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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리고 그 후
작가 : 전Yeah
작품등록일 : 2019.10.7

2014년, 갑작스레 일어난 사태 이 후 인류는 멸망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사태에서 살아남은 이설전은 변해버린 환경과 그것에 적응해가는 자신에게 회의감을 가지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하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일상을 쓰는 아포칼립스 일상물.

 
08 - 비의 레퀴엠 (2)
작성일 : 19-10-16 21:46     조회 : 230     추천 : 0     분량 : 15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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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하늘은 태풍이 부는 바다와 같았다. 일렁거리는 먹구름의 파도는 하늘에서 이리저리 부서져갔다. 파도가 부서질 때 마다 빛이 번쩍거리며 천둥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그 소리는 부서지고 있는 파도가 금방이라도 땅을 향해 곤두박질 칠 것만 같은 전초처럼 들렸다.

 

  옥상 위에서 설전은 하늘을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으득 하는 기분 나쁜 소리가 났지만 물기를 머금은 바람의 소리에 날려 들리지 않았다. 비는 아직 오지 않았지만 바람은 곧 비가 도착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는 전령 같았다. 한 숨을 깊게 내쉰 그는 소수를 세기 시작했다. 2, 3, 5, 7, 11, 13, 17, 19... 하지만 아무리 소수를 세어도 쉬이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사실 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론 내뱉고 싶지 않았다.

 

  그런 그를 향해 권란이 다가와 말을 건다.

 

  “꼭 지금 가야 하니?”

 

  권란의 질문에 꼬박 꼬박 잘 대답하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잠시 머뭇거렸다. 권란도 빨리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아들을 닥달하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설전의 뺨을 스치며 지나가자 그제야 그도 권란의 질문에 입을 열었다.

 

  “괴물 무리들이 돌아다니는 걸 너무 경계했어요. 안 좋은 타이밍이네요.”

 

  “비가 그친 다음 가도 되잖아.”

 

  어머니의 걱정스러움이 잔뜩 녹아있는 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걱정을 아들은 단호하게 밀쳐냈다.

 

  “장마가 오잖아요. 언제 그칠지도 모르고 앞으로 더 심해질지도 모르죠.”

 

  “그래도 어느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거야.”

 

  권란은 설전을 달래보려 했다. 그녀의 머리에서 자꾸 피범벅이 된 손수건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손수건을 만지던 그때 권란은 아들을 다시 못 보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인력이 없어서 미뤄왔던 거지만 지금은 가야해요. 탄이 이제 몇 백발 정도 밖에 안 남았어요. 수류탄도 거의 다 썼고요. 이젠 보급이 필요할 시기에요. 계속 미루다간 진짜 위험해요.”

 

  “그렇다고 지금 위험할 순 없잖아... 비도 곧 올 거고 조금 잠잠해질 때 가도 좋을 텐데 왜 그리 급하게 일을 처리하려 하니.”

 

  “버틸 수 있을 때 까진 버티려고 했지만, 이젠 진짜 위험해요. 정말 아슬아슬할 정도인데 갑자기 놈들이 무리를 지어서 몰려오면 답이 없어요. 게다가 영혜의 일을 생각하면 괴물들에만 대비하기는 벅차요. 적이 더 늘어났다고 봐야 한다고요.”

 

  설전이 이를 악 물더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실 더 버텨보려 했지만 날씨가 도와주지 않네요. 날씨만 좋았다면 내일이나 모레정도에 출발하려 했는데. 장마라면 일주일은 넘게 걸리니 지금 가는 수밖에요.”

 

  “...그냥 비가 오는 걸 수도 있잖아...”

 

  권란의 마음은 이미 아들의 발에 족쇄를 걸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런 어머니의 족쇄를 풀려고 발악하는 중이었다.

 

  “걱정 마요. 혼자 가는 게 아니니까.”

 

  설전이 소총을 고쳐 매며 말하더니 권란을 지나쳐서 옥상 문으로 걸어갔다. 권란은 그런 설전을 복잡한 심경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머니의 마음은 아는지 아니면 애써 무시하는 건지 설전은 권란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영혜를 찾고 있었다.

 

  영혜는 3층 주차장에서 밖을 바라보며 엄청난 바람과 날씨를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한동안 계속 지하에 갇혀 지내던 영혜에게 이런 날씨의 변화도 재밌는 볼거리 중 하나였다. 그러던 중 그녀는 설전의 등장에 깜짝 놀라더니 아직 안가셨냐고 묻는다. 설전이 근처 군부대에 탄을 나르러 간다는 소리는 대범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설전은 그저 따라오라는 말만 남긴 채 3층 주차장을 벗어난다. 영혜는 설전의 등장과 자신을 호출하는 그에 대해서 굉장한 불안감을 느꼈다. 1층으로 내려온 두 사람. 영혜의 불안한 예상대로 설전은 너도 같이 나랑 가야 하니 준비하라고 일렀다.

