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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연재 > 판타지/SF
그리고 그 후
작가 : 전Yeah
작품등록일 : 2019.10.7

2014년, 갑작스레 일어난 사태 이 후 인류는 멸망하였다. 그로부터 1년 후, 사태에서 살아남은 이설전은 변해버린 환경과 그것에 적응해가는 자신에게 회의감을 가지면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하다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게 되는데... 이미 멸망한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는 자들의 일상을 쓰는 아포칼립스 일상물.

 
05 - 쏴야 할 곳을 봐라 (1)
작성일 : 19-10-14 23:35     조회 : 226     추천 : 0     분량 : 1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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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고딕 나눔고딕 돋움 굴림 궁서 바탕
13 15 17 19 21

  무거운 빗방울이 지면을 강타한다. 무수한 물방울들은 사정없이 땅으로 낙하하여 제 몸을 산산조각 부숴버렸다. 부서진 물방울이 형체를 갖기도 전에 그 자리를 다른 물방울이 강타하고 다시 부서진다. 부서진 빗물의 시체들은 흐르고 흘러 설전의 발 아래로 흘러간다.

 

  설전의 머리에서도 그 시체들이 흘러내린다. 그의 입에서 더운 입김이 토해진다. 총열 덮개를 만지작거리며 다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쉰다. 총구 안으로 빗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자신의 앞에 총을 뉘어놓은 그는 머리를 자동차 앞문에 기대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파랗던 하늘은 지금은 없다. 아니, 가려졌다. 태양도 없고, 파랗고 높은 하늘의 바다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그의 눈에 보이는 건 시커먼 구름과 쉴 새 없이 그의 안면을 강타하는 빗방울들뿐이었다. 숨어버린 하늘을 보며 설전은 다시 긴 한숨을 쉬었다.

 

  빗물이 눈에 떨어진다. 눈을 깜빡이자 빗물은 눈을 떠나 볼을 타고 흐르다 얼굴로부터 멀어지며 설전이 눕혀놓은 총을 향해 떨어진다. 설전이 고개를 숙이고 총을 바라본다. 빗물이 총 전체를 구석구석 훑어대며 지나갔다.

 

  등 뒤에서 묵직하고 무거운 발걸음이 물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설전은 숨을 멈추고 총을 견착한 후 상체를 돌려 일으켰다. 그의 눈앞에 남자 낫잡이 하나가 설전과 자동차를 사이에 두고 대치했다. 낫잡이의 입에서 입김과 함께 거북한 포효가 울려퍼진다. 낫잡이의 갈고리가 움직이기 직전 설전의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폭포와 같이 쏟아지는 빗물을 뚫고 총알은 낫잡이의 이마에 정확히 명중했다. 낫잡이의 뒤통수에서 검붉은 액체와 뇌수가 터져 나왔다. 젖은 바닥으로 쓰러지는 낫잡이의 뒤로 다른 낫잡이들과 저글링 수 마리가 설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설전이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간다. 으득 소리와 함께 수류탄 주머니에서 수류탄을 꺼내든다. 안전핀을 제거하고 안전 고리를 뽑아든다. 던진 수류탄이 땅에 떨어졌지만 그 소리는 빗소리에 먹혀 들리지 않았다.

 

  설전은 재빨리 자동차 뒤로 다시 모습을 감춘다. 양 손의 검지로 귀를 틀어막은 후 등과 피부에 온 신경을 집중시킨다. 빗소리와 숨소리만 들리는 적막함. 어둠 속에 고립되었다고 느껴지는 짧은 시간, 몇 초 이후 거대한 폭음과 함께 강한 충격이 설전의 등 뒤를 자극했다. 자동차가 잠시 흔들렸지만 설전은 아직 움직이지 않는다.

 

  폭음의 충격이 잔잔해진 바로 다음 다시 상체를 일으켜 낫잡이들을 향해 총을 조준했다. 빠르게 돌진해오던 저글링 몇 마리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 듯 움직이지 않았으며 몇 마리는 다리를 다친 듯 속도가 느렸다. 그러나 아직 건장한 몇 마리는 어느새 설전의 바로 앞까지 당도하여 설전을 향해 달려들 채비를 했다.

 

  생각할 겨를이 없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제대로 된 조준이 가능할 리 만무했지만 놀랍게도 설전의 총알은 한 발, 한 발 쏠 때마다 정확하게 괴물들의 머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총성과 빗소리가 어우러져 도시 전체에 퍼진다.

 

  설전이 있는 곳 바로 뒤, 승합차 안에서는 영혜가 귀를 막고 덜덜 떨며 고개를 숙인 채 쪼그려 앉아 있다. 고요한 빗소리만 내뱉는 도시 안에서 영혜는 설전이 해준 말을 생각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피하지도 즐기지도 못하는 더러운 현실.

 

 

 

  시간은 거슬러 올라가 며칠 전 설전과 영혜가 처음 만나던 날, 설전과 영혜는 대형마트 앞에 도착해 있었다.

 

  “들어가.”

 

  설전의 낮고 공격적인 어투에도 불구하고 영혜는 우물쭈물 거리고 있었다. 설전이 머리를 긁적거리더니 그녀의 등을 밀쳤다. 가슴과 성기를 겨우 두 손으로 가리고 있는 그녀는 불안하면서도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그를 째려보았다. 그러나 설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고개를 작은 입구 쪽으로 까딱거릴 뿐 이었다. 영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무리에요.”

 

  “뭐가.”

 

  “너무 어두워요. 이제 어두운 것은...”

 

  “시X. 가지가지 하네.”

