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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기타
대망 : 아마쿠사의 신
작가 : 한연화
작품등록일 : 2019.9.20

"제가 원하는 것은 전국을 일통하고 강한 군주가 되어 백성들을 덕으로 교화하는 것입니다. 그 길에는 지독한 피비린내와 가시밭길만이 있겠지요. 이런 저라도 받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끝없는 전란이 이어지는 전국시대의 일본. 천하를 무로 덮는 운명을 타고났으나 누나에 의해 사람이되 사람이 아닌 자, 히닌이 되어 쫓겨난 오와리국의 후계 유죠와 인간들의 전장에서 태어난 전쟁의 여신 아마쿠사미코토의 전국일통을 향한 일대기가 시작된다. 격랑의 역사 속, 그들의 삶과 사랑은 과연 어찌 될 것인가?

 
제19장 천지인(天地人)(3)
작성일 : 19-11-09 06:11     조회 : 237     추천 : 0     분량 : 7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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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미노국으로 향하는 내내 날씨는 맑고 화창했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소슬하게 불어와 일행의 뺨과 머리카락을 간질였고, 푸르게 펼쳐진 하늘 위로는 하얀 구름이 떠가고, 비 한 점 내리지 않는 땅에는 하얗고 노랗고 붉은 가을들꽃들이 지천으로 피어 있었고, 그 주위로는 붉은 꽁지를 단 잠자리들이 무리를 지어 낮게 날아다녔다.

 

  “가을에는 비가 와야 제격인데.”

 

  그러나 일행 중 루이스만은 유일하게 이런 맑은 날씨를 반기지 않았다. 그는 퉁퉁 불은 얼굴을 하고 입술을 표주박처럼 내밀고 발끝으로 작은 자갈돌들을 걷어차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낭인들은 그런 그의 행동거지에 눈살을 찌푸렸고, 결국, 그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낭인이 그렇게 맑은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일 년 내내 비가 오는 곳에서 살지 그러냐고 이죽거리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루이스는 곧바로 그 낭인의 멱살을 잡고 “내가 살다 온 곳이 딱 그 모양 그 꼴이었다.”라고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릅떴다.

 

  “하. 주군, 아무래도 저희가 웬 미친놈을 하나 데리고 다니는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정말 미친놈이 따로 없다니까요.”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며 허허 웃고 넘어가던 몇몇 낭인들조차 이제는 루이스의 행동을 참을 수 없다며 그를 내칠 것을 유죠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죠는 오히려 그런 루이스의 행동에 호기심을 강하게 느꼈고, 머리끈 없이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다니는 그에게 자신의 머리끈을 건네주며 호감을 사려 애썼다.

 

  “머리를 좀 묶는 것이 어떠한가? 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는다만.”

  “마음에 드는 머리끈이 없어서요. 그나마 아마쿠사씨의 머리끈이 마음에 들었는데 그마저도 빌려줬다 다시 뺏어갔잖아요.”

 

  이제는 유죠와 아마쿠사미코토를 대하는 루이스의 말투도 많이 편해져 있었다. 루이스는 한층 편안해진 말투에 유죠는 유죠씨, 아마쿠사미코토는 아마쿠사씨라고 부르며 편하게 대했고,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낭인들이 주군과 아마쿠사님께 예의를 갖추라고 거듭 말했지만 그는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가을비를 좋아하나?”

 

  유죠가 물었다. 유죠의 물음에 무언가 한참을 생각하던 루이스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루이스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번에도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원래 망해야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법이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지?”

  “말 그대로에요. 원래 모든 걸 새로 시작하려면 기존의 것은 없어져야 하죠. 그것은 시대도 마찬가지고요.”

  “루이스?”

  “유죠씨, 당신도 잘 알겠죠? 일본인들은 미신을 참 잘 믿어요. 무엇이 조금만 잘 안 되도 신이 분노했기 때문이라느니, 세상이 망할 징조라느니 하며 떠들어대죠.”

  “한데?”

  “그런 그들이 마치 한여름 장마철처럼 쏟아지는 장대비에 수확을 앞둔 농작물을 잃고 나면 무엇을 할까요? 가장 먼저 신사나 사원으로 달려가 제물을 바치겠죠. 자기들은 당장 먹고 입을 것도 없으면서 빚을 내 새전이며 음식을 장만해 신사에 막대한 제물을 바치고, 절에 시주를 하겠죠. 그러다 집안이 완전히 망해 겨울이 되면 아내나 자식을 내다팔고요.”

  “…….”

  “그리고 지금껏 신사와 사원은 그렇게 세력을 불려왔고, 끝내는 다이묘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기에 이르렀어요. 아닌가요?”

