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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윤슬
작가 : 차운
작품등록일 : 2019.10.5

보통 청춘이라 하면 찬란한 혹은 빛나는 모습을 떠올린다. 마치 햇빛 또는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저기 저 앞 바다의 윤슬처럼. 하지만 현실에서의 청춘은 그리 반짝이지도 찬란하지도 않다. 되려 일찍 메말라 버린 꽃잎들처럼 생명력을 잃거나 무기력한 모습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버린 혹은 버려진 청춘들은 다들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소설 윤슬을 통해 여러 청춘들의 얼굴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 한없이 슬픈 얼굴들을...

 
제15화 불량품
작성일 : 19-11-04 16:25     조회 : 210     추천 : 1     분량 : 15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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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8시.

 어제 저녁에 은희의 집에 도착한 나희는 아직 잠들어 있다. 은희는 나희가 아침으로 먹을 간단한 밥상을 차려 신문지로 덮어놓고 노란 포스트잇에 메모를 하고 나간다. 포스트잇엔 이런 글이 적혀있다. ‘밥 챙겨먹고 설거지만 좀 부탁해. 노트북은 내 방 책상위에 있어. 암호는 1004야.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부엌 서랍이랑 냉장고 뒤져서 먹어도 돼. 갔다 올게. 필요한 거 있으면 문자해줘.’

 나희는 은희가 남기고 간 메모지를 읽고 반으로 접어 쓰레기통에 버린다. 그리고는 은희가 차려 놓고 간 된장찌개와 계란말이를 먹고 설거지를 해 놓는다. 나희는 은희의 배려에 고마움을 느끼며 빙긋이 미소 짓는다. 은희의 방에 들어가 책상 위 노트북을 켜고 노트북을 충전시키는 코드를 꼽고 책상 옆 침대에 앉아 베개를 하나 받치고 그 위에 노트북을 올려놓는다. 나희는 글을 쓸 때 거의 침대위에서 편안한 자세로 쓴다. 책상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자세가 불편해서 오랫동안 집중을 못하기도 하고 왠지 일을 한다는 기분이 들어서 책상에서 작업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침대에서 글을 쓰다가 막힐 땐 편안한 자세로 멍하니 있기도 하고 노트북을 책상위로 치우고 잠깐 눈을 감았다가 다시 글을 쓰기도 한다. 나희의 오래된 습관인 것이다. 나희는 새하얀 한글 창을 바라본다. 이 화면을 볼 때 이상한 무력감에 싸이기도 하고 또 얼른 뭔가를 써 넣고 싶다는 의욕에 차기도 한다. 마치 화가들이 새하얀 캔버스를 바라 볼때와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나희는 여행용 가방에서 오래된 연습장 하나를 꺼낸다. 그 곳엔 생각의 파편들이 이런 저런 단어들로 마치 낙서인양 적혀있다. 그 곳에서 언젠가 시집을 보다 따로 적어놓았던 시구를 하나 발견한다. 랭보의 시다. 소설의 첫 문장으로 적당하다는 생각에 타이핑을 해본다.

 오, 나의 선이여! 아름다움이여! 난 머뭇거리지 않는 잔인한 팡파레!

 동화 같은 받침대여! 처음으로, 깜짝 놀랄 작품과 멋진 육체를 위해, 만세!

 그건 아이 웃음으로 시작해 아이 웃음으로 끝나리.

 ― A.랭보『취기의 아침』

 그리고는 한동안 그 글자들을 가만히 노려본다. 나희는 서서히 이야기의 세계로 빠져든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사각대는 내 연필 소리에 한 음도 빠짐없이 귀 기울여야 한다. 나는 단순한 의미의 글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유언장이다. 앞으로 10년 후. 서른일곱 여름.(아마도 가을이 오기 전이겠지. 코스모스를 본다면 조금 더 살고 싶어질지도 몰라.)

 나는 죽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했으므로 나 자신조차 ‘나’라는 ‘生’ 의 의미를 몰랐으므로 나는 내가 가진 유일한 카드를 내민다.

 죽음.

  싸구려 호프집에서 내가 비밀 유언장 얘길 농담마냥 꺼내자 나의 친구는

 “이번엔 또 누구 흉내를 내는 거야? 귀엽다 참.”이라며 내게 크나큰 모욕감을 주었다.(이게 평생을 거짓말의 거짓말로 살아온 ‘業’이란 것인가.)

 나는 더러워진 기분으로 김빠진 맥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키고는 “그래봐야 넌 10년 뒤에도 여전히 대학로 소극장이나 기웃대면서 이 엿 같은 세상에 잘난 네 이름 한번 못 떨치고 어느 날 갑자기-비운의 천재작가 故유희의 지인인 연극배우 A씨는 10년 전 농담이라 웃어넘긴 일이 현실이 될지 몰랐다며 비통한 눈물을 흘렸습니다.-란 조간 신문기사나 보겠지.”라며 검푸른 독을 내뿜었다.(아! 그래도 왠지 그럴싸한걸..)