 

  설전이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영혜는 그런 그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기다가 아직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도 않았다. 이 사람도 저들과 같은 인육사냥꾼이고 자신의 육체를 얻기 위해 이런 연기까지 한다고 생각하면 등 뒤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리고 어둠은 그녀가 제일 싫어하는 곳이다. 갇혀있을 때 빛 하나 들지 않는 그 곳이 자꾸 떠오르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기만 하는 그녀를 보며 설전은 결국 그녀를 놔두고 혼자 입구로 들어가려고 했다. 영혜가 놀라며 설전을 멈춰 세웠다.

 

  “뭐에요. 어디 가요.”

 

  “어딜 가긴, 집에 들어간다.”

 

  “절 놔두고 혼자 가는 거예요?”

 

  “들어가라고 해도 안 들어가는 사람을 내가 무슨 이유로 강제로 들여보내겠냐. 그냥 거기 있어. 어두운 게 무서워서 못 들어오겠다니 여태까지 잠은 용케도 잘 주무셨구만.”

 

  “.....”

 

  “알아서 해. 그대로 벌거벗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뒈지든지. 아니면 들어와서 살 궁리를 하든지.”

 

  설전은 매섭게 쏘아붙이고는 입구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는 이제 영혜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둘러보았다. 이제 저녁이 다 되어갔지만 아직 화창한 날씨에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고 있었다. 아스팔트는 뜨겁게 끓어오르고 있었고 건물들의 깨진 유리와 금이 간 자동차의 창문이 여름 햇빛에 반사되어 빛나고 있었다. 허나 이와 안 어울리는 고요한 정적이 반짝거리는 여름의 도시를 낯설게 만들었다.

 

  영혜의 시선은 다시 입구 쪽으로 향한다. 겹겹이 막아놓은 시멘트 벽돌들이 빛을 차단해서 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어둠이 안에서 스멀스멀 기어오다가 입구에서 나올 듯 말 듯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영혜는 왠지 저 안으로 들어가면 두 번 다시 이 빛으로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선택의 폭은 좁았다. 그리고 다른 선택지도 없었다. 그녀는 태양을 등지고 어둠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구 안으로 들어서니 스멀거리던 어둠들은 기다렸다는 듯 영혜에게 더덕더덕 달라붙기 시작했다. 어둠은 달라붙을 때 마다 그녀의 몸에 새겨진 공포를 피부 밖으로 하나씩 꺼냈다. 고작 몇 걸음 안 옮겼음에도 그녀의 몸은 식은땀으로 촉촉하게 젖어있었고 몸은 점점 더 떨려왔다.

 

  정면을 응시하던 시야는 점점 아래로 내려갔으며 걸음의 보폭도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멈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 이상 갈 수 없어. 그녀의 마음 속 에서 절망이 속삭였다. 또 어둠으로 들어가 가축처럼 생활하게 될 거야. 저 사람이 어둠에서 날 구해줄 빛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저 사람도 어둠이야. 그것도 빛 하나 안 새어 들어오는 지독한 어둠. 절망은 영혜에게 뒤로 돌아 도망칠 것을 권유하였다. 영혜는 고개를 돌렸다. 아직 빛은 자신의 등을 비추고 있었다.

 

  그러나 영혜는 다시 일어났다. 어차피 자신에게 남겨진 건 죽음이다. 애초에 여기로 오면서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였지 않은가. 영혜의 걸음이 다시 건물 안쪽으로 향한다.

 

  이제 빛은 그녀의 등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이윽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물체가 겨우 희미하게 분간이 갈 정도의 짙은 어둠이 그녀를 감쌌다.

 

  “왔냐.”

 

  익숙하면서 거북한 목소리가 그녀의 고막을 울렸다. 고개를 두리번거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으려 했으나 목소리의 주인은 그보다 먼저 손전등을 켜서 그녀의 눈을 어지럽혔다. 영혜는 어둠속에 익숙해져가는 눈에 다시 빛이 들어오자 순간적으로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눈을 보호했다.

 

  “어이쿠, 조심하세요. 다 보입니다.”

 

  무미건조한 어투의 놀림이었지만 그녀는 순간 얼굴에 열이 오름을 느꼈다. 창피함에 자그마한 비명을 지르며 다시 두 손으로 자신의 중요 부위를 가렸다. 설전은 코웃음을 치더니 그녀의 몸을 향해 전등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어차피 볼 거 다 봤는데 이제와 가려서 뭐해. 받아.”

 

  설전이 손전등을 던지자 그녀는 두 손으로 그걸 잡아냈다. 설전은 어설픈 휘파람을 불더니 제법이라 칭찬하고 말을 이었다.

 

  “그거 들고 2층으로 가. 여기서 쭉 왼 쪽으로 가면 2층으로 가는 무빙워크가 있어. 뭐, 작동은 안하지만. 2층에 옷 매장이 있으니 거기서 취향에 맞는 거 골라서 입고 1층 식육코너로 와라.”

 

  말을 하고 있는 설전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던 영혜는 그의 말이 끝나자 자신의 얼굴에 손전등의 빛을 옮기며 대답했다.

 

  “당신은 어디로 가는데요? 설마 저 혼자 보내려는 거 아니죠?”

 

  “그럼 내가 쫄래쫄래 너 따라다니면서 집 구경이라도 시켜줘야 하냐. 그건 나중에라도 할 수 있잖아. 아니면 계속 그렇게 벌거벗고 다닐 참이야? 나야 눈이 즐겁긴 하지만 넌 아닐 텐데.”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요! 적어도 여자가 혼자 어두운 곳을 헤매는데 에스코트 정돈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에스코트는 개뿔. 난 너 전입신고랑 경위 보고해야 하니까 빨랑 가서 옷이나 입어. 그리고 이 문도 막아야 하고 바쁘단 말이다.”

