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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마지막 봄
작가 : 로리칼국수
작품등록일 : 2019.10.4

(정통소설/피폐)

전 세계의 질서가 무너져내린 이후 매서운 겨울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생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흩어졌고, 얼어붙은 세상에 남은 마지막 불씨는 꺼져버렸다.

이 버려진 도시에 홀로 남겨진 소녀는 이제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기 위한 여정을 떠나야만 한다.

 
76화
작성일 : 19-11-04 22:47     조회 : 237     추천 : 0     분량 : 105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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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끝나지 않는 밤

 

 

 봄이가 멍하니 던진 그 한 마디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총수의 눈동자가 커지는 것이 보였다. 이마를 찡그리는 창식의 얼굴도 보였다. 총수실에 미리 들어와서 이야기를 나누던 다른 자경단원들도 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난데없이 무슨 소리야, 삼촌이라니?”

 

  창식이 뚱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다른 자경단원들도 수근댔다. 드디어 총수가 입을 열었다.

 

  “창식 씨, 이자들은 누굽니까? 어디서 데려온 겁니까?”

 

  “보고드렸다시피 교차로 외곽에서 저희 팀과 접촉했던 무리입니다. 약간의 교전이 있었지만 아군 손실은 없었습니다. 나머지 포로들이 위협을 끼칠 염려는 없다고 판단해서 생포해 왔습니다. 이 녀석들을 정식 범법자로 인정해 주시면......”

 

  “알겠소.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잠시 나가 있으십시오.”

 

  총수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애매한 지시가 마음에 들지 않은 창식이 항의했다.

 

  “총수님, 이 녀석들은 명백한 범법자들입니다. 아무리 외곽이라도 결국엔 자경단 주둔지 내에서 벌인 위법행위입니다. 물론 전 이 여자애와 총수님이 무슨 관계인지 모릅니다만, 설마하니 정말로 혈육이라고 해서 철저한 포로 처분법을 위반하려는 건 아니겠지요?”

 

  “창식 씨, 총수님께 무례한 언행은 삼가시오. 경고입니다.”

 

  지금껏 옆에서 소총을 든 채 부동자세로 서 있던 한 자경단원이 말했다. 방 안을 떠돌던 공기가 무거워졌다. 은지는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고, 지켜보고 있던 다른 자경단원들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창식은 눈썹을 치켜올리는가 싶더니 결국엔 손을 털며 물러났다.

 

  “좋습니다. 30분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그 때까지 이 포로들을 어떻게 처분할지 결정하십시오.”

 

  창식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다른 분들도 잠깐만 자릴 비워 주시겠소?”

 

  총수가 부탁하듯 명령하자 다른 자경단원들도 하나둘씩 흩어졌다. 이윽고 방에 은지를 제외하고 총수와 단 둘만 남게 된 봄이가 입을 열었다.

 

  “삼촌.......태호 삼촌, 맞죠? 그렇죠?”

 

  봄이는 그렇게 말하고도 고개를 들어 삼촌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짧은 말 한 마디를 내뱉었을 뿐인데도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불덩이에 목이 타는 것처럼 괴로웠다. 봄이에게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만남이었지만, 어찌되었든 삼촌은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세월에 의해 많이 바래져 있었고, 기억 속에서와는 달리 여기저기 난 크고 작은 흉터도 보였다. 봄이가 지금껏 여기 오기까지 적지 않은 과정을 겪었듯 그 역시 마찬가지로 보였다.

 

  아직 진짜 가족을 찾은 게 아니기는 했지만 막상 삼촌의 얼굴을 보자 성취감이나 해방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봄이가 처음으로 그에게 느낀 감정은 ‘낯선’ 감정이었다. 지금 올려다보는 삼촌의 얼굴은 기억 속에서와는 너무나도 달랐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봄이는 막연히 이제 그가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봄이가 혈육임을 부정하며 위법자인 자신을 포로 처분법대로 처리하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그가 봄이를 자신이 새로 얻게 된 지위를 유지하는 데에 걸림돌이 될 골칫덩이로 치부하고 내쫓아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는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봄이를 일으켜 세우고는 말했다.