 정말로 이 세상에 ‘죽음’이란 것을 흉내 내는 인간이 존재한다면 서울의 밤은 유흥가에서 흘러나오는 싸구려 소음들 대신 삼류 연극배우들의 시체들로 장사진을 칠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건 이렇게 스스로(마침내)죽음을 선택해버리고 나자 왠지 모르게 우울한 감상보단 따뜻함, 시작!,추억 이라는 사뭇 정감어린 말들이 내 가슴속으로 슬그머니 스미는 것이다.

 ‘사람’이란 것은 참으로 괴상하구나.

 헛소리는 집어 치우고 비밀 유언장 이야기로 돌아가자!(그대들의 편의를 위해 한 가지 일러두자면, 이 유언장은 본인의 단편적인 기억을 꺼낸다―허구의 형식을 빌린다―진실도 거짓도 아닌 이야기들로 구성된다.)

 ? 편지 한 장만 덜렁 남겨두고 ‘生’의 마침표를 찍는 건 너무 하니까.

 아님 그뿐이고.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므로 받아들이는 건 그대들의 몫.

 단 한 가지.

 이 가엾은 불량품을 이용해 자기연민에 싸여‘위선’떨지 말란 거야!

 

 

 꿀벌(honey bee)

 

 처음부터 ‘나’는 없었다. 내가 ‘초록’을 ‘푸르다’ 불렀을 적부터.

 모든 것은 다 꾸며지고 만들어졌다. 나는 off가 닳아빠진 기계. 글을 쓰는 기계. 고장 난 기계.

 살 앞에 ‘6’이라는 저주의 숫자가 붙었을 때부터 나는 세상을 보았다. 세상의 ‘黑’을 보았다. 그 곳엔 저주받은 아이가, 소년이 삐걱거리며 서 있었다. (떨리는 오른손엔 자그마한 나이프.)

 추웠다. 그리고 오렌지를 한 입 베어 문 듯 아름다운 해질녘의 하늘. 소년은 떨고 있었다. 희번덕이는 눈빛을 머금고 달동네 한 家具의 녹슨 문 앞에.

 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제발’이라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제발. 제발. 제발. 제발. 내가 아니길. 내 옆에 코 흘리고 있는 저 못생긴 계집애이길...

 얼른 땅으로 시선을 거두었다. 개미 한 마리가 느릿느릿 기어가고 있었다.

 ‘차라리 저 개미가 되어버렸으면’하고. 바랬다. 눈은 차디찬 바닥에 있는데 모든 감각이 오른편으로 쏠려있어 어지러웠다.

 끼익- 끼익-

 녹슨 철문이 소년의 불안을 말해주었다.

 끼-익.

 숨이 멎었다. 숨을 이대로 참고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할. 제발. 제발.

 순간 휘익-

 하고 바람이 일었다. 멍해진 머리 위로 새까만 원피스 자락이 보였다. 옆에 있던 못난이가 으앙-하고 울었다. 미웠다. 아니 저주했다. 정작 울고 싶은 건 난데.

 간질간질 더럽혀진 나비가 벌어진 다리 사이를 맴돌다 사뿐 내려앉았다.

 으앙-

 이번엔 나다. 나비인 줄 알았는데 ‘벌’이였다. 몸으로 느껴지는 아픔은 없었다. 다만 오른쪽 허벅지에서 빨간 물감이 쉼표도 없이 터져 나왔다. 내 울음소리에 놀랐던지 ‘벌’은 절뚝거리는(힘이 풀린 듯 했다. 벌은 침을 한번 쏘고 나면 힘을 못 쓴다는 걸 이때 처음 알았다)다리를 ‘간절함’으로 동여 메고 재빨리 도망쳤다. 그렇게 한참을 두 여자아이가 울고 있었다.

 한 아이는 못 볼꼴을 봐서.

 한 아이는 슬퍼서 울었다.

 

 

 

 혁명가

 

 지나친 솔직함은 때때로 ‘결투’를 부른다.

  사건은 5학년 1반 담임선생이라는 여자가 칠칠치 못하게 우리들의 은밀한 일기장을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교탁에 얹어 놓음으로써 뻥! 하고 터졌다.

 “나는 남자아이들이 너무 싫다! 시도 때도 없이 고함을 빽빽 지르고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며 가씨나(여자애들 이라고 썼다. 빌어먹을 새끼.)들을 괴롭히는 꼴은 그야말로 최악이다. 도무지 너무너무 시끄러워서 미칠 것만 같다!

 저 녀석들의 혓바닥을 꺼내 가위로 싹-뚝 잘라 삐고(버리고..후..)싶다!”

 아씨. 라고 낮게 중얼거렸다. 왜! 마흔 두 권의 일기장에서 하필 내 일기장이란 말인가...나는. 정말. 조용히 지내고 싶었다.

 순간 교실에 있던 몇몇 남자아이들이 두 눈을 반짝이며 너나 할 것 없이 “누군데?,미친년, 눈데눈데?, 낄낄낄...”등등 주로 어미에 물음표를 단 말을 촉새마냥 쫑알거렸다. 나는 속으로 부디 이 순간만 저 요란하고 떠들썩한 놈에게 묵언 수행을 하는 구도자의 영혼이 내리길 빌었다.

 "유.희!”

 순간 모든 시선이 내 얼굴로 파리 떼처럼 들러붙었다. 그리고는 우리 학년에서 일명 ‘짱’이라는 녀석이 대뜸 나에게 다가와선 백태가 잔뜩 낀 허연 혓바닥을

 내밀며 “야! 짤라바라! 자! 자!”하는 것이다.