 

  그가 엄지를 가리킨 곳을 향하자 벽돌을 가득 실은 지게차가 눈에 들어왔다. 영혜는 다시 손전등의 빛을 자기 얼굴에 갖다 대었다.

 

  “전입신고랑 경위요? 여기도 무슨 조직인가요? 도대체 여긴 뭐하는 데고 당신의 정체는 뭐죠?”

 

  “뭐긴 뭐야. 너 왔다고 우리 부모님한테 알리고, 왜 데리고 왔고, 어쩌다 주워왔는지 다 말해야 될 거 아냐. 아니면 그냥 스리슬쩍 ‘어쩌다 보니 들어와쪄염! 잘 부타캐염! 뿌잉뿌잉!’ 같은 생각이라도 한 거야? 아쉽지만 여기 대장은 내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거든. 지금 상황은 어쩌다보니 내가 유기견 한 마리를 주어와 몰래 집에 들여놓고 있는 꼴이라고. 제대로 설명 못 하면 맞아 죽는단 말이다. 그러니 얼렁얼렁 위로 올라가서 그 야시시한 몸 좀 가리고 내려와. 우리 부모님께 벌거벗은 몸뚱아리를 보여 주면서 ‘앞으로 신세 좀 지겠습니다.’ 라고 인사할 생각은 아니겠지?”

 

  설전은 이제 그만 알아들었으면 얼른 꺼져. 라고 마지막 말을 덧붙인 뒤 동물이나 파리를 내쫓듯 쉬이쉬이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어댔다. 영혜는 뿌잉뿌잉은 뭐고 유기견은 또 뭐야 라면서 그의 이상한 표현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설전은 그런 그녀를 무시한 채 능숙하게 지게차에 올라가서 시동을 켰다.

 

  지게차가 잠시 움직이더니 지게차가 들고 있던 벽돌이 어느새 영혜와 설전이 들어온 입구를 막았다. 이제 입구에서 새어 들어오던 빛조차도 완전히 차단되자 희미하게 보이던 주변 풍경도 이젠 윤곽만 겨우 확인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워졌다.

 

 

 

  영혜는 결국 남성코너에 있는 하얀 티셔츠 한 장을 입었다. 속옷과 바지는 자신의 몸에 맞는 게 있었지만 손에 잡히는 여성용 웃옷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꽉 껴서 답답했다. 계속 벗은 채로 지내서 옷 입는 것이 불편한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사실 좀 더 찾으면 자신의 가슴 사이즈에 맞는 옷을 발견 할 수 있겠지만 이런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킨 채 혼자 돌아다닌 다는 것이 적어도 그녀에겐 그리 좋게 느껴지는 상황은 아니었다. 빨리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설전이 있는 곳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건 그렇고 부모님이랑 같이 살고 있었구나. 의외네.”

 

  영혜는 그가 이 도시에서 혼자 살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처음 그를 봤을 때의 위압감과 살의는 혼자 산전수전 다 겪은 방랑자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래서 그의 입 밖으로 부모님이란 단어가 나왔을 때 그녀는 사실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게 효자인 거 같이 보여도. 아빠가 대장이라고 하니 왠지 부모님한테 얹혀사는 백수 같은 이미지 같단 말이야. 얼굴이랑 머리도 지저분하고. 수염도 안 깎고.”

 

  그런 사람에게 목숨을 부여받았다. 괴물도 아닌 인간에게 먹히는 최악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 이렇게 옷을 찾아 입으며 그나마 사람답게 행동하고 있다. 하지만 사실 불안한 감이 없지 않다. 이 모든 게 연기였다고 생각하면 등 뒤로부터 소름이 돋아난다.

 

  만약 여기 가족도 그들과 같은 인육을 먹는 사람들이면 그녀는 죽으려고 제 발로 찾아 들어 온 꼴이 되는 거다. 영혜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엎질러졌다. 다시 한 번 죽을 각오를 상기했다. 어차피 죽을 운명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마음 속 몰래 억누르고 있던 묵직한 죄책감을 떠올랐다. 영혜는 영우의 얼굴을 떠올렸다. 살아있을까. 내 동생, 영우.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헤어진 동생을 생각하며 살아남은 자신에 대한 무거운 죄책감에 휩싸였다. 이영혜의 머릿속에서 손을 놓기 직전 자신을 바라보던 영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혜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아니, 살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잡기 위해서 끊임없이 희망의 끈을 붙잡으려고 했기에 어느새 자신이 그렇게나 아파했던 죄책감마저 잠시 잊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그토록 바라던 희망이 자신이 그렇게 간절히 원하던 것의 자리를 빼앗아 차지해버렸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내가 미친년이야. 어떻게 잊을 수가 있어. 하나 뿐인 동생을. 그렇게 미안해하고 괴로워하며 용서를 빌고 싶어 발악을 했던 내가. 자신의 삶을 연명하기 위해서 동생을 잊어버린 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괴로워도 견뎌냈어야 했는데. 영혜는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너무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혔다. 몸이 떨려오고 추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다. 영혜는 소리를 질렀다.

 

  바닥에 머리를 찧어댔다. 피부가 찢어지면서 피가 흘렀으며 바닥에 찧을 때 마다 사방으로 피가 튀어 하얀 색 티셔츠에 빨간 점을 만들어냈다. 계속 소리를 지르며 머리를 찧던 영혜의 머리 뒤로 강력한 통증이 느껴졌다.

