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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85화
작성일 : 19-11-07 20:41     조회 : 239     추천 : 0     분량 : 9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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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적어도 까마귀의 일원이라면, ‘잘 모르겠다’ 라는 소리나 ‘할 수 없다’ 같은 소리는 하지 말도록 해. 까마귀는 그런 어물쩡한 녀석이 있을 만한 곳이 아니니까.”

 

  베티는 단호한 인상을 주고 싶었는지 콧대를 높이며 말하고는 가버렸다. 봄이도 옷을 마저 챙겨입은 다음 베티를 따라갔다.

 

  지하실에 몇 미터 간격마다 걸린 백색등은 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다. 통로는 습기가 차고 이끼도 끼었지만 나름 청소를 하는 모양이었다. 통로 끝자락에는 달각거리는 물통과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닦고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 그 사람도 얼굴에 검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어서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베티가 그에게 인사를 건네자 그도 물통을 내려놓고 손을 들어보였다. 봄이는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지나쳤다.

 

  “이제 조금 더 가면 주방이 나와. 우리 자매들에게 필요한 식사는 전부 그곳에서 마련하지.”

 

  봄이는 그 말을 듣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깜빡거리는 백색등과 어둠, 구석구석에 친 거미줄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아무리 봐도 식재료를 다루기에 좋을 만한 장소는 아닌 것 같았다. 봄이가 물었다.

 

  “이런 곳에 주방이 있다고?”

 

  “네가 주방을 보게 되면 실망할지도 몰라. 하지만 견뎌내야 해. 아무리 실망스럽다고 해도 이번에는 소중한 식량을 우리에게 항상 탈없이 나눠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요리사 자매에게 감사를 표하는 걸 잊지 말도록 해.”

 

  베티는 묘하게 ‘이번에는’ 이라는 말을 강조했다. 봄이는 베티가 자꾸 자기만 이해할 수 있는 설교를 늘어놓는 게 싫어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조금 더 걸어가자 통로 곳곳마다 걸린 백색등과는 상반되게 유달리 붉은 적색등이 희미하게 빛나는 철문이 나타났다. 베티는 이곳이 주방으로 향하는 문이라고 소개했다. 문을 열려는 순간 안에서부터 문이 열리는 바람에 당황한 베티는 뒤로 물러났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꽤나 상당한 거구였다. 키는 여왕보다도 더 큰 듯했고, 덩치는 봄이의 두세 배는 되었다. 얼굴에는 필터가 없는 방독면을 쓰고 있었고, 두르고 있던 앞치마와 외투에는 피가 잔뜩 튀어서인지 검붉은 얼룩이 흥건했다. 손에는 긴 전기톱을 들고 있었다. 봄이는 이 사람을 보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지만 베티는 태연하게 거구에게 인사했다.

 

  “아이 참. 다희 언니, 깜짝 놀랐잖아요.”

 

  다희라고 불린 거구는 몸을 돌려 봄이를 쳐다보았다. 마치 아무런 감정 없이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는 살인 기계와 마주친 기분이었다. 거구의 검은 방독면 렌즈 초점과 눈이 마주치자 봄이는 약간이었지만 공포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거구는 베티에게로 홱 눈길을 돌렸다.

 

  “이 녀석은 누구야?”

 

  기계적인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방독면 속에서 새어나왔다. 베티가 대답했다.

 

  “제 후배예요. 오늘 막 새로 까마귀가 된 참이죠.”

 

  봄이는 왠지 모르게 이 거구에게서 경계를 풀 수 없었다. 거구는 잔뜩 긴장해 있는 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했다.

 

  “이런 잔챙이를 자꾸 들여보내서 어쩌겠다는 건지. 정말로 믿음직하고 쓸모있는 녀석들만 찾아서 모아도 부족할 텐데 말이야.”

 

  거구의 말에 베티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마치 자신은 거구가 말한 ‘잔챙이’ 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은 듯이.

 

  “그래서 말인데, 새로 들어온 후배한테 여기 주방을 보여주고 싶어서 데려왔어요. 잠깐 안 될까요?”

 

  “안 돼. 주방 일은 끝났어. 다음 식사시간까지 주방은 출입금지야.”

 

  거구는 차갑게 답하고는 주방 문을 닫아버렸다. 할 말이 없어진 베티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어쩔 수 없죠. 돌아갈게요. 그런데 그건 왜 들고 나오셨어요?”

