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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92화
작성일 : 19-11-08 22:30     조회 : 225     추천 : 0     분량 : 1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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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이는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일어나 있었다. 재빨리 문을 열고 난간을 짚은 채 홀을 내려다보자 이상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홀에는 까마귀들이 많았지만 방금 전까지 귓바퀴를 흔들어 놓던 총성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총을 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지하로부터 시작된 화재가 홀에까지 번지고 있었다. 총을 든 까마귀들은 통로에서부터 뿜어져나오는 불꽃을 두 눈으로 보면서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윽고 지하 통로를 가득 메운 불길이 홀 기둥에까지 번졌음에도 까마귀들은 유연하게 대처하기는 커녕 저택 바깥에서부터 공격해오는 침입자들을 막아야 할지, 당장 발 밑까지 옮겨붙으려 하는 화재를 진압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나마 행동력이 뛰어난 까마귀들이 소화기를 들고 와 지하 통로를 봉쇄하고는 소화기를 뿌려 불을 끄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미 지하 전체를 불태우고 홀에까지 옮겨붙은 화재의 뿌리가 너무 깊숙이 박혀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재 시설을 태운 잿더미가 허공에 흩날리고, 지하에서부터 머리를 비집고 나오는 화재가 산소를 죄다 빨아들이기 시작하자 까마귀들은 홀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도망칠 곳은 없었다. 대열을 이탈해서 저택을 뛰쳐나간다면 침입자들의 공격에 벌집이 될 테고, 그렇다고 해서 2층으로 도망친다면...... 고작해야 운명을 미루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예측하지 못한 화재 때문에 방어 인원이 분산되자 까마귀들이 밀리기 시작했다. 초소에서의 연락은 곧 두절되었고, 총성의 진원지는 더욱 가까워졌다. 봄이에게는 좋지 않은 소식이었지만, 까마귀들 역시 살기 위해선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후퇴, 후퇴! 모든 전투 인원은 대열을 유지하며 2층으로 퇴각한다. 서둘러!”

 

  하지만 지휘관의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다. 밖에서는 침입자들이 계속해서 밀고 들어오고, 이제는 홀 대부분을 집어삼키려 하는 거대한 불길 앞에서 대열이 무슨 소용인가? 까마귀들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등을 맞대고 싸웠던 전우를 밀쳐가며 너도나도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봄이도 이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까마귀들이 올라오기 전에 3층으로 올라가야 했다. 하지만 위로 향하는 계단은 쌓인 가구 더미로 가로막혀 있었다. 봄이는 완전히 굳어버린 피웅덩이에 잠긴 까마귀 시체를 끌어내고 막힌 가구들을 하나씩 치웠다. 부서진 테이블이나 의자같은 것은 그럭저럭 치울 수 있었지만, 봄이의 체구의 세 배는 될 법한 낡은 괘종시계나 네 명은 앉을 수 있을 만한 거대한 소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 힘을 다해 밀어보아도 먼지만 떨어질 뿐이었다. 봄이는 작은 집에서 자신 혼자서는 밀지 못했던 가구를 함께 밀어주었던 상훈이 생각났다. 이럴 때 상훈이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해야 했다. 이 가구들을 치우지 못하면 3층으로 도망칠 수 없었다. 홀까지 모두 장악하고 2층까지 번져올라오는 불에 휩싸여 죽든, 화재와 공격을 피해 후퇴하는 까마귀들의 손에 죽든 결국엔 죽을 것이다. 사실 위층으로 도망친다고 해서 딱히 저택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힘으로는 이 가구들을 치울 수 없었다. 그렇기에 봄이는 방법을 하나 생각해냈다. 상대적으로 부서지기 쉬운 소파의 다리를 총으로 쏴서 쌓인 가구들의 균형을 무너뜨린다면....... 어쩌면 가능성이 있는 방법이었다. 봄이는 권총을 꺼내 소파에서 가장 무게중심이 집중되어 있는 다리를 겨눴다. 조준이 빗나가서 아까운 탄환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지금으로서는 봄이의 조준이 정확하기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봄이는 소파 다리에 한 발을 쏘았다. 엄청난 먼지가 흩날리고 사격음에 머리가 띵했지만, 소파 다리에는 그저 작은 흠집만 냈을 뿐이었다.

