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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94화
작성일 : 19-11-08 22:34     조회 : 230     추천 : 0     분량 : 10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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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는 지금 자신이 눈을 뜨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등을 대고 드러누운 바닥은 차가웠고, 한 쪽 팔에는 감각이 없었다. 사실 감각이 없는 건 한쪽 팔뿐만이 아니었다.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여보기 위해 안간힘을 다했지만 몸 위에 쌓인 날카로운 철근이 몸 구석구석을 찌르기만 했다. 흙이 잔뜩 덮인 얼굴로는 숨쉬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코로 흙먼지가 스며들었고, 그 때문인지 자꾸만 기침이 나왔다.

 

  온 세계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던 굉음이 잦아들었지만 아직도 머릿속이 멍했다. 뒷목이 끊어질 것처럼 아팠고, 가까스로 연 입에서는 끈적거리는 거미줄만 들러붙었다. 가끔 침 섞인 모래알이 씹히기도 했다. 온 몸을 들쑤시는 마비 때문에 코로 흙먼지를 들이마시거나 입을 뻐끔대는 것 말고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불편하기는 했지만 별 수 없이 봄이는 그 자리에서 잠깐 눈을 붙였다.

 

  몇 시간이 지났는지도 몰랐다. 서서히 몸을 시멘트로 굳히는 것 같던 마비가 풀렸고 머리는 이성을 되찾았다. 봄이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보았다. 다섯 손가락의 감각이 모두 느껴졌다. 하지만 오른쪽 팔에서는 아직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봄이는 몸 위에 쌓인 잔해를 왼 팔꿈치로 건드려보았다. 그럴 때마다 코와 입 속으로 모래가 쏟아졌다. 그다지 맛은 없었다. 봄이는 다시 호흡을 가다듬고 다시 한 번 팔꿈치로 잔해를 힘껏 밀었다. 그러자 봄이의 얼굴을 짓누르고 있던 커다란 잔해 더미가 무너져내렸다. 동시에 눈동자에 바깥 세상의 빛이 가득 들어왔다.

 

  분명히 봄이는 저택 옥상까지 올라왔었다. 하지만 지금 눈에 보이는 광경은 자신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갑자기 발생한 거센 지진으로 인해 저택의 기둥이 무너져내리는 바람에 옥상이 완전히 폭삭 내려앉아 버린 모양이었다.

 

  눈 앞의 저택에는 지금까지 봄이가 느꼈던 고풍스러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마치 거대한 폭격기 편대가 저택 근방의 숲을 완전히 휩쓸고 지나간 것 같았다. 가까스로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저택 일부분마저 앙상한 골조로 변해있었고, 무너진 기둥이 그대로 덮쳐버려 납작해진 트럭에는 아직도 시끄러운 경보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허공에는 자욱하게 흩날리는 먼지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봄이는 입 속 가득한 모래를 뱉어내고 잔해를 딛고 일어서려고 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봄이의 오른쪽 팔이 무너진 가구 더미에 깔려있었기 때문이었다.

 

  먼지가 덮여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가구 더미 위에 잔해들이 더 쌓여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것들은 봄이의 오른팔을 엄청난 무게로 짓누르고 있었다. 그 중에 한 쪽 다리가 부서진 소파가 있는 것을 보고 봄이는 생각했다. ‘내가 다리 하나를 부러뜨렸다고 복수하는 거냐, 인정머리 없기는.......’

 

  봄이는 오른쪽 어깨를 왼손으로 붙잡고 깔린 팔을 잡아당겼다. 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미 오른팔에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아닐 거야. 이건 거짓말이야.

 

  아무리 발버둥쳐도 무거운 가구 더미에 깔린 오른팔은 움직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오른팔 위에 쌓인 가구들은 너무 무거워서 봄이의 힘으로는 치워낼 수조차 없었다. 결국 봄이는 옴짝달싹도 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누워서 일어나지도 못한 채 주위를 둘러보니 봄이의 왼손이 가까스로 닿을 법한 거리에 무언가 빛나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커다란 부엌칼이었다. 봄이처럼 흙을 흠뻑 뒤집어써서 볼품없는 모양이기는 했지만, 확실히 날이 서려 있었다.

