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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99화
작성일 : 19-11-08 22:59     조회 : 272     추천 : 0     분량 : 12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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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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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촌이 차고 있던 손목시계의 눈금이 몇 칸 옮겨간 뒤에야 봄이는 천막 밖으로 나왔다. 지금까지의 그녀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찬물로 깨끗이 씻어낸 얼굴에는 누르스름한 핏자국이나 흙먼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입고 있는 검은색 스웨터와 청바지, 어깨에 걸친 분홍색 트렌치 코트는 비록 헌 것이기는 했지만 길 가던 도둑고양이도 동정할 정도로 초췌했던 전 몰골보다는 훨씬 나았다.

 

  봄이는 아직 새 옷이 적응되지 않아서인지 자꾸만 아래를 내려다보며 뒤뚱거렸다.

 

  “어떤....... 것 같아요?”

 

  봄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 때만큼은 영락없이 백화점에서 마음에 드는 새 옷을 막 고른 평범한 소녀와 전혀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그것보다 삼촌은 옷이 크지 않을까 걱정이구나.”

 

  “크기는커녕 엉덩이가 조금 끼는데요.”

 

  “음....... 나는 별로예요.”

 

  봄이가 째려보자 겨울은 얼굴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뭐, 우리 봄이가 마음에 든다는데 어쩌겠니.”

 

  “다들 반응이 왜 그래요?”

 

  예상과는 다른 미적지근한 반응에 얼굴이 달아오른 봄이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삼촌이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언니, 혹시 삐졌어요?”

 

  “안 삐졌어.”

 

  “삐졌네요, 뭘.”

 

  입을 가리고 얄밉게 웃던 겨울은 봄이의 정색한 얼굴을 보자마자 웃음을 뚝 그쳤다.

 

  “그래, 봄이 네가 만족해하는 걸 보니 이제야 삼촌도 마음이 놓이는구나. 배고프지 않니? 지금껏 분명히 제대로 된 음식을 못 먹었을 테지. 곧 식사시간이기도 하니까 함께 식사하자꾸나. 겨울이 거의 다 지나기는 했지만 아직은 쌀쌀하니까 먼저 회의실에 들어가 있어.”

 

  “아뇨, 전 괜찮아요. 잠깐 바람 좀 쐬다가 들어갈게요.”

 

  봄이의 말에 삼촌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렴. 우린 회의실에서 기다릴게. 오늘 저녁에 다 같이 자경단 본부로 돌아갈 거니까 해가 지기 전까지만 돌아오면 돼. 알겠지?”

 

  “알겠어요, 삼촌.”

 

  봄이가 고분고분 대답하자 삼촌은 미소짓고는 겨울을 데리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이제 또다시 봄이 혼자만 남게 되었다. 하지만 다시 혼자가 되었다는 게 봄이는 슬프지 않았다. 지금 당장은 혼자 남게 되었을지 몰라도, 사실은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안도감은 지금껏 정신없이 땅바닥을 기며 살아남기에만 급급해 온 봄이에게 얼마 누리지 못했던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런 여유를 가질 수 있게 된 데에는 입고 있는 새 옷도 한몫했다.

 

  새로 단장한 껍질을 뒤집어쓰니 자연스레 여유가 생겨났고, 지금껏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것들이 하나둘씩 눈앞에 나타나고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잔해를 치우던 러닝 셔츠 사내들이 삽을 잠시 내려놓고 즐겁게 잡담하는 것이 보였고, 어떤 사내들은 철제 우리 속 묶인 개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건너편 옆 천막에서는 경쾌하지만 고요한 음악 소리도 들려왔다. 봄이가 모르는 음악이었지만, 일관성이 있고 규칙적인 산뜻한 멜로디를 가만히 듣고 있자니 자기도 모르는 새에 봄이는 한 구절을 흥얼거렸다. 멜로디를 더 자세히 듣기 위해 건너편 천막에 가까이 가보았지만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노래제목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아쉬운 대로 봄이는 근처에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접이식 의자를 펼쳐 놓고 그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작은 새들이 핼쑥하게 야윈 나무에게로 날아와 앉는 것이 보였고,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아직 차긴 했지만 마음을 안정시키고 그 여유를 조용히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도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마음의 평화인가?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봄이는 진심으로 자신의 숨통을 끊으려는 자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치렀다. 인신매매단의 함정에 넘어가 수많은 적들과 몸싸움을 벌였고, 극단주의자들에게 반역자로 몰려 총살당할 뻔하기도 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때의 기억들을 되살리는 것만으로도 정신에 심각한 악영향을 초래했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봄이에게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심지어 요 근래 봄이는 자신이 겪은 일들을 제대로 기억하지조차 못했다.

