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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102화
작성일 : 19-11-08 23:07     조회 : 234     추천 : 0     분량 : 93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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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는 단숨에 밑으로 뛰어내렸다. 잔해는 너무나도 복잡해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봄이는 자신이 다시 이 지옥같은 곳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기억해내려 해 봐도 이 곳에서의 유쾌한 추억은 없었다. 딱 하나 있다면 지금 세계에서는 꿈도 못 꾸는 따뜻한 물로 목욕을 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 뒤에 금방 온 몸에 오물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의미없는 일이 돼 버렸지만.

 

  봄이는 방금 전에 당당하게 결심한 것과는 달리 산처럼 쌓인 콘크리트 더미를 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제 이곳에서 펜던트를 찾아야만 했다. 자신을 비웃는 머릿속 존재에게 지기 싫다는 자존심 하나만으로 뛰어내리기는 했지만, 이 난장판과도 같은 잔해 더미 사이에서 어떻게 손바닥만한 펜던트 하나를 찾는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고 불만을 품을 시간조차 봄이에게는 없었다. 자기도 모르는 새에 목표를 코앞에 두고 망설이는 바람에 시간을 얼마나 지체했는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폐쇄 작업이 끝날 때까지는 앞으로 몇 분이 남았을까? 과연 그 전까지 펜던트를 찾을 수 있을까? 그보다도 앞으로 얼마나 더 자신의 존재를 이들에게 숨길 수 있을까........

 

  봄이는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아 무작정 잔해를 파헤쳤다. 누군가 보기라도 하면 틀림없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무식한 방법이었다. 봄이는 마지막으로 펜던트를 봤던 게 언제였는지 생각나지도 않았고, 설령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완전히 폭삭 무너져내려 본래의 형태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저택에서 붕괴되기 전 장소를 정확히 찾아낸다는 것은 코미디에 가까웠다. 이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까마귀 저택은 지하로부터 발생한 화재와 지진으로 인해 붕괴되기 전에도 제법 거대했기 때문에, 어지럽게 널린 굵은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쌓인 면적은 엄청나게 넓었다. 잔해 더미 가장자리에는 큰 불도저가 한 대 보였다. 다루기 어려운 잔해들을 밀어내기 위해 쓰이는 듯했다.

 

  그 보기만 해도 절망스러워지는 면적 너비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봄이는 어째서 자경단 조사대원들이 자신을 아직까지 발견하지 못할 수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이 넓은 조사 구역 안에서 봄이를 찾는다는 것이 봄이가 잔해 속에서 펜던트를 찾는 것과 비슷한 고역일 것이다.

 

  봄이는 회중전등을 입에 물고 서툰 왼팔만으로 무겁고 진흙투성이인 콘크리트 잔해들을 뒤적거렸다. 당장이라도 이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팔깁스를 벗어던지고 오른팔을 사용하고 싶었다. 봄이는 두 팔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던 사람이 팔을 하나 쓰지 못하게 된다는 게 이렇게 답답하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그때서야 깨달았다.

 

  사람은 왜 팔이 두 개뿐일까! 만약 인간이 날 때부터 팔이 아홉 개쯤 되었다면 그들이 말하는 사회 생활에서의 인간 노동자들의 능률이 지금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았을까? 이럴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전자 시술 부작용으로 인해 팔이 세 개로 태어난 기형아가 봄이를 부러워하는 동안 봄이는 잠시나마 그 기형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인간이란 자신이 얼마나 혜택이나 권리를 누리고 있던간에 영 그 정도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동물이었다.

 

  콘크리트와 날카로운 철근 더미들을 파헤치던 봄이는 돌무더기 밑에서 어딘가 낯익은 물건을 보았다. 힘겹게 꺼낸 그것은 깨진 먼지투성이 액자였다. 턱을 당당하게 내밀고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활짝 편 어떤 서양인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였는데 보기만 해도 빨려들어갈 것 같은 눈동자가 상당히 섬뜩한 얼굴이었다. 기분이 나빠진 봄이가 재빨리 치우려고 하는데 액자 아래에 어떤 글귀가 보였다. 그곳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정말로 네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깊은 혐오감과 분노에 휩싸인 봄이는 기겁하며 액자를 내던져버렸다. 액자가 완전히 조각나 깨졌음에도 쉽사리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봄이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유지하지 못하고 불안정하게 떨렸고, 이마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흘러내렸다. 방금 자신은 무엇을 본 것일까? 그 액자는 저택이 붕괴되기 전 봄이가 본 적이 있는 그림이었다. 봄이가 기억하기로는 액자 아래에 그런 글귀는 없었는데.........