  봄이의 머릿속에 순간 어떤 결정이 스쳤다. 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결정이었다.

 

  봄이는 왼팔을 뻗어 부엌칼을 움켜쥐었다. 오른팔은 지금 무거운 잔해에 깔려있었고, 그 때문에 봄이는 이 무너진 저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순전히 오른팔 하나가 봄이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 오른팔만 없다면 봄이는 언제든지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오른쪽 어깨가 뜨겁고 아프기는 했지만, 팔에는 아무런 감각이 없었다. 그렇다는 것은 봄이의 오른팔 신경계는 모두 짓뭉개지고 망가져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오른팔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이미 너무 늦어버렸다.

 

  시간이 없었다.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봄이는 나머지 한 쪽 손으로 무거운 부엌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분명히 이 정도로 큰 칼이라면 이미 뭉개진 팔 하나 따위는 순식간에 절단할 수 있을 것이다. 치켜든 팔이 부들거렸고, 봄이의 눈동자에 서린 핏줄이 튀어나올 듯이 요동쳤다. 결국 이렇게까지 해야 한다는 말인가........

 

  칼을 쥔 봄이의 손아귀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이제 두 눈 감고 내려치기만 하면 되었다. 그렇게만 한다면 지금 봄이의 심장을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도, 공포도, 죽음으로부터의 위협도 모두 끝날 것이다. 모든 것이 끝나기만 한다면 봄이는 이곳에서 나갈 수 있었다.

 

  봄이는 결단에 앞서 목청껏 소리쳤다. 상처를 입은 맹수가 내지르는 포효같기도 하고, 그저 처절한 고통에 휩싸인 소녀의 비명과도 같은 소리를. 그렇게라도 하면 아픔이 조금이라도 잊혀지지 않을까 해서.......

 

  봄이는 쥐고 있던 칼을 내리찍었다.

 

  하지만 내리친 곳은 조각난 시멘트 잔해였다.

 

  봄이는 칼을 떨어뜨리고 절규했다. 소녀의 절규는 마치 분노와도 같았다. 하지만 봄이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이러한 감정이 단순한 분노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절규는 땅 속 깊은 곳에서부터 터져나오는 용암처럼, 지금 자신의 두 눈동자에서 뜨겁게 흘러내리는 눈물처럼 쉽사리 단정짓기 힘든 감정이었다. 어떻게 자기 팔을 거대한 칼로 내리쳐서 자를 수 있겠는가? 모질게 자라기는 했지만 결국엔 어린 소녀에 불과할 뿐한 봄이가 어떻게..........

 

  이러한 봄이의 무른 성격은 늘 봄이의 발목을 잡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랬다. 어떠한 결정을 내린다는 일은 누군가에겐 보잘것없는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지금의 봄이에게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분명히 각오하고 오지 않았나? 저택 2층에서 아래로 뛰어내린다는 방법을 생각했을 때에는 두 다리를 내주는 것을 각오했고, 거기까지 생각할 것도 없이 봄이가 이 험난한 여정을 떠나기 전 분명히 각오했을 터였다. 두 팔, 두 다리를 희생하는 것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면 어째서 자신은 이 끝이 없을지도 모르는 여정을 시작했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니 봄이는 자기 자신에게 화가 치밀었다. 자신에게는 더 이상 자격이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변해버린 세상은 봄이같은 약하고 물러터진 소녀가 살아남을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강해져야 했고, 강해지기 위해선 증명해내야만 했다. 살아남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를, 더해서 그 의지로부터 이끌어낼 수 있는 자신의 각오를.

 

  봄이는 감각이 없는 오른팔을 움켜쥐었다. 이 다음은 모두 각오하고 있었다. 봄이는 더 망설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오른팔을 잔해로부터 끌어냈다. 우두둑 하는 소리와 함께 오른쪽 어깨 관절이 뒤틀렸다. 봄이는 그제서야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펄펄 끓는 눈물이 순식간에 흘러내렸지만 봄이는 멈추지 않았다. 오른팔을 움켜쥔 왼손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조금 지나자 오른 팔뚝의 근육이 찢어졌다. 눈 앞이 말 그대로 노랗게 변했고, 이미 피를 많이 흘린 봄이는 정신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고통을 이를 악물고 참아낼 때마다 오른팔은 조금씩 잔해에서 빠져나왔다.

