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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현대물
혼란한 세상, 이상한 사람
작가 : 토토
작품등록일 : 2016.9.28

 
주도권을 쥐었어
작성일 : 16-10-07 17:59     조회 : 498     추천 : 0     분량 : 1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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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도권을 쥐었어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상황은 점점 안 좋아지고 있었다. 며칠 동안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다. 병원에 있는 간호사와 의사, 가족, 병문안을 온 외부인이 감염되었고, 다른 환자들은 가려움을 호소하는 등의 증상을 보였다. 각 대형병원은 비상에 걸려 자체 방역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고 했지만, 사후약방문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이에 여론의 화살은 정부에게로 향했다. 교과서적이고 수동적인 대처로는 신종 바이러스의 확산을 차단하기에 역부족이라는 의견이었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문제는 병원을 벗어난 곳에서 병의 전염이 이미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확히 언제 어느 곳에서 감염되었는지도 확인하기 어려웠다. 회사원, 군인, 노인, 아이 등 전 연령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가 늘고 있었다. 대부분이 훈네 섬을 방문하지 않은 경우라 국내 전염이 본격화되고 있다는 불길한 징조였다. 몽큐 바이러스는 열이 없는 질병이라서 공항 검색대 열화상 카메라로는 환자를 가려낼 수가 없었다. 정부는 꽤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환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방역과 예방 대책이 무용지물이라는 것과 새 매뉴얼이 전무하다는 것. 질병관리본부장이 많은 카메라 앞에 서서 상황보고를 했다.

 

  환자는 좀 늘고 있지만.. 아직 사망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적절하고 정확한 매뉴얼에 따라 환자 치료를 했기 때문이라 생각됩니다. 예전 메르스 때와는 다르니 국민 여러분은 너무 불안해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자 한 명이 질문을 했다.

 

  정부가 제시한 예방수칙으로 몽큐 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는지 국민들은 많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가령 손을 씻는다든지 마스크를 한다든지 하는 예방 수칙이 몽큐 바이러스와 맞지 않는다는 이견도 많습니다만...

 

  모든 질병 전염의 기본은 호흡기 전파와 세균의 접촉 감염입니다. M바이러스라고 해서 다르진 않을 겁니다.

 

  그럼 몽큐 바이러스가 메르스 전염 경로와 같다는 말씀입니까?

 

  그렇습니다. 증상은 다르지만 전염 경로는 같습니다. 그리고 몽큐 바이러스라는 명칭보다 M바이러스라고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다른 기자가 손을 들어 질문을 했다.

 

  현재 감염자 수는 훈네 섬 토착민 다음으로 한국에 환자 수가 많다고 합니다. 왜 한국에서 유독 이 병이 확산되고 있는지 그 원인을 알고 싶습니다.

 

  질병관리본부장은 손으로 이마를 한 번 만지더니 약간 뜸을 들였다.

 

  글쎄, 몇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는데요. 훈네 섬의 기후가 아열대인데 한국도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아열대 화 되고 있어 바이러스가 비슷한 기후에 잘 적응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리고 훈네 섬 원숭이의 유전자와 사람 유전자가 98% 일치하는데요. 생리적이랄까, 특질이랄까, 한국사람 기질에 쉽게 숙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이 부분에 대한 것은 지금 의학적으로 연구 중에 있습니다만...

 

  기자들이 술렁거렸다. 한 기자가 얼른 질문을 했다.

 

  그럼 질병 확산 원인이 방역 대책의 문제가 아니라 원숭이와 한국사람 간의 생리적 유사성과 특질에 기인한다고 보시는 겁니까?

 

  그건, 의학적 정밀 검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 그렇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상황 보고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질병관리본부장은 서둘러 단상을 떠났다. 상황보고 기자 회견 이후 언론들은 급격히 불어난 홍수처럼 기사들을 쏟아 냈다.

  -몽큐 바이러스가 한국인의 유전자인가?

  -질병관리본부장은 몽큐에 감염된 것인지 검사 해봐야

  -의학적으로 전혀 근거 없는 해괴한 논리

  -이런 자가 어떻게 본부장이 되었는가?

