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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12.까마귀
작성일 : 19-11-04 22:54     조회 : 214     추천 : 0     분량 : 8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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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까마귀

 

 

  “세상이 끝나는 날에는...... 지금까지의 모든 역사와...... 살아남은 자들이......”

 

  “틀렸어. 그게 아니지. 여기 한 구절 빼먹었잖아. 다시 해 봐.”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에 봄이는 눈을 떴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온 몸 구석구석이 가시바늘에라도 찔린 듯 따끔거리고 쑤셨다.

 

  정신은 차렸지만 머리를 들기는 힘들었다. 실내에는 머리맡에 놓인 양초 접시를 포함해서 빛이 몇 군데 있었지만 그럼에도 어두컴컴했다. 봄이의 바로 맞은편에서 대화하는 사람 두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여왕님, 저는 언제쯤 다른 자매들처럼 바깥에 나가서 나쁜 악인들과 싸울 수 있을까요?”

 

  지금껏 접이식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한 소녀가 들뜬 듯이 말했다. 그러자 소녀의 옆에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아가야, 네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단다. 하지만 지금의 넌 너무 어려. 아직 전사로서 충분히 성장하지 않은 네가 다른 자매들과 함께 나서는 건 아주 위험하단다. 앞으로 몇 달 동안은 다른 자매들이 악인들을 벌하는 걸 지켜보기만 할 거야. 네 손으로 직접 악인들을 처단하는 건 네가 조금 더 성장하고 난 이후란다.”

 

  “괜찮아요. 전 약하지 않은걸요. 얼마 전에는 다희 언니한테서 총 다루는 법도 배웠다고요. 여길 이렇게 잡아당겨서...... 명칭도 배웠었는데........”

 

  “그렇다면 총은 누구한테만 겨누어야 하지? 죽여도 되는 건 어떤 사람들일까?”

 

  “그야 물론 나쁜 사람들이죠. 죽여도 되는 건 나쁜 악인들 뿐이에요.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다고요.”

 

  “장하구나. 우리 아가.”

 

  봄이는 이들의 대화 내용을 전부 다 들었음에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봄이가 정신을 되찾았음을 눈치챈 여왕이 말했다.

 

  “자, 아가야. 이제 곧 점심시간이구나. 지하에 내려가서 다른 자매들과 식사 준비하는 걸 좀 도와주겠니?”

 

  “네, 여왕님.”

 

  소녀가 힘차게 대답하고는 읽던 책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여왕은 접이식 테이블에 놓여있던 양초 접시를 들고 봄이에게로 다가왔다. 여왕이 다가오자 봄이는 왠지 모르게 오한이 저리고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몸은 좀 어때?”

 

  여왕이 아주 가깝게 다가왔지만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깨진 검은 방독면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봄이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얼굴이었다.

 

  “여기는 어디죠? 날 어디로 데려온 건가요?”

 

  “걱정 마. 이곳은 안전해. 나쁜 악인들에게 둘러싸여 거의 정신을 잃고 죽어가던 널 가까스로 구해냈어. 너, 정말로 운이 좋았어.”

 

  봄이는 여왕이란 자가 아까 전의 소녀를 대하듯 자신에게도 눈높이를 맞춰주려고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그렇고 창고에 갇혀있을 때까지만 해도 소년에게 ‘운이 없다’는 말을 들었는데 바로 직후에 ‘운이 좋다’는 말을 듣자 기분이 이상했다. 운이 나쁘다가 좋아질 수도 있나?

 

  “아이들을 어떻게 했죠? 그 창고는 어떻게 되었죠?”

 

  “무슨 아이들?”

 

  “당신들이 불태워버린 창고에 어린아이들이 갇혀 있었어요. 갇혀 있던 아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정말 모르는 건가요?”

 

  여왕은 잠시 주먹을 턱에 얹고 생각에 잠기더니 한층 강조했다.

 

  “이봐, 너. 넌 지금 다른 사람 걱정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어쩌다가 그렇게 심한 부상을 당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넌 정말로 죽었다 살아난 거야. 솔직히 말하면 난 네가 뇌사상태에 빠져서 다시는 눈을 못 뜰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오늘 오후까지 네가 의식이 없으면 뇌사한 걸로 판정하고 널 땅에 묻으려고 했어. 그러지 않았던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지.”