 

  “봄아......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보다 여기엔 도대체 어떻게 온 거야?”

 

  봄이는 그 말이 정말로 자신이 걱정되어서 한 말이라기보다는, 마치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었냐는 말처럼 들렸다.

 

  봄이는 상훈을 만난 것부터 시작해서 그의 가족들에게 신세를 지고 여기까지 오게 된 지금까지의 여정들을 그 자리에서 모두 털어놓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봄이가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때까지 그는 봄이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그랬어......”

 

  그는 봄이의 이야길 듣고 이런 식으로 중얼거리기만 했다. 그는 봄이를 만나게 된 사실이 그다지 기쁘지 않아보였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재회에 어쩔 줄 몰라하는 그를 보자 어딘가 불안해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봄이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한 젊은 자경단원이 들어왔다. 그가 말했다.

 

  “총수님, 곧 회의 시간입니다.”

 

  “알겠소, 금방 나가겠네.”

 

  자경단원이 나가자 삼촌은 그때서야 봄이의 손목에 묶인 밧줄을 풀어주었다.

 

  “금방 다시 돌아올게. 그때까지 조금만 여기서 기다려 주렴, 알겠지?”

 

  기다리라고?

 

  “삼촌.......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봄이의 말에 뒤돌아 나가려던 그의 다리가 멈췄다. 봄이는 목숨을 걸면서까지 찾아다녔던 남자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왠지 모르게 이 남자를 찾기까지 지나왔던 모든 길과 여정이 모두 부질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끓어오르는 배신감이 핏속에 사무쳤다. 그리고 그 피는 점점 식어가더니 이윽고 완전히 얼어붙어 버렸다. 동시에 삼촌에 대한 기대감이 점차 사라져가는 것을 느꼈다.

 

  “봄아, 삼촌 믿지? 조금이면 돼. 조금만 있으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하자꾸나......”

 

  봄이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혀버렸다. 이 삼촌이라는 자는 근 3년 만에 다시 만난 자신을 보고 해줄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는 것일까? 물론 장대한 상봉 파티같은 것은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이건 너무했지 않은가? 어떻게 이런 미쳐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은 가족을 눈 앞에서 마주하고서 이렇게 무관심하고 태연할 수가 있을까? 그에게 있어 봄이의 존재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었다는 말인가?

 

  삼촌을 노려보는 봄이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본래 흘러야 할 가족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격해서 흐르는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 봄이 자신마저 기쁘지도 않은데 왜 눈물이 흐르는지 알지 못했다. 그 눈물은 지금껏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눈앞의 남자에 대한 배신감과 원망감이었다. 원망감이라고? 어째서 원망감이 드는 것일까? 분명히 지금껏 목숨을 걸고 찾았던 가족일 텐데......

 

  그는 한동안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는 봄이에게 다가와 비쩍 마르고 상처로 엉망이 된 봄이의 여린 몸을 꼭 안아주었다. 끓어오르는 배신감에 이미 넋을 놓은 봄이는 그가 다가오기라도 하면 얼굴을 주먹으로 한 방 먹여주려고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봄이는 한참 동안 삼촌의 품에 안겨 힘없이 흐느꼈다. 방금 전까지 하늘을 찌르던 삼촌에 대한 원망감이 점차 누그러졌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용서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저 그가 자신을 내쫓지 않기만을 바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봄이의 생사를 결정지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봄이는 삼촌의 말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빨리 와야 돼.”

 

  그는 헝클어진 봄이의 머리를 감싸 주며 꼭 그러겠다고 했다. 그가 도망치듯 어디론가로 떠나자 방 안에는 봄이와 은지만 남게 되었다.

 

  봄이는 은지의 손목에 묶인 밧줄도 풀어주었다. 매듭이 굵고 날카로운 밧줄이라 푸는 데 애를 먹었다.

 

  “봄이야, 저 사람이 혹시...... 네가 찾던 가족이니?”

 

  은지가 오랜만에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는 어둠에 잠겨있었고,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봄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지 언니, 이제 그만 힘 내서 일어나요. 언니 잘못이 아니잖아요.”

