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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81화
작성일 : 19-11-04 22:51     조회 : 250     추천 : 0     분량 : 87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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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한테 손대지 마. 이거 놔, 씨발!”

 

  봄이는 자신의 양팔을 꽉 붙잡으려는 사내들에게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하지만 적어도 다섯 개는 되는 팔들이 봄이의 목덜미와 어깨를 거칠게 잡아당겼다. 봄이의 다리는 바닥에 끌리기만 할 뿐이었다.

 

  봄이는 팔꿈치로 사내들의 얼굴을 후려치기도 하며 발버둥쳤지만 소용없었다. 뺨과 허벅지에 통증이 몇 번 전해지자 무릎이 꺽였다. 봄이는 제대로 서지도 못한 채 창고에서 강제로 끌려나왔다. 봄이는 마지막 힘을 다해 창고 안의 아이들에게 손을 뻗었지만 누구도 봄이를 도우려는 아이는 없었다. 사실 창고 아이들이 자신을 도울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은 봄이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다.

 

  봄이는 창고에서 끌려나온 후에도 몇 대 더 얻어맞았다. 처음에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항해보려고 했지만 주먹으로 복부를 한 번 얻어맞고 나자 그런 결심은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놈들의 주먹은 봄이가 모진 구타 끝에 눈 쌓인 차가운 땅바닥에 힘없이 쓰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얼굴이 눈밭에 처박혀서인지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봄이는 간신히 욱신거리는 팔다리를 흙투성이 눈밭에 짚은 다음 입만으로 숨을 쉬었다. 숨이 차서인지 아니면 놈들에게 무자비하게 두들겨 맞은 몸뚱아리가 아파서인지는 몰랐지만 호흡을 참기 어려웠다.

 

  누군가의 억센 손이 봄이의 목덜미를 붙잡고 어디론가로 끌고갔다. 무릎이 전부 다 까질 때까지 끌려간 끝에 올려다보이는 것은 불이 꺼진 작은 오두막집이었다. 아까 전 창식과 함께 있을 때 보았던 오두막집이었다. 생각해보면 이게 다 그놈 때문이었다. 그 개새끼가........

 

  놈들은 엉망이 된 봄이를 오두막집 안으로 처넣었다. 안에서 본 오두막집은 사실 오두막집이라기보다는 공중변소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방은 두 개가 전부였고 창문은 없었다. 통나무로 대충 지은 듯한 오두막집 안에는 고약한 헤로인(*진정제의 일종)향이 진동했다. 방 구석구석에는 핏자국이 묻어있었고, 벗어던져놓은 듯한 옷가지들이 바닥에 지저분하게 널려있었다.

 

  “저...... 죄송합니다만 아까부터 자꾸 마음에 걸립니다. 정말로 이런 걸 해도 되는 겁니까? 이 아이나 저기 창고에 가둬 둔 녀석들은 팔 상품입니다. 안 그래도 이제 조금 있으면 품목으로 넘겨야 하는데, 그런 중요한 상품을 이렇게 멋대로 빼돌려도........”

 

  놈들 중 키가 크고 마른 청년이 불안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중년의 매부리코가 답답하다는 듯 다그쳤다.

 

  “그럼 네 마음대로 해 봐. 이 한심한 녀석아.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우리가 이런 짓 해먹고 사는 것도 얼마나 오래갈 것 같아? 이런 세상에 어린애들은 이제 얼마 없어. 물론 팔아먹을 게 어린애들만 있는 건 아니지만 요즘엔 도통 고객들이 어린애들 외에는 비싸게 안 쳐주려고 한단 말이야. 매각할 상품은 점점 줄어드는데 물가는 자꾸 오르기만 해. 이제 사람 몸뚱이 팔아먹고 사는 놈들은 오래 못 간다, 이거야. 그리고 그 놈들이 바로 우릴 말하는 거고.”

 

  중년의 매부리코와 함께 있던 털북숭이도 끼어들었다.

 

  “그럼, 그럼. 다 맞는 말이야.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 이 바닥에서 손을 뗄 거야. 손 떼기 전에 지금까지 일한 성과금으로 여자애 한 명 정도는 받아가도 괜찮잖아?”

 

  “암, 그렇고말고. 우리가 이 바닥에서 얼마나 손을 더럽혔는데.”