 

  창고 일 때문에 순간적으로 혼란스러웠던 봄이는 곧 자신의 성급함을 인정하고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했다. 하기야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는 창고 아이들이 어떻게 되던지간에 무슨 상관인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심장이 답답할 정도로 안절부절못했고, 손가락이 떨렸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덧붙이자면, 거기서 살아나간 사람은 없었어. 널 제외하고는 말이지.”

 

  그랬구나. 조금은 예상대로였지만 결국 빠져나오지 못했구나. 창고에 갇혀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결국에는....... 아무도.........

 

  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시울을 붉혔다. 그러나 곧 자신이 슬퍼해야 할 일이 아님을 깨닫고 죄책감을 떨쳐버리려고 했다. 지금까지 얼굴도 몰랐다가 오늘 처음 만난, 그런 자신과 아무런 관계도 아닌 아이들이 죽은 게 봄이와 무슨 상관인가?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그런데도 어째서 이렇게 안타깝고 후회스러운 것인가?

 

  혹시 봄이가 조금만 더 빨리 창고 문을 열었다면? 봄이를 우연히 구한 이들이 조금만 더 일찍 도착했더라면 아이들은 괴로움 속에서 불타 죽지 않아도 되었을까? 아니, 그 전에 아예 봄이가 창고 열쇠를 내팽개치고 혼자 도망쳤더라면 이런 죄책감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

 

  봄이는 눈물을 닦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전 여기 있을 시간이 없어요.”

 

  그 순간 복부에 전해지는 엄청난 통증에 봄이는 일어서지 못하고 신음을 토했다. 지켜보던 여왕이 말했다.

 

  “말했잖아. 넌 지금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고.”

 

  봄이는 정신을 잃기 전 겪었던 격통의 순간을 기억해냈다. 봄이의 완강한 저항에 결국 참지 못한 놈들이 봄이의 배를 힘껏 칼로 찔렀었고, 봄이는 그것을 피하지 못했다.

 

  몰려오는 엄청난 고통에 봄이는 배를 싸쥐고 뒹굴었다. 지금에서야 눈치챈 것이었지만 봄이는 검은 스판덱스 반팔 티셔츠 차림이었다. 속옷 바로 위에 입은 것이었다. 티셔츠를 걷어보니 복부에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칭칭 감긴 마른 붕대에 검붉은 핏자국이 눌어붙은 광경은 보기 꺼림칙할 정도였다. 다행히도 응급조치 덕분에 출혈은 멈춘 모양이었다.

 

  “칼에 찔렸던 모양이던데, 다행히도 장기는 피했어. 찔린 자국을 보니까 상처가 크지 않은 게 작은 주머니칼 같은 거로 찔렸던 모양이야. 그래서 널 살릴 수 있었던 거야. 독한 항생제도 조금 놓았어. 상처에 균이 들어가서 곪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만 더 큰 칼에 찔렸거나 조금만 더 깊게 찔렸어도 넌 그 자리에서 죽었을 거야.”

 

  복부 쪽에 감각이 없던 게 독한 항생제를 놓아서 그랬구나. 예전에 상훈이 통제소에서 치료를 받았을 때 독한 항생제 때문에 다리를 움직이기 힘들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충분히 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간에……. 구해주신 건 고마워요. 어떻게 답례를 해야 할지.”

 

  거친 빈민가에서 살아온 봄이는 아직도 이런 형식적인 말이 입에 붙지 않아서 무표정으로 입술을 뻐끔거리기만 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널 구해줬을 거라고 생각해?”

 

  마음이 따뜻해지려던 봄이는 여왕의 바로 다음 말을 듣고는 표정이 굳어졌다.

 

  “저는…….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물론 우린 길바닥에서 쓰러져 죽어가는 여자애를 살려놓고 가진 걸 내놓으라지는 않아.”

 

  “그럼 뭐가 목적이죠? 제가 그쪽한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거죠?”

 

  접시에 놓아둔 양초가 크게 타올랐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벽에 그려진 검은 새 문양이 보였다. 그때 이들이 내렸던 트럭에 그려져 있던 문양과 똑같은 것이었다. 페인트로 그려진 검은 새 문양은 그저 평범한 그림이었지만 무언가 강력한 힘을 내뿜고 있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우리는 지금 전쟁 중이야. 평화롭던 예전 세계를 지금 이 지경으로 만든, 또는 지금 이 절망밖에 남지 않은 세상이 계속될 수밖에 없게 하는 ‘악인’들과 맞서 싸우는 중이지. 하지만 이 깨끗한 세상에 들러붙어 끊임없이 증식하는 썩은 암세포들을 모두 없애버리기엔 우린 늘 수가 적어. 전사가 부족하다는 뜻이지.”

