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1일간 안보이기 닫기
모바일페이지 바로가기 > 로그인  |  ID / PW찾기  |  회원가입  |  소셜로그인 
스토리야 로고
작품명 작가명
이미지로보기 한줄로보기
 1  2  3  4  5  6  7  8  9  10  >  >>
 1  2  3  4  5  6  7  8  9  10  >  >>
 
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98화
작성일 : 19-11-08 22:45     조회 : 249     추천 : 0     분량 : 10197
뷰어설정 열기
뷰어 기본값으로 현재 설정 저장 (로그인시에만 가능)
글자체
글자크기
배경색
글자색
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외투의 틈새 사이로 눈을 빼꼼히 내놓고는,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를 피해 총총거리며 걷는 봄이의 모습은 마치 동화에 나오는 양탄자를 뒤집어쓴 난쟁이처럼 보였다. 천막 바깥에서 바라본 자경단 임시 캠프는 눈 돌릴 틈도 없이 분주한 광경이었다. 발 밑 땅바닥에는 쪼개진 벽돌 조각이나 잔해들이 발 디딜 곳도 없을 만큼 널려있었고, 먼지로 뒤덮인 거대한 덤프트럭이 잔해가 섞인 흙더미나 찌그러진 소형 차량들을 가득 실은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낮이었는데도 자욱한 먼지 때문이었는지 자경단원으로 보이는 사람들 몇 명이 번쩍이는 야광봉을 든 채 이리저리 신호를 주고받았고, 그 경로를 따라 급조 들것에 실린 부상자들이 호송되고 있었다.

 

  임시 캠프의 분위기는 봄이가 지금껏 지나왔던 유령 도시나 황무지와는 많이 달랐다. 이곳 사람들은 누더기 망토를 뒤집어쓰고 주저앉아 뭐라고 중얼거리던 통제소에서의 야위고 핼쑥한 사람들, 오줌 지린 냄새가 풍기는 오버코트를 깔고 앉은 채 벌건 얼굴로 넋이 나간 듯이 하늘만 쳐다보던 지하철 역의 주정뱅이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소문대로 불리는 죽음의 땅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외부 위협에 대한 대비가 잘 된 사람들처럼 보였고, 저마다 생기가 있고, 활력이 돌았다. 봄이가 이런 비슷한 분위기를 느꼈던 건 온갖 금지된 물품들을 파는 암시장에서뿐이었다. 다만 상대가 만만해 보이면 눈썹을 씰룩거리며 필로폰 값을 두 배로 불리던 암시장과는 달리 좀 더 질서정연한 느낌이었다.

 

  봄이는 중년 간호사가 말한 흰 깃발이 걸린 녹색 천막을 찾기 위해 임시 캠프를 떠돌았다. 그 곳에 삼촌이 있을 것이다. 봄이가 첫 녹색 천막을 찾아내고 안을 열어젖혔을 때, 안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남성들이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안에 있던 피부가 지저분한 남성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봄이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홱 뒤돌아 달아났다. 보아선 안 될 것을 자연스럽게 본 기분이었다.

 

  “잠깐, 꼬마야. 무슨 볼일이라도 있니?”

 

  봄이가 또다른 녹색 천막으로 접근하려 하자 누군가가 봄이를 불러세웠다. 러닝 셔츠만을 걸치고 삽으로 잔해를 치우고 있던 사내였다. 아직 겨울이었을 텐데도 그의 발달된 가슴 근육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겨울이를 만나러 왔는데요. 혹시 안에 없나요?”

 

  봄이는 적당히 둘러대려고 했지만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총수를 뵈러 왔다고 하면 분명히 절차나 자격 운운하면서 들여보내 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 너구나. 그 애가 며칠 전부터 어떤 언니를 찾아야만 한다고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자경단 설립 이후 제일 위험했던 임무에 따라가겠다고 떼를 썼지. 결국엔 못 따라갔던 모양이지만.”

