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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더럽(The Love)
작가 : 지놓
작품등록일 : 2019.9.3


"나, 다른 사람 같이 좋아해도 돼?"

조금은 불편할 수 있는 관계와 사랑
그것의 시작, 그리고 그 너머에 관하여.

#대학생 #캠퍼스물 #악의꽃 #섹슈얼리티 #조별과제 #폴리아모리

 
6. 가을이여, 그대 열매가 봄에 피는 시시한 꽃보다 나는 좋다(9)
작성일 : 19-11-09 19:29     조회 : 242     추천 : 0     분량 : 7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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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슬프다…….”

 

  “엥? 이번에도?”

 

  설이누나는 눈물을 흘리진 않았지만 웬일인지 깊은 상실감에 빠진 얼굴이었다.

 

  “히스레저 생각나서.”

 

  “그러니까요. 저도 그래요 언니…….”

 

  김소혜 역시 착잡해진 얼굴로 멍하니 엔딩 크레딧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운이 깊었던 만큼 상실감도 큰 것 같았다.

 

  “어쨌거나…… 좋았어. 진짜 최고다 최고.”

 

  설이누나의 말에 나 역시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인생영화예요, 정말로.”

 

  김소혜는 그제까지도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조용히 읊조렸다. 뭐든 빠지면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하는 성격인 듯싶었다.

 

  “어때, 조커 같은 악당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절대, 절대요.”

 

  설이누나의 물음에 김소혜는 난폭하게 고개를 휘저었다.

 

  “어떤 문장으로도 저 조커를 표현해낼 수 없을 것 같아요. 현실의 존재가 상상을 다 먹어치워 버린 느낌? 비슷한 건 고사하고, 흉내 내는 것조차 벅찰 것 같아요.”

 

  “그래도 일단 자유롭게 얘기나 해보지 뭐. 어쨌거나 빌런(:악당캐릭터)을 꼭 하나 만들고 싶은 건 맞지?”

 

  설이누나의 직설적인 물음에 김소혜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다중인격자가 주인공이니 여러 다양한 캐릭터를 만들어내긴 해야 되잖아요? 그러니 악당이 하나 정돈 있는 게 아무래도…….”

 

  “갑자기 왜 당황하고 그래? 나도 같은 생각이야. 멋들어진 빌런 하나 있으면 좋지. 그럼 소혜 워너비는 역시나 조커?”

 

  “음…… 아주 같지는 않더라도 비슷한 느낌이면 좋을 것 같아요. 뭐랄까 강렬하고…… 매력적인.”

 

  “잔혹하고 또 대범하고.”

 

  나의 덧붙임에 김소혜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음, 근데 너무 추상적이야.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해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러나 아무도 말이 없자 설이누나는 질문을 바꿨다.

 

  “그럼 조커의 행동이나 대사 중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다거나 하는 거 있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는 물음이었다. 차라리 인상 깊지 않은 걸 찾는 게 백배 빠르리라.

 

  “어…… 근데 우리 히어로물 만들려고 하는 거야?”

 

  “그럴 수도, 아닐 수도. 두루두루 생각해보면 좋지 뭐. 일단은 히어로 영화를 봤으니 이에 대해서도 얘기해 보자고.”

 

  잠시 뒤, 김소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대사가 있긴 한데요…… 사실 너무 유명한 거고,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거라…….”

 

  “Why so serious?"

 

  “네, 그거요!”

 

  “그게 왜 좋아요?”

 

  나는 김소혜가 인상 깊었다고 말한 게 아니라 좋아한다고 표현한 것에 관심이 갔다.

 

  “뭐랄까…… 그 짧은 한 마디 만으로 조커란 캐릭터에 숨을 불어넣은 것 같아서요.”

 

  “오…… 그 정도로?”

 

  “조커가 어떤 인물인지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입 찢어진 광대, 잔혹한 연쇄살인마, 광기에 찌든 미치광이…… 어떤 수식어로도 충분치 않죠.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억지로 조합해야 할지도 모르고요. 이를테면 ‘쾌활한 냉소주의자’ 같은? 반면에 이 짧은 대사 한 줄은 제게 그가 어떠한 인물인지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해줘요. 그것도 아주 선명하게요. 이토록 강력하면서도 효율적인 대사는 몇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이런 말 하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지만…… 솔직히 우아하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예요. 캐릭터를 표현해내는 그 간결함이요.”

 

  하긴, 익살스럽게 다가가 장난치듯 공포감을 심어버리는 장면은 가히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압권이었으니까. 조금은 과분할 정도의 찬양이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설득력이 아주 없지도 않았다.

 

  “인물을 함축한 대사라…… 사실 나도 생각하긴 했었거든, 캐릭터마다 그를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대사 하나씩은 꼭 만들어두자고.”