 

  총을 한 발만 쏘면 길이 열릴 것이다. 라는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결과에 당황한 봄이는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하지만 총알은 발사되지 않았다. 공이가 텅 비어있는 실린더를 헛치는 쇳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내가 벌써 다섯 발이나 쐈던가?

 

  하지만 지금 당장 꿇어앉아서 느릿느릿 재장전을 할 여유는 없었다. 벌써 까마귀들이 원탁이 있던 방문을 열어젖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다면 벌써 봄이의 바로 등 뒤까지 와 있다는 뜻이었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어떡해야 좋다는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던 봄이는 죽은 까마귀가 꼭 붙들고 있는 K-2 소총이 보였다. 권총용 38구경은 견고한 가구를 부서뜨리는 데에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5.56밀리미터라면? 어쩌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봄이는 이런 지식을 알지 못했다. 다만 전에 한 번 소총에 사용되는 탄환을 직접 본 적은 있었다. 확실히 봄이의 주머니에 만져지는 탄환보다는 길고 컸었다. 자경단 본부에서 봤는지, 아이들이 살던 하수도에서 봤는지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고민할 시간도 없었다. 봄이는 죽은 까마귀의 품에서 K-2 소총을 빼앗았다. 봄이가 생각해낸 방법을 말리기라도 하듯이 죽은 까마귀는 쉽사리 쥐고 있던 소총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소총을 집어들긴 했지만 이걸 어떻게 사용해야 하나? 또 이 쇳덩이는 권총과는 다르게 왜 이렇게 무겁단 말인가?

 

  봄이는 소총을 다룰 줄도 몰랐고 견착도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소총을 몽둥이로 쓰지 않으려면 사용법을 알아내야 했다. 하지만 아무런 지식도 없는 봄이가 어떻게? 무슨 수로?

 

  봄이는 급한 대로 방아쇠를 쥐고 개머리판을 자신의 오른쪽 가슴에 단단히 고정시키고 사격할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쏘는 건가? 이렇게 쏘는 게 맞는 거겠지?

 

  한 발을 쏘자 아까와는 달리 더욱 큰 사격음이 울려퍼졌다. 다만 잘못된 견착으로 인한 후폭풍은 극심했다. 양 손목은 떨어져 나갈 것 같았고, 그대로 반동을 모두 흡수한 가슴이 충격을 받는 바람에 호흡이 끊겨버려 잠시 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런 걸 어떻게 무기로 사용하는 거지?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딱딱한 브래지어를 입는 거였는데.

 

  엄청난 반동의 대가였는지, 38구경으로 쏘았을 때 흠집만 나던 소파 다리는 소총의 운동에너지를 버틸 만큼 견고하지는 않았는지 깊이 패였다. 효과가 있었다. 봄이는 다시 한 번 사격자세를 취하고 한 발을 더 쏘았다. 이번에는 속이 울렁거리기까지 했다.

 

  소총탄 두 발을 맞은 4인용 소파의 다리가 삐걱였지만 무너지지는 않았다. 봄이는 무거운 소총을 내던지고 체중을 실어 가구 더미를 힘껏 밀었다. 그러자 드디어 소파 다리가 완전히 부러지더니 쌓인 가구들은 중심을 잃고 요란하게 쓰러졌다. 다만 그 무너지는 소리가 까마귀들의 주의를 끌었는지, 놈들 중 하나가 봄이를 발견하고 고함을 질렀다.

 

  봄이는 놈들의 사격이 빗발치기 전에 서둘러 쓰러진 가구들을 뛰어넘었다. 비상계단으로 가는 방향에는 철문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열린 자물쇠가 그저 문고리에 걸려 있을 뿐이라서 손쉽게 열 수 있었다. 봄이는 재빨리 자물통을 뽑아 문을 열고 들어간 뒤 안쪽의 문고리에 자물통을 꽂아넣어 잠갔다. 그러자 뒤늦게 달려온 까마귀들이 반대편에서 철문을 두들겨댔다.

 

  “젠장, 문 열어. 이제 저택 전체가 잿더미가 되는 건 시간 문제라고!”

 

  까마귀들이 철문을 두들겨대는 소리는 처음엔 분노에 찬 듯했지만, 점차 애원하기까지 하는 목소리로 바뀌어갔다.

 

  “제발........ 널 해치지 않을게. 문 좀 열어줘.”