 

  봄이는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액자 밑에 씌인 글귀를 보았다. 금이 가기는 했지만 분명히 ‘파울 요제프’ 라고 씌여 있었다. 그제서야 봄이는 아주 조금이나마 안도할 수 있었다. 아주 조금.

 

  그래, 난 아직도 두려워하고 있는 거야. 진실을 마주하는 게 두려워서, 무자비할 정도로 냉혹한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싫어서 자꾸만 마음이 약해지는 거야. 이렇게 나약한 마음을 가진 주제에 스스로를 속이고, 두렵지 않다고 변명해가며 누구나 알 만한 뻔한 거짓말이나 하고 있으니까 이런 환각을 보게 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깔린 돌무더기를 들추기 위해 팔을 집어넣은 순간 손가락에 엄청난 고통이 전해졌다. 재빨리 손을 빼고 확인해 보니 돌무더기 아래에는 깨진 유리조각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봄이는 피가 흥건해진 손바닥의 고통을 잊기 위해 자신의 팔뚝을 꽉 깨물었다.

 

  손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땅에 뚝뚝 떨어졌다. 그 핏방울들은 점차 스멀스멀 움직이더니 마치 어떤 글자와 같은 형태로 변했다.

 

  ‘지금이라도 포기해도 좋아.’

 

  봄이는 재빨리 일어나 신발로 핏방울 글씨들을 벅벅 쓸어버렸다.

 

  그런 다음 물고 있던 회중전등을 잠시 뱉고 마침 근처에 버려져 있던 붕대 조각을 입으로 찢어 상처에 꽉 동여맸다.

 

  “포기 안 한다면 어쩔 건데?”

 

  봄이는 그 외침이 자신의 머릿속에다 대고 한 외침인지, 아니면 정말로 입 밖으로 외친 것인지 잘 몰랐다.

 

  이미 구역 폐쇄 시간은 지나버렸다. 봄이도 분명히 그 정도 시간의 흐름은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펜던트만큼은 도저히 찾지 못했다. 손가락 관절이 뒤틀리고, 손톱이 모두 닳아 빠져버리고, 제대로 지혈하지 못한 손바닥에 동여맨 붕대가 핏빛으로 물들 때까지도 봄이는 끝내 펜던트를 찾지 못했다.

 

  사실 애초부터 터무니없는 계획이기는 했다. 이미 숲 속에서 헤매느라 지칠 대로 지친 소녀가 한 쪽 팔만으로 이 거대한 잔해 속에서 개미만 한 펜던트 하나를 찾는다?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용기는 점차 계획된 시간을 넘겼다는 불안감과 공포로 바뀌어갔다. 봄이가 이곳까지 숨어들어와 있다는 사실을 삼촌이 알까? 감시자는 캠프로 돌아가서 뭐라고 보고했을까? 본부로 돌아가기로 약속한 시간에 봄이가 보이지 않으면 삼촌은 어떻게 할까? 혹시 벌써 봄이가 또다시 독단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자신을 잡기 위해 대원들을 보낸 건 아닐까?

 

  봄이는 그럴 리 없다고 끝임없이 되새기며 파헤치고, 파헤치고, 또 파헤쳤다. 손바닥은 걸쭉한 피와 거무스름한 진흙이 엉겨붙어 엉망이 되었고, 봄이의 깨끗했던 새 옷들에도 진흙이 묻었다. 그러나 다 헛수고였다. 봄이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래서야 지금껏 자신 내면의 두려움과 싸우며 ‘진짜’ 진실을 찾기 위해 내렸던 결단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정말로 운명이란 거스를 수 없는 것인가? 운명이란 것은 개척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미리 짜둔 각본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정해진 외길을 걷는 것이 진짜 운명일까? 인간은, 동물들은, 나아가 온 세상의 자의식을 가진 모든 생물체들은 촘촘히 짜여진 정해진 플롯 속에서 정해진 행동만을 반복하는 태엽 인형처럼 정해진 삶만을 살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는 것일까? 만약 조금이라도 정해진 길에서 벗어나려는 기미가 보인다면 곧바로 초월적인 존재가 간섭하여 제자리로 돌아오도록 알고리즘이 짜여져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결국 봄이는 정해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이봐, 거기 밑에 누구야?”

 

  점점 의지를 잃어가던 봄이는 펜던트를 찾는 데에만 집중하느라 은밀하게 행동하는 것을 잊었다. 가슴이 철렁한 봄이가 재빨리 손전등을 끄고 엎드렸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꼼짝 마. 거기 있다는 것 다 안다. 암구호!”