 

  잠시 후, 결국 봄이의 오른팔이 잔해 더미에서 뽑혀져 나왔다. 그러나 봄이의 오른쪽 어깨뼈는 이미 탈골에 가까운 부상을 입은 뒤였다. 손톱은 죄다 뽑혀버렸고, 팔뚝에 뻗은 혈맥과 찢어진 근육은 너덜너덜해져 버렸다. 이제 더 이상 오른팔은 자신의 의지로 움직이지 않았다.

 

  깔린 오른팔을 뽑아냄과 동시에 봄이는 팔뚝을 움켜잡고 바닥을 뒹굴었다. 피가 쉴새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당장 응급처치를 하지 않는다면....... 봄이는 가까스로 셔츠를 벗은 다음 나머지 손과 입으로 너덜너덜해진 오른팔을 꽉 동여맸다. 더러운 셔츠는 금방 핏빛으로 물들었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다. 봄이는 새어나오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미친 사람처럼 뒹굴며 신음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끝났다. 결국 봄이는 자기 자신을 이겨낸 것이다.

 

  저택 기둥에 깔려 폭삭 찌그러진 트럭에서 요란하게 울리던 경보음은 곧 꺼졌다. 발 밑은 무너진 잔해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거대한 저택이 붕괴되는 충격에도 완전히 꺼지지 않은 불길이 봄이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불길이 확실히 잦아들어 있었다.

 

  봄이는 오른팔을 움켜쥔 채로 다리를 잡아끌었다. 치열한 전투로 떠들썩하던 아까의 소란스러움은 온데간데없었다. 그저 어지럽게 쌓인 잔해 주위에서 불꽃이 날름대며 탁탁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앞에는 불에 완전히 타버린 목재 잔해들이 출구를 가로막고 있었다. 봄이가 힘껏 잔해들을 밀어내자 그것들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해 눈 따가운 잿가루만을 흩날렸다.

 

  이제 출구는 봄이의 눈 앞에 있었다.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제 저 무너진 출구를 통해 바깥으로 나가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식인종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분명히 그럴 터였다.

 

  그 순간, 봄이는 총성을 들었다. 분명히 봄이의 등 뒤에서 울려퍼진 총성이었다. 그 총성의 진원지를 유추해낼 틈조차 없이, 날카로운 것이 봄이의 오른쪽 허벅지를 관통했다.

 

  봄이는 출구를 눈 앞에 둔 채 또다시 풀썩 고꾸라졌다.

 

  * * *

 

  봄이가 넘어지면서 무언가 조그맣고 빛나는 것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 발 남지 않은 권총용 탄환들이었다. 처음에 아홉 발을 주웠었고, 다섯 발은 이미 써버렸다. 남은 네 발의 탄환이 땡그랑 땡강 소리를 내며 봄이의 스커트 주머니에서 빠져나갔다. 봄이는 반사적으로 그것들을 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그것들은 갑작스레 비추는 밝은 빛을 피해 달아나는 바퀴벌레들처럼 모두 어디론가로 숨어버렸다.

 

  “이대로 그냥 가려고, 응?”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였다. 다시는 듣고 싶지 않았던, 방금 전까지 봄이의 목에 쇠 파이프를 들이댔던 그 여자의 목소리였다.

 

  여왕은 잔해에서 미처 다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로 엎드려서 봄이에게 권총을 겨누고 있었다. 여왕의 이마에서는 미간을 따라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봄이와는 달리 여왕은 두 팔이 모두 멀쩡해 보였다. 다만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넌 내게서 벗어날 수 없어........ 절대로.”