 

  “저도 간다고요?”

 

  “그럼 누가 갈까?”

 

  “그... 그래도...”

 

  당황하는 영혜를 향해 설전이 전투조끼 하나를 던져주었다. 영혜는 다급하게 그거를 받아들더니 말을 이어갔다.

 

  “제가 도움이 될까요? 힘도 없는데...”

 

  “그럼 나랑 아버지랑 갈까? 여긴 여자 둘만 남기고?”

 

  “아...”

 

  “아니면 어머니 모시고 갈까? 그럼 넌 여기 남아서 아버지랑 같이 있는 거지. 늙은 어머니는 아들내미를 따라가서 무거운 탄들을 옮기는 거고. 어때?”

 

  “.....”

 

  “그림이 어떤지 대충 알겠지? 준비해. 그거 입고 앞에 긴 주머니 4개에 탄창 2개씩 집어넣어.”

 

  “네....”

 

  그녀는 주섬주섬 전투조끼를 입었다. 가슴부분이 꽉 조여서 지퍼가 제대로 잠기지 않았다. 영혜는 숨을 깊게 내쉬더니 지퍼를 있는 힘껏 올렸다. 겨우 입은 전투조끼가 그녀의 가슴을 압박했다. 답답해. 지퍼를 내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설전이 뭐라고 불호령을 내릴까봐 영혜는 그만두었다.

 

  하지만 설전은 영혜가 숨을 고르게 쉬지 못한 채 헐떡거리는 걸 보자 숨 막혀 죽고 싶냐고 하더니 전투조끼 뒤의 끈을 조정했다. 그러자 꽉 끼던 전투조끼가 어느새 영혜의 몸에 어느 정도 알맞게 바뀌었다. 영혜는 고맙다고 웃었지만 설전은 여기서 시체 치우기 싫어서 그런 거뿐이라며 그녀의 인사를 되받아쳤다.

 

  영혜는 설전이 준비한 총알이 가득한 탄창 8개를 각각 전투조끼 앞 4개의 주머니 안에 2개씩 넣었다. 그녀는 한 숨을 내쉬더니 설전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래도 그... 탄통이라고 해야 하나? 그거 무겁지 않나요?”

 

  “드럽게 무겁지. 탄약고 작업한다고 하면 빠지려고 난리를 피웠을 정도였으니까. 실제로 위험하기도 하고.”

 

  “저 힘이 그렇게 세지 않은데.”

 

  “걱정 마. 곧 세질 거야.”

 

  설전이 탄창 하나를 소총에 결합시킨 다음 노리쇠를 전진시키며 장전했다. 이젠 영혜도 익숙해진 철컥 소리가 나자 설전은 조정간을 안전에 맞춰놓은 다음 말했다.

 

  “가서 가져와야 될게 꽤 많아. 전투식량, 탄창, 탄박스, 세열수류탄 등을 보급해야 하지.”

 

  “심부름 목록이 꽤나 많네요.”

 

  “네가 있으니 그나마 이렇게 가는 거야. 우리 가족끼리 있을 땐 엄두도 못 내고 있었어.”

 

  영혜가 궁금한 듯 손을 들며 질문했다.

 

  “근데 어떻게 지금 쓰고 있는 건 옮기셨어요?”

 

  “지금 쓰고 있는 걸 가져올 땐 단체로 움직였거든. 그땐 대형마트를 보수하던 중이였는데 하필 탄을 가지러 간 사이에 괴물들이 마트를 점령하고 있었지 뭐야. 엄청 싸웠지. 그 후로 또 그렇게 쳐들어 올까봐 마트를 비우지 못하고 있었어.”

 

  “아...”

 

  “더 질문 있냐?”

 

  영혜가 총에 달린 멜빵끈을 어깨에 메면서 고개를 저었다. 설전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영혜와 같이 마트의 정문 쪽으로 향했다. 하늘이 어두워서인지 마트 내부는 다른 때보다 더욱 훨씬 어두워보였다. 설전이 손전등을 키고 천천히 걸으며 도착한 그곳에는 대범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네들 나가면 막을 거다. 들어올 거면 창고 쪽으로 들어와.”

 

  “집 잘 지키고 계세요. 저희는 걱정 마시고요.”

 

  “걱정 안하게 생겼냐. 못미더운 아들놈이랑 연약한 아가씨가 가는데...”

 

  “어쩔 수 없잖아요. 늙으신 분들 모시고 가느니 젊은 피끼리 뭉치는 게 더 이득이죠.”

 

  “뭐 타고 갈 건데?”

 

  “승합차 정도면 되려나요?”

 

  “들고 올 양을 생각하면 많이 무거울 텐데? 승합차로 속도가 나겠냐?”

 

  “트럭이 없으니 어쩔 수 없죠. 그때 차키만 안 잃어버렸으면.”

 

  “임마! 그게 내 잘못이냐! 그게 괴물들이랑 싸우다 보니까 어쩌다 하수구로 빠진 거지!”