 

  암구호? 암구호가 뭐지? 암호 같은 건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림자는 그렇게 소리치고는 잔해 밑으로 뛰어내려 조금씩 봄이에게 다가왔다.

 

  “암구호! 말하지 않으면 쏘겠다!”

 

  그림자가 소총을 장전하는 걸쇠 소리가 울렸다.

 

  눈 깜짝할 새에 그림자는 봄이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젠장, 어쩌면 좋단 말인가? 그림자의 반응으로 보아 이미 봄이의 존재 자체는 들통난 것이 확실했다. 그리고 지금 봄이가 허튼 짓이라도 했다간 당장이라도 쏴버릴 것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여기까지 와서 꼬리를 내리고 붙잡혀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되면 또다시 봄이의 진실도, 결심도, 각오도 모조리 부서진 흙더미처럼 조각나 흩어져버릴 것이다.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라도 순순히 붙잡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거기 너, 내 말 안 들려?”

 

  이윽고 봄이의 얼굴에 회중전등이 비춰졌다. 봄이는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팔을(-두 팔을 들어올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들어올렸다. 그림자는 봄이의 몸 구석구석을 회중전등으로 훑고는 말했다.

 

  “허가받은 인원은 아닌 것 같군. 네놈은 누구냐? 침입자인가? 여기 온 목적을 밝혀라.”

 

  불행 중 다행인지는 몰라도, 그림자는 혼자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저항할 수는 없었다. 봄이에게는 무기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 죄송한데 한 번만 봐주시면 안 될까요? 전 그저 잃어버린 물건을 찾으러 온 것 뿐이거든요.”

 

  “허튼 소릴............잠깐.”

 

  그림자가 말을 끊더니 총을 내리고 봄이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두워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다가오니 은근히 섬뜩한 기분이었다.

 

  “너, 총수님한테 삼촌이라고 불렀던 꼬맹이 아니냐?”

 

  “누구........?”

 

  정말 의아하게도 그림자는 봄이를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봄이에게는 낯선 목소리였다. 얼굴이라도 보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림자는 봄이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었다. 그가 회중전등을 계속해서 얼굴에다 비추고 있었기 때문에 봄이는 눈이 아렸다. 왠지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그렇게 보채더니 결국 몰래 여기까지 숨어든 모양이군. 아무리 그래도 여기에 오면 안 돼. 없던 일로 해 줄 테니 어서 돌아가. 이미 네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자경단 내에 쫙 퍼졌으니까.”

 

  “얼굴을 보여 주세요.”

 

  봄이가 참지 못하고 부탁했다.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회중전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췄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처음 본 사람 같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20대 초반은 되었을까? 상훈보다도 어려 보였다. 어디선가 잠깐 마주쳤던가? 자세히 보니 기억날 것 같기도.........

 

  봄이는 상대가 민망해할 정도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 후에야 가까스로 얼굴을 기억해냈다. 바로 저택 잔해까지 데려다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삼촌에게 거절당했을 때 천막 안에 함께 있었던 청년이었다. 자신을 조사팀 소속이라고 말해주었던, 또한 잔해 속에서 여러 귀중품들이 발견된다고 말해주었던 그 청년이었다.

 

  “아, 아! 당신이었군요!”

 

  봄이가 기억하고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어떻게든 이 상황을 좋게 넘기기 위해 봄이는 일부러 과도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 나야. 알았으면 어서 여기에서 나가. 네가 여기에 있다는 게 알려지면 총수님마저도 널 감싸줄 수 없을 거야.”

 

  “무슨 말씀하시는진 알겠지만........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요. 꼭 찾아야 할 물건이 있거든요.”

 

  “꼬마, 내가 지금 너한테 부탁하는 걸로 보여?”

 

  느닷없이 청년의 언성이 높아졌다. 진심으로 봄이를 닦달한다기보다는 따끔한 주의를 주려는 것 같았다.

 

  “자경단 내에서의 네 처지를 모르는 거야? 네가 여기 있다는 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넌 정말로 끝장이야. 안 그래도 식인종 저택에서 발견된 널 좋게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 것 같아? 더구나 최근에 식인종 무리들한테 초소가 공격당했던 일 때문에 그 문제로 연관되어 있는 네가 좋게 보일 리가 없어. 그나마 그 때는 총수님의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유야무야 넘어갔을 지 몰라도 이번에 또다시 규율을 어겼다는 게 밝혀지면......... 더 이상 설명할 시간 없어. 어서 돌아가, 빨리.”

 

  “생각해주시는 건 정말 감사하지만, 그래도 전 돌아갈 수 없어요.”

