면서 얘기나 좀 하게.”

 

  그러곤 냉큼 TV를 틀고 냉장고로 달려가더니, 다시 한 번 양팔 가득 맥주 캔을 안고 오는 것이었다. 도대체 몇 박스나 쟁여두고 있는 건지…… 맥주를 사두고 갔다는 친구의 정체가 자못 궁금해질 정도였다.

 

  TV에선 한 토크쇼가 방영되고 있었다. 남자 진행자의 질문에 여자 게스트들이 답하는 형식으로 주제는 ‘나쁜 남자’였다. 머리를 빨갛게 물들인 한 여자 게스트가 말했다.

 

  “근데 전 솔직히 좀 웃기다고 생각하는 게, 나쁜 남자가 어째서 인기 많은 남자의 한 카테고리로서 분류될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건 그냥 나쁜 놈에 불과할 뿐이잖아요. 배려 없고, 이기적이고, 사납고, 매정하거나 또는 바람기 많은. 물론 ‘나쁜’에 해당하는 것은 이외에도 수없이 많겠지만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시크’라느니 ‘야성미’라느니 별 해괴한 수식어들이 하나 둘 붙기 시작하더니, 무슨 매력 포인트의 하나처럼 인식되고 있는 거예요. 어이없지 않아요?”

 

  “차가운 도시남자? 그런 류의 이미지가 알게 모르게 대입되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그러니까요. 차가운 거랑 나쁜 거는 엄연히 다른 건데 도대체 왜들 그러는지…….”

 

  이때 검은 뿔테 안경을 끼고 있던 점잖게 생긴 한 중년여인이 말을 받았다.

 

  “이런 경우가 있을 것 같아요. 나쁜 남자라고 불리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매력 있다는 인식이 전제될 수 있는 사람. 예를 들어 바람기 많은 선수들 같은 경우, 대개 외모가 뛰어나고 언변이 좋잖아요? 때문에 친밀한 관계의 여자들이 많을 수밖에 없겠죠. 사귀는 사람 입장에선 미워죽을 맛이겠지만.”

 

  “저는 좀 이해가 안 되는 게, 그럼 그런 사람하고는 사귀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걸 굳이 불평하면서도 참고 계속 사귀는 걸 보면 좀 갑갑한 것 같아요.”

 

  조금은 어린 편에 속하는 한 여성 게스트가 그러고 답답하다는 표정을 짓자, 검은 뿔테의 여인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쉽지가 않으니까요. 나쁜 남자들이 진짜로 나쁜 게 뭐냐면, 매번 한결같이 나쁜 게 아니라는 점이에요. 계속 밉게 행동하다가도 어쩌다 한 번씩 잘해주는데, 그럼 갑자기 아리송해지는 거죠. 이 남자가 나를 사랑하나? 사랑하지 않나? 또 끝내 지쳐 헤어지자고 말할라치면 그 성난 멧돼지 같던 인간이 갑자기 순한 양이 되어서는, ‘다시 한 번만 생각해 달라’, ‘너 없으면 나 죽을지도 모른다’ 이렇게들 나오니까……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또 한숨을 푹 내쉬더니,

 

  “게다가 처음부터 ‘나 나쁜 남자입니다’ 하면서 알기 쉽게 다가오는 인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러자 주의의 모든 사람들이 그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열렬히 끄덕거렸다. 심지어 잘생긴데다 언변까지 좋은 남자 진행자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러니까요. 진짜 딱 이마에 써놓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나.쁜.놈. 이렇게.”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본인들이 그걸 잘 모른다는 거예요. 자기가 얼마나 나쁜 남자인지. 모두가 다 ‘나 정도면 잘해주는 편 아냐?’ 이러고들 있잖아요. 여자 입장에선 미치고 팔딱 뛰는 거죠.”

