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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나의 자카르타
작가 : 히타히타
작품등록일 : 2019.9.2

도망치듯 떠나온 그곳에서 마법이 시작된다.

 
우린 약하니까
작성일 : 19-10-28 09:05     조회 : 297     추천 : 0     분량 : 4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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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서린.

 캐서린을 생각하면 유리잔이 떠오른다.

 흠집 하나 없이 매끄럽고, 긁히지 않을 만큼 단단하고, 불빛을 받으면 반짝이는 유리잔 말이다.

 하지만 그 유리잔은 균형을 잃는 순간 부서진다.

 캐서린은 단단하고 똑똑해 보이지만 약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를 그렇게 추억한다.

 

 <월드푸드> 방송이 나간 뒤 캐서린의 핸드폰에 불이 났다.

 식당으로 문의 전화가 오면 직원들이 캐서린의 연락처를 가르쳐 줬기 때문이다.

 

 전화의 발신자는 인도네시아 각지의 외식 관련 업체들이었다.

 캐서린은 그들의 동업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나는 캐서린이 거절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는 게 불만이었다.

 

 돌담은 지금 도약대에 올라섰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뛰어오를 수 없을지 모른다.

 물론 돌담이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움직이지 않는 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장인 나에게 설명은 해줘야 하는 것이다.

 

 “캐서린. 신중한 것도 정도가 있잖아.”

 “무슨 뜻이에요?”

 “좋은 제안이 들어오면 받아야지.”

 

 역시 캐서린은 치밀했다.

 내 말을 듣자마자 캐서린은 가방에서 프린트물을 꺼냈다.

 동업 제안을 한 외식업체와 유통업체들이 그 안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캐서린은 업체 이름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 설명했다.

 

 “여긴 신규 쇼핑몰이에요. 절대 들어가면 안 되는 거 미스뜨르도 알죠? 그리고 여긴 중국인이 운영하는 식당 체인이에요. 제가 여기 회장을 알아요. 레시피만 쏙 빼먹고 버릴 인간이죠. 또 여기는 경영이 잘 안 되는 곳이에요. 들어가면 우리만 괴로워요. 그리고...”

 “아, 알았어. 그만 해.”

 

 캐서린이 또 조용히 나를 불렀다.

 

 “미스뜨르.”

 “왜?”

 “우리는 기다려야 돼요.”

 “뭘?”

 “대어를 기다려야 돼요.”

 “어느 정도 커야 돼?”

 “몇 년 동안 경영이 잘 안 돼도 절대 안 흔들릴 곳. 아무 걱정 없이 돌담을 팍팍 밀어줄 그런 곳이요.”

 “그런 데가 나타날까?”

 “분명히 연락 올 거예요.”

 

 2월이 시작됐다.

 비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햇살에 데워진 축축한 공기가 한증막처럼 뿌리인다 골목을 감쌌다.

 

 돌담은 여전히 정신없었다.

 다행히 우리는 주방팀을 한명 더 채용했다.

 우리가 찾아낸 게 아니라 제 발로 걸어왔다.

 

 그날 아침 나는 배달된 숯 자루를 나르고 있었다.

 그릴기 앞에서 숯 한 자루를 떨어뜨려 앞섶에 숯가루가 잔뜩 묻었다.

 숯이란 놈은 한번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는다.

 목장갑을 벗어 연신 숯을 털어내고 있을 때 현관 유리창에 동그란 얼굴이 어른거렸다.

 

 체구가 아주 작은 청년이었다.

 밤송이처럼 깎은 머리는 작은 키에 어울리지 않게 컸다.

 나는 데시보드 위에 붙여 놓는 인형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다.

 그는 현관문 앞에 서서 영업 준비로 분주한 홀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청년이 놀라 뒤로 물러섰다.

 눈을 동그랗게 뜨니 더 인형처럼 보였다.

 

 “저는 마수드라고 해요.”

 “무슨 일이세요?”

 “여기서 일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꼬마 마수드.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내게 그는 언제나 꼬마 마수드다.

 

 “누가 소개해줬나요?”

 “아뇨. 방송에서 봤어요. 저는 여기서 꼭 일하고 싶습니다.”