 

  여왕은 무슨 말을 더 하려는 것 같았으나 격렬한 기침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여왕이 겨눈 총부리에서는 아직도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정말로 네가 여길 벗어난다고 해서 미래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봄이는 피가 울컥대는 허벅지를 남은 왼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피를 봄이의 작은 손바닥으로 지혈하기엔 너무나도 부족했다. 허벅지의 맥박이 두근거릴 때마다 피는 더욱 격렬하게 쏟아져나왔다. 봄이는 이제 아픔마저 느끼기 힘든 지경까지 이르렀다.

 

  “왜 그래? 넌 할 만큼 했어. 이제 그만해도 좋아. 어차피 네가 이곳에서 살아서 나가기는 글렀어. 난 아직 싸울 수 있거든. 그런데 넌 어떻지? 오른팔은 또 왜 그렇고? 네가 정말 아직도 터무니없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있다면 어서 일어나. 고통을 악물고 두 다리를 짚고 일어나 봐. 네가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너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지.”

 

  봄이는 무릎을 꿇고 일어서려 했다. 하지만 총을 맞은 다리는 계속해서 무너져내렸고, 걸레짝이 된 오른팔은 땅을 짚지 못하고 미끄러졌다. 그 광경을 본 여왕은 비웃듯이 소리쳤다.

 

  “그것 봐. 이미 네 몸은 이제 한계야. 그런 걸레 같은 몸뚱아리를 이끌고 어디까지 도망칠 수 있을까? 이미 바깥은 자경단 놈들로 가득 찼을 테고, 네가 그 놈들에게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해. 그리고 넌 우리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이 자리에서 즉결처형을 당하겠지. 놈들은 다른 건 몰라도 신원불명의 포로를 즉결처분하는 것만큼은 아주 좋아하거든.”

 

  봄이는 그 순간 예전에 잠깐 동안 함께했었던 종민이 그들이 쏜 총에 쓰러졌던 광경이 떠올랐다. 즉결처분이라는 명목으로.......

 

  “넌 어느 쪽에도 붙지 않았어. 까마귀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곧 들이닥칠 자경단 놈들에게 붙은 것도 아니지. 네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결국 넌 누구에게도 도움받지 못하고, 끝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지도 못한 채로 아무런 의미없이 죽는 거야. 그리고 그건 네가 선택한 결과야. 어쩌면 네 선택에 따라 구원받을 수도 있었던 삶의 갈림길에서 잘못된 길을 택한 어리석은 자의 비참한 결말이지. 만약에 네가 우리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우리 가족이 되었다면, 지금의 넌 그렇게 꼴사나운 몰골로 바닥을 헤집고 다니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당신들은 내 가족이 아니야.”

 

  봄이는 겨우 맞섰다. 말 한 마디를 꺼냈을 뿐인데도 기력이 죄다 빨려나가는 것 같았다.

 

  “우린 널 살려줬어! 죽어가는 널 살려줬다고!”

 

  여왕이 소리쳤다. 그 순간만큼은, 여왕의 목소리에 지금까지의 거만함과 여유로움이 사라지고 왠지 모를 비굴함만 남아있었다.

 

  “만약 내가 창고에서 칼에 찔려 죽어가고 있지 않았다면, 그대로 날 당신들의 제물로 썼을 거잖아? 당신들의 그 위대한 의식에 쓰인다는 희생양으로 말이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야.”

 

  “입 다물어! 더 이상 까마귀를 업신여겼다가는.........”

 

  “당신들이 우릴 구해주기 위해서 창고를 습격한 게 아니란 건 알아. 분명히 그렇겠지. 당신들은 인신매매단을 통해 식량으로 쓸 어린아이들을 조달하는 동시에, 한술 더 떠서 자경단 내부에 첩자까지 심어둔 거야. 이름이 창식이란 사람이었던가? 점점 세력이 커져가는 자경단을 견제하기 위해서였겠지.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당신들의 본질적인 목표를 행하는 이상 자경단은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주적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나중에는 인신매매단에게 붙잡힌 아이들을 구해주는 척하면서 붙잡힌 아이들의 충성심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당신들이 심어둔 첩자들을 입막음하기 위해 창고를 싸그리 불태워버린 거고. 당신들이 붙인 첩자라고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까마귀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신들에게는 위협이 될 가능성이 충분하니까. 그런 방법을 반복해서 지금까지 인육을 조달해온 거겠지. 아무 잘못도 없는 어린아이들을........”