 

  김소혜는 설이누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다 문득 생각났다는 듯,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예전에 작성해놓은 게 하나 있거든요?”

 

  그러곤 갑작스레 가방을 뒤져 자기 노트북을 꺼내는 것이었다.

 

  “어떤?”

 

  “음…… 제가 꼽은 매력적인 빌런의 조건이요. 예전에 잠깐 영화 캐릭터 연구할 때…….”

 

  “오! 연구씩이나?”

 

  “아뇨 그냥…… 과제로…….”

 

  김소혜는 빠르고 자신 있게 꺼내던 것과는 달리, 대단히 쑥스러운 표정으로 느릿느릿 노트북을 건네주었다.

 

  화면에는 ‘매력적인 빌런의 조건’이란 제목의 글이 띄워져 있었다.

 

 

  【매력적인 빌런의 조건】

 

  -빌런의 이름은 다섯 글자 이내가 적당하다. 이름에서부터 공포와 음험함을 풀풀 풍기는 게 좋다.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은 필수에 가깝다.

 

  -빌런의 능력은 어느 방면에서건 탁월해야 한다. 뛰어난 능력은 주인공보다 빌런에게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능력 없는 주인공은 공감의 대상이 되지만, 능력 없는 빌런은 외면의 대상이 된다. 신체적 우월성보단 지적 우월성이 낫다. 지적 우월성 보단 도덕적, 감정적 우월성이 더 좋다. 빌런은 육체보단 머리가, 머리보단 감정이 악마다울 때 더욱 최적의 행위를 해낼 수 있다.

 

  -빌런은 유연해야 한다. 고정관념이 존재해선 안 된다. 창의적이고 대담해야 한다.

 

  -특기 중 하나가 거짓말이면 좋다. 허위와 가식, 속임수는 빌런이 그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 중 단연 돋보인다. 때론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것도 빌런이 기억해야 할 중요한 포인트다. 물론 그것이 꼭 진실을 의미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위트는 매력적인 빌런의 구성요소중 하나다. 웃음을 선사하는 빌런은 인간의 감정에 통달했기에 더욱 무섭다. 빌런은 또한 심각해하면 안 된다. 진지하되 고민하지 않는다. 근심걱정은 그의 몫이 아니다. 열정 또한 빌런에게 요구되는 덕목 중 하나다. 무엇이든 대충하지 않는다. 끝까지 가지 않을 거라면 시작하지도 않는다. 최선을 다해 즐기는 것이 빌런의 본분이다. 빌런은 방해받는 것을 즐긴다. 성취욕을 끌어올려 줄 수 있는 어떠한 대적자도 환영한다. 위풍당당함은 빌런의 주요자질 중 하나다. 움츠려드는 모습은 그에 어울리지 않는다. 기묘함 역시 빌런의 매력 포인트다. 기이한 공포, 다가서기 힘든 위화감. 그러나 물론, 심장을 조이는 강렬함이 선행되어야 한다.

 

  -빌런에겐 과거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이 존재의 이유가 되는 것은 좋지 않다. 빌런의 악함에 타당한 근거가 있다면 진실한 악당의 자질이 아닌 것이다. 과거는 악의 본질을 보여주는 창일뿐, 해명의 도구가 아니다.

 

  -빌런의 행위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유가 타당하지 않으면 않을수록 좋다. 물론 그 기준은 일반인의 관점이다. 가령, 사람을 죽인 이유가 복수나 다른 사상적 근거를 위해서라면 공감은 될지언정 ‘악(惡)’하지 않다. 재미로 사람을 죽인다면 그야말로 악마다. 뚜렷한 기준을 경계로 줄을 탈 수 있어야 한다. 선을 넘는 순간 매력이 떨어진다. 인상을 찌푸리게 만들되, 눈을 감게 해서는 안 된다.

 

  -빌런의 목표와 목적은 크고 악랄할수록 좋다. 염원이 거대할수록 존재감을 인정받는다.

 

  -악당은 악당에게도 악당이다.

 

 

  글은 나와 설이누나의 탄성을 동시에 자아냈다.

 

  “그래, 이거야! 얼핏만 봐도 금방 떠올릴 수 있을 정도의 구체성! 물론 다 만족시키기엔 굉장히 까다로워 보이긴 하지만…… 잘 섞다 보면 괜찮은 게 나올 수도 있겠는데?”

 

  “진짜 열심히 생각하셨나보네요! 조커뿐만 아니라 여러 대단한 빌런들이 문장 곳곳에 숨어있는 것 같아요!”