 

  “네, 네. 맞아요. 그래서 잠깐 만나려구요. 괜찮을까요?”

 

  “그 애만 잠깐 만나는 건 상관없지만....... 여긴 총수님이 계시는 임시 회의실이라서 허가받지 않은 인원은 출입할 수 없거든. 금방 데리고 나와야 한다.”

 

  “그럼요, 물론이죠. 고마워요.”

 

  역시 봄이의 예상대로였다. 삼촌을 만나러 왔다고 둘러댔으면 절대로 들어가지 못했을 곳이었다. 예상이 적중한 것에 안도하며 천막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그가 말했다.

 

  “너, 자경단 소속이 아니지? 겨울이가 널 많이 보고싶어하던 것 같던데, 데리고 나와서 많이 놀아주던지 해.”

 

  “.........고맙습니다.”

 

  그대로 허둥지둥 등을 돌리는 봄이에게 대고 사내가 한 마디 던졌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부턴 좀 더 몸조심해. 팔이랑 다리가 그게 뭐냐.”

 

  천막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자 큰 접이식 테이블을 맞대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테이블에는 세 명이 앉아 있었는데, 담배를 피우는 노인과 젊은 청년 하나였다. 테이블 구석 땅바닥에는 한 소녀가 두 팔을 꼿꼿히 치켜든 채로 꿇어앉아 있었다.

 

  그 소녀는 봄이의 얼굴을 보자마자 반가운 듯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봄이 언니다!”

 

  그러자 테이블에 잠자코 앉아있던 나머지 한 사람이 소리쳤다.

 

  “윤 겨울! 누가 손 내리라고 했어?”

 

  천막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봄이에게 향했다.

 

  “아빠, 벌써 네 시간째예요. 이제 조금만 쉬게 해 줘요.”

 

  겨울에게 소리친 남성은 뭐라고 더 윽박지르려는 듯 싶더니, 봄이와 겨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좋아. 10분 휴식이야. 딱 10분 동안만이다.”

 

  겨울은 그제서야 만족스럽다는 듯 바지를 툭툭 털더니 봄이에게 와서 안기려 했다. 하지만 봄이는 자신에게 안기려는 겨울을 가로막았다. 오른팔의 깁스 때문에 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삼촌.”

  봄이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분명히 저번처럼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다시 오라고 할 게 뻔했으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재훈 씨, 죄송합니다만 회의를 잠깐만 미루어도 되겠습니까?”

 

  담배를 피우던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시죠. 예정된 회의 시간보다 지났기도 하고.”

 

  노인이 옆에 앉은 청년에게 눈짓하자 청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봄이와 겨울을 차례로 번갈아 훑어보더니 천막 밖으로 나갔다.

 

  사람들을 내보낸 총수는 가만히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를 떨궜다. 그는 봄이의 얼굴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언가 봄이에게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며칠 만에 다시 보게 된 삼촌의 얼굴은 전에 만났을 때보다 기운이 없어보였고, 잠깐 사이에 10년은 더 나이든 사람처럼 보였다.

 

  봄이 역시도 삼촌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산더미였지만, 정작 깊게 패인 그의 이맛주름을 보자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울컥한 것이 타고 올라왔고, 자신이 어째서 지금 삼촌을 만나러 여기까지 왔는지조차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봄이는 전에 삼촌과 만났을 때와는 다른 이질적인 기분에 마치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주눅들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결심했던 모든 것들이, 삼촌을 눈앞에 마주하고 나서 끝없이 사그라지고 부서지고 산산이 흩어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한동안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런 정적을 깬 것은 봄이였다. 봄이는 조용히 뒤집어쓰고 있던 외투를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이거....... 돌려드릴게요. 삼촌 거잖아요.”

 

  그는 갑작스런 봄이의 말에 당황하기라도 한 듯 얼굴을 구겼다가, 이내 주름을 펴고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 입고 있으려무나. 난 괜찮으니까.”

