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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브리튼 던
작가 : 전Yeah
작품등록일 : 2019.10.8

블루튜더의 전사였던 요한은 레드튜더와 전쟁 준비 중 블루튜더가 레드튜더에 흡수되자 자신의 꿈을 포기한 채 탈단하여 외진 시골로 내려가게 된다. 조용히 인생을 마무리하려는 요한 앞에 아무라는 이상한 녀석이 나타나면서 그의 삶은 바뀌기 시작하는데...

 
03
작성일 : 19-10-23 00:04     조회 : 223     추천 : 0     분량 : 15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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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브리튼 던 마을과 인접한 숲은 넓은 규모를 자랑하지만 그렇게 촘촘하거나 울창하진 않다. 크고 작은 호수도 여럿 있고 위험한 영역만 조심한다면 마물이나 동물에게 습격 받을 일도 없기에 종종 산책을 하러 오는 사람들과 나무를 구하러 오는 마을 사람들도 있었다. 때문에 제법 평화로운 숲이라고 할 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다르다. 날씨가 점점 세차고 어둡게 변하는 지금, 숲은 점차 위험한 공간으로 변모한다.

 

  요한은 다급하게 비명이 들려온 쪽을 향해 뛰어간다. 보통 사람이라면 지쳐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겠지만 요한은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엄청난 속도로 숲을 가로질러 간다.

 

  희미한 비명, 그 얇디얇은 가느다란 실을 붙잡듯 소리의 방향에 온 신경을 곤두세운다. 그때, 멀리 호수가 보였고 그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겨우 찾아냈다고 생각한 요한은 레이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간다.

 

  “레이미!”

 

  요한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간 곳에는 캠프가 있었다. 그곳엔 털가죽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요한에게 이목이 집중된다.

 

  무슨 일인가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요한은 캠프 뒤 쪽으로 보이는 나무감옥에 시선이 간다. 그 안에는 어려보이는 아이들이 입에 재갈을 문 채로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끙끙거리고 있었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눈치를 챈 요한이 검을 빼든다. 마찬가지로 요한의 등장에 다들 무기를 빼들고 경계한다.

 

  “누구냐?”

 

  라고 말하는 남자의 손가락이 요한에 의해 잘려나간다. 다들 황급히 요한을 향해 공격한다. 화살 하나가 요한의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으나 요한은 가볍게 그걸 쳐냄과 동시에 자세를 낮춰 달려드는 두 사람의 발목을 벤다.

 

  “뭐냐? 무슨 일이야?”

 

  가장 큰 천막 안에서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가 뛰쳐나온다. 때를 놓치지 않고 요한은 그 남자에게로 달려간다. 두목은 당황하며 막아서라고 명령하지만 요한은 활을 든 여자의 손을 벤 후 단검을 든 남자의 어깨를 베고 그의 어깨를 밟으며 뛰어오른다.

 

  두목은 도끼를 들어 공중에서 공격하는 요한의 일격을 막아내기 위해 자세를 취하지만,

 

  쩡!

 

  거대한 울림이 퍼지더니 두목의 도끼가 부서지면서 그의 어깨 죽지에 검이 패여 나간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두목을 쓰러져 기절해버린다. 남아있는 인원들이 당황하는 사이 요한은 다시 뒤돌아 우물쭈물하는 남은 놈들도 깔끔하게 처리한다.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녀석이 바짓가랑이에 실례를 하며 살려달라고 빌지만 요한은 칼 손잡이로 녀석의 머리를 강타해 기절시킨다.

 

  나무감옥으로 향한 요한은 안을 살핀다. 안에는 말끔한 차림의 아이들도 있었지만 언제 씻었는지 모를 정도로 때가 묻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아이들도 있었다. 레이미의 이름을 부르자 한 곳에서 아등바등 거리는 한 소녀가 눈에 띈다. 요한은 물러서라는 손짓을 하더니 나무감옥을 베어낸다.

 

  아주 어려 보이는 금발을 한 벽안의 소녀에게서 재갈을 풀자 소녀는 깊은 숨을 고르더니 말한다.

 

  “우아씨, 죽는 줄 알았네!”

 

  예상외로 호탕한 말이 소녀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요한이 결박을 풀어주자 소녀는 손을 흔들어 보이며 말한다.

 

  “아저씨 감사감사요! 진짜 어떻게 되는 줄 알았어요!”

  “네가 레이미니? 어쩌다 이런…….”

  “일단 애들부터 풀어주고요. 다들 겁을 먹고 있으니 달래주는 게 우선이에요.”

 

  호탕한데다 침착하기까지. 어린아이처럼 보이지 않는 행동에 당황한 요한이었지만 레이미의 말이 맞아 나머지 아이들의 속박을 푼다.

 

  훌쩍이는 아이들을 향해 이제 괜찮다고 안심시키는 요한과 레이미였다. 요한은 그녀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묻자 레이미는 어린 남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초지종을 얘기한다.