 나는 무관심한척 잠자코 있다 녀석의 ‘멱살잡이’ 도발에 화가 머리 꼭지까지 차올라 “아씨. 갖고 온나! 가위 갖고 온나! 짤라 줄께!!!”하며 마침내 소리를 빽 지르고는 그대로 놈의 뒷통수를 ‘퍽’하고 내리쳤다. 예상치 못한 나의 반격에 쭉 찢어진 눈이 별안간 똥그래지더니 곧장 죽이기라도 할 듯 “아씨. 이게 미쳤나. 죽을래?”하며 발정 난 강아지 마냥 씩씩 거렸다. 그렇게 약 53초가량을 달려들듯 말듯 시커먼 팔을 뒤로 크게 휘젓고 왔다 갔다 하며 과장된 제스처만 취하더니 결국 애꿎은 책상다리만 발로 탁. 쿠당탕. 차며 끝내 한다는 말이 “야이씨. 니 여자라서 봐주는 줄 알아라. 후..”하고 시뻘게진 얼굴로 홱-하고 돌아서 교실 뒷문으로 나가 버리는 게 아닌가. 나는 순간 맥이 풀려 ‘다행이다..’안심하며 멍하니 서있는데 어디선가 퉁퉁퉁퉁-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 정신을 차려보니 우리 반 뚱수니―키도 큰―영아가 “와~ 니 찍이네!”하며 내 오른쪽 어깨를 툭툭(격려, 혹은 경외심이 담긴 터치였다.)치는 게 아닌가. 그와 동시에 침묵에 잠겨있던 교실이 일순간 여자아이들의 흥분된 목소리로 들 뜬 리듬을 타며 “유희!유희!유희!...” 여기저기서 그 예쁜 눈들을 반짝이며 나를 떠받들어 주는데 그 우상숭배와 같은 외침에 들떠서는(마치 자신이 체 게바라쯤이나 된 냥)그만“저거 분명 마마보이다! 여자라서 봐준 단다!”기세 좋게 허풍을 떨고 만 것이다.

 최초의 허풍. 아마 이때부터 시작됐다지. 12살 유희의 ‘언어유희’가.

 

 

 침묵의 詩

 

 2002년 6월 29일 날씨: 구름 낀 하늘.

 화가가 되고 싶다.

 술집이란 술집은 온통 人山人海. 일명 ‘붉은악마’들로 꽉 차 한 여름 열기보다 더 뜨거운 혈기로 그야말로 대한민국은 흥분의 도가니탕이다. 그 속에서 내 가슴속은 자다가 봉창 두드린다는 말이 딱 떨어질 만큼의 마음이 깊은 곳에서 꿈틀 거렸다. 화가가 되고 싶다고.

 태어나 한번도 ‘애국심’이란 감정을 느껴 본적이 없는 나로서는 4년마다 어김없이 누런 양은 냄비마냥 팔팔 끓어오르는 모두가 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애국심도 없는 놈=無개념 ’ 취급당하는 ‘한국’이라는 조그만 나라의 민족성이 그저 신기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다시 돌아가자면 나는 화가가 되고 싶다! 엄마에게 이 기쁜?! 소식을 어서 알려줘야지. 근데 그림을 제대로 배우려면 예고를 가야하는 건가?

 아아- 모르겠다. 난 그냥 평생 그리고 싶어. 아름다움을.

 일단 오늘은 책 좀 보다 자고 조만간 말해보자.

 나는 그림을 배울 수 있는 예술 고등학교를 가고 싶다고. 너무 설레서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난 화가가 될꺼야!

 

 2002년 7월 1일 날씨: 흐림-흐림-흐림 비-비-비-비.

 내 부모란 인간들은 아들, 아들, 아들 온통 아들밖에 모르는 바보 얼간이 들이다.

 진짜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나고 그냥 가슴이 벌에 쏘인 마냥 너무 아프다.

 오늘 엄마란 작자에게 태어나 처음으로 나의 ‘꿈’을 말해주었다.

 화가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그림 그리는 걸 배울 수 있는 예고를 가고 싶다고. 그런데 돌아온 말은 “......(대뜸 무척 흥분하며)예고는 무슨 예고고! 네 오빠 운동하는데 돈이 얼마나 많이 들어가는지 아나! 함부로 쓸데없는 생각(나의 꿈)하지 말고 아빠한텐 입도 뻥긋 하지마라. 난리 난다. 알겠나?”

 나는 어릴 때부터 소리에 무척 예민해서 순간 죄인 마냥 주눅이 들어―시퍼렇게 멍든 가슴―알았다고 말했다. 사실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왜 당신이 화를 내는 건지 내가 뭘 잘못 한 건지 아무것도 모르겠는데 당장에 집안에 큰 싸움이라도 날 듯 윽박을 지르고 협박조로 몰아붙이는 당신 땜에 어쩔 수 없이 , 정말 어쩔 수 없이 ‘빈말’을 공허하게 읊었을 뿐인데.

 나는 화가가.. 되고 싶다...

 

 

 2003년 4월 5일 날씨: 비. 구름 빛은 보라.