 

  손을 내저으며 거절하는 삼촌에게 봄이는 외투를 다시 집어들고 그에게 다가갔다.

 

  “아뇨, 제가 무슨 면목으로 더 이상 삼촌한테 폐만 끼치겠어요.”

 

  봄이는 외투를 곧게 펼쳐서 자리에 앉아있는 삼촌의 어깨에 덮어주었다. 그는 더 이상 봄이를 말리지 못하고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봄이는 삼촌에게 외투를 덮어주고 난 후 자리로 돌아가려다가, 그만 중심을 잃고 주저앉았다. 놀란 삼촌과 겨울이 달려왔지만, 봄이는 그 순간에도 자신의 다리가 걱정되기보다는 또다시 이들에게 폐를 끼치고 있다는 자괴감만이 느껴져 괴로워 견딜 수가 없었다.

 

  “삼촌, 난 정말이지 바보 멍청이예요. 난 아직까지도 내가 도대체 무슨 낯으로 삼촌 얼굴을 볼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치가 떨릴 지경이에요. 왜 날 구한 거예요? 난 위험하다는 삼촌의 경고도 듣지 않고 무작정 나 하나만을 생각하고 식인종 소굴에까지 뛰어들었어요. 삼촌이 진실을 말해주었을 때도, 나 혼자서 그 진실을 짓밟아버리려 하고, 애써 부정하면서까지 삼촌을 믿지 않았다구요. 그런데도 내가 뭘 잘했다고 이렇게까지 하면서 날 도와주는 거예요? 내가 잘한 게 어딨다고. 난.........저는........... 삼촌을 다시 만난 이후부터 삼촌에게 아무런 도움도 돼주지 못했는데..........”

 

  더 이상 울지 않겠다고, 이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바보같이 울기만 하지는 않겠다고 몇십 번, 몇백 번도 더 다짐했던가. 그런 봄이의 다짐이 무색하게도 봄이는 또다시 주저앉아 흐느끼고 말았다. 그런 무능한 자신이 정말 밉고 싫어서, 살아남은 자신조차 원망하게 되기까지는 잠시면 충분했다. 나는 왜 살아 있는가? 울기밖에 못하는 주제에 왜 또 끈질기게 죽지는 않아서 그나마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편에게마저 민폐만 끼치는 걸까? 나처럼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을 어째서 삼촌은 끝까지 도와주려는 것일까?

 

  “삼촌, 이제는 절 생각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더 이상 삼촌에게마저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제가 삼촌에게 박힌 돌이고,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절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어요. 전 바보에다 멍청이라 어차피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테고, 그에 대한 책임은 전부 다 제가 져야겠죠. 정말 염치없지만, 이게 사람새끼인지 분간도 안 될 정도로 터무니없고 무례한 부탁이지만, 괜찮다면 제 유일한 가족인 삼촌과 함께 있고 싶어요.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제가 존나게 쓸모가 없어서 삼촌과 함께할 수 없다면, 주저없이 여길 떠나줄게요. 전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지금껏 늘 좇아왔던 소망조차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겁쟁이에다 용기도 없거든요. 삼촌도 제가 한심하죠? 그러니까 굳이 저 하나 따위 신경쓰실 것 없어요. 난 어찌되든 상관 없으니까 삼촌이 판단하세요.”

 

  “봄이 언니, 또 어딜 간다는 거야? 가지 마. 우리랑 같이 있자.”

 

  봄이의 성한 한쪽 팔을 잡아끄는 겨울을 뒤로하고, 봄이는 마음 속 깊이 박힌 모든 독기를 뿜어냈다. 그 독기는 다른 사람을 향한 것이 아니었고, 오직 자기 자신만을 향한 혐오감과 증오뿐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했지만 정작 마음 깊숙한 곳에서마저 봄이는 삼촌이 자신을 받아주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신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가 훨씬 더 강해졌다.