 

  봄이는 아직까지 실의에 빠진 은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열었지만, 그녀는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땅바닥만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봄이가 은지에게서 대답을 듣는 것을 포기했을 때, 바로 옆에서 총명한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빠랑 아는 사이예요?”

 

  한 소녀가 방 안에 있던 책장 뒤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2살에서 3살 정도 되어보이는 소녀였다. 소녀는 아직 언어구사가 완벽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표현해내는 데엔 충분했다.

 

  느닷없이 나타난 소녀는 곧 책장 뒤에서 나와 봄이에게로 다가왔다. 봄이가 이름을 묻자 소녀가 대답했다.

 

  “제 이름이요? 겨울이에요. 윤 겨울.”

 

 * * *

 

  봄이와 겨울은 잠시 동안 서로를 마주보기만 했다. 겨울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봄이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언니는 이름이 뭐예요? 윤 봄...... 봄이 언니였구나. 아하, 우린 이름이 서로 반대네요. 나는 겨울, 언니는 봄. 여기에는 겨울이 있고, 저기에는 봄이 있고. 재미있지 않아요?”

 

  겨울이 손가락을 치켜세우며 깔깔 웃어댔다. 봄이는 무표정으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봄이의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겨울은 자기 할 말에만 집중했다.

 

  “내 이름은 아빠가 지어준 거래요. 저번에 아빠가 글자 쓰는 법을 가르쳐줄 때 나한테 말해줬어요. 우리나라는 각자 뚜렷한 개성을 가진 사계절이 있다는 게 장점이라면서 나한테 예쁜 꽃도 보여줬어요. 꽃은 언제나 봄처럼 따뜻하게 생명으로서 뿌리를 내리고, 여름과 가을을 거쳐 잎과 줄기를 뻗어서 성장한대요. 그리고 겨울이 찾아오면, 많은 꽃들이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버린다고 해요. 그런데 그렇게 혹독한 추위가 지나고 악몽같았던 시련과 고난을 모두 이겨낸 꽃한테는요, 지금까지 거쳐왔던 과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실이라고 할 수 있는 예쁜 꽃잎이 피어난대요. 전에 나한테 보여준 꽃은 조금 시들었긴 했지만...... 되게 신기하지 않아요?”

 

  이 어린 소녀의 말하는 방법은 하나같이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나 봄이는 지금 그런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듣고 있을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꼬마야. 아니, 겨울아. 미안하지만 우린 지금 그런 이야기 듣고 있을 시간 없어. 내가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줬으면 좋겠어. 먼저......”

 

  “잠깐, 내 이야기 아직 안 끝났어요. 왜 말을 가로막아요?”

 

  겨울은 자신이 화가 났다고 강조하듯 볼을 부풀리고 억지로 눈썹을 찡그렸다. 예상하지 못한 겨울의 반응에 봄이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피이, 어른들은 다 이래요. 다들 날 똑같이 대해요. 아빠랑 재미있는 이야길 하고 있을 때 다른 아저씨들이 들어오면 아빠는 나랑 하던 이야기를 그만두고 나가 있으라고만 해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저씨들은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아요. 왠진 모르겠지만 여기 있는 아저씨들은 모두들 고민에 빠져 있고, 모두들 슬픈 표정을 짓고 있어요. 내가 위로해 주려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줘도 모두들 내 말은 들은 체도 안 한단 말이에요. 맨날 화내기만 하고.”

 

  겨울은 그렇게 말하며 제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그러고는 책장 뒤에 놓인 상자를 뒤적여 낡은 곰인형을 꺼냈다.

 

  “언니는 우리 아빠랑 닮아서 날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뭐 상관 없어요. 나한텐 내 말에만 대답해 주고 다른 아저씨들한테는 눈길도 주지 않는 하나뿐인 친구가 있거든요. 얘 이름은 테디예요. 배에 영어로 써 있어요. 이 정도 영어는 나도 읽을 줄 알아요. 이제 언니도 내 말을 무시했으니까 테디도 언니를 악당이라고 생각할 거예요.”