 

  기가 죽은 베티는 조심스럽게 거구가 든 전기톱을 가리켰다. 본체는 녹이 슬고 칠이 벗겨져 있었고, 톱날 부분에는 검붉은 피와 이물질이 흥건했다. 거구가 대답했다.

 

  “요즘은 고기가 질겨. 예전에는 안 그랬는데 지금은 손질하려면 썰기도 힘들고 손도 많이 가지. 톱을 너무 오랫동안 사용해서 그런지 잘 안 듣더라고. 다른 톱으로 교체할까 생각 중이야. 나중에 여왕을 만나면 지하로 보내는 고기 질 좀 개선해달라고 대신 좀 말해줘. 온통 근육질 투성이니 원.......”

 

  거구가 투덜대는 동안 베티는 이 거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늑대 앞에서 꼬리를 내린 들개 같았다. 봄이는 자신을 대할 때와는 너무나도 다른 베티의 태도가 어딘가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거구는 들고 있던 전기톱을 이곳저곳 살펴보더니 베티에게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방금 전에 까마귀 전체 소집명령이 떨어졌었는데.”

 

  베티는 그 말을 듣고 놀란 눈으로 되물었다.

 

  “전체 소집이라구요? 언제 그런 지시가 있었죠?”

 

  거구가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말해주었다.

 

  “못 들었어? 방금 전에 스피커로 여왕이 직접 전체소집을 지시했어. 전사 소집도 아니고 까마귀 전체 소집이라니, 그 쪽도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야. 방금 내려온 지시도 못 듣다니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녀?”

 

  거구가 언성을 높이자 베티의 어깨는 더욱 더 작아졌다.

 

  “죄송해요....... 잠깐 샤워실에 있었는데 못 들었나 봐요. 지금 바로 소집에 응하겠습니다.”

 

  “하여간에 덜떨어진 녀석 같으니.”

 

  베티는 곧바로 봄이의 팔을 붙잡고 어디론가로 데려갔다. 베티는 얼굴을 봄이에게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지만 봄이는 지금 베티의 심정을 알 것만 같았다. 하지만 어째서 베티가 거구에게 쩔쩔매기만 하는 것인지는 묻지 않았다.

 

  “다희 언니야. 내가 아까 말한 요리사 자매지. 겉은 저렇게 차가워 보여도 속으로는 분명 날 생각해서 엄격하게 대한 걸 거야. 까마귀는 다 같은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

 

  “싫지 않아? 저렇게 대놓고 널 못마땅해하는데......”

 

  베티의 말에 답답해진 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한소리 했다. 봄이는 분명히 베티가 흥분해서 자신의 말에 맞받아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베티는 예상외로 차분했다.

 

  “아니, 싫지 않아. 내가 왜 싫겠어? 까마귀는 모두 가족이고, 진정한 가족이라면 서로의 나쁜 점을 지적해줄 수도 있는 거야. 그러니까 난 다희 언니가 좋아. 내 유일한 가족들마저 싫어해버리면, 이 세상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질 테니까.”

 

  봄이는 베티가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아챘다. 그래서 더 이상 베티에게 그런 말은 꺼내지 않기로 했다. 아까부터 베티에겐 말로 표현하기 힘든 어떤 동질감이 느껴져왔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그런 동질감이 느껴졌다.

 

 * * *

 

  베티는 봄이를 데리고 지하실 계단을 올랐다. 홀에는 여러 사람들이 서둘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무장을 한 사람도 있었고, 수북이 쌓인 물품을 어딘가로 실어나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군중들이 모이는 곳은 거의 정해져 있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봄이가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드는 사람들을 보고 물었다.

 

  “여왕님이 까마귀 전체 소집을 지시한 모양이야. 너 때문에 샤워실에 있느라고 못 들을 뻔했어. 이제 곧 여왕님이 오셔서 소집 이유를 설명할 거야.”

 

  베티는 봄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여왕이 어디서 모습을 드러낼지에만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봄이는 베티와 함께 군중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군중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여왕이 지금처럼 까마귀 전체 소집을 지시하는 것은 흔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군중들의 소란은 여왕이 홀 위층에 있던 제단에 나타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여왕은 아래층에 있는 군중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 중에는 봄이와 베티도 끼어있었다. 이윽고 여왕이 입을 열었다.