 

  아이는 실버 벨이라는 꽃을 찾고 있었다고 한다. 주로 호수에서 자생했지만 숲에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기에 이 마을 아이들의 대장 격이며 이 숲 속의 지리를 훤히 알고 있는 레이미가 동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 호수에는 인신매매단이 몰래 자리를 잡고 있었다. 레이미와 이 아이가 제발로 굴러 들어온 셈이었다.

 

  그 외 아이들은 샤르코바는 물론 꽤나 멀리 있는 마을에서까지 잡혀 온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의 수는 12 명이었다. 울먹거리며 잔뜩 긴장한 아이들을 레이미가 다독거려 준다.

 

  “괜찮아! 이제 집에 갈 수 있어! 여기 있는 이 아저씨가 나쁜 새끼들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어 줬거든!”

 

  도저히 어린아이라고 볼 수 없는 입담이었지만 아이는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간다.

 

  “이 아저씨는 음, 어……. 그 블루투스가 GG치는 사람이랬어! 아빠가 엄청 강하고 쎄고 강한 사람이랬어! 그 사람이 우리를 구하러 온거라고! 자, 다들 만세를 외치자!”

 

  그러더니 아이들은 훌쩍거리면서 레이미를 따라 만세를 외친다. 갑자기 분위기 사이비종교가 된 상황이었지만 점차 애들이 기력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여 그대로 놔둔다.

 

  “나 그때 봤거든! 마차를 타고 어제 온 아저씨지? 촌장님이 말해줬어! 어디에 꽤 높으신 양반이니까 우리가 발이랑 손을 싹싹 빌어먹을 해야 된다고. 그게 닳아야 우리 목숨이 보전된다고 했던가? 암튼 엄청 강하니까 잘 보이면 앞으로 인생 필거라고 했어!”

 

  아무래도 레이미는 그때 마차를 쫓아와 잔뜩 경계를 하면서 본 아이들 중 한 명 이었던 거 같다. 그나저나 촌장은 도대체 아이들한테 어떻게 이미지를 설명해 놓은 거야?

 

  레이미와 아이들의 건강상태는 좀 의심이 되지만 일단 다들 무사한 상황. 요한은 아이들의 상태를 확인하다가 재빨리 검을 빼들고 뒤를 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달려드는 두목의 손을 예리하게 베어버린다. 두목이 들고 있던 단검을 놓치며 쓰러지자 그 뒤에 요한과 동시에 두목의 등을 벤 아무가 시야에 들어온다.

 

  “오, 방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도와주려고 했는데…….”

  “뒤에서 급습당하는 거는 제법 있는 일이라.”

 

  아무가 칼에 묻은 피를 털어낸다. 요한은 아무를 보며 이 녀석 심상찮은 놈이라며 경계한다. 그 때 레이미가 갑자기 성질을 내며 아무에게 달려가 강렬한 로우킥을 찬다.

 

  “멍청한 부하 같으니! 이런 일이 생기면 당장 튀어 나왔어야지!”

  “아얏! 튀어 온 거거든! 대장이 마음대로 숲으로 들어가니까 이런 일이 생긴 거잖아!”

  “알반이 꽃이 필요하대서 같이 가준 거야!”

  “그럼 같이 가는 게 아니라 말렸어야지!”

  “엄마의 생일 선물이라는데 어떻게 그래!”

 

  그러면서 레이미는 한 번 더 아무의 종아리를 걷어찬다. 요한은 다시 뒤를 돌아 아이들에게 많이 놀랐겠지만 이젠 괜찮다고 말한다. 아이들은 요한이 보여준 반격에 놀라면서도 한 편으로는 안심이 되는 듯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는 뒤의 아이들과 요한에게 자기를 따라오라고 한다.

 

  “당장 쏟아질 태세야. 일단은 빨리 마을로 돌아가자.”

 

  아무가 앞장서고 요한이 후미를 따르면서 이동한다. 레이미는 계속 아무에게 쫑알쫑알 혼을 내고 있었다. 아무는 그런 레이미한테 꼼짝을 못하고 있었다. 그 철거머리 같은 녀석이 저렇게 기죽어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 깊은 곳에서 통쾌함이 밀려 올라온다.

 

  그러다 아무가 걸음을 멈춘다. 그는 레이미를 뒤로 밀며 잔뜩 경계를 한다. 무언가 위험이 감지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한도 같은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아이들이 떠는 것을 본 레이미는 아무의 눈치를 살피더니 다시 아이들을 안심시킨다.

 

  “괜찮아. 잠시 조심하는 거 뿐이니까. 다들 가만히 있어. 가만히 있으면 여기 있는 아저씨들이 무엇이 나오든 지켜 줄 거야.”

 

  요한은 저 레이미라는 아이의 놀라운 침착함에 혀를 내두른다. 저거 혹시 인생 2회차 아니야?

 

  그 때 앞에 무언가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난다.

 

  표범의 얼굴에 길고 위협적인 검치. 2m 가까이 되는 육중한 고릴라의 몸을 가진 맹수. 데마르칸이었다.