  -세계적인 웃음거리 자초, 추락하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부분 황당하다는 반응이 주를 이루었다. 원숭이가 한국사람 기질에 잘 부합한다는 논리는 어디서 나온 무 개념 논리냐는 것, 사태가 심각한데 고위 관료가 그런 어처구니없는 농담을 지껄이느냐는 것, 그러면서 병은 희극적이고 감염 원인은 삼류 코미디이며 국가 관료는 개그맨, 방역 체계는 개그콘서트라는 비아냥도 따랐다. 의학계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의학 상식을 벗어난 궤변이라며 질병관리본부장을 비난했다. 다음 날 질병관리본부장은 스스로 사임을 하고 자리를 떠났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서둘러 기자 회견을 했다. 어제의 회견은 전혀 근거 없는 개인의 저차원적 의견이니 국민들은 절대 동요하지 말라는 것. 그러면서 당국은 감염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제적 방역대책을 실시하고 있으므로 국민 여러분은 생업에 종사하시면 된다고 했다. 한 시민 단체는 질병관리본부장을 형사 고소하기도 했다. 국민 모독죄라는 죄명이 성립하지 않는 관계로 허위 사실 유포에 관한 직권 남용이라는 죄명으로 법원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인터넷은 온통 바이러스와 본부장의 발언으로 도배가 되다시피 했다. 이 중 한 기사의 베스트 댓글이 추천 수 2만을 기록해 성지가 되었다.

  -섬나라 쪽국 일본에 이 바이러스가 아직 퍼지지 않았다. 그곳 원숭이들은 모두 다 무사하다고 하는데, 원숭이가 서식하지 않는 한반도에 웬 원숭이 병이 창궐한다는 말인가? 미스터리하도다. 이쯤 되면 원숭이가 문제인지 사람이 문제인지 매우 궁금한 사안이 아닌가. 병에 걸리면 털이 빠지고 온몸을 박박 긁는다고 한다. 하는 짓이 딱 원숭이다. 나는 본부장의 말이 뜬금없다고 보지는 않는다. 한국인이 유독 이 병에 취약한 이유를 밝히는 것은 논문거리로 충분하다고 본다. 네이처지에 실리고 노벨상 받으려면 연구하고 또 연구들 하시게나. 희망 없는 대한민국에 이러한 핵 웃음 바이러스가 폭발하다니! 이건 하늘이 우리에게 내린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천형이 아니던가. 바이러스 환자를 향해 함부로 비웃거나 손가락질 마시게. 나 자신이 한순간 동물원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에....

  그리고 어느 블로그에서는 바이러스 환자를 대하는 법이 소개되어 있었다.

  -몽큐 바이러스 환자 대처법

  1. 재빨리 다가가 효자손을 건네준다.

  2. 죽지 않을 만큼 몽둥이로 두들겨 팬다.

  3. 서울대공원 우리로 신속히 보낸다.

  4. 여유 있는 마음으로 라이브 쇼를 감상한다.

  5. 두꺼운 겨울 점퍼를 입혀준다.

  6. 시진 찍어 특정인과 합성하여 필요할 때 쓴다.

  7. 피부과 전문의를 데려온다.

  장삼은 킥킥 웃음이 나왔다. 댓글에는 블로그 주인장을 욕하는 글도 있었고 재미있다는 글도 있었다. 대처법 중에서 6번은 잘만하면 풍자적 발상이 될 수 있다고 쓴 글도 있었다.

 

  장삼은 몇 시간 동안 컴퓨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 남자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니 여러 보도 기사가 있었다. 국내 대회에서 우승을 한 적도 있었으나 대부분 상위권 밖으로 밀리거나 컷 탈락인 대회도 있었다. 장삼은 그의 이름을 처음 들어본다. 프로는 프로인데 실력이 출중하고 지명도가 있는 프로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잘 나가는 프로 골퍼가 교육원 같은 데서 강좌 코치를 하고 있겠는가. 그냥 수많은 프로 중 빛을 보지 못한 과거 선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행을 한 기사가 눈에 띠었다.

  윤성현 프로골퍼, 불우이웃을 위해 천만 원 기탁.

  윤성현씨, 어린 꿈나무들을 위한 재능기부 현장에 참여.