 

  “알면서도 그러는 인간들도 있어요. 상대방 감정과는 상관없이 저 좋을 대로만 행동하는 인간들. ‘어차피 이 여잔 나 못 떠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암만 봐도 저 점잖게 생긴 뿔테안경의 중년부인은 세상의 온갖 나쁜 남자란 나쁜 남자는 다 만나본 것 같았다. 거의 모든 대답에 쓴웃음과 자조의 눈빛이 함께했던 것이다. 처음 보는 인물이었는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뿔테부인의 잔잔한 눈빛 속으로 나도 모르게 빠져 들어가려던 찰나, 갑작스레 “근데……” 하는 나지막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김소혜였다.

 

  “제가요, 좀 이상한 게…… 확실히 끌리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런 쪽으로.”

 

  “응?”

 

  “뭐가요?”

 

  “…….”

 

  김소혜는 부끄러운 건지, 아니면 그냥 취기가 오른 건지 빨개진 얼굴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쁜 남자 말이에요.”

 

  그녀의 말에 설이누나가 재밌어 죽겠다는 듯 함박웃음을 지었다.

 

  “나쁜 남자한테 끌린다고? 요거, 요거 빌런들 좋아하는 데에 다 이유가 있었네!”

 

  그러자 김소혜는 머리위로 이불을 슥 뒤집어쓰더니,

 

  “아…… 몰라요.”

 

  그러곤 몸을 배배꼬는 것이었다.

 

  경악스런 광경이었다.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다. 난데없이 새침한 표정하며, 툭툭 끊어가는 말투며, 끈적끈적한 비음에…… 아예 다른 사람이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설이누나가 침 나오겠다며 내 턱을 툭 치지 않았다면 입을 벌리고 있었는지조차 몰랐을 것이다.

 

  “왜? 경험 있어? 데인 경험?”

 

  “……한 번요.”

 

  “정말? 언제?”

 

  “……대학교 1학년 때…… 잠깐 그냥.”

 

  김소혜는 한참을 뜸 들이다 결국 못 이기듯 털어놓았다. 한두 달 사귀다 만 남자친구가 있었는데 매일같이 기다리게 하고 연락도 뜸한가 하면, 항상 바쁘다며 약속을 미루곤 했었다는 것이다.

 

  “게임한다고 메시지 읽지도 않고…… 답장도 느리고…….”

 

  그러나 김소혜가 언급한 대부분은 보통의 커플들이 겪는 가장 기본적인 갈등에 불과했다. 물론 남자의 행동이 그녀를 서운케 했다는 점에서 결코 좋다곤 할 수 없겠지만, 일반적으로 ‘나쁜 남자’로 칭해지는 이들의 것과 비교해 볼 땐 사실 그리 대단치도 않았던 것이다. 슬쩍 옆으로 눈을 돌려보니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는 설이누나가 보였다.

 

  “……또 약속시간에 늦을 때마다 변명만 잔뜩 늘어놓고. 버스를 놓쳤다느니, 엘리베이터가 늦게 왔다느니.”

 

  “엘리베이터가 핑계거리가 되나? 그럼 그래도 아주 늦은 건 또 아니었나 보네요?”

 

  들어보니 기껏해야 5분, 10분 늦은 것이었다. 역시나 잘한 건 없지만 그렇다고 또 아주 나쁜 놈이라 하기에는…… 조금 억지스럽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속해서 무덤덤하게 반응하자, 김소혜도 결국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매번 늦었는데…… 그거 다 합치면 엄청 늦은 거 아닌가? 아씨…… 짜증나.”

 

  그러더니 갑작스레 확 토라진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이 모습 또한 내겐 적잖은 충격이었다. 혹시 이게 술버릇인가?

 

  “아…… 그런 게 아니라요, 이런…… 미안해요, 미안.”

 

  당황한 내가 거듭 사과했으나 김소혜의 표정은 쉬이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제대로 사과해야지!”

 

  깔깔거리며 웃던 설이누나가 그러고 한 손으로 내 머리를 꾹 눌렀다. 그러자 압박되어 숙여진 내 머리가 이불 밑에 있던 김소혜의 허벅지에 닿았다. 물컹하고 폭신한 느낌이었다.

