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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95화
작성일 : 19-11-08 22:36     조회 : 278     추천 : 0     분량 : 9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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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는 그 순간 과거의 흔적을 보았다. 머릿속으로 지나왔던 어떤 광경을 떠올리자 그 때의 순간이 다시금 눈 앞에 펼쳐졌다. 검은 새들이 날갯짓을 하며 가로등에 날아와 앉았고, 눈부신 섬광과 함께 익숙한 향기도 풍겨왔다. 분명히 그것은 환각이었다. 하지만 환각을 자각하지 못한 순간에는 총탄이 심장을 꿰뚫는 감각이 똑똑히 느껴졌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였지만, 과연 지금도 환각일까?

 

  봄이는 쥐고 있던 권총을 떨어뜨렸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오른쪽 어깨에서 새빨간 피가 뿜어져나오는 것을 보았다. 뿜어나온 핏방울의 일부는 봄이의 뺨에 튀었고, 나머지는 근처 잿더미에 뿌려졌다. 가까스로 뜯어진 문고리로 중심을 지탱하고 있었던 봄이는 어깨뼈를 관통당한 충격에 뒤로 나자빠졌다. 이미 오른쪽 어깨는 너덜너덜했지만, 고통은 확실히 전해졌다.

 

  “어째서야? 어째서..........”

 

  여왕이 소리쳤다. 분노한 목소리 같기도 했고, 울부짖는 것 같기도 했다.

 

  “왜 쏘지 않은 거야? 기껏 너에게 날 쏘고 스스로 빠져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까지 주었는데도.......... 어째서야? 도대체 어떤 이유로?”

 

  봄이는 피가 흐르는 어깨를 움켜쥐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거대한 추를 매단 것 같은 다리는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모두 부질없었다. 이렇게 엉망진창인 몸으로는 이곳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봄이는 일어서는 것을 포기하고 그대로 드러누웠다. 이리저리 구른 탓인지 다친 허벅지와 어깨의 핏자국에 흙먼지와 모래가 그대로 눌러붙어 따끔거렸다.

 

  “인간이 이기적이기는 하지만, 다른 짐승들과는 달리 인간에게는 인간성이란 게 존재해. 그리고 그 인간성을 잃지 않는 한 인간은 짐승도 아니고, 그보다 더 끔찍한 존재로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배웠어. 지금까지의 내 여정 속에서 말이야.”

 

  지금껏 잠잠하던 바깥에서 폭음이 들렸다. 그 때문에 두 사람을 둘러싼 잔해에서 타오르던 불길이 매섭게 흔들렸다.

 

  “내 가족들을 찾기 위해 떠났던 날부터 난 많은 사람들과 만났어. 예전 세계에서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다르게 근 며칠 동안 만났었던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목표를 가지고, 각자 자신만의 길을 걸어오고 있었지. 그 중에선 인간성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도, 인간성을 잃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도, 인간성을 너무 과하게 지키려던 나머지 그만 인간성을 잃어버리고 만 사람도 있었어. 그런 사람들과 같은 길을 걷고,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있었던 시간 동안 깨닫게 된 거야. 물론 나도 당신처럼 인간성을 저버릴 뻔한 적이 많았어. 그저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이유만으로 나와 똑같은 목표를 가지고 살아가던 사람들을 위협하기도 했지. 사람을 죽인 적도 있고.........”

 

  자꾸만 호흡기로 스며드는 잿가루 때문에 기침이 나왔다. 한참 동안이나 콜록대던 봄이는 발작이 완전히 멎고 나서야 다시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행동들을 용서받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아무리 살아남기 위해서라고,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악행은 악행이겠지. 그래서 나는 지금 지은 죗값을 치르고 있을 뿐이야. 여기서 당신을 쏜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어차피 나는 이곳에서 살아나갈 수 없을 테니까. 오히려 더 무거운 죄를 짊어지고 죽게 될 뿐이겠지.”

 

  봄이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여왕이 비웃듯이 말했다.

 

  “이해할 수가 없어........ 지금 세계에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 인간성 하나 때문에 네가 살아나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저버렸다는 말이야? 말도 안 되게 물러터졌구나. 너무나도 물러터져서 멍청한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야. 도대체 너란 꼬맹이는.........”