 

  “제발..........부탁이에요. 날 버리지 말아요. 더 이상 혼자가 되는 건 싫어요. 너무 외로워요. 삼촌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게요. 어떤 더러운 일이라도, 어떤 힘든 일이라도, 설령 목숨이 걸린 일일지라도 뭐든지 할게요. 이제는 삼촌의 충고도 무시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날 버리지 말아줘요. 이제 혼자는 싫어요. 태어날 때부터 혼자였는데, 죽는 순간에까지 혼자이긴 싫어요.”

 

  자신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에 젖은 봄이는 지금 자신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봄이는 끝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팔로 닦아내고 또 닦아냈다. 그저 하염없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삼촌이 자신과 함께 살자고 말해주기만을 기다리면서. 지금 봄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몇 분 동안이나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삼촌이 말했다.

 

  “봄아, 이제 그만해도 돼.”

 

  봄이는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물 범벅이 된 고개를 치켜들었다.

 

  “더 이상 혼자서 모든 걸 해결하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혼자서 상처받고, 혼자서 헤매고, 혼자서 이겨내려 하고. 더 이상 그런 외로운 투쟁은 하지 않아도 돼. 넌 이제 할 만큼 했잖아. 그렇지?”

 

  멍하니 삼촌을 바라보는 봄이에게 그가 다가왔다. 그러고는 또다시 그때처럼,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와 다름없이 그는 두 팔로 봄이를 꼭 안아주었다.

 

  “이제는 혼자서 싸우지 않아도 괜찮아.”

 

  오른팔이 으깨지고, 여기저기 눌러붙은 핏자국과 상처투성이인 데다 흙먼지까지 뒤집어쓴 봄이를 삼촌은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지금까지 고생했어, 봄아.”

 

 * * *

 

  천막 내부의 온도계는 영하 5도 정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자리에 앉아 몇 시간 동안이나 흐느끼던 봄이는 눈물을 흘리느라 뿜어낸 열기 덕분인지 춥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아까 전 삼촌이 봄이를 꼭 안아주었을 때, 잠깐이었지만 봄이는 삼촌의 눈망울이 젖어있는 것을 보았다. 소망을 좇아 떠났지만, 결국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봄이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사라져 걱정했던 어린 조카가 무사히 돌아온 것에 대한 막연한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사실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구태여 확신하기 위해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봄이는 오래 전, 물자를 구하기 위해 몰래 숨어들었던 아파트 단지에서 보았던 젊은 부부를 보고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날 위해 눈물을 흘려준 사람이 있었던가?’ 갑자기 왜 이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었다.

 

  봄이는 접이식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삼촌을 바라보았다. 지금 보이는 그의 모습은, 확실히 봄이가 3년 전에 함께했었던 남자와는 많이 달랐다. 세계의 질서가 무너지고 나서 처음 만났던 삼촌은 봄이에게 낯설게까지 느껴졌을 정도였으니까. 그러나 봄이는 지금의 그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그때의 감정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 있을까?

 

  봄이가 눈물을 막 그치고 쭈그려 앉아 훌쩍거리고 있는데, 누군가가 천막 입구를 열어젖히고 들어왔다. 깔끔히 면도를 하고 옆구리에 서류 뭉치를 낀 남자였다.

 

  “총수님, 금일자 상황으로 갱신된 사후 보고서입니다.”

 

  삼촌은 그에게서 서류 뭉치를 넘겨받고는 천천히 넘겨보았다.

 

  “부상자가 최대 수용 인원을 넘지는 않아서 다행이군.”

 

  “예, 예상보다 부상자가 많지 않아 오늘까지는 원활하게 후송을 마칠 수 있을 겁니다. 특별한 문제가 없으시다면 오늘 내로 임시 캠프 관리를 위임하고 본부로 돌아가셔도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삼촌은 손가락에 침을 묻혀 서류 뭉치를 몇 장 더 살폈다.