 

  어째서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가?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에 파고든 총알처럼 뇌리에 단단히 박혀 자고 있을 때도, 깨어 있을 때도, 식사를 할 때도,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 ‘사랑한다’고 귓가에 속삭일 때까지도 가슴 속 깊숙이 박힌 트라우마는 언제나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기억 속에 남아 죽을 때까지 당사자를 괴롭힐 것이다. 하지만 봄이는 그렇지 않았다. 봄이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자신이 겪었던 그 악몽과도 같았던 밤을 별 것 아닌 일로, 심지어는 아예 없었던 일이었던 것처럼 필사적으로 부정하려 하고 있었다. 봄이의 자의식과는 상관없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봄이는 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대부분의 인간은 극도로 충격적인 광경을 직접 목격하면 그 순간이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기억하게 되지만, 그들과 다른 극소수의 인간은 자신이 처한, 혹은 처했던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발생한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그 때 목격했던 끔찍한 광경, 충격적인 광경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잊어버리게 되는, 일종의 정신적 방어기제가 발현된다는 것을. 만약 그것이 정상적으로 발현되면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억을 완전히 잊을 수 있었지만, 극심한 스트레스가 억지로 발생시키는 이러한 단기 기억상실은 뇌신경의 기억회로에 상당한 손상을 줄 것이 당연했고, 결국에는 정신병으로 취급된다고 한다.

 

  물론 봄이는 지금까지 이 정신병에 대해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하지만 혹시라도 봄이 자신이 이런 경우라면, 사라진 가족들에 대한 진실과 이 현상이 조금이라도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일어나려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 보는 옷이네. 누나한테 꽤 잘 어울리는걸.”

 

  “흥.”

 

  굳이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에, 봄이는 목소리에게 관심도 주지 않았다.

 

  “왜 그래? 난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총명한 눈의 소년이 어느새 봄이의 눈 앞에 서있었다. 봄이는 같잖다는 듯 소년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한 마디 했다.

 

  “그래, 그래도 이 옷이 어울린다고 말해준 사람은 너밖에 없네.”

 

  “그 정도야? 내가 봐도 예쁜데. 충분히 잘 어울려.”

 

  봄이는 순간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래, 그래서. 이번에는 또 얼마나 귀찮게 하려고 나타났어?”

 

  “나한테 할 말 있는 것 아니었어?”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봄이가 한숨을 내쉬었다.

 

  “뭐, 멍청한 너한테 말해봤자 소용없을 테지만.”

 

  소년은 여전히 초롱초롱한 눈을 빛내며 봄이가 말을 꺼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봄이는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내가 전에 삼촌한테 우리 부모님을 찾으러 가겠다고 했었는데, 삼촌이 날 극구 말렸어. 왜 말렸는 줄 알아? 글쎄 우리 엄마랑 아빠가 이미 전부 죽었다는 거야. 그렇게 말한 이유도 가관인데, 심지어 내가 직접 그 사실을 삼촌한테 전화로 말해줬다는 거 있지? 정작 그렇게 통보했다는 본인은 전혀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데 말이야. 넌 이게 말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어떻게 본인이 그런 광경을 목격하고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거야? 말이 되는 소릴 하셔야지.”