 

  설전이 욕설을 내뱉으며 영혜의 뒷머리를 잡아채서 당기고 있었다. 영혜는 눈물범벅이 된 채 손전등으로 자신을 비추는 설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얼굴을 씻었는지 그의 얼굴은 깔끔해 있었고 머리에 두르던 손수건도 없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영혜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영혜는 비명 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 이끌려갔다.

 

  “미친년아! 대가리 부수는 건 안 아프고 머리채 붙잡는 건 존나 아픈가보지? 무슨 지거리야!”

 

  “아야야! 놔요! 놓으라고요!”

 

  “그렇게 열심히 바닥에 구멍 내고 싶으면 계속 해 봐. 머리채 부여 잡혔다고 못할 거면 포기하고. 그렇게 포기할 거면 애초에 그딴 짓을 하질 말던가. 갑자기 소리 지르더니 이게 뭐야. 분노조절장애라도 있냐?”

 

  “난 쓰레기에요! 쓰레기라고! 당신이 뭘 알아! 뭘 아냐고!”

 

  “아 시X. 뭔 개소리야! 옷 입으라고 올려 보내놨더니 갑자기 왜 이래. 미쳤어?”

 

  “그래요! 미쳤어요! 왜 날 살려내서! 왜! 왜!”

 

  “미치겠네. 죽고 싶으면 아까 보내줄 때 갔으면 되잖아. 왜 여기까지 기어 들어와선 죽고 싶다고 생 떼를 쓰는 건데.”

 

  “당신이 뭘 알아! 뭘 아냐고!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녀의 목소리가 찢어지며 올라갔다. 흐느껴 우는 소리와 신경질적인 비명소리가 어두운 건물 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울려 퍼졌다.

 

  “차라리 죽었어야 했어. 그 애를 생각했으면! 괜히 살아서. 괜히 사는 게 부모님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뒤지고 싶으면 나가서 그 앤지 뭔지 하는 애랑 같이 뒤져! 여기까지 와서 시체 치우게 하지 말고!”

 

  찰싹 소리가 들리면서 그녀의 손이 설전의 뺨을 지나갔다. 놀란 설전이 잡고 있던 뒷머리를 놔주자 그녀는 충혈된 두 눈으로 매섭게 그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분을 이기지 못했는지 다시금 그를 향해 손을 올렸다. 아까보다 훨씬 큰 소리가 설전의 뺨에서 퍼져나갔다.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설전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전등에 비춰진 그녀의 모습은 초췌했다. 정말 아까 낮의 그녀가 맞는가 싶을 정도였다. 처음 봤을 때도 상태가 좋아보이진 않았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그보다 더 처참했다.

 

  이마는 찢어져 피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으며 그 피는 충혈되어 붉어진 눈에서 흐른 눈물과 뒤섞여 얼굴 전체에 번져있었다.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얼굴은 피와 눈물로 인해 더욱 기괴하게 일그러져 보였으며 기껏 입게 된 하얀 티셔츠는 피로 붉게 젖어있었다.

 

  대체 무엇이 그녀를 이리도 몰아붙인 거지? 그러나 설전은 생각하기 싫었다. 죽기 직전의 상황에서 살려줬더니 갑자기 죽고 싶어 하는 여자가 자신의 뺨을 때렸다. 분노와 함께 설전의 손도 같이 올라갔다.

 

  그러나 그의 손은 영혜를 향하지 못했다. 어느새 권란과 같이 2층으로 올라온 대범은 그의 손을 붙잡더니 뒤통수를 한 대 때리며 나무랐다.

 

  “여자한테 어디 손찌검을 하려고 들어. 정신 나갔냐?”

 

  “아버지!”

 

  설전은 그렇지 않아도 짜증나 있는 상태인데 대범이 이런 행동을 보이자 더욱 화가 났다. 억울한 심경에 언성을 높이며 대범에게 하소연했다.

 

  “이 년이 내 뺨을 때렸다고요!”

 

  “얌마! 년이 뭐냐 년이! 얘가 네 자식이야!”

 

  대범의 손이 다시 설전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설전이 자식한테도 년을 붙이는 건 몰상식이라고 짜증을 내며 소리치자 대범은 어따대고 엄살이야 라면서 다시 그를 때리려했다. 설전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고 그 틈을 타 권란이 영혜를 포근히 안아주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자신을 학대하는 것은 보기 안 좋아요.”

 

  “......”

 

  “분명 힘든 일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이런다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아요. 자신을 학대해도 돌아오는 건 더욱 큰 죄책감과 자괴감 뿐 이에요.”

 

  권란의 손이 영혜의 손을 포근하게 감싸 쥐었다. 영혜는 권란을 바라보았다. 어두컴컴한 건물 안이었지만 영혜가 바라보는 그녀의 눈만큼은 밝고 깊게 반짝거렸다. 말은 없었지만 이해가 되는 것이 있다.

 

  그녀의 눈을 본 영혜는 그녀에게서 자신과 같은 상처를 보았다. 깊고 아득한 눈동자 너머에서 그녀는 자신을 깊이 이해하는 권란을 알 수 있었다. 분명 이 사람도 나와 같이...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린 거다. 갑자기 다시금 부은 눈에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영혜는 권란을 안았다.

 

  속에 담겨진 죄책감과 자신의 혐오스러운 감정을 모조리 입 밖으로 토해냈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어떻게 살려고 발버둥을 쳤는지, 그리고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도 모조리. 막혀 있던 댐이 무너지듯 그녀의 감정도 가슴에서 무너져 역류하여 입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토로하게 될 줄이야.

