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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14.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작성일 : 19-11-08 22:44     조회 : 246     추천 : 0     분량 : 8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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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임시 캠프라고는 했지만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봄이는 자신이 들것에 누운 채 바닥조차 깔리지 않아 진흙탕 투성이인 오렌지색 천막까지 실려올 때까지의 과정을 기억해내려고 했다. 봄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본 것은 천장에 걸린 채 펄럭이는 흰 깃발이었다. 그 다음으로 기억나는 것은 헤진 누더기 조각을 이어붙여 꿰맨 볼품없는 침대에 누운 자신의 머리맡에 놓인 새하얀 꽃병이었다. 꽃병에는 아무것도 담겨 있지 않았다.

 

  봄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임시 캠프는 지지대가 반쯤 휘어진 오렌지색 천막을 대강 덮어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짧았지만 강렬했던 지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현장에서 즉석으로 급조한 야전 병원으로 쓰였다. 이곳에는 봄이 외에도 환자들이 많았고, 모두들 치료가 끝난 상태였는지 돌아누워 쉬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가장자리가 구겨진 낡은 잡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볼품없는 광경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랐지만, 봄이에게 그렇게 조용하고 나태하기 짝이 없는 광경은 오랜만에 느끼는 지극히 평화로운 휴식이었다.

 

  부러진 오른팔에는 당장 응급처치를 할 수단이 없어 급한 대로 묶어놓은 더러운 셔츠 대신 제대로 된 깁스가 되어있었다. 총에 맞았던 어깨와 허벅지에도 깨끗한 붕대가 감겨져 있었고, 검은 스판 티셔츠만 걸치고 있던 봄이의 몸 위에는 두껍고 털 장식이 달린 고급스러워 보이는 가죽 외투가 덮여있었다. 봄이의 옷은 이미 지난 밤의 전투에서 모두 못 입게 되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외투인데, 누구의 것이었더라?

 

  봄이는 덮인 외투를 걷어내고 누더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워있는 것이 편하기는 했지만, 그렇게 아무런 의미 없이 쉬고만 있는 건 영 봄이에게 맞지 않았다. 봄이는 늘 혼자 있어야만 직성이 풀렸고, 바깥으로 나가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아야지만 마음이 편했다.

 

  “안 된단다, 얘야. 조금 더 안정을 취해야만 해.”

 

  나이든 남성의 목소리였다. 키가 작고 배가 나왔으며, 둥근 알에 테두리가 가는 안경을 쓰고, 데님 셔츠에 트렌치 코트를 걸치고 있었다. 그의 밝은 베이지색 트렌치 코트에는 보기 흉한 얼룩이나 핏자국이 군데군데 묻어있었다. 그가 봄이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보니 봄이에게 말하는 것인 모양이었다.

 

  “잘 잤니?”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봄이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입에서는 오래 묵힌 커피 향이 풍겼다. 봄이는 괜시리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한 채로 모르는 남자의 옆에 있는 게 창피해서 가죽 외투로 몸을 가렸다.

 

  “죄송해요. 조금 추워져서.”

 

  “그래, 이해한단다. 너처럼 어린 아가씨가 어쩌다가 그 식인종 저택에서 발견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야.”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머리를 긁적였다. 그 말을 들은 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해서 대답했다.

 

  “잠깐만요, 아저씨. 저는........”

 

  “오, 괜찮단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돼. 네게 그런 걸 물어보려고 한 게 아니었단다. 모두 다 끝난 일이야. 네가 그 식인종과 한패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나는 의사는 아니지만 간호사로서 우선적으로 구해낸 사람들을 안전하게 간호해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말이야.”

 

  그의 말을 듣고 나자 봄이는 약간이나마 흥분이 가라앉았다. 그건 그렇고, 이 나이 들고 배불뚝이인 중년 남자가 간호사라고? 무언가 봄이가 상상하고 있던 간호사와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묻지 않을게. 분명히 네가 또다시 기억해내기엔 터무니없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기억이겠지. 아까 전에 네가 이곳으로 실려왔을 때, 내가 네 치료를 도왔었어. 지금껏 많은 부상자들을 봐왔지만 몸이 그렇게 완전히 엉망진창이 된 어린 환자는 네가 처음이었어. 오른쪽 어깨는 탈골된 것도 모자라 군데군데 골절에, 팔뚝은 완전히 짓이겨져 있는 데다가 여러 군데 총상까지 있는 꼬마 환자라니. 사실은 널 처음 봤을 때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었어. 평범한 소녀였다면 당장 과다출혈이나 쇼크로 죽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는데.......”

 

  봄이는 가만히 앉아 중년 간호사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중년 간호사는 말을 이으면서도 자꾸만 봄이의 눈치를 살폈다.