 

  “적대세력이 점거하고 있던 저택 조사는 끝났나?”

 

  “그게, 오늘 그에 관련해서 조사 도중 사상자가 조금 발생했습니다.”

 

  자신만만하게 보고하던 남자의 눈초리가 약간 내려갔다.

 

  “사상자라고?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택이 완전히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조사팀을 분산시켰는데, 아직 근방에 내부 저항세력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조사대원 두 명이 중경상을 입었고, 한 명은 머리에 총을 맞았습니다. 다행히도 저항세력의 규모가 크지 않아 즉각 반격해서 섬멸에 성공했습니다.”

 

  “저항세력의 규모는 어느 정도였는가?”

 

  보고하던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세력이라고도 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한 명이었지요. 엄밀히 따지면 두 명이었지만.”

 

  “자세히 말해보게.”

 

  “저기, 담배 한 대만 피워도 되겠습니까?”

 

  삼촌이 체크 셔츠 품에서 담뱃갑을 꺼내 넘겨준 뒤 불을 붙여주었다. 그가 담배 연기를 가슴 깊숙이 빨아들이며 말했다.

 

  “오늘 아침이었어요. 오전 여덟 시 정도였죠. 분산된 조사팀 중 한 조가 무너진 저택을 지나 새카맣게 타버린 숲 속까지 들어갔었던 모양이에요. 숲 속을 조사하던 중에 사람 그림자 두 개를 발견했는데, 신원 확인을 요구하자 어디론가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어요. 당연히 조사팀은 그대로 녀석들을 쫓았지요. 그런데........”

 

  보고하던 남자가 손가락으로 자기 이마를 쿡쿡 찔렀다.

 

  “갑자기 도망치던 녀석들이 뒤돌아서는 우리 대원들한테 총을 쐈어요. 예상하지 못한 그 첫 공격으로 조사대원 한 명이 죽었죠. 사상자가 발생하자마자 곧바로 산개해서 엄폐한 덕분에 더 이상의 사망자는 없었어요. 두 명이 각각 허벅지와 팔에 총상을 입기는 했지만요. 두 놈 중에서 총을 든 녀석은 하나 뿐이었는데, 상당히 사격 실력이 좋은 놈이었어요. 즉각 조사대원들이 응사한 덕분에 놈은 곧 총을 맞고 쓰러졌습니다.”

 

  보고하던 남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담배 연기를 내쉬었다. 삼촌은 옆에 놓인 차갑게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저항세력의 침묵이 확인되자, 조사팀은 시신으로 다가가 신원을 확인했어요. 저항하던 녀석은 20대 후반에서 30대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성이었습니다. 그 옆에도 한 사람이 더 있었는데, 고작해야 십 대밖에 안 된 소녀였습니다.”

 

  쭈그린 두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봄이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조사팀은 시신을 무장해제시킨 다음 소녀를 인계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지저분한 소녀는 여성의 시신을 부둥켜안고 울부짖기만 할 뿐, 전혀 저희 지시를 듣지 않으려고 했어요. 녀석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울부짖으며 소리를 질러대기도 하고, 조사팀에게 저주를 퍼붓기도 했지요. 그 때 조사에 참여했던 한 대원은 아직까지도 그 소녀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살기에 찬 꼬맹이의 눈동자는 난생 처음 봤다고........”

 

  “그렇다면 왜 그 소녀를 인계하지 않은 건가?”

 

  천막 내부가 잠시 동안 침묵에 잠겼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삼촌이 되물었다.

 

  “어린아이의 어머니를 죽인 것에 대한 자책감 때문이었나?”

 

  “아뇨, 그건........”

 

  삼촌이 들고 있던 머그컵을 내려놓았다.

 

  “뭐, 규정상 무장하지 않았고 저항의지가 없는 민간인이라면 사살이나 인계가 필수는 아니지만, 적어도 난데없이 조사팀을 공격한 적대세력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도 있었던 기회였는데. 아쉽게 됐군.”