 

  눈물과 침 범벅이 되어 계속 토해내는 그녀의 감정들을 권란과 대범은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설전만이 등을 돌린 채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할 뿐이었다.

 

  그녀의 이야기에서 가장 비중을 차지했던 건 영우였다. 계속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녀에게 있어 영우란 어떤 존재이며 어떤 사람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소중한 존재를 자신의 목숨과 저울질한 거 같은 죄책감.

 

  그리고 그녀에게서 막상 닥친 삶이라는 희망이 동생의 존재를 잊게 만들었다는 자괴감. 그 혐오스러운 감정이 삶이라는 희망을 가졌던 자신을 옭아 메고 살아남았다는 모순된 죄책감을 부여했다. 그 결과가 지금 두 사람 앞에 스스로 부서지려고 하는 여자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야기가 멈추고 나서도 한 동안 정적이 계속 되었다. 눈물이 다 마른건지 아니면 너무 울어서 지쳐버린 건지 영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못하고 있었다. 고요한 정적이 이젠 어색하게 느껴지게 될 즘 권란의 몸이 움직였다. 권란은 다시 한 번 그녀를 안아주었다. 등을 토닥이며 눈물을 흘리던 그녀는 영혜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죽어버리면. 아무도 동생을 기억 못하게 되잖아요.”

 

  권란의 말에 영혜는 다시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전 동생을 잊었어요. 내가 살았다는 사실에. 죽을 때 까지 잊지 말아야 할 제 동생을 살았다는 기쁨에 잊어버렸다고요.”

 

  “그렇다고 이렇게 죽으면 동생이 좋아할까요?”

 

  영혜의 얼굴을 바라보며 권란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설전은 짜증이 올라왔다. 목구멍에서 욕이 나오는 걸 조용히 억눌렀지만 쉽지 않았다. 결국 쳇 이란 말 한마디를 남기고 그는 자리를 떴다. 대범은 그런 설전을 바라보며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었다. 그런 설전의 행동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권란은 계속해서 영혜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신의 목숨은 소중해요. 삶의 기쁨은 당연한 거예요. 그러니 죄책감을 가지지 말아요.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영혜는 고개를 떨구었다. 권란의 말을 이해하지만, 자신의 죄책감과 자괴감은 쉽사리 줄어들지 않았다. 권란은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는 듯 다시금 손을 잡아주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눈에선 다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대범은 그런 그녀들의 모습을 보고 나서 설전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설전은 옥상에 올라가 이미 해가 저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파랗던 하늘은 어느새 서쪽은 붉게 물들었고 동쪽은 어둡게 젖어가고 있었다. 설전의 입에서 한 숨이 나왔다. 그의 귀엔 그녀들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자신에 대해 뭘 아냐며 소리치던 영혜와 그런 영혜를 다독이던 권란.

 

  가슴 안쪽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설전은 한 숨으로 바꿔 내뱉었다. 순간 설전은 땅바닥을 발로 차며 성질을 내었다. 욕설을 강하고 짧게 토해낸 그는 다시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알긴 뭘 알아.”

 

 

 

  옥상 난간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은 스산했다. 빛이 나는 곳은 단 한곳도 보이지 않아 적막한 고요함이 바람과 함께 일렁거렸다. 그저 콘크리트 숲의 희미한 윤곽이 달빛에 비춰져서 아슬아슬하게 보일 뿐이었다. 그에 비해 밤하늘은 매우 대조적이었다.

 

  수많은 별들은 검은 바다 위에 넘실거리며 춤추고 있었고 여느 때보다 더욱 크고 밝은 달은 설전의 머리 위에서 그가 있는 땅을 비추고 있었다. 태양은 자취를 감췄지만 밤의 하늘은 그다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인데?”

 

  설전의 말에 뒤에서 쭈뼛거리며 다가오던 영혜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설전은 그녀를 등진 채로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기, 아주머니, 아저씨께서 오빠가 여기 있을 거라고 해서.”

 

  “누구 마음대로 오빠래.”

 

  딱딱하고 낮은 억양에 영혜는 잠시 흠칫 놀랐다. 괜히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의 일을 사과할 생각으로 큰마음 먹고 설전을 찾았다. 대범과 권란에게 마음을 연 그녀는 그들로부터 자신도 이 가족의 일원으로써 허락을 받게 되었다.

 

  따뜻한 마음씨의 두 사람에게 영혜는 큰 고마움을 느꼈다. 동생에 대한 죄책감과 자괴감은 사라지진 않았지만 조금 누그러진 건 사실이다. 이것도 전부 이 두 사람이 묵묵히 자신을 보듬어줬기 때문이다.

 

  마음과 몸이 진정되자 그녀의 가슴에선 또 다른 죄책감이 나타났다. 그들을 못 믿고 의심한 게 그것이다. 또, 설전에게 함부로 대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래저래도 그는 자신을 구해준 장본인이었다. 그런 그에게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취해버렸다.

 

  영혜가 그런 속내를 두 사람에게 털어놓자 대범은 옥상으로 올라가라고 충고해주었다. 마음이 심란하면 언제나 옥상으로 올라가서 기분을 푼다고. 그런 그의 말을 듣고 기껏 옥상으로 올라왔지만 면전, 아니 얼굴도 보지 않고 문전박대 당하게 될 처지에 놓였다.

 

  “오빠라고 부르면 안 되나요.”

 

  “안된다면 안 부를 거냐.”

 

  “네.”

 

  “그럼 부르지 마.”

 

  “그럼 뭐라고 불러야 되죠?”