 요즘 내 주위로 이상한 기운이 돌고 있다. 반 아이들은 하나같이 나를 피하고 내가 지나갈 때 마다 킥킥대거나 귓속말로 수근 거린다. 이상한 소문이 도는 듯 했다.

 아.. 이렇게 외톨이가 되는 거구나...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문학동아리(나는 결국 예고대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소도시의 여고로 진학했다. 그리고 그림에 대한 욕구를 대신 할 방편으로 글쓰기를 택했다. 우리 동아리에선 자작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문학작품에 대해 토론하기도 한다. 그리고 연합동아리 특성상 근처의 남고아이들과 만나 전체 모임을 가진다.)

 친구들과 놀며 나름 즐거운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문이란 것이 날이 갈수록(어제보단 오늘, 오늘보단 내일)더 심각한 빛을 띠어갔다. 내 ‘침묵’에 의해 그 형체 없는 소문들은 반 아이들을 넘어 급기야 1학년 전체에서 과반수의 아이들이 내가 복도를 지나갈 때 마다 수근 거릴 정도로 커진 것이다.

 나는 도대체 왜 내가 일명 ‘따돌림’의 대상이 된 건지 아무런 이유도 모른 채 하루하루 그야말로 지옥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현재 나는 시골집에서 떨어져 나와 할머니 혼자 거주하는 방이 남아도는 아파트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데 그나마 같은 학교를 다니는 친한 언니가(1살 많은)있어 하교 후에는 그럭저럭 밝은 생활을 가장 할 수 있지만 타고난 기질 상 내 마음을 남에게 속 시원히 말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이 일을 발설하지 않고 혼자만의 어두운 동굴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나는 지금 오로지 혼자이다. 외톨이.

 

 2003년 5월 18일 날씨: ?

 알아냈다. 빌어먹을 소문의 정체를.

 그건..그건 ... 그냥 ‘장난’에서 비롯된 것이다. 장난.

 내 이름과도 닮아있는 ‘장난’이라는 말이 이토록 잔인한 것인지 미처 몰랐다. 구린내 나는 풍문에 더는 아니다 싶어 담임선생이라는 여자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우리 반에 ‘지영’이라는 아이가 저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퍼뜨려 곤란을 겪고 있습니다. 선생님. 그 아이와 차분히 얘기해 볼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라고.

 그런데 이 여자가 교무실로 우리를 불러 선 지영이란 아이와 죽이 맞아 한순간에 나를 지나치게 예민한 ‘이상한 아이’로 분위기를 몰아가며 하하 호호 너무나도 가볍게 웃고 떠드는 것이다. 그리고 지영이년은 덜렁 보내버리고 나더러 한다는 말이 “유희야.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 마. 지영인 네가 순진하고 귀여워서 그냥 재미로 그런 거야. 앞으론 아이들과 잘 지내렴. 선생님도 잘 얘기했으니.”

 뭘? 도대체 뭘 자알 얘기했단 말인가. 선생이란 작자들은 하나같이 약아빠졌다. 교사도 영악한 학생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비겁하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더는 갈 곳이 없다. 막다른 골목이다. 어찌됐건 일이 더럽게 꼬여버렸지만 방학 때 까지만 참자. 참아보자.

 

 2003년 7월 22일 날씨: 비. 하늘은 보랏빛

 방학을 한지 일주일이 지났다. 자살소동(자취방에서 손목을 그으려 했다.)이후 자유’라는 이름하에 끝없는 ‘무관심’으로 일관하던 부모라는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나의 행동에 놀랐던지 시골집으로 나를 데리고 내려와 약을 먹이며 지내고 있다.

 막다른 곳에서. 어두운 동굴 속에서 혼자 소리치던 나는 급기야 어느 날 갑자기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래도 이렇게 일기라도 써서 ‘말’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자신의 딸이 상처받고 찢긴 것이 분하고 부끄러웠던지 아버지라는 자는 고작 한다는 말이 “그런 나쁜 년이 다 있나! 확 가서 죽일까! 니도 멍청하게 있지 말고 한 대 걷어 차면되지. 바보같이 당하고 있나!”

 대단한 부성애다. 그렇게 자식 걱정이 되면 왜 ‘네 꿈은 뭐야?,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따위의 초등 교과서에도 나올법한 질문은 단 한 번도 안했는지. 왜 제 분에 못 이겨 미쳐 날뛰는 건지. 아무래도 신경안정제는 내가 아니라 아버지란 사람이 먹어야 할 듯하다. 아무튼 요즘 태어나 처음 받아보는 과분한 관심을 부모들로부터 받고 있어서 조금 역겨우면서도 오히려 나보다 그들이 불쌍하게 여겨질 정도다. 그래도 그나마 집이 바다가 있는 마을에 있다는 것이 큰 위로가 된다. 바닷가를 산책하며 파도소리를 듣는 것이 요즘의 주된 활동이자 일상인데 오늘은 문학동아리의 에이스인( 다른 사람들이 그랬어. 정말!)내가 바다를 바라보다 ‘詩’를 한편 지어 보았다.

 

 <물거품>

 망설임 없이 부서져 내리고 싶었다.

 잔잔한 물결 이는 바다에 까만 돌멩이 하나 주워 던진다.

 퐁당

 포-옹당

 이 정도로는 일어날 리 없다.