 

  “미안해. 너 같은 또래의, 그러니까...... 십대 학생들하고는 그다지 말주변이 없었거든. 이런 이야기는 조금 듣기 거북하지?”

 

  “아뇨, 계속 이야기해 보세요.”

 

  중년 간호사는 봄이의 반응이 의외라는 듯 눈을 껌뻑이면서도 말을 이었다.

 

  “아무튼 내가 말하려던 건, 그렇게 가망이 없어 보이는 널 선생님께서 끝끝내 살려주셨다는 거야. 선생님은 한때 촉망받는 의사가 될 수도 있었지만 결국 재정 때문에 의사의 꿈은 포기하셨다고 해. 그렇기는 하지만 난 언제나 선생님을 존경하고 있어. 선생님께는 배울 것도 많고, 늘 곤경에 빠진 사람이나 위급한 환자들을 돕는 데에 최선을 다하시는 분이시거든.”

 

  “그 선생님이라는 분이 날 치료해줬다고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중년 간호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생님? 아, 보통 우리 단원들은 총수라고 부르는 모양이야. 난 요즘 선생님께 의학을 배우고 있어서 그렇게 불러. 뭐, 선생님께서는 이런 시시한 호칭 같은 데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으실 테지만.”

 

  “삼촌이 여기 있다고요?”

 

  “삼촌이라고?”

 

  봄이가 놀라서 묻자 중년 간호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삼촌’이라는 단어를 혼자서 조용히 몇 번 되새겼다. 마치 말끝을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선생님께 어린 딸이 있다는 건 알지만, 조카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데...... 아무튼 선생님이라면 저 쪽 반대편 천막에 계실 거야. 흰 깃발이 걸린 녹색 천막인데 지금은 회의실로 쓰이고 있지. 원래는 오늘 아침 일찍 본부로 돌아가기로 하셨는데, 어젯밤 벌어졌던 전투의 여파가 워낙 컸던 데다 잠깐 동안이었지만 난데없이 지진까지 일어나버리는 바람에 임시 캠프에 조금 더 머물게 되신 모양이야. 늦어도 오늘 밤까지는 본부로 돌아가실 거야.”

 

  “본부로 돌아간다고요? 안 돼요. 전 꼭 삼촌을 만나야만 해요. 지금 당장이요.”

 

  봄이가 무리하게 일어서려 하자 중년 간호사가 뜯어말렸다.

 

  “안 돼. 내가 말하지 않았니. 넌 지금 당장은 무조건 안정을 취해야 한다니까.”

 

  중년 간호사는 봄이의 양 어깨를 붙잡고 어떻게든 봄이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사실 봄이가 마음만 먹으면 이 정도 배불뚝이는 어떻게든 밀치고 나갈 수도 있었다. 예전의 봄이였다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당장 삼촌을 만나러 뛰어갔을 테지만, 지금은 그럴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몸 속에서 파도처럼 밀어닥치던 흥분은 곧 가라앉았고, 봄이는 곧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알겠어요. 조금 더 쉴게요.”

 

  중년 간호사는 봄이가 결코 간단히 포기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었는지, 봄이가 쉽게 순응해버리자 오히려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고, 곧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잘 생각했어. 솔직하게 말하자면....... 네 팔 말인데, 거기에서 더 악화된다면 팔을 절단해야만 할 가능성도 있어. 잘못된 응급처치를 행한 데다가 치료가 늦어서 이미 많이 오염되어 버렸거든. 우선 상태를 더 두고봐야만 할 것 같아. 섣불리 무리한 행동은 안 해줬으면 해서.......”

 

  깁스를 한 오른팔은 아직 마취가 풀리지 않았는지 찌푸둥했고, 총에 맞은 허벅지에도 감각이 없었다. 절단이라고? 지금도 오른팔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정말로 영원히 팔 한쪽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고독 속에서 영원히 한 쪽 팔이 없는 외팔이로 살아가는 자신을 본다면 남들은 그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운명이라는 것은 결코 인간이 바꿀 수 없는 것일까? 만약 봄이가 무리하게 여정을 떠나지 않고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면 팔뚝이 으깨지고 허벅지와 어깨에 구멍이 뚫리는 운명을 피해갈 수 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 더 나아질까?

 

  봄이는 자신이 정한 삶의 틀을 벗어나기 위해서 운명을 거스르려고 하다가 보복을 당한 것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은 봄이 자신의 선택이었고, 봄이는 자신의 선택이 부정되거나 설사 옳지 않은 선택이었다고 해도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라고 믿었고, 운명은 바꾸거나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믿었다.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것만이 바로 인간이 생전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이루어야만 한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유일한 이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요. 조심할게요. 알려 주셔서 고마워요.”

 

  봄이는 얌전히 수긍했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떼쓰지 않아 줘서 고맙다.”