 

  데마르칸은 잔뜩 그르릉 소리를 내며 검치를 비롯해 이빨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특유의 그르릉 소리는 배고픔으로 인한 감정의 표출이었고 이때의 데마르칸은 굉장히 위험한 상태이다.

 

  데마르칸과 아무가 서로 대치하는 동안 아이들은 갑작스런 맹수의 등장으로 다시금 겁에 질렸다. 몇몇은 엄마 아빠를 부르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레이미가 괜찮다고 다독이지만 아이들의 불안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아무는 뒤의 상태가 심각해지는 걸 눈치 챘는지 빨리 데마르칸을 처치할 생각으로 칼을 뽑으려 한다.

 

  그때, 요한이 뒤에서 나와 데마르칸의 앞에 선다. 아무는 뭐라 말을 하려 했으나 요한이 풍기는 무거운 분위기에 잠시 접어둔다. 요한은 검도 쥐지 않은 채 데마르칸의 앞에 서서 가만히 그 맹수를 응시한다.

 

  데마르칸의 그르릉 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맹수는 당장이라도 달려들 태세로 손에 힘을 잔뜩 주어 튀어나갈 준비를 한다.

 

  그러나 요한은 가만히 서 있다. 당장 앞에서 맹수가 배고픔에 그르릉거림에도 그는 노려보는 것도 아닌 차가운 눈으로 계속 맹수와 눈을 마주치며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자 맹수는 점차 그르릉 소리를 줄이더니 잔뜩 드러낸 이빨을 집어넣는다. 그러면서 데마르칸은 차츰 뒤를 돌더니 이내 다시 숲속 저편으로 재빨리 사라져 버린다.

 

  데마르칸이 사라지자 요한은 다시 후미로 이동하려 했다. 그때 아무가 넌지시 무엇을 한 거냐며 신기해한다.

 

  “무언의 대화라도 나눴나?”

  “아니, 그냥 압박을 줬을 뿐이야. 기척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걸 넌지시 보여준 거지.”

  “어떤 기척?”

  “그냥 돌아가면 괜찮겠지만, 그대로 오겠다면 죽이겠다. 뭐, 이런? 맹수들은 의외로 본능에 충실해서 그런 기척을 사람보다 쉽게 읽거든.”

  “내가 볼 땐 그냥 엄청난 박력으로 위압을 준 것처럼 보이는데?”

 

  아무는 킬킬거리더니 다시금 말을 잇는다.

 

  “그렇게 귀찮게 할 바에야 단번에 죽이는 게 낫지 않았을까?”

  “그러면 편하긴 하겠지만, 적어도 아이들에겐 좋은 모습은 아니지. 또 아이들이 휘말릴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러면서 요한은 다시 아이들의 뒤편으로 걸어간다.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에 도착했고 갈색머리의 여성, 레이미의 엄마는 울면서 레이미를 끌어안는다. 그리고 낮에 봤던 가게주인도 나오더니,

 

  “멍청한 녀석! 위험하잖아! 왜 숲에 함부로 들어 간 거야! 모두들 걱정했잖아!”

 

  라며 윽박을 지른다. 그러자 레이미는 당차게 대답한다.

 

  “미안! 내가 호수에서 낚시를 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나 혼자 가기 심심해서 알반까지 데리고 갓지 뭐야! 알반은 나한테 끌려온 거니까 용서해줘! 내가 대신 벌을 받을게!”

 

  워낙에 당당하게 말했지만 오히려 그게 화를 돋았는지 가게주인이 딱밤을 딱콩하고 레이미의 머리를 때린다.

 

  마을에선 용병들과 자경단이 숲속에 쓰러진 인신매매단을 포박한 후 돌아왔고, 이후 아이들은 원래 살던 곳으로 인계해주기로 결정했다. 아이들은 각각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요한과 아무는 집으로 향한다. 어느새 바람은 돌풍이 되었고 그 속에 촉촉이 젖은 물기가 두 사람의 뺨을 스친다.

 

  집 앞에 도착한 두 사람. 요한은 아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아무도 그런 요한을 바라본다. 요한은 저어어어어어어엉말 내키지 않았지만 어쨌든 날씨도 이렇고 하니 문을 열고 아무에게 들어오라는 고갯짓을 한다.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욕실에서 샤워를 한 후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에 앉는다.

 

  장작이 타닥거리며 연주를 하는 중간, 아무가 먼저 입을 연다.

 

  “용케도 레이미를 찾았네?”

  “……숲에서 희미한 비명소리가 들렸거든.”

  “감각이 대단하네. 그 희미한 비명소리를 따라 쫓다니.”

 

  아무가 대단하다며 키득거리자 이번엔 요한이 물어본다.

 

  “그러는 너는 어떻게 거기인 줄 알았어?”

  “며칠 전 거기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봤거든. 그 쪽은 한바 씨가 자주 사냥이나 나무를 하러 가는 곳이니까 한바 씨가 내는 연기인 줄 알았는데, 혹시나 싶어 달려가 본 게 정답이었어.”

 

  그러면서 아무는 말을 이어간다.