  장삼은 기사를 보며 조용히 콧방귀를 끼었다. 계속 화면만 주시하다보니 눈이 아프고 침침했다. 장삼은 자리에서 일어나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커피를 타서 자리에 앉았다. 다시 한 시간이 지나도록 집요하게 검색을 하다가 그가 소속 돼있는 한 동호회 골프클럽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거기에 들어가 샅샅이 검색을 했다. 회원 명부 파일이 있었다. 클릭했는데 로그인 화면으로 바뀐다. 장삼은 회원 가입을 완료하고 다시 명부를 클릭하자 파일이 열리며 회원정보가 나왔다. 많은 사람들 중에 윤성현이란 이름을 찾아냈다. 집은 송파구 잠실동이었다. 장삼은 볼펜으로 주소를 옮겨 적으며 쾌재를 불렀다. 네 시간 동안 눈알이 시뻘게지도록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장삼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지어졌다. 시간을 보니 오후 한 시가 넘었다. 장삼은 찬을 꺼내 식은 찌개에 밥을 말아 먹었다. 밥을 먹다가 아차, 하는 생각에 수저가 멈칫했다. 범인에게 너 잡으러 몇 시에 출동하니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장삼은 머릴 탁 치며 다시 컴퓨터 앞으로 가 앉았다. 열이 나도록 또 검색을 시작했다. 쥐꼬리만 한 단서라도 포착하려고 저인망식으로 훑어나갔지만 원하는 것을 찾지 못했다. 눈앞이 어질어질하다. 입맛을 다시며 아까 들어갔던 블로그를 다시 접속했다. 하나하나 일일이 클릭하며 살펴보았지만 눈에 띠지 않았다. 이미지 목록에 들어가 사진들을 들여다보았다. 골프장과 바다와 산과 사무실 등에서 찍은 사진들. 회원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찍은 단체 사진 속에는 영주도 있었다. 그와 영주의 자리는 멀리 떨어져 있다. 장삼은 태연함을 가장한 저 모습이 가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로 짐작하게 하는 사진과 아들, 딸과 찍은 사진도 있었다. 여자는 야리야리하고 여성스러운 이미지를 갖고 있다. 그 사진 밑에 메모 글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사랑하는 마눌 선미혜 여사와 함께.

  장삼은 의자에 등을 쭉 펴고서 뒷머리에 팔짱을 끼었다. 콧노래가 흥얼거리며 나왔다. OK 원 샷, 원 킬! 컴퓨터를 끄고 나와 식탁에 앉았다. 찌개에 만 밥알이 팅팅 불어 있었다. 장삼은 맛나게 싹싹 먹었다. 좋은 식재료와 소스는 물론 셰프에게 전수받은 레시피를 손에 쥐고 있다. 이제 도마와 칼을 꺼내고 불을 댕기는 일만 남았다. 장삼은 셰프의 여유만만을 즐기기로 했다.

 

  장삼은 지하철 인근 카페에 자리를 잡고 기다렸다. 시간보다 일찍 나왔다. 공지 란에 가는 길을 자세히 설명해 놓았으니 찾아오는데 문제는 없다. 나중에 추가로 두 명이 게시 글을 올려서 초대를 했는데, 한 명은 승낙하고 한 명은 알바 일 때문에 못나가 아쉽다고 했다. 오늘 참석 인원은 장삼을 포함해서 다섯 명이다.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두려움 등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장삼은 2층 카페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거리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간다. 모두 자기의 그림자를 달고 어디론가 가고 있다. 그림자가 있다는 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므로, 저들은 그림자가 있건 없건 항상 태연하고 무심하며 상관하지 않는다. 그림자가 자신을 이끌어가든 등 뒤에 매달려 끌려가든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보조를 맞추건, 죽어서 관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는 동안에 문득문득 제 밑을 보게 되고 금방 잊어버리게 되는 무한 건망증의 기록이다.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경우를 장삼은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다. 차라리 빈부 격차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 견디기 수월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삼은 끊임없이 오고가는 사람들의 동선을 보다가 시선을 거두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속에 주황색 빛이 따듯한 커튼을 드리운다.

  저, 실례하지만 오장삼 방장님이 맞나요?

  장삼이 눈을 떴다. 젊은 여성이었다.

  예, 제가 방장입니다. 그, 상, 모?

  네에.

  여기 앉으시죠.

  장삼은 실제 동지를 눈앞에 마주하게 되자 신기하면서도 한편으론 강한 동질감이 생겨났다. 장삼이 말했다.