 

  우리의 감탄어린 찬사가 김소혜의 흥을 돋은 것 같았다. 그녀는 한껏 들뜬 눈으로 우리를 보더니, 곧 근질거려 못 참겠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사를 할 즈음에 조커가 잠깐 자신의 가정사를 언급하잖아요? 아버지가 어머니를 찔러 죽인 다음 울고 있는 자신에게 다가와 한 말이라면서, 마치 속삭이듯 ‘Why so serious…….’ 제겐 그때의 감정 선이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다가왔었어요. 재미있다는 듯 낄낄대는 웃음과 장난스럽게 건네는 말투, 그러면서도 한없이 깔아뭉개버리는 보통의 가치들. 삶, 안정, 평화…… 그렇게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시선은 처음이었거든요. 심지어 자기 자신의 것까지도 말이에요. 결코 자신의 유년시절을 원망하던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어요. 그조차도 장난스럽게 생각했던 거죠. ‘나를 괴물로 만든 건 다름 아닌 이 세상이야!’ 뭐 이런 식의 찌질함이 전혀 없잖아요? 정말이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캐릭터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게다가 분장도 멋지고, 손짓이며 고개 까닥거리는 거 하며 움직임 하나하나가 다 소름 돋을 지경이고!”

 

  조커를 찬양하며 눈을 빛내는 모습이 마치 할리퀸을 보는 것 같았다. 조커에게 물들어 어느새 그를 따라 빌런이 되어버린 미친 정신과 의사. 문득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곤 한쪽은 파랗게, 다른 한쪽은 빨갛게 염색한 김소혜의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핫팬츠를 입고 야구방망이를 든 채 혓바닥을 길게 내미는 그녀…….

 

  “……흠흠.”

 

  “왜, 그래도 난 사연 있는 악당들 싫지 않던데? 괜히 한 번 더 보게 되고, 2차 3차 이야깃거리로도 충분하고.”

 

  설이누나의 말에 김소혜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는 아무래도 정이 잘 안가더라고요. 왠지 변명만 늘어놓는 나약한 기회주의자 같이 느껴져서.”

 

  “그건 네가 너무 무리할 정도의 자격요건을 세워놔서 그런 거 아니야? 주인공도 아니고 고작해야 악당일 뿐인데?”

 

  설이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전 다크나이트의 주인공이 조커라고 생각해요. 어둠이 박쥐를 삼키듯 조커의 존재감이 배트맨을 잡아먹어버렸으니까요. 또 제 경우엔 빌런 쪽에서 사정상 어쩔 수 없었다느니, 사실 그리 나쁜 놈은 아니었다느니 하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하면 괜스레 몰입감이 떨어지는 것 같거든요. 동정하고 싶게 만드는 순간 악인으로선 실격이죠.”

  여하튼 나쁘면 나쁠수록, 못되면 못될수록 환장한다는 소리였다. 그즈음 저쪽에서도 나의 의미심장한 눈길을 눈치 챈 모양인지, 헛기침을 하며 급히 말소리를 낮췄다.

 

  적잖이 들어간 알코올 때문인지, 아니면 ‘조커’덕에 트인 말문 때문인지 우리의 대화는 그로부터도 한참동안이나 쉼 없이 계속되었다. 빌런으로 시작된 주제는 다중인격, 여성캐릭터, 조력자로까지 이어졌고 그에 따라 기상천외한 성격의 캐릭터들이 속속 탄생했다. 특히 설이누나가 많은 의견을 냈다.

 

  “주인공에게 시시콜콜한 잔소리를 끊임없이 해대는 빌런이 있어도 재밌을 것 같아, 다른 영웅들과 비교해가면서 말이야. 저쪽의 거미인간은 폭주하는 전차를 멈춰 세웠다는데 너는 고작해야 비싼 코스튬 하나 차려입고 교통단속 하는 게 전부냐, 누구는 우주에서 침공해온 적들 막고 있는데 너는 한두 푼 훔쳐 도망치는 나 같은 잡범들이나 잡으려고 비싼 돈 들여 차 만들고 비행기 만들고 했느냐, 그러고 폭주족마냥 헤집고 다닐 시간 있으면 차라리 사회의 늘어나는 경찰공무원 공급과잉현상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 해보는 게 더 낫지 않겠느냐…… 뭐 이런 식으로?”

 

  “어…… 괜찮을까?”

 

  조금은 당혹스런 설정이었다.

 

  “또 있어. 직업은 히어로인데 꿈은 패셔니스타인 거야! 문제는 주인공이 악당의 패션을 동경하면서 시작되는 거지. 상징성을 위해 단벌을 고집해야하는 자신에 비해 악당의 옷차림은 매번 더 화려해지는 거야. 막 분해서 못 견뎌하고 있는데, 마침 사람들이 그걸 알곤 막 놀려대기까지 하는 거지. 댓글 같은 걸로 말이야. ‘힘만 센 패알못’, ‘안구테러는 테러가 아닌가요?’ 그래서 참다못한 주인공이 결국엔 악당 코스튬을 따라 하기 시작하는 거야. 어때?”