 

  여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봄이를 노려볼 뿐이었다.

 

  “당신들이 대의를 위한 숭고한 희생이라며 마구잡이로 잡아먹었던 그 어린아이들이....... 어떤 누군가에게는 이 변해버린 세상에서 유일하게 서로 의지할 수 있었던 소중한 가족이었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어?”

 

  봄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하수도에서 모여 사는 꼬마들을 떠올렸다. 마실 식수가 없어 썩은 물을 마셔버린 아이들을 살려달라며 봄이의 다리에 매달리던 꼬마 대장도 떠올렸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정신을 되찾고 나서야 진심으로 안도하며 웃음을 보였던 꼬마 대장의 얼굴도.........

 

  “그래, 너도 결국 내 동생과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여왕이 두 팔만을 바닥에 짚고 잔해 속에서 기어나왔다. 하지만 일어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여왕의 한 쪽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죄 없는 어린아이들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면서, 자기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까마귀를 나간 그 멍청이랑 똑같아. 너도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여왕은 보이지 않는 다리를 질질 끌고 근처의 부서지다 만 가구 더미로 향했다.

 

  “나약한 녀석들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어. 정신적으로 나약한 것도 포함해서 말이지. 그들이 늘 무른 면모를 계속해서 반복해오니까 세상이 결국 이 꼴이 나버리고 만 거라고. 약자에 대한 인권? 그런 시덥잖은 게 과연 인간이 수만 년 전 신들에게서 불 피우는 방법을 전수받았을 때에도 존재했을까? 인간이 다른 짐승들처럼 무리를 지어 사냥을 하고, 채집을 하고, 동굴 벽에 그림을 그리고, 하늘 높이 바벨탑을 쌓고, 태초의 계급 사회가 실현되는 그 순간에도 약자를 위한 인권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했다고 생각해? 인간들이 살기 위해 지었던 건축물들은 곧 황무지가 된 세계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되었고, 그와 동시에 인류는 자신들의 내면을 감싸고 폭발하지 못하도록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했던 문명이 사라져버리자 한낱 짐승으로 전락해버렸어. 짐승의 세계에서는 강한 자가 곧 법이고, 그에 대적하지 못하는 나머지 종족들은 모두 도태될 뿐이야. 강함이 곧 예전 세계의 법전을 대신하게 된 지금 세계에서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예전 세계의 도덕적 관점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야. 간단하잖아? 이해하기 어렵지 않잖아? 그저 ‘시대는 변화한다’는 것뿐이잖아? 도대체 어째서 이해를 못하는 거야?”

 

  여왕은 답답하기도 하고 분노에 차오르기도 하는 사람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봄이가 말했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 인간들은 어둠 속 길잡이를 잘못 선택했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렸어. 당신 말대로 인간이 짐승으로 돌변하지 않도록 막아주고 있던 문명이 붕괴되면서 그들을 묶어두고 있던 고삐는 풀려버렸지. 그렇게 지금 인류의 몇 퍼센트는 실제로 결국 짐승으로 변해버렸어. 그렇지만 만약 인간성을 완전히 저버려야만 지금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솔직히 두려워. 그 삶이 과연 인간으로서의 삶이 될지, 아니면 인간이 아닌 어떤 그 무엇인가로서의 삶이 되어버릴까 봐........”

 

  봄이는 뜯어진 문고리를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고작 서있는 것뿐인데도 이렇게 힘들다니! 봄이는 마치 갓난아이가 걸음마를 배운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고 상상했다. 결국 모든 인간들이 걷기 위해 태어나는 것처럼......

 

  “나약한 자들은 모두 도태되어야 한다. 물론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야. 모든 동물들은 후대에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서 살아간다는 이야길 들은 적이 있어. 그러기 위해선 더 나약하고, 도태되어버린 종을 배척하는 게 동물적 생존에 있어서는 더 유리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오히려 그런 인간들의 모질지 못한 무른 면으로 인해 더욱 짐승으로서가 아닌 인간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고는 해. 가끔 말이지.”