  “…….”

  “유죠씨.”

  “말하라.”

  “이제 내가 말한 가을비가 장인 구레나룻 밑에서 피한다는 그 가을비가 아닌 것은 잘 알았겠죠? 나는 장대비 같은 가을비가 되어 당신을 도와 신사와 사원들을 철저히 탄압할 겁니다. 그래야만 당신의 시대가 새로 시작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그것이 당신의 가신이 되기로 한 내가 해야 할 일이니까요.”

  “그대의 종교를 위해서인가?”

  “피차 마찬가지 아닌가요. 당신은 강한 군주가 되어 백성들을 덕으로 교화하기 위해 나를 택했고, 나는 가톨릭을 공인받기 위해 당신을 택했어요. 그러니 우리는 서로의 목적을 위해 서로를 위한 가을비가 되는 것뿐이죠.”

 

  아마쿠사미코토는 이번에도 검집에 손을 가져갔다. 정말 두고 보면 볼수록 루이스는 ‘내 사람이 될 수 없다면 죽여야 할 자’가 틀림없었다.

 

  “왜 굳이 낭인들에게 미움을 받을 일을 자처하는 거지?”

 

  아마쿠사미코토가 유죠와 루이스 사이로 끼어들며 물었다. 루이스는 허리춤에 찬 검집을 만지작거리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내가 굳이 낭인들과 친해져야 할 이유라도 있나요?”

  “우리는 서로의 운명을 함께 하는 동료들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서로간의 마찰은 최대한 피하고 잘 지내야만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본다만.”

  “웃기고 계시네.”

  “뭐?”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지랄하고 자빠졌네가 올바른 표현이겠네요.”

 

  루이스가 한껏 비꼬는 듯한 표정으로 아마쿠사미코토를 돌아보았다. 루이스는 은반지를 낀 손가락으로 흰 이를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당신은 인간을 믿어요?”

  “무슨 뜻이냐?”

  “말 그대로에요. 당신은 인간을 믿냐고요.”

  “내 분명히 무슨 뜻이냐고 물었을 텐데.”

  “당신도 알다시피 인간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아요.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한다 해도 그것은 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한 행동에 다름 아니죠.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서든, 스스로의 추악한 내면을 감추기 위해서든.”

  “한데?”

  “생각해봐요. 저들도 결국, 나처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유죠씨를 선택한 것에 불과하겠죠. 그리고 그것이 실현되지 않으면 언제든 유죠씨를 배신할 테고요.”

  “…….”

  “그것이 인간의 본질이에요. 그런데 동료라. 와, 지나가는 개가 웃겠네.”

 

  더 이상 루이스의 말을 참다못한 낭인들이 루이스의 멱살이며 머리채를 잡았다. 그러나 루이스는 이번에는 낭인들 모두의 얼굴이며 복부에 정확히 주먹을 꽂아 넣고 다리를 걷어차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것들이 한 번 당해주니 아주 사람을 만만히 보고 있었나 보네.”

  “끄으으.”

  “아, 역시 이 말이 맞아. 천하에 쓸모없는 것이 바로 낭인이라더니. 봐봐. 이렇게 쉽게 당하잖아.”

  “으으. 네이놈.”

  “엄살 그만 피우고 일어나. 내가 알기로, 고통을 이겨내는 극기라는 것이 무가의 정신이라던데 아닌가?”

 

  그날 이후로 낭인들은 더욱더 루이스를 따돌리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루이스가 낭인들을 따돌린다는 것이 맞는 말인지도 몰랐다. 루이스는 일행이 끼니를 해결할 때도 저 멀리서 혼자 음식을 먹었고, 잠을 잘 때도 저만치 떨어진 곳에서 새우잠을 잤다. 낭인들은 루이스를 곁에서 보지 않아도 되는 것에 만족해하는 듯했지만 유죠만은 이 상황을 매우 불편해했는데 그는 늘 루이스를 곁에 불러 함께 음식을 먹으려 했고, 잠도 함께 자려 했다.

 

  “나도 인간을 믿지 않는다.”

 

  어느 날 밤, 유죠는 언제나처럼 저만치에서 혼자 모포를 덮고 자는 루이스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루이스가 모포를 들고 다른 쪽으로 가려 했으나 유죠는 그에게 술이라도 같이 하지 않겠느냐며 작은 병을 내밀었다.

 

  “하? 나이도 어린데 벌써부터 잘하는 짓이군요. 왜, 아예 계집질까지 하지 그럽니까.”

  “아직 계집질을 할 만큼 몸이 성장하지는 않아서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는 아마쿠사가 있지 않나.”