 

  겨울은 손에 든 낡은 곰인형을 자랑스럽다는 듯이 내밀었다. 곰인형은 장식이 거의 다 떨어져 있었고, 옆구리에는 봉제가 뜯어져 솜이 삐져나와 있었다. 인형과 어울리지 않기는 했지만 머리에는 예쁜 머리핀도 꽂고 있었다.(누가 봐도 사람 머리핀이 틀림없었다-)

 

  봄이는 겨울에게로 성큼 다가가 곰인형을 홱 빼앗았다. 당황한 겨울은 마구 소리 질러댔다.

 

  “앗, 뭐 하는 짓이에요! 내 테디 돌려줘!”

 

  “이건 테디라고 읽는 게 아니라 ‘테드’ 라고 읽는 거야.”

 

  봄이가 곰인형을 돌려주자마자 겨울은 인형을 빼앗아 봄이에게서 달아났다.

 

  “치, 남이사. 나도 다 아는데.”

 

  “그래서, 삼촌이 네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데?”

 

  겨울이 못 믿겠다는 얼굴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내 이야기 들어 줄 거예요?”

 

  “들어줄 테니까 말해 봐.”

 

  봄이가 말하자 겨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봄이의 앞에 와서 앉았다.

 

  “우리 아빠가 내 이름을 왜 겨울이라고 지었냐면요, 꽃도 결국에는 사람이랑 마찬가지래요. 꽃이 겨울이라는 혹독한 과도기를 견뎌내고 결실을 맺듯이 사람도 그런 추운 겨울 같은 고난과 시련을 이겨내야만 더 단단해지고 성장하는 거라고, 그렇기에 사계절 중에서도 겨울이 가장 우리들에게 중요한 계절인 거라고....... 그래서 제 이름을 겨울이라고 지은 거래요. 멋지죠?”

 

  겨울은 자신만만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봄이는 그런 겨울의 모습이 너무나도 천진난만하게 느껴져서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래서 저도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요. 얼른 어른이 되어서 다른 아저씨들처럼 멋진 배낭을 메고 바깥세상에 나가서 예쁜 별들을 마음껏 구경하고 싶어요. 지금은 아저씨들이 너무 어리다고 절대로 바깥세상에 못 나가게 하거든요. 바깥세상에는 지금껏 내가 본 적도 없는 괴물들과 악마들이 우글거린대요. 나 같은 어린애가 바깥에 한 발자국이라도 나가면 바로 악마들한테 유괴돼서 잡아먹힌다는 거 있죠. 봄이 언니는 그런 궤변을 믿어요? 누굴 바보로 아나. 나도 알 건 다 안다구요. 아,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울 막바지니까 산타 할아버지가 오겠네요.”

 

  겨울이 테이블 위를 기어올라 봄이와 은지에게 따뜻한 물을 한 잔씩 건네주었다.

 

  “봄이 언니는 최근에 운 적 있어요?”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봄이에게는 그 말이 가슴 한가운데에 강하게 박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봄이는 왠지 모를 울적함에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대답했다.

 

  “운 적이라...... 많이 있지.”

 

  “정말요? 그럼 선물 못 받겠네.”

 

  겨울이 과하게 놀라는 반응을 보이며 기겁했다. 그러나 봄이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아무튼 좋아요. 봄이 언니가 내 이야길 들어줬으니 나도 언니가 묻는 말에 대답해 줄게요. 아까 하려던 말이 뭐였어요?”

 

  “아, 내가 하려던 말은......”

 

  봄이가 말을 꺼내려는 순간 방문이 열리더니 누군가가 들어왔다. 삼촌이었다.