 

  “도대체 지금까지 뭘 들은 거야? 지금 세계에서 물러터지기만 한 인간성 같은 건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니까!”

 

  “당신 동생, 살아있지?”

 

  너무나도 돌발적인 봄이의 질문에 여왕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딴 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확실하지는 않지만........ 어디선가 만났던 것 같기도 해서.”

 

  여왕의 눈동자는 더 이상 봄이를 향한 살의로 불타고 있지 않았다. 그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고만 있었다.

 

  “너, 그 녀석을 알아? 녀석을 본 적이 있다는 거야?”

 

  “잘 모르겠다니까.”

 

  봄이는 힘 빠지게 대답했다. 여왕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아까 듣기로는, 당신 동생이 까마귀를 나갔다고 했었지.”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야.”

 

  봄이가 말하자 여왕은 듣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렇다면 어째서 당신 동생을 죽이지 않았어?”

 

  “죽일 가치도 없는 년이었어.”

 

  “조금 더 솔직해져도 괜찮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봄이는 여왕의 눈을 바라보았지만, 여왕은 누구와도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봄이는 여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들의 신념을 배반한 배신자를 절대로 살려두지 않는 이 극단주의자가 어째서 자신의 동생만큼은 죽일 수 없었는지.

 

  “유일한 가족이니까. 그렇지?”

 

  “입 닥쳐! 아까부터 무슨 소리를 늘어놓는 건지 모르겠군! 그딴 멍청한 년이 왜 내 가족이라는 거야? 난 까마귀 여왕이고, 내 가족은 오직 까마귀 자매들뿐이야. 앞으로 그 주둥이를 한 번이라도 더 놀린다면 죽여버리겠어!”

 

  여왕이 소리치며 지금껏 내려놓았던 권총을 치켜들어 겨눴다.

 

  “어째서 그렇게 힘들어하면서까지 남아있는 인간성을 버리려는 거야? 우리가 예전 세계에서 서로 총부리를 겨누지 않고 만났었더라면......... 친구가 되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입 닥치라고 말했을 텐데!”

 

  봄이가 가까스로 중심을 지탱하고 선 곳으로부터 다섯 걸음도 채 멀지 않은 곳에서 무엇인가 빛났다. 익숙한 스테인리스 개머리의 권총이었다.

 

  세계는 결국, 봄이에게 결판을 내라고 부추기고 있었다. 여기서 다섯 보 걸어가 총을 뽑고, 방아쇠를 한 번만 당기면 된다고. 그렇게만 한다면, 이제는 정말로 모든 게 끝날 것이라고.

 

  봄이는 조각나고 울퉁불퉁한 잔해들을 겨우 짚고 앞으로 한 걸음씩 나아갔다. 두 걸음, 세 걸음....... 이제 리볼버 권총은 봄이가 손만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었다. 여왕은 이상하게도, 봄이가 권총을 향해 기어가는 이 모든 광경을 보면서도 봄이를 쏘지 않았다.

 

  “그래, 총을 뽑아. 그리고 날 겨눠라. 넌 우릴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이젠 우리도 널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거야. 우리들의 긴 것 같았던 하룻밤 사이의 악연도, 전부 이걸로 끝인 거야. 모두.”

 

  봄이는 잔해 속에 꽂힌 권총을 움켜잡았다. 아까 전에 흩어져 사라져버렸던 탄환들도 네 발 중에서 한 발밖에 남지 않았다. 봄이는 조용히 탄환 한 발을 주워 장전했다. 그리고 여왕을 겨눴다. 여왕 역시도 봄이를 겨누고 있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흘렀다. 잔해 속에서 두 사람을 둘러싼 불의 장막이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이윽고 두 사람은 방아쇠를 쥐었다.

 

  곧 요란한 총성이 울려퍼졌다. 뿜어져나온 붉은 선혈이 잿더미 위에 뿌려졌다.

 

  그러나 울린 총성은 단 한 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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