 

  “레이미와 알반이 꽤 막나가는 짓을 저지른 것처럼 보이겠지만……. 알반 어머니는 1년 전 부터 투병중이거든. 계속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체력도 약하고 약값도 만만찮은지라 꽤 힘든 모양이야. 근데 알반 녀석이 어디서 들었는지 실버 벨이라는 꽃을 흔들어서 소리가 나면 어떤 병이든 금방 낫는다는 말 때문에 숲으로 들어간 거야. 참, 그런 일을 겪고도 결국 꽃은 못 얻었다니.”

 

  아무는 씁쓸한 듯 혀를 찬다. 요한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레이미에 관해서 묻는다.

 

  “레이미? 당차지. 이 마을 어린애들 중에서 대장 노릇을 하고 있어. 나도 그 부하 중 하나지만.”

 

  아무가 크큭 소리를 내며 웃는다.

 

  “당참이 지나칠 정도라니까. 알반이 혼날까봐 자기가 죄를 뒤집어쓰려고 하는 거 봐. 근데 다들 알거든. 알반이 부탁을 하면 레이미가 거의 다 들어주니까, 이번에도 알반이 레이미에게 힘든 부탁을 했을 거라는 걸. 그래도 운이 좋았지. 전쟁을 피해서 온 녀석들이라 거점을 만들지 못한 모양인데다 근처에 그런 어린 아이를 사드릴 만한 미친놈들도 없어서.”

 

  그래도 역시 말하는 동안 입맛은 좋지 않았다. 연신 쓴 맛이 올라오는지 아무는 계속 혀를 찼다.

 

  이야기를 들은 요한은 한 동안 벽난로의 불을 응시하다가 피곤하다면서 자리에서 일어난다. 아무가 발을 소파에 올리고 웅크린 채로 요한을 향해 “움, 나 여기서 자도 되는 건가? 그런 건가? 안 쫓아 낼려나?” 라고 말을 하자,

 

  “날씨가 이런데 내쫓을 정도로 썩을 놈은 아니야.”

 

  라고 말하며 아무가 여기서 자도록 허락한다.

 

  침대에 누운 후 요한은 이것저것 생각한다. 이런 평화로운 마을에도 그런 위협이 있을 수 있구나. 수요가 있기 때문에 저런 놈들이 생기는 것이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 한 곳이 욱신거린다.

 

  그 후,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 속에 빠져 요한은 잠이 든다. 요한은 꿈에서 태양에 빛나는 푸른 갑옷을 입은 남자를 바라본다. 그 남자는 인신매매단은 물론 다른 수많은 악당들의 시체를 밟고 올라서서 요한에게 손을 내민다. 요한은 거침없이 그의 손을 잡는다.

 

  그리고 아침 새소리와 함께 꿈에서 깬다. 요한은 손을 바라본다. 손을 잡는 순간 땅이 무너져 버렸지만 그를 더욱 당황스럽게 한 건, 남자의 손을 잡는 순간 요한의 손이 그 손을 통과해 허공을 허우적거렸기 때문이었다.

 

 

  //

 

 

  그날 이후, 요한은 좌천된 거물 인사에서 든든한 이웃사촌의 이미지로 마을 사람들에게 각인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이따금 요한에게 들러 이것저것 챙겨주기 시작했다. 지역 특산품들은 물론 집에서 마련한 다채로운 요리에 보존음식, 농기구나 연장들을 기부하는 등 요한에 대한 지원이 끊이질 않았다.

 

  너무 많은 것들을 받게 되자 요한은 그 보답으로 여러 가지 일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사냥꾼인 애꾸눈 한 씨라 불리는 한바 씨에게서 멧돼지 고기 절임을 받았기에 요한은 그의 나무판자 집을 보수해주고 있었다.

 

  “캬캬캬! 거, 먹다 남은 걸 준건데 이렇게 까지 해주다니.”

  “멧돼지 고기 옮기시다가 허리가 나가셨다면서요. 이쪽에 망치질을 하면 되나요?”

  “오오, 그래! 거기! 그래도 고마워. 다들 바쁘고 아무 녀석은 나만 보면 귀찮다면서 도망을 쳐버리니!”

 

  보수를 마치고 돌아가려는 요한에게 한은 병에 든 장조림을 선물로 준다. 사양하려는 요한의 품에 억지로 병을 들이미는 터라 결국 그 병을 들고 집으로 귀환한 요한이었다.

 

  요한은 집에 쌓여 있는 여러 가지 물품들을 보며 생각에 잠긴다. 너무 공짜로 받고 있는 게 많은 것 같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집 앞에서 앨리가 토마토 달걀 볶음을 전해주러 기다리고 있었다. 잔뜩 귀찮아하는 표정의 앨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지겨울 정도였다.

 

  그런 고민을 어느새 홈메이트로 같이 생활하고 있는 아무에게 털어놓자 아무는 닭고기가 들어간 토마토 달걀 볶음을 퍼먹다가 잠시 우물거리더니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뭐, 공짜로 받는 건데……. 사람이 좀 얼굴에 철판도 깔 수 있어야 하는 법이야.”