  그림자가 없으신 게 맞습니까?

  네, 없어요.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하셨겠습니다.

  너무 혼란스러웠어요.

  저도 그랬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는 동안 회원들이 들어왔다. 두 번째는 말끔한 인상의 중년 남자였고 세 번째는 40대의 참한 얼굴을 가진 가정주부였고, 네 번째는 스타일리쉬한 복장을 한 20대 젊은이였다. 모두 특별할 것이 없는 사람들이다. 다섯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자 장삼은 차와 커피를 주문했다. 모두의 시선이 장삼에게 향했다. 장삼이 말했다.

  여러분 반갑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없는 특별한 회원입니다. 남들은 모르지만 우리만 알고 있는 특급 비밀. 그럼 한 분씩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갖을까요?

  장삼이 첫 번째로 직업과 가족 관계를 얘기했다. 다음으로 중년남자가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쉰 넷이고 와이프와 삼남매를 두고 있습니다. 현재 백두그룹 플랜트 사업부 부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대리 과장 차장을 거쳤으니 제 청춘을 다 바친 회사죠.

  가정주부가 말했다

  잘 나가시는 분이군요. 그런데 왜?...

  그러게요. 미스터리하죠. 어느 날 밥 먹으러 길을 걷다가 아래를 보니 그림자가 없는 거예요. 옆에 부하직원들도 있는데 너무 당황스럽더라구요. 근데 다행히 그걸 눈치 채지는 못하더군요. 그날 이후로 한 푼이 아쉬운 거지마냥 바닥을 자꾸 훑어보게 되었습니다.

  회원들은 묵묵히 생각에 잠겼다. 희한하군, 알 수 없네 라는 말만 흘러나왔다. 다음은 젊은 여자가 자기소개를 했다.

  전 중학교 선생님이에요. 역사를 가르치고 있죠. 지금 교사생활 한지는 2년 째 접어들었나...

  중년남자가 말했다.

  꿈을 이루셨네요. 저도 한때 선생님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는데..

  젊은 여자가 말을 이었다.

  임용고시 합격하려고 5년간 노량진 학원에서 공부했어요. 실패하고 응시하고 실패하고.. 아마 수능보다 더 치열하게 공부했을 겁니다. 내 꿈은 오로지 선생님이었으니까요. 결국 고시에 합격하고 발령을 받아 중학교에 부임했습니다.

  장삼이 말했다.

  허 참, 왜 그런 일이 생긴 걸까요...

  학교생활 몇 개월이 지나면서 갈등과 속앓이가 시작되었어요. 애들이 사춘기 시기라서 그런지 몰라도, 거울로 치마 속을 훔쳐보지 않나, 질문하는 척 하며 몸에 손들을 대지 않나, 선생님이 앞에 있는데도 스마트 폰으로 게임을 하지 않나. 제가 휴대폰을 빼앗았는데 그 학생이 저한테 쌍욕을 하면서 얼굴을 갈겼어요. 얼마나 충격이던지 전 쓰러져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가정주부가 말했다.

  세상에, 교권 폭력이 정말 심각하네요!

  젊은 남자가 높은 톤으로 말했다.

  왜 체벌 금지를 했는지 몰라. 한국 사람은 두들겨 맞아야 정신 차린다니까.

  젊은 여자가 마저 말했다.

  1년간 병가를 냈어요.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고 있지만 학교 가기가 여전히 두렵고 무섭습니다. 어렵게 꿈을 이뤘는데 현실은 이런 것인가. 퇴직을 해야 할지 다른 진로를 찾아야 할지. 어느 날 갑자기 제 그림자가 안 보이더군요. 그날 머릿속이 하얘져서 수면제 백 알을 삼켰는데 다음 날 응급실에서 깨어났어요.

  장삼이 말했다.

  절대 자살은 안 됩니다. 힘내세요.

  모두가 한 마디씩 위로를 건네주었다. 이번에 가정주부가 말을 꺼냈다.