 

  봄이는 더 이상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놈들이 문을 두들기는 소리는 갈수록 약해졌다.

 

  봄이는 아직도 욱신거리는 복부와 허벅지를 움켜잡고 다리를 절며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해서 위층으로 올라간다고 해서 과연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 뛰어내릴 수도 없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해졌다. 아니, 애초부터 봄이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만한 사람도 없었지만.

 

  봄이는 두 손으로 힘껏 3층 문을 열어젖혔다. 저택의 마지막 층은 옥상이었다. 아래에서 올려다볼 때는 거대해 보였던 저택도 이곳이 끝인 모양이었다. 세차게 불어오는 새벽 바람이 뺨을 스치자 머리카락이 휘날렸고, 셔츠 깃은 물론 스커트까지 펄럭였다. 이 공허한 새벽 바람소리는 적어도 요란한 총성보다는, 총을 맞고 죽어가는 사람이 고통에 울부짖는 신음 소리보다는 훨씬 듣기 좋았다.

 

  자경단 공격대가 쏘아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조명탄의 빛꼬리를 제외하고는 한 점의 빛도 없는 새벽 하늘이 훤히 보였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옥상에 쳐진 난간마다 모형 횃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크릴제 모형 횃불 안에는 밝은 수은등이 켜져 있었다.

 

  봄이는 끝까지 올라왔다는 것을 알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가다듬었다. 옥상의 면적은 상당히 넓었고, 2층 일부가 내려다보이는 강화유리 바닥도 있었다. 간간히 놓인 환풍기 위에는 화초가 자라고 있는 작은 화분들이 놓여있었다.

 

  이제 더 이상 도망칠 곳도, 돌아갈 곳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봄이는 일단 놈들의 공격을 피해 무사히 도망쳐올 수 있었던 자신의 운에 감사하면서 조용히 옥상을 살폈다. 혹시라도 옥상에서부터 1층까지 안전히 내려갈 수 있는 비상사다리 같은 게 존재하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봄이가 비상사다리를 찾기 위해 일어선 순간,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구나.”

 

  몇 번이고 들은 적 있던 여성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를 듣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졌고, 심장이 뛰었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봄이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거센 주먹이 봄이의 뺨을 후려쳤다.

 

  * * *

 

  뺨을 맞은 충격으로 봄이는 중심을 잃고 멀리 나동그라졌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핥아 보니 피 맛이 났다. 셔츠 소매로 입을 닦으니 질펀한 검붉은 얼룩이 소매에 닦여 나왔다. 봄이는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로 자신의 얼굴을 후려친 여성의 그림자를 올려다보았다.

 

  숲 속에서 한 발의 조명탄이 또 쏘아올려졌다. 조명탄은 하늘 높이 떠올라 여성의 그림자 머리 위에서 눈부시게 빛났다. 그 덕분에 봄이는 여성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바로 여왕이었다.

 

  여왕은 주저앉은 봄이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얼굴을 찡그렸다. 마치 봄이에게서 엄청난 악취가 풍긴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여왕은 그 자리에서 굳어 움직이지 않는 봄이에게 다가와 쭈그려 앉았다.

 

  “네게 있어선 그다지 반갑지 않은 재회겠지. 그렇지 않니?”

 

  이제 봄이의 체력은 거의 한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에게는 그저 주저앉아 가쁜 숨을 진정시키는 것만이 고작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봄이에게 여왕이 덧붙였다.

 

  “솔직히 말해서, 조금 실망했어. 밑에서는 지금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치솟아 올라오고 있고, 그렇다고 나가는 문들은 죄다 까마귀들로 붐비고, 저택 너머 숲은 깡그리 불타고 있어서 여길 벗어날 수도 없지. 그런 상황에서 네가 판단한 최선의 선택은 고작 옥상으로 올라오는 거였니? 조금이라도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서?”

 

  봄이는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이 어떻게든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해 벼랑을 붙들고 올라왔던 모든 처절한 몸부림이 여왕의 손아귀 안에서 놀아난 것에 불과했다고 생각하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가 빠득 갈렸고, 움켜쥔 주먹은 부르르 떨렸다. 그러나 여왕은 봄이의 그 모든 반응을 외면해버렸다.

 

  “네가 한 짓이지? 지하 무기고에서 일어났던 폭발 말이야.”