 

  “아직도 모르겠어? 인간과 까마귀가 다른 점이 뭔지.”

 

  그러나 여왕은 코웃음만 쳤다.

 

  “그래, 잘 알아들었다. 네가 날 쏘든 안 쏘든 상관없어. 넌 우리의 마지막 호의마저 걷어차버렸으니 말이야. 그런다고 내가 널 살려둘 것 같아?”

 

  여왕은 권총을 힘껏 밀어내고는 두 팔로 잔해 속에서 온 힘을 다해 기어나왔다. 여왕이 기어나온 바닥에는 흥건한 핏자국이 칠해졌다. 엄청난 고통에도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성이라, 그딴 개똥만도 못한 것에 얽매였다면 난 아마 지금까지 살아남지도 못했을 거다. 무기고에 불을 지른 대담함 때문에 널 높이 평가했지만, 아무래도 널 과대평가한 것 같구나. 넌 그냥 터무니없을 정도의 바보 멍청이였어.”

 

  여왕은 한 쪽 다리가 없었음에도 엄청나게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새 그녀는 봄이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날 쏜다고 해도 어차피 살아나가지 못할 거라고? 잘 아는구나. 그걸 알고 있다면 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게 된다는 것도 알고 있겠지. 넌 틀림없이 물러터진 멍청이지만, 네 마지막 용기를 높이 사서 특별히 숨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인간으로서 죽을 수 있도록 해주지. 엄청나게 명예로운 죽음일 거야. 그렇지?”

 

  여왕은 실컷 봄이를 비웃으며 자신의 권총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봄이에게 총구를 겨눴다.

 

  “난 말이지,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끝까지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으려고 하다가 길거리에서 꼴사납게 죽어있는 녀석들은 과연 인간답게 죽은 걸까? 아니면 아무것도 먹을 게 없는 상황에서, 고작 식인의 거부감 때문에 사람을 잡아먹지 못하고 그대로 굶어죽은 녀석들은 정말로 인간답게 죽은 걸까? 그게 정말로 인간다운 죽음일까? 천만에, 모두 다 개죽음일 뿐이야. 변해버린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독한 결단을 내리지 못한 나약한 녀석들이 그대로 비참한 죽음을 맞은 것뿐이지. 난 절대로 그렇게 의미없이 죽음을 맞지는 않을 거야. 인간답게 죽을 바에는 설령 괴물이 된다는 한이 있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도 살아남을 거라고.”

 

  그 순간 우르릉 하는 폭음이 반쯤 무너져내린 저택을 다시 한번 뒤흔들었다. 천장에서 커다란 잔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이 장소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완전히 붕괴돼버릴 것이다. 곧 하늘에서 날카로운 잔해가 봄이의 목을 향해 떨어져내릴 것이고, 그와 동시에 봄이는 미련 없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누군가가 찌그러진 출구 문을 바깥에서 두드렸다. 하지만 여왕은 신경쓰지 않았다.

 

  “우리는 까마귀야. 우리만의 정의를 관철하고, 살아남기 위해 시체를 뜯어먹는 까마귀다. 우린 더 이상 인간의 기준에서 세운 정의 따위는 따르지 않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 잿더미뿐인 세상에서, 긍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인간성 따위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니까.”

 

  찌그러진 출구 밖에서 누군가가 무어라고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어린 소녀의 목소리 같았지만, 봄이에게는 곧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럼 죽어라. 죽는 순간까지 그 잘난 인간답게 말이지.”

 

  여왕은 방아쇠를 당겼다.

 

  봄이는 눈을 감았지만, 총성은 들리지 않았다. 슬라이드가 뒤로 젖혀진 권총에서 둔탁한 쇳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여왕이 몇 번 더 방아쇠를 당겨 보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봄이는 어차피 죽게 될 운명이라면 의연하게 죽음을 맞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하게 되어버리자 왠지 모르게 김이 빠졌다.

 

  여왕은 권총을 내팽개치고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 순간만큼은 봄이도 정말로 그녀가 인간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잔해 속에서 여왕의 괴물 같은 웃음소리가 몇 번이고 메아리쳐 돌아왔다. 여왕의 그 괴이한 모습을 보자 봄이가 동화 속에서 읽었던, 아이들을 납치해 가마솥에 던져버리기 전 기쁨에 젖어 미친 듯이 웃던 마녀가 생각났다.