 

  영혜의 말에 설전은 한 쪽 눈을 일그러뜨렸다. 귀찮고 이야기하는 것도 싫어서 대충 말한 것이 그만 더 귀찮은 결과물을 만들어 버렸다. 그냥 내 이름을 부르게 할까, 아니지. 그냥 나를 부를 생각마 라고 하는 편이 더 좋을지도. 하지만 그렇게 하면 내일 아침 분명 아버지한테 얻어맞겠지? 아 귀찮군.

 

  “그냥 마음대로 불러. 오빠든 뭐든.”

 

  “알았어요. 오빠.”

 

  영혜는 설전의 눈치를 보며 조금씩 다가왔다. 설전은 그런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그런 그녀를 막으려 하진 않았다. 그녀에 대한 마음이 누그러졌다던가 그녀의 행동을 용서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계속 성질을 내면 피곤하고 귀찮을뿐더러 여기까지 올라온 녀석을 성을 내며 다시 돌려보내는 것도 뭐가 아닌 것 같았을 뿐이었다. 어느새 그녀는 설전의 옆까지 다가와서 난간에 똑같이 기댔다.

 

  “저기, 아까는...”

 

  “무슨 말이 나오든 지금의 나는 너를 용서해 줄 생각이 없으니 포기해.”

 

  설전이 말을 잘라먹으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영혜는 차가운 그의 행동에 감정이 좀 상했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그녀는 다짜고짜 그의 뺨을 때렸다. 그가 심한 말을 한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그의 행동을 나무랄 수는 없었다. 어찌 되었든 심해지는 죄책감과 자괴감에 죽으려던 그 순간조차 그는 그녀의 죽음을 만류했으니까.

 

  “쌀쌀 맞네요. 여자한테 인기 없겠다.”

 

  “여자가 있어야 인기가 있든 없든 하지.”

 

  “그렇게 말하니 인기가 없는 거예요.”

 

  “뭐, 지금 말투 고친다고 해도 인기 있게 해 줄 여자가 있나. 의미 없는 병신 짓이지.”

 

  “입도 거칠고.”

 

  “심심해서 시비 걸러 온 거면 내려가.”

 

  “시비 걸려고 온 거 아닌데요.”

 

  “그럼 하고 싶은 말이 뭔데. 다시 말하지만 나는...”

 

  “고마워요.”

 

  이번엔 영혜가 설전의 말을 잘라먹었지만 설전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고요한 정적이 대화가 끊어짐을 말해주고 있었다. 밤바람이 가볍게 살랑 불어오자 영혜는 다문 입을 다시 열었다.

 

  “고마워요. 살려줘서.”

 

  “그런 여자가 머리 박으면서 왜 살려냈냐고 난리를 치냐.”

 

  “그땐 그랬으니까요.”

 

  “뭐가 ‘그랬으니까요’냐. 반나절도 안 지났어.”

 

  설전이 그제야 고개를 돌리며 영혜를 바라보며 타박을 줬다. 영혜는 그런 설전을 언제부터 바라고 있었는지 이미 고개는 설전 쪽을 향해 있었다. 영혜와 눈이 마주치자 설전은 가슴 속에 담아 둔 응어리를 하나 끄집어내었다. 응어리는 깊은 한 숨으로 변하여 설전의 입을 떠나갔다.

 

  “그리고 그건 고마워 할 필요도 없는 거야. 널 살리겠다는 목적으로 살린 게 아니니까. 어쩌다보니 일 처리의 결과물로 네가 남은 거 뿐 인거지.”

 

  “그래도 그 일의 결과로 전 살았고, 그리고 여기 이렇게 오빠랑 같이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생긋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설전은 말없이 쳐다보았다. 아까는 당장이라도 죽을 듯이 발악하며 초췌해져 갔던 그녀였는데 어느새 지금은 얼굴에 생기가 돌며 미소까지 지을 수 있게 되었다.

 

  정신분열인가. 그렇게 물어보고 싶은 설전이었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론 내지 않았다. 참, 빨리도 적응하는군.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야 할지. 설전은 볼을 가볍게 긁고 나서 입을 열었다.

 

  “살아있단 것, 그 자체에 감사하는 건가?”

 

  “...?”

 

  갑작스러운 질문에 영혜는 당황한 듯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설전은 고개를 돌려 어둠이 깔린 도시를 바라보았다. 들쑥날쑥 솟아난 검은 건물들의 모습이 마치 일렁이는 파도처럼 보였다. 스산한 도시에서 밤바다의 파도가 설전의 눈에 부딪혀 부서진다. 시큼해진 눈이 가려운 듯 설전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은 채 아까의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살아있는 것만으론 안 돼.”

 

  “네?”

 

  살아있는 것만으론 안 된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설전의 알쏭달쏭한 말에 영혜는 엉겁결에 대답을 하긴 했지만 사실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놔두고 설전은 더 할 말이 없는 듯 자리를 떠나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영혜는 설전이 한 말을 곧 씹으면서 설전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 붙었다. 설전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정말 유기견을 데리고 온 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었다.

 

  3층을 지나, 2층, 1층까지 내려온 설전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손전등을 발끝에 비추면서 조심조심 걸어오는 영혜를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그는 음료수 진열대로 걸어가 이온음료 캔을 하나 들어 영혜를 향해 던졌다. 영혜는 자신의 발끝을 보느라 미처 설전이 던진 음료수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런. 짧은 설전의 탄식과 함께 예상대로 음료수는 영혜의 머리에 명중했다. 그녀는 가벼운 신음을 내며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찌었고 설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떨어진 음료수 캔을 집어 손전등을 비추며 영혜에게 자신이 무엇을 던졌는지 확인 시켜줬다.