 

  “헙!”

 

  내가 놀라 벌떡 일어난 데 비해 김소혜는 전혀 의식도 하지 못한 듯 보였다. 내 쪽을 보지도 않았고, 별다른 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방 한 구석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한테 욕도 하고 그랬는데.”

 

  “욕을 했어? 나쁜 남자 맞네! 진짜 완전 못됐다!”

 

  설이누나는 얼른 말을 받더니, 그걸 구실삼아 내 부글거리던 눈초리에서 벗어났다. 나 역시 일단은 김소혜를 달래는 게 급선무라 생각해 서둘러 말을 보탰다.

 

  “나쁜 놈 맞네요! 고생했겠다!”

 

  “……나한테 멍청한 거 아니냐고도 했는데…… 막 소리 지르고.”

 

  설이누나는 급기야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굉장히 심했네. 사실 저도 그 남자를 괜찮다고 한 게 절대 아니에요. 제 말은……”

 

  그러고 억울함을 드러내기 위해 슬그머니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또 한 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김소혜가 해석 불가능한 표정으로 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던 것이다. 뭐랄까, ‘흥칫뿡’한 표정이었다.

 

  “조장님은 나쁜 남자예요?”

 

  당혹스러울 정도로 갑작스런, 그리고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당황한 나는 머뭇머뭇 하면서도 간신히 “설마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소혜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금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나쁜 거는 모르겠지만 조금 거침없는 면이 있긴 한 것 같은데.”

 

  그때 설이누나가 은근한 말투로 끼어들었다.

 

  “내가?”

 

  “응, 너.”

 

  도저히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어떤 부분이?”

 

  “너 나한테 바로 말 놓았잖아.”

 

  “……무슨 소리야? 먼저 말 편하게 하자고 한 건 누나였잖아.”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자마자 바로 놓았다고.”

 

  “……그때 바로 안 놓으려니까 장난 하냐고 막…… 그러지 않았어?”

 

  “그런다고 바로 놓는 사람이 어디 흔한 줄 아니? 그것도 4살이나 차이 나는 누나한테?”

 

  나는 황당함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래서 내가 거칠다고? 아니, 그보다도 왜 갑자기 이 얘기가 나온 건지 그것부터가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때,

 

  “……나한텐 안 놓는데. 동갑인데도.”

 

  김소혜가 이불속에 파묻었던 고개를 어느새 쏙 빼 올리고는 부루퉁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난감할 정도로 빤한 시선이었다.

 

  ‘설마…….’

 

  그간 심심할 때마다 왜 둘은 말을 놓지 않느냐고 추궁하듯 물어왔던 것이다. 설마하니 이런 상황을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거나 꼴좋다는 설이누나의 저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를 보며 실실거리며 웃는데, 은근 열이 뻗쳤다.

 

  “그래, 동갑인데 왜 안 놓는 거야. 나한텐 바로 놨으면서.”

 

  “무슨 말을 그런 식으로…….”

 

  “……심지어 나한텐 놓지 않겠냐고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하마터면 ‘그쪽도 안 물어봤잖아요!’ 하고 소리칠 뻔했으나 간신히 참아냈다. 하지만 부글거리는 열을 채 식힐 틈도 없이, 두 사람의 대비되는 표정이 계속해서 나를 자극해왔다. 하나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우중충한 얼굴이고, 다른 하나는 반대로 입이 귀에 걸려 있고…… 결국 욱하는 마음이 벼락처럼 터져 나왔다.

 

  “그럼 말 놔요! 말 놓으면 되잖아.”

 

  “우와, 남자다!”

 

  “…….”

 

  나는 침묵하고 있던 김소혜에게 한 번 더 쏘아붙이듯 말했다.

 

  “나 말 놓을 테니까 너도 놔. 그럼 됐지?”

 

  김소혜는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으나 대신 웅크리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러곤 다시 이불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새삼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거 봐, 거침없잖아.”