  “철판을 깔아?”

  “비유지, 비유! 하지만 네 성격상 그러긴 힘들 거 같고. 그럼 마을 퀘스트에 용병으로 등록하지 그래. 앞으로 제가 스스로 해보겠다고 하면 마을사람들도 기부행렬이 좀 줄어들 걸? 나는 좀 아쉽긴 하겠지만.”

 

  그러면서 요한은 안타까운 듯 토마토 달걀 볶음을 응시한다.

 

  그리고 다음 날, 요한은 아무와 같이 마을 회관으로 가 마을 용병으로 등록한다.

 

  “너는 자경단이랑 용병이랑 같이 되어 있는 거야?”

 

  요한의 말에 아무는 웃는다.

 

  “그렇지. 뭘 하든 좋으니 그냥 여기서 먹고 살게 만 해달라고 했더니……. 그리고 그 후 대부분 무보수였지.”

 

  웃으며 말하는데 눈동자는 죽어 있다. 그럼에도 저 녀석이 날뛰지 않는 건 매일 치킨 한 마리를 무료로 먹게 해주겠단 촌장의 약속 때문이었다. 지금도 촌장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치킨 한 마리를 아무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그런데 요한님께서 이곳의 용병으로 활약해 주신다니. 참으로 기쁘네요! 요한님이라면 아주 든든해서 마을 치안에는 걱정이 없겠습니다!”

 

  요한은 촌장에게서 받은 용병증표를 들고 닭다리를 우물거리는 아무와 함께 마을 퀘스트 지점으로 향한다. 지점 안에는 긴 갈색머리를 하고 메이드 복장을 입은 여자가 카운터에서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을 맞이하고 있었다.

 

  “어서오십시오, 무슨 일로 오셨나요?”

  “용병등록을 하러 왔습니다.”

 

  용병증표를 건네받은 여자는 카운터에서 뭔가를 적더니 다시 웃으면서 말한다.

 

  “등록되셨습니다, 요한님. 저는 브리튼 던 퀘스트 지점의 안내인인 세릴이라고 합니다. 기본적으로 퀘스트는 밖에 있는 게시판, 또는 안에 있는 게시판에 부착되어 있는 퀘스트 용지를 가지고 해당 의뢰를 완수하시면 됩니다. 퀘스트의 보수는 대체로 퀘스트 용지에 명시된 완료 물품과 퀘스트 용지를 들고 저에게서 보수를 받으시면 됩니다만, 퀘스트 내용에 따라 의뢰인에게 직접 받아야 하는 보수도 있으니 잘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세릴은 생긋 웃으며 퀘스트 용지들을 펼쳐 보인다.

 

  “물론 저에게 문의 하시면 원하시는 퀘스트를 찾아 권해드릴 수도 있습니다. 퀘스트는 A~F의 등급으로 나뉘며 F부터 A까지 순차적으로 난이도가 어려워집니다. A 이상의 퀘스트도 있지만 이건 저희 마을에선 거의 나오지 않아요. 요한 님은 A도 너무 쉬우시겠지만, 일단, 요한님에게 권해드릴 수 있는 건…….”

 

  세릴은 F~E등급의 퀘스트 용지를 건넨다.

 

  “처음 퀘스트는 대체로 이 정도밖에 권해드릴 수 없네요. 애초 이 이상의 퀘스트가 나오는 경우는 정말 드물거든요. 그것 때문에 싸움이 나기도 하고요.”

 

  그러면서 세릴은 퀘스트에 대해 더 설명을 해준다. 퀘스트를 등록할 때도 요금이 필요하다는 것과 등급에 따라 최소 요금 또한 달라진다는 것. 보상은 현금일 수도 있지만 특수한 물품이나 특산품 같은 것도 있으니 퀘스트 용지의 보상내역을 꼼꼼하게 살펴보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세릴이 건네준 퀘스트 용지 중 하나를 보고 있는 사이, 낯익은 얼굴의 거한과 마른 체형의 남자가 요한 앞에 달려가 고개를 숙인다.

 

  “미처 알아 뵙지 못했습니다. 설마 그……. 그…….”

 

  거한이 감정에 북받쳐서 말을 못하는 사이 마른 체형의 남자가 대신 말를 잇는다.

 

  “설마 블루튜더의 요한 델 베르난데스 님이실 줄은……. 이 마을에 오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설마 본인이실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그러면서 거한은 존티, 마른 체형의 남자는 마도루 라며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들은 저번의 행동을 사과하며 다시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고 하더니 요한에게 사인을 부탁했고 둘은 갑옷과 도끼에 받은 사인을 기분 좋게 바라보며 지점 밖을 나선다.

 

  밖으로 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아무가 둘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 녀석들 싸우는 건 이제 마을 연례행사 같은 거야. 높은 등급의 퀘스트가 나왔다 하면 서로 하려고 저 녀석들끼리 치고 박고 싸우거든. 하도 싸워서 오늘은 누가 이기나 내기하는 사람들도 많아. 저번에는 네가 와서 나가리가 됐지만.”