 

  “죄송합니다.”

 

  남자가 힘차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삼촌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해하네.”

 

  “......여쭈신 저택 조사는 오늘 저녁 안에 끝날 예정입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남자는 다시 한 번 힘차게 경례를 붙이고는 천막 밖으로 나갔다. 봄이는 방금 들었던 남자의 말에 왠지 모르게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 혼란은 삼촌이 봄이에게 건넨 말 한 마디와 함께 깡그리 사라졌다.

 

  “저, 봄아.”

 

  “네.”

 

  삼촌이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은 뒤 봄이에게 다가왔다. 봄이는 저 차갑게 식은 커피도 하수도에 살던 아이들에게 얻어마셨던 모래 씹히는 싸구려 커피일지 생각해보았다.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삼촌이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봄이 너 새 옷이 필요할 것 같구나.”

 

  느껴지는 삼촌의 시선에 봄이는 자기 몸을 내려다보았다. 진흙탕에 담가 놓았다가 꺼내입은 것 같은 검은 스판 티셔츠, 이리저리 걸려 찢어져가는 교복 치마, 이미 올이 몽땅 헤지고 군데군데 구멍이 숭숭 뚫린 스타킹, 밑창이 모조리 떨어져 나가버린 운동화까지. 삼촌 외에 다른 누군가가 봄이의 지금 상태를 동정한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추한 몰골이었다.

 

  “어......... 그렇게 보이긴 하네요.”

 

  삼촌은 봄이의 대답을 듣고 나서도 한참 동안 봄이를 안쓰럽다는 듯이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말했다.

 

  “따라오렴.”

 

  봄이는 얌전히 천막 밖으로 나서는 삼촌을 따라나갔다. 물론 겨울도 두 사람이 나가는 것을 보고 쫄래쫄래 따라왔다. 러닝 셔츠만 걸친 채 삽으로 잔해를 치우던 대원들은 삼촌을 보자 모두들 하던 일을 잠시 중단하고 경례를 붙였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봄이는 삼촌에게 경례하던 남자들 중 몇몇은 봄이가 천막을 착각하고 들어왔을 때 옷을 미처 입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삼촌이 봄이를 데려간 곳은 아까 봄이가 잘못 찾았던 천막이었다. 아무래도 이 천막이 탈의실로 쓰이는 모양이었다. 봄이는 또다시 안에 알몸의 사람들이 있을까 봐 조심스레 눈을 들이밀었지만, 다행히도 이번에는 아무도 없었다.

 

  삼촌은 천막 안에 쌓인 옷가지들을 뒤졌다.

 

  “미안하구나. 지금은 임시 캠프이니만큼 잠깐 물건들을 옮겨놓은 것뿐이라 마음에 드는 옷이 없을지도 몰라. 오늘 밤 자경단 본부로 돌아가면 더 좋은 옷으로 갈아입어도 된단다.”

 

  삼촌이 옷가지들을 뒤지는 동안, 봄이는 근처에 너저분하게 널린 볼품없는 검은색 니트 스웨터를 집어들었다.

 

  “이거 괜찮아 보이네요. 따뜻해 보이고.”

 

  삼촌은 옷가지를 뒤지다 말고 봄이가 고른 니트를 쳐다보았다.

 

  “그건 아마도 누가 입던 것 같은데.......... 게다가 남성용일 거야. 전에 여성 대원이 입던 옷이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리거라.”

 

  “괜찮아요. 이거면 됐어요.”

 

  숨에 찬 삼촌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담이야? 그걸로 괜찮겠어?”

 

  “네.”

 

  “언니........ 조금 안 어울릴 것 같은데..........”

 

  겨울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만류했지만 봄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청바지를 집어들었다.

 

  “우와. 이것도 나쁘지 않네요!”