 

  “어련하시겠습니까.”

 

  설전은 그렇게 말한 다음 마트 입구를 나섰다. 설전과 대범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을 쭈뼛쭈뼛 쳐다만 보던 영혜도 설전이 입구를 나서자 자신도 종종걸음으로 총총 그를 따라 입구 쪽으로 향했다. 그러나 도중 대범이 영혜를 부르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대범은 싱긋 웃어 보이더니 영혜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우리 아들 좀 잘 부탁한다.”

 

  뜻밖의 말에 영혜는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아... 아! 네!”

 

  “몸조심하고.”

 

  말을 마친 대범이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지게차 쪽으로 걸어갔다. 곧 여기 문이 닫히겠지. 영혜는 대범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한 다음 입구 쪽으로 나갔다. 입구 밖에는 설전이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는지 벽에 기댄 채 멍하니 하늘을 응시하고 있었다.

 

  “뭐하세요?”

 

  질문한 그녀가 무색하게 설전은 아무런 대답도 안하고 앞으로 걸어갔다. 영혜는 또 무시당했다며 뾰로통한 얼굴을 하더니 그의 뒤를 쫓아갔다. 차도로 나온 설전은 곧장 검은색 승합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가 운전석 안으로 들어가자 뒤를 따라오던 영혜는 조수석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오우! 운전하는 남자! 멋지네요!”

 

  “엉?”

 

  갑작스러운 영혜의 감탄에 설전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영혜는 안전벨트를 매더니 설전을 향해 휘파람을 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마치 아무것도 못할 줄 알았던 어린아이가 상장을 들고 오자 기특해 하는 어머니의 눈빛이었다. 설전은 그녀의 눈빛을 캐치해내더니 기분 나쁜 듯 꽂혀있던 차키를 돌리며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렇게 신기하냐?”

 

  “네. 맨날 만화책이나 보고 심심하면 총이나 쏘는 그런 남자로 보였거든요.”

 

  “.....”

 

  “이야, 운전면허도 있다니. 그래도 자격증 하나 정도는 가지고 계셨네요. 굿 굿 굿!”

 

  설전이 차에 시동이 걸리자 가속 페달을 가볍게 밟으며 말했다.

 

  “나 운전면허 없는데?”

 

  “에?”

 

  “그런 거 딴 적 없어.”

 

  “에? 그게 무슨?”

 

  “운전면허 없다니까.”

 

  승합차가 천천히 출발을 하기 시작했다.

 

  “잠깐만요! 면허가 없다고요? 근데 어떻게 운전하시려고요?”

 

  “운전면허는 없지만. 운전은 배웠어.”

 

  “어... 언제요?”

 

  영혜의 얼굴이 점차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다급하게 설전을 향해 질문했다. 부디 자신의 상식선에서 대답이 나오길 빌었으나 설전은 그런 그녀의 희망을 가볍게 박살내었다.

 

  “사태 발생하고 나서. 아버지가 남자새끼가 운전하나 정도는 배워야 한다고 하셔서 말이지. 그래서 운전면허 문제집이랑 아버지한테 운전연수 받으면서 배웠어.”

 

  “아... 아저씨한테 서요? 아저씨도 운전면허가 있었나요?”

 

  설전이 검지로 코를 가볍게 후빈 다음 말했다.

 

  “아니, 아버지도 무면허야.”

 

  영혜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뭐, 어때. 어차피 칠 사람도 없는데. 차 가게 하고 차 뒤로 빼고 차 옆으로 가게 하면 다 되는 거 아냐?”

 

  “잠시만요. 그냥 걸어가면 안 될까요? 저번에 리어카로 파이프 같은 거 옮겼다고 하셨는데..”

 

  당황스러워 하는 영혜를 향해 설전은 무심히 말했다.

 

  “하늘 봐라, 그럴 시간 없어.”

 

  출발하는 승합차 안에서 영혜의 비명소리와 함께 그녀에게 시끄럽다고 다그치는 설전의 언성이 함께 울려 퍼졌다.

 

 

 

  설전네 가족들이 보금자리로 사용하는 대형마트로부터 차로 5~7분 정도 가다보면 군 훈련소가 있다. 사태가 발생하기 전엔 매월 이곳에서 입소식이 치러졌고 수많은 부모와 자식들이 눈물의 이별을 하며 떠나갔다. 허나 지금은 다 떨어져가는 위병소의 간판만이 음울한 날씨와 어우러져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설전의 승합차가 위병소를 지났다. 위병소에는 자동차를 막는 장애물들이 입구 근처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는 여기 지리가 익숙한 듯 차를 이리저리 몰고 다녔다. 저 장애물들을 가리키며 설전은 차에 방해가 안 되도록 아버지와 자신이 치워놓은 거라고 설명했다. 조수석에는 영혜가 설전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안전벨트를 꽉 붙잡으며 떨고 있었다. 설전은 그런 영혜를 보며 혀를 찼다.