 

  아무가 키득거리더니 요한에게 묻는다.

 

  “그래서 너는 무슨 퀘스트를 하려고?”

 

 

  //

 

 

  요한은 당황스러운 듯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코코다르크 돌봐주는 의뢰를 한 게……?”

  “네. 저에요. 근데 이웃사촌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네요.”

 

  앨리가 머리를 긁적거린다. 요한은 앨리가 목장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앨리는 요한을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입 꼬리를 올리며 헛웃음을 친다.

 

  “참, 아빠는 이럴 때 농장 쪽으로 일을 가신다니까. 오늘 목장 일 좀 도와달라고 할 때 왔으면 얼마나 좋아?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사람을 볼 수 있었을 텐데.”

 

  앨리의 아버지인 스틸 파머는 요한의 광적인 팬이었다. 그러나 농장과 목장 일이 바빠 제대로 요한을 보러 갈 기회가 없었다. 저녁에는 요한을 방해하면 안 된다며 가지 않을 정도로 요한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요한도 따라 헛웃음을 짓자 앨리는 요한에게 따라오라며 그를 목장으로 안내한다.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코코다르크들은 최소 120cm에서 최대 2m까지 크기가 다양하며 색도 다양하다. 전신이 깃털로 뒤덮여 있고 날개는 없으며 육중하고 튼튼한 두 다리로 최대 시속 60km를 달릴 정도로 빠르다. 그렇기에 짐을 운반하거나 탈것으로도 쓰이지만 대체로 이런 목장에서는 소형 코코다르크들을 식육용으로 키운다.

 

  목장 안에는 노란 깃털을 한 코코다르크들이 신나게 뛰고 있었다.

 

  “이제 요한 씨가 할 일은 코코다르크들의 먹이를 갈아주고 코코다르크들의 배설물들을 치우는 거에요. 또 코코다르크들이 탈출하지 않도록 울타리를 돌면서 유지보수를 해주시고요.”

 

  앨리가 말한 일은 쉬운 잡무처럼 보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야! 쪼지마! 나는 밥을 주러 온 거라고!”

 

  코코다르크는 무리에 신기한 개체가 들어오면 일단 쪼고 보는 습성이 있다. 심하게 쪼지 않고 살짝 부리를 톡 건드는 수준이지만 코코다르크의 크기를 생각하면 이 가벼운 행동도 당하는 입장에선 꽤나 아프다.

 

  요한은 4마리 정도의 코코다르크들에게 둘러싸여 여기저기를 콕콕 쪼이고 있었다. 모이를 주고 도망치지만 코코다르크들은 줄줄이 요한의 뒤를 따라가기 시작한다.

 

  마지막 모이통을 채웠을 땐 이미 10마리가 요한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코코다르크들은 “꾸깃! 꾸깃!” 거리는 소리를 내며 요한의 등을 쪼아댄다.

 

  배설물들을 치우고 울타리 전체를 돌고 돌았을 땐 어느새 20마리 정도가 “꾸깃!”소리를 내며 요한의 뒤를 따라 다닌다. 흡사 그 모습이 행군 대열에 앞장서는 부대장의 모습 같아 앨리는 역시는 역시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 부대장이 부하들에게 제발 그만 쪼으라고 사정하고 있었지만.

 

  그렇게 요한이 거의 일하기보단 도망 다니던 도중 앨리가 요한에게 다가온다. 요한이 울상을 지으며 앨리에게 도와달라고 하자 앨리는 등 뒤의 코코다르크들을 매섭게 노려보기 시작한다. 꼬꼬다르크들은 흠칫하더니 이내 해산한다.

 

  “새참 먹으라고 할 참이었는데, 바쁘셨네요?”

  “아, 네……. 바빴죠…….”

 

  도망치느라.

 

  “아무튼 먹고 하세요. 드실 거라곤 잼이랑 빵이랑 우유지만.”

 

  그러나 그게 어딘가. 도망다니느라 허기가 진 요한은 빵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겁을 주면 도망가는데 뭐하러 그렇게 고생을 해요.”

  “얘네들은 스트레스를 안 받아야 고기 맛이 좋아진다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제가 위협하면 엄청나게 스트레스 받을 거 같아서…….”

 

  그 말을 듣고 앨리는 요한을 빤히 쳐다보더니 이내 엷은 미소를 짓는다.

 

 

 //

 

 

  해가 뉘엿뉘엿해질 때 즘 코코다르크들을 축사로 들여보내는 것으로 일이 끝난다. 요한은 지친 모습으로 축사 문을 닫는다. 온 몸에는 코코다르크들의 침과 배설물 냄새가 진동을 한다.

 

  앨리가 코를 막고 요한에게 음료와 함께 오늘 급료를 건넨다.

 

  “고생했어요. 여기.”

  “하아아아아……. 일단은 돈보다는 이게 더 끌리네요.”

 

  그는 음료부터 받아들고 벌컥벌컥 마셔댄다. 우유의 고소함과 꿀의 달콤함이 함께 섞인 맛이었다.