 

  김소혜가 깔깔거리며 그에 덧붙였다.

 

  “거기다 주인공이 트리플A형이면 더 재밌을 것 같아요. 소심하고, 뒤끝 있고.”

 

  “맞아! 자기한테 달리는 악플들 일일이 다 적어두고, 심하다 싶으면 찾아가 따지고. 아니면 이런 건? 사람들한테 패션 추천을 받는 거야. 디자이너들한테 먼저 연락해서 협찬해달라고 제안한다거나 코스튬 추천 사이트를 만들어서 사람들 반응을 확인하는 거지.”

 

  가만 듣고 있으려니 갈수록 가관이었다.

 

  “너무 막 던지는 거 아냐?”

 

  “뭐 어때. 이러다 좋은 게 나올 수도 있는 거지.”

 

  “그래도 전 꽤 재미있는 것 같은데요?”

 

  어느덧 빨갛게 달아오른 김소혜가 취기어린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은 언제 또 벗었는지 맨눈이었다.

 

  나는 이때 약간 놀라고 말았는데, 안경 하나 차이로 그녀의 인상이 믿기 힘들 정도로 달라보였기 때문이다. 평소의 딱딱하고 깐깐해보이던 모습은 어디가고, 웬 시골서 올라온 풋풋한 소녀하나가 앉아있는 게 아닌가. 눈이 제법 처졌다는 것도, 생각보다 동안이라는 점도 이때 처음 알게 된 것이었다. 눈을 끔벅끔벅 감았다 뜨며 요상한 표정을 짓는데, 제법 순박하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아이고, 나도 취했나.’

 

  게다가 설이누나 역시 취한 게 훤히 보일 정도여서, 나는 슬슬 이 모임의 끝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분위기라도 빨리 전환시켜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누나 영화 생각난 거 있어?”

 

  “응?”

 

  “영화.”

 

  “음…… 영화?”

 

  조금은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다.

 

  “우리 영화 봐? 소혜야 어때?”

 

  “……저야 뭐.” ”그래? 그냥 얘기하는 것도 괜찮은데…… 너 영화 보고 싶어?”

 

  “아니 뭐 상관은 없는데 시간도 꽤 늦었고 해서. 만약 볼 거라면 지금이라도 보기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그녀들의 떨떠름한 반응은 사실 모두 예상된 것이었다. 말이 쉽지, 세 편의 영화를 연속해서 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나는 밤이 늦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일깨워줌으로써 슬슬 발 뺄 준비를 했던 것이다.

 

  처음의 설렘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진지 오래였고, 더욱이 우리 콘텐츠를 위해 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점차 사그라지던 중이었다. 내 눈에 들어오는 거라곤 그저 술에 취해 약간 맛이 간 듯 보이는 두 명의 여성과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맥주 캔들, 그리고 탁자 위의 식어버린 치킨 몇 조각이 전부였으므로, 더는 이곳에서 의미 있는 뭔가를 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나 역시 당장이라도 누우면 잠들 것 같이 피로한 상태인데다,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해야 하니 별 부담 없는 저들과는 입장이 달랐다. 시답잖은 얘기로 시간을 보내는 게 그리 달갑지 않았던 것이다(심지어 가면 갈수록 재미도 없었다). 말이 밤샘이지 조금만 지나면 둘은 곧 곯아떨어질 게 뻔했다. 할증택시를 불러 홀로 처량히 돌아가는 내 모습을 상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시간 늦는 게 왜?”

 

  설이누나가 눈을 번쩍 뜨며 날카롭게 물었다. 물론 예상했던 바였다.

 

  “늦게까지 놀면서 얘기하면 물론 좋기야 하겠지만…… 다들 피곤할 거 아냐. 술도 제법 마셨고. 나는 또 돌아가긴 해야 하니까 아주 늦는 것은 쫌…….”

 

  “흠…….”

 

  돌아가야 한다는 걸 강조하니 설이누나의 기세가 조금 주춤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때다 싶어 요란하게 기지개를 켰다. 내 몸 곳곳에서 따다닥 하며 뼈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설이누나는 나를 한 번 돌아보더니, 그제야 저들만 편한 차림으로 편히 누워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나는 여성의 침대 위에 올라앉는 것만으로도 황송했던 나머지, 뻣뻣하고 불편한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설이누나의 눈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비로소 나의 편치 않은 상황들이 이래저래 신경 쓰이게 된 모양이었다.

 

  그때였다.

 

  “근데 우리 아직 덜 친해졌는데…….”

 

  의외의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반응이 튀어나왔다. 흐리멍덩한 눈을 약간 아래로 내려 깐 채 가만 침묵하고 있던 김소혜가 난데없이 툭하고 내뱉었던 것이다. 눈을 마주친 건 아니었지만 그녀의 고개는 나를 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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