 

  “마셔. 그렇게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목마를 거 아냐.”

 

  영혜는 캔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신기해하면서도 이상한 듯 설전에게 대꾸했다.

 

  “근데 이거 유통기한 지난 거 아닌가요? 먹고 탈나면...”

 

  “대체로 음료수의 유통기한은 길게 2년이야. 나도 들은 거라서 정확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뭐, 정 마시고 싶지 않다면 그냥 버려도 돼.”

 

  말을 마친 설전은 그녀에게 보란 듯이 음료수 한 캔을 꺼내 따 마셨다. 벌컥거리는 소리가 묘하게 영혜의 침샘을 자극했다. 사실 설전의 말이 맞았다. 오늘은 먹을 거 하나 제대로 먹지 못했고 그나마 남은 체력도 아까의 난리를 피우느라 다 소진해 버렸다.

 

  거기다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사실 갈증이 심했으나 오늘 하루 정신이 없어 미처 느끼지 못한 것도 있었다. 거기에 음료를 마시는 장면을 목격하자 그녀의 잊어버렸던 허기와 갈증에 대한 욕구가 강렬하게 샘솟기 시작했다.

 

  그녀는 허겁지겁 캔을 따려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체력이 지금 캔 하나 따지 못할 정도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손에 힘이 없어 낑낑거리는 그녀는 손전등을 입에 물고 한 손으론 캔을, 다른 한손으론 캔 뚜껑을 열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캔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었다.

 

  가만히 그녀를 보고 있던 설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저게 무슨 병신 짓거리야 라고 조용히 되뇌었다. 그는 영혜에게 다가가 그녀가 씨름하고 있는 캔을 들어 가볍게 뚜껑을 딴 뒤 다시 돌려주었다. 영혜는 멍하니 그런 설전을 바라보다 헐레벌떡 캔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음료에선 오래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조금 미지근하긴 했지만 오히려 미각을 자극하는 오랜만의 단맛이 그녀의 혀로 전해졌다. 짜릿한 달콤한 감각은 입안에 퍼져나가더니 이윽고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갔으며 달달한 음료는 위에 도착하자마자 만족감을 머리로 향해 쏘아 보냈다. 간만의 자극에 머리는 더 들이키라는 명령을 내려 보냈고 그 명령은 수월하게 팔과 입으로 이동하여 임무를 완수했다.

 

  어느새 음료수는 그 용량을 다했고 영혜는 아쉬운 듯 캔을 흔들며 남은 음료수 방울들을 입에 털어 넣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설전은 왠지 안쓰러워보였다. 여자애가 저렇게 게걸스럽게 음료수를 먹을 정도면 얼마나 고생한 걸까.

 

  영혜는 이제 캔에서 음료수가 나오지 않자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음료수 캔을 바라보고 있었다. 배가 고플지도 모르겠군. 목이 마를 테니 음료수를 주긴 했지만 사실 허기가 져서 더 저러는지도 모르겠어. 뭐라도 먹여야 되나. 설전은 그런 생각이 들자 영혜에게 다가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배 안 고프냐? 라면 먹으러 갈래?”

 

  “네?”

 

  영혜는 알아들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설전을 바라보았다. 설전은 발음을 잘못해 그녀가 못 알아들었나 싶어 발음을 또박또박하게 천천히 다시 말했다.

 

  “배 안 고프냐고. 라면 먹으러 갈 거냐고?”

 

  “네?”

 

  다시금 반문이 들려오자 설전의 뒷목에서 짜증이 솟아오르려 했다. 마음을 추스르려는 듯 그는 주먹으로 자신의 뒷목을 살짝 쳐가면서 세 번째 반복하는 그 말을 그녀에게 전했다.

 

  “배. 안고. 프냐고. 라면. 먹으러. 안갈. 거냐고.”

 

  “라.. 라면이요? 그거? 후룹후룹?”

 

  영혜가 손가락으로 가상의 젓가락을 만들어 입에 갖다 대는 시늉을 하자 설전은 그제야 그녀가 알아먹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혜는 일순 멍한 표정으로 설전을 계속 응시했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설전은 그 표정의 의미를 잡아내지 못하고 얘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손으로 그녀의 눈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미동도 하지 않고 그대로 얼어버린 그녀였다. 갑자기 왜 이래. 설전은 당황한 듯 그녀의 볼을 살짝 만졌다.

 

  “꺄아아악!!!!!!!!!!!!!!!!!!!! 라아아아아아아아미이이이여어어어어어어어언!!!!!!!!!!!!!!!”

 

  폭음과 총성 이후로 이렇게 고막을 울리는 큰 소리는 설전에게 있어서 오랜만의 큰 충격이었다.

 

 

 

  “힝.. 아파.”

 

  “군소리 하지 마. 아버지, 어머니 자다 놀래서 총까지 들고나오셨으니.”

 

  머리를 매만지며 아파하고 있는 영혜였지만 설전은 퉁명스럽게 그녀의 행동에 대꾸했다. 영혜는 볼멘 목소리로 설전을 탓했다.

 

  “그래도 너무 아프잖아요. 주먹으로 그렇게 심하게 내리찍다니. 폭력남.”

 

  “아까 뺨 두 대 친 거로 퉁쳐.”

 

  노려보는 영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는 계속해서 버너 위에 올려 진 양은냄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아직 물이 끓지 않은 듯 양은냄비의 뚜껑은 조신하고 얌전하게 그 위를 지켰다. 설전의 시선이 양은냄비의 뚜껑에만 집중되자 영혜는 여전히 볼멘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근데 지금 끓이는 물 먹을 수 있는 거예요?”