 

 꼬마 마수드는 ‘꼭’이란 말에 힘을 주고 ‘여기서’라는 말에 또 한 번 힘을 주었다.

 나는 마음이 뿌듯해졌다.

 직원을 구하기도 어려웠던 식당이, 직원이 찾아오는 식당으로 바뀌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이것저것 따지지도 않고 그를 안으로 들였다.

 

 꼬마 마수드는 실업고(SMK)에서 요리를 전공했다.

 줄리, 리리, 디디와 같은 스무 살이었다.

 요리의 기본을 알고 있는 데다 손이 빨라서 주방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자말 때문에 맘고생을 했던 인드라는, 마수드가 들어온 날부터 웃는 일이 잦아졌다.

 

 그런데 꼬마 마수드에겐 이상한 버릇이 있었다.

 어느 정도 친해지면 사극에나 나올 법한 고풍스런 인도네시아어로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수드의 표현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과장된 억양과 몸짓만 봐도 뭔가 괴상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리리는 마수드의 말투를 금세 따라했다.

 리리와 마수드는 죽이 잘 맞는 진정한 라이벌이었다.

 

 “리리 그대여. 그대의 왼쪽 뺨에 난 점은 점점 커져서 세계지도를 그리게 될 것이오.”

 “오호, 그렇소? 그런 것이오? 그럼 우리 자카르타 앞바다가 핏물이 될 때까지 싸워보는 건 어떻겠소?”

 

 우리는 이런 대화를 하루 종일 들어야 했다.

 그것만 빼면 꼬마 마수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자말이 나무늘보라면 마수드는 다람쥐였다.

 마수드는 온순한 자말을 놀리면서도 곧잘 도와주곤 했다.

 

 아침에 그릴기 숯통에 숯을 넣는 일은 자말의 몫이었다.

 자말이 예배라도 드리는 표정으로 숯을 하나하나 집어 숯통에 떨어뜨릴 때마다, 나는 제발 들이 부으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자말은 숯이 다이아몬드라도 되는 줄 아는 것 같았다.

 그 망할 것들이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수백만 년의 세월과 압력을 견뎌야 하는데도 말이다.

 

 자말이 오늘 안으로 못 끝내겠다 싶을 땐 꼭 꼬마 마수드가 나섰다.

 그는 자말 대신 숯을 부으며 말하곤 했다.

 

 “자말 형님의 손놀림은 언제 봐도 우아하기 그지없구려. 가루다의 날갯짓 같사옵니다.”

 

 2월 둘째 주, 점심장사를 막 끝냈을 때 캐서린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 캐서린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돼 있었다.

 

 “미스뜨르. 왔어요!”

 “누가 와?”

 “대어가 나타났다고요.”

 “얼마나 커?”

 “고래만큼 커요!”

 

 수요일 새벽 우리는 반둥으로 출발했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다.

 이렇게 화창한 하늘은 자카르타에 와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그것은 내게 작은 기적이었다.

 자카르타는 도로의 뿌연 스모그 위에 적도의 시퍼런 하늘을 감추고 있었다.

 나는 그날의 풍경을 수채화처럼 기억한다.

 캐서린과 함께 한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기 때문이다.

 

 운전석에 기사 노빨이 앉았다.

 화교를 싫어하는 그는 캐서린에게 짧은 아침 인사를 던지고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바띡을 입고 있었다.

 한번 입고 만다는 생각에 너무 싼 걸 샀는지 목깃이 뻣뻣해 가려웠다.

 캐서린은 바띡을 입은 내 모습을 보자마자 한숨을 쉬었다.

 

 “미스뜨르. 왜 인형 포장지 같은 걸 입고 있어요?”

 “그렇게 보기 안 좋아?”

 “중요한 자리니까 격식을 갖추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바띡을 입은 거야.”

 “좀 좋은 걸 샀어야죠.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딱 보면 알아요.”

 

 캐서린의 양장 역시 어울리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날을 위해 너무 엄숙한 것을 골랐는지 장례식 조문객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우리는 반둥행 똘(Tol)로 접어들었다.

 자카르타에서 반둥까지는 차로 3시간 거리지만, 도로가 막히면 몇 시간이 걸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새벽에 출발해야 했다.

 

 “쁘라위라는 사람이 그렇게 거물이야?”