 

  “사랑하는 자매 여러분, 이렇게 소집에 응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자매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예전 세계를 병들게 만든 악인들을 벌하고, 상처뿐인 흔적만 남은 예전 세계에 남은 잔재들을 모두 불태우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날, 우리는 한 점의 부끄럼도 없이 의연하고 떳떳하게 새로운 세계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봄이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베티는 넋을 놓고 존경심 가득한 눈으로 여왕의 연설에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군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는 날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는 것처럼, 동전의 앞면이 존재하면 뒷면도 존재하는 것처럼 숭고한 새로운 세계를 반대하는 악인들은 언제나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악인들은 사람들이 다투지 않고 모두가 평등하게 살아갈 수 있는 신세계를 반대하고, 계속해서 예전 세계에 집착하면서 영광스러운 시대의 변화에 동참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 얼마나 구시대적인 사상이란 말입니까?”

 

  여왕은 헛기침을 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많은 군중들이 보장하는 침묵 아래서 다시 말했다.

 

  “이미 예전 세계는 무너져 내렸습니다. 예전 세계는 잘못된 세계의, 즉 우리들이 후대에 절대로 물려주어서는 안 될 세계의 아주 좋은 본보기입니다. 높은 자리에 올라 권력을 남용하여 자기들의 밥그릇 챙기기에만 급급했던 썩은 정치인들, 멋대로 전쟁을 일으켜 평화를 배척하고 세계 멸망에 기여한 범죄자들, 이런 세계가 점차 몰락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오직 상상 속 권좌에 앉은 신들만을 믿고 세계가 무너지는 것을 방관한 자들. 이들 모두 절대적인 악인에 해당합니다. 물론 이들이 예전 세계에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것은 맞지만, 이는 또한 다른 뜻 있는 자들이 자기들만의 신념과 의지로 더러워진 예전 세계와는 다른 새로운 세계를 세울 수 있도록 부추기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이 또한 당연히 존재하는 자연의 섭리이지요.”

 

  군중들이 소란스러워지자 여왕은 조용히 손을 들어올렸다. 그러자 다시 모두가 조용해졌다.

 

  “이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와 예전 세계에 남은 흔적은 완전히 부정될 것입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새로운 세계를 세웠을 때, 절대로 예전 세계에서 불타지 않고 남은 흔적이 숭고한 신세계에 이어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것이고, 얼마 못 가 예전 세계가 멸망하게 된 것처럼 새로운 세계도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왕이 잠깐 말을 끊자 군중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베티도 그들과 완전히 감화된 것처럼 두 주먹을 치켜들고 힘껏 소리쳤다. 봄이는 이 모든 광경을 얼떨떨하게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제 소집의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정보원이 공원 부근의 열차 무덤 너머에서 대규모 무장집단을 발견했다고 전해왔습니다. 정보원은 수칙대로 외부 생존자 집단과 접촉하여 우리의 숭고한 뜻을 전하고 동참 의지를 물었으나 결렬되었습니다. 불행하게도 새로운 세계 개척에 반대하는, 악의 무리가 또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지요.”

 

  봄이는 여왕이 말한 장소를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원...... 열차 무덤........ 상당히 낯익은 장소처럼 들렸는데.......

 

  “그들 악의 무리는 스스로 이 무너진 세상의 치안을 유지하는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미 무너진 예전 세계를 보존하려는 것, 이 말인즉 그들이 신세계의 개척에 반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신세계의 개척에 반대한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 될 우리 까마귀의 위대하고 숭고한 뜻에 맞서겠다는 행위이지요.”

 

  여왕이 끝내 결론을 이야기했다.

 

  “따라서 우리 까마귀는, 이 시간부로 자신들을 ‘자경단’ 이라고 칭하는 공원 부근의 대규모 불법 무력집단을 숭고한 신세계 개척의 뜻에 반대하는 명백한 ‘악인’ 으로 규정하고 전쟁을 선포할 것입니다.”

 

 여왕이 말을 마치자마자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터져나왔다. 봄이는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군중들과 함께 계속해서 환호하는 베티를 붙잡고 말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저 여자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전쟁이라니......”

 

  하지만 베티는 봄이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두 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고만 있었다. 마치 넋이 빠진 사람 같았다. 홀에 모인 모든 군중이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대며 자신들만의 신념과 믿음에 젖어있는 동안에도 봄이는 혼자 이들과 감화되지 못했다.

 

  다급해진 봄이는 주변에 있는 다른 군중들의 소매를 붙잡고 외쳤다. 하지만 봄이의 하소연에 귀기울여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질려버린 봄이는 몰려든 개미처럼 수많은 군중들을 밀치고 홀을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저택 출입문에서 얼굴을 가린 채 소총을 든 극단주의자들이 봄이를 막아세웠다.