  “의외로 일편단심이군요.”

  “사랑하는 여인이 있다면 그 여인 외에 다른 여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 나라의 다이묘들은 측실을 여럿 두지 않습니까? 사실, 유럽을 벗어나니 가장 적응하기 힘든 것이 일부다처제더군요.”

  “어째서?”

  “우리는 철저한 일부일처제라서요. 평생 한 명의 부인만을 둘 수 있지요. 물론, 이혼을 하는 것도 불가능하고요. 그러니 남편은 아내에게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 수밖에요.”

  “그러면 남만의 다이묘들은 측실을 들일 수 없단 말인가?”

  “영주뿐만 아니라 국왕이나 황제도 아내를 한 명밖에 둘 수 없지요. 그런데 일본에서는 천황도 측실을 두더군요.”

  “그대는 마음에 둔 여인이 있었나?”

 

  유죠의 말에 루이스가 병을 낚아채 입에 대고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루이스는 아이씨,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뭘 그런 걸 묻고 그래요. 술맛 떨어지게.”

  “있었나보군.”

  “내가 사제가 된 게 열여섯 살 때 일이에요. 그러니 여자고 뭐고 눈에 들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더군요.”

 

  말을 마친 루이스는 유죠에게 술병을 돌려주었다. 유죠는 루이스에게 말했다.

 

  “이 시대는 말이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시대다. 그리고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는 시대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내가 믿었던 누군가가 나를 배신할지 모르는 그런 시대니까.”

  “…….”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나 또한 내가 믿었던 이들에게 배신당했으니.”

 

  유죠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루이스가 술병을 도로 빼앗았다. 루이스는 고개를 뒤로 젖히고 술을 입으로 쏟아 넣었다. 마치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술을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고 모두 받아 마신 루이스가 검은 옷소매로 입을 닦으며 유죠를 바라보았다. 수단이라 했던가. 일본의 의복과는 다르게 생긴 가톨릭 사제복을 온몸에 두르고 있어서인지 루이스의 표정은 한층 더 매서워보였다.

 

  “당신이요?”

  “그래. 나 또한 그러하였다.”

  “당신이 누구를 믿었다고요.”

  “나는 내 아버지의 가신들을 믿었다. 아니, 어쩌면 그들이 내 아버지의 가신이라는 것을 믿었을지도. 그들이 감히 누님의 편에 서서 나를 반역자로 몰아 후계의 자리를 빼앗고 히닌으로 만들어 오와리국 밖으로 내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의 죽음이 닥쳐오는데도 그토록 안일했고, 너무도 쉽게 누님에게 자리를 빼앗겼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루이스가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귓불에 걸린 고리를 매만졌다. 달은 보이지 않았지만 대신 별빛이 총총히 반짝이는 하늘 덕택에 루이스의 손가락과 손등에 새겨진 문신이 선명하게 드러나 보였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도 계속 사람을 믿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내 사람이 된 이들을 믿을 것이다. 내 곁에 있는 이들을 믿고, 그들과 함께 나아갈 것이다.”

  “와, 정말 성인군자 같은 소리를 하는군요. 아버지의 가신들도 당신을 배신했다면서요. 그런데 이번에도 또 배신당하면 어쩌려고 그러는데요.”

  “그대의 눈에는 내가 성인군자로 보이는가?”

  “그러면 아니에요?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애새끼로밖에 안 보이는데.”

  “루이스 프로이스.”

  “왜요?”

  “그대는 나를 잘못 봐도 한참을 잘못 보고 있군. 일전에 그대가 한 말을 기억하나?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지?”

  “그런데요?”

  “내가 내 사람들을 믿지 않으면 그들이 나를 믿어주겠는가? 또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겠는가?”

  “……!”

  “이런 것이다, 루이스. 믿음이란, 나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다. 내 사람들이 나를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게 만드는 수단.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루이스가 마치 기가 질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유죠를 바라보았다. 유죠는 그런 루이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윽고 루이스가 한숨을 푹 쉬며 담뱃대를 입에 물었다.

 

  “그건 거의 종교나 다름없는데요.”

  “그런가?”

  “그래요. 종교에서 말하는 순교라는 게 딱 그런 거거든요. 믿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뭐 그런 거요. 그런데 당신 말처럼 당신을 믿어서 목숨을 바친다면 그것이 종교와 다를 게 뭐가 있죠?”

 

  루이스의 말에 유죠는 그의 입가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가 담배연기를 한 번 들이마시고 후, 하고 내뱉으며 말했다.

 

  “인정하죠. 내가 당신을 잘못 보고 있었다는 걸. 당신은 단순히 전국일통을 이루기만 할 인물이 아니에요. 천황을 발 아래 두기만 할 인물은 더더욱 아니고요.”