 “거물들 위에 있는 거물이죠.”

 

 우리는 쁘라위 가문의 점심 초대를 받았다.

 쁘라위는 골카르당의 원로 정치인이자 기업가로, 자카르타 시내에만 복합쇼핑몰을 10개 이상 소유한 재벌이다.

 박 사장은 그가 외환위기 때 해외로 도피시킨 재산이 국내에 있는 재산보다 더 많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재벌들의 재산 도피는 국제적인 이슈가 되기도 했다.

 

 자카르타 최상위 부자들은 헬기를 자가용처럼 쓴다.

 도로 사정이 워낙 안 좋다보니 헬기로 목적지 근처까지 간 다음 차를 타는 게 편하기 때문이다.

 쁘라위는 바로 그런 ‘헬기를 타는 사람’이었다.

 

 “원래 집안에 그렇게 돈이 많았나?”

 “명문가 출신이기도 하고, 수하르토 때 장관을 지냈으니 한 재산 마련했겠죠.”

 

 독재자 수하르토는 인도네시아를 32년간 통치했다.

 그의 모든 악행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것이 부정 축재다.

 그에게 들러붙은 측근과 정치인 역시 국가의 재산을 야금야금 파먹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독재정권이 무너진 뒤에도 떵떵거리며 살았다.

 

 “그렇게 돈 많은 사람이 조무래기 한식당에 왜 관심을 갖지?”

 “쁘라위의 주력 사업이 쇼핑몰과 리조트에요. 요즘 한류가 유행이니까 사업장에 한식당 하나씩 놓고 싶었겠죠. 마침 돌담이 방송에 나오니까 딱 걸린 거예요.”

 “그런 일은 집사 시키면 되잖아.”

 “그럼 쁘라위가 나올 줄 알았어요? 우린 비서를 만나러 가는 거예요.”

 “쳇.”

 

 노빨이 차를 쁘르따미나 주유소에 정차시켰다.

 인도네시아 주유소에선 직원이 주유하는 동안 운전자가 주유기 앞에서 서서 눈금을 속이지 않는지 확인한다.

 노빨은 그 일을 엄숙히 수행했다.

 다른 운전자들이 설렁설렁 감시하는 척만 하는데 비해, 노빨은 주유기의 눈금이 인도네시아의 자존심이라도 되는 양 미동도 않고 노려봤다.

 나는 노빨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노빨은 미터기를 나노단위로 확인하는 걸까?”

 “참 특이한 사람이에요.”

 “근데 쁘라위 말이야, 우리가 잘 하는 걸까?”

 “무슨 소리에요?”

 “그래봤자 독재 잔당이잖아.”

 “미스뜨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캐서린이 나를 어린애 타이르듯 쳐다보고 있었다.

 

 “쁘라위 측근을 만나도 정치 얘긴 절대 하지 마세요.”

 “하고 싶지도 않아.”

 “지금은 민감한 시기에요. 올해 총선과 대선이 있다는 건 알죠? 쁘라위가 직접 출마하진 않겠지만 막후에서 움직일 거예요. 괜히 쓸데없는 말 꺼내면 망해요.”

 “안 한 다니까.”

 

 차가 다시 출발했다.

 캐서린은 안심이 안 되는지 나를 계속 타일렀다.

 

 “만나면 무조건 예, 예 하세요. 토 달지 말고.”

 “알았어.”

 “이건 우리 운명을 건 일이에요.”

 “우린 왜 이렇게 자주 운명을 걸어야 돼?”

 “우린 약하니까요.”

 

 캐서린은 운전석의 노빨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약하니까.”

 

 차가 막히기 시작했다.

 우리는 입을 다물었다.

 이 상태라면 반둥까지 네 시간 넘게 걸릴 것 같았다.

 캐서린이라는 기계 같은 사람과 침묵 속에 네 시간을 앉아 있는 건 숨 막히는 일이었다.

 캐서린이 갑자기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노빨이 알아듣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저 기사가 날 대하는 태도 봤죠? 우린 평생 그런 일을 당하고 살아요.”

 

 나는 놀랐다.

 캐서린이 처음으로 자기 속을 내비치고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똑똑함 뒤에 감추고 있는, 그 깨지기 쉬운 유리조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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