 

  “뭘 그리 떨고 있냐.”

 

  “안 떨게 생겼어요!? 무면허자가 운전하는 차에 타고 있는 거잖아요!”

 

  “무슨 몇 시간 간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오는데 10분도 안 걸렸구만, 뭘 그리 무서워 해.”

 

  “사고는 순간이에요! 어떻게 무면허로 운전할 생각을 해요!?”

 

  “지금 면허를 어떻게 따. 무사히 도착했으면 된 거 아냐?”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요!”

 

  “어차피 사람칠 일이 어디 있어. 그렇다고 차가 지나다니는 것도 아니고.”

 

  영혜는 설전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차든 사람이든 지나다녀야 사고가 나긴 하지. 그래도 운전 미숙으로 벽이나 가로등에 부딪혀 사고가 날 수 있는 거 아닌가? 영혜는 입을 옹알거리며 불평을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운전 중인 설전은 그런 영혜를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승합차는 이후 점점 훈련소 부대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잡초들이 무성한 한 언덕에 도착했다.

 

  설전이 차에서 내렸다. 그는 언덕에 깔려있는 콘크리트길을 따라 올라갔다. 조수석에서 내린 영혜도 그의 뒤를 종종 걸음으로 따라갔다. 경사가 급해 거의 70도에 육박했지만 설전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단숨에 길을 올라갔다. 다 부서지고 끊어진 철조망 입구에 도착한 설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영혜를 불렀다. 영혜가 헉헉 거친 숨소리를 내며 대답하자 설전이 마음에 안 드는 듯 불호령을 내렸다.

 

  “누가 보면 산 등반한 줄 알겠다! 얼른 안 튀어와!”

 

  “히... 힘든 건... 힘든 거예요!”

 

  “으으...”

 

  설전이 자신의 머리를 치며 통탄했지만 영혜는 그런 설전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았다. 꿋꿋이 자기만의 속도로 설전이 있는 곳까지 올라온 영혜는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다 올라온 영혜를 향해 설전이 말했다.

 

  “그럼 여기 망보고 있어 차로 여기까지 올라올 테니까.”

 

  “헉...헉... 무면허면서.. 허우..헉.. 이런 언덕도... 헉헉.. 탈 줄 아.. 후... 아세요?”

 

  “넌 도대체 날 뭘로 보고 있는 거냐.”

 

  “헉...헉... 무면허라이더?”

 

  얘는 자꾸 왜 개소리를 지껄일까. 설전은 영혜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고는 콘크리트 아래로 내려갔다. 제대로 주변을 살펴보라며 그녀에게 주의를 주며 내려간 설전이었지만 영혜는 그런 충고를 못 알아들었는지 자리에 주저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아까보다 더욱 우중충한 모습이었다.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 같은 모습. 가끔가다 울리는 천둥소리가 그 추측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름임에도 바람은 찼으며 이따금 비 냄새와 습한 기운을 날라주었다. 영혜는 왠지 불길했다. 하늘의 모습만큼이나 불길한 무언가가 영혜의 가슴을 옥죄어왔다. 비가 내리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왠지 그래야 될 것만 같았다. 비가 내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영혜는 그리 느끼고 있었다.

 

  “야! 이영혜! 뭐해!”

 

  설전의 다급한 호통이 영혜의 의식을 하늘에서 땅으로 잡아 내렸다. 영혜의 눈앞에 차의 앞부분이 보였다. 영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만약 조금만 늦었으면 영혜는 차에 깔리게 될 상황이었다.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다급하게 내린 설전은 영혜에게 다가가 다시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쥐어박았다.

 

  “임마! 멍하니 있으면 어떡해! 하마터면 쥐포 만들 뻔 했잖아!”

 

  “에...에...어머..”

 

  “어머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주변 잘 살피라고 했지. 뭘 그리 멍하니 있었던 거야!”

 

  “비... 올 것 같아서요.”

 

  “그래! 비오니까 집중해서 빨리 일을 끝낼 생각을 해야지. 뭘 그리 멍하니 있어. 혼나고 싶어!?”

 

  “이미 혼냈잖아요.”

 

  설전이 미간을 찌푸리며 다시 가볍게 영혜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아프다고 칭얼거리는 영혜를 일으켜 세운 설전은 차의 트렁크를 열고 나서 철조망을 넘어 벽돌로 세워진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로 향했다. 그는 익숙한 듯 창고 안쪽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나무 박스를 하나 들고 오기 시작했다. 영혜가 도와주러 종종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가자 설전이 말했다.

 

  “됐어. 엄청 무거워서 넌 들지도 못해. 가서 괴물이나 잘 살펴봐. 여기서 습격당하면 진짜 위험하니까.”

 

  설전은 그리 말하더니 영혜에게 보여준 적 없는 힘든 모습을 보이며 박스를 차 안에 싣기 시작했다. 그는 이 행위를 여러 번 반복했다.