 

  “허니 드링크라고 어머니가 자주 만들어 주시는 음료에요. 피로회복의 효과가 있다는 데 저는 그냥 맛으로 마셔요.”

  “크하아아아……. 살 것 같네요. 후우우…….”

  “브리튼 던의 첫 퀘스트는 어땠나요? 할만 했나요?”

  “글쎄요. 하루종일 쪼인 것 같은 느낌만 드는데…….”

  “아, 그리고 매주 수요일에 오셔야 하는 거 아시죠? 저는 그렇게 알고 퀘스트 의뢰한건데.”

  “네? 아……. 매주 수요일이요? 하아아아아아…….”

 

  요한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한숨을 내뱉자 앨리가 큭큭 거리며 웃더니 말한다.

 

  “씻고 가실래요? 원하시면 샤워실 빌려드릴 수도 있는데.”

  “괜찮아요. 집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집에서 씻을게요.”

 

  그러면서 요한은 앨리에게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집으로 가려 했다. 앨리는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다가 요한을 불러 세운다.

 

  “저랑 잠시 어디 좀 같이 가실래요?”

  “에? 잔업인가요? 급료 더 쳐주셔야 합니다.”

 

  앨리는 순간 이 사람, 일에 관해선 조금 깐깐하고 귀찮은 타입이구나 생각했다.

 

  요한을 데리고 앨리는 목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울타리가 쳐진 절벽 쪽으로 향한다. 바닷바람이 강하게 부는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요한의 눈이 번쩍 뜨인다.

 

  바다가 불타고 있었다. 주황빛의 태양은 자신의 붉은 몸을 녹여 바다에 흩뿌리고 바다는 거기에 반짝이는 가루를 섞어 제 몸을 흔들며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었다. 요한이 뒤를 돌아보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하늘은 태양이 건넨 노을에 머리를 물들이고 뉘엿뉘엿 밤과 함께 다가오는 중이었다.

 

  “여기선 일출과 일몰을 전부 볼 수 있어요. 새해가 되면 여기 되게 북적북적 하다고요.”

 

  앨리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한다. 그녀는 울타리에 몸을 기대고 요한을 바라본다.

 

  “이제 좀 사람 사는 얼굴처럼 보이네요.”

  “네?”

 

  요한이 얼른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만진다. 그 모습을 보고 앨리는 가볍게 웃으며 말한다.

 

  “처음 요한 씨가 여기 왔을 때 봤거든요, 마차에서 내릴 때. 식료품점에 들렀다가 소문이 자자한 유명한 인사가 우리 마을에서 지낸다기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보고 싶어서 봤는데. 제 상상과는 좀 거리가 멀었어요. 집에 가자마자 곧 목에 줄 메달 사람처럼 보였거든요.”

 

  얼마 지나지 않은 과거였지만 요한은 괜스레 창피해져 얼굴을 붉힌다.

 

  “저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아빠가 난리를 치고 그럴까 싶었어요. 채소절임 가져다 줄 때도 눈은 죽어있고 얼굴은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이 해선…….”

 

  사실 지쳐서 쓰러질 것 같은 이유는 치킨에 미친 새끼 때문이었지만.

 

  “그래서 요한 씨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어요. 근데 엄마랑 아빠가 자꾸 심부름 시키니 안 갈 수도 없고. 일부러 싫은 티를 팍팍 냈는데도 영 안 먹히더라고요. 근데…….”

 

  앨리는 요한의 눈을 바라본다.

 

  “알반이랑 레이미를 데리고 온 요한 씨의 눈은 좀 다르더라고요. 내가 본 그 사람이 맞는가 의심 될 정도로. 그 후로 점차 눈에 생기가 돌더니 지금은 완전 사람 사는 눈이 된 거에요. 소포즈 할배가 말하길 호수처럼 맑은 눈이라고 하더라고요.”

 

  눈 이야기가 나오자 요한은 황급히 고개를 노을 쪽으로 돌려버린다. 그녀는 생긋 웃더니 노을을 바라보며 말한다.

 

  “저는 머리가 복잡하거나 축 처지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여기로 와요. 일출이나 일몰을 볼 때면 세상이 확 밝아지는 느낌이 들어서 덩달아 제 머리와 마음도 화아아아악 하고 밝아지면서 탁 트이는 기분이 들거든요.”

 

  그녀는 계속해서 노을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요한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몰라요. 분명 큰 일이 있었기 때문에 여기까지 그 죽은 눈을 가지고 온 거겠죠? 만약 그 때처럼 힘든 일이 생기면 여기에 와서 잠시 쉬었다 가요. 저는 지금 보는 풍경이 떠오르면 괜스레 힘이 나고 그래요.”

  “……갑자기 왜……?”

 

  요한이 조심스레 묻자 앨리가 요한의 눈을 응시하며 대답한다.

 

  “맑고 깨끗한 게 흐려지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그녀는 다시 생긋 웃는다.