 

  씩 웃으며 말을 건네는 설이누나를 보니 그제야 나도 픽 웃음이 났다.

 

  “근데 그것도 혹시 모르는 거 아냐? 너…… 어쩌면 나쁜 남자 스타일일지?”

 

  설이누나가 왼쪽 입가를 씰룩거리며 소리 없이 웃었다. 입을 작게 오므리는 것 같으면서도 보조개가 깊이 파이는 게 무척이나 인상적이어서, 볼 때마다 묘한 느낌을 주는 미소였다.

 

  나는 설이누나가 간혹 짓곤 하는 저 특징적인 미소가 그녀의 본래 ‘색’에 가깝다고 생각해왔는데, 이때의 미소가 저 아름다운 얼굴과 성격, 분위기,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한데 결합시킨 하나의 직관적인 형상으로서 비춰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형상은 흰색과 검정으로만 이루어진 그녀의 원룸 인테리어완 달리, 대단히 매력적인 유채색을 띄고 있었다.

 

 

  이불 속에서 잠이 든 소혜를 확인한 건 자정이 약간 넘었을 때였다. 대화에 간간이 끼어드는 것 같더니 그새 곯아떨어진 모양이었다.

 

  TV에선 좀 전까지 보고 있던 영화가 끝나고 대출광고가 차례로 이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때 괜찮았어? 이제 다시 채널 돌릴까? 아니면 꺼?”

 

  조금 전까지 틀어놨던 영화는 할리우드산 B급 공포물로, 토크쇼가 끝난 뒤 채널을 돌리던 설이누나가 “이거다!” 하며 선택한 것이었다. 조잡한 분장과 진부한 대사가 끔찍해 못 견딜 정도였음에도 굳이 보겠다며 고집을 부리는 이유가 궁금해 물었더니,

 

  “그냥 배경음악삼아 틀어만 놓게.”

 

  설이누나는 소리만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 공포영화의 매력중 하나라며 본인의 기이한 취미를 설명했는데, 바로 시원한 맥주를 손에 쥔 채 창문너머 펼쳐진 달빛 무성한 밤하늘을 보며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름끼치는 비명과 음울한 장송곡을 듣는 것이었다.

 

  실제로 해보니 놀랍도록 기묘한 체험이었다. 창문 밖의 어둠이 금방이라도 내게 손을 뻗어올 것만 같았고, 스피커에서 나오는 비명소리가 웬일인지 맥주의 목 넘김을 한없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으며, 느릿느릿한 클래식이 울려 퍼질 땐 심장의 두근거림이 몇 배나 빨라져 이것이 음악 때문인지 아니면 맥주 때문인지 아리송해지기도 했다. 또한 오싹한 무엇인가가 내 주위를 맴돌며 계속해서 공기를 차갑게 식혀버리는 느낌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마치 유령과 마주앉아 한잔하는 것만 같은…… 어쨌거나 생각보다 나쁘지 않아서 신기했다(물론, 아주 좋지도 않았다).

 

  “소혜 자는 데 어떡할래?”

 

  설이누나가 조금 남은 맥주 캔을 마저 입속으로 털어내며 물었다. 잔잔한 음성이었다.

 

  “음…… 가야지 이제.”

 

  “막차 있어 지금?”

 

  “마을버스는 다 끊겼고 빙 돌아가는 거 하나 남아있을 것 같긴 한데 글쎄…… 한번 찾아봐야지. 없으면 택시 타는 거고.”

 

  “늦었는데 너도 자고갈래?”

 

  “……어?”

 

  오랫동안 알고 지낸 편한 동성친구에게 말하는 것처럼 그러고 그냥 덤덤하게 묻는 것이었다. 설이누나는 별다른 표정변화 하나 없었다. 또다시 나 혼자 당황하고 말았다.

 

  “네가 입을 만한 바지도 있어. 긴 거. 트레이닝복.”

 

  “……됐어 자고 가긴 뭘.”