 

 여왕은 쓰고 있던 깨진 방독면을 벗었다.

 

  “필요한 건 뭐든 도와주지. 우리와 함께해줬으면 한다.”

 여왕은 쓰고 있던 깨진 방독면을 벗었다.

 

  “필요한 건 뭐든 도와주지. 우리와 함께해줬으면 한다.”

 

  여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봄이가 누워있던 침대가 약하게 흔들렸다. 심상치 않은 진동이었다. 난데없이 접시에 놓인 촛불이 불안정하게 휘청거렸고, 벽에 걸린 검은 새 모양 그림도 약간 출렁댔다. 그러나 여왕은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이죠? 왜 갑자기…….”

 

  “걱정할 것 없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냥 여진이니까.”

 

  봄이는 예고도 없이 일어난 천재지변 덕분에 여왕의 제안에 확실한 답을 내놓지 않아도 되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뻐했다.

 

  봄이가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여진이라니요?”

 

  “몇 주 전에 이쪽 지방에 큰 지진이 일어났었어. 피해가 꽤 컸지. 토목공사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낮은 건물들이 죄다 무너져내렸어. 확실하진 않지만, 많이들 죽었을 거야. 지금 같은 때에 누가 지진 피해 구호 활동이라던가 그런 걸 하겠어? 모두들 무너진 잔해 틈에서 건져 올린 시체들의 옷을 벗기고 가방을 빼앗았겠지. 그건 왜 물어? 아직 모르고 있었어?”

 

  사실 봄이는 전에 자경단에 있었을 때 다른 지방에 지진이 났었다던 사실을 삼촌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또 지진이 난 지방에 협상을 위해 사람들을 보내겠다는 것도. 그저 자신들과 함께하자는 여왕의 부담스러운 제안에 섣불리 대답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저, 그런데 여왕이라니 무슨 뜻인가요? 아까 어떤 아이가 당신을 여왕이라고 부르던데요.”

 

  봄이의 질문에 여왕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래, 여왕이야. 전 세계의 질서가 붕괴되고 세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어딜 가나 예전 세계의 잔당은 남아있기 마련이지. 이곳도 특별한 건 없어. 우리가 살아왔던 세상의 규율과 크게 다르지 않은 계급사회, 뭐 그런 거야. 여왕은 그저 우리 세대가 만들어낸 서열 중 하나일 뿐이지.”

 

  “그렇다면....... 여왕 다음에는 어떤 서열이 있나요?”

 

  “없어. 내가 총책임자야.”

 

  여왕의 얼굴은 보통 사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검은 방독면을 벗자 정돈이 잘 된 긴 생머리가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입고 있던 지저분한 니트 위에는 너덜너덜한 방탄조끼를 걸치고 있었고, 허리춤에는 권총도 차고 있었다.

 

  여왕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평범한 여성보다는 훨씬 큰 키가 돋보였다. 여진이 멎어 들자 여왕은 근처 접이식 테이블에 놓인 찻주전자에서 뜨거운 물을 따라 봄이에게 건넸다. 물에서는 녹슨 쇠 맛과 섞인 쓴맛이 났다.

 

  “이건 우리와 함께하는 자매들만 마실 수 있는 차야. 자매들과의 결속을 더욱 단단히 하고 밝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는 우리들의 사명을 확실히 일깨울 수 있게 해주지.”

 

  봄이는 아무래도 영 귀찮은 일에 말려들었다는 것을 직감했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며 아까 전 여왕과 이야기를 나누던 조그만 소녀가 들어왔다.

 

  “여왕님, 식사하세요.”

 

  소녀가 펄펄 끓는 뜨거운 국그릇이 담긴 쟁반을 접이식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일어나 있던 봄이를 보았는지 소녀가 얼버무렸다.

 

  “어, 한 분이 더 계셨네요. 식사를 한 그릇 더 가져와야 했는데.”

 

  그러고는 곧바로 다시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여왕이 접이식 테이블을 끌어다가 봄이의 앞에 놓았다. 작은 그릇이었지만, 음식에서 풍기는 고소한 향기가 방을 가득 채웠다.