  글쎄, 전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라서.. 전 그냥 가정주부예요. 20대 초에 결혼하고 나서 전업주부로만 살았어요. 남편은 성품과 인성이 정말 좋은 사람이에요. 평생 중소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는데 몇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인덕이 있는지 천운이 내렸는지 잘 헤쳐 나가더라고요. 아이들 셋은 미국과 캐나다로 유학 보내고 저는 애 아빠 내조만 열심히 했습니다. 방배동 집에 손님들도 많이 찾아와요. 그럴 때는 아줌마를 불러서 음식 장만이 소홀하지 않도록 대접을 해드렸어요. 첫 째는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을 거고, 둘째는 국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고, 셋째는 뉴욕에서 패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중년 남자가 말했다.

  풍족한 생활을 하셨군요. 특별히 고민이나 문제가 없으신 분 같은데..

  그런 건 살아오면서 별로 없습니다. 어느 날, 백화점에 장보러 가려고 주차장에 나왔는데 제 그림자가 안 보인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있는 줄 알았던 그림자가 안 보이니 어찌나 당황스럽던지...

  장삼이 말했다.

  혹시 남편 분에게 말씀해 보셨나요?

  네. 그랬더니 남편이 당장 치매 검사 받으러 가자고 하더군요. 병원 가서 검사 받았는데 모든 게 정상으로 나왔어요.

  중년남자가 말했다.

  난 와이프한테 말했더니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정 심심하면 책이나 한 자 읽으라고 하더군. 하핫.

  마지막으로 젊은 남자 차례였다.

  제 나이는 스물여섯이고 집은 청담동이고 저의 애마는 페라리입니다.

  중년남자가 끼어들었다.

  딱 강남스타일이네.

  젊은 남자가 계속 말했다.

  집에 돈이 좀 있어요. 아버지가 부동산 쪽에 발이 넓으셔서...

  젊은 남자가 말을 멈추고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쓰윽 살펴보았다. 장삼이 말했다.

  괜찮아요. 세무조사 할 사람 없으니까 기탄없이 말씀하세요.

  젊은 남자는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말투가 바뀌었다.

  뭐, 좋아요. 까짓 거. 있는 대로 말할게요. 아버지가 부동산 투자를 적기에 잘 하셔서 엄청난 돈을 만지게 됐죠. 지금 강남에 보통 건물 하나하고 작은 건물 하나가 있습니다. 임대 수입만 해도 한 달 최소 수 억은 착착 입금됩니다. 인생 뭐 있나요? 맘껏 즐기는 거 아니겠습니까?

  장삼은 속으로 딱 재수 없는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 놀 때 업소 같은 데는 시시해서 안 가고요. 텐 프로라고 하는 강남 유학파 클럽이 있거든요. 저도 유학파였죠. 거기에 들어가면 열락과 환락의 밤이 도가니로 펼쳐집니다. 뭐 대마는 기본이고 알약 종류의 환각제도 다 먹어봤는데 아직 주사는 안 했습니다. 중독이 너무 무서운 거라...

  젊은 여자의 얼굴에서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가정주부가 말했다.

  그건 그냥 유흥이고요. 지금 하는 일이 뭔지 그것부터..

  백숩니다!

  아.. 그럼 장래 희망이나 꿈같은 거는요?

  음.. 구체적으로.. 이거저거 생각해보기는 했는데.. 아버지 말씀대로 그냥 관리나 잘 하는 게..

  일동 침묵이 흘렀다. 장삼이 물었다.

  그림자는 언제 없어졌습니까?

  1년 전쯤 내 그림자가 없어진 걸 알고 놀랐는데, 뭐 알아보는 사람도 없고 생활하는데 지장도 없는 거 같고..

  그러면 그게 없어도 상관없다는 얘기군요.

  아니요. 그게, 기분이 참 더럽고 찝찝해서.. 그거만큼은 꼭 되찾고 싶습니다. 억만금이 필요하다면 갖다 바칠 수도 있어요.

  모두 유형이 다른 사람들이었다. 가진 경우도 있었고 평범한 수준도 있었다. 장삼은 공통분모를 도출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모두들 저마다 생각하느라 침묵이 길어지자 젊은 여자가 장삼에게 말했다.

  방장님께선 뭔가 느낌이 오시나요? 한 말씀 해주세요.

  네 사람의 눈이 장삼에게 향했다. 이 모임의 중심인물이 된 장삼. 장삼은 뭔가 그럴듯한 말을 해야 하는데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손에 땀이 났다. 잘못 말해서 볼품없는 사람으로 비쳐지는 건 정말 싫었다. 장삼은 속으로는 떨렸지만 여유와 품위 있는 자세를 유지하며 하나하나 침착하게 말을 해나갔다.