 

  “젠장, 이해를 못 하는 거야? 너, 틀림없이 식인종들과 한 패로 몰려서 죽거나 추방당할 거라고.”

 

  “어차피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그런 건 여기 오기 전부터 각오했어요. 이왕 다 무릅쓰고 여기까지 온 거, 목적은 확실히 이뤄야죠.”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청년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보였다. 아마도 지금 그에게는 봄이가 나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저를 좀 도와주셨으면 좋겠어요.”

 

  청년은 금방이라도 펄쩍 뛸 듯한 얼굴이었다.

 

  “지금 장난하는 거냐?”

 

  “아니, 장난이 아니에요. 어쩌면 저한테는 제가 떠나온 여정 이래 제일 중요한 순간일 거예요. 그런 중요한 순간에 제가 왜 장난을 하겠어요?”

 

  “진심으로 하는 소리라는 거야?”

 

  “물론이죠. 진심으로 부탁드리는 거예요.”

 

  봄이의 너무나도 뻔뻔한 부탁에 청년은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그는 금방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정신 나갔어? 난 네 적이나 다름없어. 아직은 적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얼마 안 가 적이 되겠지. 수색대가 널 찾으면 식인종 저택에서 발견된 네가 다시 잔해로 돌아가려 했다는 소문이 퍼질 테고, 안 그래도 의심을 한 몸에 받던 넌 빼도박도 못할 용의자로 낙인찍히겠지. 그러면 이제 더는 되돌릴 수 없게 돼. 어쩌면 공개재판을 당할 수도 있어. 그러니 지금이라도 어서 돌아가. 아직 늦지 않았어.”

 

  “늦지 않았다라.........”

 

  봄이가 천천히 말끝을 늘어뜨렸다.

 

  “제가 만약 늦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전부 다 그만두고 다시 돌아간다고 쳐요. 그러면 과연 절 붙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사람들이 과연 제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줄 것 같아요? 어떻게든 여기까지 오긴 했지만, 제가 이곳에서 그렇게 오래 숨어있지 못할 거라는 건 알아요. 벌써부터 한 사람에게 들키기도 했고 말이죠.”

 

  봄이가 청년을 가리켰다. 그리곤 말을 이었다.

 

  “이제 제겐 시간이 얼마 없어요. 여기 숨어있는다고 해도 곧 들킬 거고, 지금 돌아간다고 해도 붙잡힐 거예요. 어느 쪽이나 결과는 같겠죠. 이렇게 되는 걸 원치 않았다면 처음부터 임시 캠프에서 얌전히 있었어야 했어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난 전부 다 각오하고 여기 왔다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는 것도 알고 있죠.”

 

  “그게 쉽게 내뱉을 만한 말이 아니라는 것 정돈 알 텐데.”

 

  청년은 팔짱을 낀 채로 서서 마치 봄이를 시험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내려다보았다.

 

  “물론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니에요. 멍청하게 들리겠지만, 결단을 내리기 전까진 모습도 드러내지 않고 자꾸만 머릿속에서 속삭이며 날 비웃은 내면의 누군가와 싸워야 했으니까요. 이제 와서 후회한다면 절대로 내면의 존재는 날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분명 겁쟁이라고, 물러터진 년이라고 실컷 비웃으며 내가 죽을 때까지 영원히 따라다니며 괴롭히겠죠.”

 

  “네 각오나 듣자고 한 이야기가 아니야. 아무튼 난 널 도울 수 없어.”

 

  “왜 도울 수 없죠?”

 

  “말했잖아. 난 네 적이라고.”

 

  “적어도 아직은 적이 아니잖아요!”

 

  “이미 자경단은 널 적으로 돌린 지 오래야.”

 

  “그렇다면 당신은요? 당신은 날 적대하고 있나요?”

 

  봄이가 묻자 청년이 어깨를 움츠렸다.

 

  “무슨 뜻이지?”

 

  “자경단 일원이라는 이유만으로 날 적대한다는 막연한 적대감이 아닌, 당신이라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날 적대하고 있는 것인지 묻는 거예요.”

 

  “개인적인 감정이 있든 없든, 난 자경단 일원으로서 널 적대해야만 해.”

 

  “난 당신을 적대하지 않아요.”

 

  “안됐지만 난 널 적대하고 있는데.”

 

  “왜 적대하는지도 모르면서요?”

 

  “그게 중요한가?”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지금 이곳엔 우리 둘밖에 없어요. 대의명분에 얽매이지 말고 생각해 봐요. 우리가 개인 대 개인으로서 서로를 적대시할 이유가 있나요? 설령 당신이 날 적대한다고 해도, 난 당신을 적대해야 할 이유를 느끼지 못하겠어요. 난 그저 떨어뜨린 물건을 찾으러 왔을 뿐이고, 그게 잘 되지 않아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뿐이라고요. 날 적대한다고 당신한테 득 될 게 뭔가요?”