 

  최대한 담담한 척 말을 하긴 했으나 하도 심장이 두근대던 통에 목소리가 떨려나오는 건 아닌지, 얼굴이 붉어진 건 아닌지 계속해서 신경이 쓰였다.

 

  “왜, 피곤할 텐데. 게다가 우리 지금 프로젝트 얘기도 거의 안 했어. 내일까지 좀 더 대화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혹시 부끄러워서 그래?”

 

  설이누나가 피식 웃으며 물으니까 더더욱 부끄러웠다. “아니 뭐…… 부끄럽다기보다는 집도 얼마 안 먼데 굳이 여기서 잘 필요가 있을까 해서. 집만큼 편한 것도 아니고.”

 

  그즈음 그렇게나 의미심장한 설이누나의 미소가 자꾸만 내게 무언의 아찔함을 심어주고 있었던 탓에, 나는 거절을 말하면서도 혹시나 내가 평생에 다시없을 천금 같은 기회를 날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끊임없이 자문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그럼. 배웅해줄게.”

 

  그리고 어째서 나는 이때의 설이누나의 대답에 그토록 진한 아쉬움을 느꼈던 걸까. 집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도 설이누나는 되묻지 않았다. 소혜가 자는 모습을 한 번 더 확인하고, 나가는 김에 괜히 물 한 모금을 달라 말하고, 집 안을 마지막으로 둘러보면서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자고 간다고 다시 얘기 해볼까? 아니면 영화나 한 편 더 보고 가겠다고 한다거나…….

 

  나는 말을 번복할 용기가 쉬이 솟지 않음에 한탄했다. 취기야 돌아라, 혈관을 도는 피처럼 심장을 움직일 용기를 다오!

 

  “진짜 갈 거지?”

 

  짐을 챙기고, 신발을 신고,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기다렸던 말이 오피스텔 현관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려던 그 순간 마침내 등장했다. 설이누나는 미소 띤 얼굴로 잔잔히 묻고 있었다. 기다리던 물음이었다. 하지만 대답이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 뭐…… 가야지.”

 

  “버스 찾아봤어?”

 

  “있긴 있더라. 막차.”

 

  “서둘러야 되는 거 아니야?”

 

  “그냥 조금 빠르게 걸으면 될 것 같아.”

 

  내가 뭘 하고 있는 걸까. 말하는 도중에도 내내 그 생각을 했다.

 

  “그래 그럼. 아, 그럼 내일은 뭐해? 별 일 없으면 여기 와서 같이 이야기라도 하게. 소혜 같이 있을 때. 이제 정말 얼마 안 남긴 했잖아.”

 

  맞는 말이었다. 과제나 프로젝트 하나하나에 심한 부담감을 느끼는 내가 그나마도 편히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마음 맞는 뛰어난 조원들이 곁에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지 결코 남은 시간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내일은 조금 곤란했다.

 

  “내일은 약속이 있어서…….”

 

  “그래? 언제?”

 

  “점심때부터 보기로 했어.”

 

  설이누나는 내 표현의 미묘함을 곧바로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고 하루 종일?”

 

  “……아마도?”

 

  “너, 걔 만나는구나?”

 

  설이누나가 지칭한 ‘걔’가 누구인지, 말이 나오는 순간 알아차렸으나 당장은 모르는 척 하기로 했다. 어떻게 설이누나가 곧장 해를 짐작해낸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고, 누나의 저 ‘뻔하지’ 하는 표정에 왠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응? 누구?”

 

  “걔 아냐? 전에 나한테 막 예쁘다고 달려들었던 애. 맞지?”

 

  “음…… 어떻게 알았어?”

 

  “그냥 느낌.”

 

  그러고 아무렇지도 씩 웃는데, 저게 여자의 직감이라는 건가 싶었다. 신기했다.

 

  “그 애랑 내일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거야?”

 

  “글쎄…… 그럴 것 같은데?”

 

  설이누나는 ‘흐음’ 하고 한 차례 콧소리를 내더니 불쑥,

 

  “너 걔랑 사겨?”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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