 

  “못 먹어도 먹어야지.”

 

  “빗물 받아놓은 거라면서요. 막 병원균 있고 중금속 있고 그러면 어떡해요.”

 

  “병원균에 노출되고 중금속이 쌓여서 뒤지는 거보다 수분부족으로 쳐말라 뒤지는 게 더 빠르니 쳐마셔야지.”

 

  영혜는 심통이 났다. 사실 먹을 수 있든 없든 그녀는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인육추종자들로 인해 붙잡혀 있을 당시 부족한 물을 벽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지하의 구정물까지 핥아 마셨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은 순전히 한 대 맞은 심통, 그리고 자기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설전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설전의 시야는 냄비에서 떨어질 생각을 안했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어느새 설전이 그것을 눈치 채고 먼저 선수를 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이 물로 끓인 라면은 안 드시겠다 이 말이네?”

 

  “네? 아뇨! 절대! Naver!”

 

  뭔가 영어가 틀린 거 같지만 설전은 그런 지적조차 귀찮아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순간 냄비뚜껑이 들썩이며 물이 끓는 신호를 알렸다. 설전은 라면 봉지를 뜯으며 그녀에게 말했다.

 

  “퍼진 게 좋냐, 덜 익은 게 좋냐.”

 

  “역시 라면은 꼬들꼬들해야죠. 덜 익혀서 주세요.”

 

  “뭘 좀 아는군.”

 

  설전이 냄비뚜껑을 열자 하얀 김이 매달아 놓은 전등 빛에 반사되어 퍼져나갔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아직 라면을 넣지도 않았음에도 맛있게 들려왔다. 설전이 라면스프를 넣자 강렬하고 자극적인 매운 향이 영혜의 코를 간지럽혔다. 이 매콤한 향. 얼마만인가. 음료수와 달리 또 다른 충격이었다. 라면 두 개가 냄비 안으로 들어간다. 면을 뒤적거리자 영혜가 설전을 만류하며 말했다.

 

  “너무 젓가락으로 라면을 저으면 라면이 풀어져서 꼬들꼬들한 맛이 줄어든대요.”

 

  “아, 그래?”

 

  “네.”

 

  “알았어. 네가 라면 끓일 땐 그렇게 하지 마렴.”

 

  설전은 라면을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 영혜를 바라보았다. 영혜는 조금 삐진 듯 또 시무룩한 표정으로 라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뭘 저리 잘 삐져. 설전은 미간을 찡그리며 들었던 라면을 후 불었다. 입을 떠난 입김은 라면 면발을 넘으면서 냄새를 데리고 영혜의 코를 자극했다.

 

  영혜는 시무룩한 표정을 풀고 다시 입에 침을 흘리며 라면을 바라보았다. 설전은 그런 그녀를 보면서 강아지다, 쟤는 강아지야 라고 생각하며 가스버너의 불을 껐다.

 

  “먹어, 꼬들꼬들이다.”

 

  설전이 젓가락과 냄비뚜껑을 주면서 말하자 영혜는 당황한 듯 그를 향해 반문했다.

 

  “예? 냄비뚜껑을 주시는 거예요?”

 

  “그럼 어따가 먹으려고?”

 

  “아니, 그게 그냥 냄비 째 먹어도 되는데...”

 

  “뜨겁잖아. 식으면 그렇게 먹어.”

 

  “그래도... 냄비뚜껑은 끓이는 사람의 전리품이자 징표 같은 건데 제가 그걸 받아도 될지...”

 

  “난 안 먹어. 너 먹으라고 끓여 준거야.”

 

  “진짜요?”

 

  그녀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설전을 바라보았다.

 

  “진짜 라면 두 개를 제가 혼자 다 먹어도 되요? 네?”

 

  “그래, 그러니까...”

 

  “잘 먹겠습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영혜의 젓가락은 냄비 안의 라면을 사정없이 공격하고 있었다. 무력한 면발들은 젓가락의 포로로 붙잡혀 냄비뚜껑위로 올려졌다. 그녀는 불쌍한 면발들을 다시 젓가락으로 집어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짜릿한 라면국물의 맛이 그녀의 혀를 강타했다.

 

  뜨거움과 짜릿한 매콤함. 그 모든 감각이 영혜의 입안에서 완성되자 곧 그녀의 입김으로 변신하여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녀는 멈추지 않고 다음 포로를 충족하기 위해 젓가락을 놀렸다. 설전은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다 만화책을 집더니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후,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설전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만화책에서 시선을 땠다. 훌쩍이는 소리는 영혜에게서 나고 있었다. 영혜는 눈물을 글썽이며 라면을 먹고 있었다.

 

  눈물과 코로 범벅이 된 라면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뭔가 측은해보였다. 설전은 그런 그녀를 향해 한마디 하려다 그만 두었다. 그는 묵묵히 울고 있는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전등 아래에서 훌쩍이는 소리와 후룩거리는 소리가 교차하고 있었다.

 

 

 

  침낭 안에서 권란은 묵묵히 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손수건을 바라보았다. 아들은 이것을 건네주면서 밖이 더욱 위험하므로 당분간은 정말 마트 안에서 생활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들은 찢어진 머리에 연고와 소독약을 몇 번 바르더니 붕대는 갑갑하다며 권란의 제의를 거절했다.

 

  권란은 손수건을 가슴에 갖다 댄다. 서러움이 가슴에서 그녀의 목까지 차오른다. 그녀는 숨을 죽이며 눈물을 흘린다. 그녀는 몇 번이고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숨죽여 우는 권란을 그 옆 침낭에서 대범은 묵묵히 바라본다.

 
작가의 말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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