 

  “그렇다면 언제 여기서 빠져나올 겁니까? 다른 사람들이 깨어나기 전에 도망쳐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아이 한 명을 빼돌리려는 걸 알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걱정 마. 빠져나오는 건 이 년이랑 실컷 놀아주고 난 다음에 해도 충분해.”

 

  중년의 매부리코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봄이를 가리켰다.

 

  “슬슬 시작하자. 너희들은 오두막집 밖에서 혹시라도 다른 녀석들이 오는지 망이나 봐. 먼저 하고 금방 교대해줄 테니까.”

 

  “최대한 빨리 끝내시오. 기다리는 사람이 있으니.”

 

  털북숭이가 그렇게 말하고는 마른 청년과 함께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문이 닫힌 후 발자국 소리들이 점점 멀어졌다. 중년의 매부리코는 동료들이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 조용히 바지 벨트를 풀었다.

 

  “꼬마야, 넌 정말로 운이 좋은 거란다. 넌 이제 저 춥고 더러운 창고에 갇힌 채로 식인종인지 뭔지에게 팔려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우리가 널 구해준 거야. 우리가 널 죽음을 기다리는 공포 속에서 꺼내준 거지. 물론 너도 알고 있겠지만 이 세상에 공짜라는 건 없단다. 사람의 피를 사고팔기 위해 대가가 필요한 것처럼, 목숨을 구해주었다는 걸로도 당연히 대가가 필요하겠지. 하지만 우린 너처럼 가진 것 없는 가엾은 꼬마들에게 많은 걸 바라지는 않는단다.”

 

  매부리코가 쓰러진 봄이를 세워 앉힌 다음 봄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중요한 건 마음이지. 네가 네 목숨을 구해준 우리들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단다. 우린 결코 널 해치지 않을 거야. 우린 그저 앞으로 너와 함께하고 싶을 뿐이야. 차마 네가 식인종에게로 팔려가는 걸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단다. 이제부터 넌 우리가 데려다가 책임지고 돌봐줄게. 더 이상 이 끔찍한 곳에 갇혀있지 않아도 된단다. 맹세하마.”

 

  매부리코가 그렇게 말하며 봄이의 분홍색 후드 재킷을 벗겼다. 봄이는 저항하지 않았다. 매부리코는 계속해서 봄이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풀었다.

 

  그 순간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봄이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매부리코는 재빨리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아무런 낌새도 없다는 것을 알아챈 매부리코가 조심스레 봄이에게 물었다.

 

  “얘야, 갑자기 왜 그러니?”

 

  “아저씨........저 너무.... 너무 무서워요. 이 집에는 이제 아저씨와 저밖에 없는 건가요?”

 

  매부리코가 또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는 따뜻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무서워할 것 없단다. 이 집에는 우리 단 둘뿐이야.”

 

  봄이가 훌쩍이며 대답했다.

 

  “정말로....... 정말로 단 둘뿐인가요?”

 

  “그래, 그래. 우리 둘뿐이란다.”

 

  “그렇다면 유감이네요.”

 

  봄이는 번개처럼 아까 주웠던 녹슨 쇠못을 꺼내 매부리코의 눈알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눈을 움켜쥔 매부리코의 손바닥 사이에서 피가 분수처럼 흘러내렸다. 놈이 찢어지는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봄이는 놈이 벗은 벨트를 매부리코의 목에 휘감았다.

 

  놈은 피가 솟는 눈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봄이와 함께 뒹굴었다. 봄이는 두 다리로 놈에게 올라타 목에 단단히 감긴 벨트를 온 힘을 다해 조였다. 놈은 미쳐버린 흉포한 짐승처럼 발버둥치며 봄이를 떼어놓으려 날뛰었다. 이러던 과정에서 봄이는 천장이나 벽에 머리를 수도 없이 부딪혔다. 그러나 결코 놈의 목을 옥죈 벨트만큼은 절대로 놓치지 않았다.

 

  목이 졸려 고통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놈의 몸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놈이 완전히 축 늘어진 후에야 봄이는 벨트를 손에서 놓을 수 있었다.