 

  봄이는 며칠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몸의 회복에 온 기력을 소모했기 때문에 더더욱 배가 고팠던 봄이는 순식간에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평범한 고깃국과 다르지 않아 보였지만 고소한 향기처럼 맛도 아주 좋았다. 봄이가 지금까지 ‘맛있다’라고 느낀 몇 안 되는 음식이었다. 상훈의 집에서 잠깐 머물렀을 때 중년 여성이 해주었던 요리에는 비교하기조차 아까울 정도였다(그녀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봄이가 허둥지둥 그릇을 비우는 것을 지켜보던 여왕이 안쓰럽다는 듯이 말했다.

 

  “고기가 많지? 우리 자매들은 늘 식사는 든든하게 챙겨 먹거든. 그래야 악인들과 싸울 수 있으니까.”

 

  봄이가 대답하지 않자 여왕이 말을 이었다.

 

  “오늘부터 넌 까마귀야. 우리와 같은 까마귀의 일원으로서 지켜야 할 규율을 몇 가지 알려주지.”

 

  “잠깐만요. 정말 죄송하지만, 전 당신들과 함께할 수 없어요.”

 

  봄이는 그 순간 여왕이 자신을 바라보는 태도가 바뀐 것을 느꼈다. 잠깐 여왕과 눈이 마주친 봄이는 갑자기 어두워진 여왕의 눈빛에 왠지 모르게 오싹해졌다. 조금 전까지 별다른 일 없이 대화하던 그녀가 마치 다른 사람으로 느껴졌다.

 

  “어째서지?”

 

  여왕이 차갑게 되물었다. 일순간 뒤바뀐 공기에 봄이는 주춤했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저는, 그러니까....... 제 가족을 찾고 있어요.”

 

  “가족? 가족이라.”

 

  여왕이 잠시 턱을 만지작거렸다.

 

  “가족이라, 그런 건 뭐 하러 찾아? 어차피 전부 다 죽었을 텐데.”

 

  봄이는 순간 울컥했지만 마음을 가다듬었다. 여기서 말을 잘못했다간 어느 쪽이든 좋을 것이 없었다. 봄이는 최대한 여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말을 꼬았다.

 

  “당신들이 정말 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그러니까....... 당신들이 가진 그 위대한 사명으로....... 또........ 세상을 더럽히는 악인들과 싸우고 있다는 건 알겠어요. 하지만 전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이 있어요. 당신들에게는 당신들만 해야 하는 일이 있듯이, 저한테는 저만이 해야 하는 일이 있어요. 조금 이기적일지도...... 무례하다고 생각될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에게는 누구나 선택의 권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여왕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만 있었다. 봄이가 계속 말했다.

 

  “제 부상, 치료해 주셔서 고마워요. 그리고 또...... 식사도 잘 먹었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봄이는 재빨리 근처에 걸린 자신의 셔츠와 재킷을 챙겨입었다. 잠자코 있던 여왕이 말했다.

 

  “원래는 방금 전에 우리 규칙을 알려주면서 말해 주려고 했던 건데, 지금 말해 줄 수밖에

  없겠구나.”

 

  봄이는 무시하고 문 쪽으로 몸을 돌려 나가려 했다.

 

  “까마귀 기본 교범 제 다섯 번째, 여왕의 명령을 불복한 자에 대해서는 누구나 즉결처분 권한을 가진다.”

 

  봄이는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여왕의 허리춤에 달린 권총집이 빛났다. 봄이는 이도저도 못한 채 가만히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난 아직 까마귀가 아니에요. 지금의 당신이 나에게 명령할 권리도, 내가 당신의 명령을 들어야 할 이유도 없어요.”

 

  “그렇다면 지금의 널 적대세력으로 간주해야겠군.”

 

  여왕이 권총을 뽑아 봄이를 겨눴다. 식은땀이 흘렀다. 여왕의 눈빛은 정말로 지금 당장이라도 방아쇠를 당길 각오가 되어있었다. 우선 여왕을 진정시켜야 했다.

 

  “저기요, 제발 진정해요. 이런다고 득 될 게 뭐예요?”

 

  “자신을 까마귀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자가 무단으로 까마귀 본부에 들어와 있다. 넌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예컨대 우릴 적대하는 세력 중 하나가 교묘하게 심어놓은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들어?”

 

  “무단이라니........”

 

  봄이는 대판 따지려다 말문이 막혀버렸다. 사실 봄이는 창고에서 이미 죽었을 운명이었다. 이들이 칼에 찔려 길바닥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자신을 구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런 여왕과의 갈등조차도 없었을 것이다. 그 전에 벌써 창고에서 봄이의 숨이 끊어지고 차갑게 식어버렸을 테니까.