 

  “그리고 가끔은 마음의 안식처인 곳을 마련해두는 것도 좋아요. 저는 이곳이지만, 요한 씨에게는 이 마을 어딘가에 그런 곳이 있을지도 몰라요. 지금은 내 안식처를 빌려줄 테니까, 나중에 요한 씨의 안식처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두 사람은 다시 저 멀리 노을을 바라본다. 요한은 노을을 바라보며 아까 생긋 웃던 앨리의 표정을 떠올린다. 퉁명스런 그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괜스레 뺨이 붉어진다.

 

 

  //

 

 

  며칠간 요한은 대부분 F~E랭크의 퀘스트를 잔뜩 받았다. 그래봤자 몬스터 토벌 같은 거창한 건 없었고 장작패기, 재료조달, 요리보조, 목장 돌보기, 수확물 수확 등등의 퀘스트만 받았을 뿐이다. 그래도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바닥을 보이던 자금이 나름 충만해진 상태다.

 

  오늘도 푹 자고 일어난 요한은 기지개를 펴며 거실로 내려온다. 아무는 어제 야간 순찰을 한다고 나간 뒤 아직 안 들어온 모양이었다. 치킨 3마리에 싸게 부려먹을 수 있는 노동력이라니……. 요한은 괜히 촌장의 무자비함에 소름이 끼쳤다.

 

  허니 드링크를 마시면서 마당으로 나온 요한은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고 내쉰다. 상쾌한 공기가 코를 지나 폐와 가슴에 퍼져나간다. 청량한 기분이 가슴에서 몸 곳곳으로 퍼져나가자 요한의 입가엔 흐뭇한 미소가 새겨진다.

 

  요즘 들어 이렇게 충만한 기분을 느낀 적이 언제였던가.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 내가 살아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살아있고 살아간다는 느낌. 조용히 썩어문드러질 인생만 있을 줄 알았던 요한에게 지금의 하루는 그야말로 봄 햇살이 비치는 이파리에 맺힌 물방울 같이 촉촉했다.

 

  힘껏 기지개를 펴고 있는 도중에 저 멀리서 고벨리누스 종족인 우채부 고르브가 보인다. 고벨리누스 종족은 키가 100~140cm 가량이며 몸은 녹색에 코와 귀가 굉장히 길고 뻣뻣하다. 왜소해 보이는 체격이지만 악력과 힘은 성인 남성의 2~3배가량으로 강한 편이다.

 

  깐깐하고 약삭빠르지만 기억력이 매우 좋고 계산도 빠르며 일과 관련해서는 완벽하게 해내는 완벽주의자들이 많기 때문에 요한은 고르브가 우채부 역할을 하는 건 최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자기가 배달한 편지의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할 정도였으며 궂은 날씨에도 절대 일을 멈추는 법이 없었다.

 

  “어이, 신참! 잘 있었나?”

 

  고르브가 당나귀 수레를 끌고 안경과 콧수염을 씰룩이며 인사를 하자 요한도 기분 좋게 인사를 받아준다.

 

  “고르브 씨. 오늘은 어쩐 일이세요?”

 

  고르브는 매일 블루튜더에서 보내오는 편지를 전달해주고 있었다. 대부분 블루튜더에서 지내던 부하들이 안부를 묻는 편지였지만, 요한은 답장을 보내지 않았고 고르브는 정 없는 놈이라며 요한을 깠었다.

 

  “오늘은 좀 특별해. 너한테 배달이 왔어!”

 

  고르브는 수레에서 내리더니 무거워 보이는 사람크기만한 길쭉한 나무상자 하나를 번쩍 들어 올려 요한 앞에 내려놓는다. 요한이 이리저리 살피면서 어디서 온 거냐고 묻자 고르브는 품에서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안경을 고쳐 쓰며 대답한다.

 

  “그래, 블루튜더에서 온 것이군. 내쫓을 땐 언제고 편지도 보내고 상자도 보내고 아주 정성이여. 이번엔 뭘 보냈길래 이리 무거운 거야. 신참 인기 많아. 잠긴 건 이걸로 열라고 준 거구만. 자 받아.”

 

  고르브에게 열쇠를 건네받은 요한이 고개를 숙인다.

 

  “저 때문에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세요.”

  “그럼 팁이라도 주던가! 입으로는 혀로 똥꼬도 닦지!”

 

  그러면서 고르브는 오늘 돌 곳이 많다며 수레를 타고 떠난다. 요한은 이번엔 무엇을 보냈길래 이렇게 나무상자로 포장해서 보냈나 궁금했다. 그는 나무상자를 들고 집으로 향한다. 생각보다 굉장히 무거웠다. 상자를 거실에 놔둔다.

 

  뭔가 사람이 들어있을 법한 상자를 눕힌 요한은 괜히 불안한 느낌이 든다. 정말 사람이 들어있는 건 아니겠지? 요한은 그럴 리 없다고 웃으면서 손에 쥔 열쇠로 잠긴 나무상자의 잠금을 풀고 뚜껑을 천천히 열어본다.

 

  어떤 선물이 들어있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요한이 뚜껑을 모두 열었을 때,

 

  그의 심장은 차가워졌고,

 

  그의 눈에 흐린 먹구름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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