 

  여왕은 봄이를 딱히 경계하지도 않았다. 허리춤에 찬 권총집이 보이기는 했지만, 지금 당장 그것을 뽑으려는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여왕은 빈손으로 봄이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그 때 당시에 무기고에 있던 자매들에게 추궁했어. 도대체 어떻게 멀쩡한 무기고가 난데없이 폭발할 수 있느냐고 물었지. 그랬더니 뭐랬는 줄 알아? 모른다더군. 솔직히 어이가 없었지. 한번 생각해 봐. 자기들은 두 눈 똑바로 뜨고 무기고를 지키고 있었는데, 갑자기 뜬금없이 불꽃이 튀더니 펑! 하고 터져버렸다는 거잖아. 그 소식을 전해듣고 한참 웃었어. 다들 누구도 ‘어, 저희들이 멍청하게도 무기고에다 불을 지르려는 정신나간 미친 꼬맹이를 막지 못했기 때문에 무기고가 폭발해 버려서 불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고 보고하지 않더군. 다들 지하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했다고만 하고 말이지. 웃긴 녀석들이야.”

 

  여왕은 니트 위에 걸친 방탄조끼에 손을 넣었다. 흠칫한 봄이가 급히 일어서려 했지만 여왕이 꺼낸 건 다름아닌 담배갑이었다.

 

  “혹시 담배 피우니?”

 

  예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여왕의 반응에 봄이는 얼이 빠졌다.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여왕은 담배 하나를 물고 불을 붙였다.

 

  “안 피우더라도 한 번쯤은 피워보는 것도 좋을 텐데. 이게 마지막이니까.”

 

  봄이는 천천히 옆의 옥상 난간을 붙잡고 일어섰다. 만약 여왕과 대치하게 된다면 봄이에게 승산이 없었다. 조금만 쉴 시간을 준다면 좋을 텐데. 그러기 위해서는 당장은 여왕을 자극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이 시간을 끌다가는 분명히 머리에 구멍이 뚫릴 것이다.

 

  여왕은 봄이를 등지고 홱 뒤돌았다. 언제 반격할 지 모르는 적을 눈앞에 둔 사람치고는 너무나도 여유로워서 봄이는 옥상에 다른 까마귀가 있나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봄이와 여왕, 둘뿐이었다.

 

  “네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난 전에 군대에서 생활한 적이 있었어. 여군 부사관으로 복무했었지. 내가 복무하던 사관학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때문에 산에서 산짐승들이 줄곧 내려오고는 했어. 보통은 고라니 같은 동물들이 많았는데 때로는 다람쥐나 토끼처럼 귀여운 동물들이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나운 멧돼지가 내려오는 바람에 부대 단위로 비상이 걸리는 일도 허다했지.”

 

  여왕은 여전히 봄이에게 아무런 눈길도 주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랐다.

 

  “하루는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내가 초소에서 근무를 서고 있었어. 그 때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에서 불빛을 찾아 산에서 내려온 녀석들이 있었지. 들고양이랑 들개 이렇게 두 마리였는데, 둘 다 다리를 심하게 다쳤더라고. 아마 산중에 쳐진 철조망이나 덫에 걸렸던 모양이야. 다행히도 허가가 떨어져서 우리는 그 불쌍한 아이들을 거두어서 기를 수 있게 되었어. 이름도 붙여줬지. 이름이 뭐였더라........ 둘 중 하나가 ‘전진이’ 였을 거야. 그도 그럴 것이 군부대였으니까.”

 

  봄이는 여왕이 더 이상 자신을 경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봄이는 조용히 옆에 굴러다니고 있는 유리병으로 손을 뻗었다.

 

  “우린 그렇게 둘과 만났어. 녀석들은 이제 우리의 새로운 식구가 되었지. 다친 다리도 치료해주고 나니 우릴 아주 잘 따랐어. 다만 그 둘은 사이가 조금 안 좋았던 것 같았지만. 지금껏 인간과는 연이 없다가 인간에게 구해지게 된 두 산짐승은 점차 서로 질투하기 시작했지. 우리들의 관심을 독차지하기 위해 서로 싸우기도 했어. 그럴 때마다 우린 둘을 갈라놓으며 이렇게 말했지. ‘얘들아, 너희들은 친구잖아. 비록 종은 다르지만 지금은 하나의 공동체에 속한 가족과도 같아. 가족끼리 서로 싸우면 안 되지.’”