 성 낼일 없다.

 안간힘을 써서 큰 바윗돌 하나

 푸른 얼굴에 들이 받았다.

 

 성 내기는 커녕 그 짙은 푸름이

 온 몸을 감싸 눕히려 든다.

 달고 몽롱한 소리로 귓불을 훔친다.

 

 이대로라면 가라앉을

 취할

 잠들어 버릴

 

 묵직해진 마음 털어내고

 언덕위로 올랐다.

 

 피투성이가 된 두 귀를 막고

 날아오른다.

 

 부드러운 바람.

 몽실 구름.

 찔레꽃 향기.

 

 깊고 푸른 바다를

 산호 빛으로 물들인다.

 

 

 조 우

 우연.

 우연 이였다. 그와 나의 만남은.

 그땐 막 휴학계를 내고 새로운 ‘놀 거리’를 찾고 있던 중이였다. 심심했다. 매일 밤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꽤 그럴싸한 것을 발견했다.

 배우.

 정확히 말하면 배우 지망생 흉내 내기!

 꽤나 흥미로운 그림이 그려져 나는 곧바로 사뭇 진지한 얼굴을 하고 엄마에게 운을 띄웠다. 일종의 복수.

 “엄마. 나 배우가 되고 싶어. 어릴 때부터 정말 원했는데(거짓말.) 그동안 용기가 없어서 말 못했거든. 나 진심이야. 내 룸메이트가 서울 사는데 당분간은 친구 집에서 신세 좀 질 생각이야.”

 내가 너무나도 진지한 얼굴로 나름 구체적인 계획까지 세워서 말하니 사뭇 감동하여 진심으로 걱정이라도 하는 냥 “아빠가 알면 난리 날 텐데.”(이 집 사람들은 내가 뭘 한다고만 하면 일단 막고 본다. 뭐, 이번 건 일종의 복수니 나도 할 말은 없지. 긁적긁적.)하자 나는 자신 만만한 눈빛으로 “그건 걱정 마. 내가 쓴 편지 보여주면 분명 아빠도 반대 못해.” 라고 말했다. 그러자 멍청하고 무책임한 눈으로 “그래 하고 싶은 건 해야지.”

 그걸 아는 사람이 여태 나한테 그랬어? 라고 순간 발끈할 하려다 곧 착한 딸 가면을 얼른 뒤집어쓰고는 “이해해줘서 고마워. 엄마.”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母女’의 모습인가!

 그렇게 ‘원숭이 흉내 내기’ 계획이 성공하고 나는 상경을 앞두고 고등학교 단짝 친구를 만나 싸구려 호프집에서 기쁨의 맥주를 기쁘게 들이 키고 있는데 란(단짝의 애칭이다.)이 자기가 친구 놈 한명을 불렀는데 그 친구란 놈이 다른 친구 한명을 더 데리고 나올지도 모르겠다는 거였다. 나는 뭐 어차피 둘이든 넷이든 별 상관없다 여겨 “그래?”라며 무의식적으로 짧게 반응하곤 오로지 나의 원숭이 흉내 놀이 생각으로 한창 공상에 빠져 있었다.

 그때 그가 들어왔다. 란의 친구.(정확히 말하면 한 다리 건너)

 눈이 마주쳤을 때 느꼈다. 이 녀석은 악마의 눈을 가진 얼간이구나 하고.

 이런 ‘류’의 예상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는 그야말로 사나운 눈을 가진 얼간이였다. 그리고 그런 얼간이답게 ‘善人’의 눈을 가진 악마 ‘유희’의 덫에 어김없이 걸려들었다. 술자리 내내 그는 내게서 눈을 못 떼고 나서서 구식 매너 남 흉내를 내며 접근해왔다. 나는 그 모양이 썩 재밌고 우스워 적당히 받아주었다. 그런데 그것이 사단이었다. 나의 그 우유부단한(얼간이들은 대체로 눈치가 없다.)행동이 묘한 희망을 심어주어 그는 후에 상경한 나를 쫓아 서울에 방까지 구한 것이다.(아- 순진한 사람.)그리고 끈질기게 내 주변을 팅커벨 마냥 맴돌며 가난한 피터팬에게 먹을 것을 사바치고(나는 결코 먼저 요구 한 적이 없다.)신이 나선 놀이동산까지 데려가고 하다하다 “같이 살면 어때?”라는 게 아닌가. 마침 친구 집에 신세 지는 것도 미안하고 염치없기도 하던 찰나에 그만 충동적으로 “그럴까?”하니 그는 너무나 기뻐하는 소리로 까르르 웃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동거를 하게 되었다. 물론 어색하게 양반 흉내 내기 좋아하는 부모들에겐 애써 알리지 않았다.

 내 친구 란에게 이 소식을 전하자 조금 흥분한 듯 야단법석을 떨며 “그 애. 느낌별로야. 구려. 완전 재수 옴 붙었네!”라며 독설을 했지만 내 생각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악마는 나다. 구린 건 내 쪽이다. 재수 옴 붙은 건 내가 아니라 저 가엾은 얼간이니까.

  내게 세상은 ‘黑’.