 

 

 

  “전투식량도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설전이 차 안에 쌓인 전투식량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어있는 좌석마다 전투식량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아슬아슬하게 쌓여있는 전투식량들을 보면서 설전은 뭔지 모를 쾌감이 느껴졌다. 뿌듯함. 성취감. 이런 감정을 얼마 만에 느껴보는가. 설전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차 안을 바라보다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근데 얘는 어디 간 거야. 전투식량 챙길 동안 망 좀 보고 있으라고 했더니...”

 

  혹시나 싶어 설전은 주위를 살핀 다음 보급 창고에서 조금 떨어진 부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자신이 군 시절에 쓰던 구 막사와는 다른 신형막사였다. 건물이 마치 대학 기숙사처럼 느껴졌다. 설전은 입구의 거미줄과 먼지를 털어내며 건물 안쪽으로 몸을 옮겼다.

 

  설전의 예상대로 안쪽에서 쩝쩝거리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한 다음 조용히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걸어갔다. 소리의 근원지는 충성클럽, 소위 PX라고 불리는 곳이었고 그 곳에는 초코바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영혜가 보였다. 설전의 주먹이 영혜의 머리를 향해 날아간다.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거다. 뭐하냐. 망보라고 했더니 언제 여기서 군것질이나 하고 있었던 거야.”

 

  “아! 끝났어요?”

 

  “그럼 끝났지. 뭐하냐니깐. 망도 안보고.”

 

  “여기서도 보이는걸요?”

 

  영혜가 다 부서진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는 보급창고와 설전이 세워둔 승합차가 한 번에 보였다.

 

  “그리고 초코바가 급하게 땡겨서요. 아마 이게 위병소효과라고 했던가? 군부대 안에 들어오면 단 게 막 먹고 싶어진다던데. 아마 그런 거 아닐까요? 암튼 너무 먹고 싶어서 들어 와봤어요. 혹시나 싶었는데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그건 당장 집에 돌아가도 있는 거잖아. 왜 지금 쳐먹어야 되는 건데.”

 

  “음... 지금 먹고 싶으니까?”

 

  미친년이다. 이 여자는 미친년이야. 생글 생글 웃으며 대답하는 영혜를 보며 설전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왜 이 여자를 데리고 온 걸까.

 

  “그러다 괴물에게 습격당하면 어쩌려고...!”

 

  “그럼 발바닥에 불이 나게 튀려고 했죠.”

 

  퍽이나. 설전은 자신이 다가오는 줄도 모른 채 초코바를 우물거리던 영혜의 모습을 떠올렸다. 괴물이 나오면 단번에 죽겠군, 이 여자. 손이 많이 가는 여자다. 설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영혜를 끌고 충성클럽 밖으로 나왔다.

 

  하늘은 이제 흐리다고 표현하기 보단 어둡다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시간이 꽤 지났어도 아직은 한 낮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시간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설전은 끌고 온 영혜를 억지로 조수석에 밀어 넣었다. 운전석에 설전이 탑승하자 영혜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꺼냈다.

 

  “이제 다 한건가요?”

 

  “탄 박스 열, 수류탄 박스 다섯, 그리고 전투식량...에...”

 

  설전이 뒤를 돌아 쌓여진 전투식량들은 바라보았다. 그는 눈대중으로 전투식량의 개수를 세더니 다시 돌아앉으며 말했다.

 

  “먹을 만큼 충분히.”

 

  “전투식량은 근데 왜 챙기는 거예요? 마트에도 먹을 게 쌓여 있는데.”

 

  “먹을 게 쌓여있다고 그걸 전부 다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생각해봐라. 사태가 발생한지 얼마나 지났냐. 1년 남짓 지났잖아. 실제로 지금 있는 쌀들은 추수한지 2년째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고. 라면 같은 것도 사실 이제 슬슬 변질되어가는 시점이야. 마트 안의 제대로 된 식량이라고 해봤자 이젠 레토르트나 통조림 밖에 남지 않으니.”

 

  “흐음.. 의외로 철저하고 세심하네요.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살아갈 궁리를 해야지.”

 

  “저번에는 살아있는 것만으론 안 된다면서요.”

 

  갑자기 설전의 말이 끊긴다. 영혜의 말 때문인가. 설전은 영혜의 말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을 아무런 말없이 앉아있었다. 자기 스스로가 바쁘다며 일을 빨리 끝내려고 열심히 던 그가 차에 시동조차 걸지 않은 채 멍하니 앞 유리 밖을 응시하고만 있다니. 영혜는 왠지 초조하고 미안했다. 괜한 질문을 했나. 말마다 일일이 태클을 걸며 자신을 낮게 보는 설전을 한 방 먹일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그녀였지만 실제로 해보니 그렇게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예상치 못한 그의 반응에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래. 살아있는 것만으론 안 되지.”

 

  마침내 설전이 입을 열었다.