 

  “최고 집행자의 연설 도중 무단으로 자리를 이탈하는 건 금지되어 있다.”

 

  봄이는 당장이라도 놈들이 뒤집어쓴 방독면을 찢어발기고 싶은 욕구를 간신히 억눌렀다.

 

  “여기서 내보내 줘요. 난 당신들과 당신들의 사상에 동조할 생각도 없고, 전쟁이라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도 몰라요. 당신들이 만들어낼 새로운 세계인지 뭔지에 관심도 없고, 나에겐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저리 비켜요!”

 

  봄이는 소총을 어깨에 맨 채 부동자세로 서 있는 극단주의자를 밀쳤다. 놈은 봄이의 완강한 저항에 주춤하나 싶더니 봄이의 배를 발길질로 걷어찼다. 봄이가 그대로 배를 움켜잡고 구르는 동안 놈은 어깨에 맨 소총을 풀어 봄이에게 겨눴다.

 

  그 순간 누군가가 봄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잘 정돈된 긴 생머리에, 평범한 여성보다 돋보이는 커다란 키. 여왕이었다.

 

  “사랑하는 자매여, 아직 우리들의 위대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 전사를 용서하세요. 우리는 새로운 세계의 주인이자 절대자의 유일한 대리인입니다. 인류가 어떻게 해서 6천 년에 달하는 긴 세월동안 세계의 주인이 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까마귀가 이끌어나가야 할 새로운 세계에 서로간의 이해와 존중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매여, 당신은 지금 매우 크나큰 결례를 범하고 있습니다.”

 

  여왕의 말투는 타이르는 듯하면서도 위압감이 넘쳤다. 마치 여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반드시 그렇게 따라야만 한다는 최면을 내뿜고 있는 듯했다.

 

  “생각이 짧았습니다. 여왕님.”

 

  소총을 든 극단주의자가 냉큼 총구를 거두고 제자리로 돌아가자 여왕이 봄이에게 말했다.

 

  “얘야, 잠깐 이야기 좀 하자꾸나.”

 

 * * *

 

  여왕은 아까 전에 봄이가 처음으로 눈을 떴던 어둑어둑한 침실로 봄이를 데리고 갔다. 여전히 양초 접시에는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고, 벽에 그려진 검은 새 문양이 촛불을 받아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여왕은 봄이를 침대에 앉혀 놓고 따뜻한 물을 주었다. 봄이는 이것도 아까 마신 쇠를 핥는 맛이 나는 차일 거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맹물이었다.

 

  “얘야, 우리가 아까 서로 나눴던 이야기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넌 까마귀가 되었고, 까마귀인 이상 절대로 자기 본분을 망각하지 말아야만 해. 어련히 그래야만 하지만 넌 아직 우리와 함께 할 준비가 되지 않은 것 같구나.”

 

  여왕이 차분하게 말했지만 봄이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애초에 내가 까마귀에 들어오게 된 게 정당하게 협의된 일인가요? 협박에 의해 일방적으로 통보한 거지. 그래요, 죽어가던 날 살려주신 건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요.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걸 담보로 내가 원하지도 않는 일에 휘말리게 되는 건 사양하고 싶어요. 더구나 전쟁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여왕은 다른 잔에 뜨거운 물을 따라 한 모금 마시고는 대답했다.

 

  “아까도 말했잖아. 우린 지금 전쟁 중이라고.”

 

  그 때 까마귀 문양 옆에 걸린 괘종시계가 몇 번 울렸다. 맑고도 청아한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작동하는 시계를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더라?

 

  “너도 방금 들었겠지만, 까마귀는 지금 이 시간부로 공원 너머 열차 무덤 부근을 불법적으로 점거한 악의 무리들에게 전쟁을 선포할 거야. 열차 무덤이 어딘지 알고 있니?”

 

  “몰라요.”

 

  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했다.

 

  “그러면 그 쪽 부근을 점거한 악인 무리들에 대해서도 모르겠구나. 지금부터 설명해줄 테니 잘 들어. 놈들은.......”

 

  “자기들을 ‘자경단’ 이라고 칭하던가요?”

 

  여왕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또, 자신들의 소속을 나타내는 휘장으로 흰 천을 사용하던가요?”

 

  “맞아. 어떻게 알지?”

 

  “그러니까....... 들어서 알고 있었어요.”