 

  “그러니까, 진실을 알고 싶다는 거야?”

 

  소년이 말하자 봄이는 드디어 이 머저리 소년과도 말이 통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래, 진실 말이야. 내가 그 좆.......아니지. 내가 그 바보 같은 진실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넌 모를 거야. 단지 가족을 찾겠다는 소망 하나만으로 난 여기까지 왔어. 네가 처음 데리고 갔었던 그 집에서부터 시작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고, 또 죽임당할 뻔하기도 하면서 한강을 지나 여기까지 왔다고. 그런데도 아무 단서도 찾지 못했어. 삼촌에게 들은 그 괴상한 소식을 빼면 말이지. 너라면 뭔가 알고 있을 거야. 맞지?”

 

  봄이가 거의 애원하다시피 물었지만, 돌아오는 소년의 대답은 차가웠다.

 

  “아니, 나도 몰라.”

 

  “너 정말.........”

 

  봄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년의 멱살을 움켜쥐려 했지만, 소년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이야. 내가 어떻게 누나의 가족들에 대해 알겠어? 나는 신 같은 절대자가 아니야. 그저 이 세계에서 누나를 우연히 만난 평범한 꼬마일 뿐이지. 전에도 말했었던 것 같은데, 누나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누나만이 해결할 수 있어. 자신이 원하는 해답은 자신만이 찾을 수 있다는 소리야. 이런 무너진 세계에서 살아가면서 그렇게 느낀 적 없어? 언제부터 그렇게 타인에게 의존하게 된 거야?”

 

  “그래, 잘 알겠어. 결론은 네 좆대로 알아서 찾아내라 이거잖아? 그럼 이제 내 눈앞에서 꺼져. 쓸모없는 꼬맹이 같으니.”

 

  봄이는 자신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 소년이 괘씸해서 노골적으로 짜증을 냈다.

 

  “뭐, 그거야 어렵지 않지. 전에 만났을 때 나한테서 빌려간 펜던트만 돌려준다면 말이야.”

 

  순간 봄이는 모든 흥분이 가라앉았다.

 

  “뭐라고?”

 

  정신을 차리고 되물었을 때, 소년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 * *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이미 사라진 소년을 향해 팔을 휘저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잔해를 치우던 사내들의 잡담 소리도, 분주히 돌아가는 덤프트럭의 털털거리는 배기음도, 지금껏 귀기울이던 기분 좋은 음악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소년이 난데없이 들먹인 펜던트라는 말 한 마디가 어째서 이렇게까지 봄이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 것일까? 봄이는 무엇인가에 홀린 것처럼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뭐가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옷을 갈아입기 전에도 봄이는 아무 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었다. 그렇다면 열차 무덤에서 소년에게 받았었던 펜던트는 어디에.......

 

  봄이는 접이식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솔직히 봄이는 그 펜던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저 소년과 처음 만난 다음 날 새벽, 소년이 ‘우리 집’이라고 소개했던 집에서 나올 때 유일하게 가지고 나왔던 물건이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 때 그 녀석이 뭐라고 했었던가? 부모님께서 생일 선물로 사다 주신 마지막 선물이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런데 그걸 내가 왜 찾아야 하지? 왜 돌려주어야 하지?

 

  봄이의 머릿 속 누군가가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만 봄이는 선뜻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나 봄이는 분명히 갈팡질팡하면서도 자신이 낸 발자국을 따라 계속해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발자국은 겨울과 삼촌이 있었던 회의실 천막 입구 앞에서 끊어졌다.

 

  봄이가 천막을 열어젖히려고 들어서는 순간 안에서부터 나오던 누군가와 거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앗!”

 

  “이런 세상에!”

 

  자기 상체만한 양동이를 가지고 나오던 남자의 품 속으로 내용물이 쏟아졌다. 내용물에서 고소한 향기가 나는 걸 보니 음식물인 모양이었다. 남자는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본 봄이는 재빨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정말로 죄송해요.”