 

  봄이는 피로 물든 못이 눈알에 박히고 벨트를 칭칭 감은 채 널부러진 매부리코를 내려다보았다. 숨이 가빠졌다. 끔찍한 광경이었다. 차마 두 눈으로 보지 못할 정도였다.

 

  죽었을까? 아니면 정신을 잃은 걸까?

 

  그 순간 오두막집 바깥에서 누군가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아까 그 털북숭이와 마른 청년의 목소리였다.

 

  “이봐, 아직 멀었어? 꽤 소란스러운 것 같던데.”

 

  봄이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끔찍하다고 생각했던 매부리코의 몸을 재빨리 뒤졌다. 쓸만한 것은 없었다. 무기는 전부 두고 온 모양이었다.

 

  “왜 대답이 없어? 도대체 무슨 일이야?”

 

  안에서 대답이 없자 바깥 놈들의 목소리가 거세졌다. 급기야 안에서 잠긴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고 했다. 창문이라도 있었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없는 오두막집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었다.

 

  문틀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미 늦어버렸다. 봄이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이윽고 털북숭이와 마른 청년이 문을 박살내고 들어왔다. 그들은 칼을 뽑아들고 조심스레 내부를 살폈다. 그들은 핏자국을 따라오다가 바지도 입지 못한 채 바닥을 핏물로 물들이고 있는 매부리코를 보자 모두 굳어버렸다.

 

  숨어있던 봄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근처의 벽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마른 청년에게 달려들어 놈의 머리를 힘껏 후려쳤다. 놈이 쓰러지자 털북숭이는 봄이의 존재를 알아채고 봄이에게 칼을 휘둘렀다. 놈이 칼을 엄청나게 난폭하게 휘둘렀기 때문에 만약 피하지 못했다면 봄이는 그대로 가슴에 칼이 찔려 죽었을지도 몰랐다.

 

  난투가 길어지면서 무기가 없는 봄이는 자연스레 구석에 몰리게 되었다. 털북숭이가 휘두르는 칼날에 어깨와 허벅지, 팔뚝이 베여 피가 흘러내렸다. 놈이 칼을 들고 있어서 봄이가 섣불리 접근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놈은 더욱 더 자신만만하게 봄이를 밀어붙였다.

 

  “네 년이, 도대체 네 년 혼자서 어떻게......”

 

  털북숭이가 그렇게 중얼거리며 봄이에게 다가왔다.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을 번뜩이며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왔다. 완전히 벽에 몰린 봄이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놈이 칼을 쥐고 있던 오른손이 움찔거렸다. 놈의 공격을 예측한 봄이는 재빨리 몸을 최대한 숙여 굴렀다. 놈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동안 빠져나온 봄이는 재빨리 피 묻은 벽돌을 다시 주워 놈에게 냅다 던졌다. 벽돌은 놈의 콧등에 매섭게 직격했다. 봄이는 코를 싸쥐고 고통스러워하는 놈을 힘껏 넘어뜨리고 놈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는 놈의 이마에 벽돌을 내리찍었다. 얼굴에 피가 튀었다. 두 번, 세 번 내리찍은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벽돌이 가루가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놈의 이마가 걸레짝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몇 분 후 놈이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게 되자, 봄이는 손에 쥔 벽돌 조각을 떨어뜨렸다. 봄이는 벽돌에 찍혀 걸레짝이 된 놈의 몸뚱이 위에서 한참 동안 가쁜 숨을 내쉬다가 피로 난장판이 된 땅바닥에 드러누웠다.

 

  자신 이외의 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이제 모두가 침묵했고, 방금 전까지 귓가에 맴돌던 사내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봄이는 지금까지 자신이 무얼 하려고 했는지, 또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 지금 봄이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그저 자신의 피 묻은 손과 부서져 산산히 조각난 벽돌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악인을 처단했다는 사실에 기뻐할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더 나아가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하려고 한 악인이었다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 중 거의 대부분은 살인을 해본 적이 없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머리를 벽돌로 내려칠 때 손끝부터 척추를 타고 흐르는, 뭐라고 할까, 이른바 짜릿한 ‘쾌감’ 같은 것도 느껴본 적 없었고 그 반대의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에게는 느낄 기회조차 없었다.