 

  그렇다면 정답은 무엇인가? 까마귀라는 난생처음 듣는 집단에 강제로 끌려들어가는 것이 싫다면 이들이 죽어가는 자신을 못본 척하기를 원했어야 할까? 아니, 그건 아니었다.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목숨이 붙어있기만 하다면 아직 기회는 남아있다는 뜻이었다. 기회는 충분하다. 기회만 있다면 여정은 얼마든지 계속할 수 있었다.

 

  봄이는 못 이기는 척 수긍했다.

 

  “좋아요. 당신들에게 협력하겠어요. 그러니까 당장 총 내려요.”

 

  여왕은 그 대답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흡족해하며 권총을 거뒀다.

 

  “정말 잘 생각한 거야.”

 

  여왕이 뒤돌아서 벽에 걸린 배낭을 뒤졌다.

 

  “넌 우리와 같은 자매가 된 걸 후회하지 않을 거야. 여긴 따뜻한 물은 물론이고 식사도 매일 하루 세 끼씩 꼬박꼬박 나와. 마실 물도 부족할 일이 없고, 원한다면 매일 샤워도 할 수 있어. 그렇지만 명령은 확실하게 따라야 해.”

 

  여왕이 배낭에서 꺼낸 무언가를 봄이에게 건넸다.

 

  “받아. 네가 쓰러져 있던 근처에 떨어져 있던 거야. 네 것 같던데.”

 

  은색 로켓 펜던트였다. 그러나 줄이 끊어져 있었고, 흙탕물이 번졌는지 지저분해져 있었다.

 

  “그리고 이건 놈들의 본부에서 노획한 물건이야. 네 까마귀 입단 선물로 딱이겠군.”

 

  여왕이 내민 것은 권총이었다. 아주 익숙한 권총이었다. 봄이의 손에 딱 맞는 작은 리볼버였다. 봄이는 이 권총이 누구의 물건이었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총알은 넣어 두지 않았어. 기념 선물이라고 생각해. 나중에 너도 자매들과 함께 전투에 나서게 되면 총알은 그 때 지급해주지. 다룰 줄 알아?”

 

  “조금은요.”

 

  봄이는 여왕에게서 받은 권총을 치마폭에 넣었다. 역시 딱 맞았다.

 

  “까마귀가 된 것을 환영한다.”

 

  봄이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엿이나 먹으라고 하고 싶었다. 그러나 애써 참았다. 일단은 자신을 구해준 사람들이기도 했고, 기회를 봐서 탈출하기만 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까 설명하다 말았던 우리들의 기본적인 규율 여섯 가지를 알려주지. 까마귀 기본교범 첫 번째, 무기는 반드시 명백한 ‘악인’들에게만 사용할 것. 두 번째, 더러워진 세계를 되돌리는 방법은 오직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악인을 멸하는 것뿐임을 절대로 잊지 말 것. 세 번째, 어린아이를 포함한 모든 여성은 ‘악인’이 될 수 없다. 네 번째, 까마귀에게 반기를 드는 자가 있을 경우 앞의 규칙을 무시하고 무조건 ‘악인’이 된다. 다섯 번째는 아까 말했으니 두 번 말할 필요는 없겠군.”

 

  봄이는 규칙을 모두 들었지만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악인’ 이라는 건 누굴 말하는 걸까? 어린아이와 모든 여성들은 어째서 악인이 될 수 없다는 말일까?

 

  “그리고 여섯 번째, 허가 없이 무단으로 이탈을 시도하는 배신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즉결처분된다.”

 

  봄이와 여왕은 서로 입을 다문 채 마주보았다. 둘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있었다.

 

  “조금 복잡했니? 이 정도만 알아둬도 이곳에서 생활하는 데에 지장은 없을 거야. 마지막 여섯 번째 규칙은 흘려들어도 돼.”

 

  여왕이 몸을 홱 돌리고는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설마하니 네가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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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84화 2019 / 11 / 4 240 0 7691   
83 12.까마귀 2019 / 11 / 4 215 0 8834   
82 82화 2019 / 11 / 4 249 0 5374   
81 81화 2019 / 11 / 4 250 0 8794   
80 80화 2019 / 11 / 4 266 0 8167   
79 79화 2019 / 11 / 4 224 0 5245   
78 78화 2019 / 11 / 4 251 0 7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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