 

  “그래. 살아있는 것만으론 안 돼.”

 

  “왜... 죠? 저번부터 궁금했어요. 왜 살아있는 것만으론 안 된다는 거예요?”

 

  영혜의 질문에 설전은 이제 하늘이라기보다 검은 바다라고 불러도 될 만큼 우중충해진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토끼나 쥐같은 작은 동물들은 주로 야행성이 많지. 작은 보금자리에 들어가서 천적을 피해 은신하고 있다가 천적의 활동이 뜸해진 틈을 타서 먹이활동에 나서지. 근데 그마저도 목숨을 걸어. 야행성인 천적들이 아직 다수 존재하니까. 그러니 이 녀석들도 매일 그렇게 밖으로 나갈 순 없는 거야. 목숨이 걸려있으니까 당연하지. 외출하려면 목숨을 담보로 해야만 하는데 어찌 그럴 수 있을까. 그러니 녀석들은 한번 밖에 나가면 식량을 그 자리에서 해치우거나 저장을 한 뒤 집으로 돌아와. 그리고 한 동안 밖을 나서지 않지. 그 조그마한 은신처에서 말이야.”

 

  “...갑자기 그 이야기는 왜...?”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지?”

 

  설전의 질문에 영혜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사실 영혜도 대충 그 말의 의미를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영혜가 대답을 하지 않았음에도 설전을 말을 이어갔다.

 

  “동물과 같아진 삶. 처음에는 살아남은 것에 감사했지. 살아있음에 안도하고 살아남음에 안심하고. 근데 시간이 지날수록, 내 안의 뭔가가 부서지고 있다는 걸 알았어. 그건 처음엔 뭔지 몰랐어. 아주 단순히, 이런 상황에 내몰리자 받게 되는 스트레스 따위로 치부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괴물을 한 마리 쓰러뜨리고 그게 뭔지 알게 된 거야.”

 

  설전이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가치관이었어. 내가 여태까지 배워왔고 살아오면서 확립되었던 삶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부서지기 시작한 거야. 그걸 느끼게 된 건 괴물. 눈앞에 쓰러진 괴물이었지. 난 살아있다고 느끼고 있던 순간이. 괴물이 죽었음을 알아야 느끼고 있었던 거야. 생존에 대한 확실한 안도. 확실한 안심. 생존에 대한 보장. 이 모든 게 괴물의 죽음을 보고 나서야 느끼는 감정이란 걸 눈치 챈 거지.”

 

  영혜가 설전에게 무슨 말을 건네려고 했지만 설전이 먼저 말을 자르며 자신의 말을 계속 이어갔다.

 

  “알아.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가치관이란 건 그래.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배경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야. 때론 신념이 바뀌거나 개인의 의지로 바뀌는 경우도 있지. 지금은 천적에 따른 목숨이 위험한 상황. 생명을 지키는 것에 쾌감을 느끼고 행복감을 느끼는 건 오히려 이 세계에서 정상일 수 있어. 하지만 가치관이 붕괴되면서 또 다른 공포가 나를 덮쳤지.”

 

  짧은 한숨. 짧지만 깊은 한숨. 그 한숨소리가 왜 이리 거슬리게 들리는 걸까. 영혜는 하늘이 내려앉는 듯한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생존. 반복되는 생존. 이 빌어먹을 짓을 난 언제까지 반복해야 하는 걸까?”

 

  어색한 침묵이 다시 차안에 내려앉으려 했다. 하지만 다행이도 침묵이 다 깔리기 전에 설전의 입이 먼저 열렸다.

 

  “오로지 살기위한 쾌락을 위해, 생존이라는 것을 위해 이 목숨을 건 반복행위를 해야 하는 걸까. 정말 이젠 인간이 아닌 동물로써 살아가야 하나. 천적을 피해 굴에 숨고 생존에 필요한 물품을 굴 밖에서 조달한다. 정말로 그런 생활을 나는 삶이라 부를 수 있는가. 이것을 삶이라 부를 수 있는가.”

 

  영혜는 설전을 바라보았다. 가늘게 뜬 눈에는 무언가를 보는 듯, 아니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더욱 잘 보려고 노력하려는 그런 모습이 보였다. 뭘 그리 보려고 하는 걸까. 영혜는 설전을 보며 생각했다.

 

  “이런 반복되는 삶이 언제 끝날까. 아니, 끝나기는 할까. 내 목숨이 다하는 날 까지 이런 생활이 계속 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결국 그런 삶을 살다 늙어 죽는다면. 나는 그토록 원하는 생존을 위해 발악하지만 결국 죽는 건가. 그런 삶을 나는 정녕 원하는 건가?”