 

  봄이는 자신이 방금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 일말의 기쁨도 성취감도 쾌감도 느끼지 못했다. 설령 상대가 자신을 칼로 찔러 죽이려 하고, 옷을 벗기고 강간하려고 했던 명백한 악인이었는데도 말이다. 이들을 자신이 심판한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만약 맞다면, 어째서 ‘살인’은 봄이가 옳은 일을 했다는 포상으로 일말의 기쁨도, 성취감도, 쾌감도 주지 않았을까?

 

  아니, 사실 이제 이 세계에서 옳고 그름 따위는 없었다. 창고에서 끌려나오기 전 소년이 했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이 세계는 강한 자가 곧 힘이고 절대자야.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맞는 말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인간의 선악을 구분짓고 무게를 잴 저울은 존재하지 않았다. 선악과는 먼 옛날부터 전해내려오던 빛바랜 종이에 씌인 한 구절에 지나지 않았다. 더 이상 이런 무의미한 도덕적 관념에 얽매인다면 그건 바보 같은 짓이었다. 봄이가 처음으로 방아쇠를 당겼던 날, 그 날은 이미 지나버렸다. 이제 봄이는 먼 과거에 저지른 과오에 미련을 남겨서는 안 되었고 되돌아보아서도 안 되었다.

 

  봄이는 조용히 일어나 반쯤 벗겨진 셔츠의 단추를 채우고 재킷을 고쳐입었다. 그러고는 핏구덩이에 뒹굴고 있는 사내들에게 다가갔다. 눈알에 못이 박힌 채 죽은 사내가 마치 눈을 부릅뜨고 봄이를 쳐다보는 것처럼 보였다. 봄이는 신경쓰지 않고 놈과 다른 사내들의 재킷을 벗겨 뒤졌다. 피가 흘러나와 묻은 권총 한 정과 짤랑거리는 열쇠 꾸러미뿐이었다. 권총은 마른 사내의 재킷에서 나왔는데, 불행히도 봄이에게 뒤통수를 맞는 바람에 사용해보지도 못한 것이 틀림없었다.

 

  봄이는 권총과 열쇠 꾸러미를 가지고 절뚝거리며 오두막집에서 나왔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지만 어느새 새벽녘 어스름이 걷히고 동이 트고 있었다. 놈들이 남은 인원수를 체크한 다음 오늘 있을 거래를 위해 ‘팔 물건’을 확인하러 창고로 들이닥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하지만 봄이는 그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봄이에게는 더 이상 창고로 돌아갈 이유가 없었다. 이미 봄이는 풀려났고, 놈들의 구속에서 자유로웠다. 이런 이른 시간부터 바깥에 나와 순찰을 도는 놈은 없었다.

 

  즉 봄이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저 이곳에서 멀리멀리 도망치면 되었다. 놈들이 더 이상 봄이를 찾을 수 없게, 또다시 놈들의 장화 소리가 봄이의 등 뒤에서 울려퍼지지 않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것이 이 끝나지 않는 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봄이는 해가 떠오르는 방향으로 달렸다.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녹슨 창고의 그림자를 뒤로하고 무작정 뛰었다. 그다지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도망치던 봄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 자리에 멈춰섰다.

 

  왜 멈춰섰을까?

 

  무언가 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왠지 이대로 떠나서는 안 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 속에서는 재빨리 다리를 움직여 이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소리치고 있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예전에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있었다. 바로 냉랭하고 제멋대로인 봄이에게 등을 돌릴 뻔했던 상훈에게 느꼈던 감정과 똑같았다. 봄이는 그 때 느꼈던 이 묘한 감정을 지금 이 죽음의 땅에서 다시 느끼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봄이는 오른손에 쥐고 있던 열쇠 꾸러미를 바라보았다. 한 개의 고리에 열쇠가 일곱 개는 달려 짤랑거리고 있었다. 무슨 열쇠일까? 어디에 맞는 열쇠일까?

 

  봄이는 자신이 창고에 갇혀있을 때 문을 열어주었던 사내들을 떠올렸다. 창고 문은 분명히 잠겨 있었는데 사내들이 어떻게 문을 열었을까? 그 사내들은 이제 없었지만, 이 열쇠들은 분명히 놈들의 품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 열쇠들의 용도는 단 하나뿐이었다. 틀림없었다.