 

  중년 간호사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봄이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땀에 젖은 봄이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듯 싶더니 금방 손을 치워버렸다.

 

  “그렇지. 기분 나빠할 수도 있겠구나.”

 

  “괜찮아요. 적어도 까마귀들보다는 아저씨가 훨씬 마음이 놓이니까.”

 

  “까마귀라니?”

 

  “아무 것도 아니에요.”

 

  이렇게 아무런 생각 없이 편안하게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이 언제였던가? 눈 앞에 있는 이 사람은 봄이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까지 알고 지냈었던 사람도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분명히 오늘 처음으로 만난 사람일 텐데도 그랬다. 그래서인지 봄이는 이 배불뚝이 간호사와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고 싶어졌다.

 

  봄이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 꽃병은 뭐예요? 지금껏 늘 비어있었던 것 같은데.”

 

  봄이가 누더기 간이 침대 머리맡에 놓인 깨끗한 꽃병을 가리켰다. 그러자 중년 간호사는 잊고 있었다는 듯이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그렇지. 내 정신 좀 보게. 잠깐만 기다려.”

 

  얼마 후 그가 다시 천막으로 돌아왔을 때는 손에 작은 식물 몇 줄기를 들고 있었다. 그는 그 식물들을 조심스럽게 봄이의 머리맡에 놓인 꽃병에 꽂았다. 봄이가 무슨 풀인가 하고 살펴보니 사실은 아직 앳되어 보이는 하얀 꽃이었다. 꽃봉오리가 아주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았던 것뿐이었다.

 

  “원래 이 시기에 필 꽃이 아닌데 의아하기도 하지. 아직은 꽃들이 피어나기엔 많이 추운 날씨인데도 말이야. 엄청 땡잡았다고 생각해서 냉큼 꺾어왔지. 예쁘지 않니?”

 

  줄기는 10~20센티미터쯤 되어 보였고, 작은 봉오리의 미성숙한 외관과는 달리 털이 듬성듬성했다. 방석 모양으로 촘촘히 피어난 하얀 꽃잎은 살짝 휘어져 있었고, 그 때문인지 마치 꽃이 봄이를 보고 눈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되게 작네요. 무슨 꽃인데요?”

 

  중년 간호사는 흐트러진 꽃을 일일이 섬세하게 다듬을 때까지 봄이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보통 봄맞이꽃이라고들 해. 동전초나 보춘화라고도 하지. 전에 있었던 천막에서도 겨울 꽃을 꽂아놨었는데, 이번에 일어난 지진 때문에 모조리 깨져버렸거든. 그래서 꽃을 다시 구해야겠다고 생각하던 도중에 마침 이 꽃이 보이지 뭐냐. 이제야 우울하던 새 천막 안이 조금이나마 밝아진 것 같군.”

 

  “봄맞이꽃이라고요? 그럼 이건 봄에 피는 꽃인가요?”

 

  “음, 조금 달라. 이름이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본격적인 봄이라기보다는 3월 경 초봄에 조금씩 피어나는 정도거든. 벌써 그 정도 시기가 되었을 리는 없으니 정말로 운이 좋았던 거지. 아니, 벌써 그렇게 된 건가? 설마.”

 

  중년 간호사는 갑자기 천장을 보며 중얼거리더니 손가락 열 개를 접는 시늉을 했다. 이 꽃이 정확히 언제 핀 것인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봄이는 점차 추위가 사그라드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기는 했다. 당장 지금의 봄이는 제대로 된 옷조차 갖춰입지 못한 상황이었는데도 말이다. 고작해야 내복 티셔츠에 누군가의 외투가 고작이었다.

 

  “아무튼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은 꽃을 통해 계절의 변화를 짐작할 수 있다는 거야. 지금 세계에서 예전만큼 확실하게 달력으로 날짜를 확인하기는 힘드니까. 다시 말해 꽃이 지금 세계의 달력 역할을 하는 것과 다름없지. 물론 자경단 본부에서는 날짜만을 전문적으로 관리하는 녀석들이 있긴 하지만.”

 

  “꽃을 좋아하시나 봐요.”

 

  봄이가 중년 간호사를 올려다보며 묻자 그가 웃었다.

 

  “그럼, 좋아하고말고. 예전 세계에서는 내 업무용 책상 위에 꽂아놓은 꽃 한 송이가 내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힘든 하루 일과를 보내면서도 늘 앞에 보이는 예쁜 꽃을 볼 때마다 얼마나 기분이 좋던지. 이제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얼마나 더 많은 꽃들을 볼 수 있을지 벌써부터 기대되지 뭐냐.”