 더럽고 추악하고 야비한 욕망으로 뒤덮인 암흑이다. 그래서 나는 시인과 화가를 사랑한다. 세상은 내게 너무나 더럽고 추하게 느껴져 나는 ‘아름다움’을 끝없이 갈망하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아직 ‘이 세상은 아름답다. 살만한 가치가 있다 ’말하는 사람들을 뜯어 말릴 생각은 없다. 그것이 그들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망각’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니까. 어쨌든 나는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인 것이다. 검고 악한 것만을 더 강하게 끌어당기는. 그리고 ‘어둠’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기어코 붙잡아 망가뜨리는(악마도 혼자는 외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얼간이 짓에 도취돼 날로 미쳐갔고 급기야는 광적인 집착을 보이고 마침내 나의 꿈의(원숭이 흉내)후원자가 되기까지 자청하는 것이었다. 그 쯤 되자 나는 재미삼아 놀던 이 얼간이의 바보짓에 그만 질려버려 ‘헤어지자’는 말이 나오게끔 그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비겁함은 우리들의 무기)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말했다. B.I.N.G.O !

 “헤어지자.”그렇게 2개월가량의 짧은 동거가 끝이 났다. 도대체 이게 무슨 바보짓이냐며 울화통이 터지겠지? 그래서 덧붙이자면 교훈.

 그래 교훈이다. 이런 미련한 연애에도 교훈은 있다.

 (귀를 살짝 잡아당기며 속삭인다.) “잘 들어. 너한테만 말해줄게. 사람을 사랑한다는 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시에 그 어떤 바보짓의 바보짓보다 어리석은 일인거야.”

 

 episode 1.

 악몽

 

 후미진 골목에 있었다. 흑연 가루처럼 검은 건물 창 사이로 무수한 별빛 같은 빛들이 빠져나온다.

 타박-타박-

 안으로 발자국을 옮기니 마치 마약 벌에 쏘인 듯 찬란한 쾌락이 온몸에 퍼졌다.

 곡예를 하는 서커스단이 굽이진 이층계단을 가느다란 밧줄 하나로 가로지르고, 널뛰고 서빙 하는 사람들은 엉덩이를 씰룩, 쎌룩 리듬을 타고 와인 바에 앉은 여인은 너무나 아름답고. 커피!

 카페인 방울 카페 안 곳곳에 터져 퍼져 물결 계단을 딛고 홀린 듯 발걸음을 옮기니 쌉쌀한, 달콤한 향이 코를 훔치고.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니!

 얼간이 마냥 감탄사를 분수처럼 뿜어내고 슬그머니 창가 구석으로 발을 옮겨 유리창을 바라..........................................................

 ..........................................................!

 날개 찢긴 파랑나비 피 흘리며 비틀리고 팔랑거리고

 검붉은 죄수복을 입은 인간도 짐승도 아닌 것들이 깔깔대거나 후앙후앙 울먹거리며

 날다 떨어지다 구름도 없는 꺼먼 도시를 취한 듯 배회하니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

 ‘나쁜 꿈을 꾸고 있구나...’

 굳어진 허벅다리를 꼬집어보니 “아이야-!”

 지옥문 초입에 들어선 것이다.

 

 episode 2.

 숨바꼭질

 

 “너희 모두는 내게 복종해야 한다. 만약 세 마리 이상 모여 멍청한 작당이라도 하는 날엔 이곳보다 더 아름다운 곳으로 데려 가지.

 경배하라. 찬양하라. 검은 누더기를 걸친 ‘蟲 人’들아.

 거인이 외치자 두려움에 한껏 쪼그라든 벌레의 몸과 사람의 얼굴을 가진 ‘충인’들이 “당신만이 나의 신. 대장이요. 오- 황금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신이시여. 오늘도 우리에게 넘치는 기쁨 되시니 이 어찌 감사하지 않으리.”

  이건 무슨 상황인가. 어리둥절하여 발걸음을 옮기려니 발이 없다. 다른 ‘충인’들을 보니 모두 제 각각으로 사람 얼굴에 지렁이의 몸, 또 사람 얼굴에 파리의 날개, 그 외에도 지네, 벼룩, 바퀴벌레, 무당벌레 등 이건 사람이라 불러야 할지 벌레라고 해야 할지 난감한 그야말로 ‘蟲’人들이 가시로 뱅 둘러쳐진 둥그런 광장 안에 모여 모두가 비굴한 모양으로(어딘가 비틀리고 취한 듯) 날고, 기고, 튀어 오르고 있는 것 아닌가. 그제 서야 이 기막힌 상황이 어느 정도 파악이 된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내 몸을 내려다보니 다리는 온데간데없고 대신에 반짝거리며 빛나는 날개가 달려 있는 것이다. 그나마 지렁이나 벼룩이 아닌 것에 감사하며 이 괴상한 곳에서 원인모를 불안감에 쫓기며 몸 숨길 곳을 찾아 날아다니는데 저 쪽 검은 풀 숲 한 구석에서 어떤 녀석이(나와 모습이 매우 닮은 마치 ‘팅커벨’을 연상시키는 충인 이었다.)대뜸 말을 걸어오는 것이다.

 "V, 이리로 와봐.(매우 조심스럽게)”

 나는 본능적으로 주변을 한번 살피고는 “나? 나 말이야?(마찬가지로 조심스럽게)”라고 물으니

 “그래. 너! 여기 너 말고 V가 또 있어? 얼른 와!”