 

  봄이는 몇 걸음을 기어가 유리병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우리는 녀석들이 서로 싸울 때마다 일러주었지만, 녀석들의 질투는 날이 갈수록 심해졌어. 그러다가 결국 일이 터져버렸지. 우리가 근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우리가 만들어 준 집에서 목이 완전히 꺾여버린 녀석 하나가 피떡이 된 채로 죽어 있었어. 나머지 한 놈은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낑낑대고 있었지. 우리가 없는 사이에 한 녀석이 나머지 하나의 목을 물어뜯어 죽이고 만 거야.”

 

  봄이는 한 손에 유리병을 거꾸로 쥐고 여왕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우리가 거둔 녀석들에게 평등했어. 두 녀석 모두 가족처럼 대했지. 우리는 모두 가족이었어. 그 녀석이 우릴 배신하고 다른 녀석을 죽이기 전까지는. 그래서 우린........”

 

  여왕의 말이 끊어졌다. 봄이가 여왕의 머리에 유리병을 힘껏 내려쳤기 때문이었다.

 

  유리병이 산산조각나 깨졌다. 여왕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봄이가 쥔 깨진 유리병 파편이 부들거렸다.

 

  여왕은 태연하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머지 한 녀석도 죽여버렸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왕은 팔을 뻗어 봄이의 목을 거세게 움켜잡았다. 여성이라고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을 정도의 악력이었다. 봄이는 쥐고 있던 깨진 유리병도 떨어뜨리고 여왕의 팔을 붙잡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봄이는 너무나도 거뜬하게 하늘로 들어올려졌다. 봄이가 별다른 저항도 못하는 사이에 여왕은 물고 있던 담배꽁초를 봄이의 쇄골에 꽂아넣듯 지졌다.

 

  봄이는 몇 미터를 날아가 벽에 내동댕이쳐졌다. 살갗이 말 그대로 타는 듯한 고통에 눈물마저 흘러나왔다. 봄이가 신음을 흘리며 쇄골을 움켜잡고 뒹구는 사이에 여왕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들고 다가왔다.

 

  “바로 이렇게 되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였지. 무엇보다 가족을 배신한 녀석이 너무나도 괘씸했었던 것 같아. 한 번 배신한 동물은 그것만으로 끝나지 않아. 처음에는 자신을 죽음의 벼랑에서 구해 준 인간들을 잘 따르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그 죽음의 벼랑에서 느꼈던 공포가 바래지고 삶의 질이 나아지게 되면 대부분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만을 품지. 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야. 전에 죽음의 벼랑에서부터 구해진 적이 있다는 은혜를 잊고 점차 커져가는 불만을 감당하지 못하고 가족을 배신하는 녀석들도 있는 반면에, 그렇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받아들여 준 공동체에 평생 충성을 맹세하는 녀석들도 있어. 혹시 누구 생각나는 사람 없니?”

 

  숨이 쉬어지지 않는 목과 타들어가는 쇄골 때문에 정신을 차릴 틈조차 없었던 봄이는 여왕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생각나는 사람? 누구..........

 

  여왕은 봄이에게 권총을 겨눴다.

 

  “이야기는 여기까지란다. 우리에겐 너 같은 들고양이는 필요 없어.”

 

  그 순간 여왕의 이마에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여왕은 아주 잠시동안 비틀거렸다. 아까 전의 충격의 여파인 듯했다. 여왕은 재빨리 정신을 차리고 권총을 고쳐잡았지만 봄이에게는 반격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이었다.

 

  봄이는 빛보다 빠르게 달려들어 여왕의 권총을 쳐냈다. 여왕은 권총을 손에서 놓치지는 않았지만 엉뚱한 곳에 발사했다. 여왕이 다시 조준하려 했으나 봄이가 권총을 꽉 움켜쥐는 바람에 하늘로만 두 발이 더 날아갔다.

 

  봄이와 여왕은 서로를 부둥켜안다시피 붙잡은 채 권총을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를 벌였다. 여왕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총구는 점점 봄이의 얼굴로 향해졌다. 이윽고 한 발이 더 발사됐다. 봄이가 재빨리 얼굴을 비튼 덕분에 총탄은 관자놀이를 살짝 스치는 데에 그쳤다. 관자놀이에서 뜨거운 피가 흘러내렸다. 조금만 더 왼쪽이었다면 곧바로 오른쪽 눈이 꿰뚫렸을 것이다.