 

  남자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뭐라고 말하려는 것처럼 보였으나 고개를 숙인 봄이를 보고는 마지못해 그냥 나가버렸다.

 

  “무슨 일이야, 봄아? 그렇게 서두르고.”

 

  그 광경을 앉아서 지켜보고 있던 삼촌이 말했다. 아무래도 식사 시간이었던 모양이었다. 삼촌의 옆에 앉은 겨울은 눈만 이쪽을 향한 채 그릇을 정신없이 비우고 있었다. 그 옆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젊은 청년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전 천막에 있었을 때 담배 피우는 노인과 함께 있던 청년이 틀림없었다.

 

  “삼촌, 저........ 혹시 펜던트 같은 것 못 보셨어요?”

 

  “펜던트? 무슨 펜던트를 말하는 거니?”

 

  “그러니까, 목걸이 같은 건데, 은색이고, 구슬이.........”

 

  봄이는 손짓까지 동원해가며 기억하고 있는 로켓 펜던트의 모양을 설명했지만 삼촌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알기로는 최근에 그런 물건을 본 것 같지는 않은데. 중요한 물건인 거니? 갑자기 그런 건 왜 찾아?”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는데....... 반드시 찾아야만 할 것 같아요. 어쩌면 그게 제 잃어버린 가족들에 대한 진실을 밝힐 유일한 열쇠일지도 몰라요.”

 

  봄이의 예상대로, 그 말을 들은 삼촌의 얼굴은 눈에 띄게 어두웠다. 삼촌이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봄아, 정말 너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저번에도 말했듯이...........”

 

  “네, 알아요. 삼촌을 못 믿는 게 아니에요. 그저 삼촌이 알려준 그 진실을 내가 직접 확인해보고 싶을 뿐이에요. 분명히 삼촌한테는 제가 지금 하는 말들이 전부 답답하게 들리겠죠. 만약 삼촌이 알려준 진실이 전부 사실이라면 전 지금 완전히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니까요. 그래요, 우리 엄마 아빠는 이미 세상에 없을지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 헛된 희망이 멋대로 그렇지 않을 거라며 부정하는 걸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전 가족들이 아직 살아있을 거라고, 언젠가는 꼭 날 사랑해 주는 가족들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소망 하나만을 가슴 속에 품고 여기까지 왔어요. 이 여정의 마지막이 비록 절망뿐이라고 해도, 적어도 제가 시작한 여정은 제가 직접 끝마치게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모두들 말이 없었다. 겨울마저 허겁지겁 비우던 그릇을 내려놓았고, 잠깐 동안 정적이 감돌았다.

 

  “부탁드릴게요, 삼촌.”

 

  봄이의 간절한 부탁에 삼촌은 결국 마지못해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래, 잘 알겠다. 더 이상 삼촌은 봄이 네 목적에 간섭하지 않으마. 다만 삼촌도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면, 지금 이곳에서 자경단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생활하니만큼 봄이 너도 무분별한 개인행동은 자제해줬으면 좋겠구나.”

 

  예상 외의 삼촌의 말에 봄이는 갑자기 말문이 틀어막혔다.

 

  “봄아, 지금 여기 자경단 사람들 중 몇몇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 줄 아니? 삼촌은 널 믿지만, 봄이 넌 우리 자경단과 완전히 대립하고 있던 식인종들의 저택 내부에서 발견됐어. 거기에 그들과 한 패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지도 못했지.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는 이야기야. 많지는 않지만 이곳 사람들 중에는 네가 식인종들이 심어놓은 첩자일지도 모른다며 당장 즉결처형해야 한다는 사람도 존재해. 그저 내 조카라는 이유만으로 널 다른 포로들과 똑같이 처리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말이야. 그러니까 삼촌이 말하고 싶은 건, 앞으로는 삼촌이랑 함께 살면서 되도록 나서지 말고 조용히 지냈으면 좋겠다는 뜻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니?”