 

  봄이는 그 ‘자경단’ 총수가 자신의 삼촌이라고 말할 뻔했다가 아차했다. 이 극단주의자들에게 그런 사실을 말했다간 악인과 내통한 반역자라며 당장 붙잡혀 총에 맞아도 이상할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군. 그쪽에선 꽤 유명한가 보지?”

 

  여왕이 별로 의심하는 것 같지 않자 봄이는 약간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어째서 그들을 배척하는 거죠? 아까는 사람이 살아가려면 이해와 존중이 필요하다면서요? 그렇다면 어째서 그들의 사상을 존중하지 않는 거죠?”

 

  여왕은 자기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못하는 봄이가 안쓰럽다는 듯 말했다.

 

  “생각해 보렴, 얘야. 넌 지나버린 예전 세계가 살아남은 우리들에게 무엇을 남겼다고 생각해? 더 이상 우리들이 살던 예전 세계의 역할은 끝났어. 지금 이 시기는 추락하고 타락해서 무너져버리고 만 예전 세계의 종착점을 잇는, 즉 말하자면 새로운 세계가 막 시작되려 하는 시발점이라는 거야. 아까도 말했지만...... 이건 최초의 인간이 태어난 이후부터 늘 있어왔던 세대 교차의 순간이야. 기원전 1세기부터 22세기를 지나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자연의 섭리지. 하지만 인류는 지금껏 실패만을 반복해왔어. 아무리 구시대가 종말을 맞고 새로운 세계가 시작되어도 늘 실패했지. 기회가 수백, 아니 수천만 번 이상이 있었는데도 말이야. 지금까지 이어져 온 그 실패가 낳은 마지막 결과가 바로 우리가 지나 온 예전 세계지. 그래서, 결국 실패한 예전 세계는 지금 네가 보기에 어때? 모두가 전쟁 없이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니, 아니면 추하게 굴러떨어지고 만 볼품없는 황무지가 되었니?”

 

  지금껏 접시 안에서 녹아내리던 마지막 양초가 꺼졌다. 여왕은 품에서 새로운 양초를 꺼내 불을 붙여 접시 위에 놓았다.

 

  “이런 시점에서 이미 다 끝나버린 예전 세계를 되살리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지극히 자명한 사실이지. 다시 말해 놈들은 신시대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꾸만 녹슨 구시대에 매달리는 미개인들이야. 이래도 모르겠어?”

 

  “그렇다고 전쟁을 일으켜요? 난 사실 전쟁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분명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거예요. 당신의 그 말 한 마디에 수백 명이 아무런 의미없이 개죽음당할 거라구요. 정말로 이게 좋은 방법인가요? 난 동의 못하겠어요.”

 

  봄이는 마지막으로 여왕이 정신 차리도록 설득해보았다.

 

  “지금 인류가 존재하는 이상 전쟁은 불가피해. 그렇지만...... 이제 우리가 그런 세계를 만들 거야. 전쟁도 없고 대립도 없는,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계를 말이지.”

 

  “그 말은 당신들의 뜻에 반대하는 자들을 모두 없애버리겠다는 뜻인가요? 그게 진정한 평화이고, 새로운 세계인가요?”

 

  “보면 알게 될 거야.”

 

  어느 새 홀에 빽빽이 모여 있던 군중들은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전까지 귓전을 맴돌던 군중들의 넋 나간 듯한 환호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가운 정적만이 넓은 저택에 홀연히 흐르고 있었다. 베티도 없었다.

 

  “세 시간 후에 바로 공원을 넘어 자경단 초소를 공격한다. 원래 지금까지는 너나 베티 같은 어린 전사들은 직접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았지만, 최근 몇 번의 전쟁에서 너무 많은 전사들을 잃었어.”

 

  여왕이 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준비하고 있어. 너도 차출 대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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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88화 2019 / 11 / 7 248 0 13724   
87 87화 2019 / 11 / 7 256 0 6876   
86 86화 2019 / 11 / 7 241 0 6670   
85 85화 2019 / 11 / 7 240 0 9450   
84 84화 2019 / 11 / 4 240 0 7691   
83 12.까마귀 2019 / 11 / 4 215 0 8834   
82 82화 2019 / 11 / 4 250 0 5374   
81 81화 2019 / 11 / 4 250 0 8794   
80 80화 2019 / 11 / 4 269 0 8167   
79 79화 2019 / 11 / 4 225 0 5245   
78 78화 2019 / 11 / 4 251 0 7057   
77 77화 2019 / 11 / 4 238 0 5426   
76 76화 2019 / 11 / 4 238 0 10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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