  우린 제각기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든..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림자는 없지만 우린 분명히 지금 심장이 뛰는 살아있는 상태라는 겁니다. 이의 있는 분 없으시겠죠?

  모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개나 고양이에게도 그림자는 있고, 심지어 죽어 있는 시체에게서도 그림자는 있습니다. 지구에는 수십억의 사람이 살고 있고 한국에 오천 만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그 무수한 사람들 중에 달랑 우리 네 사람만 그림자가 없는 걸까요?

  그렇지는 않겠죠.

  젊은 남자가 다른 표정을 살피며 대답했다. 장삼의 말이 이어졌다.

  그림자가 없어진 걸 안다는 것은 반대로 찾을 수 있는 희망이 있는 거라 봐요. 만약에 그림자가 없는데 내 눈엔 안 보이고 다른 사람들 눈에 보인다면, 우리는 괴물이나 유령이 됩니다. 정말 끔찍한 일이죠. 아마도 자살하게 될 겁니다. 내 그림자가 없다는 걸 나만 안다는 것, 우리 스스로가 어떤 과제를 부여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눈을 더욱 크게 뜨고 나 자신과 주변을 살피며 살다보면, 그림자가 어느 순간 나타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쉽게 생각하기로 합시다.

  장삼은 자기가 한 말이 논리가 맞는 것인지 제대로 전달이 된 것인지 뚜렷한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모임의 장이 되었으니 그럴듯한 말이라도 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작용했다. 모두들 곰곰이 생각에 잠기면서 긴 침묵이 흘렀다. 그 후 이런저런 얘기들이 오고갔으나 근본이나 핵심에는 다다르지 못했다. 결국 어떠한 결론도 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모두의 표정에 묻어났다. 젊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배고프지 않아요?

  순식간에 웃음이 나왔다. 젊은 남자가 말했다.

  오랜만에 깊은 생각에 빠져드니까 에너지가 다 소진됐어요. 꼬르륵 소리가 나더라고요. 자, 나가서 밥이나 먹죠. 오늘 특별한 날인데 제가 3차 4차 5차 통으로 쏠 수 있습니다.

  장삼이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우린 노는 회원이 아니니까 그냥 밥만 먹고 헤어지기로 해요. 그리고 카페에다 사는 근황을 올리시고 혹시 신변에 어떠한 변화가 있으시면 꼭 올리도록 하세요. 저도 수시로 글을 통해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뚜렷한 해결책을 얻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나름의 위안을 얻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섯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져 나무나 사람들의 그림자가 길게 뻗치고 있었다. 가정주부가 외쳤다.

  이것 봐요. 우리 네 사람 모두 그림자가 없어요. 이걸 반갑다고 해야 하나?

  중년남자가 말했다.

  아무도 몰라. 시어머니도 몰라 우리밖에 몰라!

  다섯 사람은 강한 동지애를 느끼며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옆을 지나는 사람들이 흘낏흘낏 쳐다보았다.

  장삼은 집에 오면서 생각을 했다. 그림자 상실이 혹시 바이러스처럼 전염되어 번져나가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그림자 부재는 질병이 아니었다. 무엇으로도 설명이 불가능한 미스터리였다. 장삼은 집에 가는 내내 셜록 홈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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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주도권을 쥐었어 2016 / 10 / 7 499 0 10308   
9 나, 괴물이야 2016 / 10 / 4 595 0 13125   
8 드디어 친구를 만나다 2016 / 9 / 30 422 0 6618   
7 속이 영 거시기 하네 2016 / 9 / 28 564 0 10241   
6 사방이 꽉 막혔어 2016 / 9 / 28 464 0 8292   
5 거울에 비친 나, 나, 나 2016 / 9 / 28 498 0 6014   
4 코가 커지다 2016 / 9 / 28 463 0 8133   
3 객사와 보신 사이에서 2016 / 9 / 28 742 0 5942   
2 삐져나온 우산살 하나 2016 / 9 / 28 647 0 6697   
1 시야가 흐린 날 (1) 2016 / 9 / 28 1143 1 6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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