 

  그 말을 들은 봄이는 고개를 떨궜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삼촌. 명심할게요. 더 이상 폐 끼치지 않을게요.”

 

  “봄이 네가 이것만 잘 지켜준다면, 삼촌도 힘이 닿는 데까진 기꺼이 도와주마.”

 

  삼촌도 봄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흡족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렇지만 봄이 네가 말한 펜던트 이야기는 처음 듣는구나.”

 

  “어디에 떨어뜨렸나 봐요. 이 근처를 조금 더 둘러봐야겠어요.”

 

  “목걸이라..........”

 

  봄이가 일어서려고 하는 순간 지금껏 잠자코 듣고만 있던 청년이 입을 열었다. 봄이가 물었다.

 

  “아저씨, 혹시 아는 것 있으세요?”

 

  그러나 청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나는 조사팀 소속인데, 지금 조사중인 식인종 저택 잔해를 조사하다 보면 가끔씩 목걸이나 팔찌 같은 귀중품들이 발견되곤 해. 그래서 조사팀 내에서도 말이 많아. 돈을 대신할 것 같은 물건들이 보이면 죄다 담아가지. 그렇지만 네가 말한 그 은색 로켓 펜던트라는 건 나도 처음 들어봐. 다른 단원들에게도 펜던트를 주웠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어. 혹시나 해서 말이야.”

 

  그 순간 봄이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분명히 봄이는 지난 밤의 전투에서 정신을 잃고 임시 캠프에서 깨어난 후부터는 펜던트를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옷을 갈아입는 과정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때문이었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렇게 되면 답은 하나밖에 나오지 않았다. 식인종들, 아니 까마귀들과 싸우던 중에 어디론가 떨어져버린 건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절 무너진 저택으로 데려다주세요.”

 

  “봄아, 삼촌이 방금 얘기했잖아. 멋대로 개인행동을 해선 안 된다고.”

 

  삼촌이 이맛살을 찌푸리자 봄이는 약간 주눅들었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물론 그랬지만, 이번이 마지막이에요. 이제 모든 걸 끝낼 수 있어요. 여기까지 와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로 돌아갈 순 없단 말이에요.”

 

  봄이가 삼촌에게 성큼 다가와 애원했다. 삼촌은 답답하다는 듯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조사팀에게 연락해서 네가 말한 그 펜던트란 걸 찾아보라고 지시하겠다. 하지만 봄이 널 직접 보낼 수는 없어. 지금까지 삼촌 이야기를 제대로 들었다면, 내가 결정을 번복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 거야.”

 

  “삼촌, 제발..........”

 

  삼촌은 코앞에서 난처해하고 있는 봄이를 무시하고 뒤에 있던 청년에게 손짓했다. 청년은 꾸벅 경례를 붙인 다음 말했다.

 

  “그럼, 다시 일하러 돌아가 보겠습니다. 팀장님께 그 펜던트를 찾아봐 달라고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청년이 등을 돌려 나가려 하자 봄이는 재빨리 청년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아저씨, 부탁이에요. 제발 삼촌한테 뭐라고 말 좀 해 줘요.”

 

  그러나 청년은 머뭇거리다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미안하다고만 하고는 나가버렸다.

 

  봄이는 화가 끓어올랐지만 지금 분노를 표출하는 것을 받아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애써 감정을 억눌렀다.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몰라주는 삼촌에게 다가가 냅다 뺨을 갈기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삼촌은 갈 곳 없는 봄이를 거두어 준 은인이었으니까. 지금은 삼촌이 자길 학대하든 어디 식인종에게 내다팔든 간에 잠자코 있어야만 할 지경이었다. 물론 삼촌이 그럴 사람은 아니었지만.

 

  잔뜩 실망한 봄이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삼촌은 태연하게 수화기를 들어 다이얼을 이리저리 돌렸다.