 

  설전은 다시 머뭇거렸다. 해답을 여기서 찾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시간 골몰했던 답을 갑자기 찾으려 한다 해도 찾아질 리 없었다. 해답을 못 찾은 그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내 삶은 뭘까? 살아 있는 것만으로 괜찮은 건가? 숨만 내쉬는 것만으로도 행복감을 느껴야 하는 건가? 괴물들로부터 죽어나간 사람들이 원하는 삶이기 때문에 내가 이 삶을 사는 것에 행복을 느껴야 하는 건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것만으로 괜찮은 건가?”

 

  설전의 말이 빨라지며 호흡도 거칠어진다. 영혜가 이런 흥분한 모습을 보는 건 그때 그녀의 첫 사격 이후로 처음이었다.

 

  “가치관이 붕괴되고 행복이란 것에 대한 정의가 무너지니. 난 이 삶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있어. 그리고 그 답을 못 찾았지.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정작 왜 살아가는지 모르겠어. 그런 내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 괜찮은 걸까?”

 

  “그래도 죽지 않으려고 살 궁리를 하시잖아요. 그건 목숨이 아까워서 아닌가요? 살고 싶으니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영혜가 질문했다. 마치 영혜는 필사적으로 죽으려고 물에 들어가려 하는 사람을 향해 밧줄을 던져주는 것처럼 다급했다. 질문을 받은 설전은 잠시 생각하더니 영혜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게 죽고 싶지 않아서... 일까? 괴물들에게 죽고 싶지 않으니까. 그렇게 안 죽으려고 발버둥을 쳐댔으니까. 그래서 그런 죽음 이외의 죽음을 선택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지금의 나는 죽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살아갈 이유도 없는 상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바다 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는 상태라고 해야 할까. 다만 어디로든지 흘러가는 대로 흘러가고 있지만 바다에 빠지고 싶지 않은. 그런 상태.”

 

  그리고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영혜는 고개를 숙이고 설전은 계속해서 앞을 응시했다. 무거운 공기가 승합차 안을 짓눌러대고 있었다.

 

  “만약,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유를 그래도 찾아보라고 한다면...”

 

  말을 마친 설전은 총, 그 다음 자신이 온 길, 대형 마트쪽 길을 바라보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가슴 속에 작은 덩어리를 토해내는 느낌이었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고 얼굴은 상기되었는지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영혜가 입을 움직인다. 그리고 설전은 영혜 쪽을 바라보았다. 영혜가 뭐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영혜의 말을 듣고 그는 잠시 생각을 하는 것 같더니 이내 차에 시동을 걸었다. 천천히 천천히 차가 움직이는 그 순간. 승합차의 앞 유리에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전투조끼 이제 벗으면 안돼요?”

 

  “왜?”

 

  “가슴 부분이 너무 꽉 조여요. 지퍼까진 잠그지 말고 걸치고만 있으면 안 되나요?”

 

  “그렇게 조종했는데도 여전히 조인다고? 어휴, 얼마나 귀찮은 거야, 그 몸. 마음대로 해. 정말이지 몸조차도 불편한 친구로군.”

 

  설전의 말에 영혜는 토라진 듯 입을 샐쭉 내밀며 볼에 바람을 넣고 삐졌다.

 

  “뭐, 이게 내 마음대로 커지고 싶어서 커진 줄 아시나. 나도 이렇게 까지 큰 거 불편하다고요.”

 

  “나도 마찬가지야. 쓸모도 없는 거 왜 그리 커. 내일까지 줄여.”

 

  “...성희롱 쩌시네요. 경찰이 있었으면 신고했을 텐데.”

 

  “없으니까 이런 말도 하는 거지.”

 

  “그나저나 너무 많이 실은 거 아닌가요. 차가 속도가 안 나오네, 속도가.”

 

  “거 운전하는 건 난데 옆에서 너무 말 많은 거 아니냐?”

 

  “심심하지 않으라고 이렇게 말도 걸어주고 얼마나 착해요.”

 

  “됐다. 그냥 아버지를 모시고 오지 못한 나의 불찰이지.”

 

  설전이 와이퍼를 키며 말했다. 쏟아진다는 표현보단 붓는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비는 승합차의 앞 유리를 맹렬하게 강타하고 있었다. 와이퍼는 삐걱거리며 열심히 차에 떨어지는 빗물들을 제거하려고 애썼지만 비의 대군은 물량으로 밀어붙이고 있어 쉬이 앞 유리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하늘이 번쩍거리더니 이윽고 천둥소리가 대지를 울리자 영혜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으아. 비 엄청 오네요.”

 

  “그러게. 너무 오는데.”

 

  “시야도 제대로 안 보여요. 안개 같은 것도 막 끼기 시작하는 것 같고.”

 

  “젠장. 시야까지 가릴 정도로 올 줄이야.”

 

  “라이트를 켜요!”

 

  “미안하지만 이 차의 라이트는 안 켜져. 뭐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야.”

 

  “그럼 비가 좀 잠잠해지면 가는 게 어때요? 지금 너무 앞이 안 보이는데 왠지 께름칙해요.”