 

  그는 총수실로 돌아오자마자 봄이에게 달려와 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내 권한으로 봄이 너와 저 아가씨는 아무런 처벌도 내릴 수 없게끔 처리됐어. 널 끌고 왔었던 창식 씨에게도 절대로 널 건드리지 못하도록 일러두었어.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돼. 지금까지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구나, 봄아.”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봄이를 다시 한 번 꼭 안아주었다. 봄이도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삼촌을 두 팔 벌려 끌어안았다. 아까와는 달리 그의 재킷은 따뜻했고, 그는 더 이상 봄이를 부담스러워 하지 않았다. 봄이는 설마 이런 곳에서 그와 재회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말로 기행이었다. 졸지에 범법자로 몰려 포로로 잡혀들어간 조직의 책임자가 봄이가 찾던 가족 중 하나였다니! 봄이는 그와 어렵게 재회한 만큼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였다.

 

  “삼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어쩌다가 이런 곳에서 폭력배들을 이끌고 계시는 거냐구요?”

 

  “그런 게 아니야, 봄아. 그럴 만한 일이 있었어. 예전에 내가 결국 의사의 꿈을 포기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이곳에도 사태가 터졌었어. 조용하던 사람들이 점차 폭력적으로 돌변하기 시작하자 나는 집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어. 그런데 그러다 보니 결국 식량이 완전히 거덜나게 되었지.”

 

  그가 물을 한 잔 마시고 나서 다시 이야기했다.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나가야만 했어.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 더 심했어. 어디서 들여온지도 알 수 없는 불법 총기들이 거래되고 사람 목숨의 값어치가 바닥까지 떨어졌던 그 때, 나는 약탈자들 무리에게 공격당했어. 녀석들은 내가 가진 게 없다는 것을 알자 날 죽이려고 했지. 그런데, 녀석들 중 하나가 최근 심각했던 흑사병에 시름시름 앓고 죽어가고 있었어. 그 자리에 있던 녀석들 중 누구도 병을 고치는 법을 알지 못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나 했어. 내게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녀석의 흑사병을 고쳐주겠다고 말이야.

 

  나는 문 닫은 근처 병동으로 녀석들을 데리고 갔어.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 약품들을 사용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지. 녀석은 아직 피부 괴사가 시작되지 않은 증상 초기였기 때문에 치료가 쉬웠고, 녀석들은 동료가 완치되자 약속을 지켰어. 날 건드리지 않았던 건 물론이고 자기들끼리 세운 무리 내 서열도 높게 올려주었어. 무리에는 의사가 반드시 필요한 역할이라고 생각했나 봐. 그러다가 결국 윗사람들이 모두 죽거나 실종되는 바람에 내가 총책임자가 되고 만 거야.”

 

  “아빠, 의사였어?”

 

  지금껏 잠자코 듣고만 있던 겨울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의학을 배웠었지. 결국 의사는 못 되었지만 말이야.”

 

  삼촌이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담뱃대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씁쓸한 듯이 담배 연기를 내쉬며 봄이를 애처롭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봄이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외투에는 지난번 싸움에서 묻은 진흙과 먼지가 흥건했고, 어깨에는 괴물에게 긁혀 흘렸던 핏자국이 눌러붙어 흉하게 번져 있었다. 제대로 된 응급처치랄 것도 없이 붕대 쪼가리를 감고 있는 것이 전부였고, 몸뿐만 아니라 마음 속까지 입은 상처는 수도 없이 많았다.

 

  “사랑하는 우리 조카,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까......”

 

  그는 봄이의 처지를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봄이를 보고 무작정 가엾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녀의 마음 속까지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봄이를 진심으로 걱정해줄 수 있었고, 그 덕분에 봄이도 잠시나마 느꼈던 삼촌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심을 완전히 풀 수 있었다.

 

  “저기, 삼촌......”

 

  “그렇다면, 이제 저희에게 더 이상 제약을 걸지 않겠다는 말씀이시죠?”

 

  정신을 차린 은지가 꽤 강압적으로 소리쳤다. 삼촌이 담배 연기를 들이마시고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가씨. 이제 뜻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그 말을 들은 은지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곧 힘겹게 일어섰다.

 

  “우린 공원 너머로 가야만 합니다. 제겐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공원 너머라는 소리를 듣자 삼촌은 얼굴을 찡그렸고, 씁쓸해 보이던 눈동자는 심각하리만치 굳어버렸다.