 

  중년 간호사는 조용히 꽃병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꽃들은 저마다 사람들이 눈치챌 수 없을 정도로 약한 마력을 내뿜는다고 해. 그래서 늘 꽃을 옆에 두고 있으면, 꼭 사랑에 빠진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준다나. 그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 혹시 예전에 달콤한 것을 먹어봤을 때의 기분을 기억하고 있니? 꽃 향기가 그런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데에는 제격이지.”

 

  “달콤한 것........”

 

  봄이는 그의 말에 홀리기라도 한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있었던 것 같아요. 예전에 전 솜사탕을 좋아했어요. 중학생씩이나 되어서 솜사탕을 좋아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게 창피해서 다른 사람들한테는 비밀로 했지만요. 학교가 끝나면 늘 학교 앞 불량식품 가게에서 솜사탕을 사먹는 게 내 얼마 안 되는 즐거움이었죠. 그러다가 돈이 없을 땐 엄마를 불러서.......”

 

  봄이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았고, 뒤통수를 망치로 후려치기라도 한 것처럼 머리가 아팠다.

 

  “그랬구나,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에요. 방금 이야긴 못 들은 걸로 해 주세요.”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도 있는 모양이구나.”

 

  봄이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중년 간호사는 그저 천진난만한 봄이가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기만 했다. 봄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이 솟구치는 것을 느꼈으나 지금 이 사람에게 화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두통은 벌써 잦아들었지만, 봄이는 거짓말을 했다.

 

  “죄송해요. 머리가 아파서요. 조금만 더 누워서 쉴게요.”

 

  “그러렴. 푹 쉬어. 때가 되면 다시 돌아올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불러. 멀리 있어도 천막 앞에는 있을 테니까.”

 

  “아저씨, 저.......”

 

  중년 간호사는 봄이에게 당부한 후 등을 돌리려 했다. 그러나 봄이가 그를 불러세웠다.

 

  “생각해 주셔서 고마워요. 전 당신들 소속도 아닌데.......”

 

  “신경 쓰지 마.”

 

  그는 그렇게 말하고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가 가고 난 뒤 봄이는 자신의 몸에 덮인 외투를 더욱 당겨 끌어안은 채 돌아누웠다. 그러자 봄이의 머리맡에 놓인 꽃병이 보였다. 아까와는 달리 비어 있지 않았고, 작고 예쁜 꽃이 담겨 있었다.

 

  방금 전에 중년 간호사는 꽃 향기를 맡으면 달콤한 것을 먹었을 때와 같은 기분을 떠올려준다고 했었다. 하지만 봄이는 그 말뜻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차렸다. 꽃 향기는 달콤한 것을 먹었을 때의 기분을 되살려주는 게 아니라, 점점 잊혀져가는 예전 세계에서 겪었던 제일로 달콤했던 기억을 되살려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봄이에게 어떠한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물론 그것이 예전 세계에서 가장 달콤했던 기억인지는 잘 몰랐다. 그런 게 제일 달콤했던 기억이었다고? 고작 솜사탕을 먹었던 게?

 

  아니다. 솜사탕은 물론 중요했지만, 요점은 그게 아니었다. 요점은 봄이가 집을 나온 뒤 처음으로 엄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앞뒤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지만 봄이가 아까 중년 간호사에게 들려주었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뭐가 달콤한 기억이었다는 말인가?

 

  꽃 향기의 마력은 곧 사라졌고, 더 이상 봄이는 아무런 지난 기억도 더듬을 수 없게 되었다. 아무런 결실도 맺지 못한 채 회상이 끝나버리자 봄이는 꽃이 원망스러웠다. 달콤했던 기억을 되살려준다고 한다면 확실하게 떠올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적어도 엄마의 손을 잡은 기분은 어땠는지, 그 때 엄마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하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나머지 기억은 봄이가 직접 찾아 나서야만 했다. 봄이는 최대한 기억을 찾을 수 있을 만한 장소를 떠올려보려고 노력했다. 기억을 찾을 수 있을 만한 장소....... 그런 장소를 봄이가 기억해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또 다시 진실은 망각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깊게 가라앉아 버렸다.

 

  봄이는 예전 기억을 더듬다가, 지난번 자경단을 떠나기 전 삼촌이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바로 봄이 자신이, 집에 들이닥친 강도들에게 엄마와 아빠가 살해당했다고 삼촌에게 연락했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봄이는 이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믿지 않았었다. 전혀 기억이 없어서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삼촌이 해주었던 그 말 한 마디만이 지금 진실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삼촌과 더 이야기를 해봐야만 했다. 어쩌면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진실에 마주하게 될지도 몰랐다. 만약 정말로 그럴 때가 온다면, 과연 봄이는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봄이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선 조용히, 몸에 덮인 외투를 뒤집어쓰고 천막 밖으로 나왔다.

 

  봄이를 제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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