 

  힘겨루기 끝에 여왕이 봄이를 밀쳐냈다. 여왕은 번개처럼 권총을 봄이의 미간에 겨눴지만 봄이는 이미 떨어져 있던 깨진 유리병을 집어든 후였다. 봄이가 휘두른 깨진 유리병이 여왕의 권총을 쥔 손목을 강타했다. 그 덕분에 여왕은 권총을 놓쳤지만, 엇나간 조준은 봄이의 왼쪽 귓불을 반으로 갈랐다.

 

  귀에서 피가 쏟아졌지만 봄이는 그 고통마저 잊고 다시 깨진 유리병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다음 공격은 여왕의 팔에 가로막혔다. 공격을 막아낸 여왕이 반격으로 봄이의 눈을 찌르려고 했다. 봄이는 여왕이 뻗은 손을 가까스로 피하고, 아직 거두지 못한 여왕의 손가락을 날카로운 이빨로 힘껏 깨물었다.

 

  여왕은 손가락을 빼내기 위해 몸부림쳤다. 봄이는 그럴수록 더 절대로 놓아주지 않을 것처럼 이를 악물었다.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가 팔꿈치에서까지 뚝뚝 흘러내렸다. 참다 못한 여왕이 다른 손 주먹으로 봄이의 턱을 후려쳤다. 그제서야 봄이는 여왕의 손가락을 놓아주었다.

 

  여왕은 반쯤 주저앉아 피가 줄줄 흐르는 손가락을 억눌렀다. 손가락이 잘려나가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지금 봄이가 여왕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타격일 것이었다.

 

  여왕은 고통에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소리내어 웃었다.

 

  “그렇지, 아주 훌륭해. 이 정도는 되어야 까마귀 전사라고 할 만하지.”

 

  여왕은 도무지 눈물을 흘리는 것인지, 정말로 즐거워서 웃는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고는 옥상 난간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녹슬어 있는 난간에서 쇠 파이프 하나를 뜯어내더니 땅에 질질 끌었다.

 

  “너......... 이 썩을 꼬맹이.......... 절대로 이 저택에서 살아서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려무나.”

 

  여왕이 쇠 파이프를 치켜들고 봄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봄이도 마찬가지로 여왕에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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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104화(그 후의 이야기) 2019 / 11 / 10 244 0 10184   
104 103화(마지막화) 2019 / 11 / 8 251 0 7150   
103 102화 2019 / 11 / 8 236 0 9365   
102 101화 2019 / 11 / 8 255 0 12720   
101 100화 2019 / 11 / 8 270 0 6491   
100 99화 2019 / 11 / 8 274 0 12040   
99 98화 2019 / 11 / 8 250 0 10197   
98 14.꿈에서 깨어나기 위해 2019 / 11 / 8 246 0 8345   
97 96화 2019 / 11 / 8 243 0 5686   
96 95화 2019 / 11 / 8 280 0 9160   
95 94화 2019 / 11 / 8 235 0 10760   
94 93화 2019 / 11 / 8 265 0 6631   
93 92화 2019 / 11 / 8 226 0 10034   
92 91화 2019 / 11 / 8 246 0 13252   
91 90화 2019 / 11 / 8 236 0 5434   
90 13.최후의 결전 2019 / 11 / 8 237 0 14296   
89 89화 2019 / 11 / 8 242 0 6525   
88 88화 2019 / 11 / 7 249 0 13724   
87 87화 2019 / 11 / 7 256 0 6876   
86 86화 2019 / 11 / 7 241 0 6670   
85 85화 2019 / 11 / 7 240 0 9450   
84 84화 2019 / 11 / 4 240 0 7691   
83 12.까마귀 2019 / 11 / 4 215 0 8834   
82 82화 2019 / 11 / 4 250 0 5374   
81 81화 2019 / 11 / 4 251 0 8794   
80 80화 2019 / 11 / 4 269 0 8167   
79 79화 2019 / 11 / 4 225 0 5245   
78 78화 2019 / 11 / 4 251 0 7057   
77 77화 2019 / 11 / 4 238 0 5426   
76 76화 2019 / 11 / 4 238 0 10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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