 

  “차 안에서 사이좋게 괴물 밥이 안 되고 싶으면 당장 집부터 가는 게 좋을 걸? 비오는 날 차 안에서 괴물에게 습격당하는 것만큼 최악의 시나리오가 어디 있어. 거기다가 여긴 탄을 잔뜩 싣고 있다고. 함부로 총을 갈겼다간 뽱뽱 다 터지지.”

 

  설전의 핀잔에 영혜는 다시 뾰로통한 얼굴이 되었다. 그 모습을 본 설전은 가볍게 피식 웃었다. 영혜는 설전이 가볍게 웃자 놀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가뭄에 콩 나듯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보이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순간 비가 너무 와서 시야가 안 보였던 것이 이유였을까. 아니면 영혜와 이야기하느라 설전의 집중력이 흩어져서였을까. 위병소를 빠져나와 본격적으로 속도를 내려 했던 승합차의 앞부분에 뭔가 둔탁한 것이 부딪히며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설전은 다급히 브레이크를 밟았으며 설전을 보려 했던 영혜는 갑작스러운 급정지에 몸이 튕겨져 나가는 듯 했다.

 

  다행스럽게도 차는 제대로 멈췄으며 옆으로 쓰러지지 않았다. 영혜도 안전벨트를 한 덕분에 큰 외상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영혜는 얼떨떨해 하며 설전을 향해 말했다.

 

  “뭐에요? 뭐에 부딪힌 거예요? 그런 거예요?”

 

  “어. 아무래도 그런 거 같다.”

 

  “헐.. 뭐예요! 어디 부딪힌 건데요?”

 

  “부딪혔다기보다는 내가 친 거지.”

 

  “쳤다고요? 설마 사람? 헐! 무면허운전자에 뺑소니!”

 

  “지금 농담 따먹기 할 때가 아니야.”

 

  “농담이라뇨! 사람을 친 거면 어쩌려고요!”

 

  설전이 전투조끼에서 탄창을 꺼낸 다음 소총에 결합한 후 장전하며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 이런 빗속에 괴물들이 돌아다니는 거리에 사람이 혼자 지나다니겠냐. 설마 지나다닌다고 해도 차가 오는데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한다는 게 더 이상하지.”

 

  “뭐에요.. 그 말은.. 설마..”

 

  “넌 여기 있어. 어차피 총도 제대로 못 쏠 텐데, 여기서 가만히 있어라. 무슨 일이 있어도 함부로 움직이지 말고.”

 

  “오빠!”

 

  “절대 문 열지 마. 내가 시선을 끌고 상황을 볼 테니까.”

 

  설전이 운전석에서 내렸다. 그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영혜를 향해 차 문을 잠그라는 시늉을 했다. 영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차문을 잠갔다. 그리고 설전은 이번엔 손을 아래로 내리는 시늉을 했다. 영혜는 그 뜻을 간파하고 고개를 숙인 채 설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그대로 집으로 가지 않고 차에서 내린 이유는 두 가지다. 첫 째는 차에 치인 생명이 인간인지 괴물인지 확인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는 괴물이라면 살았는지 죽었는지, 또는 괴물 무리가 없는지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솔직히 전자의 경우는 살펴볼 필요도 없이 괴물이었고 문제는 후자였다. 만약 괴물이라면 숨통을 끊어놔야 하는데 이게 녀석이 혼자 행동하는 게 아니라면 골치 아파진다. 무리가 있다면 여기서 도망친다 한들 뒤를 밟힐 걱정이 높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형 마트는 이제 고작 2분 거리, 도보로는 5분도 안 걸리는 곳에 있다. 안일하게 도망치다가는 괴물들에게 장소를 노출당할 위험이 있다. 거기다 장마기간이기 때문에 승합차 안의 내용물을 옮기며 놈들을 방어하는 건 쉽지 않다. 무엇보다 무리가 있다면 놈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모르기에 움직임에 주의를 요한다.

 

  설전이 한숨을 내쉬었다. 입김이 쏟아지는 빗줄기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빗방울들은 둔탁하고 아팠다. 마치 떨어지는 작은 쇠구슬들을 얻어맞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설전은 차 앞으로 다가갔다. 승합차 앞에는 피를 흘린 채 꿈틀거리는 낫잡이가 한 마리 있었다. 설전은 지체 없이 총을 쏴 그의 머리를 관통시켰다. 비가 쏟아지는 거리에 총성이 울려 퍼진다. 그는 그 후 곧장 승합차 옆으로 가더니 승합차 옆에 세워진 승용차 앞에 멈춰 서서 몸을 숙였다.

 

  역시 잘못 본 게 아니다. 낫잡이를 쏘고 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순간 이상한 형체들이 빗속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는 걸 확인했다. 비 때문에 실루엣만 겨우 확인 할 수 있었지만 확실히 저건 인간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 형체들, 그건 괴물의 무리였다. 그것도 굉장히 다수. 대략 세어 봐도 10체가 넘는 수였다. 설전은 직감했다.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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