 

  그 때, 찌그러진 출구의 문이 박살나며 누군가가 뛰쳐들어왔다. 봄이의 예상대로 어린 소녀였다. 소녀는 두 손에 소화기를 들고 있었다. 그걸로 문을 부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콜록, 콜록.........세상에,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뛰쳐들어온 소녀는 먼지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기침을 하면서도 잔해 속 두 사람에게 물었다.

 

  봄이는 눈을 한 쪽만 뜬 채로 소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여왕도 마찬가지였다.

 

  소녀는 쌓인 잔해 더미를 헤치고 두 사람에게 달려왔다. 달려온 소녀는 곧 여왕의 몰골을 보더니 들고 있던 소화기를 떨어뜨리고 울부짖었다.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여왕님!”

  “이럴 수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여왕님!”

 

  베티의 얼굴 역시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엉망진창이었다. 물론 봄이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베티는 달려와 여왕을 부축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힘겨운 듯했다. 베티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곧 여왕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이건 거짓말이야.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어째서, 도대체, 왜!”

 

  베티의 절규는 점차 분노로 바뀌어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봄이는 베티의 감정선이 변화하는 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누가 대체 이런 짓을 한 거죠? 도대체 누가? 여왕님, 여왕님은 분명히 알고 계시죠?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계시죠? 도대체 누가......... 죽여버리겠어. 반드시 죽여버릴 거라고!”

 

  한참 동안 흐느끼던 베티는 천천히 봄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베티의 얼굴은 퉁퉁 부은 데다가 격양된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져 굉장히 부자연스러웠다.

 

  “혹시.........설마 네가 한 짓은 아니지?”

 

  베티는 입술을 덜덜 떨며 물었다.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베티는 그럴 리 없다는 듯이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설마 네가 한 짓이겠어. 말도 안 되지. 정말로 그렇겠어? 내가 괜한 의심을 하고 있는 거겠지? 그렇지?”

 

  베티는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떨떠름하게 웃으며 봄이와 여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하지만 누구 하나 베티에게 답을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왜들 그래요? 왜들 그렇게 멍청하게 누워있기만 하냐고요. 여왕님, 제게 알려주세요. 지금 저택 바깥은 완전히 불타오르고 있어요.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죠? 누가 불을 지른 거죠? 누가 우리의 하나뿐인 소중한 가족들의 보금자리에 불을 지른 거냔 말이에요.”

 

  그러나 여왕은 대답하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버렸다. 베티는 쓰러진 봄이에게로 천천히 다가와서는 봄이의 양 어깨를 움켜잡고 흔들었다.

 

  “네가 말해 봐. 이번만큼은 네가, 네가 본 그대로를 말해줬으면 좋겠어. 넌 알고 있지? 늘 바빴던 여왕님은 그렇다쳐도 너라면 반드시 알고 있을 거야. 지진이 일어났었다는 건 알아. 저택에서 나와 있었을 때라면 나도 느꼈어. 하지만 까마귀 저택이 그런 한순간의 지진 때문에 내려앉았다는 건 말도 안 돼. 분명히 지하에서부터 일어난 화재 때문에 기반이 약해져 있었겠지. 그렇다면 누가 불을........”

 

  “내가 했어.”

 

  봄이가 말했다. 왜 그렇게 말했을까? 자신이 그다지 솔직하지 않다는 것은 봄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째서 베티의 진심이 담긴 추궁 한 마디에 그토록 솔직해졌을까? 무조건 자신이 한 게 아니라고 잡아떼기만 한다면 피해갈 수 있었을 텐데도 어째서........

  “잠깐, 뭐라고?”

 

  베티가 되물었다. 분명 베티는 제대로 듣지 못한 게 아니었다. 베티가 움켜잡은 양 어깨가 조여들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왼팔은 그나마 참을 만했지만 오른쪽 어깨는 눈물이 나도록 아팠다. 하지만 봄이에게는 아픔을 얼굴에 내비칠 기력마저도 남지 않았다.