 

  “아, 찾았다. 여기 있구나.”

 

  삼촌이 꺼내든 것은 상당히 값나가 보이는 분홍색 트렌치 코트였다. 한눈에 봐도 봄이에게 맞는 사이즈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자신만만하게 꺼내든 삼촌의 얼굴에도 난감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전에 한 여성 대원이 입었던 거야. 여기 있는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여성용 의류인데........ 지금 보니까 봄이 너한텐 맞지 않을 것 같구나. 옷이 너무 커서........”

 

  “아뇨, 상관없어요. 이리 주세요.”

 

  봄이는 신경쓰지 않고 코트를 빼앗아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정말로 그......... 옷들로 괜찮겠니?”

 

  “네. 가능하면 옛날처럼 싸구려 후드재킷이라도 새로 사주셨으면 좋겠지만요.”

 

  삼촌은 할 말을 잃었는지 대답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봄이는 불어터진 눈으로 환하게 웃기만 했다. 그저 그 순간이 기뻐서, 마치 3년 전 삼촌과 함께 살던 행복했던 시절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아서........

 

  “고마워요, 삼촌. 잘 입을게요.”

 

  봄이의 이 말은 3년 전 삼촌에게 분홍색 후드 재킷을 선물받았을 때와 똑같은 말이었다.

 
 

NO 제목 날짜 조회 추천 글자
105 104화(그 후의 이야기) 2019 / 11 / 10 244 0 10184   
104 103화(마지막화) 2019 / 11 / 8 250 0 7150   
103 102화 2019 / 11 / 8 236 0 9365   
102 101화 2019 / 11 / 8 255 0 12720   
101 100화 2019 / 11 / 8 269 0 6491   
100 99화 2019 / 11 / 8 274 0 12040   
99 98화 2019 / 11 / 8 250 0 10197   
98 14.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2019 / 11 / 8 246 0 8345   
97 96화 2019 / 11 / 8 243 0 5686   
96 95화 2019 / 11 / 8 280 0 9160   
95 94화 2019 / 11 / 8 235 0 10760   
94 93화 2019 / 11 / 8 265 0 6631   
93 92화 2019 / 11 / 8 225 0 10034   
92 91화 2019 / 11 / 8 246 0 13252   
91 90화 2019 / 11 / 8 236 0 5434   
90 13.최후의 결전 2019 / 11 / 8 237 0 14296   
89 89화 2019 / 11 / 8 241 0 6525   
88 88화 2019 / 11 / 7 248 0 13724   
87 87화 2019 / 11 / 7 256 0 6876   
86 86화 2019 / 11 / 7 241 0 6670   
85 85화 2019 / 11 / 7 239 0 9450   
84 84화 2019 / 11 / 4 240 0 7691   
83 12.까마귀 2019 / 11 / 4 215 0 8834   
82 82화 2019 / 11 / 4 250 0 5374   
81 81화 2019 / 11 / 4 250 0 8794   
80 80화 2019 / 11 / 4 269 0 8167   
79 79화 2019 / 11 / 4 225 0 5245   
78 78화 2019 / 11 / 4 251 0 7057   
77 77화 2019 / 11 / 4 238 0 5426   
76 76화 2019 / 11 / 4 238 0 10576   
 1  2  3  4  
이 작가의 다른 연재 작품
등록된 다른 작품이 없습니다.

    이용약관   |   개인정보취급방침   |   이메일주소 무단수집거부   |   신고/의견    
※ 스토리야에 등록된 모든 작품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 본사이트는 구글 크롬 / 익스플로러 10이상에 최적화 되어 있습니다.
(주)스토리야 | 대표이사: 성인규 | 사업자번호: 304-87-00261 | 대표전화 : 02-2615-0406 | FAX : 02-2615-0066
주소 : 서울 구로구 부일로 1길 26-13 (온수동) 2F
Copyright 2016. (사)한국창작스토리작가협회 All Right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