  “…….”

  “물론, 당신이 원하는 강한 군주가 되어 백성들을 덕으로 교화하겠다는 이상을 위해 신사와 사원 세력을 일소하겠죠. 그러나 그것이 우리 가톨릭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네요.”

  “…….”

  “당신이 가톨릭을 공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의 이상을 위해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일 테니까요.”

  “…….”

  “한마디로 말할까요? 당신은 지금 스스로 신이 되려 하고 있는 거예요. 아니, 어쩌면 신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되려 하고 있는 거죠.”

 

  유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 자신은 신이 되려 하는 것일까? 아니, 정말 신을 넘어선 그 무언가가 되려 하는 것일까? 여태 한 번도 신이 된다거나 신을 넘어선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은 신에게조차 충을 요구하고, 사츠마의 낭인들을 휘하에 두고, 이제는 먼 이국 땅에서 온 낯선 종교의 사제에게조차 자신을 믿을 것을 강요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어쩌면 회유라고 불러야 할지도요.”

 

  유죠의 생각을 눈치 챈 것인지 루이스가 담배를 끄고 발치에 침을 탁 뱉었다. 루이스는 말했다.

 

  “당신은 지금 내게 당신을 믿을 것을 요구하고 있어요. 그러나 결코 강요하는 것은 아니죠. 오히려 내게 좋은 모습들만을 보여주려 애쓰며 당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온전히 믿게 만들려 하고 있어요. 그러니 당신의 행동은 강요가 아니라 회유라고 해야 맞는 것이겠죠.”

  “…….”

  “그리고 내가 당신을 믿게 되었다면 아마쿠사씨나 사츠마의 낭인들에게도 당신을 믿는다는 걸 행동으로 보여줄 것을 은연중에 요구하고 있고요.”

  “…….”

  “그러나 당신 역시 나를 잘못 봤어요. 나는 무언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놈은 절대 아니에요. 나는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것보다 더한 가치가 있을 수 없다 보기 때문에 무슨 일이 eg 끝까지 살아 있으라고 하는 쪽이죠. 그것이 믿음을 배반하고 배교자가 되는 일이라 할지도요.”

  “…….”

  “그러니 나를 회유하려면 먼저 아마쿠사씨부터 제대로 단속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게 좋을 거예요. 그녀는 당신의 곁에 있을 수 없는 자는 모두 죽이려 드니까요. 그리고 지금 당장이라도 내가 당신의 곁을 떠난다면 나를 죽이고 말 거예요.”

 

  루이스의 말을 듣던 유죠가 별안간, 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곧 루이스의 무릎 위로 뭔가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유죠는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두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요구 조건은 들어줄 수 없다. 그리고 내가 그대를 회유하고 있다 했나? 말 한 번 잘했다, 루이스 프로이스. 틀렸다. 나는 지금 그대를 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루이스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런 루이스의 모습을 지켜보던 유죠가 재미있다는 듯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그대야말로 나를 한참 잘못 보았다. 나는 마냥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대가 나를 믿지 않는 것을 어디까지나 참을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아마쿠사에 대한 그대의 무례에 대해서는 더더욱 참을 수 없는 사람이다.”

  “……!”

  “그리고 우리는 지금 미노국에 가는 길이다. 자, 내가 그대의 언행을 참아내지 못한다면 미노국에 가서 무엇을 하게 될지 예상 가능하지 않은가?”

 

  유죠가 무릎 위에 내려놓은 공책의 가죽표지를 매만지는 루이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유죠는 그런 루이스의 손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대도 알다시피 사이토 도시마사는 수가 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

  “그런데 간도 크게 그런 자의 침실을 엿보고 그것을 그림으로 남겼더군. 이만하면 그대가 외국의 첩자라는 증거가 충분하지 않겠나?”

  “아니야. 나는……!”

  “그러나 나는 이 일을 덮을 것이다. 물론, 그대의 공책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낭인들은 전혀 알지 못할 것이고.”

 

  말을 마치고 일어서며 유죠는 루이스의 옷 속에 들어 있는 유리병을 꺼냈다. 유리병에는 자그마한 설탕덩어리들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내가 가져가기로 하지. 첩자의 존재를 덮어주는 것치고는 너무 싼 대가이지만. 그렇지 않은가?”

  “…….”

  “그러니 나를 믿는 것이 좋을 것이다, 루이스 프로이스.”

 

  유죠가 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던 루이스는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일본에서 악마보다 더한 존재를 만났나보다 생각하는 루이스의 등 뒤로 검은 날개가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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