 

  봄이가 창고에 갇혀있었을 때 주근깨 소녀에게 했던 질문이 떠올랐다. ‘어디에서 왔느냐’ 는 봄이의 물음에 소녀는 ‘하수도에서 왔다’ 고 대답했다. 또 하수도에는 자신과 같은 아이들이 많이 산다고 했었다. 봄이가 알고 있는 ‘하수도’ 는 한 곳밖에 없었다.

  이곳에 오기 전, 봄이는 종민과 은지와 함께 어린 생존자 무리들이 살고 있던 아지트에 들렀었다. 그곳에 사는 아이들은 모두 자신들이 살고 있는 ‘하수도’를 자랑스럽게 여겼다. 그렇다면 아까 만났던 주근깨 소녀도 그곳에서 붙잡혀 온 아이였을까?

 

  봄이가 하수도에 있었을 때,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비록 어린아이들 뿐이었지만 그곳에서 뭉친 아이들의 신뢰는 그 어떤 생존자 무리들보다 두텁고 굳건했음을. 그래서인지 봄이는 그 당시에, 아주 약간이었지만 하수도 아이들에게 부럽다는 감정을 느꼈었다. 늘 서로를 믿고 함께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늘 봄이가 바라던 소망과도 같았다.

 

  봄이의 가슴이 뛰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열쇠를 내팽개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쳐서 이 죽음의 땅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지만 봄이는 그러지 않았다. 예전의 봄이라면 절대로 이런 행동을 하지 않았겠지만, 예전의 봄이였다면 절대로 자신과 관계없는 일에 나서지 않았겠지만, 차마 그 가엾은 아이들을 이 죽음의 땅에 내버려둔 채 자기만 도망칠 수는 없었다.

 

  봄이는 무엇인가에 홀린 듯 달려온 길을 되돌아갔다. 지평선 너머로 해가 막 떠오르려고 하고 있었다. 대문이 훤히 열린 채 찬바람에 흔들대는 오두막집과 녹슨 창고에 돌아왔지만 놈들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봄이는 놈들이 보이지 않는 틈을 타 창고 문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열쇠 꾸러미에서 맞는 열쇠를 찾으려고 했다. 아이들은 분명히 아직 창고에 갇혀있을 것이다. 놈들이 이미 알아채지만 않았다면.......

 

  봄이는 열쇠 꾸러미를 뒤적거렸다. 창고 문에는 예상대로 큰 열쇠구멍이 있었다. 첫 번째 열쇠는........ 맞지 않았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이어서 세 번째 열쇠도 구멍에 들어가지 않았다.

 

  봄이는 언제 뒤에서 놈들의 목소리가 들릴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아니면 만약 이것이 봄이의 완벽한 오판이었고 이 열쇠 꾸러미들이 창고 열쇠가 아니었다면?

 

  네 번째 열쇠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다섯 번째 열쇠도 들어가지 않았다. 이제 두 개의 열쇠만 남았다.

 

  봄이의 노력이 헛된 것만은 아니었는지 여섯 번째 열쇠는 다행히 창고 열쇠구멍에 딱 맞았다. 찰칵 하고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봄이가 창고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를 잡아당기려는 순간, 봄이는 자신 앞에 드리워지는 그림자를 보았다. 매우 커다란 그림자였다.

 

  봄이가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아까 전의 거한이 봄이의 작은 목을 움켜잡고 들어올렸다. 봄이의 몸이 마치 교수형을 당하는 사형수처럼 순식간에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너 이 새끼,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어떻게 네년이 바깥에 나와 있는 거지?”

 

  거한이 양손으로 봄이의 목을 더욱 세게 조였다. 근육질 거한은 최소한의 저항이라도 해볼 수 있었던 다른 사내들과는 달리 힘이 엄청났다. 때문에 봄이는 거한에게 목이 죄이자 저항은커녕 팔다리조차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봄이가 거한의 힘에 무력하게 짓눌리는 동안 눈 앞은 점점 아득해졌다. 이 이상 목이 죄인다면 꼼짝없이 질식해 죽을 것이라는 걸 봄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봄이는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아까 전에 주웠던 피 묻은 권총을 꺼냈다. 그리고 방아쇠를 당겼다.

 

  고요했던 죽음의 땅에서 총성이 한 발 울려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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