 

  봄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베티는 봄이의 어깨를 놓아주고 일어섰다. 베티의 표정은 마치 끓어오르는 어떤 것을 억누르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베티는 눈을 찡그리기도 하고, 금방 참고 있던 숨을 내쉬며 웃기도 했다. 무너져가는 천장을 올려다보기도 하고, 땅에 어지럽게 짓눌리고 널린 잔해들을 내려다보기도 했다.

 

  베티는 자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가 곧 손을 털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얼굴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엄청난 혐오감에 젖은 것 같기도 했다. 이제 베티는 저택에서 일어난 모든 비밀을 알았다. 이제 베티는 날 어떻게 할까?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봄이의 얼굴에 작지만 거센 주먹이 날아들었다.

 

  “이 배신자야!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우리는, 나는, 그리고 여왕님은 널 우리 가족으로 받아줬어. 칼에 찔려 죽어가던 널 구해주고, 우리들만의 보금자리로 옮기고 치료해주기까지 했다고! 그렇게까지 해 줬는데, 넌 우리에게 해줄 수 있었던 게 이것뿐이었어? 당장 우리가 도와주지 않았으면 그 자리에서 죽었을지도 몰랐던 너를 구해준 것에 대한 대가가, 비록 외지에서 자라고 우리와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지만 널 기꺼이 우리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준 보답이, 널 믿었던 가족들을 배신하고 우리들의 보금자리에 불을 지르고 무너뜨리는 거였어? 꼭 그렇게 했어야만 마음이 편했어? 그런 거야? 대답해!”

 

  베티는 다른 손 주먹으로 봄이의 다른 쪽 뺨을 후려쳤다. 이제 얻어맞는 감각에는 익숙했다.

 

  “배신자, 반역자, 배은망덕한 계집애.......... 넌 사람도 아니야. 인간도 아니야. 너 때문에 전부 다 꼬여버렸어. 넌 그러면 안 됐어. 정말로 우리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냥 우릴 떠나버렸으면 될 거 아냐. 우리와 함께 하는 게 그렇게 싫었으면 그냥 쥐도 새도 모르게 너 혼자 떠나버렸으면 될 것 아니냐고! 그렇게 우리의, 내 하나뿐인 가족과도 같은 사람들이 몰락하는 걸 네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마음이 편했어? 널 믿었었는데.......... 네가 정말로 우리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었는데...........”

 

  베티는 이미 축 늘어진 봄이에게 끝없이 독기를 발산했다. 그 독기에는 형용할 수 없는 분노, 좌절감, 회한이 담겨있었다. 베티는 끝내 차오르는 울분을 이겨내지 못하고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왜 다들 날 싫어하는 거지? 어째서 내가 바랐던 이 조그만 소망조차도 이룰 수 없도록 가로막는 거야? 내가 너무 많은 걸 바란 거야? 난 그저 날 진심으로 아껴 주는 사람들과 가족이 되고 싶었을 뿐인데.........”

 

  베티는 그렇게 말하고는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질렀다. 머리를 쥐어박고 이마를 녹슨 잔해에 세게 찧어대며 광란을 부렸다. 숨이 차서 잠시 잠잠해지더라도, 거친 숨을 고르고 난 후에는 다시 절규하는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내가 처음 까마귀에 들어왔을 때, 모두들 날 탐탁지 않아했어. 나는 다른 자매들처럼 할 줄 아는 것도 없었고, 싸움도 못했고, 그렇다고 까마귀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데에도 재능이 없었어. 간단한 심부름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했고, 내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는 건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 때마다 옆에서 따뜻하게 격려해주었던 여왕님이 있었기에 난 자신감을 가졌고, 다른 자매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늘 노력했어. 그러던 중에, 네가 까마귀에 들어왔어.”

 

  베티는 치켜올렸던 주먹을 힘없이 떨어뜨렸다.

 

  “처음으로 내 또래 여자애를 보자 난 기뻤어. 여왕님은 내 멘토와도 같았고 큰 힘이 돼줬지만, 정말로 ‘친구’를 만나게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정말로 기뻤지만, 새로 들어온 후배에게 엄격한 선배로 보이기 위해서 일부러 널 까칠하게 대했어. 속으로는 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에 엄청나게 기뻤지만 말이야.”

 

  베티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곧 다시 입을 열었다.