 

  “나다. 이재훈 조사팀장 바꿔주게.”

 

  삼촌은 수화기를 턱과 어깨 사이에 끼고 물었다.

 

  “펜던트가 어떻게 생겼다고 했지?”

 

  “........은색의 로켓 펜던트요. 기억나는 건 그것뿐이에요.”

 

  잠시 후 삼촌은 수화기 너머 상대와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더니 전화를 끊었다.

 

  “조사팀에게 말해두었어. 이번 저택 잔해 조사가 끝날 때까지 펜던트를 찾으면 즉시 연락해주겠다는구나. 그러니까 봄이 넌 굳이 그렇게 위험한 곳으로 자진해서 나설 필요 없어. 조금만 기다리면 분명히 연락이 올 거야.”

 

  봄이가 고개를 푹 숙이고 대답하지 않자 삼촌이 다시 말했다.

 

  “봄아,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어. 네가 자경단에 머무는 한 삼촌은 네 신변을 보호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니, 중요하다기보단 최우선적으로 신경쓰고 싶구나. 아까도 말해줬지만........ 아무튼간에 최대한 사건을 일으키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아직까지는 내부에서 널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는 않으니까 말이야. 더 이상 빼도박도 못하는 일이 벌어진다면 삼촌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을 내릴 때가 올 수도 있다는 거야. 삼촌은 그렇게 되는 걸 바라지 않는단다.”

 

  삼촌의 억양은 단호했지만, 약간이나마 봄이의 눈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봄이는 별말 없이 수긍했다.

 

  “알겠어요. 더 이상 삼촌한테 폐 끼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그래. 미안하구나, 봄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삼촌이 봄이의 등을 토닥이자 봄이는 억지로 웃어보였다. 생각과는 달리 웃는 시늉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분명히 찾을 수 있을 거야. 뒷일은 우리한테 맡기고 식사라도 하는 건 어떠니?”

 

  “괜찮아요. 생각 없어요.”

 

  “배고플 거란 것 알아. 그러지 말고 든든하게 먹어두렴. 네 것도 준비해놨으니까.”

 

  삼촌이 가리킨 테이블 위에는 거의 다 식어서 김이 올라오지 않는 죽그릇이 있었다. 머그컵에 담긴 누런 액체도 보였다.

 

  “금방 돌아올 줄 알았는데 그러질 않아서 조금 식었지만, 그래도 맛있을 거야.”

 

  봄이는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아 깨작깨작 죽을 떠먹었다. 왼손으로 숟가락을 다루는 건 엄청나게 어려워서 봄이는 몇 번이고 숟가락을 떨어뜨렸다. 식감은 푸석푸석한 게 냉동쌀을 급히 해동시킨 모양이었다. 몇 숟가락 떠먹자 잘게 썬 고깃조각이 보였다. 갑자기 알 수 없는 구역감이 올라왔다. 봄이가 숟가락을 내려놓고 가슴을 움켜잡자 놀란 삼촌이 말했다.

 

  “봄아, 왜 그러니?”

 

  “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속이 안 좋은 모양이구나. 그러면 구태여 먹을 것까진..........”

 

  “삼촌, 이거....... 무슨 고기인가요?”

 

  “갑자기 무슨 고기냐니? 멧돼지 고기야. 굶주린 멧돼지를 포획하는 건 쉽지 않지만, 일단 잡기만 하면 훌륭한 식량이 되지. 중요한 필수 단백질이기도 하고 말이야. 쥐라던가, 비둘기라던가 하는 건 절대로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사실 봄이는 쥐고기나 비둘기 고기 같은 걸 두려워한 것이 아니었다.

 

  “죄송해요, 그만 먹을게요. 입맛이 없어서.”

 

  “그래, 그러렴.”

 

  “아빠, 봄이 언니가 남긴 거 내가 먹어도 되죠?”

 

  지금껏 곰인형을 만지작거리던 겨울이 달려들었다.