 나는 갸우뚱하며 다가가

 “그게 내 이름이야? 그럼 니 이름은 뭐야? 보아하니 나랑 같은 種인거 같은데.”

 녀석은 매우 조심스럽게 주변을 다시 살피고는

 “너, 진짜 몰라서 하는 말이야? 아무튼 난 곧 심부름이 있어서 가야하니 간단히 설명해줄게. 우리 둘은 이곳에서 그분에게 선택받은 신의 요정들이야. 우리 모양새가 이렇게 아름다운 것도 다 그분의 은혜와 우리를 향한 특별한 사랑 덕분이지. 그 중에서도 너는 그분이 가장 신뢰하고 특별히 아끼는 아주 특별한 요정이지.”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가. 그래 모를 땐 무조건 묻는 게 최선.

 “내가 특별하다고? 왜?”

 내 말에 아름다운 요정은 고개를 갸웃하고는

 “너 오늘 정말 이상하다. 그걸 말이라고 해? 넌 이 곳 무리들 중에 가장 악하고 약삭빠르고 머리가 비상하거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선한 눈을 가졌지.”

 도무지 뭔 소린지 모르겠지만 녀석이 가버리기 전에 하나라도 더 알아내야해.

 “내가 왜 악하다는 거야? 그리고 이곳 분위기로 봐선 ‘善 眼’을 가졌다는 건

 나쁜 거 아냐?”라고 하자 정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요정은

 “바보 같은 소리 마. 넌 그 눈 덕분에 넌 여태껏 그럭저럭 지탄 받지 않고

 사람들을 속이면서 편히 산 주제에. 넌 그 선한 눈으로 사람도 죽였잖아. 그것도

 너의.(그때 요정의 날개가 자주 빛을 띠며 반짝거렸다.)

 아무튼 지금은 너무 바빠. 그분은 늦는걸 아주 싫어하셔. 얘기는 감시업무 끝

 나고 여기서 다시 하는 걸로 하자. 내일은 네 차례야. 알지? 그럼 난 먼저 간다.”

 그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빛을 내며 충인들 사이를 유유히 날아갔다. 그리고 남겨진

 나.

 ‘나? 내가 사람을 죽였다고?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없어.( 그렇게 믿고 싶어.)

 나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어. (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지.)

 나는 아무도 죽인 적 없다고!!!!!!!!!! ( 역시 최고야. 깜박 속을 뻔 했잖아.)

 미안해... 미안해.. 미안..미안해... 미안해..

 아가야!.....아가야..미안해 정말 나는 너를..( 죽였지.)’

 “그만!!!!!!!!!!!!!!!!!”

 그때 날개에서 팟-하고 전기가 흐르고 숨통을 비트는 듯 끔찍한 고통이 전해졌다.

 “V. 지금 당장 내 방으로 오거라. 나의 사랑스런 종아.”

 순간 정신이 번쩍 들어 얼른 영롱한 보랏빛을 띠며 그분에게로 이끌리듯 향했다.

 “왔구나.”

 나는 능숙한 몸짓으로 조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제가 왔습니다. 황금보다 귀하고 다이아몬드 보다 빛나는 신이시여. 그대의 충

 직한 종 그대 귀한 부름 받고 왔습니다.”

 그의 커다란 손끝에서 빙글빙글 맴 돌며 반짝거리자 그는 1,2초 정도 감시하는 눈

 빛을 보이더니 이내 나의 충성스런 마음을 대변하는 아름다운 날개 빛에 홀려서는

 “그래. 넌 오직 나의 종이야. 그런데 아까 p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네가

 너의 본분을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이지?”

 순간 배신감에 치를 떨며

 “그럴 리가 없지요. 저는 본디 이곳의 최고 감시자입니다. 그런 제가 그 귀한 사

 명감을 잊을 리가 없지요. p가 아직 어려서 뭔가 큰 착각을 한 것 같습니다. 아까

 전에도 만나서 내일의 감시플랜에 대해 얘길 나누었는걸요.”

 이걸로 됐다. 그분의 안색이 원래의 잿빛으로 돌아왔다.

 “그럼 그렇지. p 그 아인 충성심 하나는 봐줄만한데 너를 너무 시기하니까. 내가

 그런지도 모르고 이렇게 아름다운 요정에게 몹쓸 고통을 주었구나. 내가 사과 하

 마. 나의 사랑스런 종아.”

 그래. 그래야지. 이 녀석은 몸만 컸지. 머리는 화석이나 다름없다.

 “아닙니다. 다 저의 불찰 이지요. 제가 그 친구를 너무 신뢰했나 봅니다. 앞으로

 녀석을 좀 더 유심히 지켜보겠습니다. 그대 영원한 빛이시여.”

 거인의 방을 나와 곧 장 녀석과 약속한 검은 풀밭으로 갔다. 녀석이 조악한 얼

 굴로 내게 말했다.

 “왔어, 엄마?”

 검은 풀숲이 우리들의 붉고 푸른 보랏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점

 

 2013년 이분의 일 날씨: 비. 하늘은 보랏빛

 2003년.

 그로부터 정확히 10년 후.