 

  “생애 처음으로 만난 첫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다는 건 각별한 일이었어. 지금까지 여왕님이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이었어. 널 만났을 때 나는 드디어 정말로 동등한 관계에서 의지할 수 있는 친구, 또 내 고민을 마음놓고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넌 나와 공통점도 많았지. 비슷한 듯하면서도 어딘가 완전히 다른 것 같기도 한 공통점이 말이야. 그렇기에 난 네가 우리들을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 네가 다 망쳐버렸어.”

 

  무너진 저택 바깥쪽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 같기도 하고, 쇠가 부딪히는 소리 같기도 하고, 사나운 개가 짖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 소리들의 의미를 알아챈 여왕이 말했다.

 

  “베티, 어서 여길 떠나.”

 

  베티가 여왕의 부름에 고개를 홱 돌렸다.

 

  “떠나라고요? 왜죠?”

 

  “이제 이 저택은 오래 버티지 못해. 놈들이 오고 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가는 잔해를 뚫고 들어온 자경단 놈들에게 총에 맞아 죽거나, 포로로 잡혀서 심문을 당하거나, 아니면 무너지는 돌무더기 잔해에 깔려 죽게 될 거야. 네가 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어. 빨리 여길 떠나. 어서.”

 

  “왜요? 제가 왜 여길 떠나야 하죠?”

 

  “베티, 네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알지만, 난 이미 다리를 잃어서 여길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해. 마지막 명령이다. 너라도 살아나가야 우리의 사명을 계속해서 이룰 수 있지 않겠니. 그러니까 어서 가.”

 

  베티는 여왕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왕이 답답하다는 듯이 소리쳤다.

 

  “베티! 내 말 안 들려?”

 

  “여왕님, 죄송해요. 여왕님의 마지막 명령, 따를 수 없어요. 그리고 마지막 명령도 아니게 될 거예요.”

 

  베티가 그렇게 말하더니 잔해 더미에서 뛰어내려 여왕의 팔을 들쳐맸다. 여왕을 일으켜세우는 베티는 아주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베티는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다.

 

  “베티, 너.........”

 

  “전 지금까지 늘 여왕님께 도움만 받아왔어요. 이제는 제가 여왕님을 도울 차례예요. 우린 가족이잖아요. 설사 불가능하다고 해도 가족을 그렇게 쉽게 내버려두고 혼자 도망치란 명령은 절대로 듣지 않을 거예요. 설령 나까지 죽게 되는 한이 있다고 해도.”

 

  이어서 쌓인 잔해 더미를 무언가로 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의 외침 소리는 더욱 커졌다.

 

  “젠장, 베티! 시간이 없어. 지금이라도 혼자 도망치란 말이야! 나까지 데리고 나가기에는 너무 늦어! 왜 말을 듣지 않는 거야!”

 

  “싫어요! 싫어! 절대로 안 들을 거예요! 저한테 남은 마지막 가족까지 잃고 싶지는 않아요! 여왕님이 없으면 저도 없어요. 제가 여왕님 없이 이 변해버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라는 거예요!”

 

  베티는 힘겹게 다리를 절면서도 여왕을 부축하며 한 걸음씩 봄이에게서 멀어졌다.

 그렇게 멀어지던 두 사람을 쳐다보기만 하는 봄이를 돌아보며 베티가 말했다.

 

  “난 지금의 네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 지금 당장 갈가리 찢어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지만,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난 예전에 말했듯이 누굴 원망하거나, 유치하기 짝이 없는 복수같은 건 안 하니까. 다만 넌 반드시 날 적으로 돌리게 된 걸 후회하게 될 거야. 그리고, 꼭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말을 마치고 베티는 등을 돌렸다.

 

  “네가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랄게.”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여왕과 베티는 잔해들의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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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12.까마귀 2019 / 11 / 4 209 0 8834   
82 82화 2019 / 11 / 4 249 0 5374   
81 81화 2019 / 11 / 4 249 0 8794   
80 80화 2019 / 11 / 4 254 0 8167   
79 79화 2019 / 11 / 4 223 0 5245   
78 78화 2019 / 11 / 4 250 0 7057   
77 77화 2019 / 11 / 4 237 0 5426   
76 76화 2019 / 11 / 4 235 0 10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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