 

  봄이의 말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지금 날 설교하려고 드는 거냐?”

 

  “마음대로 생각해요. 당신이 도와주지 않겠다고 해도 난 반드시 찾아내고 말 거예요.”

 

  봄이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리고 다시 잔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꼬맹이, 멈춰.”

 

  청년이 낮게 명령했다. 그의 총구는 봄이를 겨누고 있었다. 그러나 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잔해 속을 뒤적였다.

 

  “셋을 셀 동안 멈추지 않으면 쏘겠다.”

 

  “마음대로 해요. 다만 날 쏘기 전에 이것만 알아둬요. 만약 정말로 당신이 날 쏜다면, 그건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이래 가장 무의미한 살인이 될 거예요.”

 

  “셋.”

 

  “꼭 사람은 자신을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하나요? 그래야만 문제가 해결될까요? 단순히 죽이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을까요?”

 

  “둘.”

 

  “굳이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 해결될 문제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하나.”

 

  “난 당신을 적대하지 않아요.”

 

  마지막 카운트가 외쳐진 이후 정적이 흘렀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자 봄이는 왠지 모르게 등골이 시렸다. 1초가 지났다.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2초가 지났다. 3초, 4초.........

 

  “그렇게 깨작깨작 파헤쳐서 어느 세월에 펜던트를 찾겠어?”

 

  청년이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소총을 등에 돌려매고 봄이의 옆에 다가와 잔해를 깔고 앉았다.

 

  “그런 식으로 찾았다간 몇 년이 지나도 아무것도 못 찾을걸.”

 

  봄이가 잔해 아래에 넣었던 손을 빼내며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달리 방법이 없잖아요.”

 

  “방법이 하나 있긴 해.”

 

  “있다구요?”

 

  “그래. 그렇게 느려터지고 비효율적이고 고된 방법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지.”

 

  “그게 무슨 방법인데요?”

 

  쭈그려 앉아서 허리를 숙이고 있던 봄이가 벌떡 일어났다. 지금껏 쌓인 피로가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 같았고, 두 눈은 철제 장식처럼 번쩍거렸다.

 

  청년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저것 보여?”

 

  그가 회중전등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넓은 잔해 더미에 내려앉은 어스름 속에서 작은 불도저가 보였다. 눈을 찌푸려야 간신히 보일 정도였다.

 

  봄이가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저걸 사용할 수 있어요?”

 

  “못할 것도 없지.”

 

  그렇게 말하며 그가 담배 하나를 꺼내물었다.

 

  “다만 이 방법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어. 정신없이 쌓인 잔해들을 죄다 밀어내기 때문에 그나마 물건을 찾기가 쉬워지겠지만, 알다시피 저건 너무 소음이 커. 지금 잔해 주변을 지키고 있지 않은 대원들까지 모두 주의를 끌 수 있다는 거지. 다행히 지금은 조사팀들이 철조망을 가지러 갔다가 연락이 끊긴 3팀을 찾기 위해 잠시 여길 벗어났기는 하지만.......... 저걸 켜면 금방 낌새를 눈치채고 여기로 돌아올 거야. 한 마디로 일단 저걸 가동시키면 넌 꼼짝없이 들킨다고 보면 돼. 어쩔래?”

 

  “하죠.”

 

  “뭐?”

 

  봄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각오라면 수십, 수백 번도 더 넘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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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93화 2019 / 11 / 8 264 0 6631   
93 92화 2019 / 11 / 8 225 0 10034   
92 91화 2019 / 11 / 8 244 0 13252   
91 90화 2019 / 11 / 8 236 0 5434   
90 13.최후의 결전 2019 / 11 / 8 237 0 14296   
89 89화 2019 / 11 / 8 240 0 6525   
88 88화 2019 / 11 / 7 248 0 13724   
87 87화 2019 / 11 / 7 255 0 6876   
86 86화 2019 / 11 / 7 240 0 6670   
85 85화 2019 / 11 / 7 239 0 9450   
84 84화 2019 / 11 / 4 240 0 7691   
83 12.까마귀 2019 / 11 / 4 214 0 8834   
82 82화 2019 / 11 / 4 249 0 5374   
81 81화 2019 / 11 / 4 250 0 8794   
80 80화 2019 / 11 / 4 265 0 8167   
79 79화 2019 / 11 / 4 224 0 5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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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76화 2019 / 11 / 4 237 0 10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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