 꿈은 화가. 취미는 글짓기이던 ‘이상한 아이’로 불리던 17살의 소녀는 10년을 여

 기 저기 떠돌다 정말로 이상한‘괴물’이 되어 돌아 왔습니다.

 오후 12시.

 자타공인 대한민국 최고의 병원이라는 모 대학병원 정신건강의학과의 대기실은

 세상의 ‘불량품’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순번 알림용 TV화면을 보니 제3

 호실. 담당교수: 나형석. 환자: 유 - (딴에 저걸 배려라고 이름 전체는 화면에 안

 뜨지요.)라고 오직 저만 알아볼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한참을 기다린 후라 저는 얘기 나눌 힘도 없고(어차피 의사와의 대화는 5분 될까

 말까하고 약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이 들러 돈만 내고 옵니다.)개념 없는 간호사

 들로 공기마저 무례한 이 공간에서 얼른 빠져나갈 궁리를 하며 담당 의사에게 매번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믿음을 줄 수 있을 만큼만 둘러댔지요. 그러면 이 도사

 의사선생은 제 기대에 그대로 부응하며(사실은 귀찮은 거지요.)많이 좋아 졌다.

 약을 조금 바꿔 볼 테니 이번엔 2달 후에 보자고 말합니다. 저는 그럼‘순한 양’

 마냥 “네~ 감사합니다.” 하고 밝게 너스레를 떨고나오면 그만입니다.

 네. 오늘도 변함없이 ‘감사’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갑자기 한 가지 의문이

 생겼습니다. 전철역으로 가던 도중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어 걸음을 멈추고 주변

 사람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았지요.

 멀리 내다보이는 카페 유리창 건너엔 오만상을 찌푸리고 마주 앉아 담배연기를

 연거푸 뿜어대는 남자와 여자. 어색한 웃음으로 시골에 있는 부모님과 통화하는

 풋내기 얼굴의 갓 상경한 듯 보이는 남자아이. 노점상에서 익숙하게 흥정하는 아줌

 마. 어리석은 낭만에 취해 서로의 허리를 똬리를 튼 뱀처럼 휘감고 다니는 어린

 연인들. 크고 거슬리는 톤으로 연극티켓을 홍보하는 일명 삐끼들.

 (좋게 말하면 티켓 아르바이트생들)지하철 계단 주변엔 다리 하나가 잘려나간 불

 행한 팔자를 타고난 불구자들까지.

 모두들 모습은 제 각각 인데 제 눈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와 닿아 맺히는 것

 입니다.

 

 soul city. 서울.

 이보다 더 모던 할 수 없을 만큼 매일매일 세련된 것들로 허물어지고 세워지는 서

 울의 번화한 거리는 눈부시게 번들거리고, 어딘가 나사가 하나 빠져나간 듯 비틀

 거리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습니다.

 바야흐로 ‘불량품’들의 춘추전국시대가 온 것이지요. 그리고 2013년의 절반가량

 을 남긴 지금. 괴물중의 괴물. 불량품 중의 불량품인 구제불능 놀기만 하는 유희

 는 오늘밤 자그만 방 한 구석에서(사실 너무 좁아 구석이랄 것도 없지요)낮게, 그

 리고 단호하게 외쳐 봅니다.

 “나는 그리고 쓰다 죽을 것이다.

  나는 평생 예술가로 살다 갈 것이다.

  나는 허세다.

  허구다!”

 

 나희는 쉴 틈 없이 5시간을 내리 글을 썼다. 처음부터 천천히 글을 읽어보고 제일 첫 장으로 돌아온다. 글자의 크기를 크게 하고 ‘불량품’이라고 끄적인다. 소설의 제목이 결정된다. 나희는 본인이 불과 5시간 만에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시켰다는것에 스스로도 놀란다. 왠지 모를 성취감에 기분이 좋아진다. 일주일정도 글을 쓰려고 했는데 불과 하루 만에 글이 완성이 돼서 어안이 벙벙하다. 이렇게 된 이상 태환이에게 말해놓은 여행을 진짜 떠나도 될 듯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할지 은희가 퇴근하기 전까지 생각을 해두자. 오늘은 은희랑 조촐한 파티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다. 나희는 휴대폰으로 은희에게 문자를 보낸다.

 ‘단편소설 하루 만에 완성! 들어올 때 맥주 넉넉히 사와! 음식은 맛있는 거 배달시켜 먹자!’

 문자를 보낸 뒤 노트북을 책상 위로 올려놓고 완성된 소설 파일을 자신의 이메일로 보낸다. 작업을 마친 뒤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은희의 침대에 드러누워 눈을 감는다. 낮잠을 잔다.

 
작가의 말
 

 보통 청춘이라 하면 찬란한 혹은 빛나는 모습을 떠올린다. 마치 햇빛 또는 달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저기 저 앞 바다의 윤슬처럼. 하지만 현실에서의 청춘은 그리 반짝이지도 찬란하지도 않다. 되려 일찍 메말라 버린 꽃잎들처럼 생명력을 잃거나 무기력한 모습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버린 혹은 버려진 청춘들은 다들 어디에 있는 것인가. 나는 그것이 궁금했다. 소설 윤슬을 통해 여러 청춘들의 얼굴을 그려보고 싶었다. 그 한없이 슬픈 얼굴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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