 

  “아가씨, 무슨 용무가 있는진 모르겠지만 열차 무덤 너머로는 가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 곳 너머엔 무엇이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탐색을 위해 무장한 자경단원 몇 명을 보냈지만, 그중 한 명은 실종되었고 나머지는 부상을 입고 가까스로 돌아왔습니다. 대원들은 돌아오자마자 ‘얼굴이 없는 자들에게 공격당했다’ 는 말을 되풀이할 뿐 모두들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미쳐버렸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후로부터 우리 자경단에서는 공원 너머를 접근 금지 구역으로 정하고 아무도 그곳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풀어는 드리겠지만, 그곳으로 가신다면 말리고 싶습니다.”

 

  “저도 압니다. 다 안다구요!”

 

  은지가 소리쳤다. 겨울은 의아하다는 듯 책장 뒤에서 고개를 내밀었고, 삼촌은 아무 대답도 없이 담뱃대를 물고만 있었다. 봄이는 은지가 지금껏 자신과 함께했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눈 앞에서 종민을 잃었다는 죄책감과 충격 때문일까?

 

  “공원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다른 누구보다도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려는 겁니다. 거기엔 도움이 필요한 어린아이들이 넘쳐날 테니까.”

 

  “어린아이들을 구한다고요? 어째서 어린아이들을 구하려고 그 위험한 곳까지 가려는 겁니까?”

 

  삼촌이 묻자 은지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봄이에게 전부 말해줬습니다. 제가 저질렀던 모든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서라고.”

 

  은지가 비틀거리며 문으로 향했다. 그녀의 몸은 위험한 곳으로 떠나는 사람이라기엔 생기가 없었다. 그녀의 몰골도 봄이 못지 않게 초췌했고, 봄이도 그녀가 떠나는 것을 말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이거라도 가져가십시오.”

 

  삼촌이 은지에게 흰 뱃지를 내밀었다.

 

  “자경단 증표입니다. 나중에라도 혹여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저희를 찾아오십시오. 그리고 이걸 보여주시면 분명히 저희 자경단원들이 도움을 드릴 겁니다.”

 

  “내 동료를 눈앞에서 죽여버린 자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증표라...... 재미있네요.”

 

  은지는 그가 건넨 뱃지를 만지작거리며 돌려보더니 재킷 속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배낭을 챙기고 총수실에서 나갈 채비를 했다. 나가기 전 그녀가 마지막으로 봄이를 돌아보았다.

 

  “봄이야, 여기 남을 거지?”

 

  봄이가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은지가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래, 그렇겠지. 나와 다르게 너는 목적을 이뤘으니까 말이야.”

 

  봄이는 은지의 말이 묘하게 자신을 시기하는 것처럼 들렸다. 하지만 봄이는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아직 봄이는 가족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삼촌에게 가족의 행방을 묻는다고 해도 삼촌이 그것을 알고 있을지 장담할 수는 없었다. 만약 모른다고 하면?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봄이 자신도 어렴풋한 꿈 속에서나 얼굴이 지워진 사람으로 기억해내는 엄마와 아빠를 삼촌이라고 확실히 기억해낼 수 있을까? 어떻게 되든 간에 봄이는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이 나오면 다시 직접 가족을 찾아 나설 예정이었다. 물론 어느 때와 같이 계획같은 건 손톱만큼도 없었다.

 

  “.....짧게나마 함께 할 수 있어서 기뻤어. 그럼 안녕, 봄이야.”

 

  은지가 문을 열고 총수실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녀는 한동안 발을 떼지 못했다.

 

  “은지 언니.”

 

  봄이가 마지막으로 은지를 불렀다. 그녀의 반응은 없었다. 봄이가 한번 더 외쳤지만 이미 그녀는 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봄이 언니, 저 언니는 누구예요?”

 

  겨울이 볼을 우물거리며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방황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확고한 자신만의 길을 걷는, 우리랑 별반 다르지 않은 생존자일 뿐이야.”

 

  “그게 무슨 뜻이에요?”

 

 봄이는 그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겨울의 어깨를 토닥여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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