 

  “조금 쉴게요, 삼촌. 근처에 한숨 잘 만한 곳이 있을까요?”

 

  “잘 만한 곳이라, 여기서 나간 다음 우회전해서 보이는 오른쪽 모퉁이를 돌면 숙영용 천막이 보일 거야. 아무 곳에서나 들어가서 쉬면 된단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세 시간 후에 본부로 돌아갈 거야. 그 때 다시 부를 테니 쉬고 있으렴.”

 

  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막을 들추고 나갔다. 차디찬 바람이 뺨을 스쳤다. 해는 슬슬 산꼭대기 뒤로 숨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삼촌이 알려준 대로 찾아가니 대여섯 대의 노란 천막이 줄지어 나타났다. 천막을 드나드는 사람도 있었고, 나무 타들어가는 냄새가 풍기는 곳에서는 사내들 몇 명이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은 채 수집품으로 보이는 주인 없는 휴대폰들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천막 안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봄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천막을 골라 들어갔다. 천막마다 침낭이 몇 개씩 구비되어 있었지만, 봄이는 그냥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어차피 잘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봄이가 있는 천막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봄이의 옆에 털썩 앉았다. 몇 분이 지났음에도 앉아만 있는 것을 보고 봄이는 그가 삼촌이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붙인 감시자라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면 그렇지. 삼촌은 봄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치밀했다.

 

  세 시간. 분명히 삼촌은 세 시간 후에 본부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까지 봄이는 어떻게든 저 감시자의 눈을 벗어나 무너진 저택 잔해로 숨어들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게다가 세 시간이라는 것은 삼촌이 본부로 돌아갈 때의 시간이지, 조사팀이 잔해 조사를 끝마치고 해당 구역을 통제시키는 시각은 더 이를 수도 있었다.

 

  분명히 저녁까지는 조사가 끝날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그 저녁이란 게 도대체 언제인가? 일분일초가 아까웠지만 감시자가 붙은 이상 섣불리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앞 뒤 가리지 않고 행동했다가는 더더욱 의심만 사게 될 뿐이었다.

 

  그대로 30분이 지났음에도, 감시자는 봄이의 옆에 거머리처럼 붙어있었다. 가끔 부스럭거리는 걸 보니 잠을 자지 않을 모양이었다. 이대로 계속해서 시간만 보내는 것은 삼촌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이었다. 무언가 해야만 했다.

 

  봄이는 슬그머니 일어났다. 감시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봄이가 발 끝에 힘을 준 채 천막을 나서려 하자 그제서야 감시자도 몸을 일으켰다. 들키지 않고 조용히 나가려던 봄이의 계획은 무산되어버렸다.

 

  봄이는 자꾸만 뒤에 따라붙는 감시자를 애써 무시한 채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그러나 감시자도 자꾸만 따라왔다. 참다 못한 봄이가 뒤돌아 한마디 했다.

 

  “저기요, 아저씨. 왜 자꾸 따라와요?”

 

  감시자는 말이 없었다.

 

  “나한테 관심 있어요?”

 

  여전히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삼촌이 그에게 목적을 알리지 말라고 지시해둔 것이 틀림없었다.

 

  열이 뻗쳐오른 봄이가 더욱 밀어붙였다.

 

  “아, 관심이 있으면 있다고 말을 해요! 그럼 어느 정도는 어울려줄 테니까.”

 

  “허튼 수작 부리지 마라, 꼬맹아.”

 

  드디어 감시자가 입을 열었다. 봄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벙어리처럼 묵묵부답하는 것보다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것이 그 사람의 감정을 읽기 훨씬 쉬웠으니까.

 

  봄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뭐라구요? 무슨 허튼 수작? 내가 보기엔 그쪽이 지금 나한테 허튼 수작 부리려는 것 같은데요!”

 

  감시자는 또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봄이는 괜시리 우쭐해져서 콧방귀를 뀌었다.

 

  “화장실 갈 거니까 따라오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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